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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겐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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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겐스부르크는 독일 바이에른주에 위치한 도시로, 구석기 시대부터 정착이 시작된 유서 깊은 곳이다. 로마 시대에는 군사 기지가 건설되었고, 6세기부터 13세기 전반까지 바이에른의 수도였다. 1245년 자유제국도시가 되었으며, 1663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의회가 열리는 등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를 포함하여 다양한 문화 유적과 건축물을 보유하고 있으며, BMW, 지멘스 등 많은 기업이 위치한 경제 중심지이다. 레겐스부르크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육 기관이 있으며, 야구, 축구, 아이스하키 등 다양한 스포츠 클럽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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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겐스부르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레겐스부르크 깃발
깃발
레겐스부르크 문장
문장
독일어 이름Regensburg
바이에른어 이름Rengschburg / Rengschburch
체코어 이름Řezno
일반 정보
국가독일
바이에른주
행정 구역독일의 도시
면적80.76 km²
시간대CET (UTC+1)
여름 시간 (일광 절약 시간)CEST (UTC+2)
우편 번호93001–93059
지역 번호0941
자동차 번호판 코드R
지방 자치체 코드09 3 62 000
행정 구역 수18개 구역
웹사이트www.regensburg.de
정치
시장 유형Oberbürgermeister (최고 시장)
시장게르트루트 말츠-슈바르츠피셔
소속 정당SPD
시장 임기2020–2026
지리
인구 통계
총 인구145,465 명 (2015년)
인구 밀도1,800 명/km²
세계 유산
공식 명칭레겐스부르크 구시가지와 슈타트암호프
ID1155
등재 연도2006년
기준문화: ii, iii, iv
면적182.8 ha
완충 지역775.6 ha

2. 역사

레겐스부르크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켈트 이름인 '''라다스보나(Radasbona)'''가 있었고, 서기 90년경 로마 제국이 이곳에 군사 기지를 건설했다. 179년에는 '''카스트라 레기나(Castra Regina)'''("레겐 강가의 요새")라는 대규모 로마 군사 기지가 건설되었다.[6]

로마 시대 동쪽 탑의 유적, 프라에토리아 문


6세기 초부터 레겐스부르크는 아길로핑가 가문의 통치 중심지이자 530년부터 13세기 전반까지 바이에른의 수도였다. 739년 레겐스부르크 주교구로 재건되었고, 8세기 후반 샤를마뉴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다. 792년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샤를마뉴 총회의 교회 부문이 열려 비삼위일체론적 입양론 교리를 비난했다.

843년 카롤링거 제국 분할 후, 동쪽 프랑크 지배자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의 중심지가 되었다. 845년에는 14명의 보헤미아 왕족이 세례를 받아 체코인기독교화가 시작되었고, 레겐스부르크 주교구는 프라하 주교구의 모주교구가 되었다.[7] 899년 카린티아의 아르눌프가 레겐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7]

고대 후기인 1000년에는 인구가 800년의 2만 3천 명에서 4만 명으로 증가했다.[8] 1096년 제1차 십자군 당시 피에르십자군 무리를 이끌고 레겐스부르크에서 유대인의 집단 개종을 강요하려 했고,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9] 1135년에서 1146년 사이 석교가 건설되어 북유럽과 베네치아 사이의 주요 국제 무역로가 열렸고, 레겐스부르크는 황금기를 맞이하여 남부 독일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1245년 자유제국도시가 된 레겐스부르크는 중세 후기 무역 중심지였으며, 1471년에는 튀르크와의 전쟁을 결정하기도 했다.[10] 1486년 바이에른 공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10년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독립을 회복했다. 1541년 최초의 레겐스부르크 국회가 열렸고, 1542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다.

1663년부터 1806년까지 레겐스부르크 영구 국회가 열려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많은 방문객을 유치했다. 소수의 로마 가톨릭 인구는 시민권(''Bürgerrechtde'')을 박탈당했지만, 레겐스부르크는 로마 가톨릭 주교와 여러 수도원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생트 에메람 수도원, 니더뮌스터 수도원, 오버뮌스터 수도원은 국회(''Reichstagde'')에서 의석과 투표권을 부여받은 자유 제국령이었다.

16세기 레겐스부르크


1711년 제국 의회의 의식적인 도착


18세기 자유제국도시(황색)와 주교후국(자주색)


통상무역 의존, 초지역적 산업 부재, 유럽 대륙 주요 상업로 이동, 바이에른 대공의 억압 등으로 레겐스부르크는 쇠퇴했다. 뉘른베르크아우크스부르크에 가려져 인구도 추월당했고, 1486년 바이에른 대공의 영방 군주권 아래에 들어갔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와 막시밀리안 1세는 1492년 이후 도시의 제국 복귀를 강제했고, "자유 도시" 레겐스부르크를 "황제의 도시"로 만들었다.

1803년, 레겐스부르크는 제국 통상 대표자 회의 주요 결의로 독립을 잃고 카를 폰 달베르크에게 넘겨졌다. 달베르크는 도시를 근대화하고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신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1810년 바이에른 왕국에 넘겨졌고, 1809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라티스본 전투가 벌어져 도시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1809년 레겐스부르크에서의 나폴레옹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유대인 공동체는 박해를 받았다. 수정의 밤 동안 회당과 유대인 가옥, 상점이 파괴되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체포되거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1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거나 추방되었고,[12] 1945년에는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의 레겐스부르크 분소가 설치되어 460명의 강제 노동자가 있었고 그중 40명이 사망했다.[13]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의 지역 분소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


메서슈미트 Bf 109 항공기 공장과 정유소가 있어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지만, 레겐스부르크 자체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아 중세 도시 중심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레겐스부르크에는 독일에서 가장 큰 이주민(DP) 캠프가 있었고, 자체 캠프 우편 서비스도 운영했다.[14]

레겐스부르크 DP 캠프의 우크라이나 캠프 우체국 소인


1960년대 초, 레겐스부르크는 산업 유치를 위해 기반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지멘스(Siemens), BMW, 인피니언(Infineon), OSRAM과 같은 기업들이 진출하여 도시 발전에 기여했다. 1965년에는 레겐스부르크 대학교가, 1971년에는 레겐스부르크 응용과학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997년 레겐스부르크는 유럽 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유럽상(Europe Prize)을 수상했다.[15] 2006년 레겐스부르크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1. 고대와 중세 초기

레겐스부르크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레겐스부르크 근처에 주어진 가장 오래된 켈트 이름은 '''라다스보나(Radasbona)'''였으며, 서기 90년경 로마 군사 기지가 이곳에 건설되었다. 179년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에 레기오 III ''이탈리카'''를 위해 '''카스트라 레기나(Castra Regina)'''("레겐 강가의 요새")라는 새로운 대규모 로마 군사 기지가 건설되었다.[6] 이곳은 도나우 강 최북단의 중요한 진영이었으며, 오늘날 레겐스부르크 구시가지의 중심지, 즉 오베어와 운터어 바흐가세 동쪽, 슈바넨플라츠 서쪽에 해당한다. 로마 후기부터 이미 이 도시가 주교좌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6세기 초부터 레겐스부르크는 아길로핑가 가문의 통치 중심지였다. 약 530년부터 13세기 전반까지 바이에른의 수도 역할을 했다. 로마인들이 설립한 주교구는 739년 본파티우스에 의해 레겐스부르크 주교구로 재건되었다. 8세기 후반, 레겐스부르크는 샤를마뉴 통치 기간 동안 중요한 도시로 남았다. 792년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샤를마뉴 총회의 교회 부문이 열렸는데,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톨레도의 엘리판두스와 우르헬의 펠릭스가 가르친 비삼위일체론적 입양론 교리를 비난했다.

