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쓰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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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쓰케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존재했던, 군대 내에서 장수와 전장의 상황을 감찰하여 주군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메쓰케'로 불렸으며,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의 가신에게도 직무가 있었다. 에도 막부에서는 와카도시요리의 지휘를 받아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감찰하고, 일부 범죄에 대한 재판권도 가졌으며, 오메쓰케는 다이묘, 고가, 조정을 감시하는 감찰관 역할을 수행했다. 메쓰케는 정보 수집을 통해 막부의 내부 스파이 역할을 했으며, 필요에 따라 임시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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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쓰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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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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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걸쳐 존재한 일본의 관직 |
역할 | 감찰 및 정보 수집 |
상세 정보 | |
소속 | 에도 막부 |
정원 | 약 30명 |
임명 | 하타모토 중에서 임명 |
직무 | 다이묘의 동향 감시 막부 영지 내의 감찰 재판 및 형 집행 감찰 기타마치 봉행쇼와 미나미마치 봉행쇼 감찰 |
관련 정보 | |
관련 직책 | 오메쓰케 |
2. 역사
메쓰케(目付)는 일본 역사에서 감찰 임무를 수행하던 관직이다. 그 기원은 가마쿠라 시대 군대 내 감찰 역할에서 찾을 수 있으며, 무로마치 시대에 "메쓰케"라는 명칭이 정착되었고 横目|요코메jpn 또는 横目付|요코메쓰케jpn라고도 불렸다. 센고쿠 시대에는 각 다이묘들이 메쓰케를 두었으며, 에도 막부에서는 와카도시요리 아래에서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감시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각 번에서도 번사 감찰을 위한 메쓰케가 존재했다.
2. 1. 가마쿠라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가마쿠라 시대부터 군대 내에서 장수와 전장의 상황을 감찰하여 주군에게 보고하는 역할이 있었다.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역할은 "메쓰케"(目付)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横目|요코메일본어 또는 横目付|요코메쓰케일본어라고도 불렸다. 이들은 전장에서 적과 아군 양쪽의 현황을 파악하고 보고하는 감찰 임무를 수행했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쇼시다이(所司代) 아래에서 검단(検断, 범죄 단속 및 재판) 업무에 종사하는 관리를 메쓰케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2. 2. 센고쿠 시대와 도요토미 정권
센고쿠 시대에는 각 지역의 다이묘마다 메쓰케라는 직책을 두었다.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정권은 조선 침공군의 감찰 역할로 메쓰케를 임명했다. 전라도와 충청도를 침공하는 선봉대의 메쓰케로는 모리 시게마사, 다케나카 시게토시, 가키미 가즈나오, 모리 다카마사, 하야카와 나가마사, 구마가이 나오모리가 임명되었고, 왜성 주둔군의 메쓰케로는 오타 가즈요시가 임명되어 총 7명이 지명되었다.[13] 이들 중 모리 시게마사가 침공 시작 전에 병으로 사망하자, 오타 가즈요시가 선봉대 메쓰케에 추가되어 총 6명이 정유재란에서 감찰 역할을 수행했다.
2. 3. 에도 막부
에도 막부에서는 겐나 3년(1617년)에 메쓰케 직책이 설치되었다. 설치 당시 정원은 10명이었고, 역고는 1000석이었다. 상시 24명의 메쓰케가 있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2] 와카도시요리의 관할 아래 있었으며, 에도성의 혼마루 및 니시노마루에 배치되어 근무했다. 부하로 도메츠케, 코히토메츠케 등이 있었다.메쓰케의 주요 임무는 와카도시요리의 눈과 귀가 되어 쇼군의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감시하고, 여러 관리들의 근무 태도를 포함한 정무 전반을 감찰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에도에 거주하는 수많은 하타모토와 고케닌들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일종의 경찰 조직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2] 또한, 막부의 정보 기관 또는 내부 스파이처럼 활동하며 전국의 정보를 수집하여 에도의 관료들에게 보고하는 역할도 담당했다.[2] 일부 범죄에 대해서는 직접 재판할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메쓰케는 다이묘 이하의 신분을 가진 이들을 주로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이묘나 조정을 감시했던 오메쓰케(大目付)와 구분된다.[1] 보고 체계 또한 달라서, 메쓰케는 와카도시요리에게 보고했지만, 오메쓰케는 막부 최고위직인 로주에게 직접 보고했다.[2]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기관의 정보 수집 활동은 서로 보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다.[2]
메쓰케는 유능한 인물들이 임명되는 중요한 자리였으며, 이 직책을 거쳐 엔고쿠부교, 마치부교, 간조부교 등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마치부교가 되기 위해서는 메쓰케 경력이 필수적이었다. 로주가 정책을 실행할 때에도 메쓰케의 동의가 필요했으며, 메쓰케는 쇼군이나 로주에게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직접 설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바쿠마쓰 시대의 사상가 구리모토 조운은 그의 저서 『데타라메초시』에서 메쓰케의 중요성에 대해 "'''그 사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한 시대의 성쇠가 달려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막부 말기, 외국과의 회담이나 교섭 자리에 메쓰케가 동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과정에서 메쓰케의 역할을 설명하자 외국 측으로부터 "메쓰케는 스파이를 의미하는가? 일본(도쿠가와 막부)은 스파이를 교섭에 동석시키는가?"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에 막부는 외국의 관직 중 메쓰케에 해당하는 직책을 찾으려 노력했으며, 만엔 원년 견미 사절 당시 메쓰케로 파견된 오구리 타다마사는 "메쓰케는 Censor에 해당한다"고 설명하여 상황을 넘긴 일화가 있다.
