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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3세 소비에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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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얀 3세 소비에스키는 1674년부터 1696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통치한 국왕이다. 그는 1629년 우크라이나 올레스코에서 태어나 서유럽 여행을 통해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습득했다. 흐멜니츠키 봉기 진압에 참여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고, 1673년 호틴 전투에서 승리하여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여 1683년 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유럽 기독교 세계를 수호하는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갈등, 세임의 무력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아들에게 왕위를 세습하는 데 실패했다. 169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은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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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3세 소비에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니엘 슐츠가 그린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초상화
초상화, 다니엘 슐츠, 1680년경
칭호신앙의 수호자
재위1674년 5월 19일 – 1696년 6월 17일
대관식1676년 2월 2일
선임자미하우 1세
후임자아우구스트 2세
배우자마리 카지미르 (1665년 결혼)
자녀야쿠프, 오와바 공작
테레사, 바이에른 선제후비
알렉산데르 왕자
콘스탄티 왕자
가문소비에스키 가문
아버지야쿠프 소비에스키
어머니조피아 테오필리아 다니워비치
출생일1629년 8월 17일
출생지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올레스코 올레스코 성
사망일1696년 6월 17일
사망지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바르샤바 빌라누프 궁전
매장지크라쿠프 바벨 대성당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
통치
직위폴란드 왕, 리투아니아 대공
즉위1674년 5월 21일
대관1676년 2월 2일, 폴란드 대관
언어별 이름
폴란드어Jan III Sobieski, pl
리투아니아어Jonas III Sobieskis, lt
라틴어Ioannes III Sobiscius, la

2. 국왕 칭호


  • 공식 칭호 (라틴어): ''Joannes III, Dei Gratia rex Poloniae, magnus dux Lithuaniae, Russiae, Prussiae, Masoviae, Samogitiae, Livoniae, Smolenscie, Kijoviae, Volhyniae, Podlachiae, Severiae, Czernichoviaeque, etc.''[46]
  • 공식 칭호 (폴란드어): ''Jan III, z łaski bożej, król Polski, wielki książę litewski, ruski, pruski, mazowiecki, litewski, kijowski, wołochyński, podlaski i czernichowski, etc.''
  • 공식 칭호 (영어): ''John III, by the grace of God King of Poland, Grand Duke of Lithuania, Ruthenia, Prussia, Masovia, Samogitia, Livonia, Smolensk, Kiev, Volhynia, Podlasie, Severia and Chernihiv, etc.''
  • 한국어 번역: 얀 3세, 의 은총으로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루테니아, 프로이센, 마조비아, 사모기티아, 리보니아, 스몰렌스크, 키예프, 볼히니아, 포들라시에, 세베리아, 체르니히우 등의 대공

3. 생애

얀 3세 소비에스키가 태어난 올레스코 성


얀 소비에스키는 162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루테니아 보이보드십에 속했던 올레스코(현 우크라이나 리비우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야니나 문장을 사용하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소비에스키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루테니아의 궁내관이자 크라쿠프 성주였던 야쿠프 소비에스키였고, 어머니 소피아 테오필리아 다니워비츠는 폴란드 대헤트만이었던 스타니스와프 주키에프스키의 손녀였다.

소비에스키는 크라쿠프의 노보드보르스키 학교를 졸업하고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형 마렉 소비에스키와 함께 2년 넘게 서유럽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 시기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등 다양한 언어를 익혔고, 콩테 공작 루이 2세, 훗날 영국 왕 찰스 2세, 오라녜 공 빌렘 2세 등 유럽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이후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48년 폴란드로 돌아온 소비에스키 형제는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이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 진압군에 합류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얀 소비에스키는 기병 소연대를 직접 조직하고 로타마스터로서 지휘했으며, 즈보리우 전투 등에 참전했다. 이후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얻으며 대령급인 푸우코브니크로 승진했다.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그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공식 대사로 파견했다. 이스탄불에서 소비에스키는 타타르어와 투르크인의 군사 전술 및 관습을 익히는 귀중한 경험을 쌓았다.

1655년 스웨덴의 침공으로 시작된 '대홍수' 시기 초기, 소비에스키는 포즈난 궁내백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 휘하에서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으나, 1656년 4월부터는 폴란드 국왕군에 합류하여 스웨덴에 맞서 싸웠다.

