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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영화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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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만주영화협회는 1937년 만주국 정부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합작으로 설립된 국책 영화 제작사이다. 일본의 만주 지배를 정당화하고, '오족협화', '왕도낙토' 등의 통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정치, 드라마, 선전,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제작했다. 만주영화협회는 배우 야마구치 요시코(리샹란)를 발굴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해체되어 중국 공산당에 의해 동북영화공사로 전환되었다. 만주영화협회에서 제작된 영화는 친일 선전으로 간주되어 논란이 있으며, 한국 영화인들의 활동과 친일 행적 논란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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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영화협회 - [회사]에 관한 문서
개요
회사명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
영문 회사명(제공된 문서에 영문 회사명 정보가 없습니다.)
로고(제공된 문서에 로고 정보가 없습니다.)
만영 촬영소
만영 촬영소
종류주식회사 (특수회사)
시장 정보(제공된 문서에 시장 정보가 없습니다.)
약칭만영
국적만주국
우편 번호(제공된 문서에 우편 번호 정보가 없습니다.)
본사 위치신징 특별시 다이동대가 213호
본점 위치신징 특별시 홍희정 602호 (촬영소)
설립일1937년 (강덕 4년) 8월 21일
해산일1945년 (강덕 12년) 8월
업종(제공된 문서에 업종 정보가 없습니다.)
통일 금융 기관 코드(제공된 문서에 통일 금융 기관 코드 정보가 없습니다.)
SWIFT 코드(제공된 문서에 SWIFT 코드 정보가 없습니다.)
사업 내용영화 제작, 수출입 포함 영화의 배급
대표자이사장 김벽동 (1937년 - 1939년)
대표자 (계속)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 (1939년 - 1945년)
자본금500만 원
발행 주식 총수(제공된 문서에 발행 주식 총수 정보가 없습니다.)
매출액(제공된 문서에 매출액 정보가 없습니다.)
영업 이익(제공된 문서에 영업 이익 정보가 없습니다.)
경상 이익(제공된 문서에 경상 이익 정보가 없습니다.)
순이익(제공된 문서에 순이익 정보가 없습니다.)
순자산(제공된 문서에 순자산 정보가 없습니다.)
총 자산(제공된 문서에 총 자산 정보가 없습니다.)
직원 수(제공된 문서에 직원 수 정보가 없습니다.)
지점 수(제공된 문서에 지점 수 정보가 없습니다.)
결산기(제공된 문서에 결산기 정보가 없습니다.)
주요 주주만주국 정부 (50%)
주요 주주 (계속)남만주철도 주식회사 (50%)
주요 자회사(제공된 문서에 주요 자회사 정보가 없습니다.)
관련 인물(제공된 문서에 관련 인물 정보가 없습니다.)
외부 링크(제공된 문서에 외부 링크 정보가 없습니다.)
특기 사항주식회사 만주영화협회법 (강덕 4년 8월 14일 칙령 248호)에 준하여 설립, 강덕 12년 (1945년) 8월 폐쇄.

2. 설립 배경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1] 만주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오족협화", "왕도낙토" 등의 통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적극 활용했다. 관동군1937년 만주영화협회를 설립하여 만주 영화의 제작, 배급 및 국제적 유통의 전 과정을 통제했다.[1] 만주영화협회는 주로 정치 영화, 드라마, 선전 영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1939년에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새로운 스튜디오를 건설하고,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영화학교를 운영하여 수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1] 만주국을 "영화 제작의 꿈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다.

1937년 8월 14일, 만주국 정부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합작 투자로 만주영화협회(滿洲映畫協會, Man'ei)가 고쿠사쿠 가이샤/국책회사일본어로 설립되었다.[2] 초기 만주영화협회는 남만주철도 사진부를 모체로 하여 성장했으며, 만주국에 대한 산업 및 교육 영화 제작을 담당했다.[2] 스튜디오는 옛 양모 공장에, 사무실은 지린성의 옛 기린 건축 설계원(吉林省建築設計院)에 위치했다.[2]

1939년,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민정부 장관인 아마카스 마사히코를 장편 영화 제작 감독으로 임명했다.[3] 아마카스는 영화 산업 외부인이었으나,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가족을 살해한 악명으로 인해 만주영화협회를 일본 본토 영화 산업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3] 아마카스는 Universum Film AG(UFA)와 치네치타 스튜디오를 방문한 후,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 산업과 경쟁하기 위해 UFA의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했다.[4]

