노르웨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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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웨이 내전은 1130년부터 1240년까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일련의 왕위 계승 분쟁으로, 여러 왕과 그 지지 세력 간의 다툼으로 특징지어진다. 11세기 중엽부터 왕위 계승 규칙이 불분명하여 사생아도 왕위 계승 후보가 될 수 있었고, 여러 명이 공동으로 왕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시구르 1세 사후 그의 아들 마그누스와 하랄 4세 간의 분쟁을 시작으로, 이후 여러 왕위 주장자들이 나타나면서 내전이 격화되었다.
내전은 초기에는 마그누스 맹인, 하랄 길리크리스트, 시구르드 슬레메베댜큰 등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과 암살, 전투로 이어졌으며, 이후 에를링 스카케와 마그누스 5세의 등장으로 교회 세력이 내전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비르키베이나르와 스베리르 시구르다르손의 등장은 내전의 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스베리르는 교회와 대립하면서도 노르웨이의 왕으로 군림했다.
스베리르 사후 바글라르 세력이 등장하여 내전은 지속되었으나, 결국 하콘 4세의 즉위와 스쿨리 바르다르손의 반란 진압으로 1240년 종식되었다. 이 내전은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노르웨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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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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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기간 | 1130년–1240년 (110년) |
장소 | 노르웨이 |
교전 세력 | |
교전 1 | 귀족 |
교전 2 | 왕위 주장자 |
부대 1 | 바글러 |
부대 2 | 비르케베이너 |
지휘관 | |
지휘관 1 | 목록: |
지휘관 2 | 목록: |
결과 | |
결과 | 호콘 4세의 부하들이 자칭 왕인 스쿨레 공작을 살해함. 노르웨이 황금기의 시작. |
![]() |
2. 내전의 배경
노르웨이는 872년 하랄드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단일 왕국으로 통일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완전히 통합된 국가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1세기 중엽에 내부 통합 과정이 거의 완료되었지만, 여러 명의 통치자가 왕위를 공유하는 것은 여전히 흔한 일이었다. 두 명 이상의 적법한 왕위 후보가 있을 때, 이들은 서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공개적인 충돌은 피하려 했다. 당시에는 명확한 상속법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 후보의 자격은 하랄드 하르파그리의 남계 후손이면 충분했고, 사생아를 차별하지도 않았다.[27]
시구르 1세 요르살라파리는 형제들(에위스테인, 올라프)과 함께 왕위에 올랐다. 형제들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시구르드가 단독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망누스 시구르다르손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러나 1120년대 말, 아일랜드에서 온 하랄드 길리크리스트가 자신이 시구르드의 아버지 망누스 3세 베르푀트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망누스 3세가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고, 길리크리스트가 불의 시련 재판을 통과했기 때문에 시구르드는 그를 이복형제로 인정했다. 대신 시구르드는 길리크리스트에게 자신과 아들이 살아있는 동안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았다.[28]
잉기가 사망한 후, 그의 지지자들은 에를링 스카케의 다섯 살 난 아들 마그누스 에를링손을 왕위 계승자로 내세웠다. 에를링은 자신의 아내 크리스틴이 시구르드 요르살라파리의 딸이라는 점을 들어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고, 야를 칭호를 가지며 이 파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듬해 에를링파는 롬스달 협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하콘파를 무찌르고 하콘을 죽였다. 그 이듬해에는 시구르드 문의 또 다른 아들 시구르 마르쿠스포스트레가 새로운 계승권자로 세워졌으나, 에를링 스카케에게 잡혀 죽었다.[31]
