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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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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구르타는 누미디아의 왕족 출신으로, 로마 공화정과 대립한 인물이다. 그는 미킵사 왕의 양자가 되어 로마와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하며 로마의 유력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미킵사 사후 왕위 쟁탈전에서 히엠프살을 암살하고 아데르발을 공격하여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이후 유구르타 전쟁을 통해 로마에 저항했으나, 마리우스와 술라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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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르타
기본 정보
유구르타 왕 (사슬에 묶인 모습) 로마인들에게 붙잡히다
유구르타 왕 (사슬에 묶인 모습) 로마인들에게 붙잡히다
통치 기간기원전 118년 – 기원전 105년
이전 통치자미킵사
후임 통치자가우다
출생기원전 160년경, 누미디아
사망기원전 104년, 로마
자녀옥신타스
아버지마스타나발
이름
라틴어Jugurtha
생애
출생지키르타
사망 장소카르케르 마멜티누스

2. 어린 시절

유구르타(Yugrtnber)는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Masinissa)의 손자이자, 마시니사의 아들 중 한 명인 마스타나발(Manastabal)[17]의 서자로 기원전 160년 키르타(현재의 콘스탄티누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마시니사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 공화정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협력하여 카르타고한니발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웠고, 그 대가로 로마로부터 많은 영토를 받아 누미디아의 국력을 크게 키웠다.

마시니사가 기원전 148년에 사망하자, 누미디아 왕위는 그의 적자인 미킵사(Micipsa), 마스타나발, 굴룻사(Gulussa)에게 공동으로 돌아갔다. 리비우스는 세 아들이 왕권을 동등하게 계승했다고 기록했지만, 살루스티우스는 마스타나발과 굴룻사가 병약하여 미킵사가 실질적으로 왕국을 통치했다고 전한다. 마스타나발은 기원전 140년경 사망했다.

어린 유구르타는 용감하고 사냥에 능했으며 너그러운 성품으로 누미디아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이는 숙부이자 왕인 미킵사의 경계심을 샀다. 미킵사는 두 아들 아데르발(Adherbal)과 히엠프살(Hiempsal)을 두고 있었기에, 인망 높은 조카 유구르타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미킵사는 유구르타가 히스파니아에서 진행 중이던 누만티아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하기를 바라며, 그를 로마군 총사령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에게 파견했다.

그러나 미킵사의 기대와 달리, 유구르타는 누만티아 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우며 용맹함을 떨쳤다. 그는 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로마의 여러 유력자들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았고, 이때 가이우스 마리우스와도 함께 싸웠다. 또한 로마 군대와 귀족 사회의 약점이 뇌물에 있음을 간파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구르타의 활약에 깊은 인상을 받은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는 그의 용기와 능력을 칭찬하는 편지를 미킵사에게 보냈다.[19]

스키피오의 편지를 받은 미킵사는 마음을 바꾸어, 마스타나발 사후 비어있던 잠재적 경쟁자이자 인기 있는 조카 유구르타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유구르타는 미킵사의 친아들인 아데르발, 히엠프살과 동등한 왕위 계승권을 가지게 되었다. 미킵사는 기원전 118년에 사망하면서, 왕국을 세 아들(아데르발, 히엠프살, 유구르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고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20]

3. 왕위 쟁탈전과 분쟁

미킵사가 기원전 118년에 사망하자, 그의 왕국은 양아들인 유구르타와 친아들인 아데르발, 히엠프살 1세에게 공동으로 상속되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곧 분쟁이 발생했다. 유구르타는 미킵사가 죽기 전 5년간 병을 앓았다는 이유로 그 기간 동안 내려진 명령들을 무효화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히엠프살은 동의하는 척하며 유구르타가 미킵사의 양자가 된 것이 불과 3년 전임을 지적하며 그의 정통성에 의문을 제기했다.[21] 위협을 느낀 유구르타는 기원전 117년에 히엠프살을 암살했다. 히엠프살은 자신의 영지인 티르미다(Thirmida)에서 습격당해 숨었으나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히엠프살의 죽음에 분노한 형 아데르발은 로마 공화정에 이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기원전 116년 유구르타를 상대로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로마로 도망쳤다. 아데르발은 원로원 앞에서 누미디아마시니사 이래 로마의 충실한 동맹국이었음을 강조하며, 동생을 죽이고 자신을 축출한 유구르타를 처벌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유구르타 역시 사절을 보내 로마 귀족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려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 결국 원로원은 10명의 특사를 파견하여 왕국을 분할하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이 결정으로 누미디아 서부는 유구르타에게, 동부는 아데르발에게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121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포함한 로마 관료들이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 그에게 더 유리하게 영토를 분배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7] 로마 측에서는 나중에 동부 지역도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서부에 비해 인구가 적고 개발이 덜 된 지역이었다.[8]

