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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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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기원전 236년에 태어난 고대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활약한 로마의 장군이다. 그는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히스파니아와 아프리카에서 로마의 세력을 확장했다.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탄압을 받으며 은퇴했다. 스키피오는 로마의 군사, 정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로마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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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코가 없는 흰색 흉상
원래 가족 무덤 근처에서 발견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흉상(이전에는 술라로 식별됨)
이름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마요르
로마자 표기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 Major
출생기원전 236년 또는 235년
출생지로마
사망기원전 183년경
사망지리테르눔
국적로마
배우자아이밀리아 테르티아
자녀4명 (코르넬리아 포함)
아버지푸블리우스 스키피오
친척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형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입양 손자),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외손자)
별칭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대 스키피오
출신 계급파트리키
가문스키피오 가문
씨족코르넬리우스 씨족
군 경력
복무로마군
계급장군
주요 전투제2차 포에니 전쟁, 시리아 전쟁
참전 전투티키누스 전투
빅투물라에 전투
칸나이 전투
카르타헤나 전투
바에쿨라 전투
일리파 전투
우티카 공방전
우티카 전투
대평원 전투
자마 전투
마그네시아 전투
공직
트리부누스 밀리툼기원전 216년
아이딜리스 쿠루리스기원전 213년
프로콘술 (스페인)기원전 216년–210년
집정관기원전 205년
프로콘술 (아프리카)기원전 204년–201년
켄소르기원전 199년
집정관기원전 194년
레가투스기원전 193년, 190년, 184년
살리기원전 211년-184년경
프린켑스 세나투스기원전 199년, 194년, 189년
상대한니발
업적
주요 업적한니발 격파

2. 초기 생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명문 스키피오 가문에서 태어났다. 제2차 포에니 전쟁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의 군대를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며,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는 이를 기념하여 붙은 것이다.[1]

스키피오는 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강 전투에서 17세의 나이로 아버지 스키피오와 함께 참전하였다.[2]

2. 1. 가문 배경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기원전 236년, 집정관과 검열관을 다수 배출한 명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네 가문에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와 폼포니아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증조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바르바투스와 할아버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모두 집정관과 검열관을 역임했다. 그의 가문은 주요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 스키피오는 신전에 가서 신들의 꿈이나 징조를 보았다고 하며, 주변의 권유로 일찍 공직에 진출하여 원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2. 2. 초기 군사 경력

제2차 포에니 전쟁 초기, 스키피오는 아버지 스키피오와 함께 참전하여 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강 전투에서 경험을 쌓았다.[2] 티키누스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포위된 아버지를 구출했다고 전해진다.[2]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대패한 후, 스키피오는 카누시움(Canusium)에서 생존자들을 결집하여 저항을 이어갔다.[3] 그는 로마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젊은 귀족들을 칼로 위협하여 로마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고 한다.[3]

기원전 212년, 스키피오는 쿠루레 에딜(curule aedile)로 선출되어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5] 그의 출마는 법정 연령 미달로 호민관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대중의 열렬한 지지로 반대를 철회시켰다.[6]

3. 제2차 포에니 전쟁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205년 만장일치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는데, 당시 31세로 법적 나이 제한에 미달했음에도 여론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19] 집정관이 되자마자 원로원에 아프리카 속주를 요구하며 인민회의에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위협했고, 원로원은 이에 굴복하여 시칠리아를 할당하고 아프리카로 건너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20]

원로원은 스키피오에게 추가 병력을 배정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지지자들로부터 자원병을 모집하여 약 30척의 전함과 7,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시칠리아에서 아프리카 침공을 위한 군대를 준비했고, 로크리를 점령하기도 했다.

기원전 205년까지 임기가 연장된 스키피오는 아프리카로 건너가 우티카를 포위 공격했다가 철수하고, 겨울 동안 카르타고인들과 협상하는 척하며 야습을 감행하여 적진을 파괴했다. 이후 대평원 전투에서 승리하고 누미디아의 십삭스를 사로잡아 마시니사를 왕위에 복위시켰다.