에를링과 그 파벌의 행동은 파격적이었는데,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어떤 선왕의 아들도 아니어서 전통적인 계승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구르드 요르살라파리의 외손자였지만, 원래 계승권은 남계 후손에게만 주어졌다.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에를링파는 천주교회와 손잡고 적자만 계승권을 갖는다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했다. 잉기 크로크흐뤼그는 하랄드 길리크리스트의 유일한 적자였고, 마그누스 에를링손도 에를링 스카케와 크리스틴 시구르다르도티르의 적자라는 논리였다. 1152년 니다로스에 노르웨이 대교구가 설치된 후 세력을 확장하던 천주교회와의 유착은 에를링파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1163년,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베르겐에서 최초로 교회의 대관을 받은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7세였다. 마그누스의 대관식과 함께 적장자에게만 상속권이 있다는 성문 상속법이 반포되었다. 이후 10여 년간 마그누스 에를링손이 국왕이고 에를링 스카케가 섭정하는 체제는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에를링 스카케는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와도 동맹했다.[32]
2. 1. 불분명한 왕위 계승 규칙
노르웨이는 전통적으로 872년 하랄드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단일 왕국으로 통일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내부적으로 규합된 진정한 통일국가가 되기까지는 그 뒤로도 긴 시간이 걸렸다. 11세기 중엽이 되면 그 내부 규합 과정이 거의 완료되었지만, 그럼에도 복수의 통치자가 왕위를 공유하는 것은 여전히 드물지 않았다. 두 명 이상의 적법한 왕위 후보가 존재할 때 이런 식으로 해결하곤 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함께 즉위한 공동왕들은 서로 긴장된 사이일 수밖에 없었지만, 공개적인 충돌은 피하려 했다. 상속법이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 후보로서 적합하다고 평가받는 기준은 하랄드 하르파그리의 남계 후손일 것, 그것뿐이었다. 사생아를 배제하는 적서의 차별조차 없었다.[27]시구르 1세 요르살라파리 역시 형제들(에위스테인, 올라프)과 공동왕으로서 즉위했다. 그러다 형제들이 후사 없이 죽자 시구르드가 단독왕이 되었고, 시구르드의 아들 망누스 시구르다르손이 왕위계승자가 되었다. 그런데 1120년대 말엽에 아일랜드에서 노르웨이로 건너온 하랄드 길리크리스트라는 자가 자신이 시구르드의 아버지 망누스 3세 베르푀트의 사생아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실제로 망누스 베르푀트는 아일랜드 방면에서 노략질을 했던 전력이 있었고, 길리크리스트가 불의 시련재판을 통과했기에 시구르드는 길리크리스트가 자신의 이복형제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시구르드는 길리크리스트에게 자신과 아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28]
2. 2. 교회와 왕권의 대립
잉기가 죽은 후, 잉기의 지지자들은 4년 전 에위스테인 지지자들의 행동을 따라 새로운 왕위 계승권자를 내세웠다. 그들 중 가장 유력한 귀족 에를링 스카케의 다섯 살 난 아들 마그누스 에를링손이었다. 에를링은 아내 크리스틴이 시구르드 요르살라파리의 딸이므로 자기 아들이 그 외손자라는 논리로 계승권을 주장했으며, 야를 칭호를 갖고 이 파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듬해 에를링파는 롬스달 협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하콘파를 무찌르고 하콘을 잡아 죽였다. 그 이듬해에는 시구르드 문의 또 다른 아들 시구르 마르쿠스포스트레가 새로운 계승권자로 세워졌으나, 에를링 스카케가 신속하게 잡아 죽였다.[31]에를링과 그 파당의 행동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는데,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어떤 선왕의 아들도 아니므로 전통적인 계승권이 없었다. 시구르드 요르살라파리의 외손자이기는 했으나, 원래 계승권은 남계 후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 취약한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에를링파는 천주교회를 포섭해서, 적자만 계승권을 갖는다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한다. 잉기 크로크흐뤼그는 하랄드 길리크리스트의 유일한 적자였고, 마그누스 에를링손도 에를링 스카케와 크리스틴 시구르다르도티르의 적자라는 논리였다. 1152년 니다로스에 노르웨이 대교구가 설치된 후 노르웨이에서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던 천주교회와의 유착은 에를링파에 큰 자산이 되었다. 1163년,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베르겐에서 최초로 교회의 대관을 받은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7세였다. 마그누스의 대관식과 동시에 적장자에게만 상속권이 있다는 성문상속법이 반포되었다. 이후 10여 년간 마그누스 에를링손이 국왕이고 에를링 스카케가 대원군 노릇을 하는 체제는 어느 정도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에를링 스카케는 자기 아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고,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와도 동맹했다.[32]