중재안을 수락한 유구르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야심을 드러내 아데르발의 영토를 침공했다.[22] 아데르발은 수도 키르타(Cirta)로 피신하여 농성했다. 로마는 사절을 보내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고 요구했지만, 유구르타는 이를 무시했다. 키르타 성 안에 있던 로마와 이탈리아 상인들은 아데르발에게 항복을 권유했고, 결국 아데르발은 압박에 못 이겨 항복했다. 그러나 유구르타는 약속을 어기고 아데르발을 처형했으며, 성 안에서 저항했던 모든 사람을 학살했다.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여론은 들끓었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일부 귀족들이 사건을 무마하려 했으나,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이들의 부패를 대중에게 폭로하며 유구르타 토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원로원은 당시 집정관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에게 토벌 임무를 맡겼다. 베스티아는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몇몇 도시를 함락시켰지만, 결국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고 서둘러 전쟁을 마무리한 뒤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서는 부패한 관료들에 대한 처벌과 유구르타 응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호민관 멤미우스는 민회를 설득하여 당시 법무관이었던 루키우스 카시우스를 파견하도록 했다. 카시우스는 유구르타를 설득하여 로마로 와서 직접 해명하도록 했다. 유구르타는 로마로 갔고, 멤미우스에 의해 로마 시민들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유구르타에게 매수된 또 다른 호민관 가이우스 바이비우스의 방해로 심문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때 로마의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는 마시니사의 다른 손자인 맛시바(Massiva)를 부추겨 누미디아 왕위를 노리도록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구르타는 부하 보밀카르를 시켜 맛시바를 암살했다. 이로 인해 유구르타와 보밀카르는 로마에서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유구르타는 배심원 50명에게 뇌물을 주어 무죄 판결을 받으려 했으나, 상황이 불리해지자 왕위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보밀카르를 먼저 누미디아로 탈출시킨 뒤 자신도 로마를 떠났다. 이에 원로원은 유구르타에게 추방령을 선포했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이때 유구르타는 이탈리아를 떠나면서 로마를 "urbem venalem et mature perituram, si emptorem invenerit|la"라고 비웃었다고 한다.[23]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프리카로 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그의 동생인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가 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이미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아울루스는 불안감 속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유구르타의 도시 수툴(Suthul)을 성급하게 공격했다. 유구르타는 회담을 제안하는 척하며 아울루스를 유인한 뒤, 로마 병사들에게까지 뇌물을 뿌려 매수했다. 적절한 시점에 유구르타는 아울루스의 군대를 포위했다. 로마군은 저항했지만, 뇌물을 받은 트라키아 출신 기병대와 리구리아 출신 보조병들이 배신하여 유구르타에게 투항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로마군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유구르타는 아울루스와 협상하여, 로마군이 무장을 해제하고 멍에 아래를 지나가는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제안했다.[24]

이 치욕적인 패배 소식은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시민들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스푸리우스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유구르타와의 협정을 승인해달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원로원은 굴욕적인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결국 원로원은 기원전 109년의 새로운 집정관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유구르타를 완전히 토벌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4. 유구르타 전쟁

기원전 118년 미킵사 왕 사후, 누미디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 끝에 유구르타는 공동 통치자였던 힙살을 살해하고 아데르발마저 공격했다. 로마는 기원전 116년경 개입하여 왕국을 분할했으나, 이 과정에서 유구르타의 뇌물이 작용했다는 의혹이 일었다.[7][8]