843년 카롤링거 제국 분할 후, 이 도시는 동쪽 프랑크 지배자 동프랑크 왕국 루트비히의 중심지가 되었다. 2년 후인 845년, 14명의 보헤미아 왕족이 레겐스부르크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 이는 체코인기독교화의 시작점이었고, 레겐스부르크 주교구는 프라하 주교구의 모주교구가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체코 지역의 문화사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그 결과로 슬라브 정교 세계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899년 12월 8일 카린티아의 아르눌프는 샤를마뉴의 후손으로 레겐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7]

고대 후기인 1000년에는 인구가 800년의 2만 3천 명에서 4만 명으로 증가했다.[8] 1096년 제1차 십자군으로 향하는 길에 피에르십자군 무리를 이끌고 레겐스부르크에서 유대인의 집단 개종을 강요하려 했고,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9] 1135년에서 1146년 사이에 석교가 도나우 강에 건설되었다. 이 다리는 북유럽과 베네치아 사이의 주요 국제 무역로를 열었고, 이는 부유한 무역 가문의 거주지로서 레겐스부르크의 황금기를 열었다. 레겐스부르크는 남부 독일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고 금세공과 직물로 유명했다.

7세기 또는 8세기에 갈리아(Gallia), 아마도 프랑스 북서부 푸아티에(Poitiers) 출신의 순회 주교(Wanderbischof)인 성 에메람(Heiliger Emmeram)이 바이에른(Bayern)으로 초청되어, 바이에른 공작(Herzog)의 주선으로 레겐스부르크 주교가 되어 바이에른에서 기독교 전파에 힘썼다고 전해진다.[58]

일찍이 부족 공작령 바이에른(Stammesherzogtum Bayern)의 중심지였던 레겐스부르크에 아길로르핑가(Agilolfinger)는 자기 영토의 중심 궁정(Hauptpfalz)을 두었다.[59] 739년, “독일인의 사도”라고 불리는 보니파티우스(Bonifatius)는 공작 오데로(Odeló)의 지원을 얻어 바이에른에 잘츠부르크, 파사우, 프라이징, 레겐스부르크의 네 주교좌를 설치하여 교회 조직을 확립했다.[60] 788년, 타실로 3세(Tassilo III)가 카롤루스 대제(Karl der Große)에게 항복하면서 레겐스부르크에 대한 지배권은 카롤링거 왕조(Karolinger)로 넘어갔다. 루트비히 1세(Ludwig I)(프랑크 왕)는 이 도시에 웅장한 교회를 새로 건설하려 할 때, 돌이 부족하자 “도시 성벽을 허물게 했는데”, “성벽 내부의 틈에서 옛 사람의 유골을 싼 금이 대량으로 발견되어” 이 금으로 교회를 장식했다.[61] 그 후, 도시는 동프랑크 왕국에서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뛰어난 지위를 획득했고, 카롤링거 궁정에서는 “황제 도시”(civitas regia)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받았다.[59]

프랑크 왕국의 통치하에 들어간 후에도 레겐스부르크는 정치·경제의 중심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대주교좌 성당 등을 통해 그 번영을 엿볼 수 있다. 13세기 중반에 “제국 자유 도시”로서의 특권을 인정받았다.

루트비히 2세(Ludwig II)(동프랑크 왕)는 이곳에 자주 머물기 위해 구 콘마르크트(Alter Kornmarkt)에 새로운 왕궁을 설치했다. 그러나 반세기 후, 아르누르푸스(Arnulf)(동프랑크 왕)는 성 에메람 수도원 안에 “수도원 궁”(Klosterpfalz)을 짓게 하고 거기에 머물렀다. 두 왕 모두 레겐스부르크를 자주, 장기간 방문했다. 카롤링거 왕가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묻혔다.[62]

2. 2. 중세 전성기와 자유제국도시

1245년 레겐스부르크는 자유제국도시가 되었고, 중세 후기 무역로의 변화 이전까지 무역 중심지였다. 레겐스부르크는 국제 회의가 자주 열리는 곳이었으며, 1471년에는 튀르크와의 전쟁을 결정하기도 했다.[10] 1486년 바이에른 공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10년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독립을 회복했다. 1541년 최초의 레겐스부르크 국회가 열렸고, 1542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받아들여 시 의회는 전적으로 루터교로 남았다.

1663년부터 1806년까지 레겐스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의회 상주지였으며, 이는 레겐스부르크 영구 국회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레겐스부르크는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많은 방문객을 유치했다.

소수의 인구는 로마 가톨릭으로 남아 시민권(''Bürgerrechtde'')을 박탈당했다. 제국 도시가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지만, 레겐스부르크는 로마 가톨릭 주교와 여러 수도원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생트 에메람 수도원, 니더뮌스터 수도원, 오버뮌스터 수도원은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자유 제국령으로 국회(''Reichstagde'')에서 의석과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따라서 레겐스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관점에서 다섯 개의 독립된 "국가"(프로테스탄트 도시, 로마 가톨릭 주교구, 세 개의 수도원)로 구성되는 독특한 상황이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 레겐스부르크는 제국 남동부의 정치적 중심지였으며, 920년경 서쪽 신시가지(Neustadt)가 원형 시벽 안에 포함되었다. 왕궁(Pfalzen)은 도시 확장의 핵심으로 남독일 경제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무역 관계는 사방으로 뻗어 있었지만, 중심은 남쪽에 있었다. 1000년 이후 알프스 북부에서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산 제품 유통지가 되었으며, 베네치아의 번영과 여러 면에서 함께했다. 경제적 번영은 14세기 말까지 계속되었고, "돌다리"(슈타이너네 브뤼케), 도시 귀족 저택의 탑, 대성당, 시청 등 높은 수준의 건축물들이 그 유산이다. 주민들은 국제적이었으며, 중세 전성기에는 약 15,000명의 인구를 가진 독일 최대 도시 중 하나였다. 11세기부터 형성된 동서 교외 도시(Vorstädte)는 13세기 말 편입되어 시역이 확장되었고, 당시 건설된 시벽은 18세기 말까지 존속했다. 중세 말기에는 약 12,000명이 거주했다.[63]

제3차 십자군에서 프리드리히 1세(바르바로사)가 이끄는 대군은 레겐스부르크에 집결하여 1189년 5월 11일 도나우 강을 따라 빈으로 진군했다.[64]

통과 무역은 도시 번영의 결정적인 기반이었다. 12세기 사회적 분화와 시민 조직화가 이루어지면서,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정책에 협력하며 1182년 이후 자치권을 확대했다. 필립 폰 슈바벤의 특권(1207년)과 프리드리히 2세의 특권(1230년, 1245년)은 바이에른 공작과 주교의 시내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왕과 황제의 특권은 도시의 자유(Stadtfreiheit)의 기반이 되어 시민들에게 시장과 참사회 의원 선출 권한을 부여했다.