3. 1. 유년 시절과 교육

올레시코 성,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출생지


얀 3세 소비에스키는 1629년 8월 17일, 현재 우크라이나의 리비우 근처 올레스코에서 태어났다.[4][5] 당시 이곳은 폴란드 왕국의 루테니아 보이보드십에 속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다. 그는 야니나 문장을 사용하는 명문 귀족 가문인 소비에스키 가문 출신이었다.[4][5] 그의 아버지 야쿠프 소비에스키는 루테니아의 보이보드이자 크라쿠프의 카슈텔란이었고, 어머니 조피아 테오필리아 다닐로비치는 대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주우키에프스키의 손녀였다.[5] 소비에스키는 주우키에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5]

1643년 크라쿠프의 바르트워미에이 노보드보르스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646년에는 야기엘론스키 대학교 철학부를 졸업했다.[5][6] 대학 졸업 후, 얀과 그의 형 마렉 소비에스키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2년 이상 서유럽을 여행했다.[5][7] 그들은 라이프치히, 앤트워프, 파리, 런던, 라이덴, 헤이그 등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5] 이 여행 기간 동안 그는 루이 2세 드 부르봉, 훗날 잉글랜드의 찰스 2세가 되는 찰스 왕자, 오라녜 공 빌헬름 2세와 같은 당대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했으며, 라틴어 외에도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를 익혔다.[8]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군사적 활약에 영향을 주었다.

3. 2. 군 경력

1648년 연방으로 귀국한 얀 소비에스키는 형 마렉 소비에스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코사크가 일으킨 흐멜니츠키 봉기 진압군에 참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직접 기병 소연대를 조직하여 로타마스터로서 지휘했으며, 즈보리우 전투와 베레스테치코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대령급인 푸우코브니크로 승진하고 명성을 얻었다.[14] 그의 활약으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주목을 받은 소비에스키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공식 대사로 파견되어 타타르어투르크어를 배우고 오스만 제국의 군사 전술을 익히는 기회를 가졌다.

1655년 스웨덴의 침공으로 시작된 '대홍수' 시기 초기, 소비에스키는 포즈난의 궁내백 크시슈토프 오팔린스키 휘하에서 스웨덴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으나, 1656년 4월부터는 폴란드 국왕군에 합류하여 싸웠다.[14] 같은 해 7월 바르샤바 전투에서는 2,000명의 크림 타타르 정예 기병대를 이끌고 눈부신 활약을 펼쳐 왕국대기수(호론츠) 직책을 받았다.[14][15] 이후 토룬 공성전(1658년) 등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14] 1660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에 참전하여 슬로보디슈체 전투와 리우바르 전투 등에서 싸웠다.[14]

소비에스키는 루보미르스키의 반란(1665-1666년) 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에게 충성을 지켰다.[14][16] 이러한 충성심과 군사적 능력은 그의 승진에 큰 도움이 되었다. 1665년 그는 왕관령 궁내장관으로 임명되었고,[4][16] 1666년에는 폴란드군 서열 2위인 왕관령 야전 헤트만의 지위에 올랐다.[16] 1667년 10월, 폴란드-코사크-타타르 전쟁 중 포드하이체 전투에서 페트로 도로셴코가 이끄는 코사크와 크림 타타르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명성을 다시 한번 확립했다.[13][16]

호틴 전투(Battle of Khotyn)에서 승리한 얀 3세 소비에스키


마침내 1668년 2월 5일, 소비에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최고 군사령관 직책인 왕관령 대헤트만에 임명되었다.[13] 대헤트만으로서 그는 1672년 발발한 폴란드-오스만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부차치 조약을 통해 포돌레 지역을 오스만 제국에 할양하려 하자, 소비에스키는 세임의 지지를 받아 전쟁을 지속했다. 같은 해 리프카 반란이 일어나자, 타타르 병사들에게 존경받던 소비에스키는 많은 이들이 다시 연방군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데 기여했다.

