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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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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시니사는 기원전 3세기 누미디아의 왕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성장하여 카르타고를 위해 싸웠으나,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동맹을 맺고 자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로마의 지원을 받아 누미디아를 통일하고 번영을 이끌었으며, 카르타고와의 영토 분쟁으로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마시니사는 90세가 넘도록 통치하며, 그의 업적은 델로스에 동상이 세워지고 후대 예술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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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니사
개요
마시니사 주화
마시니사 왕의 주화
이름마시니사
로마자 표기Masinissa
누미디아어 표기[[File:Libyco-Berber letter N.svg|x12px]] [[File:Libyco-Berber letter S.svg|x12px]] [[File:Libyco-Berber letter N.svg|x12px]] [[File:Libyco-Berber letter S.svg|x12px]] [[File:Libyco-Berber letter M.svg|x12px]]
통치
칭호누미디아
왕조마실리
통치 기간기원전 202년 – 기원전 148년
이전 칭호마실리 왕 (기원전 206년 – 기원전 202년)
계승자미킵사
생애
출생기원전 238년경
사망기원전 148년 (약 90세)
매장지엘 크루브 왕실 무덤
가족
배우자누미디아 여왕 소포니스바
자녀미킵사
굴루사
마스타나발
아버지가이아
역사
즉위새로운 왕조 설립

2. 제2차 포에니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누미디아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와 싸웠다.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군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싸웠지만, 대 스키피오가 이베리아 반도의 로마군 사령관이 되자 패배를 거듭했다. 그 무렵 가이아가 사망하고, 마사에슐리 왕 슈팍스가 마슐리를 병합했다. 왕국을 잃은 마시니사는, 약간의 기병을 이끌고 대 스키피오에게 의탁했다.

기원전 204년, 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누미디아 동맹군을 격파하고, 누미디아 왕 슈팍스를 포로로 잡았다. 대 스키피오를 도와 공을 세운 마시니사는 누미디아의 왕으로 즉위했으나, 소포니스바와 관련된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기원전 202년, 자마 전투에서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기병을 이끌고 카르타고 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로마 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0][11][12]

2. 1. 초기 활약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부족 집단인 마실리족의 추장 가이아의 아들이었다.[8] 그는 아버지의 동맹국인 카르타고에서 자랐다.[9]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자 마시니사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서부 누미디아(현재 알제리)의 마세실리족 왕 시팍스에 맞서 카르타고를 위해 싸웠다. 당시 17세였던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군대와 카르타고 지원군을 이끌고 시팍스의 군대에 맞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원전 215~212년). 그는 카르타고 장군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과 약혼했다.[3]

시팍스를 상대로 승리한 후, 마시니사는 숙련된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스페인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웠으며, 기원전 211년 카스툴로 전투와 일로르카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승리에 기여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떠난 후, 마시니사는 스페인에서 모든 카르타고 기병대의 지휘를 맡아 로마 장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맞서 성공적인 게릴라 작전을 수행했으며, 그 동안 마고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새로운 군대를 징집하고 훈련시켰다. 기원전 206년경, 신선한 증원군과 함께 마고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대의 지원을 받아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와 맞붙었고,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지배력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영원히 무너졌다.

기원전 206년에 가이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마시니사와 그의 형제 외잘케스는 상속을 놓고 다퉜고, 시팍스는 동부 누미디아의 상당 부분을 정복할 수 있었다. 한편, 카르타고인들이 히스파니아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마시니사는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로마로 귀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 영토인 아프리카 침공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 결정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삼촌의 명령을 어기고 전투에 참전했던 마시니사의 조카 마시바를 석방함으로써 더욱 굳어졌다. 마시니사와의 동맹을 잃은 하스드루발은 다른 동맹을 찾기 시작했고, 귀순 전까지 마시니사와 약혼했던 소포니스바와 결혼한 시팍스에게서 그 동맹을 찾았다. 로마는 시팍스에 맞서 누미디아 왕위에 대한 마시니사의 주장을 지지했지만, 스키피오가 기원전 204년에 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시팍스가 마시니사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시니사는 로마군에 합류하여 승리한 대평원 전투 (203)에 참여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자 누미디아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와 싸우게 되었다.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군을 이끌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싸웠지만, 대 스키피오가 이베리아 반도의 로마군 사령관이 되자 패배를 거듭하게 되었다. 그 무렵 가이아가 사망하고, 마사에슐리 왕 시팍스가 마슐리를 병합했다. 왕국을 잃은 마시니사는, 약간의 기병을 이끌고 대 스키피오에게 의탁했다.

기원전 204년, 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은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로마군은 요격하러 온 카르타고·누미디아 동맹군을 격파하고, 누미디아 왕 시팍스를 포로로 잡았다.

