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래리 앨런 앱셔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래리 앨런 앱셔는 1962년 대한민국에서 복무 중이던 미국 육군 이병으로, 비무장 지대를 넘어 월북하여 북한에서 생활했다. 그는 북한에서 다른 월북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김일성 관련 교육을 받았으며,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앱셔는 북한에서 태국인 여성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고, 1983년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영국계 한국인 - 샤넌 (가수)
    샤넌(김아름)은 영국 웨일스 출신으로 영국과 한국 국적을 가진 가수로, 솔로 가수로 데뷔하여 음반 발매와 방송 출연 등 활동 후 MBK엔터테인먼트 계약 종료 후에는 발로란트 스트리밍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 영국계 한국인 - 장대일
    장대일은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K리그에서 활동했으며, 천안 일화 천마와 부산 아이콘스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선수 은퇴 후 연기 활동을 하였으나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빚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거주한 미국인 - 조지프 T. 화이트
    조지프 T. 화이트는 1982년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으로 월북하여 김일성을 찬양하는 비디오를 공개했으며 1985년 청천강에서 익사한 미군이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거주한 미국인 - 제임스 드레스녹
    제임스 드레스녹은 1962년 북한으로 월북하여 선전물 출연 및 영화 배우로 활동하며 북한 내 유명 인사가 된 전 미국 육군 이등병이다.
래리 앨런 앱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래리 앨런 앱셔
1962년 모습
출생일1943년
출생지미국 일리노이주 어배너
사망일1983년 7월 11일 (40세)
사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국적미국 (1943년–196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62년–1983년)
거주지평양직할시 사동 (-1965년)
평양직할시 만경대 (1965년 - 1967년)
평양직할시 태양리 (1967년 - 1969년)
평양직할시 화천 (1969년 - 1972년)
평양직할시 승호 (1972년 - 1983년)
직업군인 (–1962년)
영어 교사 (1981년–)
배우자아노차 판조이
군사 정보
소속미국 육군 (1962년까지)
조선인민군 (1962년 이후)
복무 기간불명–1962년
최종 계급이등병
소속 부대제1기병사단, 제9기병연대, 제1정찰전대
기타 정보
웹사이트래리 앨런 앱셔

2. 월북 배경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 제9기병연대 제1정찰대대 소속[22][2][8] 이등병이었던 래리 앨런 앱셔는 1962년 5월 28일, 당시 19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에 있는 주한 미군 기지를 이탈했다. 그는 DMZ를 넘어 북한으로 갔으며,[22][2][8] 그해 8월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일병이 새로 월북하기 전까지 약 3개월 동안 북한에 체류하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22][2][8]

훗날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은 2006년 다큐멘터리 영화 크로싱 더 라인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북한에서 잠을 자다 깨어났을 때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낯선 백인(앱셔)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드레스녹은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물었고, 상대가 "나는 앱셔이다"라고 답하자 "앱셔? 나는 앱셔를 모른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21][1][7]

3. 월북 과정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 제9기병연대 제1정찰대대 소속[22][2][8] 이등병이었던 래리 앨런 앱셔는 1962년 5월 28일[8], 대한민국에 있는 자신의 주한 미군 기지를 몰래 빠져나왔다. 그는 DMZ(군사 분계선)를 넘어 북한으로 들어갔으며[22][2][8],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8]

앱셔는 그해 8월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일병이 월북하기 전까지 약 3개월 동안 북한에 체류한 유일한 미국인이었다.[22][2][8] 2006년 다큐멘터리 영화 크로싱 더 라인에서 드레스녹은 북한에서 앱셔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하며, 잠에서 깨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하얀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드레스녹이 Who in the hell are you?|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eng라고 묻자, 그는 I'm Abshier|나는 앱셔이다eng라고 답했다. 이에 드레스녹은 Abshier? I don't know no Abshier.|앱셔? 나는 앱셔를 모른다.eng라고 답하며 당시의 당혹감을 표현했다.[21][1][7]

4. 북한에서의 생활

제1기병사단 제9기병연대 제1정찰대대 소속이었던[22] 앱셔 이병은 1962년 5월 대한민국에서 복무 중 DMZ를 넘어 북한으로 월북했다. 그는 1962년 8월 제임스 드레스녹 일병이 월북하기 전까지 약 3개월 동안 북한에 거주하는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드레스녹은 2006년 다큐멘터리 영화 푸른 눈의 평양시민에서 앱셔와의 첫 만남 당시를 회상하며 놀라움을 표현하기도 했다.[21]

이후 앱셔는 드레스녹, 찰스 로버트 젠킨스, 제리 웨인 패리시 등 다른 세 명의 미군 월북자들과 함께 북한 당국의 관리 하에 생활하게 되었다. 이들은 북한의 선전 활동에 동원되었는데, 특히 이름 없는 영웅들과 같은 여러 선전 영화에 출연하여 주로 사악한 미군이나 외국인 악당 역할을 맡았다.[21] 이러한 영화 출연으로 이들은 북한 사회 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21] 북한 당국은 이들이 북한에서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처럼 묘사된 사진들을 외부에 공개하며 체제 선전에 활용했다.[21][23]

앱셔는 다른 월북자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김일성 저작 학습 등 사상 교육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동료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으며, 북한 당국이 정해준 여성과 결혼하기도 했다. 1972년 6월 30일, 앱셔는 다른 세 명의 미군 월북자들과 함께 북한 시민권을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10]