1673년 11월 11일, 소비에스키는 호틴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고 전략적 요충지인 호틴 요새를 점령하는 대승을 거두었다.[13] 이 승전보는 공교롭게도 전투 전날 사망한 미하우 국왕의 부고와 함께 연방 전역에 퍼져나갔고, 소비에스키를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다.[13][17] 이 군사적 성공은 그가 다음 해인 1674년 5월 19일 자유 선거를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는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4][17]

3. 3. 폴란드 국왕 즉위

1673년 호틴 전투 승리 직후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 국왕이 사망하자, 얀 소비에스키는 1674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676년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얀 3세로 즉위했다.[20]

빌라누프 궁전에 새겨진 얀 3세 소비에스키의 대관식(1676년)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명목상 유럽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국가 중 하나였으나, 소비에스키가 왕위에 오를 때는 거의 반세기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20] 국고는 거의 비어 있었고, 강력한 마그나트(대귀족)들은 종종 폴란드 중앙 정부보다 외국 궁정과 동맹을 맺어 국왕의 권력 기반은 취약했다.[21][22]

소비에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자신의 왕조를 세우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며, 다양한 개혁을 통해 국가를 강화하려는 장기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22][23] 특히 남부 국경에서 계속되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정착시켜 국가 재정을 재건하고자 했다.[18][22][25] 1674년 가을,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브라츠와프, 모길료프, 바르 등 여러 도시와 요새를 탈환하며 우크라이나 남부 국경의 방어선을 다시 구축했다.[17] 1675년에는 리비우를 향한 오스만과 타타르 연합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17][26]

동시에 소비에스키는 프랑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스웨덴의 공격에 직면한 프로이센 공국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25] 프로이센은 과거 폴란드의 봉토였으나 대홍수 시기에 사실상 독립한 상태였다. 소비에스키는 프로이센을 정복하여 가문의 세습 영지로 삼으려는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22] 이를 위해 1675년 프랑스와 비밀리에 야보루프 조약을 맺었으나, 계획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오스만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프로이센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대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고 스웨덴군을 격퇴했다. 게다가 폴란드 내부의 많은 마그나트들이 국왕의 계획에 반대하며 프로이센 측을 지지했다.[17][22][26][27][28] 특히 리투아니아 대헤트만이었던 미하우 카지미에슈 파츠는 브란덴부르크와 결탁하여 군대를 해산시켜 버렸고, 결국 프로이센 정복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17] 심지어 오스트리아와 브란덴부르크의 지원을 받은 반대파들은 소비에스키를 폐위시키고 샤를 드 로렌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27]

성령훈장을 받은 소비에스키, 1676년경


1676년, 타타르 군대가 드네프르강을 건너 반격해왔지만, 전략적 요충지인 주라브노를 점령하는 데 실패하자 주라브노 조약이 체결되었다.[17] 이 조약으로 카미야네츠포딜스키와 포돌리아의 상당 부분이 오스만 제국 영토로 남게 되었지만, 폴란드는 빌라 체르크바와 파볼로치를 되찾았고, 무엇보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왕권을 강화할 수 있는 평화의 시기를 확보했다.[17] 이 평화 기간 동안 소비에스키는 폴란드 군대의 개혁에 성공했다.[25] 군대를 연대 단위로 재편성하고, 보병의 주 무기를 창에서 도끼로 바꾸었으며, 폴란드 기병은 후사르용기병 체제를 채택했다.[24] 또한 포병 전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포술을 도입했다.[24]

프로이센 정복 계획의 실패와 1679년 프랑스-프로이센 조약 체결은 소비에스키가 친프랑스 정책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27] 1683년에는 폴란드-프랑스 동맹이 공식적으로 종결되었고, 소비에스키는 국내외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개선 및 동맹을 모색하기 시작했다.[27][28]

4. 폴란드 국왕으로서의 통치

얀 3세 소비에스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국가는 반세기에 걸친 전쟁으로 황폐해져 있었고 국고는 바닥난 상태였다. 강력한 마그나트(대귀족)들은 중앙 정부의 권위를 약화시키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21][22] 소비에스키는 즉위 초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남부 국경을 안정시키려 했으며,[17] 한편으로는 프로이센 공국 정복을 시도했으나 국내외적인 반대로 실패했다.[17][22][55]

