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다 쓰나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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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에다 쓰나노리는 1643년에 태어나 1724년에 사망한 가가 번의 다이묘이다. 그는 3세에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15세에 번을 완전히 장악한 후, 토지 개혁, 기근 구호, 의료 시스템 구축 등 번정을 개혁했다. 또한 예술을 장려하여 겐로쿠엔 정원을 개발하고, 문학 작품을 수집하는 등 문화 진흥에도 힘썼다. 1689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고산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으며, 1723년에 은퇴했다. 그는 에도 시대 전기의 명군으로 칭송받았으며,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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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쓰나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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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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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에다 쓰나노리 (前田 綱紀) |
아명 | 이누치요 (犬千代) |
개명 | 쓰나토시 (綱利), 쓰나노리 (綱紀) |
묘소 |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 노다마치의 노다산 묘지 |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중기 |
관위 | |
관위 | 정4위하 좌근위권소장 겸 가가노카미, 좌근위권중장, 참의, 종3위, 히젠노카미, 증 종2위 |
출생과 사망 | |
출생 | 1643년 12월 26일 |
출생지 | 에도 |
사망 | 1724년 6월 29일 |
가문 | |
씨족 | 스가와라성 마에다 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마에다 미쓰타카 |
어머니 | 세이다이인 (清泰院,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양녀, 미토 요리후사의 친딸) |
형제 | 만키쿠마루 (万菊丸) |
배우자 | 정실: 마스히메 (摩須姫,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 |
측실 | 미오, 지운인, 조쇼인, 미나, 마쓰, 미루이, 기시 |
자녀 | 요시노리 (吉徳), 도시아키라 (利章), 도시코 (利子) 등, 교히메, 마코토히메, 조히메 |
무사 정보 |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에쓰나, 쓰나요시, 이에노부, 이에쓰구, 요시무네 |
소속 번 | 가가국 가가번 |
다이묘 정보 | |
가가번주 | 제4대 가가번주 |
재임 기간 | 1645년 ~ 1723년 |
이전 번주 | 마에다 미쓰타카 |
다음 번주 | 마에다 요시노리 |
기타 정보 | |
묘지 |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 노다마치의 노다산 묘지 |
계명 | 쇼운인덴 도쿠오 이치사이 다이코지 (松雲院殿徳翁一斎大居士) |
2. 생애
마에다 쓰나노리는 에도에 있는 마에다 가문의 저택에서 마에다 미쓰타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미토 번의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딸이었다. 1645년 아버지 미쓰타카가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쓰나노리는 3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았고, 도쿠가와 막부의 명령에 따라 숙부인 마에다 도시쓰네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
어릴 때 마쓰다이라 이누치요마루라고 불렸던 그는 1654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주재한 겐푸쿠 의례(성인식)를 치렀고, 이때 정4위하, 사콘에쇼쇼, 가가노카미 칭호를 받았다.[1]
1658년, 아이즈 번의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인 스마히메(마쓰히메라고도 알려짐)와 결혼했으나, 이는 정략결혼이었다. 스마히메는 10세에 불과했고, 1666년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쓰나노리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않았다.[1] 같은 해 1658년에 도시쓰네가 사망했고, 쓰나노리는 15세의 나이에 번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징세를 용이하게 하고 새로운 벼농사를 개척하기 위해 마을을 10개 그룹으로 묶는 토지 개혁을 시작했다. 또한 기근 구호와 의료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수립하고, 마에다 도시이에가 잇코잇키를 진압한 이후 매우 엄격했던 번의 법률을 개정했다. 후쿠이 번과의 오랜 국경 분쟁을 해결하기도 했다.[1]
쓰나노리는 예술의 저명한 후원자였으며, 특히 노 공연을 선호했다. 또한 일본 및 중국 문학 작품을 대거 수집했으며, 겐로쿠엔 정원을 개발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689년,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아래에서, 번은 에도 성에서 고산케와 동일한 대우를 받았으며, 번의 고쿠다카는 100만 코쿠로 재평가되었다.[1]
쓰나노리는 1723년에 공직에서 은퇴했고, 1724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마에다 쓰나노리는 1643년(간에이 20년) 11월 16일, 에도의 마에다 가문 저택에서 마에다 미쓰타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미토 번의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딸이자,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양녀인 오히메였다. 유아명은 '''이누치요마루'''였다.아버지 미쓰타카는 이 소식을 듣고 산킨코타이 도중 에도로 급히 돌아갔는데, 120리(약 470km)를 6박 7일 만에 걸어간 속도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미쓰타카는 무사시 가시와바라에서 "피어나니 매화는 천리의 향기인가"라는 구절을 꿈에서 얻었는데, 이것이 쓰나노리 탄생의 징조였다고 한다. 당시 후사가 없으면 개역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미쓰타카와 마에다 도시쓰네는 크게 기뻐하며 며칠 후 렌가회를 열었다.
