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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렌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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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렌기성은 1493년 도다 무네미쓰가 축성한 일본의 성으로, 미카와국 아쓰미 군에 위치했다. 센고쿠 시대에 도다 가문의 거점으로서 주변 세력과 항쟁했으며, 특히 이마바시 성(후에 요시다 성)과의 관계가 중요했다. 1571년 다케다 신겐의 공격으로 함락되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원으로 탈환되기도 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이동하면서 폐성되었고, 현재는 오구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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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렌기성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니렌기성 유적지의 토루
니렌기성 유적지의 토루
이름니렌기성
원래 이름二連木城
위치아이치현도요하시시
성 유형평성
좌표좌표: 34.770014, 137.414847
코드해당 없음
건축 시기1493년
건축가도다 무네미쓰
재료흙, 나무, 돌
사용 기간1493년–1590년
전투해당 없음
철거해당 없음
상태유적지는 오구치 공원으로 조성됨. 토루, 석벽, 해자는 남아 있음.
소유아이치현도요하시시
공개 여부24시간 개방
관리아이치현도요하시시
주둔군해당 없음
현재 사령관해당 없음
사령관해당 없음
점유해당 없음
사건해당 없음
니렌기성 유적지 기념비
니렌기성 유적지 기념비
다른 이름仁連木城
성 종류평산성
천수각 구조없음
건축가도다 무네미쓰
건축 년도메이오 2년 (1493년)
개조해당 없음
통치자도다 씨
폐성 년도덴쇼 18년 (1590년)
유적토루, 해자
문화재 지정미지정
역사
건설1493년, 도다 무네미쓰에 의해 건설됨
사용 종료1590년

2. 역사

니렌기성은 센고쿠 시대1493년 도다 무네미쓰가 축성하여 도다 가문의 주요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거치며 성주가 바뀌고 여러 전투를 겪었다. 1590년 마지막 성주였던 도다 야스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라 간토로 이주하고, 같은 해 이케다 데루마사가 요시다 성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니렌기성은 폐성되었다.

2. 1. 센고쿠 시대 이전

니렌기성은 1493년(메이오 2년)에 도다 씨의 중흥조인 도다 무네미쓰(戸田宗光)가 축성했다.

도다 무네미쓰는 교토 무로마치 막부만도코로(政所) 집사(執事)였던 이세 사다치카(伊勢貞親)를 섬겼다. 당시 미카와국 슈고(守護) 호소카와 시게유키(細川成之)가 미카와 국 누카타군의 소란 평정을 요청하자,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는 도다 무네미쓰와 그의 의부(義父) 마쓰다이라 노부미쓰(松平信光)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무네미쓰는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와 함께 임무를 완수하고 미카와국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오닌의 난(1467년~1477년)으로 혼란한 시대가 되자, 무네미쓰는 1475년(분메이 7년) 아쓰미 군의 오쓰 성에 입성했다. 이후 1477년(분메이 9년)에는 군다이(郡代) 잇시키 마사테루(一色政照)를 아쓰미 군 오쿠사 촌(아이치현 다하라시)에 은거시키고 그의 양자가 되어 군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1480년(분메이 12년)에는 다하라 성을 축성했다.

1493년(메이오 2년), 도요가와 북쪽의 호이군에서는 우시쿠보 성(현, 도요카와시 우시쿠보초)에서 주군 잇시키 도키이에(一色時家)를 몰아내고 세력을 떨치던 하타노 도키마사(波多野時政)와 옛 잇시키 가신이었던 마키노 시게토키(牧野成時, 코하쿠) 사이에 하이노하라 전투가 벌어졌다. 호이 군이 큰 혼란에 빠진 이 해에, 도다 무네미쓰는 아쓰미 군 북단 아사쿠라 강 연안 언덕에 니렌기성을 쌓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써 니렌기성은 아쓰미 군 북부의 본성이 되었으며, 아들 도다 노리미쓰(戸田憲光)에게 물려준 다하라 성과 함께 도다 가문의 중심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무네미쓰는 이를 발판으로 아쓰미 군 전체를 장악하고자 했다.