카르타고는 이탈리아에 있던 한니발과 마고 장군을 소환하고, 스키피오의 함대에 맞서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다. 스키피오는 우티카 근처에서 해전을 치러 피해를 최소화했다. 이후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기근에 시달리던 카르타고인들이 로마의 식량 수송대를 공격하여 결렬되었다.

기원전 202년,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카르타고는 다시 평화를 요청했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식되었다.

기원전 201년,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에 남아 협상을 마무리했다. 카르타고는 전쟁 전 영토를 유지하고, 로마에 빼앗긴 물품과 사람들을 반환하며, 10척의 삼단노선을 제외한 모든 무기를 해체하고, 전쟁을 하려면 로마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영토는 확인되었고, 1만 탈란트의 전쟁 배상금은 향후 50년 동안 지불될 예정이었다. 로마 의회에서 평화 조건이 비준되어 전쟁이 최종적으로 종식되었다.

3. 1. 히스파니아 원정 (기원전 211년 ~ 기원전 206년)

기원전 210~206년 히스파니아에서의 로마 원정


하스드루발 바르카(한니발의 동생, 기원전 245~207년)를 묘사한 카르타고 동전. 왕관을 쓰고 있다.


기원전 211년, 아버지와 삼촌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루스가 바에티스 강 전투에서 전사하자, 스키피오는 25세의 젊은 나이로 히스파니아 방면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51] 당시 에브로 강 서쪽 히스파니아는 완전히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있었고,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하스드루발 기스코가 통치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해로로 에브로 강 유역에 상륙하여 카르타고 노바(현 카르타헤나)를 기습 점령하여 카르타고군을 놀라게 했다.[51] 그는 카르타고 노바의 재력을 바탕으로 히스파니아 현지 주민들을 매수하고, 카르타고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현지 부족으로부터 승전 축하 선물로 아름다운 딸을 첩으로 받았으나, 약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부모로부터 받은 금은을 더하여 딸을 약혼자에게 돌려보냈다고 한다.[51] 또한, 기동성이 좋은 짧은 검인 글라디우스도 이곳 공방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은 기대할 수 없었기에,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 현지 주민으로 구성된 군단을 편성했다.

기원전 209년, 바에쿨라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격파했다. 그러나 다른 카르타고 세력을 경계한 스키피오는 신중한 행동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하스드루발은 추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퇴각했다. 이것은 후에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로마령 갈리아 트란살피나에 침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52]

기원전 206년에는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 군을 대파하여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평정했다.

3. 2. 아프리카 원정 (기원전 204년 ~ 기원전 201년)

기원전 204년, 원로원의 허가를 받은 스키피오는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우티카(Utica) 근교에 상륙하여 우티카를 포위했으나, 친 카르타고파가 된 누미디아 왕 슈팍스(Syphax)의 방해로 실패했다.[54] 그러나 이듬해 스키피오는 카르타고-누미디아 연합군을 야습으로 격파했다. 폴리비오스(Polybius)는 연합군이 4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패전으로 주도권을 잃은 슈팍스는 전선에서 이탈했다.[54]

스키피오는 라일리우스(Laelius)와 마시니사(Massinissa)를 보내 슈팍스를 누미디아까지 추격하여 왕위에서 몰아내고 마시니사를 새로운 누미디아 왕으로 세웠다(바그라데스 강 전투(Battle of Bagradas), 킬타 전투(Battle of Cirta)). 그때까지 한니발을 포함한 카르타고 군은 기병 병력을 누미디아 병사들에게 의존했지만, 이때 누미디아가 로마 진영에 붙게 되면서 카르타고는 고립 상태에 빠졌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의 등장으로 열세에 빠졌고, 한때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격파했던 로마군도 히스파니아 전투를 통해 질 높은 군대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동요한 카르타고는 외교 협상을 시도하면서 한니발에게 카르타고 귀환을 요청했다. 한니발은 수십 년 만에 모국 카르타고로 돌아오게 된다.[55] 한니발의 귀환으로 강성해진 카르타고는 스키피오가 제안한 평화 조건을 거부했다. 외교 협상은 결렬되었다.