1645년(쇼호 2년) 4월, 아버지 미쓰타카가 31세로 사망하면서, 쓰나노리는 같은 해 6월 13일에 3세의 나이로 가독과 유산을 상속받았다. 막부는 번정에 관해서는 할아버지 도시쓰네가 후견할 것을 명령했다.
어린 시절 쓰나노리는 센고쿠 무장이었던 할아버지 도시쓰네와 아버지 미쓰타카의 영향을 받아 숭무의 기풍 속에서 장난꾸러기로 자랐다고 한다. 도시쓰네는 다테 무네무라, 이케다 미쓰마사 등 현군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손님이 있을 때는 쓰나노리를 옆방에 앉혀 방청하게 했다.
마쓰다이라 성을 받아 '마쓰다이라 이누치요마루'가 되었다.[2] 1654년(조오 3년) 1월 12일, 도시쓰네와 함께 에도 성에 가서 겐푸쿠(성인식)를 치르고,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서 이름을 받아 '''쓰나토시'''(후에 '''쓰나노리'''로 개명)로 개명했다. 동시에 정사위하, 사콘에권소장, 가가노카미에 임관되었다.
1658년(만지 원년) 7월 27일,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 마스(摩須)와 결혼했다. 마사유키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이복동생으로, 어린 도쿠가와 이에쓰나를 보좌하며 막정을 주도했던 다이로였다. 도시쓰네는 쇼군가에는 자식이 없고 고산케도 믿을 수 없다며, 쇼군가의 혈통에 해당하고 인물과 그릇이 뛰어났던 마사유키의 딸을 굳이 선택했다고 한다. 마스는 10세에 시집왔고, 1666년(간분 6년)에 18세로 사망했지만, 쓰나노리는 그 후에 정식으로 재혼하지 않았다.[1] 쓰나노리는 마사유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는 이후 그의 정책에 반영되게 된다.[3]
2. 2. 소년기
쓰나노리는 에도에 있는 마에다 가문의 저택에서 마에다 미쓰타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미토 번의 도쿠가와 요리후사의 딸이었다. 1645년 아버지 미쓰타카가 29세(만 2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3세(만 2세)였던 쓰나노리가 가독을 상속받았고, 도쿠가와 막부의 명령에 따라 쓰나노리의 숙부인 마에다 도시쓰네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어린 시절 쓰나노리는 마쓰다이라 이누치요마루라고 불렸다.[2] 1654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주재한 겐푸쿠 의례(성인식)를 치렀고, 이때 정4위하, 사콘에쇼쇼, 가가노카미 칭호를 받았다.[1]
1658년, 아이즈 번의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인 스마히메(마쓰히메라고도 알려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략 결혼이었고, 당시 스마히메는 10세에 불과했다. 스마히메는 1666년 1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쓰나노리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않았다.[1] 같은 해 1658년에 도시쓰네가 사망하여, 쓰나노리는 15세의 나이에 번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2. 3. 혼인
1658년, 아이즈 번의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인 스마히메(마쓰히메라고도 알려짐)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략 결혼이었고, 스마히메는 10세에 불과했고, 1666년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쓰나노리는 정식으로 재혼하지 않았다.[1]2. 4. 번정 개혁
도시쓰네가 사망한 후, 호시나 마사유키의 후원을 받아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 우선 신전 개발과 농업 분야에 착수하여 십촌제도를 정비했다.[1] 간분 대기근 때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설인 "어전 오두막"을 설치하고, 쌀을 지급하고 의사를 파견하는 등 의료 체제도 갖추었다.[3][4]마에다 도시이에가 잇코잇키를 진압한 이후 가혹했던 번의 법률을 개정하고, 사형수를 감형하는 등 관대한 정치를 펼쳐 무단 정치에서 문치 정치로 이행했다.[4] 또한, 장수를 누리는 사람에게는 부치미를 지급하고, 개작법을 만들어 가신들의 직제를 정했다.