기원전 112년, 유구르타는 다시 아데르발을 공격하여 수도 키르타를 함락시키고, 아데르발을 포함하여 저항하던 로마 및 이탈리아 상인들까지 학살했다.[9] 이 사건은 로마의 개입을 촉발하여 유구르타 전쟁이 발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초기 로마의 대응은 베스티아나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같은 지휘관들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으며, 특히 아울루스는 유구르타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당하기까지 했다.[9][11][24]

이에 원로원은 기원전 109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를 파견했다. 메텔루스는 군 기강을 확립하고 무툴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25] 유구르타의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과 지형을 이용한 저항으로 인해 전쟁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11] 전쟁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메텔루스의 부관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기원전 107년 집정관에 당선되어 전쟁 지휘권을 넘겨받았다.[12]

마리우스는 군대를 재정비하고 공세를 이어갔으며, 유능한 재무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합류했다. 전쟁의 결정적인 국면은 유구르타의 동맹이었던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쿠스 1세와의 외교전에서 마련되었다. 술라는 뛰어난 외교력을 발휘하여 보쿠스를 설득했고, 결국 보쿠스는 기원전 105년 유구르타를 배신하고 그를 체포하여 술라에게 넘겨주었다.[13][36]

로마로 압송된 유구르타는 기원전 104년 마리우스의 개선식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툴리아눔 감옥에서 처형되었다.[14]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승리는 마리우스의 명성을 드높였으나, 유구르타 생포의 실질적인 공로자였던 술라와의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4. 1. 로마의 초기 대응과 유구르타의 저항 (기원전 112년 ~ 기원전 109년)

기원전 112년, 유구르타는 공동 통치자 아데르발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그를 수도인 키르타에 가두었다.[22] 아데르발은 로마 공화정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하며 도시 내 로마 거주자들의 도움을 받아 항전했다. 로마는 사절단을 보내 협상을 촉구했으나 유구르타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당시 킴브리 전쟁에 투입되어 있었기에 지원은 지연되었다. 결국 키르타 내의 로마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은 아데르발에게 항복을 권유했고, 아데르발은 버텼으나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유구르타는 항복한 아데르발을 포함하여 성 안에서 저항했던 모든 사람을 살해했으며, 이 과정에서 로마인을 포함한 많은 거주민이 학살당했다.[9]

이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여론은 격분했다. 유구르타에게 뇌물을 받은 일부 귀족들이 사태를 무마하려 했으나, 호민관 가이우스 멤미우스가 이 사실을 폭로하며 유구르타에 대한 강경 대응을 촉구했다. 결국 원로원은 기원전 111년 집정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베스티아에게 군대를 이끌고 유구르타를 징벌하도록 명령했다. 베스티아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몇몇 도시를 함락시키는 등 초기 성과를 거두었으나, 로마의 중장보병은 누미디아의 기병 중심 군대를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9] 결국 베스티아는 유구르타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고 서둘러 유리한 조건의 평화 조약을 체결한 뒤 로마로 귀환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로마에서는 베스티아를 비롯한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유구르타를 응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호민관 멤미우스는 당시 법무관이었던 루키우스 카시우스를 파견하여 유구르타를 로마로 소환하도록 민회를 설득했다. 카시우스의 설득에 유구르타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로마에서 유구르타는 멤미우스에 의해 심문을 받았으나, 그에게 뇌물을 받은 또 다른 호민관 가이우스 바이비우스의 방해로 심문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와중에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누미디아 왕족인 마시바(Massiva)를 부추겨 왕위를 노리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구르타는 부하 보밀카르를 시켜 마시바를 암살했다.[9] 이 사건으로 유구르타는 로마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50명의 배심원에게 뇌물을 주어 무죄 판결을 사전에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유구르타는 보밀카르를 먼저 누미디아로 빼돌린 뒤 자신도 로마를 떠났다. 이에 원로원은 유구르타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유구르타는 이탈리아를 떠나면서 로마를 "urbem venalem et mature perituram, si emptorem invenerit|우르벰 베날렘 에트 마투레 페리투람, 시 엠프토렘 인베네리트la" (사들이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팔려서 쉽게 망할 도시)라고 비웃었다고 한다.[23]

