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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슈코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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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에슈코 3세는 폴란드 분열 시대에 비엘코폴스카 공작이었으며, 1173년 형 볼레스와프 4세가 사망한 후 폴란드 대공이 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 대공위를 차지하고 쫓겨나는 과정을 반복했으며, 아들 오돈의 반란과 잦은 폐위로 권력 유지가 불안정했다. 그는 보헤미아, 포메라니아 등과의 외교적 관계를 통해 폴란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나, 장남 오돈의 반란과 모즈가와 전투 패배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여러 번의 복위 시도 끝에 1202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가 대공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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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에슈코 3세
기본 정보
1145년 미에슈코의 인장
1145년 미에슈코의 인장
이름미에슈코 3세
직위폴란드 대공
통치 기간1173년–1177년, 1191년, 1198년–1199년, 1201년
작위비엘코폴스카 공작
통치 기간1138년–1177년, 1182년–1202년
배우자엘리자베트 헝가리, 에우독시아 키예프
자녀오돈, 스테판, 엘리자베트, 비에르츠코스와 루드밀라, 볼레스와프, 미에슈코, 브와디스와프 3세 스핀들섐크스, 아나스타샤
가문피아스트 왕조
아버지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어머니살로메아 폰 베르크
출생일1122년/1125년경
사망일1202년 3월 13일 (80세)
사망 장소칼리시
매장 장소칼리시 성 바울 사도 대성당

2. 생애

볼레스와프 3세와 베그의 살로메의 아들로, 볼레스와프 3세의 넷째 아들이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유언장을 통해 폴란드를 5개로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상속하고, 크라쿠프령을 장남이 차지하여 폴란드의 대공이 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분열 시대를 맞이했다. 미에슈코 3세는 비엘코폴스카를 물려받아 비엘코폴스카의 공이 되었으며, 이 지역은 그의 후손들에게 상속되었다.

미에슈코 3세는 이복 형 브와디스와프 2세와 갈등하였다. 1173년 동복 형 볼레스와프 4세가 사망한 후 폴란드 대공이 되었으나, 동생 카지미에시 2세에게 추방되었고 비엘코폴스카 공위 역시 장남 오돈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복위 야망을 버리지 않고 1202년 사망할 때까지 4번이나 크라쿠프로 돌아가 대공위를 탈환하고 폐위되기를 반복했다. 1202년 조카 레셰크 1세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에게서 대공위를 빼앗아 4번째 대공이 된 직후 사망했고, 그의 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 라스코노기가 대공위를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

볼레스와프 3세와 베그의 살로메의 아들로, 볼레스와프의 넷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는 나라를 5개로 분할해 아들들에게 상속시키고, 크라쿠프령을 그 중 장남이 차지하고 폴란드의 대공이 된다고 유언장으로 정했다. 이때부터 폴란드는 분열의 시대에 있었다. 미에슈코는 비엘코폴스카를 물려받고 비엘코폴스카의 공이 되었는데, 이 지방은 그의 후손에 의해 상속되었다.[2] 그는 이전에 그의 주요 거처가 있던 포즈난의 공작이었다.[3]

볼레스와프 3세의 아들들이 다스리던 폴란드

  • 블와디스와프 2세의 시뇨레이트(Seniorate) 지역: 동부 대폴란드, 소폴란드, 서부 쿠야비, 비엘룬 지역
  • 블와디스와프 2세의 실레시아 지역
  • 볼레스와프 4세의 마조비아 지역: 마조비아와 동부 쿠야비
  • 미에슈코 3세의 대폴란드 지역: 서부 대폴란드 지역
  • 헨리크의 산도미에르츠 지역
  • 살로메아의 웽치차 지역: 웽치차 지역, 시에라츠 지역
  • 포메라니아의 봉신


1138년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르면, 미에슈코는 새롭게 설립된 대폴란드 공국을 받았으며, 이 공국은 단명했던 대폴란드의 서부 지역을 포함했다.