2. 3. 1. 오메쓰케 (大目付)
오메쓰케(大目付)는 에도 막부의 직책 중 하나로, 로주(老中)의 지휘 아래 다이묘, 고가(高家), 그리고 교토의 조정(황실)을 감시하는 감찰관 역할을 수행했다. 주된 임무는 잠재적인 반란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이를 막아 쇼군가를 보호하는 것이었다.[1][2]오메쓰케 직책은 간에이 9년(1632년) 12월 17일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아키야마 마사시게(秋山正重), 미즈노 모리노부(水野守信),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政重) 4명이 최초로 임명되었다.[2] 설치 초기에는 소메쓰키(惣目付)라고도 불렸다.[2]
오메쓰케는 하타모토 중에서 선발되었으며, 하타모토가 오를 수 있는 최고위직 중 하나로 여겨졌다.[2] 이는 쇼군의 측근인 고쇼(御側), 친위대장, 다이반(大番)의 우두머리와 동등한 지위였다.[2] 다이묘를 감시하는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오메쓰케는 재임 기간 동안 다이묘와 동등한 만석급(万石)의 로쿠다카(禄高)를 지급받는 경우가 흔했으며, '○○노카미'(守)와 같은 관직명을 받았다.[1][2]
에도 시대 중기로 접어들면서 오메쓰케의 역할은 점차 변화했다. 기존의 감찰 임무보다는 쇼군의 명령을 전국의 다이묘에게 전달하는 사자(使者) 역할과 에도 성 내에서의 각종 의식을 담당하는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1][2] 이로 인해 점차 명예직 또는 한직으로 인식되었고, 마치부교(町奉行)나 칸조부교(勘定奉行, 원문: 가타부교) 등을 역임한 하타모토가 노년에 임명되는 자리로 여겨지기도 했다.[2] 또한, 도로 봉행(道中奉行), 소몬아라타메(宗門改), 군칸아라타메(分限改) 등의 부가적인 역할을 겸임하기도 했다.[2]
오메쓰케의 공식적인 녹봉은 시대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2]
- 기본 녹봉은 3,000 석(石)이었다.
- 간분 5년(1665년) 봉사료 제도가 시행되면서 공식 급료가 1,000 톤(俵)으로 정해졌다.
- 덴와 2년(1682년) 봉사료 제도가 폐지되자, 이 1,000 톤은 그대로 지교다카(知行高)에 가산되었다.
- 겐로쿠 5년(1692년) 봉사료 제도가 다시 부활하면서, 공식 녹봉은 3,000 석으로 정해졌고, 지교다카가 3,000 석 미만인 자에게만 700 톤(俵)의 봉사료가 지급되었다.
오메쓰케의 정원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고 시대별로 변동이 있었다.[2]
오메쓰케는 도로 봉행(道中奉行)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2] 교토 쇼시다이(京都所司代)나 오사카 조다이(大坂城代)와 마찬가지로 쇼군을 대리하는 높은 지위를 상징했다.[2] 오메쓰케가 다이묘와 조정을 감시 대상으로 한 반면, 메쓰케(目付)는 와카도시요리 직속으로 쇼군의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와 고케닌을 감시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1]
3. 정보 수집
에도 막부는 내부 정보 수집 및 첩보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에 메쓰케는 쇼군의 정보 기관 또는 내부 스파이 역할을 하며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상황을 에도의 관료들에게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다.[2] 각 번에서도 번사를 감시하기 위해 비슷한 직책을 두었다.
메쓰케는 주로 다이묘 이하 신분인 하타모토나 고케닌을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1] 반면, 오메쓰케는 관료 및 다이묘(영주)들의 활동을 감독하며 혹시모를 반란의 싹을 찾아 잘라버리는 임무를 맡았다.[1]
비록 비슷한 감찰 활동을 했지만, 보고 체계는 달랐다. 메쓰케는 로주 바로 아래 직급인 와카도시요리에게 보고했다. 반면, 오메쓰케는 막부 관료 조직의 최고 책임자인 로주에게 직접 보고했다. 의도적으로 두 집단 간 공식적인 보고 관계는 없었지만, 메쓰케의 정보 수집 활동은 오메쓰케의 활동을 보완하도록 설계되었다.[2]
에도 막부에서 메쓰케는 겐나 3년(1617년)에 설치되었으며, 초기 정원은 10명, 역고는 1000석이었다. 와카도시요리의 관할 아래 에도성 혼마루 및 니시노마루에 배치되었고, 부하로 도메츠케, 코히토메츠케를 두었다.