2. 2. 로마와의 동맹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부족 집단인 마실리족 추장 가이아의 아들이었다.[8] 그는 아버지의 동맹국인 카르타고에서 자랐다.[9]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자 마시니사는 로마와 동맹을 맺은 서부 누미디아(현재 알제리)의 마세실리족 왕 시팍스에 맞서 카르타고를 위해 싸웠다. 당시 17세였던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군대와 카르타고 지원군을 이끌고 시팍스의 군대에 맞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원전 215~212년). 그는 카르타고 장군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딸과 약혼했다.[3]

시팍스를 상대로 승리한 후, 마시니사는 숙련된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스페인에서 로마군에 맞서 싸웠으며, 기원전 211년 카스툴로 전투와 일로르카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승리에 기여했다.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로 떠난 후, 마시니사는 스페인에서 모든 카르타고 기병대의 지휘를 맡아 로마 장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맞서 성공적인 게릴라 작전을 수행했다. 기원전 206년경,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했다.

기원전 206년에 가이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마시니사와 그의 형제 외잘케스는 상속을 놓고 다퉜고, 시팍스는 동부 누미디아의 상당 부분을 정복할 수 있었다. 한편, 카르타고인들이 히스파니아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마시니사는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로마로 귀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 영토인 아프리카 침공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마시니사와의 동맹을 잃은 하스드루발 기스코는 시팍스와 동맹을 맺었다. 로마는 시팍스에 맞서 누미디아 왕위에 대한 마시니사의 주장을 지지했지만, 스키피오가 기원전 204년에 아프리카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시팍스가 마시니사를 권력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마시니사는 로마군에 합류하여 승리한 대평원 전투(203)에 참여했다.

바그라데스 전투(203)에서 스키피오는 하스드루발과 시팍스를 물리쳤고, 가이우스 렐리우스와 마시니사는 시팍스를 따라 키르타로 가서 그를 사로잡아 스키피오에게 넘겼다. 시팍스가 패배한 후 마시니사는 시팍스의 아내 소포니스바와 결혼했지만, 스키피오는 그녀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그녀를 로마로 데려가 개선 행렬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굴욕에서 그녀를 구하기 위해 마시니사는 그녀에게 독약을 보냈고,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시니사는 이제 로마의 충실한 동맹으로 받아들여졌고, 스키피오에 의해 마실리족의 왕으로 확정되었다.

자마 전투에서 마시니사는 스키피오의 오른쪽 날개에서 기병대(누미디아 기병 6,000명과 로마 기병 3,000명)를 지휘했고, 스키피오는 마시니사가 합류할 수 있도록 교전을 충분히 지연시켰다. 전투가 균형을 이루는 상황에서, 도망치는 카르타고 기병대를 몰아낸 마시니사의 기병대는 돌아와 즉시 카르타고 전열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것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고 즉시 한니발의 군대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끝났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마시니사는 시팍스의 왕국을 받았고 누미디아의 왕이 되었다.

마시니사는 마실리족과 마세실리족의 왕이 되었다. 그는 로마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보였고, 그의 아프리카 내 지위는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기원전 201년 평화 조약 조항에 의해 강화되었으며, 이 조항은 카르타고가 로마의 허가 없이는 자위적인 경우에도 전쟁을 할 수 없도록 금지했다. 이를 통해 마시니사는 로마가 카르타고가 더 약해지는 것을 원한다고 판단하는 한 남은 카르타고 영토를 침범할 수 있었다.

2. 3. 자마 전투

기원전 202년, 카르타고는 이탈리아에서 급히 한니발을 불러들여 군대를 이끌게 하고 요격에 파견했다. 대 스키피오도 누미디아에서 군대를 돌려, 같은 해 10월 19일, 자마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기병을 이끌고 카르타고 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로마 군을 승리로 이끌었다.[10][11][12]

자마 전투에서 마시니사는 스키피오의 오른쪽 날개에서 기병대(누미디아 기병 6,000명과 로마 기병 3,000명)를 지휘했고, 스키피오는 마시니사가 합류할 수 있도록 교전을 충분히 지연시켰다. 전투가 균형을 이루는 상황에서, 도망치는 카르타고 기병대를 몰아낸 마시니사의 기병대는 돌아와 즉시 카르타고 전열의 후방을 공격했다. 이것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었고, 곧바로 한니발의 군대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끝났고, 그 공로로 마시니사는 시팍스의 왕국을 받았고 누미디아의 왕이 되었다.

3. 누미디아 통일과 번영

로마의 지원을 받아 누미디아 왕위에 오른 마시니사는 평생 동안 지배 영역 확장에 힘썼다.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방파제를 필요로 했기에 누미디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마시니사는 수많은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누미디아를 거의 통일했다.

