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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산섬 전역 (19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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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둥산섬 전역 (1953년)은 1953년 7월, 중화민국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둥산섬을 탈환하려다 실패한 군사 작전이다. 1949년 국공 내전 이후 중국 대륙에서 밀려난 국민당은 둥산섬을 거점으로 삼아 본토 공격의 발판을 마련하려 했으나, 공산당의 신속한 증원과 국민당군의 정보 부족, 병력 및 화력 열세로 인해 실패했다. 이 전투는 국민당이 중국 대륙 연안에 대해 마지막으로 시도한 대규모 상륙 작전이었으며, 이후 국민당은 소규모 기습 작전만을 수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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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산섬 전역 (1953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국공 내전
날짜1953년 7월 16일 – 1953년 7월 18일
장소둥산 현, 푸젠 성, 중국
결과공산주의 승리
교전 세력
지휘관
지휘관 (중화민국)후련
지휘관 (중국)예페이
유메이야오
병력 규모
병력 (중화민국)
  • 초기 병력:
  • 8,000+ 보병
    2,000 공수부대
병력 (중국)
  • 초기 병력:
  • 1,200 민병대
    100-200 해병대
  • 증원군:
  • 9,000+ 보병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중화민국)2,664+ 전사
715 포로
전차 2대 파괴
상륙함 3척 침몰
항공기 2대 손실
다수 부상
사상자 (중국)1,250+ 전사

2. 배경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중화민국 정부1949년 대만으로 이전하였으나, 푸젠성저장성 연안의 일부 섬들을 거점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군사적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저우산 군도, 하이난섬 등이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가고 세력이 위축되었지만, 동중국해 연안에서의 해상 게릴라 전술 등으로 중국 공산당에 대항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정권의 관심이 한반도로 쏠리면서 타이완 해협에서의 군사 활동이 중단되었다. 중화민국은 이를 대륙 반격의 기회로 삼아 여러 차례 군사 작전을 시도했으며, 특히 1952년 난르다오 전투에서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중화민국은 3년 전인 1950년 둥산섬 전역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빼앗긴 둥산섬을 탈환하여 중국 대륙 공격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국민당 사령관 후롄은 약 1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둥산섬 공격을 준비했다. 초기에는 섬을 점령하여 본토 공격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군 지휘부 내에서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제기되면서 정치적 선전 효과와 사기 진작을 위해 섬을 단기간 점령한 후 신속히 철수하는 것으로 목표가 일부 조정되었다. 한편, 둥산섬을 방어하던 중국 인민해방군은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현지 지형과 방어 시설을 활용하여 결사 항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 1. 국공 내전과 중화민국의 상황

국공 내전의 결과, 1949년 중국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중국 대륙에서의 통치권을 상실하고 대만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중국 남서부의 산악 지대 및 동남 연안의 섬들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1950년에 들어서면서 저우산 군도하이난섬이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가고, 중국 남서부에서도 인민해방군이 미얀마 국경 지대로 진공하면서 중화민국 정부의 영역은 크게 줄어들었다. 결국 중화민국은 대만푸젠성저장성 연안의 일부 섬들(진먼섬, 다천 섬, 이장산 섬)만을 유지하게 되었고, 동중국해 연안에서 해상 게릴라 전술로 공산당에 대항하는 상황에 놓였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정권은 한반도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서 타이완 해협에서의 군사적 압박을 중단했다. 이를 기회로 삼아 중화민국 정부는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며, 1952년에는 난르다오 전투에서 상륙 작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2. 2. 한국 전쟁과 국제 정세

국공 내전의 결과, 1949년 중국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 정부는 중국 대륙에서의 통치권을 잃고 대만으로 이전했다. 하지만 중국 남서부의 산악 지대와 동남 연안의 섬들에서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군사 작전을 계속했다. 1950년에 들어서면서 저우산 군도하이난섬이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가고, 남서부에서도 인민해방군이 미얀마 국경 지대로 진격하면서 국민당의 세력은 더욱 위축되었다. 결국 국민당은 대만푸젠성, 저장성 연안의 일부 섬들(진먼섬, 다천 섬, 이장산 섬)만을 유지하며 동중국해 연안에서 해상 게릴라 전술로 공산당에 맞섰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정권은 한반도 문제에 집중하게 되면서 대만에 대한 군사적 압박을 잠시 멈추었다. 인민해방군이 타이완 해협에서의 군사 행동을 중단한 것이다. 이를 기회로 삼아 중화민국 국민당은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며, 특히 1952년 난르다오 전투에서는 상륙용 주정을 이용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2. 3. 중화민국의 둥산섬 탈환 계획