양 군은 카르타고와 우티카의 중간 지점인 자마에서 대치했다. 양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한니발군스키피오군
보병58,000명34,000명
기병6,000기8,700기



기원전 202년 10월 9일, 서로의 군대가 대치하는 가운데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회견하여 협상을 통한 해결을 시도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고, 한니발도 스키피오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한니발은 더 이상의 무익한 전투를 그만두고 휴전 협상에 들어갈 것을 제안했지만,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사군툼 포위가 애초의 발단이었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평화 조건을 후퇴시키지 않겠다고 말해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양측은 자진하여 전투 준비를 한다.

기병에서 열세인 한니발은 전통적인 중장보병을 중심으로 3열로 두터운 진형을 구축하고, 전면에 전투 코끼리를 배치했다. 이에 대해 스키피오는 마니풀루스를 중심으로 소집단을 체크무늬(퀸칸투스 대형)처럼 배치하고, 우익에 마시니사가 이끄는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했다.

『자마 전투』(Cornelis Cort, 1567)


전투가 시작되자 먼저 한니발의 전투 코끼리 부대가 돌격했다. 이에 대해 소집단의 기동력을 활용한 로마군은 유연한 회피 작전을 취하고, 중장보병 전열에 배치된 경보병의 교란 공격과 투창 공격으로 전투 코끼리는 대열을 무너뜨리고 폭주하여 혼란에 빠졌다. 마시니사의 누미디아 기병과 라엘리우스가 이끄는 로마 기병은 열세로 후퇴하는 카르타고 기병을 추격하여 주전장에서 이탈했고, 남은 보병 전열끼리 격렬한 접전을 벌였다. 보병끼리의 전투는 극도로 치열했지만, 보병을 지휘하던 스키피오는 병사들의 피로를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지하고 전선을 옆으로 넓혀, 아직 공격에 참여하지 않은 한니발의 주력을 포위하는 형태로 공격했다. 거기에 적 기병을 격파하고 돌아온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 보병의 사각지대인 후방에서 공격해 들어왔고, 한니발이 로마군을 격파했던 칸나이 전투와 같은 포위 섬멸이 실현되면서 한니발군은 대패했다. 이 승리로 스키피오는 사실상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식시켰다.

전후, 스키피오는 숙적 카르타고에 관대한 방침으로 임했다. 많은 로마인은 스키피오가 카르타고 포위 공격에 착수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한니발도 처벌받지 않고 휴전이 성립했다. 스키피오의 이러한 전후 처리 방침은 많은 젊은 로마인들(그중에는 후에 스키피오를 탄핵하는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가 있었다)의 반감을 사게 된다.

그리스 문화를 좋아하고 개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스키피오는 한니발이야말로 전후 카르타고 부흥을 담당할 인재이며, 그를 용서하는 것은 카르타고의, 그리고 로마 자신의 전후 처리에 매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고국이 한니발에게 유린당하고 친척들이 차례로 살해되는 것을 보면서 자란 카토 등에게는 한니발은 동포 로마인들에게 참수, 십자가형 등 잔혹한 짓을 한 인물이었고, 숙적에 대한 스키피오의 처우는 너무 관대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스키피오의 말년에 정치적 대립으로 표면화된다.

4.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스키피오는 기원전 199년 감찰관에 선출되어 기원전 195년까지 역임했다. 그는 새로운 전술을 채용하고 무기를 개량하여 로마의 전법을 발전시켰으며,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물리친 이후 '알렉산더의 재현'이라고 불리며 존경받았다.[24] 또한 15년간 원로원 제일인자인 프린켑스를 지냈다.

4. 1. 정치 활동

스키피오는 로마로 돌아와 한니발과 카르타고, 십팍스에 대한 개선식을 거행하고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24] 귀환 후 그는 약 약 55791.82kg의 은을 로마 국고에 납입하고 병사들에게 각각 400아스를 분배했다.[25]

기원전 199년, 스키피오는 감찰관에 선출되어 기원전 195년까지 역임했다. 이후 15년 동안 원로원 제일인자인 프린켑스를 지냈다. 기원전 194년과 기원전 190년에는 실질적인 집정관이 되어 안티오코스 군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물리쳤다. 기원전 190년 시리아 원정에서도 공을 세웠다.