이후 그는 군사 개혁을 통해 군대의 편제와 무장을 개선하는 데 힘썼다.[24] 외교적으로는 초기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벗어나 1683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는 중요한 전환을 이루었다.[22][27][30] 이 동맹은 같은 해 오스만 제국 포위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소비에스키는 직접 연합군을 이끌고 빈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여 유럽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라는 명성을 얻었다.[35][57]

그러나 빈에서의 승리 이후 참여한 신성 동맹 전쟁은 국가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고,[37] 1686년 러시아 차르국과 맺은 영구 평화 조약은 키예프와 좌안 우크라이나를 영구히 상실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팽창을 돕는 실책이 되었다.[59] 국내적으로는 마그나트들의 세력 강화와 세임(의회)의 기능 마비로 인해 중앙 권력은 계속 약화되었으며,[55]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계획마저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소비에스키는 말년에 건강 악화로 빌라누프 궁전에서 지내다 1696년 사망했다.

4. 1. 내정

빌라누프 궁전을 나서는 얀 3세 소비에스키, 유제프 브란트의 그림.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왕위에 올랐을 때,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반세기에 걸친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20] 국고는 거의 비어 있었고, 강력한 마그나트(대귀족)들은 국가의 이익보다는 외국의 궁정과 손을 잡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우는 데 더 관심이 많아 중앙 정부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21][22]

소비에스키는 국가 재건과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 경제적 부담을 덜고 국고를 재건하려 했으나, 1674년 가을 전쟁을 재개하여 우크라이나 남부 국경의 방어선을 재구축했다.[17] 또한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프로이센 공국을 정복하여 소비에스키 가문의 세습 영지로 삼으려는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22][25] 그러나 프랑스와의 비밀 조약이 드러나고, 오스만과의 전쟁에 몰두하는 사이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주도 하에 스웨덴군을 격퇴하고 프랑스와 조약을 맺었다. 게다가 많은 마그나트들이 정복 계획에 반대했고, 리투아니아 대헤트만인 미하우 카지미에시 파츠가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프로이센 정복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17][22][26][27][28][55]

오스만 제국과의 주라브노 조약(1676년) 이후 찾아온 평화 시기에 소비에스키는 군대 개혁에 착수했다.[25] 군대를 연대 단위로 재편성하고, 보병의 주 무기를 파이크에서 전투도끼로 바꾸었으며, 기병대는 후사르용기병 체제를 도입했다. 또한 총기 보유량을 늘리고 포병 전술을 발전시키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다.[24]

하지만 국내 정치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마그나트들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나 오스트리아와 결탁하여 소비에스키를 견제했고, 심지어 그를 폐위시키고 샤를 드 로렌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까지 꾸몄다.[27] 특히 리투아니아 대공국에서는 파츠 가문(1670년대)이나 사피에하 가문(1680년대 이후) 같은 대귀족 가문들이 사실상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55] 세임(의회)에서는 자유 거부권(Liberum veto) 행사가 반복되어 국정 운영이 마비되기 일쑤였고, 세이미크(지방 의회)는 세금 징수와 관직 임명권을 남용했으며, 헤트만들은 군대를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동원하는 등 공화국은 극심한 혼란과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국왕과 그의 가족.


이러한 상황 속에서 소비에스키는 1686년 러시아 차르국과 영원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외교적 실책을 범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는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돌려받기로 했던 키예프와 좌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 영토로 영구히 인정하게 되었고, 이는 러시아가 동유럽의 패권 국가로 부상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59] 폴란드가 얻은 것은 러시아가 신성 동맹에 참여한다는 약속뿐이었다.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한 소비에스키는 말년에 자신의 아들 야쿠프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에 집중했다. 이는 공화국의 "황금의 자유" 전통에 어긋나는 것으로, 많은 귀족들과 심지어 왕비 마리시엥카까지 반대했다. 야쿠프를 부유한 상속녀 루드비카 카롤리나 라지비우와 약혼시키려 했으나, 그녀가 168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이 계획마저 실패하고 소비에스키 가문은 큰 굴욕을 겪었다.

