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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도시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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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에다 도시쓰네는 가가 번의 2대 번주로, 센고쿠 시대 무장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들이다. 1594년에 태어나,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형인 마에다 토시나가의 양자가 되었으며, 1605년 토시나가의 은거로 가독을 상속받았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인 타마히메와 결혼하여 도쿠가와 쇼군 가문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에 참전했으며, 이후 영지를 보존하고 가나자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639년 가독을 아들 마에다 미쓰타카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며, 1658년에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가부키모노 기질로도 알려져 있으며, 미술과 공예를 장려하고, 가가 번의 내정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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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도시쓰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에다 도시쓰네
마에다 도시쓰네 초상
이름마에다 도시쓰네
원어 이름前田 利常
로마자 표기Maeda Toshitsune
생애
출생1594년 1월 16일
사망1658년 11월 7일
관직
가가 번주1605년 ~ 1639년
전임마에다 도시나가
후임마에다 미쓰타카
소속
가문마에다 씨
충성도쿠가와 막부
가계
아버지마에다 도시이에
어머니주후쿠인
양아버지마에다 도시나가
배우자다마히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자녀마에다 미쓰타카
마에다 도시쓰구
마에다 도시하루
마에다 도시아키
가메쓰루히메 (모리 다다히로 실)
지쇼인 (아사노 미쓰아키라 실)
도미히메 (하치조노미야 사다타다 친왕 비)
하루히메 (혼다 마사나가 실)
마쓰히메 (마쓰다이라 사다시게 실)
구마히메 (호시나 마사쓰네 실)
생애 상세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아명사루치요, 이누치요
초명도시미쓰
이명마쓰다이라 지쿠젠노카미, 고마쓰 주나곤
계명미묘인덴 이치미네가쿠간 다이코지
묘소노다 산 묘지
관위종4위하
시종관
지쿠젠노카미
우근위권소장
참의
종3위
중납언
히젠노카미
종2위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쓰나
참전오사카 전투

2. 생애

마에다 도시쓰네는 분로쿠 2년(1594년) 가가 번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 주후쿠인(히가시마루도노)이다.[1]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니와 나가시게의 인질이 되었으나,[1][2] 같은 해 맏형 마에다 토시나가의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주히메와 결혼했다. 게이초 10년(1605년) 가독을 이어받아 제2대 번주가 되었다.[1]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하여 사나다 노부시게 군과 대치 (사나다마루 전투) 했으나, 군령을 어기고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5]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오노 하루후사 군과 싸워 승리했다.[5] 전투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와, 사누키, 이요, 도사 4개국을 주겠다고 했으나, 도시쓰네는 가가, 노토, 엣추 3개국의 안도를 원하여 인정받았다.[5]

1629년 휘를 도시미쓰에서 도시쓰네로 고쳤다. 1631년 가나자와 성 보수 등으로 모반 혐의를 받았으나("간에이의 위기"),[5] 에도로 가서 변명하고 의혹을 풀었다.[5] 1639년 가독을 미쓰타카에게 물려주고 은거했다.[6][5]

1645년 미쓰타카가 급사하자, 뒤를 이은 쓰나노리가 어려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령으로 쓰나노리의 후견인으로서 번정을 보좌했다.[1][2] 도시쓰네는 치세 동안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경계에도 120만 석의 영지를 보존했다. 내정에서는 치수, 농정 사업을 시행하고, 미세이쿠쇼를 설립하여 산업과 문화를 보호, 장려했다.[1]

1658년 66세로 사망했다.

2. 1. 유년기부터 가독 상속까지

분로쿠 2년(1594년), 가가번의 시조 마에다 토시이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 히가시마루도노(수후쿠인)이다.[1] 토시이에가 56세 때 얻은 아들이다. 토시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로쿠·게이초의 역에서 히젠나고야성에 주둔하고 있었을 때, 하급 무사 딸이었던 히가시마루도노는 시녀로 파견되었는데, 이때 토시이에의 아이로 태어난 것이 토시쓰네이다.[2] 어릴 때는 엣추모리야마성 대리인 마에다 나가타네 밑에서 길러졌다(나가타네의 아내는 큰누이 사치히메). 아버지 토시이에를 처음 만난 것은 아버지의 죽음 전 해인 게이초 3년(1598년)에 모리야마성을 방문했을 때로, 토시이에는 어린 토시쓰네를 마음에 들어 하여 대소 2자루의 칼을 하사했다.

