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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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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선은 춘추 전국 시대부터 송나라 시대까지 중국에서 사용된 대형 군선으로, 층을 이루는 구조와 다양한 방어 및 공격 시설을 갖추어 수군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누선은 주로 강이나 호수에서 전투를 벌이는 데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사치스러운 놀이용 배로 사용되기도 했다. 누선은 중국 수군의 주력 전함으로 발전하여 삼국 시대, 위진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그 중요성이 커졌으나, 송나라 시대에 이르러 그 중요성은 점차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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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선
지도 정보
개요
유형선박
설명여러 층으로 지어진 배
용도전쟁
운송
사치품
로마자 표기lou chuan
역사
기원한나라 시대
발전삼국시대 및 진나라, 남북조시대
전성기수나라 및 당나라 시대
쇠퇴송나라 시대 이후
영향동아시아 해군에 큰 영향
구조 및 특징
특징높고 거대한 구조
여러 층의 갑판
탑과 망루 설치
다양한 무기 탑재
재료주로 나무 사용
크기매우 다양했으며, 일부는 거대했음
추진력노와 돛을 병행
활용
군사적 활용해상 전투
해안 방어
병력 수송
민간적 활용무역
교통
사치품 운반
문화적 의미
상징권력, 부, 기술력의 상징
예술적 표현회화, 조각, 문학 등에서 자주 등장
기타
유사 선박몽골 배
일본 배
참고 문헌중국 전통 선박
동아시아 해군사

2. 역사

누선이라는 이름은 춘추 전국 시대 조(越)에서 누선군(樓船軍)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서 누선을 사용한 사례는 오(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僚) 재위 2년(기원전 525년)에 오와 초(楚)장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오에서 「여황(余皇)」이라는 이름이 붙은 누선을 지휘선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서한(西漢) 시대에 누선은 처음으로 중국 수군의 주력 전함이 되었다.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고, 한나라에서 수군을 지휘하는 장군은 으레 누선장군(樓船將軍)이라고 불렀으며, 수군은 누선사(樓船士)라고도 불렸다.[3] 한 무제(漢武帝)가 남월(南越)과 고조선을 공격했을 때에도 누선이 활용되었다.[3] 전쟁을 하지 않을 때에는 누선이 일종의 놀이배로 쓰였는데, 한 무제 때의 예장누선(豫章樓船)은 수만 명을 태울 수 있었고 배 위에 궁궐 건물도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3] (新) 왕조에서 동한(東漢) 초기에 공손술(公孫述)이 한중(漢中) 땅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이미 비단으로 장식한 10층짜리 적루백란선(赤樓帛蘭船)이라는 배가 건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

삼국 시대에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걸쳐 누선은 보편적인 수군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동오(東吳)에서 건조한 「비운(飛雲)」, 「개해(蓋海)」 등의 누선은 5층으로 이루어져 3천 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서진(西晉) 태시(泰始) 8년(272년)에 진 무제(晉武帝)는 왕준(王濬)에게 누선을 건조하게 하여 동오를 멸망시켰는데, 이때 제조된 군선은 너비 120보에 최대 2천 명 이상을 실을 수 있었고, 배 위에서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5]

수 양제 때에는 용주(龍舟)라는 이름의 누선이 제작되어, 수 양제는 이 배를 타고 강남으로 자주 순행하였다. 오대 십국 시대에는 중국 남방 국가들이 누선지휘사(樓船指揮使)라는 정규 관직을 두었다. (宋) 왕조 시대에도 누선은 군사 장비로써 사용되었지만, 그 중요성은 이전 시대에 비해 줄어들었다. 송나라 시대의 군사서 『무경총요』와 당나라 시대의 『태백음경』에서 누선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의 번역에 따르면, 『태백음경』에서는 누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특히 양자강을 따라 이루어지는 강 상 전투에서 이러한 배의 사용은 후한 시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아마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 1. 춘추전국시대

누선이라는 이름은 춘추 전국 시대 조(越)에서 누선군(樓船軍)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타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서 누선을 사용한 사례는 오(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오의 왕 (僚) 재위 2년(기원전 525년)에 오와 초(楚)장강 유역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오에서 「여황(余皇)」이라는 이름이 붙은 누선을 지휘선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2. 2. 서한 시대

서한(西漢) 시대에 누선은 처음으로 중국 수군의 주력 전함이 되었다.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고, 한나라에서 수군을 지휘하는 장군은 으레 누선장군(樓船將軍)이라고 불렀다. 수군은 누선사(樓船士)라고도 불렸다. 한 무제(漢武帝)가 남월(南越)과 고조선을 공격했을 때에도 누선이 활용되었음을 《사기(史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쟁을 하지 않을 때에는 누선이 일종의 놀이배로 쓰였는데, 한 무제 때의 예장누선(豫章樓船)은 수만 명을 태울 수 있었고 배 위에 궁궐 건물도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3]

