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컨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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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덩컨 2세는 1094년 잠시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1072년 잉글랜드 왕 윌리엄 1세의 스코틀랜드 침공으로 인질이 되어 잉글랜드에서 성장했으며, 숙부 도널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자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되찾았다. 그러나 잉글랜드에 의존적인 그의 통치에 대한 반발로 즉위 반년 만에 암살당했다. 덩컨 2세는 노섬브리아의 에설레다와 결혼하여 아들 윌리엄 피츠 덩컨을 두었으며, 덩컨 2세의 후손들은 스코틀랜드 왕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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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컨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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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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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알바의 왕 |
재위 기간 | 1094년 5월 - 1094년 11월 |
이전 통치자 | 도날 3세 |
다음 통치자 | 도날 3세 |
출생 | 1060년경 |
사망 | 1094년 11월 12일 |
사망 장소 | 스코틀랜드, 먼다인즈 |
매장지 | 스코틀랜드, 던펌린 수도원 |
배우자 | 노섬브리아의 에셀레다 |
자녀 | 윌리엄 막 돈카다 |
왕가 | 덩켈드 가 |
왕조 | 아살 가 |
아버지 | 말 콜룸 막 돈카다 |
어머니 | 이잉가보르그 |
2. 생애
덩컨 2세는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 3세의 아들로, 어머니는 오크니가 사가에 따르면 잉기비오르그 핀스도티르이다.[2]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스코틀랜드의 덩컨 1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1072년, 아버지 말콤 3세가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에게 패배한 후, 덩컨은 런던으로 보내져 인질 생활을 하며 앵글로-노르만 궁정에서 성장했다.[17][18] 그는 노르만식 기사 교육을 받고 윌리엄 1세와 그의 아들 윌리엄 2세의 궁정에서 활동했다.[7][8]
1093년, 아버지 말콤 3세와 이복동생 에드워드가 알니크 전투에서 전사하고 숙부 도날드 3세가 왕위를 찬탈하자, 덩컨은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1094년 5월, 그는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진격하여 도날드 3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19]
그러나 덩컨 2세의 통치는 잉글랜드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즉위한 지 6개월 만인 1094년 11월, 메언즈 지방의 몬다인즈에서 도날드 3세의 사주를 받은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20] 그의 유해는 던펌린 수도원에 매장된 것으로 전해진다. 덩컨 2세 사후 스코틀랜드는 다시 도날드 3세와 덩컨의 이복동생 에드먼드의 공동 통치 시기를 거쳤으나, 1097년 또 다른 이복동생 에드거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20]
덩컨 2세는 노섬브리아의 고스패트릭의 딸인 에설레다와 결혼하여 아들 윌리엄 피츠 덩컨을 두었다.
2. 1. 초기 생애
덩컨 2세의 어머니는 오크니가 사가에 따르면 말콤 3세의 첫 부인인 잉기비오르그 핀스도티르이다. 그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스코틀랜드의 덩컨 1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주요 연대기 기록에서는 잉기비오르그에 대한 언급이 드물다. 이 때문에 그녀가 첩이었거나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결혼 관계였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덩컨을 말콤 3세의 사생아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후대에 스코틀랜드의 성 마가렛을 통해 왕위를 계승한 후손들이 덩컨의 후손인 메크 유일리엄의 왕위 계승 정당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선전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2]1072년,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여 말콤 3세가 패배하자, 덩컨은 런던으로 보내져 인질이 되었다.[17][18] 얼스터 연대기는 이 사건을 "프랑스인들(노르만족)이 스코틀랜드로 가서 스코틀랜드 왕의 아들을 인질로 데려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말콤 3세가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왕족 에드거 애설링을 보호하고[3] 그의 누이인 마가렛과 결혼하면서[3] 윌리엄 1세와 갈등을 빚었기 때문에 발생했다.[4] 말콤은 윌리엄 1세가 노섬브리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을 자신의 영토인 컴브리아와 로디언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을 수 있다. 1070년, 말콤은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하며 이에 대응했다.[5]