메쓰케의 주요 업무는 하타모토와 고케닌의 감시였으나, 여러 관리의 근무 태도를 비롯한 정무 전반을 감찰했으며 일부 범죄에 대해서는 재판권도 가지고 있었다. 메쓰케에는 유능한 인물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로주가 정책을 실행할 때 동의권을 행사하고, 쇼군이나 로주에게 부동의 이유를 직접 설명할 수 있는 권한도 가졌다.
메쓰케는 중요한 직책으로 여겨져, 후에 엔고쿠부교나 마치부교, 간조부교 등으로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마치부교에 임명되기 위해서는 메쓰케 경력이 필수적이었다. 바쿠마쓰 시대의 사상가 구리모토 조운은 그의 저서 『데타라메초시』에서 "'''그 사람을 얻느냐 못 얻느냐에 따라 한 시대의 성쇠가 달려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상시적으로 24명의 메쓰케가 활동했다.[2]
막말기에는 외국과의 회담이나 교섭 시 메쓰케를 동석시켰는데, 이 때문에 서양 측으로부터 "메쓰케는 스파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 일본(도쿠가와 막부)은 스파이를 회담에 동석시키는가?"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에 막부는 외국의 직책 중 메쓰케에 해당하는 것을 조사했고, 만엔 원년 견미 사절 당시 메쓰케로 파견된 오구리 타다마사는 "메쓰케는 Censor이다"라고 설명하여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4. 임시적 변화
도쿠가와 막부의 관료 기구는 필요에 따라 임시적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때로는 특정 문제나 독특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한 명 이상의 메쓰케 또는 오메쓰케가 특별 임무를 맡아 활동했다. 예를 들어, 아라오 노리마사는 1852년부터 1854년까지 海防掛目付|카이보가카리메쓰케일본어라는 특별 직책을 수행했다.[3]
海防掛|카이보가카리일본어는 "해상 방어 담당"을 의미하는 접두사로, 1845년 이후 일부 막부 관료들의 직함에 사용되었다. 이들은 연안 해역을 감독하고, 점증하는 외국 관련 문제, 특히 서양 세력의 접근에 대응하는 특별한 책임을 지는 관리였다. '카이보가카리메쓰케'는 이후 外国掛|가이코쿠가카리일본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4] 이러한 직책의 변화와 발전은 미일 화친 조약 체결 협상을 전후하여 설치된 가이코쿠 부교 제도보다 앞서 이루어진 것이다.[5]
5. 여러 번의 메쓰케
여러 번(藩)에서는 순찰 담당 번사보다 유능한 인물을 메쓰케로 등용하여 大目付나 가로의 지휘 아래 두는 경우가 많았다. 부하로는 徒士目付|가치메쓰케일본어, 歩行目付|보행 메쓰케일본어, 横目|요코메일본어 등을 두어 足軽나 徒士의 비위나 근무 태도를 감찰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센다이 번에서는 다테 소동 당시에 메쓰케가 奉行 (가로에 상당하는 직책)까지 감찰할 권한을 가졌다. 특히 어린 번주 다테 쓰나무라의 후견인이었던 다테 무네카츠는 메쓰케의 권한을 강화하고 이를 이용해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는 다테 소동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6. 대중문화 속의 메쓰케
메쓰케의 직책은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때로는 관리들의 행동이 뇌물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 시대극인 ''폭군 쇼군''의 여러 에피소드에서는 관리들의 사소한 부패가 묘사된다.
메쓰케는 또한 영화 ''사일런스'' (2016)에서 일본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6]
비디오 게임 ''토탈 워: 쇼군 2''에서, 메쓰케는 적대적인 가문의 요원, 특히 닌자를 투옥하거나 처형하는 임무를 맡고 있으며, 내부 보안을 강화하고 세금 징수를 개선하기 위해 정착지를 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7. 메쓰케 목록 (일부)
wikitext
참조
[1]
서적
Select Documents on Japanese Foreign Policy, 1853–1868
1955
[2]
서적
Taiho-jutsu: Law and Order in the Age of the Samurai
https://books.google[...]
2004
[3]
서적
[4]
서적
[5]
서적
A History of Japan, 1582-1941
2003
[6]
웹사이트
'Silence', los silencios de Martin Scorsese
http://www.periodist[...]
2017-01-08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문서
慶長2年(1597年)2月21日付朱印状『立花家文書』等
1597-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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