마시니사의 팽창 정책은 카르타고에게 큰 위협이었다. 티투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카르타고 서부 영토를 침범하여 70개의 마을을 습격했다. 이 때문에 카르타고는 방어 체제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체결된 로마와의 평화 조약을 위반하는 행위였기에 로마의 군사 개입을 초래하여 제3차 포에니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이때 90세를 넘긴 마시니사가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3. 1. 왕국 건설

로마의 지원을 받아 마시니사는 카르타고 서쪽에 자신의 왕국인 '''누미디아'''를 건설했으며, 수도는 현재의 콘스탄틴인 키르타였다. 이는 로마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었으며, 로마는 카르타고가 이웃 국가들과 더 많은 문제를 겪기를 원했다.[13] 마시니사의 주된 목표는 반유목 누미디아 부족들로부터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카르타고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고 많은 누미디아인들에게 정착하여 농부로 살도록 강요했다.[13] 마시니사와 그의 아들들은 누미디아 전역에 대규모 영지를 소유했으며, 로마 작가들은 그에게 누미디아인들의 정착을 완전히 잘못 귀속시켰다.[13] 주요 도시로는 캅사, 두가, 불라 레지아, 히포 레기우스가 있었다.

마시니사는 통치 기간 내내 영토를 확장했으며, 말년에는 로마와 협력하다가 카르타고를 도발하여 자신과 전쟁을 벌이게 했다.[13]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조약 때문에 법적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13] 한 번은 마시니사가 아들 중 한 명이 히스파니아인들의 공격을 격퇴하도록 돕기 위해 출동해야 했는데, 아마도 기원전 153년 루시타니아인의 침공으로, 카우케누스가 카르타고와 연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3] 카르타고는 확실히 마시니사의 영토를 약탈하여 이득을 보았다.[13]

그러나 마시니사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희망은, 마시니사와 카르타고 간의 영토 분쟁을 결정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된 로마 위원단으로 인해 좌절되었다.[13] 그는 기원전 151년 오로스코파 전투에서 푸니크인을 격파했다.[13] 어쨌든, 카르타고의 부활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이나 승리한 마시니사의 야심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노년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카르타고의 파괴를 옹호했고, 마침내 성공했다.[13] 리비의 묘사에 따르면, 누미디아인들은 카르타고 잔여 영토의 남부 및 서부 지역의 약 70개 도시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했다.[13] 그들의 행동에 분노한 카르타고는 로마 조약을 어기고 누구와도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조항을 위반하여 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년)이 촉발되었다.[13] 마시니사는 기원전 149년 로마 군대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전인 기원전 148년 초에 사망했다.[13] 고대 기록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90세가 넘도록 살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왕국의 군대를 직접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13]

기원전 179년에 마시니사는 델로스 주민들로부터 곡물 선적을 제공한 공로로 금관을 받았다.[14] 마시니사를 기리기 위해 델로스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로도스 출신의 한 사람이 델로스에 그를 기리는 비문을 새겼다.[14] 그의 아들들도 델로스 섬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역시 마시니스를 위해 동상을 헌정했다.[14]

마시니사가 죽은 후, 누미디아는 그의 아들인 미킵사, 구루사, 마스타나발이 지배하는 소왕국으로 분할되었다. 후에 유구르타 전쟁을 일으켜 누미디아를 재통일하려 했던 유구르타는 그의 손자에 해당한다.

3. 2. 팽창 정책과 카르타고와의 갈등

로마의 지원을 받아 마시니사는 카르타고 서쪽에 자신의 왕국인 '''누미디아'''를 건설했으며, 수도는 현재의 콘스탄틴인 키르타였다. 이 모든 일은 로마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로마는 카르타고가 이웃 국가들과 더 많은 문제를 겪기를 원했다.[13] 마시니사의 주된 목표는 반유목 누미디아 부족들로부터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카르타고의 농업 기술을 도입하고 많은 누미디아인들에게 정착하여 농부로 살도록 강요했다. 마시니사와 그의 아들들은 누미디아 전역에 대규모 영지를 소유했으며, 로마 작가들은 그에게 누미디아인들의 정착을 완전히 잘못 귀속시켰다.[13] 주요 도시로는 캅사, 두가, 불라 레지아, 히포 레기우스가 있었다.

마시니사는 통치 기간 내내 영토를 확장했으며, 말년에는 로마와 협력하다가 카르타고를 도발하여 자신과 전쟁을 벌이게 했다. 카르타고는 로마와의 조약 때문에 법적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 번은 마시니사가 아들 중 한 명이 히스파니아인들의 공격을 격퇴하도록 돕기 위해 출동해야 했는데, 아마도 기원전 153년 루시타니아인의 침공으로, 카우케누스가 카르타고와 연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타고는 확실히 마시니사의 영토를 약탈하여 이득을 보았다.[13]