게이초 5년(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 아사이나와테의 전투 후, 서군이 패배하여 동군에 강화를 요청한 고마쓰성의 니와 나가시게의 인질이 되었다.[1][2] 고마쓰성 안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나가시게가 토시쓰네에게 직접 배를 깎아 주었는데, 토시쓰네는 만년까지 배를 먹을 때마다 이 추억을 이야기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같은 해, 후계자가 없었던 맏형 마에다 토시나가의 양자가 되어, 를 '''토시미쓰'''로 하고,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 주히메를 아내로 맞이했다(이때 주히메는 불과 3세였다).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토시쓰네에게도, 그 후의 마에다 가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게이초 10년(1605년) 6월, 토시나가는 은거하고, 토시쓰네가 가독을 이어 제2대 번주가 된다.[1] 4월 8일, 마쓰다이라의 씨와 본성을 받았다.[4] 그러나 토시쓰네는 아버지 이래의 스가와라 성에 대한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5] 같은 해, 막부는 토시쓰네(당시는 토시미쓰) 앞으로 "영지 판물"을 통해 119만 2760석을 마에다가의 주홍인으로 했다.

2. 2. 번주 시대

마에다 도시쓰네는 어머니가 같은 형제가 없어, 이복 형제들과 협력하기 어려웠고, 의붓어머니 호슌인과 생모 쥬후쿠인(寿福院) 사이의 갈등 등 집안 내 문제에 시달렸다.[5]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도시쓰네는 도쿠가와 측으로 참전했다. 에도에서 가나자와를 거쳐 오사카로 출진하며 사기 진작을 위해 불량한 말몰이를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 스미요시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아베노에 진을 쳤는데, 마에다 군은 2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 도쿠가와 측 최대 규모였다.[5] 사나다 노부시게 군과 대치 (사나다마루 전투) 했으나,[5] 이에야스의 공격 명령이 없었음에도 조급하게 공을 세우려다 군령을 어기고 사나다마루를 공격, 이이 나오타카,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군과 함께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배했다.[5]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이에야스의 명으로 오카구치의 선봉을 맡았고, 히데타다 군이 후방에 배치되었다.[5] 마에다 군 1만 5000명은 오노 하루후사 군 4000명과 싸워 고전 끝에 승리, 3200개의 수급을 얻었다.[5] 오사카 양진 일기에 따르면, 직참·가신 213명이 적을 베어 수급 258개, 잡병 포함 3000여 개의 수급을 올렸다고 한다. 마에다 군의 전사자는 겨울 전투에서 6명, 여름 전투에서 34명이었다.[5] 오사카 여름 전투 중, 마에다 군 내에서 성 측에 협력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다.

전투 후 이에야스는 아와, 사누키, 이요, 도사 4개국을 주겠다고 했으나, 도시쓰네는 사양하고 가가·노토·엣추 3개국의 안도를 원하여 인정받았다 (국초 유문).[5] 사양 이유는 전봉에 대한 경계, 경제적 이유 (엣추 7금산 광산 경영) 등으로 추측된다.[5]

1616년 이에야스 임종 시, 도시쓰네에게 "오테마에(お点前)를 죽이라는 요청을 쇼군(히데타다)이 듣지 않아 아무 조치도 없었으니, 우리 은혜는 잊어도 좋으나 쇼군의 후은은 간직하라"는 말을 들었다 (회혜야화).

1626년 종삼위 권중납언에 서임되어 '''가가 중납언'''으로 불렸다.

1629년 휘를 도시미쓰에서 '''도시쓰네'''로 고쳤다. 1623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세이이타이쇼군이 되면서, 이에미쓰에게서 받은 편휘인 "광(光)" 자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대신 적자 미쓰타카가 이 글자를 받아 개명했다.