결국 1072년, 윌리엄 1세는 스코틀랜드 남부를 침공했고, 말콤 3세는 에버네티에서 윌리엄 1세와 만나 에버네티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 말콤은 잉글랜드 내 영토에 대해서는 윌리엄에게 복종했지만, 스코틀랜드 왕국의 독립성은 유지했다. 조약의 정확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에드거 애설링을 스코틀랜드 궁정에서 추방하고 장남인 덩컨을 인질로 보내는 조건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
덩컨은 윌리엄 1세의 앵글로-노르만 궁정에서 자라면서 그곳의 문화, 교육, 제도에 익숙해졌다. 그는 노르만 방식의 기사로 훈련받았으며 윌리엄 1세의 군사 원정에도 참여했다.[7] 1087년 윌리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 로버트 커토즈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자, 우스터의 플로렌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버트는 덩컨을 인질 상태에서 풀어주고 공식적으로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이후 덩컨은 노르망디 공국을 떠나 로버트의 동생이자 새로운 잉글랜드 국왕인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의 궁정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8] 당시 여러 아들을 두었던 아버지 말콤 3세는 덩컨을 스코틀랜드로 데려오려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덩컨이 없는 동안 그의 이복동생인 에드워드가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 덩컨은 15년간의 잉글랜드 생활과 그곳에서 배운 문화를 바탕으로 개인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동시에, 언젠가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스코틀랜드의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7]
1092년, 말콤 3세와 윌리엄 2세 사이의 적대 관계가 다시 심화되었다. 윌리엄 2세는 컴브리아의 주요 도시인 칼라일을 점령하고 1093년에는 칼라일 성 건설을 시작했다. 이에 말콤 3세는 노섬벌랜드로 마지막 군사 원정을 이끌며 반격에 나섰다.[8] 그러나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1093년 11월 13일 알니크 근처에서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의 군대에 매복 공격을 받아 알니크 전투에서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전사했다.[9] 이 소식을 들은 왕비 마가렛 역시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10]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 상태에서 말콤 3세의 동생인 스코틀랜드의 도널드 3세(돔날 반)가 왕위를 차지했다. 새로운 왕은 말콤과 마가렛 시대에 스코틀랜드 궁정에 들어왔던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을 몰아내며 토착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8] 이러한 상황은 잉글랜드에 있던 덩컨에게 왕위를 주장할 명분을 주었고, 그는 자신을 후원하는 윌리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지원을 받아 삼촌 도널드 3세에게 도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2. 2. 왕위 계승 및 통치
1072년 잉글랜드의 왕 윌리엄 1세가 스코틀랜드를 침공했을 때, 던컨은 아버지가 패배하면서 인질로 런던으로 보내졌고, 성인이 된 후에도 잉글랜드에 머물렀다.[17][18]1093년, 아버지 맬컴 3세와 이복동생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침공 중 전사하자, 숙부인 도날드 3세가 왕위를 차지했다. 도널드 3세는 전임자 맬컴 3세 정권과 연관된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의 특정 토지 소유주와 교회 관리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던컨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었던 세력과 손을 잡고 왕위 계승을 위한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확보했다. 당시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는 직접적인 개입은 꺼렸지만, 노르만 군대의 일부를 던컨에게 빌려주었다. 던컨은 또한 잉글랜드의 지역 남작들과 도시들로부터 추가적인 징집병을 모집했으며, 토지와 특권, 영지와 작위를 약속하며 지지를 얻었다.[11][19]