3. 내전의 전개
노르웨이의 왕위 계승 분쟁은 1130년 시구르 1세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시구르 1세의 아들 마그누스 4세와 하랄 길레는 공동 왕으로 합의했지만, 1134년 전쟁이 발발했다. 1135년 하랄은 마그누스를 사로잡아 눈을 멀게 하고 거세한 뒤 수도원에 가두었고, 이후 마그누스는 "맹인왕"으로 불렸다.[29]
같은 시기, 아이슬란드 출신 시구르드 슬레메베댜큰이 마그누스 3세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나타났다. 그는 덴마크에서 화형 심판을 통과했다고 주장했지만, 하랄은 인정하지 않았다. 1136년 시구르드는 베르겐에서 하랄을 암살하고 왕을 선포했다. 하랄의 지지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그의 어린 두 아들 시구르드 문과 잉기 크로크흐뤼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시구르드 슬렘베는 마그누스 맹인을 풀어주고 동맹을 맺었다.[29] 1139년 홀멘그로 전투에서 마그누스와 시구르드는 패배했고, 마그누스는 전사했으며, 시구르드는 고문 끝에 사망했다.[29]
이후, 시구르드 문과 잉기 크로크백의 시대가 왔으나, 그들 역시 내전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1142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외스테인 하랄드손이 하랄 길레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왕위의 3분의 1을 받았다. 1155년까지 세 형제는 평화롭게 통치했지만, 결국 외스테인과 시구르드 문은 잉기를 폐위시키려 했고, 1157년 외스테인은 보후스렌에서 살해되었다.[30] 잉게의 죽은 형제들의 추종자들은 호콘 헤르데브레이를 새 섭정으로 선택했다. 호콘은 10세에 불과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잉게와 계속 싸웠고, 1161년 오슬로 전투에서 잉게를 살해했다.[30]
이후 마그누스 에를링손과 천주교회가 등장하면서 내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선왕의 아들이 아니었지만, 그의 아버지 에를링 스카케는 교회를 포섭하여 적장자 계승 원칙을 내세웠다. 1163년,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노르웨이 최초로 교회의 대관을 받은 국왕이 되었다.[32] 그러나 1174년, 에위스테인 메윌라를 지도자로 하는 비르키베이나르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비르키베이나르는 '자작나무 다리'라는 뜻으로, 가난 때문에 자작나무 껍질을 발에 묶고 다닌다는 멸칭이었다. 이후 페로 제도에서 온 스베리르 시구르다르손이 비르키베이나르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스베리르는 자신이 시구르드 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33]
1179년, 스베리르는 칼브스키네트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에를링 스카케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트뢰넬라그 지방이 스베리르를 지지하는 아성이 되었다. 마그누스는 1184년, 송네 피오르에서 벌어진 핌레이테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스베리르가 승리했다. 스베리르는 1202년까지 노르웨이를 다스렸으나, 천주교회가 스베리르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통치는 불안정했다. 1194년 교황에게서 스베리르의 파문을 얻어냈다.[34]
이후 바글라르가 등장하면서 내전은 더욱 복잡해졌다. 바글라르는 노르드어로 주교의 지팡이를 의미하며, 천주교회의 지지를 받았다. 스베리르의 치세는 바글라르 반군과의 내전으로 얼룩졌다. 1202년 스베리르가 베르겐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하콘 스베리스손이 왕위를 계승했다.[34]
1217년, 잉기 바르다르손 왕이 죽자 비르키베이나르당은 13세의 하콘 하코나르손을 왕으로 추대했다. 야를 스쿨리 바르다르손이 비르키베이나르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37] 같은 해, 바글라르당의 왕 필리푸스 시몬스손도 죽자 스쿨리는 바글라르당에게 새 왕을 추대하지 말고 하콘 하코나르손에게 충성을 맹세해 두 쪽 난 나라를 합치자고 설득했다. 1239년 스쿨리 바르다르손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니다로스의 한 수도원에 숨었다가 하콘 왕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110년에 걸친 내전이 종식되었다.