2. 2. 브와디스와프 2세와의 갈등

볼레스와프 3세와 베그의 살로메의 아들인 미에슈코 3세는 이복 형 브와디스와프 2세와 권력 다툼을 벌였다.[1]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는 폴란드를 5개로 분할해 아들들에게 상속시키고, 크라쿠프령을 장남이 차지하여 폴란드의 대공이 된다고 유언했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분열 시대를 맞이했다.[1]

미에슈코 3세와 브와디스와프 2세의 갈등은 웽치차 지역의 소유권, 폴란드 내 권력 분배, 브와디스와프 2세의 폭정 등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되었다.

2. 2. 1. 첫 번째 갈등

1140년부터 1141년까지, 대공과의 첫 번째 주요 갈등이 발생했다. 미에슈코 3세는 그의 이복형제인 볼레스와프 4세 곱슬머리 공과 함께 어머니 살로메아가 소유하고 있던 웽치차 지역을 대공 뵐라디스와프 2세의 동의 없이 분할했다. 웽치차 지역은 살로메아가 사망한 후 뵐라디스와프 2세의 영지에 반환되어야 했다.[1]

1141년, 살로메아는 웽치차에서 회의를 열고, 그녀의 아들들과 함께 그들의 여동생 아그네스를 키예프 대공 브세볼로트 2세의 아들 중 한 명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는 뵐라디스와프 2세에 대항할 동맹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뵐라디스와프 2세의 빠른 개입으로 이 계획은 실패했다. 브세볼로트 2세는 뵐라디스와프 2세와의 동맹을 선택했고, 1142년 뵐라디스와프 2세의 장남 볼레스와프 1세 고공과 브세볼로트 2세의 딸 즈베니슬라바가 약혼했다. 뵐라디스와프 2세는 아그네스의 약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졌음에도 웽치차 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1142년에서 1143년 겨울, 뵐라디스와프 2세는 살로메아와 그녀의 아들들에 대한 키예프 루스의 군사 행동을 지원했다. 형제들 간의 첫 번째 충돌은 뵐라디스와프 2세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1]

2. 2. 2. 두 번째 갈등

1144년 7월 27일,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의 미망인이자 볼레스와프 4세 곱슬머리 공과 미에슈코 3세의 어머니인 살로메아 폰 베르크가 사망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라 웽치차 영지는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의 수장령에 편입되어야 했지만, 볼레스와프 4세와 미에슈코 3세는 이 영지를 어린 동생 헨리크에게 주고자 했다. 이로 인해 1145년에 전투가 벌어졌고,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은 브와디스와프 2세는 키예프 대공국 동맹국의 도움으로 결국 승리했다(필리치 전투).[2]

브와디스와프 2세는 웽치차를 유지하는 데는 합의했지만, 모든 폴란드를 자신의 통치하에 재통합하려는 의도를 굽히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소공작들의 이익을 지지했던 실레시아의 보이보드 표트르 브워스토비츠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브와디스와프 2세는 아내 바벤베르크의 아그네스의 사주를 받아 브워스토비츠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브워스토비츠는 매복에 걸려 체포되었고, 아그네스는 그를 반역죄로 처형할 것을 요구했지만, 브와디스와프 2세는 브워스토비츠의 눈을 멀게 하고 벙어리로 만든 뒤 추방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이 잔혹한 행위는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고, 브워스토비츠는 키예프 궁정으로 도망쳐 브와디스와프 2세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이는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2]

2. 2. 3. 세 번째 갈등 및 블라디슬라프 2세의 망명

표트르 브워스토비츠를 처벌한 블라디슬라프 2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 야콥에게 파문당하고 지지 기반을 잃었다. 자신의 폭정에 반발한 신민들의 봉기까지 일어났다. 1146년 5월, 폴란드 전역이 젊은 공작들에게 넘어가자, 블라디슬라프 2세 부부는 보헤미아를 거쳐 독일 알텐부르크의 콘라트 3세 궁정으로 망명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대공이 되어 슐레지엔을 다스렸고, 미에슈코 3세는 대폴란드 공국을 유지하며 형의 동맹자로 남았다. 헨리크는 산도미에시 공국을 받았지만, 막내 정의공 카지미에시 2세는 영지를 받지 못했다.

