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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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면상은 일제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작곡가이다. 함경남도 함주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민요풍의 음악을 작곡했으나 중일 전쟁 이후 친일 시국 가요를 발표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광복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음악 활동을 이어갔으며,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 평양음악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으로도 성공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일제강점기의 〈울산 큰애기〉와 북한 시기의 〈빛나는 조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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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곡가 - 김원균
김원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곡가로서 애국가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작곡하고 혁명가극 창작에 참여했으며 평양음악무용대학 학장, 피바다가극단 총장,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했고 로력영웅,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작곡가 - 김동진 (작곡가)
김동진은 평안남도 안주 출신의 작곡가로, 가곡 〈가고파〉, 오페라 《심청전》, 《춘향전》 등 다수의 작품을 남겼으나, 만주국 시기 친일 활동 논란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 일제강점기의 작곡가 - 홍난파
홍난파는 <봉선화>, <고향의 봄> 등 다수의 가곡과 동요를 작곡하고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으며, 수양동우회 사건 연루와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이 된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소설가, 언론인이다. - 일제강점기의 작곡가 - 현제명
현제명은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음악가로, 서양음악계에 영향을 끼치고 대한민국 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고향생각〉, 오페라 〈춘향전〉 등이 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 - 송영 (극작가)
송영은 일제 강점기와 북한에서 활동한 극작가로, 카프 계열 연극인으로 등단하여 노동 운동 풍자 작품을 발표했으나 친일 행적을 보였고, 광복 후 월북하여 북조선연극동맹 위원장을 지냈으며, 김일성 항일 무장 투쟁을 형상화한 희곡으로 알려졌으나 한설야 숙청 시기에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보아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리면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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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리면상/이면상 |
예명 | 이운정 (李雲亭) |
출생 | 1908년 4월 8일 |
출생지 | 함경남도 함주군 |
사망 | 1989년 6월 25일 |
직업 | 작곡가 |
장르 | 트로트 혁명송가 혁명가극 |
활동 시기 | 1930년대 ~ 1970년대 |
2. 생애
함경남도 함주군 출생이다. 함흥부의 2년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원산부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민요와 동요를 연구했다.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된 벌교노동조합 총회에서의 사상고취 사건에 연루[2] 되어 교직을 그만두게 되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하고 1933년 서울로 돌아온 이후 민요를 작곡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초기에는 주로 서정적인 내용에 민족 의식이 은근히 담긴 민요풍의 음악을 작곡했다. 1933년에 만들어진 〈폐허에서〉가 민족적 정서를 담은 현실 비판적 가사 때문에 금지곡 판정을 받은 것이 그 예이다.[3]
그러나 중일 전쟁 발발 후인 1930년대 후반부터 시국 가요를 창작[4] 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1937년 열린 '황국위문조성 조선문예회 신작발표애국다교대회’에 시국 가요 네 편을 출품한 기록이 있으며, 이후 〈종군간호부의 노래〉, 〈정의의 사여〉, 〈총후의남(銃後義男)〉등 군국 가요를 잇따라 발표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고향인 함흥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월북 예술인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함남 음악건설동맹 위원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을 지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최고인민회의 초대 대의원에도 뽑혔다.
리면상은 김순남 등 몰락한 것으로 알려진 남로당 계열의 월북 음악인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 평양음악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197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을 맡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묘지는 애국렬사릉에 마련되어 있다.[5]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신민요 음악으로는 김상희가 다시 불러 널리 알려진 〈울산 큰애기〉가 유명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빛나는 조국〉, 〈김일성 원수님 만세〉, 〈눈이 내린다〉, 〈영광의 땅 보천보〉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를 다수 창작했다. 혁명가극의 대표격인 《피바다(1971) 창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가극혁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2. 1. 일제 강점기 활동
함경남도 함주군 출생으로, 함흥부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원산부에서 교사로 일하며 민요와 동요를 연구했다. 광주학생운동 관련 사건에 연루[2]되어 교직을 그만두고 일본 유학 후, 1933년 서울로 돌아와 민요를 작곡하며 활동했다. 초기에는 서정적인 민요풍의 음악을 작곡했으나, 〈폐허에서〉와 같이 민족적 정서를 담은 곡은 금지곡 판정을 받기도 했다.[3]중일 전쟁 발발 이후 시국 가요를 창작하여 친일 행적을 보였다.[4] 1937년 열린 '황국위문조성 조선문예회 신작발표애국다교대회’에 시국 가요 네 편을 출품했으며, 〈종군간호부의 노래〉, 〈정의의 사여〉, 〈총후의남(銃後義男)〉 등 군국 가요를 발표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는 결과를 낳았다.
2. 2. 광복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광복 후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에서 활동하면서 자연스럽게 월북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함남 음악건설동맹 위원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북조선음악건설동맹 위원장을 지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대표하는 음악인으로 활동했다.[5] 1948년 최고인민회의 초대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5]김순남 등 몰락한 것으로 알려진 남로당 계열의 월북 음악인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5] 평양음악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1971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위원을 맡았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5] 묘지는 애국렬사릉에 마련되어 있다.[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빛나는 조국〉, 〈김일성 원수님 만세〉, 〈눈이 내린다〉, 〈영광의 땅 보천보〉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노래를 다수 창작했다. 혁명가극의 대표격인 《피바다(1971) 창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가극혁명을 주도하기도 했다.
3. 주요 작품
3. 1. 일제 강점기
3.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4. 평가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5. 같이 보기
참조
[1]
뉴스
“‘만고강산 유람할 제…’못다한 노래 불러주고 싶었다”
http://www.minjog21.[...]
민족21
2003-04-01
[2]
웹사이트
벌교노동조합총회시사상고취사건 (1928년)
http://student.gen.g[...]
[3]
뉴스
일제시대 `검열 통제 실태` 한눈에
연합뉴스
2006-12-06
[4]
뉴스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8) - 〈종군간호부의 노래〉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07-25
[5]
뉴스
북한의 열사릉, 그 상징과 폭력: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
http://www.prometheu[...]
프로메테우스
200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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