1230년 이후 도시 법원(Stadtgericht)이 설치되었고, 가장 오래된 시장(Stadtsiegel)은 1211년, 시청(Stadtkanzlei)은 1242년 이후 존재했다. 도시 정치는 상업 경영 도시 귀족(Haldelspatriziat)이 이끌었으며, 카롤링거 왕조 이래 유대인 상인들도 일부 참여했다. 도시 귀족들은 과두 지배를 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레겐스부르크를 "대공령 바이에른의 중심지"(Hauptort des Herzogtums Bayern)에서 영방 국가 바이에른의 수도(Hauptstadt des Territorialstattes Bayern)로 만들지 못했다. 중세 말기 레겐스부르크는 제국에 대한 부담, 공물, 충성 맹세(weder Steuern oder sonstige Abgaben noch die Huldigung)가 면제된 7개의 자유 도시(sieben Freie Städte) 중 하나였다.[65]

통상무역 의존, 초지역적 산업 부재, 유럽 대륙 주요 상업로 이동, 바이에른 대공의 억압 등은 레겐스부르크의 급격한 쇠퇴를 야기했다. 뉘른베르크아우크스부르크의 번영에 가려 인구도 추월당했다. 도시 귀족들은 도시를 떠났고, 1486년 자발적으로 비텔스바흐가 바이에른 대공의 영방 군주권 아래에 들어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와 막시밀리안 1세는 1492년 이후 도시의 제국 복귀를 강제했고, 막시밀리안은 "자유 도시"(Freistadt) 레겐스부르크를 "황제의 도시"(kaiserliche Stadt)로 만들었다. 이 상태는 1555년까지 지속되었다. 도나우 강 북쪽 기슭에 바이에른이 건설한 슈타트암호프(Stadtamhof)는 도시로 승격되었다. 16세기 이후 레겐스부르크는 제국 의회가 자주 개최되는 남동 독일 유일의 제국 도시였는데, 도시 인구 감소로 의회 참석자들을 위한 숙박 및 물자 공급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67]

레겐스부르크는 '''제국 의회'''(Reichsversammlungen von Regensburg) 개최지로 중요했다. 제국 의회는 788년 카롤루스 대제 시대에 시작되어 13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지만,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약 60회 개최되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는 18회 개최되었다. 10세기 말 이후 알터 코른마르크트 왕궁(Pfalz am Alten Kornmarkt) 주변에 성직 귀족들의 숙박을 위한 저택(Hof, Höfe)이 마련되었다. 1180년 회의에서는 벨프 가문의 하인리히 사자 공에게 제국 추방이 결정되었다. 15세기 제국과 터키와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1454년 회의에는 부르고뉴 공작필리프 3세("선량공")도 참가했고, 1471년 회의에서는 "터키세" 선언이 발표되었다.[68]

레겐스부르크는 '''수도원이 많은 도시'''였다. 1525년 기록에 따르면, 수도원에 거주하지 않는 성직자(Weltgeistliche) 230명, 남성 수도사(Mönche) 66명, 여성 수도사(Nonnen) 85명이 있었다. 이는 도시 인구의 약 3%에 해당하며, 중세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곳의 종교 시설이 Reichsstandschaft(제국 신분)을 획득하여 도시 지배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700년경 설립된 베네딕트 수도회 성 에메람 수도원은 바이에른 대공령과 카롤링거 왕조의 수호 성인으로 양 가문에 의해 보호받았다. 수도원장은 973년까지 레겐스부르크 주교를 겸임했다.

이후 고르체(Gorze) 개혁으로 Bischofshof(주교 관구)와 Domkloster(대성당 수도원)가 분리되어 대립했다. 수도원 측은 주교 권력 개입 배제와 제국 직속(Reichsunmittelbarkeit) 획득을 목표로 했고, 1295년 아돌프 폰 나사우에 의해 승인되어 성 에메람 수도원은 제국 수도원(Reichsstift)이 되었다. 오버뮌스터(Obermünster)와 니더뮌스터(Niedermünster)는 계획적으로 배치, 설립된 수도원에서 주교좌 교회 참사회 율원(Kanonissenstift)으로 바뀌었다. 니더뮌스터는 하인리히 2세, 오버뮌스터는 콘라트 2세에 의해 제국 직속(Reichsunmittelbarkeit)을 인정받았다.

1000년경부터 고르체 개혁에 따른 성 파울 수도원 설립을 시작으로 수도원 개혁에 따라 수많은 수도원이 레겐스부르크에 건설되었다. 중세 설립 수도원/율원 중 후대 세속화(Säkularisation)를 극복하고 현재까지 존속하는 곳은 세 곳뿐이다.[69]

2. 3. 근세와 영구 제국 의회



1245년 레겐스부르크는 자유제국도시가 되었고, 중세 후기 무역로 변화 이전까지 무역 중심지였다. 1471년 튀르크와의 전쟁 결정, 1541년 최초의 레겐스부르크 국회 개최 등 레겐스부르크는 항상 국제 회의가 열리는 곳이었다.[10] 1486년 바이에른 공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10년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의해 독립을 회복했다. 1542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고, 시 의회는 루터교로 남았다.

1663년부터 1806년까지 레겐스부르크 영구 국회로 알려진 신성 로마 제국 의회의 상주지였다. 따라서 레겐스부르크는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으며, 많은 방문객을 유치했다.

소수의 인구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남았고,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시민권 (''Bürgerrechtde'')을 박탈당했다. 제국 도시가 종교 개혁을 받아들였지만, 이 도시는 로마 가톨릭 주교와 생트 에메람 수도원, 니더뮌스터 수도원, 오버뮌스터 수도원 등 여러 수도원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이 세 수도원은 국회 (''Reichstagde'')에서 의석과 투표권을 부여받은 자유 제국령이었다. 그래서 레겐스부르크는 프로테스탄트 도시, 로마 가톨릭 주교구, 세 개의 수도원으로 구성된 다섯 개의 독립된 "국가"로 구성되는 독특한 상황이었다. 또한, 레겐스부르크는 바이에른 지역의 전통적인 수도였고, 영구 국회로 인해 제국의 기능적 공동 수도(비엔나 다음으로) 역할을 했으며, 황제의 전권 대표(대부분 튀른 택시스 가문 왕족)의 거주지였다.