기원전 110년, 집정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구르타를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로마로 돌아갔다. 지휘권을 넘겨받은 그의 동생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이미 유구르타에게 매수된 상태였다. 그는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유구르타의 도시 수툴(Suthul)을 공격했다. 유구르타는 회담을 제안하며 아울루스를 유인한 뒤, 미리 매수한 로마 병사들과 트라키아 및 리구리아 출신 보조병들의 배신을 이용해 로마군을 포위했다. 로마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기와 군장을 버린 채 치욕적으로 패주했다. 유구르타는 아울루스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로마군 전체가 멍에 아래를 지나가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퇴각을 허락했다.[24] 이 패배로 아울루스가 이끌던 로마군은 누미디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11]

이 소식은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고,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는 거센 비난에 직면했다. 그는 원로원과 시민들에게 유구르타와의 협정을 승인해달라고 설득하려 했으나, 원로원은 이 굴욕적인 조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결국 원로원은 기원전 109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에게 유구르타 토벌의 임무를 맡겼다.

4. 2. 메텔루스의 군사 작전과 마리우스의 등장 (기원전 109년 ~ 기원전 107년)

기원전 109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는 아프리카 속주에 도착하여 기강이 해이해진 로마군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며 재정비한 뒤 누미디아로 진격했다.[11] 유구르타는 과거 아울루스 포스투미우스 군대를 상대로 성공했던 계략을 다시 시도했으나 메텔루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양군은 무툴(Muthul) 강에서 격돌했다. 메텔루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부장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P. Rutilius Rufus)에게 강가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후위를 맡긴 채 언덕에서 내려와 서서히 전진했다. 유구르타는 2,000명의 병력으로 로마군이 떠난 언덕을 점령하게 하고, 주력 부대로 로마군을 급습했다. 유구르타는 메텔루스 군대를 포위하고 기병대를 이용한 치고 빠지기 전술로 로마군을 괴롭혔으나, 전투는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메텔루스는 병력을 재정비하여 원래 있던 언덕으로 돌아가 유구르타의 분견대를 격파했다. 한편, 유구르타의 부하 보밀카르는 루틸리우스를 공격했지만, 메텔루스 본대의 기습을 받았다. 유구르타의 코끼리 부대는 지형 장애물에 막혀 제대로 기동하지 못했고, 결국 유구르타 군대는 크게 패하여 흩어졌다.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코끼리 4마리를 생포하고 40마리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25]

무툴 강 전투 승리 후 메텔루스의 로마군은 누미디아 곳곳을 황폐화시키며 진군했다. 유구르타는 본대에서 이탈한 로마군 분견대를 노리는 게릴라 전술로 대응했다. 메텔루스는 군대를 자신과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지휘하는 두 부대로 나누어, 농경지를 불태우고 식량을 약탈하며 이동했다. 유구르타 역시 로마군의 예상 경로에 있는 우물을 파괴하고 기습 공격으로 로마군을 지치게 만들었다.

메텔루스는 누미디아 왕국의 중요 거점인 자마(Zama)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유구르타는 서둘러 자마로 들어가 수비를 강화했다. 이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의 명령으로 시카(Sicca)에서 식량을 징발 중이었다. 유구르타는 시카 주민들에게 마리우스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으나, 마리우스는 이를 간파하고 물리친 뒤 자마의 메텔루스 본대와 합류했다. 자마에서는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고, 유구르타는 로마군이 자마를 포위 공격하는 동안에도 별동대를 이끌고 로마군 본영을 대담하게 급습하기도 했다. 결국 로마군은 자마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아프리카 속주로 철수했다.[26] 한편, 메텔루스는 유구르타의 부하 보밀카르에게 접근하여 협력하면 로마 원로원에 알려 죄를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보밀카르는 이 약속을 믿고 유구르타에게 로마 항복과 조약 체결을 권유했다. 유구르타는 메텔루스에게 항복하고, 은 20만 파운드와 코끼리, 다수의 가축과 말을 로마군에 넘기기로 합의했다.[27] 그러나 유구르타는 곧 항복의 득실을 재고하고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C. Marius). 7선 집정관으로 유명한 그는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휘하로 처음 유구르타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기원전 107년에는 집정관으로 당선되어 자신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한편,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자신이 일곱 번 집정관이 될 것이라는 예언에 고무되어 메텔루스에게 군 복무 해제를 요청하며 집정관 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귀족 출신 메텔루스는 평민인 마리우스를 얕보며, 나중에 자신의 아들과 함께 출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하며 사실상 거절했다.[28] 이에 분노한 마리우스는 소극적으로 복무하며,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면 유구르타를 반드시 사로잡아 전쟁을 끝낼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당시 총사령관 막사에 있던 누미디아 왕족 가우다(Gauda)[29]가 메텔루스에게 왕위 계승 인정과 로마인 호위대 파견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마리우스는 실망한 가우다에게 접근하여 여러 약속으로 그를 회유했다.