콘라트 3세는 블라디슬라프 2세를 복위시키려 했으나, 결국 볼레스와프 4세의 통치를 인정하고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제2차 십자군 때문에 해결되지 못했다.

3. 폴란드 대공 즉위

볼레스와프 3세와 베그의 살로메의 넷째 아들인 미에슈코 3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비엘코폴스카를 물려받아 비엘코폴스카의 공작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은 나라를 5개로 분할해 아들들에게 상속시키고, 크라쿠프 영지를 장남이 다스리며 폴란드 대공이 되도록 정했기 때문에, 폴란드는 분열의 시대를 맞이했다.

1173년, 이복 형 볼레스와프 4세가 사망하자 미에슈코 3세는 폴란드 대공이 되었으나, 동생 카지미에시 2세에 의해 쫓겨나고 장남 오돈에게 비엘코폴스카 공작위마저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위하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고 1202년 사망할 때까지 네 번이나 크라쿠프로 돌아와 대공위를 탈환하고 폐위되기를 반복했다. 1202년, 조카 레셰크 1세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에게서 대공위를 빼앗아 네 번째로 대공이 되었으나, 곧 사망했다. 그의 막내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가 대공위를 계승했다.

3. 1. 대공 즉위

볼레스와프 4세가 1173년 4월 3일 사망한 후, 미에슈코 3세는 아그나틱 선거 원칙에 따라 폴란드의 새로운 대공(dux Totius Poloniae)이 되었다.[1] 그는 왕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었다.[1] 새 대공은 대폴란드에 머물렀고, 소폴란드는 미에슈코가 임명한 총독 헨리크 키에트리치가 통치했다.[1] 가혹한 세금 정책은 소폴란드 마그나트들의 불만을 샀다.[1]

3. 2. 정책

미에슈코 3세는 1173년 형 볼레스와프 4세가 사망한 후, 아그나틱 선거 원칙에 따라 폴란드의 대공(dux Totius Poloniae)이 되었다. 그는 왕조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었다. 크라쿠프에서 왕위에 올랐지만, 실제로는 대폴란드에 머물렀고, 소폴란드는 미에슈코가 임명한 총독 헨리크 키에트리치가 통치했다. 미에슈코 3세는 가혹한 세금 정책을 시행하여 소폴란드 마그나트들의 불만을 샀다.

한편, 미에슈코 3세는 딸들의 결혼을 통해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엘리자베스는 1173년경 보헤미아의 소베슬라프 2세와 결혼했고, 딸 아나스타샤와 그리핀 공작 포메라니아의 보기슬라프 1세 사이의 결혼을 통해 포메라니아 공국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강화했다.

3. 3. 외교적 성과

미에슈코 3세는 딸들의 결혼을 통해 여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1173년경, 딸 엘리자베스는 보헤미아의 소베슬라프 2세와 결혼하였다. 딸 아나스타샤는 그리핀 공작 포메라니아의 보기슬라프 1세와 결혼하여, 미에슈코 3세는 포메라니아 공국에 대한 폴란드의 주권을 강화했다.

4. 폐위와 망명 생활

1173년, 동복 형 볼레스와프 4세가 사망하자 폴란드 대공이 되었으나, 동생 카지미에시 2세와 장남 오돈의 반란으로 대공위에서 쫓겨났다.[3] 이후 복위의 야망을 버리지 않고, 1202년 사망할 때까지 4번이나 크라쿠프로 돌아가 대공위를 탈환하고 폐위되기를 반복했다. 1202년, 조카 레셰크 1세로부터 대공위를 빼앗아 4번째 대공이 된 직후 사망했다.

