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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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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레스와프 3세는 1086년 출생하여 1138년 사망한 폴란드 공작으로, "입이 비뚤어진 자"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의 아들이자 관대한 볼레스와프 2세의 조카였으며, 1102년 아버지의 사후 폴란드를 동생 즈비그니에프와 분할 통치했다. 이후 1106년 내전을 통해 즈비그니에프를 몰아내고 폴란드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포메라니아 정복, 덴마크 및 신성 로마 제국과의 외교, 헝가리, 키예프 루스와의 동맹을 통해 폴란드의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포메라니아의 기독교화에 힘썼으며, 자신의 영토를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하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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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볼레스와프 3세의 유해 기반 안면 복원 (1972년)
작위폴란드 공작
통치 기간1107년–1138년
이전 통치자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다음 통치자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
출생일1086년 8월 20일
출생지프워츠크, 폴란드
사망일1138년 10월 28일
사망지소하체프, 폴란드
매장지마조비안 성모 마리아 대성당, 프워츠크, 폴란드
배우자 1키예프의 즈비스와바
배우자 2베르크의 살로메아
자녀더보기...
가문피아스트 가문
아버지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
어머니보헤미아의 유디트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이름
폴란드어Bolesław III Krzywousty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가족
자녀 목록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
리체자
볼레스와프 4세 곱슬머리
미에슈코 3세 늙은이
도브로니에가 루드그라다
유디트
헨리크
아그네슈카
카지미에시 2세 유스티

2. 유년 시절

2. 1. 1080년대 폴란드의 상황

1086년, 보헤미아의 국왕 브라티슬라프 2세의 대관식과 헝가리 국왕 라슬로 1세와의 동맹은 폴란드 통치자인 공작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의 지위를 위협했다.[6][7] 따라서 그해 브와디스와프 1세는 볼레스와프 2세 용감공의 유일한 아들이자 폴란드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인 미에슈코 볼레스와보비치를 헝가리 추방에서 소환해야 했다. 젊은 볼레스와보비치는 귀국 후 삼촌의 종주권을 받아들이고, 그를 계승하는 조건으로 폴란드 왕위에 대한 세습적 권리를 포기했다.[8] 그 대가로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은 조카에게 크라쿠프 지역을 하사했다.[9]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에게 상황은 적법한 남자 상속자가 없다는 점으로 더욱 복잡해졌는데, 그의 장남 즈비그니에프는 교회에서 인정하지 않은 관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10][11] 미에슈코 볼레스와보비치가 폴란드로 돌아오면서 브와디스와프 1세는 헝가리 왕국 및 키예프 루스와의 관계를 정상화했다(1088년에 미에슈코 볼레스와보비치와 키예프 공주의 결혼이 성사되었다).[12] 이러한 조치로 헤르만은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국제 문제의 긴장을 완화할 수 있었다.[13]

2. 2. 출생과 이름

볼레스와프 3세는 1086년 8월 20일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1세의 날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35] 그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어머니 보헤미아의 유디트는 후손을 얻기 위해 생 질 수도원에 많은 선물을 보냈고, 유디트는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해 12월 24일 또는 25일에 사망했다.[14][15][16][18][25]

볼레스와프의 출생일은 어머니 유디트의 사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여러 사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갈루스 아노니무스는 유디트가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의 날에 볼레스와프를 낳았고, "성탄절 밤"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다.[18] 프라하의 코스마스는 볼레스와프가 유디트의 사망 3일 전에 태어났다고 기록했지만, 유디트의 사망 연도를 1085년으로 잘못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19][25] 『크라쿠프 달력』, 생 질 수도원의 부고, 『크라쿠프 대성당 연감』은 유디트의 사망을 1086년 12월 24일로 기록했다.[20][22][23]

볼레스와프의 이름은 그의 삼촌인 관대한 볼레스와프 2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36] 그의 별명 "입이 비뚤어진 자"(pl: ''Krzywousty'')는 13세기 자료부터 나타나며, 12세기에 그의 신체적 특징과 관련하여 붙여졌을 것으로 추정된다.[36] 1972년 플로츠크에서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된 유골의 턱뼈가 변형되어 있어, 이 별명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41][42]

2. 3. 초기 생애

볼레스와프 3세의 출생 이후, 폴란드의 정치적 상황은 급변했다. 당시 17세였던 미에슈코 볼레스와보비츠가 왕위 계승 서열 1순위였으나, 1089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48] 같은 해,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의 맏아들 즈비그니에프는 작센의 퀘들린부르크 수도원으로 보내졌다.[49] 이는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즈비그니에프를 수도승으로 만들어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려는 의도였다.[50][51]