그러나 평민들 사이에서 그의 놀라운 인기는 많은 로마 귀족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주로 그의 권력 확대에 반대하거나 질투심을 느꼈다. 집정관 재임 중에도 스페인에서 왕이자 신으로 환영받았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파비우스 막시무스 등의 반대에 직면했다.

기원전 184년, 정적인 대 카토의 음모로 동생이 쓴 500탈렌트의 사용처를 추궁받으며 고발되었고, 결국 원로원에서 물러났다.

4. 2. 스키피오 가문 탄압 사건

기원전 187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 루키우스는 안티오코스 3세에게서 부적절한 금전을 받았다는 혐의로 민중 관리 퀸투스 페티리우스 스프리누스에게 고발당했다.[24] 스키피오는 동생의 전비 기록을 원로원에서 찢어버리며 "1만 5천 탈렌트 배상금을 어떻게 얻었는지 묻지 않고, 3천 탈렌트만 추궁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라고 항변했다.[24] 스키피오의 강경한 태도에 고발은 취하되는 듯했으나, 그가 죽은 뒤 루키우스는 다시 고발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24] 이는 대 카토의 음모로 추정된다.[24]

기원전 185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자신도 안티오코스 3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24] 이날은 자마 전투 승전 기념일이었고, 스키피오는 군중을 신전 참배로 이끌어 자신의 업적을 기리게 했다.[24] 그러나 스키피오는 궁지에 몰렸고, 유죄 판결 직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마이오르(그라쿠스 대)가 그를 변호하여 무죄를 이끌어냈다.[24] 이후 스키피오는 정계에서 은퇴했고, 대 카토가 원로원에서 영향력을 키웠다.[24]

스키피오는 막내딸 코르넬리아를 그라쿠스와 결혼시키기로 약속했다.[24]

5. 은퇴와 죽음

스키피오는 캄파니아 지방의 리테르눔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다시는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기원전 183년경 사망했는데, 묘하게도 같은 시기에 그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한니발도 로마의 끈질긴 추격 끝에 망명을 거듭하다 비티니아에서 자살했다.[29]

스키피오 말년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사인 또한 불명확하다. 동시대인의 기록에서 그의 죽음이나 장례에 대한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죽음을 앞둔 스키피오는 선조들의 무덤에 묻히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묘비에 "배은망덕한 나의 조국이여, 너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새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었는지, 최후를 맞이한 리테르눔에 매장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약 150년 후 로마 제국 초기에는 그의 무덤이 알려져 있었던 것 같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참배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29]

6. 유산과 평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자마 전투에서 격파한 공로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19][22][23] 그는 새로운 전술과 무기 개량을 통해 로마의 전법을 혁신했으며, 늘 승리하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견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로마 원로원의 제일인자인 '프린켑스'를 15년 동안 지냈다.

대 카토의 음모로 정치적 위기를 맞았으나,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6. 1. 군사적 업적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전술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로마군의 전투 방식을 혁신했다. 그는 티키누스 전투트레비아강 전투에서 아버지를 구출했고, 바이쿨라 전투에서 승리했다. 일리파 전투에서는 마고 휘하의 7만 4천 대군을 5만 8천 명으로 격파하여 히스파니아를 완전히 정복했다.[19] 자마 전투에서는 한니발을 상대로 승리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종식시켰다.[22][23]

스키피오는 기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무기와 전술을 도입하여 로마군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한 마그네시아 전투에서도 그의 군사적 역량이 드러났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으며, 그의 전술은 현대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연구되고 있다.