1094년까지 던컨은 용병 기사와 보병으로 구성된 상당한 군대를 확보했다. 이들 중 다수는 던컨이 고스패트릭 가문과 연관이 있었기 때문에 노섬브리아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여름, 던컨은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도널드 3세는 이에 맞서 자신의 지지자들과 군대를 동원했지만, 6월에 벌어진 초기 전투에서 던컨이 승리했다. 도널드 3세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로 후퇴해야 했고, 던컨은 스코운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권력 기반은 포스 강 이남 지역에 한정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앵글로-노르만 동맹국의 군사력에 크게 의존했다.[11][19]
외국 군대의 지속적인 주둔은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반감을 일으켰다. 던컨 자신도 생애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냈기에 외부인으로 여겨졌다. 즉위 몇 달 만에 토지 소유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노르만 군대에 대항하여 봉기했다. 계속되는 습격에 점령군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던컨은 반군과 협상하여 왕위를 겨우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반군의 요구에 따라 대부분의 외국인 지지자들을 잉글랜드로 돌려보냈다.[11]
그러나 지원군을 돌려보낸 결정은 곧 역효과를 낳았다. 로우랜드의 반란은 잠잠해졌지만, 도널드 3세는 그 사이 군대와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시 구축했다. 1094년 11월, 도널드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우랜드로 진격하여 조카 던컨과 대치했다. 11월 12일, 즉위한 지 7개월도 채 되지 않은 던컨은 전투 중 매복 공격을 받아 암살당했다.[11][20]
던컨 2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인시팰른 연대기는 "말 콜룸[맬컴]의 아들 돈카드[던컨], 알바의 왕이 돈날[도널드], 돈카드[던컨]의 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라고 기록하며, 얼스터 연대기는 "스코틀랜드 왕 말 콜룸의 아들 돈카드는 그의 형제인 돈날과 에드먼드에 의해 배신당하여 살해되었다"라고 전한다. 던컨에게는 그런 이름의 형제가 없었으므로, 이는 숙부 도널드와 이복 형제 에드먼드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후대의 기록에서는 메른의 말 페테르(Malpeder)라는 귀족이 실제 살해자로 지목되기도 한다.[12]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던컨이 "삼촌 도널드의 악행으로 살해되었다"라고 기록했고, 우스터의 플로렌스는 살해 사실만 언급했다. 13세기 기록인 ''픽트족과 스코트족의 연대기''에는 던컨이 도널드의 배신으로 말 페테르(Malpeder)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며, 14세기 존 오브 포든은 "메르니 백작에 의해 몬테킨에서 ... 삼촌 도널드의 계략으로 살해되었다"는 보다 구체적인 기록을 남겼다.
던컨 2세의 유해는 던펌린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아이오나 섬에 묻혔다는 상반된 기록도 존재한다. 그의 사후 스코틀랜드는 복위한 도널드 3세와 던컨의 이복동생 에드먼드의 공동 통치 체제가 되었으나, 1097년 던컨의 또 다른 이복동생 에드거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도널드 3세와 에드먼드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20]
2. 3. 결혼과 자녀
덩컨은 노섬브리아의 고스패트릭의 딸인 에설레다와 1090년에 결혼했다. 이 결혼은 《크로니콘 쿰브리아》에 기록되어 있다. 둘 사이에는 외아들 한 명을 두었다.- 윌리엄 피츠 덩컨 (1090/1094년경 ~ 1147년): 모레이 백작
3. 유산과 평가
역사가 윌리엄 포브스 스킨은 도널드 3세와 덩컨 2세 사이의 갈등을 단순히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계승 방식인 탄니스티와 앵글로-색슨족의 세습 군주제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로 해석했다. 이 관점에 따르면, 도널드 3세는 켈트족의 관습에 따라 정당한 계승자였던 반면, 덩컨과 그의 형제들은 세습 원칙에 따라 왕위를 주장했다. 도널드는 스코틀랜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게일족의 지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며, 이들은 말콤 3세 시대에 유입된 앵글로-색슨 세력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말콤 3세의 후손들은 사실상 혈통 외에는 모든 면에서 앵글로-색슨화되었기에, 그들의 왕위 주장은 게일족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스킨은 이 갈등에 두 명의 외국 군주가 개입했다고 보았다. 노르웨이의 마그누스 3세는 함대를 이끌고 아일랜드해에서 활동하며 제도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는데, 그와 도널드 3세 사이에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암묵적인 동맹 관계를 시사한다. 즉, 마그누스는 도널드의 왕위를 인정하고, 도널드는 해당 지역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권리 주장을 포기했을 수 있다. 반면, 덩컨 2세는 명백히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았는데, 윌리엄 2세는 그에게 상당한 규모의 잉글랜드 및 노르만 군대를 빌려주었다.
