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쾨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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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스 쾨겔은 1895년 독일 퓌센에서 태어난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세관원, 상업 대리점 등으로 일하다가 나치당에 가입하여 다하우, 라벤스브뤼크, 마이다네크,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했다. 특히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는 7·20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관련자들의 재판에 참심관으로 참여했다. 전쟁 후 미군에 체포되었으나 1946년 뉘른베르크에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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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쾨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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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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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오토 막스 쾨겔 |
출생 | 1895년 10월 16일 |
출생지 | 퓌센,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
사망 | 1946년 6월 27일 (50세) |
사망지 | 슈바바흐, 연합군 점령 독일 |
별칭 | (없음) |
소속 | |
충성 | 독일 제국 (1916–1918) |
정당 | NSDAP |
군대 | SS |
복무 기간 | 1916–1945 |
계급 | SS-오버슈투름반퓌러 |
지휘 | |
지휘한 부대 | 리히텐부르크 강제 수용소 |
훈장 | |
주요 훈장 | 제1차 세계 대전 철십자장 2급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부모 | (알 수 없음) |
자녀 | (알 수 없음) |
2. 생애
막스 쾨겔은 1895년 10월 16일 바이에른 왕국 퓌센에서 태어났다.[1] 제1차 세계 대전에 바이에른 보병으로 참전하여 철십자 2급 훈장을 받았다.[1] 전쟁 후 세관원, 기념품 가게 운영 등 여러 일을 했으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극우 민족주의 단체에 가입했다.[1]
193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돌격대(SA)에 가입했고, 1932년에는 나치당과 친위대(SS)에 정식으로 합류했다.[1] 나치 정권 수립 후 다하우 강제 수용소 간수를 시작으로 경력을 쌓아 1937년 부소장이 되었다.[1] 이후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1940-1942), 마이다네크 강제 수용소(1942),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1943-1945)의 소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수많은 전쟁 범죄에 책임이 있다.[1] 특히 마이다네크에서는 가스실 설치에 관여했고, 플로센뷔르크에서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관련자들의 처형에도 관여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도주했으나 1946년 6월 미국군에게 체포되었다.[1] 그는 슈바바흐 감옥에 수감된 다음 날인 1946년 6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2. 1. 초기 생애
막스 쾨겔은 1895년 10월 16일 바이에른 왕국 퓌센에서 목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여섯 살이 되기 전 어머니가 출산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1907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근처 농가에서 살게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양치기 훈련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산악 가이드로 일했다.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바이에른 보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1919년 1월 12일까지 복무했다. 복무 중 병장 계급까지 진급했으며, 베르됭 전투를 포함하여 세 차례 부상을 입고 철십자 2급 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잠시 세관원으로 일했으나, 1920년 그만두고 기념품 가게를 열었다. 그러나 4년 후 사기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파산했다.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일하며 지내다 퓌센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옛 가구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 시기 그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인 단체인 뵘키셔 분트와 분트 오브어랜드(자유군단 오버란트)에 가입했다.
1929년에는 여덟 살 된 아들이 홍역으로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년간의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마무리했다. 193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SA에 가입했으며, 1932년 5월 2일에는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1179781)했고, 같은 해 6월 SS에도 가입(#37644)했다.
2. 2. 전간기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막스 쾨겔은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세관원으로 잠시 일했다.[1] 1920년, 그는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기념품 가게를 열었으나, 4년 뒤인 1924년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파산했다.[1] 이후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일하다가 고향 퓌센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일했던 가구 공장에서 잠시 일자리를 얻었다.[1]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동안 쾨겔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적 성향의 단체인 뵘키셔 분트(Völkischer Bund|푈키셔 분트de)와 자유군단의 일부인 분트 오브어랜드(Bund Oberland|분트 오버란트de)에 가입하여 활동했다.[1] 이는 당시 독일 사회의 혼란 속에서 극우 세력에 가담하게 된 배경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도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1929년에는 여덟 살 된 아들이 홍역으로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10년간 이어온 결혼 생활도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1]
이러한 배경 속에서 쾨겔은 나치당에 점차 경도되었다. 1931년 돌격대(SA)에 가입했으며, 1932년 5월 2일에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나치당)에 정식으로 입당(당원 번호 1179781)했다.[1] 같은 해 6월에는 친위대(SS)로 이적(SS 번호 37644)하며 본격적인 나치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1]
2. 3. 나치 친위대 활동
1931년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의 돌격대 (SA)에 가입하였고, 1932년에는 정식으로 나치당원이 되었으며 같은 해 친위대(SS)로 이적했다. 1933년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간수로 근무하기 시작했다.1937년에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 소장의 부관이 되었고, 이후 부소장으로 승진했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는 Sturmbannführer|슈투름반퓌러de(소령) 계급으로 리히텐부르크의 라벤스브뤼크에 있는 여성 노동 수용소의 Direktor|디렉토어de(총괄 이사)를 거쳐 소장으로 활동했다. 구체적으로 1940년 1월부터 1942년 8월까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 소장을 역임했다.
1942년에는 절멸 수용소인 마이다네크의 소장으로 부임했으며(1942년 8월~11월 재임), 이곳에 가스실을 설치하는 데 직접 관여했다. 1943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는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KZ Flossenbürg)의 소장을 맡았다. 플로센뷔르크에서는 특히 여호와의 증인 수감자들의 절멸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체포된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한스 오스터 장군 등 주요 인물들이 플로센뷔르크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열린 군사 재판에서 쾨겔은 참심관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재판은 피고인들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여 전원 사형 판결을 내렸고, 이들은 1945년 4월 9일 수용소 내에서 처형되었다.
2. 4. 체포와 죽음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쾨겔은 도주하여 한동안 체포를 피했으나, 1946년 6월 바이에른에서 미국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슈바바흐의 감옥으로 보내졌고, 다음 날인 1946년 6월 27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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