이로써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 두 명이 제거되면서, 볼레스와프 3세의 왕위 계승은 보장되었고, 귀족들의 반발도 줄어들었다.[52]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은 즉위 직후 귀족들에게 실질적인 통치권을 자작 팔라틴 시에체흐에게 넘겨주도록 강요받았다.[53]

이 무렵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은 유디트-마리아와 재혼했다. 유디트-마리아는 황제 헨리 3세의 딸이자 헝가리 왕 헝가리의 솔로몬의 미망인이었다. 유디트-마리아는 결혼 후 '소피아'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이 결혼으로 볼레스와프 3세는 여러 명의 이복 누이를 얻게 되었다. 새로운 공작 부인은 시에체흐가 폴란드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54]

3. 청년 시절

3. 1. 시에치흐의 폴란드 내 지위

1090년, 시에치 휘하의 폴란드군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장악했지만, 몇 달 후 토착 엘리트들의 반란으로 인해 이 지역은 폴란드로부터 독립을 회복했다.[55] 이듬해에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되찾기 위해 징벌 원정이 조직되었고, 브다 강 전투에서 폴란드 기사단은 보헤미아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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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공작은 시에치의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폴란드에서 대규모 이주가 일어나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57][58]

3. 2. 국가 분할

시에치와 유디트 소피아 공작 부인이 나라를 장악하려는 계획을 즈비그니에프가 발견하고, 어린 볼레스와프와 동맹을 맺었다.[64] 두 형제는 정부의 고삐를 자신들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블라디슬라프 1세 헤르만은 형제들에게 왕국을 나누어주기로 동의하여[64] 각자 자신의 영지를 부여받았다. 블라디스와프 1세는 마조비아와 수도 프워츠크를 계속 통제했고, 브로츠와프, 크라쿠프, 산도미에시와 같은 가장 중요한 도시들도 계속 통제했다.[65][66] 즈비그니에프는 대폴란드, 그니에즈노, 쿠야비아, 웽치차, 시에라츠를, 볼레스와프는 소폴란드, 실레시아, 루부스를 받았다.[67]

볼레스와프와 즈비그니에프의 공동 통치 하에 국가가 분할되자 시에치는 크게 경계했고, 형제들을 완전히 제거할 준비를 시작했다.[68] 시에치는 국가 분할이 자신의 지위를 약화시킬 것이라고 이해했다.[68]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군사적 해결을 시작했고, 공작의 지지를 얻었다.[69] 블라디슬라프 1세는 그의 아들들 대신 시에치의 대의를 지지하기로 선택했다.[70]

3. 3. 시에치흐와의 싸움

볼레스와프와 즈비그니에프는 시에치흐의 준비에 대응하여 브로츠와프에서 스카르비미르가 조직한 민회에서 동맹을 맺었다.[68] 1099년, 필리차 강 근처 자르노비에츠에서 즈비그니에프와 볼레스와프의 군대는 시에치흐의 군대를 격파했고, 블라디슬라프 1세 헤르만은 시에치흐를 팔라틴 직에서 영구적으로 제거해야 했다.[68] 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볼레스와프는 자테츠에서 보헤미아와 단기간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71] 코스마스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삼촌인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2세의 미에치니크로 임명되었고, 보헤미아에 매년 100개의 고급 은화와 10 탈렌트의 금을 조공으로 지불해야 했다.[72]

반군 세력은 팔라틴이 피신한 시에치후프로 향했다.[73] 공작들은 아버지를 폐위시키기로 결정하고, 플로츠크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블라디슬라프 1세 헤르만의 군대를 패배시켰다.[74] 그 후 공작은 시에치흐를 추방해야 했다.[74] 시에치흐는 1100/1101년경에 폴란드를 떠나[68] 독일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 폴란드로 돌아왔으나 다시는 정치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53] 그는 눈이 멀었을 수도 있다.[53]

4. 통치 초기

1102년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사망하면서, 폴란드는 그의 아들들인 즈비그니에프와 볼레스와프 3세 간에 분할 통치되었다.[75] 즈비그니에프는 마조비아를 포함한 북부를, 볼레스와프 3세는 남부를 통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사실상 두 개의 분리된 국가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76][77] 즈비그니에프는 볼레스와프 3세보다 경험이 많았기에 폴란드의 ''군주(princeps)'' 역할을 하고자 했다.[78]