덩컨 2세의 통치는 매우 짧았으며, 결국 자신의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게일족의 시각에서 그는 외세의 힘을 빌린 찬탈자였다. 그의 사후 이복동생인 에드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의 군사적 개입 덕분이었으며, 에드거 역시 대부분의 게일족에게 반감을 샀다. 에드거의 승리는 스코틀랜드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후 스코틀랜드 왕국에 앵글로-색슨식 법률, 제도, 정부 형태가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재위 1124-1153)가 본격적으로 앵글로-노르만 제도를 도입하기 이전에 이미 스코틀랜드가 "앵글로-색슨 왕국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벤자민 허드슨은 덩컨 2세가 자신의 외국 군대를 돌려보낸 것을 "치명적인 행보"였다고 평가하며, 이로 인해 스스로 지지 기반을 허물었다고 분석했다. 허드슨은 말콤 3세와 성 마가렛의 직계 후손들이 13세기까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그들 중 누구도 덩컨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그는 에드거가 10년간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정치적 후원자인 윌리엄 2세와 헨리 1세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이었으며, 이들의 자원이 도널드 3세와 그 지지자들의 힘을 압도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13]
16세기 역사가 조지 뷰캐넌은 도널드 3세가 말콤과 마가렛을 추종하던 선량한 이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국민들이 덩컨을 불러들였다고 기록했다. 뷰캐넌은 덩컨을 뛰어난 군인으로 평가하면서도, 평화 시 통치에는 미숙했고 거만한 태도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고 평가했다.
3. 1. 앵글로-노르만 문화의 영향
덩컨은 1072년 정복왕 윌리엄에게 인질로 보내졌다. 얼스터 연대기는 "프랑스인들이 스코틀랜드로 가서 스코틀랜드 왕의 아들을 인질로 데려갔다"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프랑스인은 노르만족을 의미한다. 이는 아버지 말콤 3세와 윌리엄 사이의 갈등 때문이었다. 잉글랜드 왕족 에드거 애설링이 1068년 노르만족을 피해 스코틀랜드로 망명했고,[3] 말콤 3세는 윌리엄에 맞서는 그를 지원했다.[4] 1071년 말콤이 에드거의 누이 마가렛과 결혼하면서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3] 잉글랜드의 노르만 정복 과정에서 윌리엄이 노섬브리아를 장악하려 하자, 말콤은 자신의 영토인 컴브리아와 로디언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1070년, 말콤은 잉글랜드 북부를 공격하며 대응했다.[5]스코틀랜드 왕가와 웨섹스의 연대, 그리고 말콤의 잉글랜드 북부 공격은 윌리엄에게 큰 위협이었다. 윌리엄은 1072년 스코틀랜드 남부를 침공했고, 말콤은 애버네디에서 윌리엄과 만나 애버네디 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애버네디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서 말콤은 잉글랜드 내 영토(컴브리아, 노섬브리아)에 대해서는 윌리엄에게 복종했지만, 스코틀랜드 왕국 자체에 대해서는 복종하지 않았다. 정확한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조약 조건 중 하나로 에드거 애설링이 스코틀랜드 궁정을 떠나야 했을 수 있다. 말콤의 장남 덩컨을 인질로 보내는 것 역시 조약의 조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6]
덩컨은 윌리엄 1세의 앵글로-노르만 궁정에서 성장하며 그 문화와 교육, 제도에 익숙해졌다. 그는 노르만 방식의 기사 훈련을 받았고, 윌리엄 1세의 군사 원정에도 참여했다.[7] 1087년 윌리엄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장남 로버트 커토즈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었다. 우스터의 플로렌스에 따르면, 로버트는 덩컨을 풀어주고 기사로 정식 임명했다. 덩컨은 노르망디 공국을 떠나 로버트의 동생인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의 궁정으로 갔다.[8] 당시 아들이 많았던 아버지 말콤 3세는 덩컨을 다시 데려오려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덩컨이 없는 동안 이복동생인 에드워드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5년간 노르만 궁정 생활에 익숙해진 덩컨은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 그 문화를 따르기로 했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언젠가 스코틀랜드 왕위에 오르겠다는 생각은 계속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7]
1092년, 말콤 3세와 윌리엄 2세 사이의 갈등이 다시 불거졌다. 윌리엄 2세는 컴브리아의 주요 거점인 칼라일을 점령하고 1093년 칼라일 성을 짓기 시작했다. 이에 말콤 3세는 노섬벌랜드를 공격하며 마지막 원정에 나섰다.[8] 그러나 북쪽으로 돌아가던 중, 1093년 11월 13일 알니크 근처에서 노섬브리아 백작 로버트 드 모브레이의 매복에 걸려 알니크 전투 중 살해당했다. 그는 밤버 성의 관리인 아르킬 모렐에게 죽임을 당했다.[9] 아들 에드워드 역시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왕비 마가렛은 아들 에드거에게 남편과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10] 이 권력 공백을 틈타 말콤의 동생인 스코틀랜드의 도널드 3세(돔날 반)가 왕위를 차지했다. 새로운 왕 도널드 3세는 말콤과 마가렛 시대에 궁정에 들어왔던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을 몰아내며 스코틀랜드 토착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8] 이러한 상황 변화는 덩컨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기회를 주었다. 그는 후원자인 윌리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그의 지지를 얻어 삼촌 도널드 3세에게 도전하게 된다.