통상무역 의존, 초지역적 산업 부재, 유럽 대륙 주요 상업로 이동, 바이에른 대공의 억압 등 여러 요인으로 레겐스부르크는 급격히 쇠퇴했다. 뉘른베르크아우크스부르크에 가려져 인구도 추월당했다. 도시 귀족들은 떠났고, 1486년 레겐스부르크는 자발적으로 비텔스바흐가 바이에른 대공의 영방 군주권 아래에 들어갔다. 1490년 막시밀리안 황제가 악단에게 레겐스부르크를 향해 "비참한 유다"를 연주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66]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3세와 막시밀리안 1세는 1492년 이후 도시의 제국 복귀를 강제했고, 막시밀리안은 "자유 도시" 레겐스부르크를 "황제의 도시"로 만들었다. 이 상태는 1555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도나우 강 북쪽 기슭에 바이에른이 건설한 슈타트암호프는 도시로 승격되었다. 레겐스부르크는 16세기 이후 제국 의회가 자주 개최되는 남동 독일 유일의 제국 도시였는데, 도시 인구 감소로 의회 참석자들을 위한 숙박 및 물자 공급 능력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67]

레겐스부르크는 '''제국 의회'''(Reichsversammlungen von Regensburg) 개최지로 중요했다. 제국 의회는 788년 카롤루스 대제 시대부터 13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지만,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약 60회 개최되었다. 호엔슈타우펜 왕조 시대에는 특히 빈도가 높아 18회 개최되었다. 10세기 말 이후 알터 코른마르크트 왕궁 주변에 성직 귀족들의 숙박을 위한 저택이 마련되었다. 1155년 프리드리히 1세가 벨프 가문 하인리히 사자 공과 바벤베르크 가문 하인리히 사이의 바이에른 대공령 분쟁 조정을 시도했다. 1180년 회의에서는 벨프 가문 하인리히 사자 공에게 제국 추방이 결정되었다. 15세기 제국과 터키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1454년 회의에 부르고뉴 공작필리프 3세도 참가했고, 1471년 회의에서는 "터키세" 선언이 발표되었다.[68]

레겐스부르크는 '''수도원이 많은 도시'''였다. 종교 개혁 시작된 1525년 기록에 따르면, 수도원에 거주하지 않는 성직자 230명, 남성 수도사 66명, 여성 수도사 85명이 있었다. 이는 도시 인구의 약 3%이며, 중세에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종교 시설이 제국 신분을 획득하여 도시 지배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수도원은 700년경 건설된 베네딕트 수도회 성 에메람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장은 973년까지 레겐스부르크 주교를 겸임했다.

이후 고르체 개혁으로 주교 관구와 대성당 수도원이 분리되어 대립했다. 수도원 측은 주교 권력 개입 배제와 제국 직속 획득이 목표였고, 1295년 아돌프 폰 나사우에 의해 승인된다. 이후 성 에메람 수도원은 제국 수도원이 된다. 성 에메람 수도원과 유사한 특별 지위를 얻은 곳은 오버뮌스터와 니더뮌스터이다. 두 수도원은 계획적으로 배치, 설립된 수도원에서 출발하여 주교좌 교회 참사회 율원으로 바뀌었다. 니더뮌스터는 하인리히 2세, 오버뮌스터는 콘라트 2세에 의해 제국 직속을 인정받았다.

1000년경부터 더 많은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고르체 개혁에 따른 성 파울 수도원 설립을 시작으로 수도원 개혁에 따라 수많은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중세 설립 수도원/율원 중 세 곳만이 세속화를 극복하고 현재까지 존속한다.[69] 역대 레겐스부르크 주교 중에는 왕권 지지 상서 장관으로 정치 활동을 하거나, 종교적 뛰어남으로 성인(열성) 또는 복자(열복)로 추대된 주교도 있다.[70]

중세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제국 의회는 종종, 특히 16세기 중반부터 매우 빈번하게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1663년부터 1684년까지는 ""가 열렸다.[71] 165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이루어진 "최종 제국 의회 결의"는 정규 제국 의회 결의로서는 마지막이었다.

30년 전쟁에서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전사 후, 용병 대장 베른하르트가 군대 지휘를 맡았다. 1633년 11월 베른하르트는 바이에른 영내에 진공,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미온적 태도 덕에 손쉽게 레겐스부르크에 입성하여 영내를 황폐화시켰다.[72]

1803년 제국 통상 대표자 회의 주요 결의로 독립을 잃고, 마인츠 대신 카를 폰 달베르크에게 넘겨졌다. 카를은 도시를 근대화하고,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신자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여 존경받았다. 1810년 바이에른 왕국에 넘겨지고, 카를은 풀다로 옮겼다. 1809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 교전으로 도시에 큰 피해가 발생했다.

2. 4. 현대

1803년, 레겐스부르크는 레겐스부르크 공국에 편입되면서 제국 자유 도시의 지위를 상실했다. 1801년 루네빌 조약에 따라 프랑스가 라인 강 좌안에 위치한 마인츠 선제후령 영토를 합병하자, 그 보상으로 마인츠 대주교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인 카를 폰 달베르크에게 레겐스부르크가 넘겨졌다. 마인츠 대주교구는 공식적으로 레겐스부르크로 이전되었고, 달베르크는 주교구, 수도원, 도시 자체를 통합하여 레겐스부르크 공국(''Fürstentum Regensburg'')을 형성했다. 달베르크는 공공 생활을 철저히 현대화했으며, 프로테스탄트로마 가톨릭 신자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했다. 1810년 달베르크는 레겐스부르크를 바이에른 왕국에 할양했고, 그는 프랑크푸르트 대공이라는 칭호를 받고 풀다하나우를 보상으로 받았다.

1809년 4월 19일부터 4월 23일까지, 레겐스부르크에서는 앙리 가티앵 베르트랑과 나폴레옹 자신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부대와 후퇴하는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라티스본 전투가 벌어졌다. 보급품과 탄약이 바닥나자 결국 도시는 함락되었고, 전투 중 약 150채의 집이 불타고 다른 집들은 약탈당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프랑스 진영에서의 사건''은 프랑스군의 관점에서 전투를 묘사하지만 역사적 오류로 가득 차 있다.