소비에스키는 1691년 심장 발작을 일으킨 후 건강이 악화되어 빌라누프 궁전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696년 사망하여 바벨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사후 열린 국왕 선거에서 아들 야쿠프는 패배했고, 작센 선제후인 아우구스트 2세 강건왕이 새로운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4. 2. 대외 관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많은 국가 중 하나였지만,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즉위했을 때는 거의 반세기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국가가 극도로 피폐해진 상태였다.[20] 국고는 거의 비어 있었고, 강력한 마그나트(영주)들은 종종 폴란드 궁정보다는 외국의 궁정과 동맹을 맺고 있어 중앙 정부의 재정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21][22]

소비에스키는 남부 국경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끝내고 경제적 부담을 줄여 국고를 재건하고자 했다. 1674년 가을,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 바르, 레슈쿠프 등 여러 도시와 요새를 탈환하며 우크라이나 남부 국경의 방어선을 강화했다.[17] 1675년에는 리비우를 향한 오스만과 타타르 연합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17][26]

동시에 소비에스키는 프랑스의 재정 지원을 받아, 과거 폴란드의 봉토였으나 대홍수 시대를 틈타 독립했던 프로이센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25] 그는 프로이센을 자신의 가문 영지로 만들고자 하는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22] 이를 위해 1675년 프랑스와 비밀리에 야보루프 조약을 맺었으나, 이 계획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오스만과의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프로이센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스와 나이메헌 조약을 체결하고 스웨덴의 침공을 격퇴했다. 또한 폴란드 내부의 많은 마그나트들이 정복 계획에 반대하며 프로이센을 지지했고, 특히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미하우 카지미에슈코 파츠는 군대를 이탈시켜 해산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방해했다.[17][22][26][27][28] 결국 프로이센 정복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빈 전투의 얀 3세 소비에스키''. 에지 시에미기노프스키-에레우델(Jerzy Siemiginowski-Eleuter)의 1686년 경 작품, 바르샤바 국가 미술관.


1676년, 크림 타타르가 드네프르강을 건너 반격해왔지만, 전략적 요충지 주라브노를 점령하지 못하고 결국 폴란드와 주라브노 조약을 체결했다.[17] 이 조약으로 카미에니에츠 포돌스키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 영토로 남았지만, 폴란드는 빌라 체르키에프와 파볼로치를 되찾고 새로운 요새 도시 오코피를 건설하여 방어선을 유지했다.[17]

오스만과의 조약으로 잠시 평화가 찾아오자, 소비에스키는 군대 개혁에 착수했다.[25] 군대를 연대 단위로 재편하고, 보병의 주 무기를 파이크(장창)에서 전투도끼로 바꾸었으며, 폴란드 기병은 후사르(유익 중기병)와 용기병 편제를 채택했다.[24] 또한 대포 수를 늘리고 새로운 포병 전술을 도입했다.[24]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브란덴부르크오스트리아 등 외부 세력과 결탁한 내부 반대파들은 소비에스키를 폐위시키고 로렌 공 샤를 5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까지 꾸미기도 했다.[27]

프로이센 정복 계획 실패와 프랑스와의 관계 악화 속에서 소비에스키는 외교 노선을 수정했다. 1679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조약을 맺자, 소비에스키는 친프랑스 정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683년에는 폴란드 내정에 간섭하던 프랑스 대사를 추방하며 프랑스와의 동맹 관계는 사실상 종결되었다.[27] 대신 그는 과거 적대적이었던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27][28] 내부 반대파를 견제하고 남부 국경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1683년 3월 31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 수도가 위협받을 경우 서로 돕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며, 직접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간접적으로는 프랑스를 겨냥한 것이었다.[22][27][30] 이 동맹은 이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의 지지 아래 신성 동맹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31]

빈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는 소비에스키, 마르티노 알토몬테 작


1683년 봄,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 군사 작전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소비에스키는 폴란드 도시인 리비우나 크라쿠프가 목표일 수 있다고 우려하여 방어 준비를 서둘렀다.[13] 같은 해, 오스트리아령 헝가리 북서부에서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반란군이 오스만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자, 술탄은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오스트리아 수도 으로 진격했다. 레오폴트 1세는 폴란드에 긴급 지원을 요청했고, 소비에스키는 이에 응하여 직접 폴란드군과 독일 제후 연합군을 이끌고 빈으로 향했다.[32]

1683년 9월 12일, 빈 전투가 벌어졌다.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약 7만 명의 연합군은 14만 명이 넘는 오스만 대군과 맞섰다.[33][32] 소비에스키는 오스만군의 지휘 체계가 불안정하고 사기가 낮다는 것을 간파하고, 카렌베르크 언덕에서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를 중심으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후사르의 용맹한 돌격으로 오스만 군의 전열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오스만 군은 혼란 속에서 퇴각했다.[34] 이 극적인 승리로 소비에스키는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기독교 유럽을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다.[35] 교황과 여러 유럽 군주들은 그를 "빈과 서유럽 문명의 구원자"라고 불렀다.