두 형제는 서로 다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즈비그니에프는 포메라니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와 프로이센으로 여러 차례 침략을 감행했다.[75] 1102년 가을, 볼레스와프 3세는 비아오가르드를 약탈했다.[80] 이에 포메라니아인들은 보복 공격을 가했지만, 즈비그니에프의 영토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즈비그니에프는 볼레스와프 3세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보헤미아의 보르지보이 2세와 동맹을 맺고 조공을 약속했다.[79]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 루스헝가리와 동맹을 맺었다. 1103년 즈비슬라바 키예프와의 결혼을 통해 스비아토폴크 2세와의 동맹을 강화했다.[81] 또한 교황 파스칼 2세를 인정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반대했다.[82]

즈비그니에프는 볼레스와프 3세와 키예프의 동맹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보르지보이 2세를 매수하여[83] 폴란드를 침략하게 했다.[84] 볼레스와프 3세는 1103년 포메라니아 (코워브제크 전투[85])와 1104년~1105년 모라비아 원정으로 보복했다.[86][87] 스카르비미르는 보르지보이 2세를 매수하여 짧은 평화를 맺었고, 보르지보이 2세는 즈비그니에프와의 동맹을 파기했다.[83]

1104년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 왕위 분쟁에 개입하여 알모스를 지원했으나, 알모스가 칼만과 화해하면서 헝가리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1105년 칼만과 조약을 맺었다.[88] 같은 해 볼레스와프 3세는 즈비그니에프와 합의를 보았으나,[87] 1년 후 즈비그니에프가 포메라니아와의 전투에서 지원을 거부하면서 조약은 파기되었다.[92]

1106년, 볼레스와프 3세는 헝가리와 키예프의 도움을 받아 즈비그니에프의 영토를 공격하여 내전을 시작했다.[93] 칼리슈, 그니에즈노, 스피치미에르즈, 웽치차 등 주요 도시를 점령하고,[94] 웽치차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95] 즈비그니에프는 볼레스와프 3세를 폴란드의 최고 공작으로 인정했지만, 마조비아를 봉토로 유지했다.[96]

4. 1. 패권 다툼 (1102–06)

1102년 6월 4일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이 사망한 후,[75] 폴란드 국가는 즈비그니에프와 볼레스와프가 다스리는 두 개의 주로 나뉘었다. 즈비그니에프는 수도가 플로츠크인 마조비아를 포함한 북부를, 볼레스와프는 남부를 통치했다.[76] 이로 인해 사실상 두 개의 분리된 국가가 만들어졌다.[77] 즈비그니에프는 볼레스와프보다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폴란드의 ''군주(princeps)'' 또는 종주국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78]

두 형제는 각자 다른 외교 정책을 펼쳤다. 즈비그니에프는 포메라니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나, 볼레스와프는 포메라니아와 프로이센으로 여러 차례 습격을 감행했다.[75] 1102년 가을, 볼레스와프는 비아오가르드를 약탈했다.[80] 이에 포메라니아인들은 폴란드 영토로 보복 공격을 했지만, 즈비그니에프의 영토를 공격하여 피해를 입혔다. 즈비그니에프는 볼레스와프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보헤미아의 보르지보이 2세와 동맹을 맺고 조공을 약속했다.[79]

볼레스와프는 키예프 루스헝가리와 동맹을 맺었다. 1103년 즈비슬라바 키예프와의 결혼으로 스비아토폴크 2세와의 동맹을 굳혔다.[81] 또한 교황 파스칼 2세를 인정하여 신성 로마 제국에 반대했다.[82]

즈비그니에프는 볼레스와프와 키예프의 동맹을 위협으로 간주하고, 보르지보이 2세를 매수하여[83] 폴란드를 침략하게 했다.[84] 볼레스와프는 1103년 포메라니아 (코워브제크 전투[85])와 1104~05년 모라비아 원정으로 보복했다.[86][87] 스카르비미르는 보르지보이 2세를 매수하여 짧은 평화를 맺었고, 보르지보이 2세는 즈비그니에프와의 동맹을 끝냈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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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 폴란드의 유일한 통치자

1109년 나크워 전투에서 포메라니아인을 격파하고 포메라니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 군을 격파하고, 원정에 참여했던 이복 형제 즈비그니에프도 물리쳤다. 그러나 1135년에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하게 되었고, 황제는 헌납된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 1132년부터 1135년까지 헝가리 원정을 행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104][105][106][107][108][109][94][101][95]

서거 전인 1138년에 유언장을 발표하여 국토를 4분할하여 아들들에게 계승하게 했다. 피아스트 가문의 연장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고, 크라쿠프를 수도로 삼아, 로마 황제에게 바친 포메라니아를 관리하도록 했다. 이 연장자 상속제는 곧 무시되었고, 200년 가까이 분열 시대가 지속되었다.