1933년 나치당이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후 유대인 공동체는 박해를 받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도망쳤으며 일부는 폴란드로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드-독일 협정 덕분에 그들은 도시로 돌아갈 수 있었다.[11] 1938년 11월 9일, 수정의 밤 동안 레겐스부르크 회당과 여러 유대인 가옥과 상점이 파괴되었고, 약 220명의 유대인이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11]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여러 국가로 이주했고, 1942년에는 200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독일 점령하 폴란드의 피아스키(Piaski, Świdnik County) 또는 독일 점령하 체코슬로바키아의 테레지엔슈타트 게토로 이송되었다.[12] 제2차 세계 대전의 마지막 달인 1945년 3월과 4월에 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의 레겐스부르크 분소가 도시에 설치되었으며, 여러 국적의 강제 노동자 460명이 있었고 그중 40명이 사망했다.[13]

레겐스부르크에는 메서슈미트 Bf 109 항공기 공장과 정유소가 있었는데, 이곳은 1943년 8월 17일 슈바인푸르트-레겐스부르크 작전에서, 그리고 1945년 2월 5일 제2차 세계 대전의 석유 작전 중에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다. 두 목표물 모두 심하게 피해를 입었지만, 레겐스부르크 자체는 연합군의 전략 폭격 작전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고, 거의 손상되지 않은 중세 도시 중심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도시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손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베르뮌스터 교회였는데, 1945년 3월 공습으로 파괴되어 재건되지 않았다(종탑은 남아 있음). 또한 전후 레겐스부르크의 느린 경제 회복은 역사적 건물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지 않도록 보장했다. 1960년대 후반 복원의 움직임이 레겐스부르크에 도달했을 때,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도시의 유산을 보존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레겐스부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큰 이주민(DP) 캠프가 있던 곳이었다. 1946년에서 1947년 최고점에 달했을 때, 간호퍼지들룽(Ganghofersiedlung) 노동자 지역에는 거의 5,000명의 우크라이나인과 1,000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아닌 난민 및 이주민들이 거주했다. 미국의 연합군 점령 지역 내 미국 군정의 승인을 얻어 레겐스부르크와 다른 DP 캠프들은 자체 캠프 우편 서비스를 조직했다. 레겐스부르크에서는 1946년 12월 11일에 캠프 우편 서비스가 운영을 시작했다.[14]

1960년대 초, 레겐스부르크는 산업 유치를 위해 기술 및 사회 기반 시설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 지멘스(Siemens)가 레겐스부르크에 진출한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도시 발전에 있어 중요한 발걸음이었다. 1965년에는 레겐스부르크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레겐스부르크 응용과학대학교는 1971년에 설립되었다. 두 번째 다국적 기업인 BMW는 1986년에 레겐스부르크에 진출하여 대규모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1990년대 이후로 인피니언(Infineon)과 OSRAM과 같은 여러 유명 첨단 기술 기업들이 레겐스부르크에 위치하여 도시의 현재 부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1997년 레겐스부르크는 유럽 통합에 기여한 공로로 유럽상(Europe Prize)을 수상했다.[15]

세계유산위원회는 2006년 7월 레겐스부르크 구시가지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3. 지리

슈타트암호프 수문의 라인-마인-도나우 운하, 레겐스부르크


바이에른주 동부, 오베르팔츠의 중심 도시이며, 도나우 강과 레겐 강의 합류 지점 근처에 위치하여 수상 운송의 요충지 역할을 한다. 역사적인 경관과 온화한 기후로 여름 휴양지로도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인근 도시로는 남서쪽 약 55km 지점에 잉골슈타트가 있다.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습윤 대륙성 기후(Dfb)와 해양성 기후(Cfb) 지역에 걸쳐 있다.

3. 1. 위치와 지형

레겐스부르크는 도나우 강 최북단에 위치하며, 지질학적으로 네 가지의 독특한 지형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 북쪽과 북동쪽에는 바이에른 숲이 있으며, 화강암편마암 산맥, 광활한 숲, 그리고 국립공원이 있다.
  • 동쪽과 남동쪽에는 비옥한 다뉴브 평원(Gäuboden)이 있으며, 이곳은 경작이 잘 된 뢰스 평원이다.
  • 남쪽은 제3기 구릉 지대가 지배적이며, 알프스 전방지의 연장선상에 있다.
  • 서쪽에는 프랑켄 쥐라가 있다.


바이에른주 동부, 오베르팔츠의 중심 도시이며, 도나우 강과 레겐 강의 합류 지점 근처에 위치한다. 따라서 수상 운송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적인 경관과 온화한 기후로 여름 휴양지로서도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인근 도시로는 남서쪽 약 55km 지점에 잉골슈타트가 있다.

3. 2. 기후

레겐스부르크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습윤 대륙성 기후(Dfb)와 해양성 기후(Cfb) 지역에 걸쳐 있다. 1971년부터 2000년까지의 평균 기온 8.5°C는 독일 평균(7.8°C)보다 약간 높지만, 인구 10만 명 이상의 독일 도시 80개 중 5개 도시만이 레겐스부르크보다 기온이 더 낮다. 연평균 강수량은 636mm로 독일 평균(약 700mm)보다 약간 낮다. 1981년부터 2010년까지의 최근 기간 동안 평균 기온과 강수량은 각각 8.9°C와 658mm로 증가했다. 이러한 평균 기온 상승은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지만, 레겐스부르크는 여전히 앞서 언급한 순위에서 잉골슈타트와 키엘과 공동 5위를 차지하고 있다.[16] 연간 일조 시간은 총 1670시간으로 독일 평균보다 약 120시간 많다.[17]

일반적으로 가장 따뜻한 달은 7월이고, 가장 시원한 달은 1월이다.

레겐스부르크 기후 (1971–2000년 평균)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평균 최고 기온 (℃)2.6°C4.1°C10.5°C17.3°C20.6°C24.2°C26.3°C24.5°C20.6°C14.4°C7.2°C2.9°C14.6°C
평균 최저 기온 (℃)-2.6°C-2.8°C0.1°C4.4°C8.1°C11.8°C13.6°C12.5°C9.3°C5.1°C1.8°C-1.7°C5°C
평균 강수량 (mm)51mm34mm37mm41mm76mm77mm81mm79mm43mm38mm45mm56mm658mm
평균 일조 시간447314019421122624019415810545371667
평균 상대 습도 (%)88847872717170747984888979

[79] [80]