2. 1. 만주국 수립과 영화의 역할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만주 지역을 점령하고, 1932년 괴뢰 국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1] 만주국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고, "오족협화", "왕도낙토" 등의 통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적극 활용했다. 관동군1937년 만주영화협회를 설립하여 만주 영화의 제작, 배급 및 국제적 유통의 전 과정을 통제했다.[1] 만주영화협회는 주로 정치 영화, 드라마, 선전 영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1939년에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새로운 스튜디오를 건설하고,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영화학교를 운영하여 수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1] 만주국을 "영화 제작의 꿈의 땅"으로 만들고자 했다.

2. 2. 만주영화협회 설립 과정

1937년 8월 14일, 만주국 정부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합작 투자로 만주영화협회(滿洲映畫協會, Man'ei)가 고쿠사쿠 가이샤/국책회사일본어로 설립되었다.[2] 초기 만주영화협회는 남만주철도 사진부를 모체로 하여 성장했으며, 만주국에 대한 산업 및 교육 영화 제작을 담당했다.[2] 스튜디오는 옛 양모 공장에, 사무실은 지린성의 옛 기린 건축 설계원(吉林省建築設計院)에 위치했다.[2]

1939년,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민정부 장관인 아마카스 마사히코를 장편 영화 제작 감독으로 임명했다.[3] 아마카스는 영화 산업 외부인이었으나,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가족을 살해한 악명으로 인해 만주영화협회를 일본 본토 영화 산업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3] 아마카스는 Universum Film AG(UFA)와 치네치타 스튜디오를 방문한 후,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 산업과 경쟁하기 위해 UFA의 제작 시스템을 도입하고자 했다.[4]

3. 조직 및 운영

만주영화협회(만주국 정부와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의 합작 투자로 1937년 8월 14일에 설립)는 국책회사일본어였다.[2] 원래 스튜디오는 옛 양모 공장에, 사무실은 지린성의 옛 기린 건축 설계원(吉林省建築設計院)에 있었다.[2] 만주의 영화 시장은 타이완과 한국의 일본 영화 시장과는 달리, 처음부터 일본이 운영하는 중국 영화 스튜디오로 홍보되었다.[2] 만주영화협회는 원래 일본 관객을 위해 만주국에 관한 산업 및 교육 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담당했던 남만주철도 사진부에서 성장했다.[2] 스튜디오의 홍보 자료는 만주영화협회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자랑했다.[2] 닛카츠의 다마가와 스튜디오에서 네기시 간이치(根岸寛一)가 장편 영화 제작을 감독하기 위해 영입되었다.[2]

1939년,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민정부 장관인 아마카스 마사히코를 네기시의 후임으로 임명했다.[3] 아마카스는 영화 산업 외부인이라는 자신의 지위와 오스기 사카에와 그의 가족을 살해한 악명으로 만주영화협회의 독립성을 일본 본토 영화 산업으로부터 유지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했다.[3] 아마카스는 종종 만주영화협회에 대한 일본의 인식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때로는 적대적이기도 했다.[3]

1936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방문한 후, 아마카스는 Universum Film AG(UFA)와 치네치타 스튜디오를 방문할 수 있었다.[4] 만주영화협회에 부임한 후, 아마카스는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 산업 모두와 경쟁하기 위해 UFA의 제작 시스템을 따라 스튜디오의 제작 시스템을 개혁하려 했다.[4] 여기에는 도와(Towa) 회사 직원들을 고용하여 최신 독일 영화 카메라와 제작 기법을 확보하는 것이 포함되었다.[4] 아마카스는 또한 아사히나 다카시와 같은 영화 배우, 감독,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포함한 일본 영화 산업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했다.[4] 아마카스는 우익으로 여겨졌지만, 일본 영화 산업에서 숙청되던 좌익 및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많이 고용했다.