기원전 108년, 유구르타는 로마 공화정 지배하의 바카(Vacca) 시에 공작원을 보내 주민들을 선동, 로마군을 배반하고 자신에게 합류하도록 했다. 주민들은 로마 주둔군 사령관 티투스 투르필리우스 실라누스(T. Turpilius Silanus)와 천부장, 백인대장들을 연회에 초대한 뒤, 투르필리우스를 제외한 모든 로마군을 살해했다. 소식을 들은 메텔루스는 즉시 보복에 나서, 로마 보병대와 누미디아 기병대를 이끌고 밤낮으로 달려 바카로 향했다. 지친 병사들이 행군을 거부하자, 메텔루스는 도시 약탈을 허락하고 복수심을 자극하여 겨우 설득했다. 바카 주민들은 접근하는 군대를 유구르타 지원군으로 착각하고 성문을 열었다가 로마군의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에 직면했다. 투르필리우스는 메텔루스 앞에 끌려와 심문받고 채찍질당한 후 참수되었다.[30]

한편, 유구르타의 부하 보밀카르는 주군에 대한 반역을 결심하고, 유구르타의 신임을 받던 나브달사(Nabdalsa)와 공모했다. 그러나 나브달사가 망설이는 사이 계획이 유구르타에게 발각되었다. 유구르타는 나브달사는 용서했지만, 보밀카르는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유구르타는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어 조언자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매일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 사이 메텔루스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유구르타를 공격하여 누미디아 군대를 격파하였다. 유구르타는 사막을 가로질러 부유한 도시 탈라(Thala)로 도망쳤다. 탈라는 유구르타에게 충성심이 높고 지형적으로 방어에 유리했으며, 유구르타는 자식들과 보물을 이곳에 두었다. 유구르타는 중요한 물품을 미리 빼돌리고 농성전을 준비했다. 메텔루스는 약 40일간 탈라를 포위 공격했다. 결국 함락이 임박하자 절망한 탈라 주민들은 왕궁에 금은보화와 음식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메텔루스는 도시를 점령했다. 유구르타는 겨우 탈출했다. 당시 누미디아는 황폐해졌고 대부분 지역이 로마군 수중에 들어갔다. 유구르타는 사막의 베르베르인들을 훈련시켜 군대를 재건하고, 장인이자 마우레타니아의 왕인 보쿠스 1세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그의 신하들에게 뇌물을 주어 협력을 얻어냈다. 동맹을 맺은 두 왕은 군대를 이끌고 메텔루스가 점령한 누미디아수도 키르타(Cirta)로 향하였다. 메텔루스는 즉각적인 전투를 피하고 보쿠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려던 중, 로마에서 자신의 부하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집정관에 당선되었고 아프리카가 그의 임지로 배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12] 이에 메텔루스는 전투 의지를 상당 부분 잃고, 보쿠스에게 비밀 사절을 보내 전쟁과 평화의 이해득실을 설명하며 협상을 시도했다. 보쿠스는 이에 마음이 움직였고, 메텔루스는 전투 없이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기원전 107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 시민 중 재산이 없어 병역 의무가 없던 '머릿수로 헤아려지는 자들'(무산자, capite censi) 가운데서도 병사들을 추가로 선발하여 군대를 증강했다.[31] 메텔루스는 자신의 부하였던 마리우스가 후임자로 오는 것에 치욕을 느끼고, 직접 인계하지 않고 부장 루틸리우스를 통해 마리우스에게 군대를 넘기도록 했다. 메텔루스는 로마로 돌아왔고, 로마 원로원과 시민들은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누미디쿠스(Numidicus)'라는 경칭을 부여했다.