스키피오의 전술은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사용한 전술을 계승한 것으로, 적 보병의 공세를 아군 보병으로 방어하는 동시에 우세한 아군 기병이 적 후방으로 돌아가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망명 중이던 한니발에게 "최고의 지휘관"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첫 번째, 피르루스를 두 번째, 자신을 세 번째로 꼽았다. 스키피오가 "만약 당신이 나를 정복했다면 어떻게 말했을까요?"라고 묻자, 한니발은 "나는 알렉산더와 피르루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다른 지휘관들을 능가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44]

6. 2. 정치적 유산

스키피오는 로마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고 개인적인 권력욕을 절제하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그리스 문화를 존중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으며, 이는 로마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40] 스키피오는 병사들에게 토지 분배를 보상으로 제공하는 전통을 확립했으며, 이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후대 장군들에게 계승되었다.[40] 그의 외손자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역사에 변혁을 가져온 중요한 인물이다.[40]

그는 그리스식 삶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카리스마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 사상과 예술을 불가피하게 접하게 하였다. 스키피오 가문은 로마 엘리트와 로마 대중 사이에 생겨난 불가피한 균열을 주도했을지도 모른다. 엘리트의 교육 방식과 생활 방식, 그리고 그들이 소유한 부의 양 면에서 그러했다.[40]

스키피오는 공화정 초기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에 따라 그의 노병들에게 토지 분배를 지원했지만, 그의 행동은 보수파에 의해 다소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병사들에게 토지를 요구한 성공적인 장군이었던 스키피오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후대 장군들에게 길을 열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리우스나 카이사르와 달리 그는 자신의 카리스마와 명성을 이용하여 공화정을 약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승리하여 감사하는 로마로 돌아온 직후 그의 행동에서 그 면모를 볼 수 있다. 스키피오는 영구 집정관이자 독재자가 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자신의 이익보다 공화국의 이익을 우선시한 그의 자제에 대해 리비우스는 그의 비범한 정신을 보여준 것으로 칭찬했는데, 이는 마리우스, 술라 또는 카이사르가 눈에 띄게 본받지 못한 예이다.[40]

스키피오의 친척들은 몇 세대 동안 공화정을 지배했다. 이러한 지배는 기원전 133년부터 122년까지 그의 손자인 그라쿠스 형제와 그들의 다른 친척들 사이의 혼란 속에서 끝났다. 그라쿠스 형제는 로마 병사가 부대에서 복무하기 위해서는 토지를 소유해야 했고 로마 토지 소유자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잠재적인 로마 병사의 수를 늘리기 위해 토지 재분배를 옹호했다. 그들은 그들의 방법에 반대했고 아마도 토지 재분배를 두려워하는 경제적 이유가 있었던 친척들에 의해 살해당했다.[40]

  • 그는 일생 동안 패배하지 않은 최고 수준의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의 영토를 이탈리아 반도 외부로 확장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스키피오 이전에도 로마는 시칠리아 섬, 이베리아 반도 남부 등을 지배했지만,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상태였다. 스키피오의 공격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사회는 안정되었고, 로마의 속주로 지배되었다. 그리고 이 로마의 외정 경향은 결국 카르타고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 병사들에게 토지 분배를 보상으로 제공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보상은 당시 원로원 보수파에게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 방식은 로마의 전통이 되어 가이우스 마리우스,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 등에게도 계승된다. 이처럼 군제에 변혁을 가져왔고, 또한 종종 원로원의 의향을 무시했던 스키피오였지만, 스키피오 자신은 로마 공화정의 일원으로서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전통을 뒤엎는 일은 하지 않았다.
  • 스키피오의 그리스 문화에 대한 경향은 –당시에는 아직 소수파였지만– 그 후 로마 원로원 계급의 경향이 된다. 상류 계급에는 그리스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그리스의 고전적 교양이 로마 문화에 도입되어 그리스 문화는 엘리트들의 교양으로서 필수적인 것이 된다.
  • 원로원 귀족들 사이에서 스키피오에 대한 평가는, 우선 그의 그리스 문화에 대한 경도(傾倒)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토가(toga) 착용 방식은 전통에 따르지 않았고, 마르쿠스 카토는 이 사례를 자주 언급하며 로마인들이 조상의 전통을 소홀히 하고 그리스 문화에 경도되는 것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또한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같은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스키피오의 행동이 원로원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고, 원로원을 무시한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도록 그의 권한에 제한을 가하고, 시칠리아 섬에서의 훈련 시찰 등에서 자주 간섭을 했다.
  • 스키피오는 당대의 민중들에게는 신성을 띠는 존재로 여겨졌고, 신들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 또한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며, 그는 자주 유피터 신전에 가서 기부를 했다. 사람들은 스키피오가 신들과 교신할 수 있고, 꿈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소문냈다.