1508년 도다 무네미쓰가 사망하자, 아들 노리미쓰는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니렌기성 근처에 젠큐인(全久院)을 건립했다.

2. 2. 센고쿠 시대

1465년, 교토무로마치 막부 정소 집사 이세 사다치카를 섬기던 도다 무네미쓰는 미카와국 슈고 호소카와 나리유키의 요청과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명령으로 미카와로 파견되었다. 그는 장인인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와 함께 누카타군의 소란 세력(마루야마 가문, 오히라 가문 등)을 진압하고 미카와 국에 정착하여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오닌의 난(1467년~1477년)으로 혼란한 시대가 되자, 무네미쓰는 지타 반도에서 시작하여 미카와 만을 거쳐 아쓰미 반도로 진격했다. 1475년(분메이 7년)에는 오쓰 성에 들어갔고, 1477년(분메이 9년)에는 군다이(郡代) 잇시키 마사테루를 아쓰미 군 오쿠사 촌(아이치현 다하라시)에 은거시키고 그의 양자가 되어 아쓰미 군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1480년(분메이 12년)에는 다하라 성을 축성하여 작전 거점으로 삼았다.

1493년(메이오 2년), 도요가와 북쪽 호이 군의 나가야마 잇시키성(현, 도요카와시 우시쿠보초)에서 주군 잇시키 도키이에를 몰아내고 세력을 떨치던 하타노 도키마사와 옛 잇시키 가신 마키노 시게토키(고하쿠) 사이에 하이노하라 전투가 벌어져 호이 군이 혼란에 빠졌다. 같은 해, 도다 무네미쓰는 동쪽의 다메 마타사부로(1492년 후나가타야마 성 축성) 세력에 대항할 전진 기지로서, 아쓰미 군 북단 아사쿠라 강 연안 언덕에 니렌기 성을 축성하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2][3] 이로써 니렌기 성은 아쓰미 군 북부의 본성이 되었고, 아들 도다 노리미쓰에게 물려준 다하라 성과 함께 도다 가문의 중심 거점이 되었다. 무네미쓰는 니렌기 성을 기반으로 아쓰미 군의 완전한 제압을 도모했다.

1505년, 마키노 고하쿠가 니렌기 성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에 이마바시 성을 건설하자[4], 두 성 사이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도다 무네미쓰는 마키노 가문의 수장을 승려로 만들고 동맹을 맺었다. 1508년(에이쇼 5년) 도다 무네미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노리미쓰가 뒤를 이었다. 노리미쓰는 아버지 무네미쓰를 위해 니렌기 성 근처에 젠큐인을 건립했다.[4] 노리미쓰는 이미 1490년대에 사이고 마사사다(西郷正定)의 딸과 혼인하여 사이고 씨족과의 동맹을 확보한 상태였으며[4], 니렌기 성으로 거처를 옮겨 1508년경 도다 가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529년, 19세의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이마바시 성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점령한 후[5], 이나 성과 니렌기 성을 포함한 이 지역의 다른 요새들도 공격했다. 잇따른 정략 결혼을 통해 도다 씨족은 점차 마쓰다이라씨의 분가가 되었다.