마리우스는 즉시 전투를 재개하여 캅사(Capsa, 오늘날 튀니지의 가프사) 공략에 나섰다. 마리우스는 밤낮으로 행군하여 방비가 허술한 도시를 기습,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성 주민들을 학살하며 도시를 약탈했다.[32] 이후 마리우스는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의 국경인 물루카 강(Mulucha, 오늘날 알제리의 물루야 강)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기 전, 유구르타가 보물을 쌓아둔 요새가 마리우스의 눈에 띄었다. 마리우스는 이 요새를 공략하기로 했으나, 험준한 지형 때문에 공격은 지지부진하고 전사자만 늘어갔다. 그러나 우연히 요새 뒤편으로 통하는 길이 발견되었고, 마리우스는 기만 전술을 사용하여 요새 뒤에서 전투 나팔을 불게 했다. 수비군이 혼란에 빠진 사이, 로마군은 정면에서 성문을 맹렬히 공격하여 결국 함락시켰다.[33]

유구르타는 보쿠스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겨울 숙영지로 향하던 마리우스의 로마군을 기습했다. 마우레타니아 병사들의 기습에 로마군은 원형 진형을 만들어 겨우 공격을 막아냈다. 밤이 되자, 마우레타니아 병사들은 승리를 예감하며 밤새 잔치를 벌였고, 로마군은 결의를 다졌다. 마리우스는 마우레타니아 병사들이 경험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날이 밝아오자 밤새 지친 적들을 기습 공격했다. 마우레타니아군은 크게 무너졌고, 마리우스는 승리한 로마군을 이끌고 해안가에 겨울 숙영지를 마련했다.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마리우스는 이때 직접 경계 근무자들을 순찰하며 일반 병사들과 고충을 함께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한다.[34]

로마군이 키르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도착했을 때, 유구르타와 보쿠스가 이끄는 병력이 다시 공격해왔다. 마우레타니아누미디아 병사들은 대열 없이 사방에서 공격해왔다. 마리우스는 당황하지 않고 진형을 유지하며 방어했다. 이때 마리우스 휘하의 재무관으로 부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보쿠스 왕이 이끄는 보병대를 격파했다. 한편, 마리우스가 이끄는 본대는 유구르타 군대와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보쿠스 군대를 물리친 술라가 병력을 이끌고 돌아와 유구르타를 공격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누미디아마우레타니아 연합군은 크게 패했고, 로마군은 승리하여 누미디아수도키르타에 입성했다.

4. 3. 마리우스의 지휘권 장악과 유구르타의 최후 (기원전 107년 ~ 기원전 104년)

기원전 107년, 메텔루스의 부관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집정관에 당선되어 유구르타 전쟁의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2] 그는 누미디아로 가서 게릴라전을 펼치던 유구르타를 상대했으며, 유능한 부관 술라를 휘하에 두었다.

유구르타는 자신의 장인이자 마우레타니아의 왕인 보쿠스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대항했다.[13] 그러나 기원전 106년, 전투에서 패배한 보쿠스는 로마 공화정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며 마리우스에게 사절을 보냈다. 마리우스는 술라와 만리우스를 파견했고, 술라는 보쿠스에게 로마 투항을 설득하려 했으나 보쿠스는 유구르타와의 관계 때문에 망설였다.[35]

한편 마리우스는 군사 작전을 계속했고, 술라는 아프리카 속주의 우티카에서 외교 활동을 벌였다. 그는 로마로 가던 중 도적에게 습격당한 보쿠스의 사절단을 우티카에서 보호하며 환심을 샀다. 이후 마리우스는 키르타에서 이 소식을 듣고 사절들을 불러 일부를 로마로 보냈다. 로마 원로원은 보쿠스의 죄를 사면하고 마우레타니아를 로마의 동맹국으로 인정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보쿠스는 마리우스에게 다시 술라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술라는 펠리그니족 궁병대, 발레아레스인 투석병, 약간의 기병 등 소규모 호위대와 함께 마우레타니아로 향했다. 이동 중 유구르타 군대의 매복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으나, 술라는 침착하게 대처하여 위기를 넘기고 보쿠스에게 무사히 도착했다.