3. 2. 게일족의 반발과 왕위 계승 분쟁
1093년, 아버지 말콤 3세와 이복 동생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침공 중 알니크 전투에서 전사하자, 권력 공백이 발생했다.[9][10] 이 틈을 타 말콤 3세의 동생인 도널드 3세 (돔날 반)가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말콤과 마가렛 왕비 시절 궁정에 들어왔던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을 추방하며 토착 귀족들의 지지를 얻었다.[8]이러한 상황은 잉글랜드에 머물던 덩컨 2세에게 왕위를 주장할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윌리엄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군사적 지원을 약속받았다.[17][18] 도널드 3세는 전임 정권과 연관된 스코틀랜드 로우랜드의 일부 지주와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는데, 덩컨은 이 점을 이용하여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었던 세력과 동맹을 맺고 군사 및 재정 지원을 확보했다. 윌리엄 2세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노르만 군대 일부를 지원했으며, 덩컨은 잉글랜드 북부 지역 남작들과 도시들로부터 추가 병력을 모집했다.[11]
1094년 초여름, 덩컨은 용병 기사와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 다수는 그가 고스패트릭 가문과 연관이 있었기에 노섬브리아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덩컨은 도널드 3세의 군대를 격파했고, 도널드는 스코틀랜드 하이랜드로 후퇴했다. 덩컨은 스코운에서 왕위에 올랐으나[19], 그의 권력 기반은 포스 강 이남 지역에 한정되었으며, 앵글로-노르만 동맹군의 주둔에 크게 의존했다.[11]
그러나 외국 군대의 지속적인 주둔과 해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덩컨 2세 자신에 대한 반감은 스코틀랜드 귀족과 주민들 사이에서 커져갔다. 즉위 몇 달 만에 노르만인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고, 덩컨은 반군과의 협상을 통해 대부분의 외국 군대를 잉글랜드로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겨우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11]
외국 군대의 철수는 곧바로 역효과를 낳았다. 도널드 3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재정비하고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졌다. 1094년 11월, 도널드는 군대를 이끌고 로우랜드로 진격하여 덩컨과 대치했다. 결국 11월 12일, 덩컨 2세는 즉위 7개월도 채 되지 않아 메언즈(Mearns) 지방의 몬다인즈(Mondynes)에서 매복 공격을 받아 암살당했다.[11]
덩컨 2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다. 얼스터 연대기는 그가 동생들인 도널드(삼촌 도널드 3세를 의미)와 에드먼드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한다.[12]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는 "삼촌 도널드의 악행으로 살해되었다"고만 언급하며,[12] 후대의 기록인 존 오브 포든의 연대기(14세기)는 "메언즈 백작 말 페테르(Malpeder of Mearns)가 몬테킨(Monthechin, 몬다인즈)에서 삼촌 도널드의 계략으로 살해했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한다.[12]
덩컨 2세의 유해는 던펌린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지나, 아이오나 섬에 묻혔다는 상반된 기록도 존재한다. 그의 사후 스코틀랜드 왕위는 복위한 도널드 3세와 덩컨의 이복 동생 에드먼드가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1097년, 덩컨의 또 다른 이복 동생인 에드거가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도널드 3세와 에드먼드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20]
3. 3. 메이크 윌리엄 가문의 등장
덩컨 2세의 아들인 윌리엄 피츠 덩컨은 그의 이복 형제인 알렉산더 1세와 데이비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인물이었다. 윌리엄은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의 인정된 상속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14] 그의 후손인 메이크 윌리엄 가문은 후기 스코틀랜드 왕들에 대항하여 다양한 반란을 주도했다. 마지막 남은 메이크 윌리엄 가문의 일원, 즉 질 에스코이프 또는 그의 아들 중 한 명의 어린 딸은 1229년 또는 1230년에 처형되었다. 기록에는 "''[T] 같은 맥-윌리엄의 딸은, 어머니의 자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파 자치구에서, 시장 광장에서 공공 고지자에 의해 포고된 후 처형되었다. 그녀의 머리는 시장 십자가의 기둥에 부딪혀 뇌가 쏟아졌다''"고 전해진다.[15]덩컨 2세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헌장은 티닝엄과 그 주변 지역을 더럼의 수도승들에게 부여하는 내용이다. 이 헌장의 증인 중에는 "Uuiget"이라는 인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이름은 아마도 고대 영어 "Wulfgeat"의 렌더링으로, 둠스데이 북에서는 "Uviet"로도 렌더링되었다. 이 이름은 잉글랜드 미들랜즈와 잉글랜드 남부에서 인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기 요크셔에는 그 이름의 주목할 만한 토지 소유자가 적어도 한 명 있었다.[16]