얀 마테이코가 1880년에 그린 '빈 전투 후 교황에게 승리 소식을 전하는 소비에스키', 바티칸 박물관 소장


빈에서의 승리 이후, 168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의 호소로 폴란드,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등이 참여하는 대(對)오스만 신성 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동맹은 빈 전투 승리로 얻은 폴란드의 외교적 우위를 다른 경쟁 국가들과 나누는 결과를 낳아, 장기적으로 폴란드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37] 폴란드는 대튀르크 전쟁의 일원으로 계속 오스만 제국과 싸웠지만, 이미 17년간의 전쟁으로 국력은 심각하게 소모된 상태였고, 전쟁 때문에 시급한 내정 개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37] 또한 발트해 지역에서 프로이센의 성장을 견제하고 폴란드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잊혀졌다.

의 전장에 선 소비에스키


더욱 심각한 실책은 동쪽의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이었다. 1686년, 러시아는 안드루소보 조약에 따라 과거 전쟁에서 점령했던 키예프와 좌안 우크라이나를 폴란드에 반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며 오히려 오스만 제국과 동맹하여 폴란드를 위협했다. 이러한 압박에 굴복한 소비에스키는 1686년 5월 6일, 러시아와 영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폴란드는 키예프와 좌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권을 영구히 인정하고, 폴란드 내 정교회 신도의 자유 보장 및 러시아의 보호권을 승인해야 했다. 대가로 얻은 것은 러시아의 신성 동맹 참여 약속뿐이었으나,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가 동유럽의 새로운 패권 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막지 못한 외교적 실패로 평가된다.[59]

대튀르크 전쟁이 끝난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에서 폴란드는 잃었던 포돌스키 지역을 되찾는 데 그쳤지만, 오스트리아는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며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프로이센 공국은 곧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하여 발트해 남부의 강자로 떠올랐다. 결국 17세기 패권 국가였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오스만 제국은 함께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이라는 새로운 중동유럽 3강 구도가 형성되었다.

4. 3. 빈 전투

1683년, 폴란드-리투아니아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와 동맹을 맺었다.[27][22] 이 동맹은 1683년 3월 31일 체결되었으며,[30] 양국 수도 중 하나가 위협받을 경우 서로 돕기로 약속했다. 이 동맹은 오스만 제국을 직접적인 공동의 적으로 삼았으며,[27] 훗날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의 지지로 신성 동맹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31]

1683년 봄, 오스만 제국이 대규모 군사 작전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소비에스키는 폴란드 도시인 리비우나 크라쿠프가 목표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13] 한편, 오스만 제국은 오스트리아 황제에 대항하는 헝가리 프로테스탄트 반란군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대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약 15만 대군을 파견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으로 진격했다. 제2차 빈 포위가 시작되자 레오폴트 1세는 동맹 조약에 따라 폴란드에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했다.[32]

소비에스키는 요청에 응하여 폴란드군을 이끌고 으로 향했다. 8월에는 샤를 5세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군(주로 바이에른작센 군대)과 합류하여 연합군을 형성했다.[30][32] 소비에스키는 이 연합군의 총지휘관을 맡았다.

1683년 9월 12일,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약 7만 명(폴란드군 약 2만 7천 명 포함)의 연합군은 교외의 카렌베르크(Kahlenberg) 언덕에 도착했다.[27][32][33] 당시 은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이끄는 약 14만 명의 오스만 제국 군대에게 포위되어 함락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32][33] 소비에스키는 오스만군의 지휘 체계가 불안정하고 방비가 허술하다는 점을 간파하고 즉시 총공격을 명령했다.[34]