4. 2. 1. 보헤미아로의 첫 번째 원정과 즈비그니에프의 추방

1107년 볼레스와프 3세는 동맹인 헝가리의 콜로만 왕과 함께 보헤미아를 침공하여 스바토플루크가 체코 왕위를 차지하도록 돕고 폴란드의 남쪽 이익을 확보하려 했다.[97] 이 원정은 완전히 성공하여, 1107년 5월 14일 스바토플루크는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다.[98]

1107~1108년 겨울, 볼레스와프 3세는 키예프와 헝가리 동맹의 도움을 받아 형 즈비그니에프를 처벌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즈비그니에프가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푸와비 근처 쿠루프의 요새 중 하나를 불태우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99] 또 다른 이유는 즈비그니에프가 봉신으로서 포메라니아에 대한 볼레스와프 3세의 원정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지 못해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볼레스와프 3세의 군대는 마조비아를 공격하여 즈비그니에프를 신속하게 항복시켰다. 이후 즈비그니에프는 국외로 추방되었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프라하로 피신하여 스바토플루크의 지원을 받았다.[100] 그 이후 볼레스와프 3세는 폴란드 영토의 유일한 군주가 되었지만,[94][101] 사실 그의 종주권은 즈비그니에프가 봉건 영주로서 그에게 경의를 표한 1107년에 시작되었다.[95]

4. 2. 2. 1109년 폴란드-독일 전쟁

볼레스와프 3세의 공격적인 외교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는 1109년에 폴란드를 침공했으며,체코인들이 보헤미아 공작 스바토플루크의 지원을 받아 참전했다.[104] 표면상의 전쟁 명분은 즈비그니에프를 그의 이전 지위로 복귀시키는 것이었다. 황제는 볼레스와프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으나, 볼레스와프는 하인리히의 요구를 거부했다. 제국과 폴란드 사이의 협상 동안, 폴란드 통치자는 포메라니아와의 전쟁 중에 있었다. 오데르 강 서쪽에서, 하인리히 5세는 폴란드에 대한 원정을 위해 기사들을 급히 소집했다.[105] 포메라니아에서의 전투가 끝나기 전에, 독일군은 Głogów에 접근할 수 있었다.[106]

군사 작전은 주로 폴란드 남서부의 실레시아에서 진행되었으며, 하인리히 5세의 군대는 글로고프, 브로츠와프 및 비톰 오드잔스키의 주요 도시들을 포위했다. 볼레스와프는 도시 방어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그의 동맹군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그는 1109년 8월 24일에 군츠펠트 전투에서 원정군을 격파했다고 전해지지만,[105][107] 이 전투의 존재는 약 1세기 후에 처음 기록되었기 때문에 역사가들에 의해 의심받고 있다.[108][109]

4. 2. 3. 보헤미아로의 두 번째 원정

1110년 볼레스와프 3세보헤미아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감행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의도는 망명하여 폴란드에 있던 소베슬라프 1세를 체코 왕위에 앉히는 것이었다.[110] 그는 이 원정에서 1110년 10월 8일 트루티나 전투에서 체코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111] 이후 군대에 철수를 명령했다. 그 이유는 소베슬라프 1세가 체코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볼레스와프가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더 이상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111년, 폴란드와 제국 간의 휴전이 체결되어 즈비그니에프는 폴란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112] 1112년, 볼레스와프는 즈비그니에프의 눈을 멀게 했다.[117]

4. 2. 4. 파문

즈비그니에프의 실명은 볼레스와프의 신하들 사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니에즈노의 마르틴 1세 대주교는 이복 형제를 실명시킨 죄로 볼레스와프를 파문한 것으로 여겨진다.[119] 파문은 볼레스와프의 모든 신하들에게 복종의 의무를 면제했다. 공작은 볼레스와프 1세(용감공)를 폐위시켰던 것과 같은 종류의 봉기의 실제 가능성에 직면했다. 위태로운 상황을 인식한 볼레스와프는 고위 사제와의 화해를 위한 관례적인 참회를 구했다. 익명의 갈루스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먼저 40일 동안 금식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했다.