G. W. S. 배로우는 이 "Uuiget"이 실제로 트레버렌(현대 더딩스턴)의 영주인 화이트 유비에트(White Uviet)라고 주장한다. 유비에트는 또한 에드거(재위 1097–1107), 알렉산더 1세(재위 1107–1124), 데이비드 1세(재위 1124–1153) 왕들의 헌장에 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유비에트(Uviet(h)s), 에비오트(Eviot(h)s), 오비오스(Ovioths) 등으로 다양하게 알려진 토지 소유 왕조를 형성했으며, 특정 가계는 17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배로우는 화이트 유비에트가 원래 윌리엄 2세의 궁정에서 야심 찬 기사로서 덩컨 2세의 동반자로 스코틀랜드에 들어왔고, 두 사람은 비슷한 배경을 공유했다고 이론화한다. 덩컨의 이복 형제들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지원은 그들이 덩컨이 형성했던 지지자들의 서클을 물려받았음을 시사한다.[16]
4. 현대적 해석
덩컨 2세의 짧은 통치와 죽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왕위 계승 갈등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포브스 스킨은 이 갈등을 전통적인 게일족의 탄니스티 관습과 앵글로-색슨족의 세습 군주제 사이의 충돌로 보았다. 또한 벤자민 허드슨과 같은 역사가들은 덩컨 2세의 정치적 판단과 외세(특히 잉글랜드)와의 관계 설정이 그의 운명과 이후 스코틀랜드 역사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4. 1. 윌리엄 포브스 스킨의 해석
윌리엄 포브스 스킨은 도널드 3세와 덩컨 2세 사이의 갈등을 단순히 개인 간의 권력 다툼이 아닌, 스코틀랜드 사회 내부의 깊은 구조적 문제, 즉 "켈트족과 작센족의 상속법" 사이의 충돌로 해석했다. 이는 전통적인 게일족의 계승 방식인 탄니스티(가장 능력 있는 친족이 왕위를 계승하는 방식)와 앵글로-색슨족의 영향으로 들어온 세습 군주제(장자 상속 원칙) 사이의 대립이었다. 스킨에 따르면, 도널드 3세는 탄니스티 원칙에 따라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으며, 당시 스코틀랜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게일족의 지지를 받았다. 게일족 지지자들은 말콤 3세 치하에서 스코틀랜드로 유입된 많은 앵글로-색슨족과 그들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덩컨 2세와 그의 형제들은 세습 군주제에 따라 왕위를 주장했으며, 이들은 "출생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앵글로-색슨화된 인물로 여겨져 게일족에게는 불안과 반감을 일으켰다.스킨은 이 갈등에 두 명의 외국 군주가 개입했다고 보았다. 노르웨이의 마그누스 3세는 당시 아일랜드해에서 활동하며 제도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려 했다. 도널드 3세와 마그누스 3세 사이에 별다른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마그누스가 도널드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는 대신 도널드는 제도 왕국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모든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는 식의 암묵적인 동맹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한편, 덩컨 2세는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로부터 "많은 수의 잉글랜드인과 노르만족 군대"를 지원받아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 이는 덩컨 2세의 왕위 계승 시도가 외부 세력, 특히 잉글랜드의 힘에 크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덩컨 2세의 통치는 매우 짧았으며, 결국 자신의 백성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그가 스코틀랜드 내부에서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게일족의 관점에서 그는 외세의 힘을 빌려 왕위를 빼앗은 찬탈자에 불과했다. 그의 이복동생인 스코틀랜드의 에드거 역시 윌리엄 2세의 군사적 개입 덕분에 겨우 왕위에 오를 수 있었고, 그의 통치 역시 대부분의 게일족으로부터 반발을 샀다. 그러나 에드거의 승리는 스코틀랜드 왕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앵글로-색슨식 법률, 제도, 정부 형태가 스코틀랜드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이후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1124-1153년 재위)가 앵글로-노르만인 제도를 도입하기 이전에 스코틀랜드가 "앵글로-색슨 왕국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스코틀랜드 역사학자 벤자민 허드슨은 ''스코틀랜드 문학의 에든버러 역사''에서 덩컨 2세가 자신을 도왔던 외국 군대를 돌려보내는 "치명적인 행보"를 보임으로써 스스로 지지 기반을 약화시켰다고 분석했다. 허드슨은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와 스코틀랜드의 성 마가렛의 직계 후손들이 13세기까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그들 중 누구도 덩컨 2세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외부(특히 잉글랜드)의 지원을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에드거가 10년 동안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정치적 후원자인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이었으며, 이들의 자원은 스코틀랜드의 도널드 3세와 그 지지자들의 힘을 훨씬 능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13]
