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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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는 1211년 니케아 제국과 룸 술탄국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 분열된 후, 룸 술탄국은 망명한 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3세를 지원하여 니케아 제국을 공격했다. 전투는 니케아 제국의 승리로 끝났으며,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호스로 1세가 전사하고 알렉시오스 3세가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일시적으로 제거하고 니케아 제국의 지위를 강화했으며, 이후 니케아 제국과 룸 술탄국 간의 국경은 1260년대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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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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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동로마-셀주크 전쟁 |
날짜 | 1211년 6월 17일 (추정) |
장소 | 아나톨리아 |
결과 | 니케아 제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니케아 제국 |
교전국 2 | 룸 술탄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니케아 제국 | 테오도루스 1세 |
룸 술탄국 | 케이후스라브 1세 알렉시우스 3세 앙겔루스 |
병력 규모 | |
니케아 제국 | 2,000명 (기병) *800명 (라틴 기병) |
룸 술탄국 | 5,000–11,000명 |
피해 규모 | |
니케아 제국 | 대부분의 라틴인 사망 |
룸 술탄국 | 심각한 피해 |
관련 정보 | |
전투 이름 | 메안데르 강가의 안티오키아 전투 |
2. 배경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이 분열되자, 테오도로스 1세는 1208년 서부 아나톨리아에 니케아 제국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했다.[6] 니케아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을 주장하며 북쪽의 라틴 제국과 동쪽의 룸 술탄국으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1211년 초, 120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 도망쳤던 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3세가 안탈리아에 도착하면서 룸 술탄국과의 평화가 깨졌다.[7] 알렉시오스 3세는 제위 복귀를 위해 망명 생활 중이었으며, 여러 시도 끝에 과거 인연이 있던 룸 술탄 카이호스로 1세에게 의탁했다.[8][9][10]
카이호스로 1세는 알렉시오스 3세의 복위를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니케아 제국을 공격할 기회로 삼았다. 그는 테오도로스 1세에게 알렉시오스 3세에게 제위를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군대를 일으켜 니케아 제국 영토를 침공했다.[11][12] 이 침공은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2. 1. 제4차 십자군과 비잔티움 제국의 분열
제4차 십자군이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이 혼란 속에서 이전 비잔티움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3세(재위 1195–1203)는 룸 술탄국으로 망명했다.[26]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제국 분할 이후, 테오도로스 1세(재위 1205–1222)는 서부 아나톨리아의 옛 비잔티움 영토에 기반을 마련하고 1208년 황제로 즉위했다. 이 새로운 국가는 니케아 제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6] 니케아 제국은 스스로를 정통 '로마인의 황제'라 칭하며 비잔티움 제국의 계승을 주장했다.[26]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유산을 주장하는 그리스계 후계 국가는 니케아 제국 외에도 서부 그리스의 에피루스 전제공국과 이후 등장하는 테살로니카 제국 등이 있었다. 니케아 제국은 북쪽으로는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 동쪽으로는 룸 술탄국의 위협에 직면했다.[6]
1211년 초, 전 황제 알렉시오스 3세가 안탈리아 항구에 도착하면서 룸 술탄국과의 평화는 깨졌다. 이 시기의 사건들은 셀주크 측의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시르와 이븐 비비, 비잔티움 측의 게오르기우스 아크로폴리테스와 니케포로스 그리고라스, 그리고 니케타스 코니아테스 등의 기록을 통해 자세히 전해진다.[7]