3. 1. 초기 분쟁 (1130년 - 1161년)

시구르드 1세 요르살라파리가 1130년 죽자, 하랄 길레는 맹세를 깨고 왕위를 주장했다. 시구르드의 아들 마그누스 4세와 하랄은 공동 왕으로 합의했지만, 1134년 전쟁이 발발했다. 1135년 하랄은 베르겐에서 마그누스를 사로잡아 눈을 멀게 하고 거세한 뒤 수도원에 가두었다. 마그누스는 이후 "맹인왕"으로 불렸다.[29]
같은 시기, 아이슬란드 출신 시구르드 슬레메베댜큰이 마그누스 3세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나타났다. 그는 덴마크에서 화형 심판을 통과했다고 주장했지만, 하랄은 인정하지 않았다. 1136년 시구르드는 베르겐에서 하랄을 암살하고 왕을 선포했다. 하랄의 지지자들은 이를 거부하고, 그의 어린 두 아들 시구르드 문과 잉기 크로크흐뤼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시구르드 슬렘베는 마그누스 맹인을 풀어주고 동맹을 맺었다.[29]
1139년 홀멘그로 전투에서 마그누스와 시구르드는 패배했다. 마그누스는 전사했고, 시구르드는 고문 끝에 사망했다.[29]
시구르드 문과 잉기 크로크백은 미성년자였기에 권력 분점에 문제가 없었다. 1142년, 스코틀랜드에서 외스테인 하랄드손이 하랄 길레의 아들이라 주장하며 왕위의 3분의 1을 받았다. 1155년까지 세 형제는 평화롭게 통치했다. 사가에 따르면, 외스테인과 시구르드 문은 잉기를 폐위시키려 했다. 잉그리드 라그발스도터와 그레고리우스 다그손의 권유로 잉기는 베르겐에서 먼저 공격했고, 시구르드 문은 살해되었다. 잉게와 외스테인은 불안정한 합의를 했지만, 1157년 외스테인은 보후스렌에서 살해되었다.[30]
잉게의 죽은 형제들의 추종자들은 호콘 헤르데브레이를 새 섭정으로 선택했다. 이는 내전의 새로운 단계로, 지도자가 몰락해도 파벌이 유지되며 새로운 인물을 선출하는 형태였다. 호콘은 10세에 불과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잉게와 계속 싸웠고, 1161년 오슬로 전투에서 잉게를 살해했다.[30]
3. 2. 마그누스 에를링손과 교회의 등장 (1161년 - 1177년)
잉기가 죽었으나, 잉기의 지지자들은 4년 전 에위스테인 지지자들이 했던 것처럼 새로운 계승권자를 내세웠다. 그중 가장 유력한 귀족 에를링 스카케의 다섯 살 난 아들 마그누스 에를링손이었다. 에를링은 아내 크리스틴이 선왕 시구르드 요르살라파리의 딸이므로 자기 아들이 그 외손자라는 논리로 계승권을 주장했으며, 야를 칭호를 갖고 이 파당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행세했다. 이듬해, 에를링파는 롬스달 협만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하콘파를 무찌르고 하콘을 잡아 죽였다.[31] 그 이듬해에는 시구르드 문의 또 다른 아들 시구르 마르쿠스포스트레가 새로운 계승권자로 세워졌으나, 에를링 스카케가 신속하게 잡아 죽였다.[31]에를링과 그 파당의 행동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는데, 그들이 왕으로 추대한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그 어떤 선왕의 아들도 아니므로 전통적인 계승권이 없었다. 시구르드 요르살라파리의 외손자이기는 했으나, 원래 계승권은 남계 후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 취약한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에를링파는 천주교회를 포섭해서, 적자만 계승권을 갖는다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했다. 에를링파의 예전 지도자였던 잉기 크로크흐뤼그는 하랄드 길리크리스트의 유일한 적자였고, 자기들이 지금 왕으로 밀고 있는 마그누스 에를링손도 에를링 스카케와 크리스틴 시구르다르도티르의 적자라는 논리였다. 1152년 니다로스에 노르웨이 대교구가 설치되고 노르웨이에서 조직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던 천주교회와의 유착은 에를링파에 큰 자산이 되었다. 1163년, 마그누스 에를링손은 베르겐에서 최초로 교회의 대관을 받은 노르웨이 국왕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불과 7세였다. 마그누스의 대관식과 동시에 적장자에게만 상속권이 있다는 성문상속법이 반포되었다. 이후 10여 년간 마그누스 에를링손이 국왕이고 에를링 스카케가 대원군 노릇을 하는 체제는 어느 정도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에를링 스카케는 자기 아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들을 무자비하게 박살냈고, 또한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와도 동맹했다.[32]
3. 3. 비르키베이나르와 스베리르 시구르다르손의 등장 (1177년 - 1202년)
1174년, 에위스테인 메윌라를 지도자로 하는 비르키베이나르라는 새로운 세력이 마그누스 에를링손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자작나무 다리'라는 뜻의 비르키베이나르는 가난 때문에 신발 대신 자작나무 껍질을 발에 묶고 다닌다는 멸칭이었다. 에위스테인 메윌라는 1177년 레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지만, 페로 제도에서 온 스베리르 시구르다르손이 비르키베이나르의 새 지도자가 되었다. 스베리르는 자신이 시구르드 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 주장을 믿지 않지만, 스베리르는 에를링 스카케의 정치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33]
일부 유물사관 역사학자들은 스베리르와 비르키베이나르를 빈민파로 보고 계급투쟁으로 해석하려 했지만, 비르키베이나르가 경제적 약자를 대변했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대부분의 렌드마드가 마그누스를 지지했지만, 스베리르 역시 적지 않은 렌드마드를 자기 편으로 회유해냈다. 비르키베이나르는 사회구조의 변혁을 꾀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들이 그 사회의 정점에 올라가고자 했다.