아마카스는 또한 배우이자 가수인 야마구치 요시코의 경력을 시작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중국 관객들은 그녀를 중국 소녀로 여겼는데, 그녀는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5] 태평양 전쟁 이후, 그녀는 일본으로 돌아와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경력을 쌓았다.[5]

만주영화협회는 다른 일본 식민지 영화 스튜디오와 차별화되었다. 아마카스는 자신의 주요 관객이 일본인이 아닌 만주인이라고 주장했다.[6] 1942년 "만주인을 위한 영화 제작"이라는 기사에서 아마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주국을 일본을 위해 이국적으로 만들 영화를 만들 필요는 전혀 없다. 일본은 어쨌든 만주의 특이한 측면을 저속하게 만들면서 잘못된 영화를 만들 것이다. 우리의 초점이 만주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진전을 이룬 후에는 일본을 위한 영화 제작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6]

1945년 8월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 이후, 소련 붉은 군대는 중국 공산당이 만주영화협회를 인수하도록 도왔다.[7] 이전에 식민지 스튜디오였던 곳은 허강으로 이전되어 공산당 최초의 풀캐퍼시티 영화 스튜디오인 동북영화제작소로 설립되었다.[7] 위안무즈가 이 제작소의 감독이었고, 천보얼이 당 서기였다.[7] 동북영화제작소는 1947년 초에 제작을 시작하여 뉴스 및 다큐멘터리 영화뿐만 아니라 아동을 위한 일부 픽션, 교육 영화 및 애니메이션에 중점을 두었다.[7]

3. 1. 이사회 구성 및 역할

만주영화협회(만영)는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이사장 1명과 이사 3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통해 사업 의결의 가부를 결정했다. 초대 이사장은 청나라 황족 금벽동(숙친왕 선기의 일곱째 아들, 가와시마 요시코의 오빠)이었지만, 실권은 만철 영화 제작소 출신인 하야시 겐조 전무이사가 쥐었다.

만영의 영화 제작 실적이 좋지 않자, 만주국 국무원아마카스 마사히코를 2대 이사장에 앉혀 만영 개혁에 나섰다. 아마카스 사건으로 복역 후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민생부 경무사 등을 역임하며 협화회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흉계 기관의 수장으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아마카스를 기용한 것은 무토 도미오와 기시 노부스케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의 속마음은 아마카스가 그 공적에 비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며, 무토는 일본 굴지의 영화인으로 이사인 네기시 칸이치를 불러 동의를 구했고, 네기시는 잠시 생각한 후 "받아들이겠습니다"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3. 2. 아마카스 마사히코의 개혁

만주영화협회(만영)의 영화 제작 실적이 부진하자, 만주국 국무원아마카스 마사히코를 제2대 이사장으로 임명하여 만영 개혁을 추진했다. 아마카스 사건으로 복역 후 프랑스로 건너간 그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만주국 민생부 경무사 등을 역임하며 협화회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흉계 기관의 수장으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아마카스를 이사장에 기용한 것은 무토 도미오와 기시 노부스케로 알려져 있다.

아마카스는 1936년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Universum Film AG(UFA)와 치네치타 스튜디오를 방문했다.[4] 만영 이사장 부임 후, 아마카스는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 산업 모두와 경쟁하기 위해 UFA의 제작 시스템을 따라 스튜디오의 제작 시스템을 개혁하려 했다.[4] 그는 도와(Towa) 회사 직원들을 고용하여 최신 독일 영화 카메라와 제작 기법을 확보했다.[4] 또한 아사히나 다카시와 같은 영화 배우, 감독, 오케스트라 지휘자를 포함한 일본 영화 산업의 저명인사들을 초청했다.[4] 아마카스는 우익으로 여겨졌지만, 일본 영화 산업에서 숙청되던 좌익 및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많이 고용했다.[4]

3. 3. 인력 구성 및 차별 문제

만주는 타이완, 한국의 일본 영화 시장과는 달리, 처음부터 일본이 운영하는 중국 영화 스튜디오로 홍보되었다.[2] 만영은 현지 영화 제작을 위해 중국인 감독과 각본가도 채용했지만, 일본인 직원과의 대우 차별 문제가 존재했다. 1939년,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 민정부 장관인 아마카스 마사히코를 네기시 간이치의 후임으로 임명했다.[3] 아마카스는 영화 산업 외부인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활용하여 만주영화협회의 독립성을 유지했다.[3] 아마카스는 이러한 격차를 일부 시정했으나,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 그는 할리우드와 일본 영화 산업 모두와 경쟁하기 위해 Universum Film AG(UFA)의 제작 시스템을 따라 스튜디오의 제작 시스템을 개혁하려 했다.[4] 여기에는 도와(Towa) 회사 직원들을 고용하여 최신 독일 영화 카메라와 제작 기법을 확보하는 것이 포함되었다.[4] 아마카스는 우익으로 여겨졌지만, 일본 영화 산업에서 숙청되던 좌익 및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많이 고용했다.

