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폰 바이에른 선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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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폰 바이에른 선제후는 1662년에서 1726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군사적 업적과 정치적 야망, 그리고 예술 후원으로 기억된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빈을 방어하고, 대동맹 전쟁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여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블렌하임 전투의 패배로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으로 돌아와 건설 사업을 추진하며 왕가의 위상을 높였으며, 예술 후원을 통해 로코코 시대를 열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으며, 뮌헨의 테아티너 교회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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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폰 바이에른 선제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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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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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칭호 | 바이에른 선제후 |
출생일 | 1662년 7월 11일 |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파일:Flag of the Electorate of Bavaria.svg|border|25px]] 바이에른 선제후령, 뮌헨 |
사망일 | 1726년 2월 26일 |
사망지 | 신성 로마 제국 [[파일:Flag of the Electorate of Bavaria.svg|border|25px]] 바이에른 선제후령, 뮌헨 |
매장지 | 신성 로마 제국 [[파일:Flag of the Electorate of Bavaria.svg|border|25px]] 바이에른 선제후령, 뮌헨, 테아티너 교회 |
왕가 | 비텔스바흐 가문 |
아버지 | 페르디난트 마리아 |
어머니 | 엔리에타 아델라이데 디 사보이아 |
통치 | |
재위 기간 | 1679년 3월 26일 - 1726년 2월 26일 |
배우자 | |
배우자 1 | 마리아 안토니아 폰 에스터라이히 |
배우자 2 |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 |
자녀 | |
자녀 | 목록 참조 |
기타 정보 | |
참고 문헌 | |
ISBN | 0-304-36704-4 |
2. 초기 생애 및 가문 배경
1679년에 선제후위를 계승했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숙부인 막시밀리안 필리프 히에로니무스가 1680년까지 섭정을 하였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맞서 빈을 방어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1] 이후 대튀르크 전쟁, 대동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등 여러 주요 전쟁에 참여했다.
3. 군사 경력 및 전쟁 참여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원하기도 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도 하는 등 복잡한 외교 관계 속에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 노력했다. 특히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프랑스 편에 서서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3. 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항해 빈 방어에 주력했다.[1] 제2차 빈 포위에서 해방군에 참가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빈을 해방하는데 성공했다.
대터키 전쟁에 참전하여 1686년 로렌 공작샤를 5세의 지휘 아래 부다를 함락시켰고, 1687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승리했다. 1688년 샤를 5세를 대신하여 지휘를 맡아 베오그라드를 포위・함락시켰다(베오그라드 포위전).
3. 2. 대동맹 전쟁
1688년 대동맹 전쟁에 참전하여 샤를 5세와 함께 라인강 방어에 나섰고, 터키 전선은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으로 교체되었다.[1] 막시밀리안 2세는 대동맹 전쟁에서 라인강 유역과 이탈리아, 플랑드르를 전전하며, 1695년에 잉글랜드 왕 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3세와 함께 플랑드르 도시 나뮈르를 함락시켰다(제2차 나뮈르 포위전).[1]
3. 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막시밀리안 2세는 프랑스 편에 섰다. 그는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앙주 공작 필리프(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다. 1701년 네덜란드 총독직 보장을 조건으로 프랑스군을 네덜란드로 불러들였고, 1702년 프랑스 측으로 참전했다. 1703년 빌라르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합류하여 도나우강 유역을 장악하고 빈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존 처칠과 프린츠 오이겐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영국 연합군에 패배하면서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 전투로 바이에른은 적군에게 점령되었고,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들은 포로로 잡혀 수년간 오스트리아에서 지내야 했다. 막시밀리안 2세는 네덜란드로 도망쳐 프랑스 장군 빌르로이 공작과 함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싸웠지만, 1706년 라미예 전투에서 또다시 크게 패했다. 네덜란드마저 영국·네덜란드에 점령당하자, 그는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1714년 라슈타트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면서, 1715년 막시밀리안 2세는 바이에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4.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시절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네덜란드에서 자신의 왕가를 세우려는 야망을 품었으나, 총독에 임명된 해에 아내 마리아 안토니아가 사망했다. 1694년 1월 12일, 그는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와 결혼하여 이러한 야망을 다른 방식으로 추구하고자 했다.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는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이었으므로, 몇 년 후 얀 3세가 사망하자 막시밀리안 2세는 폴란드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적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는 서유럽에 더 큰 관심을 두었고, 테레사 쿠네군다 소비에스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를 알베르트와 클레멘스 아우구스트에게 자신의 야망을 투영했다.[1]
한편, 첫 번째 아내인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아 안토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자식이 없던 스페인 왕카를로스 2세의 가장 가까운 남자 상속인으로서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아스투리아스 공 작위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2세는 1692년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태어날 즈음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요제프 페르디난트는 1699년에 어린 나이로 사망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막시밀리안 2세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앙주 공작 필리프(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을 지지하며 프랑스 편에 섰다. 1701년, 그는 네덜란드 총독직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프랑스군을 네덜란드로 불러들였다.