1179년, 스베리르는 니다로스 외곽 칼브스키네트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고, 에를링 스카케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트뢰넬라그 지방이 스베리르를 지지하는 아성이 되었다. 마그누스는 아버지의 죽음 뒤에도 공동왕 제안을 거부하고 계속 싸웠다. 「스베리르의 사가」는 마그누스 왕이 평민들에게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고 그래서 스베리르의 싸움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스베리르와 마그누스의 전쟁은 7년 이상 계속되었고, 결국 밀려난 마그누스는 덴마크로 망명했다. 1184년, 송네 피오르에서 벌어진 핌레이테 해전에서 마그누스가 죽으면서 전쟁은 스베리르의 승리로 끝났다.
스베리르는 1202년까지 노르웨이를 다스렸으나, 그의 통치는 불안정했다. 에를링 스카케와 영합했던 천주교회가 스베리르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1190년, 노르웨이 대주교 에이리크 이바르손이 노르웨이를 탈출한 뒤 1194년 교황에게서 스베리르의 파문을 얻어냈다. 교황은 노르웨이에 잔류한 모든 주교에게 덴마크에 망명간 에이리크 대주교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고, 주교들은 명령을 따랐다. 스베리르는 오슬로 주교 니콜라스 아르네스손을 겁박하여 대관을 받아냈다. 1198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노르웨이 왕국에 금령을 발령했다. 스베리르는 자신의 파문이 철회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해 문서들을 위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스베리르는 죽을 때까지 파문이 철회되지 않았다.[34]
파문당한 스베리르에게 도전하는 새로운 참칭자들이 여럿 나타났는데, 그중에 가장 강대한 것은 잉기 크로크흐뤼그의 아들을 자칭한 욘 쿠블룽이었다. 욘 쿠블룽은 1185년 즉위를 선언했으나 3년 뒤 베르겐에서 전사했다. 1193년에는 마그누스 에를링손의 서자 시구르드 마그누손이 즉위를 선언했는데, 시구르드는 당시 13세로, 하랄드 마다드손 등 귀족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1194년, 베르겐 바로 북쪽의 아스쾨위섬에서 벌어진 블로르복 전투에서 스베리르는 시구르드를 죽이고 승리했다.[35]
3. 4. 바글라르의 등장과 내전의 지속 (1202년 - 1217년)
1197년, 스베리르의 왕국에 가장 심각한 도전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잉기 크로크흐뤼그의 이복형제이기도 한 오슬로 주교 니콜라스 아르네스손, 노르웨이 대주교 에이리크 이바르손 등 스베리르의 주요 정적들이 스코네(당시 덴마크령)의 할뢰르 장시에서 회동했다. 그들은 잉기 마그누손이라는 아이를 데려다가 마그누스 에를링손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자기들의 허수아비로 삼았다. 이들의 파당은 바글라르라고 불렸는데, 노르드어로 주교의 지팡이를 의미한다. 이후, 스베리르의 치세는 천주교회의 공공연한 지지를 받는 바글라르 반군과의 내전으로 얼룩졌다. 바글라르는 스베리르를 이기고 폐위시킬 능력은 없었지만, 스베리르 역시 바글라르를 발본색원해서 씨를 말릴 수 없었다. 1202년 스베리르가 베르겐에서 병에 걸려 죽었는데, 내전이 시작된 이래 자연사한 첫 번째 왕이었다. 스베리르는 아들이자 후계자 하콘 스베리스손에게 교회와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콘이 비르키베이나르의 새 왕으로 즉위한 그 해, 노르웨이의 금령이 풀리면서 주교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쓸모가 없어진 바글라르파의 허수아비 왕 잉기 마그누손도 자기를 추대한 바글라르들에게 같은 해에 살해되었다.3. 5. 비르키베이나르와 바글라르의 화해, 그리고 내전의 종식 (1217년 - 1240년)