1953년 7월 15일 새벽, 중화민국군 상륙 부대는 중화민국이 통제하고 있던 진먼 섬을 출발하여 둥산 섬으로 향했다. 다음 날인 7월 16일 새벽, 사령관 후롄(胡璉)은 해군 선박 13척과 30척 이상의 정크선에 병력을 나누어 태우고 3년 전 1950년 둥산섬 전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빼앗긴 푸젠성 둥산 섬 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동원된 병력은 정규군 1개 사단과 1개 연대, 그리고 498명의 낙하산 병력으로 구성된 1개 대대였으며, 총 병력은 1만 명에 미치지 못했다.

중화민국 측의 초기 계획은 둥산섬을 중화인민공화국 본토 공격의 발판으로 삼는 것이었으나, 많은 군 지휘관들이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이었다. 격렬한 논의 끝에, 정치적 선전 효과와 사기 진작을 위해 섬을 공격한 뒤 중국 인민해방군 증원 전에 신속히 철수하는 것으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전황이 유리할 경우 섬 점령을 시도하기로 했다.

한편, 당시 둥산섬을 방어하던 중국 인민해방군 병력은 공안 제80연대와 민병대를 합쳐 약 1,200명으로 수적 열세였다. 중국 인민해방군 사령관 예페이는 현지 사령관 유메이야오(游梅耀)에게 필요시 철수 후 반격을 도모할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중일 전쟁 당시 천이의 참모였던 유메이야오는 섬 사수를 결정하고, 증원군 도착까지 지형과 방어 시설을 활용해 중화민국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며 피해를 주는 방어 전략을 세웠다.

3. 전투 서열

공격군: 중화민국 국군



방어군: 중국 인민해방군

  • 제80 공안 연대 및 민병대 (1,200명)
  • 제31군 제272 연대
  • 제28군 1개 연대
  • 제41군 1개 연대
  • 제31군 제91 사단

3. 1. 중화민국 국군 (공격군)

전투 시작 직전 중화민국 국군 사령관 후롄은 3년 전 둥산섬 전역 (1950년)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간 둥산 섬을 탈환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섬으로 향했다. 국민당 측은 둥산섬을 확보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미사일로 공격할 수 있는 근거지로 삼으려 했으나, 군 지휘관들 사이에서는 작전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결국 치열한 논의 끝에, 정치적 사기를 높이기 위해 섬을 일시적으로 점령한 후, 인민해방군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신속하게 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공격에 동원된 중화민국 국군의 병력은 다음과 같다.

구분규모
육군1개 야전 사단, 1개 연대 (총 병력 1만 명 이상)
게릴라정크선을 이용한 민간 기반 게릴라
공수부대1개 낙하산 대대 (487~498명)
해군함정 13척
기타 선박동력 정크선 30척 이상



1953년 7월 15일 새벽, 상륙 부대를 태운 해군 함정 13척과 정크선 30척이 중화민국이 통치하던 진먼 섬을 출발하여 둥산 섬에 상륙했다.

중화민국 국군은 상륙에는 성공했으나, 섬을 방어하던 중국 인민해방군 수비대의 박격포 공격으로 상륙 함정 3척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 인민해방군 수비대는 상륙 지점 반대편에 위치한 바치먼(八尺門) 지역에 고립되었고, 중화민국군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수 작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며 큰 손실을 입었다.

중화민국군이 섬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7월 17일, 중국 본토로부터 인민해방군 증원군이 도착하자 중화민국군은 서둘러 철수했다.

3. 2. 중국 인민해방군 (방어군)



1953년 7월 15일 새벽, 중화민국 육군이 둥산 섬에 상륙하자 중국 인민해방군 수비대는 방어에 나섰다. 초기 교전에서 인민해방군은 박격포 포격으로 중화민국군 상륙 함정 3척에 피해를 입혔다. 상륙 이후 인민해방군 수비대는 상륙 지점 반대편에 위치한 바치먼에 한때 고립되기도 했으나, 중화민국군의 공수 부대 제압 시도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며 오히려 큰 손실을 안겼다. 7월 17일, 중국 본토에서 인민해방군 증원군이 도착하자 전세는 인민해방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결국 중화민국군은 섬에서 철수했다.

