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섭
1. 개요
김지섭은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3년 일본 시설 파괴를 위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다 실패하고, 1924년 도쿄 이중교에서 황거에 폭탄을 투척하려다 체포되었다. 재판에서 사형을 주장했지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1927년 감형되었으나 1928년 옥중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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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어 이름 | 金祉燮 |
|---|---|
| 출생일 | 1884년 7월 21일 |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안동 |
| 사망일 | 1928년 2월 20일 (43세) |
| 사망지 | 일본 제국 천엽형무소 |
| 직업 | 독립운동가 |
| 소속 | 의열단 |
| 주요 활동 | 일본 왕궁에 폭탄 투척 |
| 관련 활동 | 독립운동 |
| 웹사이트 | 김지섭(독립유공자 공훈록) |
| 상훈 |
| 한글 | 김지섭 |
|---|---|
| 한자 | 金祉燮 |
| 가타카나 | 기무 지소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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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김씨 -
김탁환
김탁환은 1968년 경상남도 진해 출생으로,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재해석하는 특징을 가진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평론가이다. -
한국 사람에 관한 -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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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안동시 출신 -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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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달
권정달은 육군 출신 대한민국 정치인으로, 제5공화국에서 활동하며 국회의원을 지냈고, 김영삼 정부 이후에도 정계 활동을 이어갔으며, 한국자유총연맹 총재를 역임했다.
2. 생애
경상북도안동군 출생으로, 학업이 우수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상주시의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김산 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 풍산 김씨 일가인 김응섭(金應燮) 법률 사무소 상주 출장소 직원을 역임했다.
1919년에 조선 독립 운동에 가담하여 1920년에 중화민국으로 망명했다. 1922년 여름에 의열단에 가입하여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12월, 윤병구, 유석현과 함께 백윤화 경성지방법원 판사에게 항일 활동 자금 50의 제공을 요구하여 2을 받기로 약속했지만 밀고당하여 윤병구가 체포되었다.
1923년 1월경, 폭탄 수십 개를 상하이에서 서울로 수송했다. 같은 혐의로 의열단 관계자가 대량 체포되었지만 도망쳐 상하이로 돌아갔다. 12월 20일, 제국의회에 출석하는 일본 정부 고관을 저격하려 상하이를 출발하여 31일,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이때 고바야시 간이치라는 인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공산주의자인 히데시마 고지와 아마기마루 선원 고바야시 간이치라는 자료도 있다. 출입국 시에는 나카무라 히코타로 명의의 위조 명함을 사용했다.)
1924년 1월 3일, 도쿄에 잠입했지만, 제국의회 시작이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계획을 변경하여 황거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을 세웠다. 1월 5일에 이중교에서 황거 침입을 시도했지만, 순사에게 발각되어 폭탄을 던지고, 더욱 침입하려다가 근위병과 마주쳐 폭탄을 2개 더 던지고 도주하려 했다. 3개의 폭탄은 모두 불발되었기 때문에 순사와 근위병은 부상을 입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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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서 그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며 폭탄이 불발된 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지만, 김지섭은 재판에서 "(조선 독립 운동의 순국자가 될 수 있는) 사형 아니면 무죄"를 주장했고, 검사도 사형을 구형했다.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김지섭은 상고하지 않겠다고 주장했지만 변호인에 의해 상고되었지만, 상고는 기각되어 1925년 8월 12일, 무기 징역이 확정되었다. 1927년, 다이쇼 천황 어대장으로 인한 은사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28년 2월 20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사망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독립운동
경술국치 이후 김지섭은 사직하고 귀향하여 김원봉, 곽재기, 김시현 등과 독립 운동을 의논하였다.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 1922년 의열단에 입단하여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폭탄 36개를 상해에서 안동을 거쳐 서울로 반입하려다 황옥(黃鈺)이라는 일본 첩자의 활동으로 일본에 발각되어 동지 3명이 붙잡히고, 김원봉, 장건상 등과 상해로 피신하였다. 이후 1924년 동경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고관들을 저격하고자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출발, 후쿠오카를 거쳐 도쿄에 잠입하였다.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자 일본 궁성의 니주바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어 체포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28년 2월 20일 뇌일혈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3.1. 국내 폭탄 반입
1923년 한국 내 일본 시설 파괴를 위해 폭탄 36개를 상해에서 안동을 거쳐 서울로 반입하려고 하였으나, 황옥(黃鈺)이라는 일본 첩자의 활동으로 일본에 발각되어 동지 3명이 붙잡혔다. 김지섭은 김원봉, 장건상 등과 상해로 피신하였다.
3.2. 이중교 투탄 의거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 1922년 의열단에 입단하여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한국 내 일본 시설 파괴를 위해 폭탄 36개를 상해에서 안동을 거쳐 서울로 반입하려고 하였으나 황옥(黃鈺)이라는 일본 첩자의 활동으로 일본에 발각되어 동지 3명이 붙잡히고 그는 김원봉, 장건상 등과 상해로 피신하였다. 이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한인들이 학살 당한 소식을 듣고 1924년 동경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고관들을 저격하고자, 폭탄 3개를 휴대하고 1923년 12월 20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31일 후쿠오카에 도착하였다. 이때 고바야시 간이치(小林貫一일본어)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고바야시 간이치는 공산주의자인 히데시마 고지와 아마기마루 선원이었다는 자료도 있다.
1924년 1월 3일 도쿄에 잠입하였으나,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궁성(宮城)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지기로 했다. 1월 5일에 왕궁진입을 시도하며 폭탄을 던졌으나, 3개 모두 불발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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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재판과 투옥
1924년 1월 5일 김지섭은 왕궁 진입을 시도하며 폭탄을 던졌으나, 3개 모두 불발되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김지섭은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사람"이며, 폭탄이 불발되었으니 불능범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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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은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천엽형무소(千葉刑務所)로 이감되었다. 1927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20일 뇌일혈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4. 최후
1924년 1월 3일, 도쿄에 잠입했지만, 제국의회 시작이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황거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으로 변경했다. 1월 5일 이중교에서 황거 침입을 시도했지만, 순사에게 발각되어 폭탄을 던졌다. 더 침입하려다가 근위병과 마주쳐 폭탄 2개를 더 던지고 도주하려 했으나, 3개의 폭탄은 모두 불발되어 순사와 근위병은 부상을 입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재판에서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며 폭탄이 불발된 점을 들어 무죄를 주장했지만, 김지섭은 "(조선 독립 운동의 순국자가 될 수 있는) 사형 아니면 무죄"를 주장했고, 검사도 사형을 구형했다. 법원은 1심과 2심 모두 무기 징역을 선고했다. 김지섭은 상고하지 않겠다고 주장했지만 변호인에 의해 상고되었고, 1925년 8월 12일 상고는 기각되어 무기 징역이 확정되었다. 1927년, 다이쇼 천황 사망에 따른 은사로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다.
1928년 2월 2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복역 중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