술라는 보쿠스와의 담판에서 유구르타를 생포하여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동시에 유구르타는 보쿠스에게 술라를 포로로 잡아 로마와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두 제안 사이에서 고민하던 보쿠스는 결국 유구르타를 배신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체포하여 기원전 105년 술라에게 넘겨주었다.[13][36] 술라는 유구르타를 쇠사슬로 묶어 키르타의 마리우스에게 보냈고, 이로써 길었던 유구르타 전쟁은 마침내 종결되었다.

thumb 주화, 앞면: 디아나, 명문 FAVSTVS. 뒷면: 술라가 솟아오른 자리에 앉아 있고, 그 앞에 보쿠스가 무릎을 꿇고 올리브 가지를 바치고 있다. 뒤에는 유구르타가 왼쪽으로 무릎을 꿇고 있고, 명문 FELIX가 있다. 기원전 56년.]]

로마로 끌려간 유구르타는 기원전 104년 마리우스개선식에서 로마 시민들 앞에 전시되는 치욕을 당했다. 그의 왕실 의복은 벗겨지고 귀걸이는 강제로 뜯겨 나갔으며, 이 과정에서 귓불 하나를 잃었다고 전해진다. 개선식이 끝난 후, 그는 툴리아눔(카르케르 마멜티누스) 감옥에 던져져 굶주림 또는 교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14]

유구르타를 실제로 포박하여 넘겨받은 것은 술라였지만, 전쟁 승리의 영광은 총사령관 마리우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술라는 자신이 유구르타를 사로잡았다는 공적을 강조하며 이를 기념하는 반지를 만들어 착용하는 등 공을 내세웠고, 이는 훗날 마리우스와 술라 간의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North African Stones Speak 2000
[2] 웹사이트 Jugurtha https://journals.ope[...]
[3] 웹사이트 Libyco-Berber alphabet of Tunisia http://www.institutu[...]
[4] 저널 Numidia https://academic.eb.[...] 2020-03-31
[5] 서적 The Jugurthine War https://www.perseus.[...] Tufts Perseus Digital Library
[6] 백과사전 Jugurtha https://academic.eb.[...] 2020-03-31
[7] 서적 Lives of Tiberius and Gaius Gracchus Ox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The Jugurthine War/The Conspiracy of Catiline. Translated with an introduction by S. A. Handford Penguin 1963
[9] 서적 A History of Rome 1975
[10] 저널 Jugurtha https://academic.eb.[...] 2020-03-30
[11] 저널 Jugurtha https://academic.eb.[...] 2020-03-30
[12] 저널 Jugurtha https://academic.eb.[...] 2020-03-30
[13] 저널 Bocchus I https://academic.eb.[...] 2020-03-31
[14] 서적 The Poison King: The Life and Legend of Mithradates
[15] 저널 Rimbaud's ode to Jugurtha 2015
[16] 문서 Jugurtha 1869
[17] 문서 살루스티우스는 Manastabal, 리비우스는 Mastanabal로 표기하였다
[18] 문서 리비우스 Periocha 50 ,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5.
[19]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9.
[20]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10.
[21]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11. 이 말은 즉, 유구르타가 미킵사 왕의 양자가 된 것이 3년 전의 일이므로, 유구르타의 제안에 의해 미킵사가 죽기 이전 5년 동안의 명령을 철회하면 자연스레 유구르타가 미킵사 왕의 양자가 되어 왕권을 계승한 일도 무효라는 뜻이 된다.
[22]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20.
[23]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35. 리비우스 Periocha 64
[24]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38.
[25]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53.
[26]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60.
[27]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63.
[28]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64.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8.
[29] 문서 나중에 가우다가 [[누미디아]]의 왕이 된다. 그는 히엠프살 2세의 아버지이고, 나중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맡붙은 유바 1세의 할아버지이다.
[30]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69. 플루타르코스 마리우스 8.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투르필리우스는 원래 죄가 없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마리우스]]가 모함하여 메텔루스가 할 수 없이 처형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살루스티우스]]에 따르면 그러한 언급이 없고, 휘하 병력들을 버리고 홀로 몸을 빼낸 죄를 물은 것처럼 서술되어 있다.
[31]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86.
[32]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91
[33]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93.
[34]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100.
[35] 문서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102.
[36] 서적 살루스티우스 유구르타 전기
[36] 서적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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