4. 전투 경과

1953년 7월 15일 새벽, 중화민국군은 진먼 섬을 출발하여 둥산 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는 3년 전 1950년 둥산섬 전역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빼앗긴 섬을 탈환하고, 본토 공격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목적이었다. 해군 함정 13척과 정크선 30여 척에 나누어 탄 1만 명 이상의 병력(정규 사단 1개, 연대 1개, 공수부대 포함)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작전 성공 가능성에 대한 내부적인 회의론도 존재하여, 초기 목표는 정치적·사기적 효과를 얻은 뒤 신속히 철수하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중화민국군은 초기 상륙에는 성공했으나, 곧바로 중국 인민해방군 수비대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다. 특히 인민해방군의 박격포 공격으로 상륙 초반에 상륙함 3척과 중화기 상당수를 잃는 큰 피해를 보았다. 또한, 섬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바치먼을 점령하기 위해 투입된 정예 공수부대는 인민해방군의 완강한 방어와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큰 손실을 입었다.

작전 수행 과정에서 중화민국군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기밀 유지를 이유로 부대 간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인민해방군의 통신망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해 적이 전황을 더 잘 파악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인민해방군의 대응 속도와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중화민국군이 섬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인 7월 17일, 중국 본토로부터 인민해방군 증원군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중화민국 정보기관이 최소 2일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던 본토와의 연결 다리 복구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루어졌다.

신속하게 도착한 인민해방군 증원군은 즉시 반격에 나섰고, 중화기는 부족하고 수적으로도 열세에 놓인 중화민국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결국 작전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중화민국 지휘부는 7월 18일 철수를 결정했다.

이 전투에서 중화민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 측 집계 기준으로 사망 2,664명, 포로 715명의 인명 손실과 탱크 2대, 상륙함 3척, 항공기 2대의 장비 손실을 입었다. 둥산섬 전역은 국공 내전 이후 중화민국이 중국 본토에 대해 감행한 마지막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4. 1. 중화민국군의 초기 공세 (1단계)

1953년 7월 16일 새벽, 후롄이 지휘하는 중화민국군은 해군 함정 13척과 동력 정크선 30여 척에 병력을 나누어 진먼 섬을 출발, 둥산 섬으로 향했다. 이는 3년 전 1950년 둥산섬 전역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빼앗긴 섬을 탈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투입된 병력은 정규 사단 1개, 연대 1개, 그리고 498명의 낙하산 대대 병력을 포함하여 총 1만 명 미만이었다.

중화민국은 둥산섬을 본토 공격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으려 했으나, 군 지휘부 내에서는 작전 성공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격론 끝에, 우선 섬을 공격하여 정치적·사기적 효과를 얻은 뒤, 인민해방군의 증원 이전에 신속히 철수하는 것으로 목표가 조정되었다. 상황이 유리하게 전개될 경우에만 섬을 점령하여 기지화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둥산섬의 중국 인민해방군 방어 병력은 제80연대 공안부대와 민병대를 합쳐 약 1,200명에 불과하여 수적으로 명백한 열세였다. 인민해방군 사령관 예페이는 현지 지휘관 유메이야오(游梅耀)에게 필요시 철수 후 반격을 도모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중일 전쟁 당시 천이의 참모였던 유메이야오는 섬을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섬의 지형과 방어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여 중화민국군의 진격을 늦추고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다는 전략을 세웠다.

7월 16일 오전 5시, 중화민국군 1개 사단이 섬에 상륙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3시간의 격전 끝에 인민해방군의 첫 방어선을 돌파하고 두 번째 방어선까지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다. 이날 저녁 무렵에는 섬에서 가장 큰 항구를 점령하고 섬 대부분을 장악했다.

하지만 중화민국군은 예상보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특히 인민해방군의 박격포 공격은 항만 시설에 큰 피해를 주었으며, 대형 상륙함 3척이 직격탄을 맞았다. 박격포탄 자체의 위력은 상륙함을 완전히 파괴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피격으로 인한 2차 폭발이 발생하여 중화기와 탄약을 실은 상륙함 3척이 모두 침몰하는 결과를 낳았다. 흘수선이 얕은 정크선은 피해가 적어 병력 수송은 계속되었지만, 중화기 수송은 사실상 차단되었다. 중화민국군은 방어 병력이 대부분 경보병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으나, 이는 이후 작전 실패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살아남은 인민해방군 박격포는 탄약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해서 중화민국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또 다른 인민해방군의 주요 저항 거점은 본토와 마주한 바치먼(八尺門) 지역이었다. 이곳은 1개 중대 규모의 인민해방군 해군 육전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부두를 포함한 강력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어 본토로부터의 증원을 위한 핵심 지점이었다. 중화민국군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미군에게 훈련받은 정예 공수부대 전체를 투입하여 조기에 점령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경보병 위주의 공수부대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과 견고한 요새를 앞세운 인민해방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목표 달성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중화기 부족은 이 중요 거점 공략 실패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결과적으로 섬의 최고 지점과 바치먼 지역이라는 두 주요 거점을 점령하지 못하면서 중화민국군의 초기 공세는 중단되었다.