2. 3. 삼국 시대 ~ 위진남북조 시대

서한(西漢) 시대에 누선은 처음으로 중국 수군의 주력 전함이 되었고,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다. 한나라에서 수군을 지휘하는 장군은 으레 누선장군(樓船將軍)이라고 불렀고, 수군은 누선사(樓船士)라고도 불렸다.[3] 한 무제(漢武帝)가 남월(南越)과 고조선을 공격했을 때에도 누선이 활용되었다.[3]

삼국 시대에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걸쳐 누선은 보편적인 수군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동오(東吳)에서 건조한 「비운(飛雲)」, 「개해(蓋海)」 등의 이름이 붙은 누선은 모두 5층으로 이루어져 3천 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서진(西晉) 태시(泰始) 8년(272년)에 진 무제(晉武帝)는 왕준(王濬)에게 밀명을 내려 쓰촨(四川) 땅에서 누선을 건조하게 하여, 이를 사용해 동오를 멸망시켰다. 이때 제조된 군선은 너비 120보에 최대 2천 명 이상을 실을 수 있었고, 나무로 성처럼 쌓아올린 누각에 사면으로 문을 내었고, 배 위에서는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5]

2. 4. 수나라 ~ 송나라

서한(西漢) 시대에 누선은 중국 수군의 주력 전함이 되었고,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다. 한나라에서는 수군 지휘 장군을 누선장군(樓船將軍)이라고 불렀으며, 수군은 누선사(樓船士)라고도 불렀다. 한 무제(漢武帝)는 남월(南越)과 고조선을 공격할 때 누선을 활용했다.[3]

삼국 시대에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걸쳐 누선은 보편적인 수군 전력으로 활용되었다. 동오(東吳)에서 건조한 「비운(飛雲)」, 「개해(蓋海)」 등의 누선은 5층으로 이루어져 3천 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 서진(西晉) 태시(泰始) 8년(272년)에 진 무제(晉武帝)는 왕준(王濬)에게 누선을 건조하게 하여 동오를 멸망시켰는데, 이때 제조된 군선은 너비 120보에 최대 2천 명 이상을 실을 수 있었고, 배 위에서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5]

수 양제 때에는 용주(龍舟)라는 이름의 누선이 제작되어, 수 양제는 이 배를 타고 강남으로 자주 순행하였다.

오대 십국 시대에는 중국 남방 국가들이 누선지휘사(樓船指揮使)라는 정규 관직을 두었다. (宋) 왕조 시대에도 누선은 군사 장비로써 사용되었지만, 그 중요성은 이전 시대에 비해 줄어들었다. 송나라 시대의 군사서 『무경총요』와 당나라 시대의 『태백음경』에서 누선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3. 구조 및 특징

누선은 3층 구조로, 각 층마다 전투를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층별 구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송나라 시대의 군사서 『무경총요』와 당나라 시대의 『태백음경』에는 누선에 관한 기록이 있다.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중국학자, 역사가인 조지프 니덤의 번역에 따르면, 『태백음경』에서는 누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2]

樓船중국어은 3층으로, 각 층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전투병들이 배치되고, 돛대에는 깃발이 휘날린다. 쇠뇌와 창을 발사할 수 있는 포구가 있고, 측면에는 불을 방지하기 위해 펠트와 가죽으로 보호막을 설치했다. 함교에는 돌을 던지는 투석기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용융된 쇳물을 투석기로 던질 수 있는 준비도 되어 있다. 선체 측면은 성벽과 같은 모습이다. 진 시대 해군 지휘관 왕준은 오를 공격할 때 길이 200보(약 305m)나 되는 거대한 배를 건조했는데, 그 위에 서까래와 복도를 설치하여 전차와 말이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강한 바람이 불면 이러한 배는 통제 불능이 될 가능성이 높아 전투에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판단되었다. 하지만 함대는 위압적인 위력을 갖추기 위해 이러한 배를 보유했다.

특히 양자강을 따라 이루어지는 강 상 전투에서 이러한 배의 사용은 후한 시대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아마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1. 층별 구조

작전용 누선은 크게 3층으로 구성되어, 전함이면서도 궁전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 《석명》(释名)에서는 누선의 구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1층은 여(廬)라고 불렸다.
  • 2층은 비여(飛廬)라고 불렸다.
  • 꼭대기층은 작실(爵室, 雀室)이라고 불렸는데, 꼭대기층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치 참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각 층마다 모두 방호용 여장이 설치되어, 적의 화살과 투석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여장 위에는 전안(箭眼)이 뚫려 있어 이 구멍을 통해 화살이나 쇠뇌를 쏘도록 되어 있었다. 적의 화공(火攻)을 막기 위해 배 위에는 가죽을 덮어 열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누선 위에는 보통 깃발과 창검을 빽빽하게 꽂아두어 위세를 드러냈고, 밧줄이나 노, 돛 등이 많이 설치되어, 배의 기능을 높였다.