1217년, 잉기 바르다르손 왕이 죽자 비르키베이나르당은 바글라르당의 공격을 우려하여 13세의 하콘 하코나르손을 왕으로 추대했다. 야를 스쿨리 바르다르손이 비르키베이나르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하콘 하코나르손은 1206년 그의 어머니 잉가 올라프스도티르가 선왕 하콘 스베리스손의 유복자라고 주장하며 궁정에 데리고 나타났는데, 당시 비르키베이나르당조차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아기였다. 스쿨리 바르다르손은 잉기 바르다르손의 동생으로, 본래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 했으나 군권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된 것에 만족했다.[37]
같은 해, 바글라르당의 왕 필리푸스 시몬스손도 죽자 스쿨리는 신속히 행동했다. 스쿨리는 바글라르당에게 새 왕을 추대하지 말고 당을 해산하여 하콘 하코나르손에게 충성을 맹세해 두 쪽 난 나라를 합치자고 설득했다. 설득되지 않은 일부는 에를링 스테인베그의 아들 시구르드 리붕그를 지도자로 하여 동노르웨이에서 반란을 이어갔다. 1227년 시구르드가 자연사하자 바글라르당의 잔당들도 반란을 포기했다. 그래서 1227년이 내전이 종식된 해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보통은 스쿨리 바르다르손의 반란까지 진압된 1240년을 내전이 종식된 해로 본다.[37]
1217년 하콘 하코나르손이 왕으로 추대된 것은 임시적인 조치였고, 스쿨리는 언젠가 왕위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1223년, 노르웨이 대귀족들이 베르겐에 모인 자리에서 스쿨리는 시구르드 리붕그 및 다른 두 명과 함께 국왕 후보자로 출마했으나, 이 선거는 하콘이 왕이라는 것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콘이 성장하여 친정을 시작하자 스쿨리의 권력은 기울기 시작했다. 하콘은 평화를 지키기 위해 1225년 스쿨리의 딸 마르그레트와 결혼했다. 1237년에는 스쿨리에게 공작(hertogi) 작위를 수여했는데, 이것은 노르웨이 역사상 첫 번째 공작 서작이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 스쿨리는 결국 1239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은 실패했고, 스쿨리는 니다로스의 한 수도원에 숨었다가 하콘 왕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110년에 걸친 내전이 종식되었다.
4. 내전 관련 주요 인물
이름 | 왕위 주장 근거 | 비고 |
---|---|---|
-- 망누스 3세 베르푀트 | 망누스 1세의 아들 | | |
-- 에위스테인 1세 마그누손 | 망누스 3세의 아들 | | |
올라프 우게파 | 외위스테인 1세의 외손자 | | |
-- 시구르드 1세 요르살라파리 | 망누스 3세의 아들 | | |
-- 마그누스 4세 시구르다르손 | 시구르 1세의 아들 | | |
-- 마그누스 5세 에를링손 | 망누스 4세의 외손자 | | |
시구르드 마그누손 ? | 망누스 5세의 아들 | | |
잉기 마그누손 ? (바) | 망누스 5세의 아들 | | |
에를링 스테인베그 ? (바) | 망누스 5세의 아들 | | |
시구르드 리붕그 (바) | 에를링 스테인베그의 아들 | | |
-- 올라프 마그누손 | 망누스 3세의 아들 | | |
-- 하랄드 4세 길리크리스트 ? | 망누스 3세의 아들 주장 | | |
-- 시구르드 2세 문 | 하랄 4세의 아들 | | |
-- 하콘 2세 헤르데브레이 | 시구르 2세의 아들 | | |
시구르드 마르쿠스포스트레 | 시구르 2세의 양자 | | |
체칠리아 시구르다르도티르 | 시구르 2세의 딸 | | |
-- 잉기 2세 바르다르손 (비) | 체칠리아 시구르다르도티르의 아들 | | |
스쿨리 바르다르손 (비) | 잉에 2세의 아들 | | |
하콘 갈린 | 체칠리아 시구르다르도티르의 아들 | | |
크누트 하코나르손 (바) | 하콘 갈린의 아들 | | |
-- 스베리르 시구르다르손 ? (비) | 시구르 2세의 아들 주장 | | |
시구르드 스베리스손 | 스베리르 시구르다르손의 아들 | | |
-- 구토름 시구르다르손 (비) | 시구르드 스베리스손의 아들 | | |
-- 하콘 3세 스베리스손 (비) | 스베리르 시구르다르손의 아들 | | |
-- 하콘 4세 하코나르손 ? (비) | 호콘 3세의 아들 주장 | | |