1571년, 다케다 신겐은 25,000명의 병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소유한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다케다가 도토미국에 진입하자,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후 하마마쓰 성에서 요시다 성으로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요시다 성과 미카와 동부 지역의 방어는 신겐이 강력한 전술가로 알고 있던 사카이 다다쓰구가 지휘했다. 미카와에 도착한 신겐은 미카와 만 바로 위에 있는 도요가와 강과 아사쿠라 강의 합류 지점을 점령해야 할 중요한 전략적 지점으로 인식했다. 요시다 성은 합류 지점을 내려다보는 강둑에 자리 잡고 있었고, 니렌기 성은 이 지역의 지성(支城)으로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아사쿠라 강둑에 위치해 있었다. 니렌기 성에서 이에야스는 자신의 수적으로 열세인 후위 부대를 이끌고 다케다 군에 대항하여 지연 작전을 펼쳤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도쿠가와는 니렌기 성에서 요시다 성으로 후퇴했다. 오다 씨족의 지원군과 함께 이에야스는 군대를 소집하여 다케다를 격퇴하고 적에게 함락되었던 니렌기 성과 다른 성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이 지역의 소유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이전되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충성스러운 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간토 지방을 점령했다. 마지막 성주인 도다 야스나가는 이에야스를 따라 동쪽으로 간 1590년에 니렌기 성의 소유권을 포기했다.[3] 이때 야스나가는 이에야스로부터 마쓰다이라(松平) 성씨를 하사받아, '''니렌기 도다 가문'''은 도쿠가와 마쓰다이라 일족과 동격인 종가를 칭하게 되었고, 기존의 다하라 성을 기반으로 한 다하라 도다 가문은 분가가 되었다. 같은 해, 미카와 동부 4군(당시 총 15만 2천 석)의 영주가 된 이케다 데루마사는 요시다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미카와국이 히데요시 또는 그의 가신들의 통제 하에 있는 땅으로 둘러싸이게 되면서 이 지역의 많은 성들이 불필요해졌고, 니렌기 성 역시 이때 폐성되었다.

2. 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1590년(덴쇼 18년) 니렌기 성주 도다 야스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간토로 이봉됨에 따라 함께 이주하면서 성은 주인을 잃었다. 이때 야스나가는 이에야스로부터 마쓰다이라 성(姓)을 사성(賜姓)받아 도쿠가와 씨계 마쓰다이라 씨 일족과 동등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마쓰다이라 성을 칭하게 된 '''니렌기 도다 가'''는 종가(宗家)가 되었고, 다하라 성을 기반으로 한 기존의 다하라 도다 가는 분가(分家)가 되었다.

같은 해, 미카와 동부 4군(총 15만 2천 석)을 다스리게 된 이케다 데루마사가 요시다 성을 거점으로 삼으면서, 니렌기 성은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폐성(廢城)되었다.

3. 요시다 성과의 관계

1493년 하이노하라 전투(灰野原の戦い)에서 승리한 마키노 나리토키(牧野成時, 통칭 코하쿠)는 도요카와 강 동쪽으로 진출하여, 1505년 니렌기 성 서쪽 약 1.5km 지점에 요시다 성(今橋城, 처음 이름은 이마하시 성)을 축성했다.[4]

이마하시 성(요시다 성)의 축성은 아쓰미군의 완전한 지배를 목표로 하던 니렌기 성의 도다 씨에게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특히 이마하시 성의 정문(오테몬)이 니렌기 성이 위치한 동쪽을 향하고 있어, 이는 명백한 대립 의도로 해석되었다. 니렌기 성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작은 산 위에 자리 잡은 요새였던 반면, 이마하시 성은 도요카와 강과 아사쿠라 강(朝倉川) 합류 지점 근처 평지에 가까운 평성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니렌기 성의 도다 씨와 이마하시 성의 마키노 씨는 축성 다음 해인 1506년부터 격돌하는 등 오랜 기간 항쟁을 벌였다. 이후 마쓰다이라 씨까지 개입하며 지배권을 둘러싼 복잡한 쟁탈전이 이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미카와국을 장악한 후, 니렌기 성은 요시다 성의 지휘 하에 편제되어 요시다 성을 보조하는 지성(支城)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두 성이 지리적으로 가깝고 상호 연계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이케다 테루마사가 요시다 성주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테루마사는 니렌기 성이 요시다 성과 너무 가깝다고 판단하여 전략적 필요성이 낮다고 보고 폐성시켰다. 니렌기 성이 폐성됨에 따라 요시다 성의 오테몬 역시 기존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이전되었다. 이로써 두 성의 관계는 니렌기 성의 폐성으로 종결되었다.