:: (...)''그는 재와 자루 옷 위에서, 눈물과 흐느낌 속에서 잠을 잤으며, 사람들과의 교류와 대화를 거부했다.''[120]

볼레스와프가 이렇게 한 것은 약화된 권위를 재건하고 즈비그니에프의 지지자들의 호의를 얻기 위한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121] 이복 형제의 실명은 폴란드 사회에서 공공 질서의 핵심 기반인 통치 왕조 구성원 간의 연대 원칙 위반으로 인식되었을 수 있다.[122]

헝가리 솜여르바르에 있는 성 질 수도원 폐허.


갈루스에 따르면 볼레스와프는 또한 이복 형제에게 용서를 구하고 받았다. 참회의 다음 부분에서, 공작은 헝가리로 순례를 떠나 솜여르바르의 성 질 수도원과 세케슈페헤르바르의 성 이슈트반 1세 수도원을 방문했다. 성 질 수도원으로의 순례는 또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볼레스와프는 아르파드 왕조와의 우정과 동맹 관계를 강화했다.[123] 폴란드로 돌아온 후, 볼레스와프는 심지어 그니에즈노로 가서 프라하의 아달베르트의 무덤에서 더 많은 참회를 했으며, 그곳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성직자들은 공작으로부터 많은 값비싼 선물을 받았다.[124] 이 후에야 비로소 파문이 최종적으로 해제되었다.[125] 참회 후 폴란드 공작은 교회에 대한 모호한 약속을 했다.[126]

5. 포메라니아 정복과 개종

1109년 나크워 전투에서 포메라니아인을 격파하고 포메라니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 군을 격파하고, 원정에 참여했던 이복 형제 즈비그니에프도 물리쳤다. 그러나 1135년에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하게 되었고, 황제는 헌납된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128]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 정복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볼레스와프 3세의 정치적 목표는 노테치 강을 따라 폴란드 국경을 강화하고 포메라니아를 복속시키는 것이었다.[129] 1113년까지 산토크, 비엘렌, 나크워, 차르눈, 우이시체, 비슈오그루트 등을 요새화하여 북부 국경을 강화했다.[129][130]

볼레스와프 3세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포메라리아)로 확장하기 전, 1114년 니사 크워츠카 강 경계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보헤미아와의 정치적 관계를 정상화했다.[103] 이 회의에는 프르제미슬 왕조의 보헤미아 공작인 블라디슬라프 1세, 오토 2세, 소베슬라프 1세가 참여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잘로메아 폰 베르크와 결혼하여 이 조약을 체결했다.[131][132]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한 후, 볼레스와프 3세는 1115년 프로이센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하여 폴란드의 북동쪽 국경을 확보했다.[133] 이를 통해 볼레스와프 3세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침공할 수 있게 되었다.[133] 1115년부터 1119년까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정복은 이전 폴란드 통치자들의 오랜 목표, 즉 나크워 카스텔라니를 포함한 비스와 강 유역의 영토를 폴란드에 완전히 병합하는 것을 달성했다.[134][135] 폴란드 공국의 북쪽 경계는 아마도 그브다 강과 우니에스타 강(후대에 이 강들은 포메라니아와 오데르 슬라브족의 경계가 되었다)을 따라 정해졌을 것이며, 웨바를 따라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복된 그단스크스웁스크의 지역 통치자들은 폴란드 귀족으로 교체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또한 해당 지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폴란드 성직자 조직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교회 조직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폴란드 교회로의 병합은 교황 사절인 투스쿨룸의 질 추기경-주교가 방문한 1125~26년에 이루어졌다.

아브단니에츠 가문 출신인 팔라틴 백작 스카르비미르가 볼레스와프 3세의 포메라니아 원정 중에 반란을 일으켰다.[136] 이 반란은 1117년에 진압되었고[136], 스카르비미르는 처벌로 눈이 멀게 되었다.[137] 볼레스와프와 아브단니에츠 가문 사이의 갈등 원인은 가문의 영향력 증가, 스카르비미르의 야망, 그리고 볼레스와프와 그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에 대한 질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37] 스카르비미르가 포메라니아인들과 키예프 루스의 대공인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와 접촉했다는 주장도 있다.[138] 이 반란은 볼레스와프가 발표한 상속법과 연관되었을 수도 있는데, 라벤츠 가문 출신인 표트르 브워스토비츠가 팔라틴 백작으로서 스카르비미르를 대체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37] 스카르비미르는 패배 후 볼레스와프로부터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140]