레겐스부르크 기후 (1991–2020년 평균)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평균 최고 기온 (℃)2.3°C4.7°C10.3°C16.5°C20.7°C24.2°C26.1°C25.8°C20.3°C13.9°C6.9°C2.9°C14.6°C
평균 기온 (℃)-0.4°C0.7°C4.9°C9.7°C14.2°C17.6°C19.3°C18.9°C14.1°C9°C4°C0.6°C9.4°C
평균 최저 기온 (℃)-2.9°C-2.5°C0.5°C3.8°C8.1°C11.7°C13.4°C13.2°C9.2°C5.3°C1.5°C-1.6°C5°C
평균 강수량 (mm)48.3mm37.1mm43.6mm35.9mm60.2mm80mm76.9mm73.3mm49.9mm49mm48.1mm54.3mm660.1mm
평균 강수일수 (≥ 1mm)16.614.414.511.614.414.515.313.412.814.414.717.7174.8
평균 일조 시간47.680.1131.2186.5215.7225.6234.4221.2158.697.545.037.81681.2
평균 상대 습도 (%)87.382.875.968.870.370.770.572.379.485.989.890.1
평균 적설일수 (≥ 1cm)14.813.23.80.10000002.28.8

[18]

4. 문화

레겐스부르크 극장 내부


비스마르크 광장에 있는 레겐스부르크 극장은 1804년에 설립된 도시의 대표적인 극장이다.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 발레 공연이 열리고, 여름에는 야외 공연도 진행된다. 레겐스부르크 극장은 비스마르크 광장의 극장 외에도 레겐스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가 열리는 노이하우스잘, 뮤지컬과 연극을 공연하는 벨로드롬 극장, 문학적이고 현대적인 연극을 주로 공연하는 하이트플라츠 극장, 카바레, 뮤지컬, 어린이 연극, 현대극을 공연하는 골리앗플라츠의 투름극장 등 4개의 보완적인 무대를 가지고 있다.[22]

레겐스부르크 대성당 소년합창단(Regensburger Domspatzen)은 성가에 특화되어 국제적인 순회공연을 하는 유명한 합창단이다. 2003년부터 매년 7월 튀른 운트 탁시스 가문의 후원으로 생트 에메람 수도원 안뜰에서 레겐스부르크 성 축제(Regensburger Schlossfestspiele)가 열려 엘튼 존, 데이비드 가렛, 톰 존스, 플라시도 도밍고 등의 음악가들이 참여했다. 매년 여름 바이에른 재즈 주말에는 재즈를 포함한 현대 음악 스타일 공연이 열리고, 100개가 넘는 밴드, 콤보, 독주자들이 구시가지에서 공연한다. 2015년에는 음악의 집이 개관하여 음악가들의 교육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독일어가 공식 언어이지만, 레겐스부르크는 바이에른 방언(''bairischer Sprachraumde'') 지역에 속하며, 중부 바이에른 방언(''Mittelbairischde'')을 사용한다.[23][24] 2019년 기준 바이에른 주 주민의 약 절반이 바이에른 방언의 변형을 사용한다.[25] 최초의 독일 방언 사전은 요한 루드비히 프라슈의 ''Glossarium Bavaricumde''(1689)이며, 레겐스부르크에서 사용되는 바이에른 방언 단어 500개가 수록되어 있다.[26][27][28] 레겐스부르크의 바우어어테아터(농민극)는 90년 이상 바이에른 방언으로 공연하고 있다.[29] 요제프 베를링거의 희곡 "마이 페어 레이디"(2011)는 바이에른 방언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이야기로, 투름테아터에서 300회 이상 공연되었다.[30]

하이트 광장의 "황금 십자가 여관"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등 왕족과 귀족들이 투숙했다. 카를 5세는 레겐스부르크 시민 바르바라 블롬베르크와의 사이에서 서자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를 얻었다.[74] 1630년에는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사망했고, "마그데부르크 반구" 진공 실험이 실시되었다.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대본을 쓴 에마누엘 시카네더, 작곡가 요한 부르크뮐러, 노르베르트 부르크뮐러 형제,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 도시 출신이다. 2006년 구시가지와 슈타트암호프는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레겐스부르크에는 20개의 박물관이 있다. 레겐스부르크 역사 박물관은 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레겐스부르크와 바이에른 동부의 역사, 문화, 예술을 다룬다.[20] 제국 의회 박물관, 케플러 기념관, 시립 미술관, "문서" 야외 박물관(로마, 유대인, 바이에른 역사 주제) 등이 있다. 교구 박물관, 성 에메람 수도원의 바이에른 국립 박물관 분관(투른 택시스 가문 보물 창고), 돔샤츠 박물관(레겐스부르크 대성당 소재), 쿠스트포룸 오스트도이체 갈레리, 나투르쿤데무제움 오스트바이에른, 파충류 동물원, 레겐스부르크 도나우 항해 박물관, 레겐스부르크 공공 천문대, 시계 박물관, 골프 박물관, 우체국 박물관, 디노라에움 등이 있다. 2018년 바이에른 역사 박물관이 개관했고,[21] 2023년에는 다켈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매년 국제 단편영화제가 3월에 열리고, CinemaxX 등 여러 영화관과 야외 영화관이 있다. 바이에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 축제인 레겐스부르크 둘트가 일 년에 두 번 열리고, 2년마다 시민 축제가 열린다. 7월에는 석교 근처에서 중세 시장인 레겐스부르크 스펙타쿨룸이, 12월에는 도시 전역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4. 1. 건축물


  • 레겐스부르크 대성당(Dom, Regensburg Cathedral)은 독일 고딕 양식의 대표적인 예시로, 바이에른에서 고딕 건축의 주요 작품으로 손꼽힌다. 1275년에 기초가 놓였고, 탑을 제외한 부분은 1634년에 완공되었으며, 탑은 1869년에 완성되었다. 내부에는 페터 피셔의 걸작을 포함한 여러 흥미로운 기념물이 있다. 수도원 옆에는 대성당보다 먼저 지어진 두 개의 예배당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옛 대성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0]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전례 음악을 담당하는 공식 합창단은 유명한 레겐스부르크 돔슈파첸(Regensburger Domspatzen, "대성당 참새")이다.
  • 석교(Stone Bridge)는 1135년에서 1146년 사이에 건설된 중세 다리 건축의 걸작이다.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 기사들은 성지로 가는 길에 다뉴브 강을 건너기 위해 이 다리를 이용했다.
  • 레겐스부르크 소시지 주방(Regensburg Sausage Kitchen)은 주요 관광 명소이자 현지인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원래는 석교 건설 본부로 지어졌으며, 현재는 석교 옆에 위치한다.
  • 로마 요새 벽의 잔해와 프라토리아 문(Porta Praetoria)이 남아있다.