그러나 마시니사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희망은, 마시니사와 카르타고 간의 영토 분쟁을 결정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된 로마 위원단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는 기원전 151년 오로스코파 전투에서 푸니크인을 격파했다. 어쨌든, 카르타고의 부활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으로 인해, 또는 승리한 마시니사의 야심에 대한 의심으로 인해, 노년의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는 로마인들 사이에서 카르타고의 파괴를 옹호했고, 마침내 성공했다.[13] 리비의 묘사에 따르면, 누미디아인들은 카르타고 잔여 영토의 남부 및 서부 지역의 약 70개 도시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행동에 분노한 카르타고는 로마 조약을 어기고 누구와도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조항을 위반하여 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년)이 촉발되었다.[13] 마시니사는 기원전 149년 로마 군대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전인 기원전 148년 초에 사망했다. 고대 기록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90세가 넘도록 살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왕국의 군대를 직접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13]

마시니사가 죽은 후, 누미디아는 그의 아들인 미킵사, 구루사, 마스타나발이 지배하는 소왕국으로 분할되었다. 후에 유구르타 전쟁을 일으켜 누미디아를 재통일하려 했던 유구르타는 그의 손자에 해당한다.

4. 말년과 유산

로마의 지원을 받아 마시니사는 카르타고 서쪽에 자신의 왕국인 '''누미디아'''를 건설했으며, 수도는 현재의 콘스탄틴인 키르타였다.[13] 마시니사의 주된 목표는 반유목 누미디아 부족들로부터 강력하고 통일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13] 주요 도시로는 캅사, 두가, 불라 레지아, 히포 레기우스가 있었다.

마시니사는 통치 기간 내내 영토를 확장했으며, 말년에는 로마와 협력하다가 카르타고를 도발하여 자신과 전쟁을 벌이게 했다.[13] 그는 기원전 151년 오로스코파 전투에서 푸니크인을 격파했다.[13] 티투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누미디아인들은 카르타고 잔여 영토의 남부 및 서부 지역의 약 70개 도시 주변을 약탈하기 시작했다.[13] 그들의 행동에 분노한 카르타고는 로마 조약을 어기고 누구와도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조항을 위반하여 전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제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146년)이 촉발되었다.[13] 마시니사는 기원전 149년 로마 군대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동맹에 균열이 생기기 전인 기원전 148년 초에 사망했다.[13] 고대 기록에 따르면 마시니사는 90세가 넘도록 살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왕국의 군대를 직접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13]

기원전 179년에 마시니사는 델로스 주민들로부터 곡물 선적을 제공한 공로로 금관을 받았다.[14] 마시니사를 기리기 위해 델로스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로도스 출신의 한 사람이 델로스에 그를 기리는 비문을 새겼다.[14] 그의 아들들도 델로스 섬에 동상이 세워졌으며,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역시 마시니스를 위해 동상을 헌정했다.[14]

그가 죽은 후, 미킵사가 왕위를 계승했다.[13] 미킵사는 힘프살 1세와 아데르발 두 아들을 두었고, 이들은 사촌 유구르타에게 전복되기 전 잠시 권력을 잡았다. 그의 후손 중에는 누미디아의 유바 1세(기원전 85년–기원전 46년)와 유바 2세(기원전 52년–서기 24년)가 있다.

5. 문화적 영향


  • 페트라르카의 서사시 ''아프리카''(1330년대 후반)
  • 다니엘 카스퍼 폰 로헨슈타인의 독일 비극 ''소포니스베''(1680)
  • 조반니 파스트로네 감독의 이탈리아 고전 무성 영화 ''카비리아''(1914). 마시니사는 비탈레 디 스테파노가 연기했다.
  • 루이지 마니 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아프리카의 스키피오''(1971). 마시니사는 우디 스트로드가 연기했다.
  • 데이비드 앤서니 더럼의 소설 ''카르타고의 자존심''(2005)

참조

[1] 뉴스 Tombeau de Massinissa https://www.youtube.[...] AlgeriePresseService 2017-08-20
[2] 웹사이트 Libyan' Inscriptions in Numidia and Mauretania https://www.worldhis[...]
[3] 간행물 Cambridge History of Africa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백과사전 MASSINISSA ou MASINISA (-240 env.--149) roi des Numides https://www.universa[...]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8-10-01
[5] 서적 OCR Ancient History GCSE Component 2: Rome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7-07-13
[6] 논문 Massinissa
[7] 뉴스 Can North Africa unite over couscous? Gulf News
[8]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Afric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9] 백과사전 Masinissa https://www.perseus.[...] Spottiswoode and Co.
[10] 서적 Villes et tribus du Maroc: documents et renseignements, Volume 7 https://books.google[...] H. Champion
[11] 서적 Histoire du Maroc https://books.google[...] Payot
[12] 서적 Le Maroc https://books.google[...] Hachette
[13] 서적 War, Warlords, and Interstate Relations in the Ancient Mediterranean Brill 2017
[14] 서적 Itineraria Phoenicia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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