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사고 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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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사고 의용대는 일본 제국이 대만을 병합한 후, 대만 원주민을 특수 부대 작전에 활용하기 위해 조직한 부대이다. 이들은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징집과 훈련을 거쳐 주요 전투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항복 이후 대만은 일본 국적을 상실하고, 전쟁 피해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어 급여 미지급, 군사 우편 저금 미반환 등의 문제로 인해 보상 문제가 발생했다. 1974년 나카무라 테루오의 발견으로 다카사고 의용군 문제가 공론화되었고, 특별법 제정을 통해 일부 보상이 이루어졌다. 전후, 생존자와 유족들은 미지급 급여,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 등으로 보상을 요구했지만, 2005년 오사카 고등법원에서 패소했다. 다카사고 의용대 위령비 철거 문제와 가오진수메이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은 이들의 역사적 평가와 관련된 논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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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사고 의용대 | |
---|---|
개요 | |
명칭 | 다카사고 의용대 |
원어 명칭 | 高砂義勇隊 (일본어) |
로마자 표기 | Takasago Giyūtai |
활동 시기 | 제2차 세계 대전 |
구성원 | 타이완 원주민 |
소속 | 일본 제국 육군 |
배경 | |
모집 배경 |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이념 확산 타이완 원주민의 일본에 대한 협력 의지 |
동원 이유 | 정글 지형 적응력 뛰어난 신체 능력 용맹함 |
조직 및 활동 | |
모집 시작 | 1942년 |
지원 자격 | 타이완 원주민 청년 |
주요 활동 지역 | 필리핀 뉴기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전선 |
역할 | 정찰 게릴라전 보급 건설 작업 등 |
특징 | 전통적인 사냥 기술과 지형 지리에 능숙 일본군에 협력하며 용맹함을 떨침 높은 사망률 |
규모 | 약 6,000명 이상 (여러 차례에 걸쳐 모집) |
종전 이후 | |
평가 |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희생양 전쟁 범죄에 연루된 가해자 다양한 시각 존재 |
생존자 | 고령으로 생존자 수가 매우 적음 |
관련 작품 | 영화, 소설, 다큐멘터리 등 (다카사고 의용대를 소재로 한 작품) |
2. 역사적 배경
1894년 청일 전쟁 결과 일본 제국이 대만을 병합한 후, 일본 정부는 대만 원주민을 대상으로 문화 동화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 제국 육군은 대만 원주민을 특수 부대 작전에 투입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일본군은 원주민들이 일본인보다 동남아시아의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서 활동하는 데 더 적합하고, 수렵 채집 문화를 가져 최소한의 군사 물류 지원으로 작전 수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일부 부족에게는 참수 풍습이 남아 있는 등, 용맹함과 강인함은 원주민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였다.
2. 1. 징집과 훈련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대만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문화 동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특수 부대 작전에 활용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원주민들은 동남아시아의 열대 및 아열대 지역 환경에 적응력이 뛰어나고, 수렵 채집 문화 덕분에 최소한의 군사 물류 지원으로도 작전 수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일본군은 친일 성향의 원주민 젊은이들을 징집했다. 정확한 징집 인원은 기밀이었으나, 대략 1,800명에서 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이들은 반란 및 게릴라전 전문 나카노 학교 출신 장교들의 지휘 아래 특수 훈련을 받았다.
초기에 다카사고 의용대는 주로 수송 및 보급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전쟁 상황이 악화되면서 전투 부대로 전선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솔로몬 제도, 뉴기니 등지에서 미국군 및 호주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2. 2. 주요 전투 및 활약
다카사고 의용대는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솔로몬 제도, 뉴기니 (코코다 트랙 캠페인 포함) 등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특히 정글 생존 능력과 게릴라전 전술에 능숙하여 미국군 및 호주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일본군은 다카사고 의용대의 이러한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우세한 미·호주군에 대한 습격과 보급이 끊어진 상황에서의 식량 조달에 활용하였다.전쟁 말기에는 '카오루 특공대'라는 자살 임무 부대가 조직되어 레이테 섬의 미국 육군 항공대 착륙장 공격에 투입되기도 했다. 카오루 특공대는 다카사고 의용병 15명의 장교와 45명의 사병으로 구성되었다.
다카사고 의용대는 본래 전지에서의 병참 및 토목 공사가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바탄-코레히도르 전투에 참가한 제1회 다카사고 의용대를 시작으로 전투에도 투입되었다. 일본군이 수세에 놓이면서, 경작·채취·수렵 등을 통한 식량 조달에 진력하는 한편, 육군 나카노 학교 출신자의 지휘 하에 유격대가 조직되어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3. 부대 구성 및 특징
다카사고 의용대는 대만 원주민으로만 구성된 부대였다. 이들은 일본 제국에 의해 문화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징집되었으며, 주로 동남아시아의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서 활동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겨졌다. 초기에는 수송 및 보급 임무를 맡았으나, 전쟁 상황이 악화되면서 전투 부대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다카사고 의용대원들은 군인이 아닌 군속 신분으로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전통 무기인 파도칼을 휴대하고 전투에 임했다. 일본군은 원주민들의 용맹성, 뛰어난 신체 능력, 생존 기술, 지도자에 대한 복종심 등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열대 지역에서의 생존 지식은 보급이 끊어진 상황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전쟁 말기에는 일부 다카사고 의용병들이 기레츠 공정대와 유사한 자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카오루 특공대로 조직되기도 했다.