4. 영화 제작 및 배급

만주영화협회(만영)는 "일만 친선", "오족공화" 등 만주국의 이상을 선전하고,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 영화, 계몽 영화, 선전 영화를 주로 제작했다.[8] 이러한 영화들은 대동아공영권 구축을 위한 일본의 이념을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8]

만영은 만주국 건국의 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10] 초기에는 만주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인해 지루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9] 이후 일상생활의 친숙한 요소와 제국주의적 이념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선전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9]

만영은 도에이의 사풍을 만든 마키노 미쓰오 조차 힘들었다고 회고 할 정도로, "관료적 분위기"가 있었고 영화의 문화적 토양이 부족 했다.[10] 실무는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담당을 하였으나, 관료 특유의 깨끗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면이 있었다.[10] 현지에서 영화 제작이 목적이었기에 배우뿐만 아니라 중국인 감독과 각본가도 채용했지만, 그 대우 면에서는 일본인과 비교하면 격차가 컸다.[10]

리샹란의 발굴 등으로 만주인으로부터의 인기 획득을 노리고 오락 영화에 힘을 쏟았지만,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의 재탕 등이 많아 볼 만한 점은 적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닛카쓰 타마가와 촬영소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가고 국내 분위기가 엄격해진 시대에 영화인들이 대륙에서 크리에이티브한 의지를 지켜나간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10]

제작된 영화로는 1938년 『장지탁천』, 『명성의 탄생』, 『칠공도』, 『만리심모』, 『지심곡』, 『대륙장홍』, 『밀월쾌차』, 『전원춘광』, 『국법무사』, 1939년 『국경지화』, 『부귀춘몽』, 『원혼복수』, 『자모루』, 『진가자매』, 『연귀』, 『동유기』, 『아름다운 희생』, 『백란의 노래』, 1940년 『애염』, 『현대일본』, 『여화미권』, 『정해항정』, 『수지타적심』, 『유명자원방래』, 『풍조』, 『예원정려』, 『류랑가녀』, 『인마평안』, 『왕속관』, 『신생』, 『현대남아』, 『지평선상』, 『대지추광』, 『유선생회고』, 『도시적홍류』, 『판수나오』, 『려명서광』, 1941년 『리반화향』, 『그녀의 비밀』, 『쌍매루』, 『신혼기』, 『천상인간』, 『우폭화잔』, 『건곽남아』, 『운전시래』, 『명성일기』, 『황금몽』, 『경화수월』, 『화병탐색』, 『관난교향악』, 『몽환곡』, 『철한』, 『가정』, 『원림춘색』, 『기동력험기』, 『황당영웅』, 『만정방』, 『청춘진행곡』, 『왕마자고약』, 『소방우』, 『옥당춘』, 『야미명』, 『춘풍야초』, 『용쟁호투』, 1942년 『영춘화』, 『연지』, 『영락공주』, 『황하』, 『가녀한』, 『일순백순』, 『안남비』, 『개대환희』, 『흑지미인』, 『화화상 노지심 수호전 초집』, 『낭낭묘』, 『애의 미소』, 『안남비』, 『개대환희』, 『근해난전』, 『흑검적 전편 후편』, 『표자두 임충 수호전 제2집』, 1943년 『맹세의 합창』, 『벽혈염영』, 『구혼계시』, 『은익연가』, 『백마검객』, 『부귀지가』, 『각후원앙』, 『천금화자』, 『연청여이사사』, 『백설방종』, 『금조대로귀』, 『사요의 종』, 『만세유방』, 1944년 『이슬은 무서워』, 『군관학교』, 『만향옥』, 『녹림외사』, 『호아이즈』, 『애여구』, 『혈전부용』, 『야습풍』, 『영성풍광』, 『묘소랑연』, 『화우춘풍』, 『일대혼조』, 『백화정』, 『월롱화영』, 『나의 꾀꼬리』, 1945년 『호랑투염』, 『지란야곡』, 『란화특공대』, 『소소매』, 『대지봉춘』, 『야반종성』 등이 있다.[18]

만영 스타들의 앨범

4. 1. 제작 영화의 특징 및 목적

만주영화협회(만영)는 "일만 친선", "오족 공화" 등 만주국의 이상을 선전하고,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 영화, 계몽 영화, 선전 영화를 주로 제작했다.[8] 이러한 영화들은 대동아공영권 구축을 위한 일본의 이념을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8]