4. 1. 오돈의 반란

1177년 미에슈코 3세의 장남 오돈은 자신의 상속권을 우려하여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크라쿠프의 게드코 주교, 사촌 볼레스와프 1세, 삼촌 카지미르 2세의 지원을 받았다.[3] 오돈이 반란을 일으킨 주된 이유는 미에슈코 3세가 두 번째 결혼에서 낳은 자식들을 편애하고, 오돈을 상속에서 제외하기 위해 사제로 만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었다.[3] 다른 반란자들에게는 대공의 가혹하고 독재적인 통치가 반란의 이유였다.[3]

이 반란은 미에슈코 3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1177년 부활절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친척들의 충성을 완전히 확신했고, 특히 어린 공작들이 그니에즈노에서 회의를 열었을 때, 대공은 군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3]

반란의 명확한 지도자인 카지미르 2세는 동맹들과 분할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모든 실레지아는 볼레스와프 1세에게, 대폴란드는 오돈에게 주어졌다.[3]

4. 2. 망명

1179년, 미에슈코 3세는 사위인 소베슬라프 2세가 통치하는 보헤미아로 갔지만, 소베슬라프 2세는 미에슈코 3세를 돕기를 거부했다.[2] 이후 미에슈코 3세는 독일로 가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바르바로사는 폴란드 왕위 복귀 대가로 은 1만 개를 요구했지만, 미에슈코 3세는 그 액수를 모을 수 없었다.[2] 결국 포메라니아의 또 다른 사위인 보기슬라프 1세 공작이 그를 돕기로 동의했다.[2] 포메라니아 동맹의 도움으로, 미에슈코 3세는 그니에즈노 대주교인 Zdzisław를 중심으로 뭉친 폴란드 추종자들과 연대했고, 1181년에는 당시 시니어 영토의 일부였던 그니에즈노와 칼리슈를 포함한 동부 대폴란드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2]

5. 복위와 권력 유지

볼레스와프 3세와 베르크의 살로메의 넷째 아들인 미에슈코 3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비엘코폴스카를 물려받아 비엘코폴스카 공작이 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은 나라를 5개로 분할해 아들들에게 상속하고, 크라쿠프령을 장남이 차지하여 폴란드의 대공이 되도록 정했기에, 폴란드는 분열의 시대에 있었다.

1173년 동복 형 볼레스와프 4세가 사망한 후 폴란드 대공이 되었으나, 동생 카지미에시 2세에 의해 추방되고 비엘코폴스카 공위도 장남 오돈에게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에슈코 3세는 복위 야망을 버리지 않고, 1202년에 죽을 때까지 4번이나 크라쿠프에 돌아와 대공위의 탈환과 폐위를 반복했다.

1173년, 미에슈코 3세는 아그나틱 선거 원칙에 따라 폴란드의 새로운 대공(dux Totius Poloniae)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맞추었다. 크라쿠프에서 왕위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대폴란드에 머물렀고, 소폴란드는 미에슈코가 임명한 총독 헨리크 키에트리치가 통치했다. 가혹한 세금 정책은 소폴란드 마그나트들의 불만을 샀다. 한편, 미에슈코는 딸들의 결혼을 통해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엘리자베스는 1173년경 보헤미아의 소베슬라프 2세와 결혼했고, 아나스타샤는 그리핀 공작 포메라니아의 보기슬라프 1세와 결혼하여 미에슈코는 포메라니아 공국에 대한 폴란드 주권을 강화했다.

1177년, 장남 오돈은 자신의 상속권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크라쿠프의 게드코 주교, 사촌 볼레스와프 1세, 삼촌 카지미르 2세 정의공의 지원을 받았다. 반란의 또 다른 이유는 대공의 가혹하고 독재적인 통치였다. 헨리크 키에트리치 총독 등의 추종자 덕분에 대폴란드는 미에슈코의 손에 강력하게 남아 있었으나, 카지미르 2세 정의공이 선임 영토를 장악하여 폴란드의 새로운 대공으로 선포되었다. 미에슈코는 저항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라치부시로 도망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폴란드를 떠나 외국 지원을 구했다.