알렉시오스 3세는 1203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접근하자 도시를 탈출했지만, 황제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왕위를 되찾으려 했다. 그는 1203년부터 1205년까지 그리스를 돌며 지역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몬페라토의 보니파시오에게 사로잡혔다. 1210년, 그의 사촌인 미카엘 1세가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났다.[8] 알렉시오스 3세는 자신의 딸 안나와 결혼한 사위 테오도로스 1세 대신, 과거 망명 시절 자신을 보호해주었던[9][10]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호스로 1세(재위 1192–1196 및 1205–1211)에게 도움을 청했다.[9]
카이호스로 1세는 알렉시오스 3세를 환대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과거 자신이 술탄에게 베풀었던 도움을 상기시키며, 왕위를 되찾게 도와준다면 큰 보상을 약속했다. 카이호스로 1세는 이를 니케아 제국을 공격할 좋은 명분으로 여겼다. 그는 테오도로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합법적인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에게 영토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테오도로스 1세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술탄은 군대를 모아 1211년 봄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다.[11][12][26]
2. 2. 알렉시오스 3세의 망명과 룸 술탄국의 개입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비잔티움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였다. 이 혼란 속에서 비잔티움의 전 황제 알렉시오스 3세(재위 1195–1203)는 제위를 되찾기 위해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203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접근하자 수도에서 도망쳤으며, 이후 그리스를 떠돌며 지지 세력을 모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몬페라토의 보니파시오에게 사로잡혔다. 1210년, 그의 사촌인 미카엘 1세가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8]한편,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인 테오도로스 1세는 아나톨리아 서부의 옛 비잔티움 영토에 니케아 제국을 세우고 1208년 황제로 즉위하였다.[6] 니케아 제국은 그리스계 계승 국가로서 비잔티움 제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북쪽의 라틴 제국과 동쪽의 룸 술탄국이라는 위협에 맞서야 했다.
석방된 알렉시오스 3세는 자신의 딸 안나와 결혼한 사위 테오도로스 1세에게 의탁하는 대신, 과거 자신이 망명했을 때 도움을 주었던[9][10]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호스로 1세(재위 1192–1196, 1205–1211)에게 향했다. 1211년 초, 알렉시오스 3세는 안탈리아 항구에 도착하여 술탄의 보호를 요청하였다.[7]
카이호스로 1세는 알렉시오스 3세를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알렉시오스 3세는 과거 자신이 술탄에게 베풀었던 도움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복위를 도와준다면 큰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카이호스로 1세는 이를 니케아 제국을 공격할 좋은 명분으로 여겼다. 그는 테오도로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알렉시오스 3세에게 제위를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 1세는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고, 이에 카이호스로 1세는 군대를 일으켜 1211년 봄 니케아 제국을 침공하였다.[11][12][26]
3. 전투의 전개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를 포위한 셀주크의 술탄 카이후스라우 1세에 맞서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급히 군대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13][16] 양측 군대는 안티오키아 근교의 메안데르 계곡에서 마주쳤다.[16][17]
전투가 시작되자 수적으로 열세였던 니케아 군대의 라틴족 용병 기병대가 용맹하게 돌격하여 셀주크 군대의 중앙을 돌파하며 초반 기세를 잡았다.[18][19] 이 공격으로 특히 셀주크 군대의 경무장 궁수와 투석병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카이후스라우 1세는 곧 전열을 가다듬고 우세한 병력을 이용하여 라틴 용병들을 포위 섬멸했다. 기세가 오른 셀주크 군대는 니케아 군대의 본진을 공격했고, 니케아 군대는 큰 피해를 입으며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18][19]