대외적으로는 후쿠이 번과의 오랜 분쟁인 "백산 쟁론"을 해결하고, 백산 비매 신사에 칼 "백산 요시미츠"를 봉납했다.[1]

쓰나노리는 학문과 문예를 장려하여 서물 봉행을 설치하고, 백공비조를 비롯한 많은 고서와 공예품을 수집했다.[5] 키노시타 쥰안, 무로 큐소, 이나오 와스이 등을 초빙하고, 백과사전 『상화학원』을 편찬했으며, 가신들에게도 학문을 장려했다. 호쇼류 노가쿠를 도입하여 번사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5] 아라이 하쿠세키는 가가 번을 "천하의 서부"라고 칭찬했다.[5]
도지의 도지 백합 문서 보존, 산조니시 가의 "지츠미쿄키" 발견 및 보수에 협력하는 등 고문서 보관에도 힘썼다.
막부로부터 경계받지 않기 위해 호화로운 조도품을 들이거나 건물 개축에 재산을 탕진하는 등 낭비를 아끼지 않았다.[5]
겐로쿠 2년(1689년),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고산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100만 석을 자랑하는 최대의 번으로 권위를 높였다.[1] 오규 소라이는 쓰나노리의 통치를 "인정"이라고 칭찬했다.[6]
교호 3년(1718년)에는 가가 토비와 정화소의 센고쿠 히사하루 부하 사이에 소화 쟁의가 발생했다.
2. 5. 문화 진흥
쓰나노리는 학문을 좋아하여 번 내에 학문과 문예를 장려했다. 서물 봉행을 설치하여 공예 표본과 고서를 많이 편찬하고 수집하여 백공비조를 만들었다. 키노시타 쥰안, 무로 큐소, 이나오 와스이 등을 초빙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츠나노리 자신이 편찬한 백과사전인 상화학원을 기록하고, 가신들에게도 학문을 장려했다. 호쇼류 노가쿠를 가가 번에 도입했으며, 츠나노리 자신도 노가쿠를 즐겨 그 실력이 뛰어났다. 장군 앞에서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5] 가가 번사들도 츠나노리의 영향을 받아 문예에 힘을 쏟았다. 풍부한 서적이 수장된 서고는 아라이 하쿠세키로부터 "가가 번은 천하의 서부"라고 칭찬받았다.[5]츠나노리는 자신 이외의 고문서 보관에도 힘을 쏟아, 도지의 도지 백합 문서 보존과 사위인 산조니시 킨푸쿠의 산조니시 가에 전해지는 "지츠미쿄키"의 발견 및 보수에 자금과 기술로 막대한 협력을 했다.
규모가 큰 가가 번이 축재를 너무 많이 하면 막부 전복을 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막부의 경계를 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츠나노리는 자금에 여유가 있을 때는 낭비를 했다. 호화로운 조도품을 들여오고, 건물 개축에 재산을 탕진했다. 막부로부터 경계받지 않기 위해 돈에 여유가 있을 때는 낭비를 아끼지 않는다는 방침은 조부 토시츠네의 방침을 답습한 것이었다.[5]
겐로쿠 2년(1689년)에는 장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로부터 고산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100만 석을 자랑하는 최대의 대번으로서 그 권위를 정점으로 높였다. 오규 소라이도 츠나노리의 통치를 칭찬하며 "가(가가 번)에 거지 없다. 진실로 인정을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6]
2. 6. 막부와의 관계
1654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주재한 겐푸쿠 의례(성인식)를 치렀고, 이때 정4위하, 사콘에쇼쇼, 가가노카미의 칭호를 받았다.[1]1689년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아래에서 가가 번은 에도 성에서 고산케와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번의 고쿠다카는 100만 코쿠로 재평가되었다.[1]
규모가 큰 가가 번이 축재를 너무 많이 하면 막부 전복을 꾀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막부로부터 경계받을 우려가 있었다. 쓰나노리는 자금에 여유가 있을 때는 호화로운 조도품을 들여오거나 건물을 개축하는 데 재산을 탕진했다. 막부로부터 경계받지 않기 위해 돈에 여유가 있을 때 낭비를 아끼지 않는다는 방침은 조부 도시쓰네의 정책을 답습한 것이었다.[5]
겐로쿠 2년(1689년) 도쿠가와 쓰나요시로부터 고산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100만 석을 자랑하는 최대의 대번으로서 권위를 높였다.
교호 3년(1718년)에는 각자 화재 진압 조직으로 조직한 가가 토비와 정화소의 센고쿠 히사하루 휘하의 와엔과의 소화 쟁의가 발생했다.
