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퍼스 토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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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퍼스 토머스는 미국의 가수, 작곡가, 탭 댄서, 코미디언, 라디오 DJ로, 195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며 멤피스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50년 첫 싱글을 발표하고, 1951년 WDIA 라디오 방송국에서 DJ로 활동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악을 처음으로 방송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Bear Cat"으로 선 레코드의 첫 전국 차트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후 스택스 레코드에서 "Walking the Dog"와 "Do the Funky Chicken" 등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며 펑크 음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토머스는 2001년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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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스 토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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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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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루퍼스 C. 토머스 주니어 |
다른 이름 | 미스터 스윙 |
출생일 | 1917년 3월 26일 |
출생지 | 케이스, 미국 미시시피주 |
사망일 | 2001년 12월 15일 |
사망지 | 멤피스, 미국 테네시주 |
활동 기간 | 1936년 – 1998년 |
직업 | 가수 작곡가 댄서 코미디언 텔레비전 진행자 디스크 자키 |
장르 | 리듬 앤 블루스 서던 소울 블루스 댄스 펑크 |
레이블 | 체스 레코드 선 레코드 스택스 레코드 AVI 레코드 |
관련 활동 | 칼라 토머스 마벨 토머스 바니스 토머스 |
2. 초기 생애 (Early life)
토머스는 테네시주 멤피스 외곽의 미시시피주 케이스 시골 공동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경 가족과 함께 멤피스로 이사했다.[4] 그의 어머니는 교회 여성이었다. 토머스는 6살 때 학교 연극에서 개구리 역할을 맡으며 처음 무대에 섰다. 10살이 되면서 탭댄서가 되어, 멤피스의 부커 T. 워싱턴 고등학교 시절 거리와 아마추어 연극 무대에서 공연했다.[4][5] 13세부터는 빌 스트리트에 위치한 팰리스 극장에서 열린 탤런트 쇼의 사회자로 활동했다. 당시 그의 고등학교 역사 교사이자 WDIA 라디오 방송국의 선구적인 흑인 DJ였던 냇 D. 윌리엄스와 함께 일했다.[5][18] 고등학교 졸업 후, 토머스는 테네시 A&I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한 학기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전업 연예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토머스는 순회 텐트 쇼에서 공연을 시작했다.[6] 1936년에는 탭 댄서이자 코미디언으로서 남부 지역을 순회하는 흑인 레뷔 래빗 풋 민스트럴스에 합류했으며, 때로는 '루퍼스와 조니'라는 듀오로 활동하기도 했다.[2] 1940년 코넬리아 로렌 윌슨과 결혼했는데, 결혼식 주례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아버지인 C. L. 프랭클린 목사가 맡았다.[7] 부부는 멤피스에 정착했고, 토머스는 20년 넘게 아메리칸 피니싱 컴퍼니 섬유 표백 공장에서 주간 근무를 했다.[4]
1960년, 그는 17세 딸 칼라와 함께 멤피스에 있는 새틀라이트 레코드에서 첫 녹음을 시작했다. 이 레이블은 이듬해 스택스(Stax)로 이름을 바꾸었다.[18][7] Jesse Hill의 "Ooh Poo Pa Doo" 리듬을 차용한 곡 "Cause I Love You"는 지역에서 히트했으며, 이 녹음에는 아들 마벨(키보드), 스타인버그, 그리고 당시 16세였던 부커 T. 존스가 세션으로 참여했다.[18][7] 이 음반의 성공은 스택스가 대형 레이블인 애틀랜틱 레코드와 제작 및 유통 계약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4]
토머스는 계속해서 음반을 녹음하고 국제적인 순회 공연을 하며 자신을 "세계에서 가장 늙은 10대"라고 칭했고, "가장 펑키한 남자"라고 묘사했다.[17] 그는 자신의 보드빌 배경을 활용하여 "50대에도 놀라운 민첩성을 보여주는 멋진 발놀림으로 무대에서 [자신의 노래]를 선보였"으며,[2] 보통 "화려한 색상의 핫팬츠, 부츠, 망토"를 입고 공연했다.[4]