3. 1. 항쟁기

1493년 도다 무네미쓰는 후나가타야마 성을 거점으로 삼은 동쪽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니렌기 성을 건설했다.[2][3] 같은 해 하이노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마키노 나리토키(牧野成時, 통칭 코하쿠 古伯)는 도요카와 강 동쪽으로 건너와, 1505년 니렌기 성 서쪽 약 1.5km 지점에 이마하시 성(今橋城, 후일 요시다 성으로 개명)을 축성했다.[4]

이는 아쓰미군의 완전한 지배를 목표로 하던 니렌기 성의 도다 씨에게는 큰 위협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이마하시 성의 정문(오테몬)이 니렌기 성이 있는 동쪽을 향하고 있어, 명백한 대립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었다. 지형적으로 니렌기 성이 주변에서 가장 높은 작은 산 위에 위치한 요새였던 반면, 이마하시 성은 도요카와와 아사쿠라 강(朝倉川)의 합류 지점 근처 평지에 가까운 평성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 도다 씨는 이마하시 성 공략에 나서게 된다.

이마하시 성 축성 다음 해인 1506년, 니렌기 성의 도다 씨와 이마하시 성의 마키노 씨는 격돌했고, 이 전투에서 마키노 코하쿠는 전사했다. 이는 두 가문 간 오랜 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이후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도다 무네미쓰는 1508년에 사망했고[4], 씨족의 지휘권은 아들 도다 노리미쓰(戸田憲光)에게 넘어갔다. 노리미쓰는 니렌기 성으로 거처를 옮겨 세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 니렌기 성과 이마하시 성 사이에서는 수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서미카와(西三河)의 마쓰다이라 씨까지 이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면서, 이마하시 성(후일 요시다 성) 쟁탈전은 도다, 마키노, 마쓰다이라 삼파전 양상으로 더욱 치열해졌다. 1529년에는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이마하시 성을 공격하여 격전 끝에 점령하기도 했다.[5]

이마하시(요시다) 성을 둘러싼 혼란은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미카와 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잠시 진정 국면을 맞았다. 이마가와 씨는 요시다 성을 확보하고 미카와 지배의 중요 거점으로 삼아 성주 대리를 파견했다. 그러나 1560년 5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하고 전사하면서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요시다 성주 대리였던 오하라 스케요시(大原資良)와 교류하던 니렌기 성주 도다 시게사다(戸田重貞)는 1564년, 요시다 성에 인질로 잡혀 있던 자신의 어머니를 구출하는 데 성공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진영에 합류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니렌기 성(도쿠가와 측)과 요시다 성(이마가와 측)은 다시 적대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1571년, 다케다 신겐이 2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를 침공했다. 이에야스는 하마마쓰 성에서 요시다 성으로 이동하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요시다 성과 미카와 동부 지역의 방어는 사카이 타다쓰구에게 맡겨졌다. 신겐은 도요카와 강과 아사쿠라 강 합류 지점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지역 공략에 나섰다. 이에야스는 니렌기 성에서 자신의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을 이끌고 다케다 군에 맞서 지연전을 펼쳤다. 격렬한 전투 끝에 도쿠가와 군은 니렌기 성에서 요시다 성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후 오다 씨족의 지원군과 합류한 이에야스는 반격에 나서 다케다 군에게 빼앗겼던 니렌기 성을 비롯한 여러 성들을 되찾았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이 지역의 지배권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넘어갔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가신들은 동쪽의 간토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니렌기 성의 마지막 성주였던 도다 야스나가(戸田康長) 역시 이에야스를 따라 간토로 가면서 1590년 니렌기 성의 소유권을 포기했다.[3] 이후 미카와 동부 지역은 이케다 테루마사에게 주어졌고, 그는 요시다 성에 거주했다. 주변 지역이 히데요시 또는 그의 가신들의 통제하에 놓이면서 니렌기 성은 전략적 가치를 상실했고, 결국 폐성되어 버려졌다.