2. 7. 은거와 죽음
1723년(교호 8년) 5월 6일, 쓰나노리는 가독을 넷째 아들인 요시노리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이듬해인 1724년(교호 9년) 5월 9일에 82세로 사망했다.[1]쓰나노리는 숙부 도쿠가와 미쓰쿠니와 이케다 미쓰마사 등과 함께 에도 시대 전기의 명군 중 한 명으로 칭송받았다. 쓰나노리가 장수하여 번정(藩政)이 80년에 걸쳐 이어진 것은 가가 번에게는 행복한 일이었다. 쓰나노리가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조부인 도시쓰네의 양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3. 평가
1660년(만지 원년) 10월, 토시쓰네가 사망하자 장인 호시나 마사유키의 후원으로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 신전 개발과 농업 분야에 착수하여 십촌제도를 정비했다. 간분 대기근 때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설(당시 "비인 오두막"이라 불렸지만, 가나자와 사람들은 츠나노리에 대한 존경심으로 "어전 오두막" 또는 "구제 오두막"이라고 불렀다[3])을 설치하고, 나중에 수공 시설도 병설했다. 이 시설은 2,000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었으며, 기아 발생 시 쌀을 지급하는 것 외에, 의사를 파견하여 의료 체제도 갖추었다[4]。 츠나노리는 번주 취임 당시부터 이 시설을 만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4], 거대한 시설이기에 유지비가 번의 재정을 압박했기 때문에 가신들의 반발도 있어, 실시에는 오랜 세월과 간분 대기근이라는 어전 오두막이 필요하게 되는 기회를 필요로 했다[4]。
번 내에서 장수를 누리고 있는 자에게는 부치미를 지급하기도 했다. 더욱이 개작법을 만들어, 마에다가 가신의 직제(가가 팔가)를 정했다. 마에다 토시이에가 잇코잇키 진압에 애를 먹었던 것 등의 영향으로, 가가 번은 다른 번과 비교해 형벌이 가혹했지만, 츠나노리는 사형이 결정된 죄인을 감형하는 등 했다[4]。이러한 츠나노리의 자세에 영향을 받아, 가혹한 형벌도 츠나노리 이전과 비교하면 관대해져 갔고, 엄벌을 중시하는 무단 정치에서 문치 정치로 이행했다[4]。
대외 정책에서도, 인접국인 후쿠이 번과의 분쟁인 "백산 쟁론"에 결착을 지었다. 또한,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백산 비매 신사에 칼 "백산 요시미츠"(국보)를 봉납했다.
츠나노리 자신이 학문을 좋아했던 것도 있어(무예에서 건축, 유학 등 폭넓게 익힘), 번 내에 학문, 문예를 장려하고, 서물 봉행을 설치하여 공예의 표본, 고서의 많은 것을 편찬·수집하여, 이것들을 백공비조에 결실했다. 또한, 키노시타 쥰안, 무로 큐소, 이나오 와스이 등을 초빙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츠나노리 자신이 편찬한 백과사전 『상화학원』을 기록하고, 가신단에게도 학문을 장려했다. 그리고, 호쇼류 노가쿠를 가가 번에 도입하고 있다. 츠나노리 자신은 노가쿠를 즐겨, 그 실력은 노가쿠 시사에 뒤지지 않았다. 장군 앞에서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5]。또한, 가가 번사들도 츠나노리의 영향을 받아, 문예에 기울었다[5]。풍부한 서적이 수장된 서고는, 아라이 하쿠세키로부터 "가가 번은 천하의 서부"라고 칭찬받았다[5]。
자신 이외의 고문서 보관에도 뜻을 두어, 도지의 도지 백합 문서의 보존이나 사위인 산조니시 킨푸쿠의 산조니시 가에 전해지는 "지츠미쿄키"의 발견 및 보수에도, 자금 및 기술로 막대한 협력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규모가 큰 번인 가가 번이 축재를 너무 많이 하면, 막부 전복을 획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막부로부터 경계받을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츠나노리는, 자금에 여유가 있을 때는 낭비를 했다. 호화로운 조도품을 들여오고, 건물의 개축에 재산을 탕진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 막부로부터 경계받지 않기 위해, 돈에 여유가 있을 때는 낭비를 아끼지 않는다는 방침은, 조부 토시츠네의 그것을 답습한 것이었다[5]。