4. 2. 중국 인민해방군의 반격과 중화민국군의 철수 (2단계)

중화민국군은 작전 수행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에 직면했다. 기밀 유지를 이유로 부대 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으며, 둥산섬의 주요 항구에 하선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박격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는 실수를 범했다. 이로 인해 중화기를 신속히 내리지 못했고, 상륙함부두가 인민해방군 박격포 공격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중화민국군은 인민해방군 방어부대와 본토 간의 통신망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해 인민해방군이 전황을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중화민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응 속도와 능력을 전반적으로 과소평가했다. 전투 서열에는 1개 사단이 포함되었지만, 실제 투입된 공수부대는 2개 여단 규모가 아닌 1개 대대 수준인 498명에 불과했다. 중장비 부족으로 벙커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을 제압하기 어려웠고, 특히 중화기 부족은 공수부대의 큰 손실로 이어졌다. 상륙함 3척이 침몰하고 항구가 파괴되면서 상륙 부대 대부분은 경무기만 보유하게 되어 화력 면에서 인민해방군에 비해 열세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무장한 공수부대에게 요새화된 인민해방군 진지를 공격하라는 무리한 지시가 내려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화기는 항구에서 손실되었고, 본토에서 인민해방군 증원군이 속속 도착함에 따라 중화민국군은 수적 열세에까지 놓이게 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장푸 현에 주둔하던 제31군 제272연대는 공격 시작 한 시간도 안 된 오전 5시 50분에 선발대가 군용 차량을 이용해 출발했고, 나머지 병력은 징발한 민간 차량까지 동원하여 이동했다. 오전 9시경, 연대 전체가 둥산섬의 바치먼(八尺門) 부두에 도착했다. 새로 도착한 증원군의 합류로 바치먼의 인민해방군 해군 보병대는 중화민국 공수부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곧이어 제28군과 제41군 소속 연대들도 도착했다. 인민해방군 사령관 유메이야오(尤梅耀)는 초기 성공에 힘입어 중화민국군이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즉시 반격을 명령했다. 중화민국군이 반격에 밀려 후퇴하는 동안, 제31군 사령관 저우즈젠(周志坚)의 지휘 아래 제31군 제91사단도 섬에 상륙했다.

중화민국군은 인민해방군의 증원 속도뿐 아니라, 파괴된 다리를 복구하는 속도 역시 과소평가했다. 중화민국 정보기관은 지우룽 강(九龙江)의 중요 다리 복구에 최소 2일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몇 시간 만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작전 지휘관 후롄은 처음에는 중화민국 공군이 지우룽 강 대교(九龙江大桥)를 성공적으로 폭격했다고 믿었기에, 인민해방군이 단시간 내에 대규모 증원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다리가 통행 가능하다는 사실과 함께 병력이 수적, 화력 면에서 열세임을 깨닫자, 더 많은 인민해방군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철수를 결정했다.

결국 중화민국군은 1953년 7월 18일, 둥산섬에서 철수했다. 철수 과정에서 일부 병력이 섬에 남겨져 인민해방군에 항복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측 집계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중화민국군은 사망 2,664명, 포로 715명의 인명 손실을 입었다. 중화민국군은 부상자들을 성공적으로 후송했기 때문에 정확한 부상자 수는 파악되지 않았다. 또한 탱크 2대, 상륙함 3척, 항공기 2대의 장비 손실도 기록되었다. 이 전투는 중화민국이 중국 본토에 대해 감행한 마지막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둥산섬 전역은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상대로 시도한 마지막 대규모 군사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중화민국군의 상당한 손실과 함께 실패로 끝났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효과적인 방어와 중화민국군의 작전상 오류 및 정보 판단 착오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 전투의 패배는 국민당 정권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국공 내전 이후 유지해 온 중국 대륙 수복 전략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둥산섬에서의 실패 이후, 중화민국은 대규모 상륙을 통한 본토 반격 가능성을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소규모 특수부대를 이용한 기습이나 정보 수집 활동 위주로 군사 작전의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이는 양안관계의 군사적 긴장 구도를 장기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5. 1. 중화민국의 패배와 전략 변화