만영은 만주국 건국의 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였다.[10] 초기에는 만주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인해 지루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9] 이후 일상생활의 친숙한 요소와 제국주의적 이념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법을 통해 선전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했다.[9]

만영은 도에이의 사풍을 만든 마키노 미쓰오 조차 힘들었다고 회고 할 정도로, "관료적 분위기"가 있었고 영화의 문화적 토양이 부족 했다.[10] 실무는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담당을 하였으나, 관료 특유의 깨끗함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면이 있었다.[10] 현지에서 영화 제작이 목적이었기에 배우뿐만 아니라 중국인 감독과 각본가도 채용했지만, 그 대우 면에서는 일본인과 비교하면 격차가 컸다.[10]

리샹란의 발굴 등으로 만주인으로부터의 인기 획득을 노리고 오락 영화에 힘을 쏟았지만,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의 재탕 등이 많아 볼 만한 점은 적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닛카쓰 타마가와 촬영소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가고 국내 분위기가 엄격해진 시대에 영화인들이 대륙에서 크리에이티브한 의지를 지켜나간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10]

제작된 영화로는 1938년 『장지탁천』, 『명성의 탄생』, 『칠공도』, 『만리심모』, 『지심곡』, 『대륙장홍』, 『밀월쾌차』, 『전원춘광』, 『국법무사』, 1939년 『국경지화』, 『부귀춘몽』, 『원혼복수』, 『자모루』, 『진가자매』, 『연귀』, 『동유기』, 『아름다운 희생』, 『백란의 노래』, 1940년 『애염』, 『현대일본』, 『여화미권』, 『정해항정』, 『수지타적심』, 『유명자원방래』, 『풍조』, 『예원정려』, 『류랑가녀』, 『인마평안』, 『왕속관』, 『신생』, 『현대남아』, 『지평선상』, 『대지추광』, 『유선생회고』, 『도시적홍류』, 『판수나오』, 『려명서광』, 1941년 『리반화향』, 『그녀의 비밀』, 『쌍매루』, 『신혼기』, 『천상인간』, 『우폭화잔』, 『건곽남아』, 『운전시래』, 『명성일기』, 『황금몽』, 『경화수월』, 『화병탐색』, 『관난교향악』, 『몽환곡』, 『철한』, 『가정』, 『원림춘색』, 『기동력험기』, 『황당영웅』, 『만정방』, 『청춘진행곡』, 『왕마자고약』, 『소방우』, 『옥당춘』, 『야미명』, 『춘풍야초』, 『용쟁호투』, 1942년 『영춘화』, 『연지』, 『영락공주』, 『황하』, 『가녀한』, 『일순백순』, 『안남비』, 『개대환희』, 『흑지미인』, 『화화상 노지심 수호전 초집』, 『낭낭묘』, 『애의 미소』, 『안남비』, 『개대환희』, 『근해난전』, 『흑검적 전편 후편』, 『표자두 임충 수호전 제2집』, 1943년 『맹세의 합창』, 『벽혈염영』, 『구혼계시』, 『은익연가』, 『백마검객』, 『부귀지가』, 『각후원앙』, 『천금화자』, 『연청여이사사』, 『백설방종』, 『금조대로귀』, 『사요의 종』, 『만세유방』, 1944년 『이슬은 무서워』, 『군관학교』, 『만향옥』, 『녹림외사』, 『호아이즈』, 『애여구』, 『혈전부용』, 『야습풍』, 『영성풍광』, 『묘소랑연』, 『화우춘풍』, 『일대혼조』, 『백화정』, 『월롱화영』, 『나의 꾀꼬리』, 1945년 『호랑투염』, 『지란야곡』, 『란화특공대』, 『소소매』, 『대지봉춘』, 『야반종성』 등이 있다.[18]

4. 2. 영화 제작의 한계와 비판

만주영화협회(만영)의 영화들은 만주국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현지 관객들에게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9] 1939년 만주 지역의 교육받은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만영의 영화는 지루하고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9]

만영은 "일만 친선", "오족 공화", "왕도락토"와 같은 만주국의 이상을 만주인에게 교육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다.[10] 만영 제작 영화는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 영화나 계몽적인 영화, 프로파간다 영화가 많았고, 대륙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또한, 일본에서 제작된 영화의 재탕이나 단순한 선전물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만영에는 일종의 독특한 "관료적 분위기"가 있었고, 영화의 문화적 토양조차 없었다.[10] 도에이의 사풍을 만든 남자라고 여겨지는 명 프로듀서 마키노 미쓰오조차 당시를 회고하며 "울면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현지에서 영화 제작이 목적이었기에 중국인 감독과 각본가도 채용했지만, 그 대우 면에서는 일본인과 비교하면 격차가 컸다.