전투가 셀주크 군의 승리로 기울어 가던 중, 양측의 군주가 직접 격돌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카이후스라우 1세는 철퇴로 테오도로스 1세를 공격하여 말에서 떨어뜨렸다.[18][20] 술탄이 승리를 확신하고 포로로 잡으려던 순간, 정신을 차린 테오도로스가 반격하여 술탄이 탄 말의 뒷다리를 베어 그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진 술탄은 곧바로 참수되었는데, 누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18][20] 술탄의 머리가 창에 꽂혀 높이 들리자, 이를 본 셀주크 군대는 큰 충격과 공황에 빠져 급히 후퇴했다. 니케아 군대 역시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지는 못했다.[18][20]
3. 1. 셀주크 군대의 침공과 니케아 군대의 대응
셀주크의 술탄 카이후스라우 1세는 폐위된 황제 알렉시오스 3세를 앞세워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다. 그의 군대는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를 포위했는데, 이곳을 점령하여 메안데르 계곡 전체를 정복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셀주크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기록에는 6만 명 또는 2만 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13] 이는 과장된 수치로 보이며, 실제로는 니케아 군대보다 훨씬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맞서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약 2,000명에서 3,000명 사이의 병력을 간신히 모을 수 있었다.[13][14] 이 병력 중 800명은 라틴족 용병이었고 나머지는 비잔틴 그리스인이었다.[13][14] 테오도로스는 니케아에서 출발하여 미시아 올림푸스 산을 넘어 11일 만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13][15] 그곳에서 안티오키아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치 식량을 제외한 모든 보급품을 버리고 안티오키아로 강행군했다.[13][16]
테오도로스의 접근 방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역사가 니케포로스 그리고라스에 따르면 테오도로스는 셀주크 군대를 기습하려 했으나,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는 테오도로스가 사신을 보내 자신의 도착을 카이후스라우에게 미리 알렸다고 기록했다.[16][17] 어떤 방식이었든, 카이후스라우는 테오도로스의 군대가 접근하자 안티오키아 포위를 풀고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16][17] 셀주크 군대는 계곡의 좁은 지형 때문에 모든 병력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기 어려웠고, 특히 기병 운용에 제약을 받았다. 이에 술탄은 니케아 군대의 공격을 기다리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18][19]
3. 2. 전투의 경과
카이후스라우 1세는 알렉시오스 3세를 앞세워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를 포위했다. 셀주크 군대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니케아 측 기록은 2만에서 6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는 과장된 수치일 가능성이 있지만,[13][14] 테오도로스 1세가 동원한 군대보다는 훨씬 큰 규모였다. 테오도로스의 군대는 약 2,000명에서 3,000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 중 800명은 라틴족 용병 기병대였다.[13][14]테오도로스는 니케아에서 출발하여 11일 만에 필라델피아에 도착했고, 안티오키아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짐을 버리고 강행군하여 도시로 향했다.[13][16] 테오도로스는 기습을 노렸으나, 셀주크 술탄 카이후스라우 1세는 니케아 군의 도착을 미리 알게 되었다. 술탄은 포위를 풀고 전투 준비를 했다.[16][17]
메안데르 계곡의 좁은 지형 때문에 셀주크 군대는 모든 병력을 효과적으로 배치하기 어려웠다.[18][19] 전투가 시작되자 테오도로스의 라틴 용병 기병대(800명)가 셀주크 군대의 중앙을 향해 맹렬히 돌격했다. 이 공격으로 셀주크 군대의 궁수와 투석병 등이 큰 피해를 입었으나[18][19], 카이후스라우 1세는 병력을 수습하여 수적 우위를 이용해 라틴 용병들을 포위하고 격파했다.[27][28][18][19] 셀주크 군대는 기세를 몰아 니케아 군대의 본진을 공격했고, 니케아 군대는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18][19] 일부 셀주크 군대는 니케아 진영을 약탈하기도 했다.[29]
전투가 혼전 양상으로 흐르던 중, 카이후스라우 1세는 직접 테오도로스 1세를 발견하고 철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말에서 떨어뜨렸다.[30][31] 술탄이 승리를 확신하고 부하들에게 테오도로스를 사로잡으라고 명령하는 순간, 정신을 차린 테오도로스가 술탄이 탄 말의 뒷다리를 베어 그를 땅으로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진 술탄은 곧바로 참수되었다. 누가 술탄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테오도로스 본인, 프랑크 용병, 혹은 이름 모를 측근 등으로 전해진다.[18][20]