-- 잉기 1세 크로크흐뤼그 | 하랄 4세의 아들 | | |
욘 쿠블룽 ? | 잉에 1세의 아들 주장 | | |
필리푸스 시몬스손 (바) | 잉에 1세의 외손자 | | |
-- 에위스테인 2세 하랄드손 ? | 하랄 4세의 아들 주장 | | |
에위스테인 메윌라 (비) | 외위스테인 2세의 아들 | | |
시구르드 슬레메베댜큰 ? | 망누스 3세의 아들 주장 | |
왕으로 자칭했지만, 공식적인 왕위 계승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칭전자들은 ''이탤릭체''로 표기한다.[25]
이름 | 재위 기간 |
---|---|
맹인 마그누스 | 1130년–1135년 (1139년) |
하랄 길레 | 1130년–1136년 |
시구르 슬렘베 | 1135년–1139년 |
시구르 문 | 1136년–1155년 |
잉게 크로크백 | 1136년–1161년 |
외스테인 하랄드손 | 1142년–1157년 |
호콘 브로드숄더 | 1157년–1162년 |
마그누스 에를링손 | 1161년–1184년 |
시구르 마르쿠스포스테레 | 1162년–1163년 |
올라프 우게바 | 1166년–1169년 |
에위스테인 메일라 | 1174년–1177년 |
스베레 시구르드손 | 1177년–1202년 |
욘 쿠블룽 | 1185년–1188년 |
시구르 마그누손 | 1193년–1194년 |
잉게 마그누손 | 1196년–1202년 |
호콘 스베레손 | 1202년–1204년 |
구토름 시구르드손 | 1204년 |
잉게 바르드손 | 1204년–1217년 |
에를링 슈테인베그 | 1204년–1207년 |
필리푸스 시몬손 | 1207년–1217년 |
호콘 호콘손 | 1217년–1263년 |
시구르 리빙 | 1220년–1226년 |
크누트 호콘손 | 1226년–1227년 |
스쿨레 바르드손 | 1239년–1240년 |
5. 내전의 결과 및 영향
노르웨이 내전은 노르웨이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5. 1. 사회 변화
(이전 단계에서 요약 및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빈 출력만 생성되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빈 출력을 그대로 유지합니다.)6. 사료
- 매튜 제임스 드리스코(편집) (1995). 《노르웨이 왕들의 사가》 (바이킹 북구 연구 학회)
- 카리 엘렌 게이드 & 시어도어 머독 앤더슨(편집) (2000) 《https://books.google.com/books?id=DFNZmUrEVY8C&q=Morkinskinna+:+The+Earliest+Icelandic+Chronicle+of+the+Norwegian+Kings Morkinskinna: 노르웨이 왕들의 가장 초기의 아이슬란드 연대기(1030–1157)》 (코넬 대학교 출판부)
- 앨리슨 핀레이; 편집자이자 번역가 (2004) 《파그르스킨나, 노르웨이 왕들의 목록》 (브릴 학술 출판사)
- 스노리 스투를루손; 번역자 리 M. 홀란더 (1991년 재판) 《https://books.google.com/books?id=qHpwje7-wNkC&q=Heimskringla:+History+of+the+Kings+of+Norway 헤임스크링글라: 노르웨이 왕들의 역사》 (텍사스 대학교 출판부)
- 칼 요운손; 번역자 J. 스테프톤 《노르웨이의 스베리 왕 사가》 (라네르크 출판사)
- 스투를라 소르다르손; G.W. 다센트의 영어 번역 (1894, 1964년 재판). 《하콘 사가와 마그누스 사가 조각과 부록.》 (런던: Rerum Britannicarum Medii Ævi Scriptores, vol. 88:4)
- 핀 호드네보 & 할바르드 마게로이(편집); 번역자 군나르 페데르센; (1979). 《바글라르와 비르케베이네르 사가》 (오슬로: 데트 노르스케 삼라게트)
- 개손-하디, 제프리 말콤 (1956) 《왕의 사기꾼: 노르웨이의 스베레 왕》 (런던: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 바게, 스베레 (1996) 《갱 리더에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스베리스 사가와 하코나르 사가 하코나르소나르의 왕권》 (사우스 덴마크 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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