닛카쓰 타마가와 촬영소 시대가 종말을 향해 가고, 국내 분위기가 엄격해진 시대에 영화인들이 대륙에서 크리에이티브한 의지를 지켜나간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이것이 전후에 거대한 영화 붐을 일으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4. 3.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 발굴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배우이자 가수인 야마구치 요시코(리샹란)를 발굴하여 만영의 대표적인 스타로 육성했다.[10] 리샹란은 유창한 중국어 실력과 매력적인 외모로 중국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만영의 영화들을 통해 일본의 선전 정책에 기여했다.

5. 종전과 그 이후

만주영화협회는 작품들이 친일 선전으로 간주되어 중국 영화 역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만주영화협회 영화 기록 보관소의 약 절반은 소련에 의해 유실되었다. 1995년 5월, 일본은 유실된 부분에 있던 영화를 다시 구매했다. 처음에 일본 회사는 영화를 30편으로 묶어 일본에서 30만 엔에 판매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주국의 이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 소유권을 주장하고, 중국의 동의 없이 영화가 복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정당성에 대해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일본은 보상으로 일부 작품을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일부는 오늘날 중국 국립 영화 자료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일부는 창춘 영화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다.

5. 1. 일본 패전과 만영의 해체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 패전하면서 만주국도 붕괴되었다. 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항복을 선택하고, 열차를 확보하여 일본인 직원과 가족들을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시키도록 지시했다. 또한 만영의 모든 예금을 인출하여 일본인 직원과 중국인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했다. 그 후 8월 20일에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아마카스는 만영이 앞으로 중국인 직원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며, 기재를 파괴하지 말고 보관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중국인 직원들에게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이 회사의 대표가 되어 일해야 합니다.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여러모로 신세를 졌습니다. 앞으로 이 촬영소가 중국 공산당의 것이 되든 국민당의 것이 되든, 여기서 일했던 중국인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라도 기재를 확실히 확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5. 2. 중국 공산당의 접수와 창춘 영화 제작소로의 전환

1945년 10월 1일 만주 일부를 '해방'한 중국 공산당은 만영을 즉시 접수하여 동북영화공사로 만들었다.[17] 그 후 국공 내전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1949년 이후 동북영화제작창을 거쳐 1955년 장춘영화제작창(중국어)으로 이어졌다.

만영의 일본인 기술 사원 중 몇 명은 동북영화공사에 남아 이후 중국 영화의 기술 지도를 했다.[17] 만영의 건물은 '장춘영화제작창 초기 건축'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만영 촬영소(창영 촬영소를 거쳐 2011년부터 창영구지박물관)

5. 3. 만영 관련 자료의 보존과 활용

만주영화협회의 영화 기록 보관소의 약 절반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 의해 유실되었다. 1995년 5월, 일본은 유실된 부분에 있던 영화를 다시 구매했다. 처음에 일본 회사는 영화를 30편으로 묶어 일본에서 30만 엔에 판매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주국의 이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 소유권을 주장하고, 중국의 동의 없이 영화가 복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정당성에 대해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일본은 보상으로 일부 작품을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일부는 오늘날 중국 국립 영화 자료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일부는 창춘 영화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다.

6. 한국과의 관계

일제강점기에 일부 한국 영화인들은 만주영화협회(만영)에서 활동하며 영화 제작 기술을 습득하거나 제작에 참여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 영화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만영에서의 활동은 친일 행적 논란과 연관되어 비판받기도 한다.

만주영화협회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친일 선전으로 간주되어 중국 영화 역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선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한국 근현대사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만주영화협회 영화 기록 보관소의 약 절반은 소련에 의해 유실되었다. 1995년 5월, 일본은 유실된 부분에 있던 영화를 다시 구매했다. 처음에 일본 회사는 영화를 30편으로 묶어 일본에서 30만 엔에 판매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주국의 이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 소유권을 주장하고, 중국의 동의 없이 영화가 복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정당성에 대해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일본은 보상으로 일부 작품을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일부는 오늘날 중국 국립 영화 자료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일부는 창춘 영화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다.