1184년, 미에슈코 3세는 하인리히 6세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카지미에시 2세가 더 많은 돈을 하인리히 6세에게 보내 무산되었다.

1186년, 레셰크가 사망하자 카지미에시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미에슈코 3세는 쿠야비아 공작령을 점령하여 자신의 공작령에 병합하고, 아들 볼레스와프에게 양도했다.

1202년, 미에슈코 3세는 조카 레셰크 1세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로부터 대공위를 빼앗아 4번째 대공이 되었으나 직후 사망했다.

5. 1. 대폴란드 회복

미에슈코 3세는 1179년 사위 소베슬라프 2세가 통치하는 보헤미아로 갔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다. 이후 독일로 가서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폴란드 왕위 복귀 대가로 요구한 은 1만 개를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또 다른 사위인 포메라니아 공작 보기슬라프 1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포메라니아 동맹의 도움으로 미에슈코는 폴란드 추종자들과 연대했고, 이들은 그니에즈노 대주교인 Zdzisław를 중심으로 뭉쳤다. 1181년에는 당시 시니어 영토의 일부였던 그니에즈노와 칼리슈를 포함한 동부 대폴란드 지역을 정복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에슈코는 서부 대폴란드도 회복했고, 오돈은 오브라강 남쪽 지역으로 밀려났다. 1182년에는 부자 간의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들 동안, 알 수 없는 이유로 최고 공작 카지미르 2세는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고, 이로 인해 미에슈코는 모든 대폴란드를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미에슈코 3세 시대의 대폴란드


5. 2. 권력 회복 시도

1184년, 미에슈코 3세는 하인리히 6세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하여 많은 양의 은을 제공했다. 그러나 당시 최고 공작이었던 카지미에시 2세는 이 사실을 알고 미에슈코 3세보다 더 많은 돈을 하인리히 6세에게 보냈다.

5. 3. 쿠야비아 점령

1186년 레셰크가 사망하자 카지미르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미에슈코 3세는 쿠야비아 공작령을 점령하여 자신의 공작령에 병합했다. 이후 미에슈코 3세는 쿠야비아를 자신의 아들 볼레스와프에게 양도했다.

6. 재집권과 말년

1173년 동복 형 볼레스와프 4세가 사망하면서 폴란드 대공이 되었으나, 동생 카지미에시 2세에게 쫓겨나고 비엘코폴스카 공작위도 장남 오돈에게 빼앗겼다. 그러나 복위 야망을 버리지 않고 1202년 사망할 때까지 4번이나 크라쿠프로 돌아와 대공위를 탈환하고 폐위되기를 반복했다. 1166년에는 형제들과 함께 프로이센 십자군에 참여하기도 했다.

1193년 아들 미에슈코 젊은 공이 사망하자 칼리시 공국을 대폴란드 영토로 반환했다. 그 직후 칼리시를 장남 오돈에게 양도했으나, 오돈은 8개월 후인 1194년 사망했다. 미에슈코 3세는 칼리시는 자신이 보유하고, 남부 대폴란드는 막내아들 블와디스와프 3세 스피들생크에게 주었으며, 오돈의 어린 아들 블와디스와프 오도니치의 후견인이 되었다.

1202년 조카 레셰크 1세에게서 대공위를 빼앗아 4번째 대공이 되었지만, 곧 사망했다. 그의 막내아들 브와디스와프 3세가 대공위를 계승했다.

6. 1. 재집권

1191년, 대공 카지미에시 2세의 외교 정책으로 소폴란드 귀족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미에슈코의 전 총독 헨리 키에틀리츠를 중심으로 결집했다. 미에슈코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크라쿠프를 재정복하고 대공 칭호를 되찾았다. 그는 크라쿠프 통치를 아들 볼레스와프 또는 미에슈코 젊은 공 중 한 명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나 카지미에시는 곧 크라쿠프와 종주권을 되찾았고, 섭정은 포로로 잡혔지만 곧 풀려나 아버지에게 돌아갔다.