3. 2. 방어 및 공격 시설

작전용 누선은 크게 3층으로 구성되어, 전함이면서도 궁전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 《석명》(释名)에 따르면, 1층은 여(廬), 2층은 비여(飛廬), 꼭대기층은 작실(爵室, 雀室)이라고 불렸는데, 꼭대기층에서 바라보는 것이 마치 참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각 층마다 방호용 여장이 설치되어, 적의 화살과 투석을 막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여장 위에는 전안(箭眼)이 뚫려 있어 이 구멍을 통해 화살이나 쇠뇌를 쏘도록 되어 있었다. 적의 화공(火攻)을 막기 위해 배 위에는 가죽을 덮어 열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2]

누선 위에는 보통 깃발과 창검을 빽빽하게 꽂아두어 위세를 드러냈고, 밧줄이나 노, 돛 등이 많이 설치되어, 배의 기능을 높였다.[2]

송나라 시대의 군사서 『무경총요』와 당나라 시대의 『태백음경』에서 누선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중국학자, 역사가인 조지프 니덤의 번역에 따르면, 『태백음경』에서는 누선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2]

3. 3. 기타 시설

누선은 작전용으로 사용될 때 크게 3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전함임에도 궁전과 같은 화려함을 지녔다. 《석명》(释名)에 따르면, 1층은 여(廬), 2층은 비여(飛廬), 꼭대기층은 작실(爵室, 雀室)이라 불렸다. 꼭대기층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참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각 층에는 방호용 여장이 설치되어 적의 화살과 투석을 막을 수 있었다. 여장 위에는 전안(箭眼)이 뚫려 있어 이 구멍을 통해 화살이나 쇠뇌를 쏘았다. 적의 화공(火攻)을 막기 위해 배 위에는 가죽을 덮어 열을 견디게 했다.

누선 위에는 보통 깃발과 창검을 빽빽하게 꽂아 위세를 드러냈고, 밧줄, 노, 돛 등을 많이 설치하여 배의 기능을 높였다.

4. 활용

서한(西漢) 시대에 누선은 중국 수군의 주력 전함이 되었다. 배에 탈 수 있는 인원은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고, 한나라에서 수군을 지휘하는 장군은 으레 누선장군(樓船將軍)이라고 불렀으며, 수군은 누선사(樓船士)라고도 불렸다. 한 무제(漢武帝)가 남월(南越)과 고조선을 공격했을 때에도 누선이 활용되었다.[3]

전쟁을 하지 않는 동안에는 누선이 일종의 놀잇배로 쓰였는데, 한 무제 때의 예장누선(豫章樓船)은 수만 명을 태울 수 있었고 배 위에 궁실도 마련되어 있었다고 한다.[3] (新) 왕조에서 동한(東漢) 초기에 공손술(公孫述)이 한중(漢中) 땅에 자리잡고 있을 때, 이미 비단으로 장식한 10층짜리 적루백란선(赤樓帛蘭船)이라는 배가 건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

삼국 시대에서 위진 남북조 시대에 걸쳐 누선은 보편적인 수군 전력으로 활용되었는데, 그 가운데 동오(東吳)에서 건조한 「비운(飛雲)」, 「개해(蓋海)」 등의 이름을 가진 누선은 모두 5층으로 이루어져 3천 명의 병사를 태울 수 있었다고 한다. 서진(西晉) 태시(泰始) 8년(272년)에 진 무제(晉武帝)가 변왕(升王) 예(濬)를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으면서 아울러 밀명을 내려 쓰촨(四川) 땅에서 누선을 건조하게 하여, 이를 사용해 동오를 멸망시켰다. 이때 제조된 군선은 너비 120보에 최대 2천 명 이상을 실을 수 있었고, 나무로 성처럼 쌓아올린 누각에 사면으로 문을 내었고, 배 위에서는 말을 달릴 수도 있었다고 한다.[5]

수 양제 때에는 용주(龍舟)라는 이름의 누선이 제작되었는데, 수 양제는 이 배를 타고 자주 강남으로 나아가 놀곤 하였다.

오대 십국 시대, 중국 남방의 국가들은 정규 관직으로써 누선지휘사(樓船指揮使)를 두었는데, 민왕(閩王) 왕연균(王延鈞)의 조카 왕인달(王仁達)도 이 직책을 지냈다. (宋) 왕조 시대에도 누선은 군사 장비로써 사용되었지만, 그 중요성은 예전 시대에 비하면 많이 줄어 있었다.

참조

[1] 서적 Taibai Yinjing
[2] 서적 Taibai Yinjing
[3] 서적 태평어람
[4] 서적 후한서
[5] 서적 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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