1631년 오고쇼 히데타다 병중에 가나자와 성 보수, 가신 자제 중 우수 인재 고쇼 선발, 오사카 전투 훈공 추상, 선박 구입 등으로 모반 혐의를 받았으나 ("간에이의 위기"),[5] 미쓰타카와 함께 에도로 가서 변명하고, 요코야마 나가토모 아들 야스하루의 노력으로 의혹을 풀었다.[5]

이후 미쓰타카의 정실로 이에미쓰의 양녀 오히메 (도쿠가와 요리후사 딸)를 맞이했다. 1639년 가독을 미쓰타카에게 물려주고, 차남 마에다 도시쓰구에게 도야마번 10만 석, 삼남 마에다 도시하루에게 다이쇼지번 7만 석을 주고, 자신은 22만 5,000석을 가지고 고마쓰에 은거했다.[6][5] 이에미쓰가 만류했으나 은거계를 내고 은거했다고 한다.[5] 지번 창설과 오미 국 영토로 가가 번은 공칭 102만 5천 석 (5대 쓰나노리 주사인장)이 되었다.

2. 3. 은거 이후

1642년(간에이 19년), 넷째 딸 도미히메가 하치조노미야 도시타다 친왕의 비가 되었고, 막부에 비판적인 고미즈노 인과도 깊이 친교를 맺었다.[1] 이에야스의 외손녀이자 다마히메의 여동생인 주와코가 고미즈노 인의 중궁이었기 때문에, 도시쓰네와 고미즈노 인은 의형제(사위) 관계였다.[1] 이소다 미치후미에 따르면, 노부나가, 히데요시, 도시이에로 이어지는 미의식에는 금을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다고 한다. 도시쓰네는 하치조노미야 별업(가쓰라 이궁) 조영에 힘쓰고 교토풍 문화를 도입하여, 오다-도요토미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부흥을 이룬 "가가 르네상스"라 불리는 가나자와 문화를 꽃피웠다.[1]

1645년(쇼호 2년) 4월, 미쓰타카가 급사하자, 뒤를 이은 쓰나노리가 3세로 어렸기 때문에, 6월에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명령으로 쓰나노리의 후견인으로서 번정을 보좌했다.[1][2] 도시쓰네는 치세 동안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경계에도 120만 석의 영지를 보존했다. 내정에서는 치수, 농정 사업(도무라 세이, 개작법) 등을 시행하여 "정치는 가가, 토사"라고 칭송받을 정도였으며, 미세이쿠쇼를 설립하여 미술, 공예, 예능 등 산업과 문화를 보호, 장려했다.[1]

한편, 쓰나노리 양육을 위해 전국 시대 생존자를 곁에 두고 숭무 기풍을 불어넣었다. 쇼군 이에미쓰의 서제이자 막부 중신 호시나 마사유키의 딸 마스히메를 쓰나노리의 정실로 맞이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 개선에도 힘썼다.[3]

1658년(만지 원년) 10월 12일,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법명은 미묘인전일법구륭대거사(微妙院殿一峯 ক্লো엄 大居士)이며, 묘소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노다정의 노다야마 묘지이다. 사후에는 법명에서 유래한 미묘공(微妙公)으로도 불린다.

3. 관직 및 위계 등의 이력


  • 게이초 6년(1601년) 5월 11일 - 원복하여, 도시미쓰(利光)로 개명하고 종4위하·지주 겸 지쿠젠노카미에 서임되었다.[1]
  • 게이초 10년(1605년) 4월 8일 - 마쓰다이라 성을 하사받았다.[1]
  • 같은 해 6월 28일 - 번주가 되었다.[1]
  • 게이초 19년(1614년) 9월 - 우콘노에곤쇼쇼로 전임되었다. 지쿠젠노카미는 그대로 겸임하였다.[1]
  • 겐나 원년(1615년) 윤 6월 19일 - 산기에 보임되었다. 날짜 미상으로 산기는 사직하였다.[1]
  • 간에이 3년(1626년) 8월 19일 - 종3위·곤츄나곤으로 승진 및 전임되었다.[1]
  • 간에이 6년(1629년) 4월 13일 - 히젠노카미로 전임되었다.[1]
  • 간에이 16년(1639년) 6월 20일 - 은거하였다.[1]
  • 1909년(메이지 42) 9월 11일 - 증·종2위가 추증되었다.[1]

4. 인물 및 일화

미묘공(微妙公)태합의 가풍을 칭찬하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태합을 언급하고 오다 노부나가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태합의 군법에 감탄했다고 한다. 《태평기》, 《고금저》 등을 보거나 원숭이 관련 책을 보았고, 《아즈마카가미》 가나쓰기를 베껴두고 매번 보았다고 한다.