술탄의 머리가 창에 꽂혀 높이 들어 올려지자 이를 본 셀주크 군대는 큰 혼란에 빠져 공황 상태로 후퇴하기 시작했다.[18][20] 니케아 군대 역시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잃었기 때문에 패주하는 셀주크 군대를 추격하지는 못했다.[18][20]
전투는 니케아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다. 카이후스라우 1세는 전사했고, 그의 시신은 코니아로 옮겨져 알라엣딘 모스크에 안장되었다.[32] 한편, 전투 중에 포로로 잡힌 전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수도원에 감금되어 은퇴를 강요당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라스카리스는 이 전투에서 패배 직전의 상황을 뒤집고 승리했지만, 그 대가로 니케아 군대는 거의 전멸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18] 이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의 위협을 상당 부분 해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술탄 카이호스로우 1세가 전사하면서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이카우스 1세는 1211년 6월 14일 니케아 제국과 휴전을 맺었고, 이후 1260년대까지 양국 간의 국경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18][21]
전투 중 포로로 잡힌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라스카리스에 의해 폐위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었는데, 이는 라스카리스의 제위에 대한 내부적인 도전을 종식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18] 이 승리는 라스카리스의 명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그러나 전투에서의 막대한 군사적 손실, 특히 핵심 전력이었던 라틴 용병 기병대의 와해는 니케아 제국의 군사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이로 인해 라스카리스는 서쪽의 라틴 제국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린다쿠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일부 영토를 할양해야만 했다.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는 셀주크와 비잔티움계 세력 간의 마지막 대규모 군사 충돌로 기록된다.[18] 이 전투는 소아시아 전체를 장악하려던 셀주크의 시도를 좌절시켰고, 결과적으로 니케아 제국은 라틴 제국과의 경쟁 속에서 세력을 확장할 기반을 다진 반면, 셀주크 세력은 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약 1세기 후 오스만 제국이 부상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소아시아 영토를 완전히 정복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마련되었다.
4. 1. 니케아 제국의 승리와 룸 술탄국의 약화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니케아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셀주크와 비잔티움계 세력 간의 마지막 주요 교전이었다.[18] 술탄 카이후스라우 1세가 전사하면서 룸 술탄국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카이카우스 1세는 1211년 6월 14일 니케아와 휴전을 맺었고, 이후 약 1260년대까지 양국 간의 국경은 거의 침범되지 않았다.[18][21] 술탄의 시신은 코냐로 옮겨져 알라딘 모스크의 왕조 영묘에 안장되었다.[22] 기록에 따르면,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는 술탄의 장례식에 조의금으로 20,000 디르함을 보냈다고 한다.[23]한편, 니케아 제국 역시 이 전투에서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었다. 특히 효과적이었던 라틴 용병 기병대가 거의 전멸하면서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18] 그 결과, 라스카리스는 라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제대로 방어할 수 없었고, 린다쿠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마르마라 해와 접경한 일부 영토를 할양해야 했다. 니케아 제국은 1212년 다비드 콤네노스가 사망하자 그의 영토였던 파플라고니아를 합병하여 이 손실을 일부 만회했다.
전투 중 포로로 잡힌 전임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라스카리스에 의해 황제의 표식을 박탈당하고 니케아의 히아킨토스 수도원에 감금되었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18] 알렉시오스의 포획은 라스카리스의 통치에 대한 내부 반대를 종식시켰으며, 전투 승리와 더불어 라스카리스에게 상당한 명성을 안겨주었다.
궁극적으로 이 전투는 소아시아 전체를 점령하려던 셀주크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니케아 제국은 강화되고 셀주크는 약화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이끄는 튀르크인들이 100여 년 후에 비잔티움의 소아시아를 모두 정복하게 된다.