3. 초기 경력 (Early career)
멤피스에서 그는 로버트 "본즈" 카우치와 '루퍼스와 본즈'라는 코미디 및 댄스 듀오를 결성했으며, 팔레스 극장의 MC를 맡아 아마추어 공연을 자주 진행했다. 이 시기 아마추어 공연 우승자 중 한 명은 B.B. 킹이었고, 1940년대 후반 토머스는 바비 블랜드, 조니 에이스와 같은 인물들을 발굴하기도 했다.[2][5][17]
1940년대 초부터 자신의 노래를 쓰고 공연하기 시작했으며, 루이 암스트롱, 팻스 월러, 게이트마우스 무어 등에게서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4] 엘크 클럽에서 다른 가수를 대신해 공연하며 전문 가수로서 데뷔했고, 1940년대에는 커리의 클럽 트로피카나와 같은 멤피스 나이트클럽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했다.[4]
1950년, 33세의 나이로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제시 에릭슨의 소규모 레이블인 스타 탤런트(Star Talent)를 통해 첫 78 rpm 싱글 "I'll Be a Good Boy" / "I'm So Worried"를 녹음했다. 그는 이 음반에 대해 "단지 음반을 만들고 싶었을 뿐... 음반은 5장 팔렸고, 그중 4장을 제가 샀습니다"라고 회상했다.[8] 이 음반은 ''빌보드''에서 "토머스는 슬로우 블루스에서 일류 스타일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9] 또한 테네시주 내슈빌의 불렛 레코드에서 바비 플레이터 오케스트라와 함께 녹음했으며, 이때 "미스터 스윙"이라는 이름으로 크레딧되었다. 이 녹음은 1996년까지 연구원들에 의해 토머스의 것으로 확인되지 않았다.[10] 1951년에는 샘 필립스의 선 스튜디오에서 체스 레코드 레이블을 위해 녹음했으나 상업적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10][32]
1951년부터 라디오 방송국 WDIA에서 DJ로 일하며 "Hoot and Holler"라는 오후 R&B 쇼를 진행했다.[11]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심의 프로그램을 송출했던 WDIA는 "흑인들의 어머니 방송국"으로 알려졌으며, 백인 청취자들에게도 블루스와 R&B 음악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토머스는 자신의 쇼를 "저는 젊고, 활기차고, 에너지가 넘치고, 흥분돼요... 우리는 돈이 없지만, 기분은 좋습니다. 루퍼스가 여기 있으니, 소리 지르고 환호하세요!"라는 말로 시작했다.[11] 그는 또한 백인 십대들을 데리고 비일 스트리트 주변에서 "한밤중 산책"을 이끌기도 했다.[11] 토머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음반을 처음으로 튼 흑인 DJ라고 주장했으며, 인종 차별적인 이유로 방송국 프로그램 디렉터가 이를 중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토머스가 엘비스와 함께 흑인 관객 앞에서 공연한 후 관객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자, 디렉터는 엘비스의 노래를 WDIA에서 틀도록 허용했다.[11]
그의 남부 지역 인지도 덕분에 1953년 샘 필립스의 제안으로 선 레코드에서 빅 마마 손턴의 R&B 히트곡 "Hound Dog"에 대한 "답변곡"인 "Bear Cat"을 녹음하게 되었다.[2] 이 음반은 선 레코드의 첫 전국 차트 히트곡이 되어 ''빌보드'' R&B 차트에서 3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Hound Dog"의 원 퍼블리셔인 돈 로비가 제기한 저작권 침해 소송으로 인해 레이블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2] 토머스는 선 레코드에서 이 한 곡만 녹음하고 레이블을 떠났는데, 이는 필립스가 레이블의 초점을 백인 아티스트, 특히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맞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는 토머스의 곡 "Tiger Man"을 커버하기도 했다.[18][12][13]
토머스는 1956년까지 녹음을 중단했다가, 비하리 형제의 메테오 레코드 레이블에서 싱글 "I'm Steady Holdin' On"을 발표했다. 이 녹음에는 훗날 부커 T. & 더 M.G.'s의 창립 멤버가 되는 루이 스테인버그가 참여했다.[10]
4. 스택스 레코드 시절 (Stax Records)
딸 칼라의 "Gee Whiz (Look at His Eyes)"가 1961년 전국 R&B 차트에 오르자, 루퍼스 토머스도 스택스에서 꾸준히 음반을 발표했다. 그는 공연 중 윌리 미첼의 베이스 라인을 바탕으로 즉흥적으로 만든 곡 "The Dog"로 히트를 기록했는데, 개 짖는 소리를 흉내 내는 독특한 스타일이 특징이었다. 1963년에는 톰 도드가 엔지니어링한 후속곡 "Walking the Dog"가 빌보드 팝 차트 10위에 오르며 그의 가장 큰 성공작 중 하나가 되었다.[2][5][14][29] 이로써 그는 딸이 먼저 10위권에 진입한 후, 자신도 10위권에 오른 최초이자 유일한 아버지가 되었다. "Walking the Dog"는 1964년 초 롤링 스톤스가 그들의 데뷔 앨범에 커버했으며, 같은 해 말 머지비트 그룹 데니슨스의 버전은 영국 차트에서 소소한 히트를 기록했다.[15]