4. 1. 개인적 삶과 갈등

찰스 젠킨스는 그의 저서에서 앱셔가 한국어 대화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단어에 매료되어 신문의 어휘를 몇 시간씩 공부하곤 했다고 썼다.[4] 젠킨스에 따르면, 탈영병 네 명은 처음 사동구역에서 함께 살았고, 1965년 6월에는 만경대구역의 방 한 칸짜리 집으로 이사했으며, 이후 1967년 가을에는 태양리, 1969년에는 화천의 집으로 옮겨가며 수년간 함께 살면서 김일성의 글을 읽고 암송하는 교육을 받았다.[10][12] 젠킨스는 만경대구역에서 살 때 드레스녹이 방을 어지럽히고 앱셔에게 치우라고 시키는 등 그를 괴롭혔다고 주장했다.[13] 젠킨스는 앱셔를 "단순하고, 상냥하며, 선량한 영혼의 소유자이지만, 조금 멍청해서 쉽게 이용당하는 인물"로 동정적으로 묘사했다.[14]

한동안 드레스녹과 패리시는 앱셔를 존 스타인벡의 소설 《생쥐와 인간》에 나오는 어리숙한 인물인 "레니"라고 부르며 비하했다.[13][14] 앱셔는 젠킨스가 설득하기 전까지는 괴롭힘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13] 결국 드레스녹이 앱셔를 공격하려 하자, 젠킨스가 드레스녹을 때려 앱셔를 보호했고, 이후 드레스녹은 젠킨스에게 적대감을 보였다.[4][5][13]

1972년 6월 30일, 앱셔는 다른 세 명의 탈영병과 함께 북한 시민권을 받았다.[10] 이후 네 명은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앱셔와 패리시는 승호구역 립석리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집을 받았다.[10][15] 앱셔를 포함한 탈영병들에게는 요리와 감시 역할을 하며 때로는 성관계를 갖도록 북한 여성이 "배정"되었다.[15] 이 여성들은 오랫동안 자녀 없이 결혼 생활을 하다 이혼했기 때문에 불임으로 여겨졌다.[16] 그러나 앱셔에게 배정된 여성이 임신하자 당국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6][16][17]

나중에 앱셔는 다른 여성과 결혼했다.[16] 드레스녹은 그녀가 한국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젠킨스는 앱셔의 두 번째 아내가 아노차 판조이라는 태국인 여성이라고 밝혔다. 젠킨스에 따르면, 아노차는 마카오에서 안마사로 일하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왔으며, 1978년 앱셔에게 "배정"되었다.[6][16] 젠킨스가 북한에서 찍은 아노차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그의 납치 주장은 큰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북한이 일본인 외에도 다른 국적의 시민들을 납치했을 가능성을 시사했기 때문이다.[16] 앱셔와 아노차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18] 앱셔가 사망한 후, 아노차는 1989년 동독의 사업가와 재혼시키기 위해 살던 곳에서 끌려갔다고 전해진다.[6][17]

5. 사망

1981년부터 다른 3명의 미국인 탈영병들과 함께 사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앱셔는[19] 1983년 7월 11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평양에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였다.[19] 젠킨스에 따르면, 당시 앱셔 부부와 젠킨스・소가 히토미 부부는 이웃이었는데, 앱셔의 아내 아노차 빵조이가 남편의 갑작스러운 상태 변화에 놀라 이웃인 젠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9] 젠킨스가 앱셔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으며, 앱셔는 곧 숨을 거두었다. 의사의 도착도 늦었다.[19]

그의 장례식은 북한 정부의 지원으로 비교적 제대로 치러졌으며[19], 참석자들은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었다.[19] 앱셔의 묘비에는 사망일과 출생지가 잘못 새겨졌는데, 젠킨스가 이 사실을 당국에 알렸지만 수정되지 않았다.[19] 앱셔의 묘지는 요코타 메구미가 자살했다고 알려진 병원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으며[19], 1998년에 사망한 제리 패리시의 유해도 그의 옆에 묻혔다.[20]

참조

[1] 웹사이트 Larry Allen Abshier http://larry-allen-a[...] Larry-allen-abshier.co.tv 2016-05-25
[2] 웹사이트 Lowell Sun Newspaper Archives, Jun 3, 1962 https://newspaperarc[...] 1962-06-03
[3] Youtube
[4] 서적 Jenkins 2008
[5] 문서
[6] 웹사이트 North Korea: Prisoner of Pyongyang? http://www.time.com/[...] TIME 2005-11-14
[7] 웹사이트 Larry Allen Abshier http://larry-allen-a[...] Larry-allen-abshier.co.tv 2016-05-25
[8] 웹사이트 Lowell Sun Newspaper Archives, Jun 3, 1962 https://newspaperarc[...] 2022-04-08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웹사이트 North Korea: Prisoner of Pyongyang? http://www.time.com/[...] TIME 2005-11-14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21] 웹인용 Larry Allen Abshier http://larry-allen-a[...] Larry-allen-abshier.co.tv 2016-05-25
[22] 웹인용 Lowell Sun Newspaper Archives, Jun 3, 1962 https://newspaperarc[...] 2019-03-18
[23] 유튜브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