6. 2. 모즈가와 전투

1195년 9월 13일에 벌어진 모즈가와 전투에서 미에슈코 3세는 레셰크 1세 백공과 마조비아의 콘라트 1세를 지지하는 소폴란드 귀족 연합군과 맞붙었다. 미에슈코 3세는 이 전투에서 권력을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아들 쿠야비아의 볼레스와프는 전사했다. 미에슈코 3세는 동맹군을 기다리지 않고 칼리시로 후퇴했다.

6. 3. 최종 합의

모즈가와 전투 이후, 미에슈코 3세는 전투를 통해 왕위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대공의 미망인인 즈노이모의 헬레나와 협상을 시작했다. 1198년에 그는 마침내 소폴란드(Lesser Poland)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쿠야비를 카지미에시 2세의 아들들에게 양도해야 했다.

1199년, 보이보드(Voivode) 미코와이 그리피타와 크라쿠프 주교 풀코는 다시 미에슈코를 폐위시키고 레셰크 1세 백공을 대공으로 복위시켰다. 그러나 3년 후 새로운 협상이 이루어졌고 미에슈코는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대공의 칭호를 유지했지만, 그의 권력의 일부를 포기해야 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 당시 그는 모든 형제와 아들들을 잃었지만, 그의 뒤를 이어 폴란드 대공이자 대폴란드 공작이 된 브와디스와프 3세 스피넬생크스는 살아남았다.

7. 가족 관계

미에슈코 3세는 두 번 결혼했다. 1140년경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딸 엘제베트와 결혼했고, 1154년경에는 키예프 대공 이자슬라프 2세의 딸 에우독시아와 재혼했다.[2]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결혼과 자녀"를 참고하라.

7. 1. 결혼과 자녀

미에슈코 3세는 1136년경 헝가리 국왕 벨라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처음 결혼했다.[2]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다음 자녀들을 두었다.

이름출생 - 사망비고
오돈1149년경 출생 – 1194년 4월 20일 사망
스테판1150년경 출생 – 1166/77년 10월 18일 사망
엘리자베트1152년 출생 – 1209년 4월 2일 사망1173년경 보헤미아 공작 소베슬라프 2세와 결혼, 1180년 1월경 루사티아 변경백 콘라트 2세와 재혼
비에르호스와바 루드밀라1153년 이전 출생 – 1223년 이전 사망1167년경 로렌 공작 프레데리크 1세와 결혼
유디트1154년 이전 출생 – 1201년 12월 12일 이후 사망1173년경 안할트 백작 베른하르트와 결혼 (이후 작센 공작이 됨)



1154년, 미에슈코 3세는 키예프 대공 이쟈슬라프 2세의 딸로 추정되는 키예프의 에우독시아와 재혼했다.[2] 에우독시아와의 사이에서 다음 자녀들을 두었다.

이름출생 - 사망비고
볼레스와프1159년 출생 – 1195년 9월 13일 사망모즈가와 전투에서 사망
미에슈코 젊은 공작1160/65년경 출생 – 1193년 8월 2일 사망
브와디스와프 3세1161/67년경 출생 – 1231년 11월 3일 사망
살로메아1162/64년경 출생 – 1183년 5월 11일경 사망1177년 이전 포메라니아의 라티보르 (2세) 공과 결혼
아나스타시아1164년경 출생 – 1240년 5월 31일 이후 사망1177년 4월 26일 포메라니아의 보기슬라프 1세 공작과 결혼


참조

[1] 웹사이트 Mieszko III | Polish prince http://www.britannic[...]
[2] 웹사이트 Mieszko III Stary https://www.academia[...] Academia.edu
[3] 문서 Encyclopædia Britannica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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