음반 녹음, 라디오 출연, 클럽 공연 외에도 토머스는 텍스타일 공장에서 보일러 조작원으로 계속 일했다. 그는 공장의 소음 속에서 음악적 리듬과 가사에 대한 영감을 얻기도 했다고 주장했으며, 1963년에 마침내 이 일을 그만두고 가수와 엔터테이너로서의 활동에 전념했다.[4] 그는 스택스에서 "Can Your Monkey Do the Dog'", "Somebody Stole My Dog" 등 독특하고 재미있는 댄스 곡들을 연이어 발표했으며, 이 곡들에는 종종 Booker T. & the M.G.'s나 바-케이스가 백업 밴드로 참여했다. 또한 그는 스택스의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멘토 역할을 하며,[2] 딸 칼라와 함께 음반을 낸 오티스 레딩과 같은 후배 가수들에게 무대 매너 등을 조언해주기도 했다.[5]
1964년 "Jump Back" 이후 스택스가 젊은 아티스트들에게 집중하면서 몇 년간 히트 공백기를 가졌다. 그러나 1970년, 그는 "Do the Funky Chicken"으로 다시 한번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은 R&B 차트 5위, 팝 차트 28위에 올랐고, 영국에서는 18위를 기록하며 그의 유일한 영국 차트 히트곡이 되었다.[30][34] 토머스는 테네시주 코빙턴의 한 클럽에서 윌리 미첼 밴드와 공연하던 중 이 곡을 즉흥적으로 만들었다. 곡 중간에는 라디오 DJ 시절 자주 사용하던 특유의 입담("아, 내가 너무 불필요하다고 느껴져 - 이건 마치 흰 셔츠 앞부분에 치킨 그레이비를 낭비하는 것처럼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싶게 만드는 종류의 일이야.")이 포함되었다. 이 음반은 알 벨과 톰 닉슨이 프로듀싱했으며, 기타리스트 마이클 톨스가 포함된 바-케이스가 연주를 맡았다. 토머스는 알 벨, 닉슨과 계속 협력하여 1970년 후반에는 또 다른 댄스 곡인 "Do the Push and Pull"로 생애 유일한 R&B 차트 1위[29] (팝 차트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16] 1971년에는 댄스 곡 "The Breakdown"이 R&B 차트 2위, 팝 차트 31위에 올랐다. 1972년에는 Wattstax 콘서트에 출연하여 "The Breakdown"과 "Do the Funky Chicken"을 선보였으며,[34] 1976년 스택스 레코드가 문을 닫기 전까지 몇 개의 싱글을 더 발표했다.[2][5]
5. 후기 경력 (Later career)
그는 1974년까지 WDIA에서 DJ로 활동했으며, WLOK에서 잠시 일한 후 1980년대 중반에 WDIA로 돌아와 블루스 쇼를 공동 진행했다.[4] 텔레비전에도 정기적으로 출연했고 다양한 레이블에서 앨범을 녹음했다.[5] 토머스는 이탈리아의 포레타 소울 페스티벌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했으며, 그가 공연했던 야외 원형 극장은 나중에 루퍼스 토머스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6]
1988년 스택스 재결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2] 짐 자무쉬의 1989년 영화 ''미스터리 트레인'', 로버트 알트만의 1999년 영화 ''쿠키의 행운'', D. A. 페네베이커의 다큐멘터리 ''Only the Strong Survive''에 출연했다.[2][4] 토머스는 1988년 올리가토 레코드를 통해 색소폰 연주자 노블 "씬 맨" 와츠가 참여한 정통 블루스 앨범 ''That Woman Is Poison!''을 발매했다.[17] 1996년에는 윌리엄 벨과 함께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헤드라인 공연을 했다. 1997년에는 에코 레코드에서 앨범 ''Rufus Live!''를 발매했다. 1998년에는 빌 스트리트에서 두 개의 제야 쇼를 진행했다.[6]
1997년, 그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시는 빌 스트리트를 벗어난 옛 팰리스 극장 근처의 도로 이름을 루퍼스 토머스 대로로 변경했다.[5] 그는 1992년 리듬 앤 블루스 재단으로부터 파이오니어 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ASCAP로부터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5] 2001년 블루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2]
2001년 12월 15일에 심부전으로 멤피스의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 사망과 유산 (Death and legacy)
그는 2001년 12월 15일 멤피스의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에서 84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2] 그는 2000년에 사망한 아내 로렌 옆, 멤피스의 뉴 파크 묘지에 묻혔다.