만주영화협회(만영)의 작품들은 친일 선전으로 간주되어 중국 영화 역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만영을 일본 제국주의의 선전 도구로 여기며, 만영에서 활동한 한국 영화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 소속이거나 보수 진영 인사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만영의 영화 기록 보관소의 약 절반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 의해 유실되었다. 1995년 5월, 일본은 유실된 부분에 있던 영화를 다시 구매했다. 처음에 일본 회사는 영화를 30편으로 묶어 일본에서 30만 엔에 판매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주국의 이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 소유권을 주장하고, 중국의 동의 없이 영화가 복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정당성에 대해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일본은 보상으로 일부 작품을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일부는 오늘날 중국 국립 영화 자료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일부는 창춘 영화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다.

6. 1. 일제강점기 한국 영화인들의 만영 활동

일제강점기에 일부 한국 영화인들은 만주영화협회(만영)에서 활동하며 영화 제작 기술을 습득하거나 제작에 참여했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 영화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만영에서의 활동은 친일 행적 논란과 연관되어 비판받기도 한다.

6. 2. 친일 영화 논란

만주영화협회에서 제작된 영화들은 친일 선전으로 간주되어 중국 영화 역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영화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선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한국 근현대사에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만주영화협회 영화 기록 보관소의 약 절반은 소련에 의해 유실되었다. 1995년 5월, 일본은 유실된 부분에 있던 영화를 다시 구매했다. 처음에 일본 회사는 영화를 30편으로 묶어 일본에서 30만 엔에 판매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주국의 이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 소유권을 주장하고, 중국의 동의 없이 영화가 복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정당성에 대해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일본은 보상으로 일부 작품을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일부는 오늘날 중국 국립 영화 자료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일부는 창춘 영화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다.

6. 3.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만주영화협회(만영)의 작품들은 친일 선전으로 간주되어 중국 영화 역사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만영을 일본 제국주의의 선전 도구로 여기며, 만영에서 활동한 한국 영화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특히, 국민의힘 소속이거나 보수 진영 인사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더욱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만영의 영화 기록 보관소의 약 절반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에 의해 유실되었다. 1995년 5월, 일본은 유실된 부분에 있던 영화를 다시 구매했다. 처음에 일본 회사는 영화를 30편으로 묶어 일본에서 30만 엔에 판매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만주국의 이전 작품에 대한 저작권 소유권을 주장하고, 중국의 동의 없이 영화가 복제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의 정당성에 대해 공식적인 불만을 제기했다. 일본은 보상으로 일부 작품을 반환하는 데 동의했다. 일부는 오늘날 중국 국립 영화 자료원에 보존되어 있으며, 다른 일부는 창춘 영화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다.

참조

[1] 서적 Chinese National Cinema Routledge 2004
[2] 서적 The Attractive Empire: Transnational Film Culture in Imperial Jap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3] 문서 Japan/American Film Wars
[4] 문서 The Attractive Empire
[5] 문서 The Attractive Empire
[6] 문서 満人のために映画を作る 1942-08-01
[7] 서적 Revolutionary Becomings: Documentary Media in Twentieth-Century China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8] 서적 What Is Japanese Cinema? A Histor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9
[9] 간행물 A National Cinema for a Puppet State: The Manchurian Motion Picture Associ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10] 서적 The Japan/Ameriaca Film Wars: World War II Propaganda and Its Cultural Contexts Harwood Academic Publishers 1994
[11] 서적 What Is Japanese Cinema? A Histor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9
[12] 간행물 A National Cinema for a Puppet State: The Manchurian Motion Picture Associ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3
[13] 서적 The Japan/Ameriaca Film Wars: World War II Propaganda and Its Cultural Contexts Harwood Academic Publishers 1994
[14] 서적 Chinese National Cinema Routledge 2004
[15] 서적 Unthinking Eurocentrism : Multiculturalism and the Media Routledge 2014
[16] 서적 Colonialism/Postcolonialism Routledge 2015
[17] 웹사이트 満州映画協会の役割とその影響 - 第4章 日本敗戦後の満映 http://www.cmn.hs.h.[...]
[18] 데이터베이스 日本映画データベース 201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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