오후 5시경, 소비에스키는 직접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를 포함한 연합군 기병대를 이끌고 카렌베르크 언덕에서 내리달려 오스만군 본진을 향해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 돌격 중 하나를 감행했다.[34][56] 특히 폴란드 후사르 선봉대의 용맹한 돌파는 오스만군의 중앙 전열을 순식간에 무너뜨렸고, 오스만군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 뿔뿔이 흩어져 도주했다. 약 한 시간 만에 전투는 연합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소비에스키는 오후 5시 30분경 카라 무스타파가 버리고 달아난 호화로운 천막에 들어섰다.[30][32]

빈 전투에서의 극적인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서진을 저지하고 유럽 기독교 세계를 구한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소비에스키는 이 전투를 통해 "과 서유럽 문명의 구원자"이자 기독교 세계의 영웅으로 유럽 전역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35][57]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를 비롯한 유럽의 지도자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소비에스키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당시의 벅찬 감격을 기록하기도 했다.[36] 이 승리는 이듬해인 1684년, 교황의 주도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이 참여하는 대(對)오스만 신성 동맹 결성으로 이어졌다.

빈 전투 이후에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소비에스키는 10월 7일과 9일에 벌어진 파르카니 전투(Battle of Párkány)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37]

5. 유산과 평가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왕관, 그단스크


소비에스키는 폴란드에서 비엔나 전투 승리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물리친 "영웅 왕"으로 기억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19세기 문학 작품에서 그의 이야기가 많이 다루어지면서 더욱 널리 퍼졌다.[43] 그러나 ''폴란드 인명 사전''은 그를 "동시대인들보다 뛰어난 인물이지만, 여전히 그들 중 하나"라고 평가하며, 개인적인 부와 권력에 관심을 가진 과두 정치가이자 거상이었다고 묘사한다.[43] 그의 야망 중 상당 부분은 아내 마리시엔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소비에스키는 어떤 왕위보다도 아내를 더 사랑했으며(왕위를 얻기 위해 전 왕비와 이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을 때 즉시 왕위를 거부했을 정도), 때로는 맹목적으로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고 전해진다.[44][45]

그는 어려움을 겪던 연방을 개혁하고 자신의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데는 실패했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스키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갖추었고,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문맹이 아니었다. 또한 과학과 예술의 후원자로서 천문학자 요하네스 헤벨리우스, 수학자 아담 아다만디 코찬스키, 역사가이자 시인 베스파지안 코호프스키 등을 지원했다. 그가 세운 빌라누프 궁전은 이후 2세기 동안 연방 영토 내에 지어질 수많은 궁전 건축 양식의 시초가 된 중요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43]

6. 가족 관계

1665년 7월 5일,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얀 소비에판 자모이스키의 미망인이자 프랑스 부르고뉴 네베르 출신의 귀족 마리 카지미르 드 라 그랑주 다르키엥(1641–1716)과 결혼했다. 그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왕비가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여러 자녀가 태어났으나,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소수였다.

그들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생몰년비고
야쿠프 루드비크1667년 11월 2일 – 1737년 12월 19일왕세자, 폴란드 왕위 계승 후보였으며, 노이부르크의 팔라틴 공녀 헤드비히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쌍둥이 딸1669년 5월 9일사산 또는 출생 직후 사망.
테레사 테오필라1670년 10월유아기에 사망.
아델라이다 루드비카 ("바르벨룬")1672년 10월 15일 – 1677년 2월 10일어린 나이에 사망.
마리아 테레사 ("라 마노네")1673년 10월 18일 – 1675년 12월 7일어린 나이에 사망.
1674년 10월사산 또는 출생 직후 사망.
테레사 쿠네군다1676년 3월 4일 – 1730년 3월 10일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알렉산데르 베네딕트1677년 9월 6일 – 1714년 11월 19일미혼으로 사망.
1678년 11월 13일사산 또는 출생 직후 사망.
콘스탄티 브와디스와프1680년 5월 1일 – 1726년 2월 28일마리아 요제파 베셀과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683년 6월 4일 – 1685년 1월 1일/4월 12일어린 나이에 사망.
1684년 12월 20일사산 또는 출생 직후 사망.
1691년 – 1692년유아기에 사망.
1694년유아기에 사망.



앙리 가스카르(Henri Gascar)의 ''소비에스키와 그의 가족'' 그림. 얀 3세와 마리 카지미르, 그리고 자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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