3. 1. 전후 생존자와 잔류병
종전 후에도 일부 다카사고 의용대원들은 정글에 남아 저항을 계속했다. 가장 유명한 잔류병은 아미족 출신의 나카무라 테루오(스니온, 이광휘)로, 1974년 12월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에서 발견되었다. 나카무라는 일본 항복 문서가 서명된 지 29년 3개월 16일 만에 발견되었으며, 1956년에 다른 잔류병들을 떠난 후 거의 20년 동안 정글에서 고립되어 살았다.4. 전후 문제
항복으로 일본이 대만을 포기하면서 일본 국적을 상실한 대만인은 일본국 정부의 전쟁 피해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직 군인·군속 및 그 유족에 대한 장애 연금·유족 연금·은급·조위금뿐만 아니라, 전쟁 중 미지급 급여 및 군사 우편 저금 등의 지급도 일절 이루어지지 않았다.[3][4]
1952년 일화 평화 조약에서 일·대만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일본국 정부와 중화민국 정부 간의 특별 협정의 주제로 한다"라고 정해졌지만, 일본 정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민 정부 또한 전후 일본으로부터 접수한 재산 처리 문제와 과거의 "적"이었던 대만인 전 일본군 병사 문제에 무관심했다. 결국, 일본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국교 수립으로 일·대만 국교가 단절되면서 협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을 위해 전장에 나섰음에도 수당을 받지 못한 대만인 전 일본군 병사들은 불만과 억울함을 느꼈다.[3][4]
1974년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에서 잔류 일본군으로 발견된 나카무라 테루오(스니온, 이광휘)는 아미족 출신 의용대원이었다. 그의 발견으로 "다카사고 의용군"이 일본 여론의 주목을 받았고, 급여 미지급 및 보상 부재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후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특정 조위금이 지급되기도 했지만, 일부 전 대원들은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너무 적은 액수라며 항의했다.[5] 1996년에는 교류협회 습격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6][7]
많은 전 병사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남겨진 보상 문제는 여전히 해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4]
4. 1. 보상 및 배상 문제
전후, 강제로 군사 우편 저금에 예치되어 인출할 수 없게 된 급여 등의 반환(확정 채무 문제), 전사자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등을 둘러싸고 생존자나 유족의 일부는 재판 등에서 계속 분쟁을 벌였으나, 2005년 9월 30일 오사카 고등법원의 판결로 패소가 확정되었다.[3] 오사카 고등법원에서의 판결은 현지 원주민 미디어도 취재하여 즉시 대만에서 방송되었다. 그러나 일부 생존자와 유족은 이에 반대하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을 희망하며 분쟁을 지속하고 있다.야스쿠니 신사는 "일단 합사한 영령은 분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대만 단결 연맹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건에 반발하여 2005년 6월 14일, 대만의 입법 위원 (국회의원) 가오진수메이(치와스아리) 등 60명의 대만 원주민이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 이들은 전몰한 의용병의 영혼을 되찾는 의식인 "환아조령"을 거행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이전에 이미 "환아조령"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거행한 적이 있었다(1회는 야스쿠니 신사도 인가). 또한 참가자 60명의 방일 모집 요항에 기재된 일정 대부분이 일본 관광지 순회여서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
가오진수메이 등의 행위는 대만의 각종 미디어에서 크게 보도되었고, 대만 내부에서 그 행위의 시비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지자와 반대파는 이 보도에 대한 받아들이는 방식이 크게 달랐다.
- 지지자 측 견해: 대만 원주민 풍습에는 조상을 자택에서 모시는 문화가 있으며, 자택에서 조상을 모시지 않는 자는 "불효자"로 간주되어 공동체와 사회로부터 경멸받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대만 원주민 및 기타 대만 출신 구 일본군 유족은 "영령 초혼" 의식 거행을 강하게 원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가 대만 유족의 의사와 문화를 무시한 점에 대해 대만의 일부 미디어는 가오진수메이 등 및 유족에게 동정을 표하며, 일본 정부 및 야스쿠니 신사의 강경한 대응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 반대파 측 견해: 이 운동이 대만인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판적인 의견이 각종 미디어 보도에서 나오고 있다. 또한, "'영령 초혼' 의식 거행을 원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야스쿠니 신사 측은 과거에 "영령 초혼 의식"을 허가하여 한 번 거행되었기 때문에 지지자 측 주장의 일부는 충족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사카 지방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때에도 대만 원주민 본인의 허락 없이 수백 명의 명부를 작성했으나, 개인 확인 결과 대부분 동의 없이 명부화된 것으로 확인되어 삭제되었다.