3. 2. 지성적 역할 시기

156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세로 이마가와 씨 세력이었던 오하라 스케요시가 요시다 성을 내어주고 물러나면서, 니렌기 성은 요시다 성과 함께 도쿠가와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 이전 이마가와 씨 지배 시기와 마찬가지로 니렌기 성은 요시다 성주의 지휘 아래 편제되었으며, 요시다 성과의 연계가 필수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요시다 성을 보조하는 지성(支城)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니렌기 성이 다시 위기를 맞은 것은 1571년이었다. 당시 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관계가 악화된 가이의 다케다 신겐으로부터 동쪽과 북쪽에서 영토를 공격받고 있었다. 시나노 방면에서 남하하는 다케다 군의 위세에 야마가 산포슈와 같이 항복하는 세력까지 나타나는 등 히가시미카와 지역은 혼란에 빠졌다. 4월 28일에는 시타라군의 스가누마 사다미쓰가 다케다 군에 밀려 퇴각했고, 다케다 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요시다 성까지 공격하며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니렌기 성 역시 다케다 군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니렌기 성의 후위 부대를 이끌고 다케다 군에 맞서 지연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니렌기 성은 요시다 성만큼의 방어력을 갖추지 못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함락되었다. 성에 있던 병력은 요시다 성으로 후퇴한 것으로 전해진다(니렌기 성 전투). 이후 오다 씨족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이에야스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다케다 군을 격퇴하고 함락되었던 니렌기 성을 비롯한 다른 성들을 되찾았다.

3. 3. 폐성기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 이후, 이 지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가신들은 간토 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니렌기 성의 마지막 성주였던 토다 야스나가 역시 이에야스를 따라 간토로 이주하면서 1590년에 성의 소유권을 포기했다.[3] 이로써 니렌기 성은 주인을 잃게 되었다.

같은 해, 이케다 테루마사가 동 미카와국 지역(당시 4군, 총 15만 2천 석)의 영주로 임명되어 요시다성에 입성했다. 이케다 테루마사는 요시다 성을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는데, 니렌기 성이 요시다 성과 불과 2km 거리에 위치하여 너무 가깝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니렌기 성은 전략적 필요성을 잃고 폐성되었다. 니렌기 성이 폐성되면서 요시다 성의 정문인 오테몬(일본어: 大手門) 역시 기존의 동쪽 방향에서 남쪽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4. 그 외

마지막 요시다 성주인 마쓰다이라 노부토키는 본래 오코치 씨 출신이지만,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의 양자가 되어 마쓰다이라 씨를 칭하게 된 인물이다.[1][2] 니렌기성 초대 성주인 도다 무네미쓰의 장인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인데, 공교롭게도 마쓰다이라 노부토키가 양자로 들어간 나가사와 마쓰다이라 가문(거점: 나가사와 성, 현 도요카와시 나가사와정)은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아들인 마쓰다이라 지카노리(11남이라는 설도 있음[2])를 시조로 삼고 있어[1][2] 서로 인연이 닿는다.

5. 성의 구조

니렌기성은 아사쿠라강 근처의 테라스 지역에 지어졌다. 본관(本丸, hon-maru)의 면적은 약 600m2였다.[12] 가문의 공식 거처는 북쪽 뜰에 위치해 있었다. 제2 뜰(二の丸, ni-no-maru)은 본관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동쪽과 남쪽 구획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 각 구획은 흙으로 만든 성벽과 해자로 서로 분리되어 있었다.[12]

참조

[1] 서적 豊橋市史〈第5巻〉古代・中世史料編 Toyohashi City Hall
[2] 문서 Kobayashi and Makino (1994), p 330.
[3] 서적 Aichi Prefecture Board of Education
[4] 문서 Kobayashi and Makino (1994), p. 610.
[5] 문서 Kobayashi and Makino (1994), p. 335.
[6] 서적 The History and Culture of Japanese Food Columbia University Press
[7] 서적 Everyday Life in Traditional Japan Tuttle Publishing
[8] 서적 The Samurai: A Military History MacMillan Publishing Co.
[9] 서적 The Meiji Restorat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10] 서적 豊橋市史 史料目録 Toyohashi City Hall
[11] 서적 豊橋市史 近代資料編 Toyohashi City Hall
[12] 서적 Toyohashi City Board of Education
[13] 웹사이트 "「豊橋市の文化財」豊橋市公式HP" http://www.toyoha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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