4. 1. 인물상

아버지 마에다 도시이에의 특징을 물려받아 훌륭한 체격을 소유했으며, 그 점이 도시이에의 많은 자식들 중에서 마에다 도시나가의 후계자로 선택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유언 등에서 도시쓰네에게서 예전의 라이벌이었던 도시이에를 발견하고 경계했다고 전해지며[1], 막부에서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경계했다고 한다[2].

금공사(金工師) 고토 겐조나 고토 가쿠조, 칠공예가 이가라시 도호나 시미즈 규베 등 교토나 에도에서 뛰어난 일류 명공들을 고록으로 초빙하여 번 내 미술공예 진흥에 힘썼다. 또한, 은거 후에도 센노 리큐의 증손자 센소 소시쓰를 다두(茶頭)로 맞이하여, 가가(加賀)에서의 우라센케 다도의 정착의 유래가 되었다.

4. 2. 가부키모노

토시이에나 사촌 토시마사처럼 마에다 가문은 양자, 연애등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을 포함하여 가부키모노 기질을 가진 가문이었다. 막부의 경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콧털을 길게 늘여 어리석은 척을 했다고도 한다. 가신이 거울을 내밀자 "이것은 가슈, 노슈, 엣추 삼국을 지키고 너희들을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한 콧털이다"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다음은 마에다 도시쓰네의 기행과 관련된 일화들이다.

  • 병으로 에도 성 출사를 잠시 쉰 후, 사카이 타다카츠에게 비꼬는 말을 듣고 "산통 때문에 여기가 아파 견딜 수 없다"며 만좌가 있는 대전에서 음낭을 드러내 변명했다.
  • 에도 성 안에 "소변 금지. 위반자에게는 황금 한 냥의 벌금"이라는 팻말이 붙자, 일부러 그 팻말을 향해 노상 방뇨를 하고 "다이묘가 황금을 아끼려고 소변을 참겠는가"라고 말했다.
  • 에도에서 쇼군으로부터 "어전 노" 접대를 받았을 때, 대전에서 두건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도쿠가와 고산케의 오와리 가는 에도 성 안에서 두건을 쓰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도시쓰네도 두건을 쓰고 등성했다. 메츠케가 주의를 주었지만, 도시쓰네는 벗으려고 하지 않았다. 로주인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는 "대전에서 두건이 금지된 것은 비젠 공과 같은 노인이 아니오"라며 메츠케를 꾸짖었고, 사카이 타다카츠는 "마음이 좁은 말을 하지 마시오.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기개 있는 다이묘가 지금 세상에 또 있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 에도 성 내에는 하마의 제찰이 있었고, 그 장소에서는 말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도시쓰네는 그 제찰을 무시하고 태연히 지나가 경호를 하던 다이신하타모토를 밀쳐냈다. 도쿠가와 이에츠나가 11세에 쇼군이 되어 정세가 불안해지자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는 도시쓰네에게 현관까지 탈것을 사용해도 좋다고 말했고, 도시쓰네는 "구두쇠를 감사합니다. 오늘부터 제찰이 있는 곳에서는 말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어용 장검 금공사, 금은 재정 담당, 가가 번 풍문 보고 역의 250석의 가신이었던 고토 카쿠조 (칸베)의 저택(옹취원)에 코보리 엔슈에게 의뢰하여 연못 정원, 상단이 있는 서원, "옹취정"이라는 소규모 다실을 짓고 두 번 방문했다. 카쿠조는 도시쓰네가 죽었을 때 비밀 서류를 모두 소각했다고 한다.

5. 가족

구분배우자자녀
정실다마히메
측실오코와노 카타
측실오쿠리노 카타 (조 쓰라타쓰의 딸)
측실고조노 쓰보네
측실교고쿠노 카타
측실후쿠쇼인
아버지마에다 도시이에(1539년 ~ 1599년)
어머니킨세인
양아버지마에다 도시나가


참조

[1] 서적 Samurai of Ayutthaya: Yamada Nagamasa, Japanese warrior and merchant in early seventeenth-century Siam White Lotus Press 2009
[2] 웹사이트 前田利常
[3] 논문 関ヶ原合戦前後における前田利政の動静 2014
[4]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2000-06
[5] 간행물 上市町誌 上市町誌編纂委員会 1970
[6] 간행물 ふるさと石川歴史館 北國新聞社 200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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