항복으로 일본이 대만을 포기함에 따라 일본 국적을 상실한 대만인은 일본국 정부의 전쟁 피해 보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직 군인·군속 및 그 유족에 대한 장애 연금·유족 연금·은급·조위금뿐만 아니라, 전쟁 중 미지급 급여 및 군사 우편 저금 등의 지급도 일절 이루어지지 않았다.
1974년 말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에서 잔류 일본군으로 발견된 대만인 나카무라 테루오(민족명: 스니온, 한자명: 이광휘)는 대만 원주민 아미족 출신의 의용대원이었다. 그의 발견은 일본 여론에서 "다카사고 의용군"이 화제가 된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급여 미지급 및 보상 부재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일어났고, 1987년 9월 "대만 주민인 전몰자의 유족 등에 대한 조위금 등에 관한 법률", 1988년 5월 "특정 조위금 등의 지급 실시에 관한 법률"이 특별 입법으로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신청이 인정된 경우, 대만인 전 일본군 병사의 유족 및 당사자인 전상 병자에게 1인당 2억엔의 특정 조위금이 지급되게 되었다.[4]
군사 우편 저금은 액면의 120배로 반환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1995년에 지급이 시작되었다. 일부 전 대원들은 이를 수령했지만, 전시 중 거액이었던 평균 잔고 1000JPY을 120배로 해도 12만엔에 불과했고,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수년간 전투의 대가로서는 너무 적은 액수라며 항의하는 전 대원도 있었다.[5] 1996년 6월에는 일본 대사관에 해당하는 타이베이의 교류협회를 전 대원이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6][7]
이미 많은 전 병사들이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보상 문제도 해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4]
4. 2. 역사적 평가와 논쟁
다카사고 의용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만 내에서도 복잡하게 엇갈린다. 일부는 일본 제국에 협력한 부역자로 비판하는 반면, 다른 일부는 용감한 전사로 칭송하기도 한다.전후, 강제로 군사 우편 저금에 예치되어 인출할 수 없게 된 급여 등의 반환 문제와 전사자의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생존자와 유족의 일부는 재판 등을 통해 계속 분쟁을 벌였으나, 2005년 9월 30일 오사카 고등법원의 판결로 패소가 확정되었다. 이 판결은 현지 원주민 미디어도 취재하여 즉시 대만에서 방송되었다.
야스쿠니 신사 합사 문제는 대만 원주민 사회에서 여전히 민감한 문제이다. 야스쿠니 신사가 "일단 합사한 영령은 분할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대만 단결 연맹 야스쿠니 신사 참배 사건에 반발하여 2005년 가오진수메이 등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4. 2. 1. 가오진수메이(高金素梅)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 논란
2005년 6월 14일, 대만의 입법위원(국회의원) 가오진수메이(치와스 아리) 등 60명의 대만 원주민이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 이들은 전몰한 다카사고 의용대 병사들의 영혼을 되찾는 의식인 "환아조령"을 거행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전에 이미 "환아조령"을 야스쿠니 신사에서 거행한 적이 있었고(1회는 야스쿠니 신사도 허가), 참가자들의 방일 일정 대부분이 일본 관광지 순회였다는 점에서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이 사건은 대만 내에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지자들은 대만 원주민의 풍습과 유족의 의지를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 정부의 대응을 비판했다. 반면 반대파들은 이 운동이 대만인 전체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영령 초혼 의식"이 거행되었으므로 지지자들의 주장이 일부 충족되었다고 반박했다.
이 사건은 야스쿠니 신사 문제의 복잡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특히,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충분한 청산 없이 야스쿠니 신사 합사를 강행하는 것은 한국의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볼 때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5. 위령비 문제
대만에서는 전후, 대만 원주민 저우리메이(周麗梅)가 위령비를 건립했고, 현재는 장남인 큐커핑(邱克平), 조카 젠푸위안(簡福源)이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위령비 부지를 제공했던 타이베이 교외의 관광 회사가 신종 폐렴(SARS) 유행으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감하여 도산하면서 유지 관리가 어려워졌고, 위령비는 철거될 위기에 처했다.[9] 이 사태는 산케이 신문 (2004년 7월 4일자 조간 1면)에 "고사고 의용병 위령비 철거 위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2006년 2월 8일, 위령비는 이설되었지만, 17일에 중국시보에서 일본을 찬미하는 비문이라는 보도[10]가 나오면서 반발이 확산되었다. 부지를 제공하고 있는 타이베이 현 정부는 위령비 철거를 명령했고[10][11], 지역 측은 철거에 반대[10]했다. 결국 24일, 강제 철거에 나선 현 정부와 지역 측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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誘導「嚮往文明」之旅:1897年台灣「蕃人內地觀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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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湾の歴史と文化 六つの時代が織りなす「美麗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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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央公論新社
2020-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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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湾人元日本兵の戦後補償問題――積み残された人々の願いに真の「解決」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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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益財団法人ニッポンドットコム
2021-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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捨てられた皇軍兵士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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台湾現住民族と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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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來―高砂義勇兵の記念碑に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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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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交通部観光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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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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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義勇隊慰霊碑の撤去命令 台湾、親日・反日派が対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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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NEWS
2013-12-05
[11]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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