4. 2. 비잔티움-셀주크 관계의 종식과 오스만 제국의 등장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와 비잔티움 제국(니케아 제국) 사이에 벌어진 마지막 주요 교전으로 평가된다.[18][21] 이 전투를 통해 니케아 제국은 셀주크의 직접적인 군사적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라스카리스는 패배 직전의 위기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전투 과정에서 그의 군대, 특히 핵심 전력이었던 라틴 용병 기병대가 거의 전멸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군사력 손실은 이후 라틴 제국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져, 결국 린다쿠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마르마라해 연안의 일부 영토를 할양하게 된다.한편, 셀주크 측에서는 술탄 카이호스로우 1세가 전사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카이카우스 1세는 1211년 6월 14일 니케아와 휴전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양국 간의 국경은 1260년대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18][21] 또한 전투 중 포로가 된 전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폐위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었는데, 이는 라스카리스의 제위 계승에 대한 내부적인 반대 여론을 잠재우는 데 기여했다.[18]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가 소아시아 전역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비록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과의 경쟁 과정에서 세력을 키우고 셀주크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약 1세기 후 오스만 제국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여 결국 비잔티움 제국의 소아시아 영토를 모두 정복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마련되었다.
5. 역사적 평가
메안데르강의 안티오키아 전투는 니케아 제국이 셀주크 튀르크의 압박에서 벗어나 생존의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 전투는 셀주크와 비잔티움 제국 계승 세력 간의 마지막 주요 교전으로 기록된다.[18][21] 전투의 승리로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그의 장인이자 전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를 포로로 잡아 제위 찬탈의 위협을 제거하고 내부 반대 세력을 잠재울 수 있었다.[18] 알렉시오스 3세는 황제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니케아의 히아킨토스 수도원에 감금되어 생을 마감했다.[18] 또한, 셀주크 술탄 카이쿠스로 1세가 전사하면서 그의 후계자인 카이카우스 1세는 1211년 6월 14일 니케아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이후 약 반세기 동안 양국 간의 국경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18][21] 전투 후, 튀르크족은 술탄의 시신을 코냐로 운반하여 왕조 영묘에 매장했다.[22] 이븐 비비는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가 술탄의 장례식에서 자선금으로 배포하기 위해 20,000 디르함을 기부했다고 전한다.[23]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컸다. 니케아 군대는 전투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전투력이 뛰어났던 라틴 용병 기병대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는 니케아의 군사력을 약화시켜, 동시대의 또 다른 위협이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라스카리스는 린다쿠스 전투 (1211)에서 라틴 제국에 패배하여 마르마라해 연안의 일부 영토를 할양해야만 했다. 다만, 1212년 트라페준타 제국의 다비드 콤네노스가 사망하자 니케아 제국이 그의 영토였던 파플라고니아 지역을 합병하면서 라틴 제국에게 잃었던 영토 손실을 일부 만회할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안티오키아 전투는 셀주크 튀르크의 소아시아 완전 정복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전투 이후 셀주크 세력은 약화되었고, 니케아 제국은 비록 라틴 제국과의 경쟁 속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점차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는 훗날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명맥을 잠시나마 되살리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약 1세기 후, 새롭게 부상한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의 소아시아 영토 전체를 정복하게 되면서 아나톨리아 지역의 패권은 튀르크 세력에게 넘어가게 된다.
참조
[1]
서적
Byzantium and the Turks in the Thirteenth Century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2]
기타
[3]
서적
The Late Byzantine Army: Arms and Society, 1204-1453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97
[4]
간행물
Battle of Antioch on the Meander (1211)
ABC-CLIO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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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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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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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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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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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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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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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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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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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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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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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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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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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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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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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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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23]
기타
[24]
기타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25]
기타
[26]
기타
[27]
문서
‘라틴인’이라는 말은 서유럽 출신의, “그리스(정교회)식” 미사보다는 “라틴(로마 가톨릭)식” 미사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시대 동지중해에서 ‘라틴’이라는 말은 ‘프랑크’를 뜻하기도 했다.
[28]
기타
[29]
기타
[30]
기타
Cambridge Medieval History
[31]
기타
Orationes
[3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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