1689년(겐로쿠 2년)에는 장군 도쿠가와 츠나요시로부터 고산케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 100만 석을 자랑하는 최대의 대번으로서, 그 권위를 정점으로까지 높였다. 또한, 오규 소라이도 츠나노리의 통치를 평하여 "가가 코 (어전 오두막)을 설치함에 따라, 가가에 거지 없다. 진실로 인정을 말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6]。
1718년(교호 3년)에는 각자 화재 진압 조직으로 조직한 가가 토비와 정화소의 센고쿠 히사하루 배하의 와엔과의 소화 쟁의가 발생했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아버지 | 마에다 미쓰타카 |
어머니 |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딸 도쿠가와 오히메 (1627년-1665년)[1] (와카야마 번) |
부인 | 마쓰히메 (1648년-1666년) |
측실 | 오미요노 카타, 주엔인, 초쇼인, 호주인, 오마치노 카타, 호린인, 오코시노 카타 |
자녀 | 출생 - 사망 (생모) |
장남 | 마에다 토시키요 (1674년-1675년) (오미요노 카타) |
장녀 | 센히메 (1677년-1681년) (주엔인) |
차녀 | 우시히메 (1680년-1730년) (아사노 요시나가에게 시집감) (주엔인) |
3녀 | 레이쇼인 (1677년-1677년) (초쇼인) |
4녀 | 토요히메 (1687년-1718년) (마에다 타카스케에게 시집감) (호주인) |
5녀 | 케이히메 (1689년-1737년) (이케다 요시야스에게 시집감) (호주인) |
차남 | 마에다 도시아키라 (1691년 – 1737년) (호주인) |
6녀 | 나오히메 (1693년-1749년) (니조 요시타다에게 시집감) (호주인) |
7녀 | 요시히메 (1689년-1693년) (오마치노 카타) |
3남 | 마에다 요시노리 (오마치노 카타) |
4남 | 쿠마루 (1689년-1689년) (호린인) |
5남 | 마사주로 (1698년-1699년) (오코시노 카타) |
양녀 | 비고 |
양녀 1 | 쿄히메 (조 히사쓰라에게 시집감) |
양녀 2 | 세이히메 (산조니시 긴후쿠에게 시집감) |
양녀 3 | 우츠히메 (사카이 다다요리에게 시집감) |
5. 관직 및 위계
연도 | 사건 |
---|---|
1645년[2] | 아버지 미쓰타카의 사망으로 3세의 나이로 가독을 상속받아 가가 번주가 됨. |
1654년[2] | 도쿠가와 이에쓰나로부터 헤이키를 받아 쓰나토시(綱利)로 명명하고, 정사위하 사콘에곤노쇼조 겸 가가노카미에 서임 및 임관. |
1658년[3] |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 마스와 결혼. 사콘에곤노추조로 전임. 가가노카미는 이전과 같음. |
1693년 | 산기에 보임. |
1707년 | 종삼위로 승서. 산기는 이전과 같음. |
1723년 | 은거하고, 히젠노카미로 천임. |
1909년 | 종이위 추증. |
6. 족보
마에다 쓰나노리 가계도 | |
---|---|
아버지 | 마에다 미쓰타카 |
어머니 | 세이다이인 |
조부 | 마에다 도시쓰네 |
조모 | 덴토쿠인 |
외조부 | 도쿠가와 요리후사 |
외조모 | 기사(喜佐) |
증조부 | 마에다 도시이에 |
증조모 | 주후쿠인 |
증외조부 | 도쿠가와 히데타다 |
증외조모 | 스겐인 |
외증조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외증조모 | 요주인 |
고조부 | 마에다 도시하루 |
고조모 | 조레이인 |
고외조부 | 우에키 신베 |
고외조모 | 오카자키씨 |
외외고조부 | 아자이 나가마사 |
외외고조모 | 오이치노가타 |
외고조부 |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
외고조모 | 오다이노가타 |
외외고조부 | 마사키 요리타다 |
외외고조모 | 고 호조씨 혹은 다나카씨 |
7. 등장 작품
- 타케우치 토루 : 미토 코몬 (영화) (도에이 교토·배우좌 영화 방송, 1978년)
- 오오타케 슈조 : 미토 코몬 제23부 (TBS, CAL, 1994년)
- 타카마츠 히데오 : 8대 쇼군 요시무네 (NHK 대하 드라마, 1995년)
참조
[1]
서적
前田綱紀
吉川弘文館
[2]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2000-06-00
[3]
간행물
歴史読本
[4]
간행물
歴史読本
[5]
간행물
歴史読本
[6]
간행물
歴史読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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