  • 스코트 수도원(Scots Monastery, Regensburg)은 성 제임스 교회(Church of St. James), 쇼텐키르헤(Schottenkirche)라고도 불리는 12세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카이다. 아일랜드 베네딕토 수도회인 스코티(Scoti) 수도원에 딸린 교회라는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주 출입구는 매우 특이한 그로테스크 조각으로 덮여 있다.[20] 이 교회는 그 이름을 딴 중세 도시 성문인 야코브슈토어(Jakobstor) 옆에 있다.
  • 첼의 율리히 성당(St. Ulrich)은 13세기 전환기 양식의 훌륭한 예시이며, 귀중한 골동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20] 이곳에는 종교 미술 교구 박물관이 있다.
  •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로는 1010년에 지어진 오버뮌스터 교회와 13세기에 지어진 성 에메람 수도원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독립된 종탑을 가진 몇 안 되는 독일 교회 중 하나로 주목할 만하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 중 하나인 고대 수도원의 수도원 건물은 여전히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1809년, 수도원 건물은 신성 로마 제국의 세습 우편 총국장인 투른 운트 탁시스 왕자를 위한 궁전으로 개조되었다.[20]

성 에메람 수도원(St. Emmeram's Abbey), 현재는 투른 운트 탁시스 궁전(Schloss Thurn und Taxis), 거대한 궁전

  • 레겐스부르크 대성당 근처에 위치한 아들러 약국(Adler-Apotheke)은 1610년에 설립된 레겐스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 중 하나이다. 고풍스러운 내부와 역사적인 용기들을 볼 수 있다.
  • 부유한 귀족 가문들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탑을 짓는 경쟁을 벌였다. 1260년, 바렌슈트라세에 골데너 투름(Goldener Turm, 황금 탑)이 세워졌다.
  • 일부가 14세기에 지어진 구 시청(Old Town Hall)에는 1663년부터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국회가 사용했던 방이 있다.[20]

시청이 있는 코흘렌마르크 광장, 1663년부터 1806년까지 영구 의회(Perpetual Diet)가 열렸던 곳

  • 골데네 크로이츠 여관(Gasthof zum Goldenen Kreuz, Golden Cross Inn)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의 어머니인 바바라 블롬베르크를 만났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장소이다.[20]
  • 1547년 레겐스부르크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 동상은 그가 죽은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인 1978년에 세워졌으며, 이탈리아 메시나에 있는 기념비의 복제품이다.
  • 도시에서 가장 쾌적한 현대 건물은 다뉴브 강둑에 있는 바이에른 왕의 고딕 양식 빌라이다.[20] 이 부지는 현재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빌라파크(VillaPark)로 알려져 있다.
  • 도시의 공공 기관으로는 공공 도서관, 미술관, 식물원,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소가 있다.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외에도 주교 사제 신학교와 교회 음악 학교가 있다.[20]
  • 성 에메람 수도원(St. Emmeram's Abbey)은 현재 투른 운트 탁시스 궁전(Schloss Thurn und Taxis)으로 알려져 있으며,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이 소유한 거대한 성이다.
  • 호플링 성(Schloss Höfling)은 투른 운트 탁시스 가문이 소유한 성이다.
  • 레겐스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공원은 많은 예술 작품이 있는 시립 공원(City Park)이다.
  •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캠퍼스에 위치한 현대적인 식물원인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식물원(Botanischer Garten der Universität Regensburg)이 있다.
  • 헤르초크파크(Herzogspark)에도 몇몇 작은 식물원이 있다.
  • 도나우스타우프에 있는 발할라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값비싼 건물이다. 테우토니아인 명예의 신전으로 세워졌으며, 다채로운 대리석, 금박 및 조각으로 풍부하게 장식된 내부에는 100명이 넘는 저명한 독일인들의 흉상이 있다.[20]
  • 켈하임에 있는 베프라이웅스할레는 1813년 해방 전쟁의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큰 원형 기념물이다.[20]
  • 벨텐부르크 수도원(Kloster Weltenburg)은 베네딕토 수도원으로, 켈하임 근처 벨텐부르크에 위치해 있다. 이 수도원은 "도나우 협곡"으로 알려진 곳에 있는 도나우 강의 반도에 자리 잡고 있다. 약 620년에 아일랜드 또는 스코틀랜드 수도사들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바이에른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라고 한다.
  • 레겐스부르크 동쪽에는 독일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보호지역 중 하나인 바이에른 숲과 그 국립공원이 있다.

바이에른 숲 국립공원 우표

4. 2. 박물관 및 예술

레겐스부르크에는 20개의 박물관이 있다. 레겐스부르크 역사 박물관은 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레겐스부르크와 바이에른 동부의 역사, 문화, 예술을 다룬다.[20] 구청사에 있는 제국 의회 박물관(Reichstagsmuseum)은 신성 로마 제국 시대의 삶을 보여준다. 주요 명소로는 고문실과 1663년부터 1806년까지 제국 의회가 사용했던 홀인 라이트잘(Reichssaal)이 있다. 케플러 기념관(Keplergedächtnishaus)은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의 삶을 보여준다. 시립 미술관(Leerer Beutel)은 미술 작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으며 영화 행사와 문화 축제도 개최한다. 또한 도시는 "문서" 사이트로 알려진 여러 야외 박물관을 추가했는데, 로마, 유대인, 바이에른 역사와 같은 특정 주제에 대한 개요를 제공한다.

레겐스부르크의 교구 박물관(Bistumsmuseen)과 생트 에메람 수도원에 위치한 바이에른 국립 박물관 분관이 있는데, 이곳에는 투른 택시스 가문의 공작 보물 창고가 있다. 교회 보물, 감실과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는 돔샤츠 박물관(Domschatzmuseum)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다. 다른 박물관으로는 쿠스트포룸 오스트도이체 갈레리(Kunstforum Ostdeutsche Galerie), 나투르쿤데무제움 오스트바이에른(Naturkundemuseum Ostbayern), 파충류 동물원, 레겐스부르크 도나우 항해 박물관(Donau-Schiffahrts-Museum), 레겐스부르크 공공 천문대 뿐만 아니라 시계 박물관(Uhrenmuseum), 골프 박물관, 우체국 박물관, 디노라에움(Dinoraeum)이 있다. 바이에른 주는 2018년 100주년을 기념하여 레겐스부르크에 바이에른 역사 박물관을 개관했다.[21] 2023년에는 다켈 박물관(닥스훈트 박물관, Dackelmuseum)이 문을 열었다. 레겐스부르크의 대부분의 역사적 기념물에 대한 가이드 투어와 여러 언어로 제공되는 도시 관광 투어도 있다.

레겐스부르크에서는 매년 국제 단편영화제가 개최된다. 비영리 행사이며 3월에 열리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 중 하나이다. 그 외에도 여러 영화관이 있는데, 대형 영화관인 CinemaxX는 블록버스터 영화와 예술 영화를 상영하며, Garbo, Ostentor Kino, Regina Filmtheater와 같은 소규모 독립 영화관도 있다. 레겐스부르크에는 야외 영화관 두 곳도 있다.

