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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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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부(東部)는 후한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혀 여러 경서에 통달하고 도참을 배웠으며, 여러 차례 중앙에서 불려갔으나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영제 때 시중에 임명되었고, 유언에게 낙양의 혼란과 익주의 중요성을 말하여 유언이 익주목으로 부임하게 했으며, 자신도 촉군속국도위가 되어 촉으로 들어갔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82세에 사망했으며, 훗날 유비가 익주에서 황제가 되었다. 하진은 동부를 칭찬하며 유종이라 불렀고, 익주에서는 변론에 능하여 지지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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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동부(董扶)
이칭자(字)는 무안(茂安)
출생지광한군 면죽
사망 원인병사 (노환, 82세)
국적후한
경력
주요 경력시중 → 촉군속국도위

2. 생애

후한 말의 학자이자 관리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혀 《구양상서(歐陽尙書)》 등 여러 경서를 통달하였고 낙양의 태학에서 유학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가르쳐 명성을 얻었으나, 여러 차례 중앙 정부의 부름과 추천에도 불구하고 을 핑계로 거절하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1]

영제 때 대장군 하진의 천거(혹은 초빙)를 받아 시중(侍中)에 임명되어 조정에 출사하였으며, 유학의 종장(儒宗)으로 불리며 두터운 예우를 받았다. 188년(중평 5년), 태상 유언이 조정의 혼란을 피해 교지로 가려 하자, 동부는 유언에게 은밀히 '낙양은 장차 혼란에 빠질 것이며, 익주에는 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조언하였다. 이 조언을 받아들인 유언은 스스로 익주 으로 부임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고, 동부 역시 촉군속국도위(蜀郡屬國都尉) (혹은 촉군도위)에 임명되어 유언과 함께 익주로 향했다.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자, 동부는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동부의 말대로 익주에서는 유비황제로 즉위하게 된다.[2]

2. 1. 초기 생애와 학문

어려서부터 학문을 익혀 《구양상서》(歐陽尙書) 등 여러 경서를 통달하였고 낙양의 태학에서도 유학하였다. 고향 친구인 임안(任安)과 함께 양후(楊厚)에게서 도참을 배웠다. 고향으로 돌아와 배운 것을 가르치니 멀리서도 제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중앙 정부로부터 열 차례나 부름을 받았고, 수레도 세 번이나 보내왔으며, 현량방정(賢良方正), 박사(博士), 유도(有道) 등으로도 추천되었지만 모두 을 핑계로 거절했다. 영강 원년(167년)에 일식이 일어나자 현량하고 방정한 인물을 천거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는데, 이때 좌풍익 조겸 등이 동부를 추천했으나 역시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관직에 나아가라는 권유를 계속해서 거절했다.[1]

익주에서는 토론에 매우 능하여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말솜씨가 워낙 뛰어나 동부가 나타나면 논쟁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송곳처럼 논쟁을 꿰뚫는다'는 의미로 trìzhī|치지중국어라고 불렀다. 훗날 제갈량이 동부의 장점에 대해 묻자, 진밀은 "동부는 사소한 선행이라도 반드시 칭찬하고, 작은 악행이라도 반드시 비판합니다."라고 평가했다.

2. 2. 관직 생활과 유언과의 관계

영강 원년(167년)에 일식이 일어나 현량방정(賢良方正)의 선비를 천거하라는 조서가 내려졌을 때, 좌풍익 조겸 등에게 천거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앙 정부의 부름과 현량방정, 박사(博士), 유도(有道) 등의 추천이 있었으나 모두 질병을 핑계로 거절했다.[1]

영제 시대에 대장군 하진의 천거(혹은 초빙)를 받아 입조하여 시중(侍中)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유학의 종장(儒宗)이라 불리며 매우 두터운 예우와 존경을 받았다. 188년(중평 5년), 당시 태상이었던 유언이 조정 내의 혼란을 피하려 교지로 가기를 희망하자, 동부는 개인적으로 유언에게 '낙양은 어지러워질 것이고 익주에는 천자의 기운이 있다'라고 조언했다. 『후한서』에는 "훗날 유비에서 천자를 칭했으니, 모두 동부의 말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 이를 들은 유언은 스스로 익주 으로 부임하기를 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동부 역시 촉군속국도위(蜀郡屬國都尉) (혹은 촉군도위)에 임명되어 유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자, 동부는 관직을 버리고 은퇴했다. 이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익주에서는 토론에 매우 뛰어나 동부가 나타나면 담론이 마무리될 정도였기에 '치지'(緻知)라고 불렸다. 제갈량이 동부의 장점에 대해 묻자, 진밀은 "동부는 사소한 선(善)도 칭찬하고, 사소한 악(惡)도 깎아내립니다"라고 평가했다.

2. 3. 은퇴와 죽음

영제 시대에 대장군 하진의 추천으로 시중(侍中)에 임명되어 매우 두터운 대우를 받았다. 188년(중평 5년), 조정 내의 혼란을 피하려던 태상 유언에게 개인적으로 "낙양은 어지러워질 것이고 익주천자의 기운이 있다"고 조언했다. 『후한서』에는 훗날 유비에서 천자를 칭했으니, 이는 모두 동부의 말과 같았다고 기록되어 있다.[2] 유언은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익주 가 되기를 청하여 허락받았다. 동부는 촉군도위에 임명되어 유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89년, 영제가 붕어하고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자 벼슬을 버리고 은퇴했다. 이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익주에서는 토론에 능하여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말솜씨가 뛰어나 동부가 나타나면 담론이 끝나버렸기 때문에 "담론을 그치게 하는 자"라는 뜻의 '치지'(致知|치지중국어)라고 불렸다. 또한, 제갈량이 동부의 장점에 대해 묻자 진밀은 "동부는 사소한 선(善)도 칭찬하고, 사소한 악(惡)도 깎아내립니다"라고 평했다.

3. 평가

하진은 동부를 천거하면서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같은 덕(德), 공자의 기질, 초연수(焦延壽)와 동중서처럼 재변을 해소하고 정상을 회복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평가 덕분에 조정에 몸담고 있을 때 유종(儒宗)이라 불렸다. 익주에서는 동부의 변론 능력이 뛰어나,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였기에 지지(至止)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진밀제갈량에게 동부에 대해 ‘아주 작은 함이라도 반드시 칭찬하고, 아주 작은 함이라도 반드시 비판했다’고 전했다. 당시 명성은 임안과 비슷했으며, 주서(周舒)가 그 다음으로 평가받았다.[3]

참조

[1] 서적 三国志』巻31劉焉伝注引[[陳寿]]『益部耆旧伝
[2] 위키문헌 『後漢書』巻82下方術伝
[3] 서적 삼국지》42권 촉서 제12 [[주군]](周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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