4. 2. 벤자민 허드슨의 해석
''스코틀랜드 문학의 에든버러 역사: 콜룸바부터 연합까지, 1707년까지''에는 벤자민 허드슨이 쓴 왕권의 역사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허드슨은 덩컨 2세가 자신의 외국 군대를 돌려보내는 "치명적인 행보"를 통해 스스로 통치를 망쳤으며, 이로 인해 지지 기반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말콤 3세와 스코틀랜드의 성 마가렛의 직계 남성 후손들이 13세기까지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덩컨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허드슨은 스코틀랜드의 에드거가 10년 동안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치적 후원자인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지속적인 지원 덕분이며, 이들의 자원이 스코틀랜드의 도널드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의 자원을 훨씬 능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13]5. 가계도
덩컨 2세는 노섬브리아의 고스패트릭의 딸인 노섬브리아의 에설레다와 혼인하여 외아들 윌리엄 피츠덩컨을 두었다.
5. 1. 배우자
덩컨은 노섬브리아의 고스패트릭의 딸인 에설레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크로니콘 쿰브리아》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외아들인 윌리엄 피츠 덩컨을 두었다.5. 2. 자녀
덩컨 2세는 1090년 노섬브리아의 고스패트릭의 딸인 노섬브리아의 에설레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크로니콘 쿰브리아》에 기록되어 있다. 둘 사이에는 외아들 한 명을 두었다.- 윌리엄 피츠덩컨 (1090/4년 ~ 1147년): 모레이 백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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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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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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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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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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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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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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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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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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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11]
논문
[12]
웹사이트
Annals of Inisfallen, AI1094.4. Online translation, published by the Corpus of Electronic Texts
http://www.ucc.ie/ce[...]
[1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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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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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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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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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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