7. 스키피오의 전술

한니발칸나이 전투에서 사용한 전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적 보병의 공세를 아군 보병으로 방어하고, 우세한 아군 기병으로 적 후방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이다. 이 전술은 현대 각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칸나이 전투자마 전투를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유효하다고 평가받는다.

8. 가족 관계

스키피오는 카나에 전투에서 전사한 집정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의 딸인 아에밀리아와 결혼했다.[1] 그녀는 또 다른 집정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누이이기도 했다.[1] 이 부부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구분이름비고
장녀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과 결혼
차녀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와 결혼하여 그라쿠스 형제를 낳음[1]



스키피오의 아들들은 모두 적자를 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푸블리우스는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 마케도니쿠스의 아들을 입양했는데, 그는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로 알려지게 되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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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문서 Allucius (Livy, History of Rome XXVI.50), cf. Indibilis (Valerius Maximus, Memorable Deeds and Sayings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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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문서 Plutarch, Life of Caesar, 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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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문서 Broughton, 1951, p. 377, citing Livy, loc=38.56.8–9.
[51] 문서 現地民の族長であり、恩義を感じていたこの族長はスキピオの軍団編成を支援したという。
[52] 문서 ここでのスキピオの行動は史家の間でも評価が分かれている。批判的なものとして、敗北させたハスドルバルを追跡しなかったことでローマ領であるガリア・トランサルピナからイタリアへの侵入を許してしまったという意見がある。一方、擁護的な意見としては、スキピオ自身にはヒスパニア戦線をこれ以上大きく展開させる意思がなかったこと、西へ逃れたハスドルバルを追跡することで東からギスコのカルタゴ勢によって挟み撃ちにされる危険性を危惧していたことなどが理由として挙げられている。また一説には、攻め落とした敵拠点を略奪したい自軍の兵士たちの要求に押されて動くに動けなかったともいわれている。
[53] 문서 スキピオがヌミディアに赴いたこの時、イリッパの敗戦でヒスパニアから逃れた敵将ギスコも海路カルタゴへの帰還中にヌミディアに立ち寄っており、両者は出会っていたという話もある。それによると、相互不可侵の中立領域の港だったので両者とも平和裏に接し、シュファクス主催の晩餐に出席したという。スキピオの人格にギスコは非常に感銘を受けたという。
[54] 문서 ここでのスキピオの戦術も評価と非難とが相半ばしている。評価する側は、前述のポリュビオスのようにスキピオが戦った中で一番目覚しい功績を挙げたと賞賛を惜しまない。他方非難する側の例としては、19世紀アメリカの軍事史家セオドア・エアオール・ドッジ(Theodore Ayrault Dodge)の「このだまし討ちはスキピオの臆病さから出た行為であり全体での戦況からすれば賞賛するには当らない」という言葉が挙げられる。もっとも戦略的に見れば、この夜襲によってシュファクスの軍勢を脱落させることができ、ウティカの包囲を強固にするという成果を挙げたことは確かである。
[55] 문서 この時ハンニバルが引き連れてきた兵士とはどこの兵士だったのかということについては、現代の歴史家の間でも諸説ある。ある者はハンニバル麾下の歴戦の兵士たちは長い戦役でほとんど死に絶えてしまい、南イタリアで現地採用したイタリア人を連れて来ざるを得なかったと言い、ある者はイタリア戦役での損失は主に現地採用兵であったのでハンニバルは子飼いの精鋭部隊を温存しており、そのまま本国へ連れてきたと言っている。いずれにせよハンニバルはその長い戦役を通じて自らの精鋭部隊の補充を怠る事はなかっただろうし、帰国するにあたって兵士たちの中でも最良の者たちを連れてきたことは確かだ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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