5. 바이에른 귀환 이후의 통치
1714년 라슈타트 조약으로 전쟁이 종결되자, 1715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바이에른으로 돌아왔다. 그는 님펜부르크 궁전 확장과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다. 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카를 알브레히트를 신성 로마 황제요제프 1세의 유녀 마리아 아말리아 황녀와 결혼시키고, 오스트리아-터키 전쟁에서는 오스트리아군에 병력을 제공했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정치적 야망의 실패를 수많은 건설 계획으로 보상하려 했다.[1] 그는 왕가의 품격을 높인 독일 공들, 특히 아우구스트 2세 강건왕(1697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1701년), 하노버의 게오르그 1세(1714년)를 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꿈이 끝나지 않았음을 인지했다.[1]
1717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튀르크에 대항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새로운 전쟁에 바이에른 예비 군대를 유지하도록 했다. 1724년에는 자신의 가문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모든 비텔스바흐 가 세력의 연합을 만들었다. 비텔스바흐 선제후는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자신과 그의 아들 쾰른의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 트리어의 프란츠 루드비히였고, 이들은 다음 황제 선거에서 4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또는 그의 아들 카를 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기를 열망했고, 1722년 카를 알베르트는 이미 합스부르크 공주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한 상태였다.
1726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하일리겐게오르크(Georgsorden)를 바이에른 왕실 가문의 왕가 훈장으로 만들었다.
6. 문화적 유산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예술 후원자였다. 그가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재임할 때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수많은 그림을 비텔스바흐 왕가 수집품에 추가했다.[1]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통치 초기에는 그의 외가 쪽 이탈리아 궁정 예술가인 엔리코 추칼리와 조반니 안토니오 비스카르디가 주로 활동했다. 1715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이 프랑스에서 큰 문화적 영향을 받고 돌아온 후, 요제프 에프너를 궁정 건축 감독관으로, 젊은 프랑수아 드 쿠빌리에를 그의 조수로 임명하면서 바이에른 로코코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님펜부르크 궁전이 확장되었고, 새로운 슐레이스하임 궁전이 건설되었다. 슐레이스하임 궁전은 수로망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네덜란드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건설한 것이다.
7. 결혼과 자녀
168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황후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딸 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했다. 슬하에 3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했고, 마리아 안토니아 또한 1692년에 사망했다.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레오폴트 페르디난트 | 1689년 5월 22일 | 1689년 5월 22일 | 요절 | |
안톤 | 1690년 11월 19일 | 1690년 11월 19일 | 요절 | |
![]() | 요제프 페르디난트 폰 바이에른 공작 | 1692년 10월 28일 | 1699년 2월 6일(6세) | 스페인 왕세자, 요절 |
1694년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딸 테레사 쿠네군다와 재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사진 |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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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음) | 1695년 | 1695년 | 요절 | |
마리아 안나 카롤리네 | 1696년 8월 4일 | 1750년 10월 9일(54세) | 1720년 수녀가 됨 | |
![]() | 카를 7세 | 1697년 8월 6일 | 1745년 1월 20일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바이에른 선제후 |
![]() | 필리프 모리츠 마리아 폰 바이에른 | 1698년 8월 5일 | 1719년 3월 12일 | 뮌스터와 파더보른 주교로 선출 |
![]() | 페르디난트 마리아 폰 바이에른 | 1699년 8월 5일 | 1738년 12월 9일(39세) | 제국 장군 |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 1700년 8월 17일 | 1761년 2월 6일(60세) | 튜튼 기사단 그랜드 마스터 | |
빌헬름 | 1701년 | 1704년 | 요절 | |
알로이스 요한 아돌프 | 1702년 | 1705년 | 요절 | |
![]() | 요한 테오도르 | 1703년 | 1763년 | 추기경, 리에주와 프라이징, 레겐스부르크 주교 |
막시밀리안 요한 토마스 | 1704년 | 1709년 | 요절 |
또한, 프랑스인 애첩 Agnes Le Louchier|아녜스 르 루시에프랑스어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1명을 두었고,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그를 인지했다.
- 에마뉘엘-프랑수아-조제프 드 바비에르 (1695년 - 1747년) - 드 바비에르 백작, 빌라세르프 후작, 프랑스 군인.
8. 평가 및 논란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정치적 야망을 이루지 못한 대신 수많은 건설 계획에 힘을 쏟았다. 그는 독일의 아우구스트 2세 강건왕(1697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1701년), 하노버의 게오르그 1세(1714년) 등이 왕가의 품격을 높이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꿈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1]
1717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합스부르크 왕가가 투르크를 상대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킬 때 바이에른 군대를 예비 군대로 유지했다.[1]
1724년, 그는 가문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모든 비텔스바흐 가 세력의 연합을 만들었다. 당시 비텔스바흐 선제후는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자신과 그의 아들 쾰른의 클레멘스 아우구스트, 팔츠 선제후 카를 3세 필리프, 트리어의 프란츠 루드비히였으며, 이들은 다음 황제 선거에서 4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또는 그의 아들 카를 알베르트가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를 차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1722년에 이미 카를 알베르트는 합스부르크 공주인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한 상태였다.[1]
1726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바이에른 왕실 가문의 왕가 훈장인 하일리겐게오르크 훈장(Georgsorden)을 만들었다.[1]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은 뮌헨의 테아티너 교회 지하실에 묻혔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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