4. 3. 축제

일 년에 두 번 레겐스부르크 둘트(Regensburg Dult)가 열리는데, 이는 바이에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 축제(Volksfest)이다. 구시가지에서는 2년마다 시민 축제(Bürgerfest)가 열리며 1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을 유치한다. 7월 두 번째 주말에는 기사와 중세 시대 인물로 분장한 사람들이 석교 근처에서 열리는 중세 시장인 레겐스부르크 스펙타쿨룸(Regensburg Spectaculum)에 모인다. 매년 12월에는 도시 전역에서 여러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5. 경제

레겐스부르크의 경제는 독일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중 하나로 손꼽힌다.[36] 자동차, 산업 및 전기 공학과 같은 제조업이 중심이다.

레겐스부르크에는 BMW, 콘티넨탈, E.ON, 제너럴 일렉트릭, 인피니온, 오스람, 슈나이더 일렉트릭, 지멘스, 텔레콤, 비테스코 테크놀로지스, 도시바와 같은 여러 다국적 기업들이 있으며, 숨겨진 강자(히든 챔피언)인 크로네스, MR도 있다.

BMW는 레겐스부르크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BMW 3시리즈, BMW 1시리즈와 (이전에는) Z4 차량을 생산한다. 콘티넨탈, 오스람 옵토-세미컨덕터, SGB-SMIT 그룹 변압기, 지멘스 그리고 지멘스 반도체 부문에서 분사한 인피니온은 레겐스부르크에서 높은 수준의 혁신과 기술 개발을 제공한다. 아레바, 슈나이더 일렉트릭, 도시바와 같은 다른 유명한 국제 기업들도 레겐스부르크 또는 그 근처에 공장을 설립했다. GE항공은 새로운 제조 주조 기술을 사용하여 터빈 기계 부품을 혁신, 개발 및 생산하기 위한 그린필드 부지를 설립했다. 아마존은 레겐스부르크에 첫 번째 독일 고객 서비스 센터를 설립했다. 숨겨진 강자(히든 챔피언)인 MR과 크로네스는 모두 레겐스부르크 또는 그 근처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주요 고용주에 속한다.

산업 부문 외에도, 특히 2006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후로 관광이 레겐스부르크의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레겐스부르크 응용과학대학교와 상업 무역도 레겐스부르크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난 20년 동안 레겐스부르크에서는 바이오테크 기업들이 점점 더 설립되어 도시의 "바이오파크(BioPark)"에 본사와 연구소를 두고 있다. 또 다른 중점 분야는 정보 기술이며, 도시는 IT 기업을 위한 스타트업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전 스타트업 중 하나인 칩소프트(CipSoft)는 현재 레겐스부르크에 기반을 둔 유명한 비디오 게임 회사이다.

동부 바이에른 기술 이전 연구소(OTTI)는 레겐스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다.[37]

2012년 레겐스부르크에서는 호텔 숙박이 912,238건, 투숙객은 531,943명에 달했다.[38] 지난 15년 동안 관광객 수가 거의 두 배로 증가하면서 레겐스부르크는 인구 10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의 도시 중 가장 많이 방문하는 독일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2014년 레겐스부르크는 국제 관광객이 선정한 독일의 인기 여행지 톱 30에 선정되었다.[5]

오베르팔츠의 중심 도시이며, 도나우 강과 레겐 강의 합류 지점 근처에 위치하여 수상 운송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역사적인 경관과 온화한 기후로 여름 휴양지로서도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인근 도시로는 남서쪽 약 55km 지점에 잉골슈타트가 있다.

; 산업

: BMW, 제너럴 일렉트릭, 유럽 최대 규모의 에너지 회사 중 하나인 E.ON 등 많은 공장이 위치하여 높은 고용률을 보이고 있다.

6. 교육

레겐스부르크 대학교는 1962년에 설립된 독일에서 가장 최근에 설립된 대학교 중 하나이며, 세계 400위권 대학으로 평가받는다. 베네딕토 16세, 우도 슈타이너, 볼프강 비가르트 등이 이 대학교와 관련된 저명한 지식인이다. 레겐스부르크 응용과학대학교와 함께 단일 캠퍼스에 위치하고 있다.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비엘베르트 건물, 경영학부


레겐스부르크 응용과학대학교, 캠퍼스


1874년부터 레겐스부르크 가톨릭 교회 음악 및 음악 교육 대학교가 있다.

대학의 연구센터 및 연구소 외에도 라이프니츠 동유럽 및 동남유럽 연구소(IOS), 레겐스부르크 중재 면역학 센터(RCI), 프라운호퍼 독성학 및 실험 의학 연구소(ITEM), 바이에른 바이오테크 클러스터인 바이오파크(BioPark) 등 여러 연구기관이 있다.

레겐스부르크에는 18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또한 공립 및 사립을 포함하여 독일 학교 시스템의 모든 수준을 대표하는 여러 중등 교육 기관이 있다. 8개의 김나지움(Gymnasien), 5개의 레알슐레(Realschulen), 6개의 하웁트슐레(Hauptschulen) 그리고 4개의 직업학교(Berufsschulen)가 있다. 게다가, 여러 가지 특성화된 여러 민속 고등학교도 있다.

SIS 스위스 국제학교는 국제 교육을 제공한다.[43] 2002년에 설립된 스포츠 기숙학교 레겐스부르크는 유럽 최초의 야구 기숙학교였다.[44]

7. 스포츠

SSV 얀 레겐스부르크는 지역 축구 클럽으로, 1889년에 ''투르너분트 얀 레겐스부르크''라는 스포츠 클럽의 일부로 설립되었다. 클럽명은 체조 사상으로 19세기 독일 스포츠에 큰 영향을 미친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에서 따왔다. 1907년에 축구 부서가 만들어졌고, 1924년 축구 선수들과 수영 선수들이 모클럽을 떠나 ''슈포르트분트 얀 레겐스부르크''를 결성했다.[1]

레겐스부르크 아레나


EV 레겐스부르크de는 레겐스부르크의 지역 아이스하키 클럽으로, 현재 독일 2부 리그인 DEL2에서 활동하고 있다.[1]

레겐스부르크 레기오네어레는 레겐스부르크를 연고로 하는 야구소프트볼 클럽으로, 부흐바인더 회사의 후원을 받아 부흐바인더 레기오네어레로도 알려져 있다. 독일 부텐스리가에서 활동하며, 독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야구 클럽 중 하나이다. 현재 MLB에서 활동하는 여러 선수들이 과거 이 클럽에서 활동했다. 1996년에 건설된 이 클럽의 경기장인 아르민-볼프-아레나는 1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며, 독일에서 가장 큰 야구장이다.[1]

지역 육상 클럽인 LG 텔리스 피난츠 레겐스부르크(LG TELIS FINANZ Regensburg)는 다양한 종목의 경기를 제공하며 독일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 중 하나로 여겨진다.[1]

SSV 얀 레겐스부르크는 2. 분데스리가 소속 축구팀이다.[1]

8. 자매 도시

레겐스부르크의 자매 도시는 다음과 같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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