작가 피터 구랄닉은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18]
: 그의 음악은... 세상에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성격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고, 끈기, 결단력, 불굴의 정신, 무엇보다도 인간 코미디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전하며, 그의 존재에서 칙칙하거나 우울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토머스는 바이핼리아에 있는 미시시피 블루스 트레일에 표지석으로 헌정되었다.[4]
7. 대중문화 속 루퍼스 토머스 (In popular culture)
8. 음반 목록 (Discography)
루퍼스 토머스는 오랜 음악 경력 동안 다수의 정규 앨범과 싱글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적인 앨범으로는 Walking the Dog, ''Do the Funky Chicken'' 등이 있으며, 싱글로는 ''Walking the Dog'', ''Do the Funky Chicken'', ''(Do the) Push and Pull'' 등이 빌보드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자세한 음반 목록은 아래와 같다.
8. 1. 정규 앨범 (Albums)
wikitext연도 | 제목 | 카탈로그 참조 | 최고 차트 순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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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200 [19] | 미국 R&B [19] | ||||
1963 | Walking the Dog | Stax 704[20] | 138 | — | |
1970 | Do the Funky Chicken | Stax STS-2028[21] | — | 32 | |
'Rufus Thomas Live: Doing the Push & Pull at P.J.s'' | Stax STS-2039[22] | 147 | 19 | ||
1972 | Did You Heard Me? | Stax STS-3004[23] | — | — | |
1973 | Crown Prince of Dance | Stax STS-3008[24] | — | 42 | |
1977 | If There Were No More Music | AVI 6015[25] | — | — | |
1978 | 'I Aint Gettin Older, Im GettinBetter | AVI 6046[26] | — | — | |
1988 | That Woman Is Poison! | Alligator AL 4769[27] | — | — | |
1996 | Blues Thang! | Sequel/Castle SEQ 1054 | — | — | |
'The Best of Rufus Thomas: Do the Funky Somethin '' (편집 앨범) | Rhino R2 72410 | — | — | ||
1997 | Rufus Live! [1996년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서던 크로스로드 페스티벌에서 녹음] | Ecko ECD 1013 | — | — | |
2000 | Swing Out with Rufus Thomas | High Stacks HS 9982 | — | — | |
2005 | 'Just Because Im Leavin''' (사후 발매) | Segue Records SRRT05 | — | — | |
"—"는 해당 지역에서 차트에 오르지 못했거나 발매되지 않은 앨범을 나타냅니다. |
8. 2. 주요 싱글 (Singles)
[28]R&B
[29]
[30]
(as ''Mr. Swing with Bobby Platers 오케스트라''')[31]
(as ''Mr. Swing with Bobby Platers Orchestra''')
(as Carla and Rufus)
(as Carla and Rufus)
Atco 6177
(as Rufus and Friend [Carla]''')
(as Rufus and Friend)
("Fine & Mellow" on some early copies)
(as Rufus & Carla''')
(as Rufus & Carla)
94 (B)
(as Rufus & Carla)
(as Rufus & Carla''')
(as Rufus & Carla)
(as Rufus & Carla)
(by The Bar-Kays)
*는 해당 차트 기간 동안 빌보드가 R&B 차트를 발표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