둥산섬 전역은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본토를 향해 감행한 마지막 대규모 반격 작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중화민국군은 패배했으며,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습한 중화민국군 사망자는 2,664명, 포로는 715명에 달했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성공적으로 후송되어 정확한 집계는 어렵다. 또한 전차 2대, 상륙함 3척, 항공기 2대를 손실하는 피해를 입었다.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중화민국군 내부의 원활하지 못한 소통이었다. 과도한 기밀 유지 때문에 부대 간 협조가 부족했고, 이는 상륙함이 둥산섬의 주요 항구에 하선할 때 중국 인민해방군 박격포 사정권 내로 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중화기를 신속히 하선하지 못했으며, 상륙함과 부두가 박격포 공격에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중화민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 방어부대와 본토 간의 통신망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했다. 그 결과 중국 인민해방군은 전황을 더 정확히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중화민국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응 속도와 증원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예를 들어, 손상된 다리 복구에 최소 2일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몇 시간 만에 완료되었다. 이러한 정보가 중화민국 측에 전달되자 임무 달성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신속히 철수했다.

작전 계획상 1개 사단 이상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실제 낙하산 부대는 2개 여단 규모임에도 병력은 498명으로 1개 대대 수준에 불과했다. 중장비 부족으로 벙커에 주둔한 인민해방군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고, 이는 낙하산 부대의 큰 손실로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항구에서 상륙함 3척이 침몰하고 부두가 파괴되면서 대부분의 상륙 부대는 경무장 상태로 인민해방군에 비해 화력 열세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무장한 낙하산 부대에게 견고하게 요새화된 인민해방군 진지를 공격하라는 무리한 명령이 내려져 사상자는 더욱 늘어났다. 결국 중화민국군은 화력과 병력 모두에서 열세에 놓인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동산도 전투의 패배 이후, 국민당 정권중국 대륙 연안에 대한 대규모 상륙 작전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소규모 특수부대를 이용한 기습 작전 위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5. 2. 전력 평가의 오류

국민당군은 여러 측면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력을 잘못 평가하여 작전 실패를 자초했다.

첫째, 정보 및 통신 운용의 오류가 있었다. 과도한 기밀 유지 때문에 국민당군 부대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또한, 둥산섬 방어 부대와 본토 중국 인민해방군 간의 통신망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국 인민해방군 지휘부는 전장의 상황을 국민당군보다 더 정확하게 파악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둘째, 중국 인민해방군의 능력 과소평가가 심각했다. 국민당군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응 속도와 증원 능력을 얕보았다. 특히 중국 인민해방군이 공습으로 파괴된 다리를 복구하는 데 최소 2일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지만, 실제로는 단 몇 시간 만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중국 인민해방군의 증원군 도착은 국민당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작전 목표 달성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하여 서둘러 철수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셋째, 작전 계획 및 실행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상륙 지점 선정부터 문제가 있었다. 섬에서 가장 큰 항구에 상륙을 시도했으나, 이곳은 중국 인민해방군 박격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이로 인해 중화기를 실은 상륙함 3척이 미처 하역하기도 전에 중국 인민해방군 박격포 공격을 받아 침몰했고, 항구 시설 역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중화기 대부분을 항구에서 잃으면서 상륙 부대는 경무장 상태로 중국 인민해방군보다 화력에서 열세에 놓였다.

병력 운용에서도 실수가 있었다. 작전 서열상 1개 사단 규모의 공수부대가 투입되었지만, 실제 병력은 2개 여단 498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병력과 중화기가 부족한 상황에서, 경무장한 공수부대에게 견고하게 요새화된 팔척문(八尺門) 지역의 중국 인민해방군 진지를 공격하라는 무리한 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공수부대의 막대한 희생을 초래했을 뿐 목표 달성에도 실패했다. 결국 화력과 병력 수 모두에서 열세에 놓인 국민당군은 중국 인민해방군 증원군이 도착하자 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5. 3. 인명 피해

둥산섬 전역에서 중화민국군은 상당한 인명 및 장비 손실을 입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의해 확인된 중화민국군 사망자는 2,664명이었고, 715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중화민국군이 부상자들을 성공적으로 철수시켰기 때문에 정확한 부상자 수는 파악되지 않았다. 장비 손실로는 전차 2대, 상륙함 3척, 항공기 2대가 있었다.

이러한 피해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특히, 작전 초기 과도한 기밀 유지로 인해 부대 간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중화민국군 상륙함이 둥산섬의 주요 항구에 하선하는 과정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박격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화기를 신속히 내리지 못했고, 상륙함과 부두 시설이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중화기 부족은 상륙 부대와 공수부대의 전투력 약화로 이어져 인명 피해를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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