1118년, 루리크 왕조 통치자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볼히니아를 자신의 영토에 병합하고 통치자 야로슬라프 스뱌토폴코비치를 추방했는데,[141] 그는 처음에는 헝가리에서,[142][143] 그 다음에는 폴란드에서 망명을 요청했다.[144] 1120년대에 키예프 공은 폴란드에 대한 원정을 계속했다.[141]

1121년(또는 1119년[150]) 볼레스와프의 군대는 그리피체 근처 니에클라지 전투에서 포메라니아 공작 바르티슬라프 1세와 스비에토펠크 1세를 격파했다.[151] 폴란드 군대는 포메라니아를 황폐화시키고, 토착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수천 명의 포메라니아인들을 폴란드 영토 깊숙이 재정착하도록 강요했다.[152] 이후 슈체친(1121~22년)을 점령했는데, 이 도시는 오데르 강의 자연 방어선과 코워브제크와 같은 잘 구축된 요새로 잘 방어되어 있었다. 볼레스와프는 기습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늪의 얼어붙은 물을 통과하는 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도시를 장악했다.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폴란드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153]

1122년 볼레스와프는 서부 포메라니아를 정복하여 폴란드 봉토로 만들었다. 바르티슬라프 1세 공작은 경의를 표해야 했으며, 폴란드 통치자에게 매년 500마르크의 고급 은화를 공물로 바쳐야 했고,[156] 볼레스와프의 요청에 따라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다.[157][158] 그 후 몇 년 동안 공물은 300마르크로 줄었다.[159] 1123년 그의 군대는 뤼겐까지 도달했지만 정복에는 실패했다.[153]

볼레스와프는 오데르 강 서쪽, 그리고 호수 근처(현재 독일의 ''Müritz'')에서도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기술적으로는 포메라니아 밖에 있었다. 동시에, 작센 공작(그리고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도 이 지역으로 진격했다. 동시대 자료에 따르면 작센 군대가 엘베 강 위쪽에서 현대의 로스토크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와리니, 치르치파니, 케시니안 및 톨렌서 부족의 일부를 정복했다.[154] 이러한 양면 확장 정책은 아마도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통치자 간의 합의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포메라니아 땅의 기독교화를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155]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 획득한 영토의 기독교화를 위한 선교를 조직했다.[161] 그는 포메라니아를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종속시키고자 했다. 스페인 출신 베르나르도가 이끈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162] 1124-25년과 1128년에 밤베르크의 오토 주교가 두 차례의 선교를 수행하여 포메라니아의 기독교화에 성공했다.[164]

오토 주교는 선교 동안 볼레스와프의 궁정에 머물렀으며, 포메라니아 통치자 바르티슬라프 1세와 동행했다.[163] 스타르가르트 슈체친스키에서 바르티슬라프 1세는 오토에게 지원을 약속했으며, 500명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경비병으로 배정했다.[158] 주요 선교 활동은 프시체, 카미엔, 볼린, 슈체친 등지에서 이루어졌다.[153][165] 슈체친볼린은 슬라브 이교주의의 중심지였으나, 볼레스와프가 포메라니아인에게 부과된 연례 공물을 낮춘 후에야 개종이 받아들여졌다.[159] 1124년 오토의 선교는 서부 포메라니아를 위한 루부슈와 동부 포메라니아(그단스크)를 위한 크루슈비차에 주교구를 세우는 것으로 끝났으며, 이 주교구는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종속되었다.[166]

1127년에는 이교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폴란드가 부과한 공물과 역병 때문이었다.[159] 바르티슬라프 1세는 봉기에 맞섰지만, 폴란드 영토로의 반란군 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오토의 외교 덕분에 직접적인 대결은 피할 수 있었고, 1128년 그는 포메라니아로 또 다른 선교를 시작했다. 바르티슬라프 1세는 데민에서 폴란드 기사들과 함께 오토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오데르 강 서쪽, 즉 우제돔, 볼가스트, 귀츠코프에 더 많은 압력이 가해졌다.[168] 포메라니아의 기독교화는 볼레스와프의 포메라니아 정책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1129년 볼레스와프는 바르티슬라프 1세와 독일 국왕 로테르 3세의 서부 포메라니아 종속 시도에 반대하는 동맹을 덴마크 국왕 닐스와 체결했다. 폴란드-덴마크군은 서부 포메라니아의 볼린우제돔 섬을 점령했다.[169]

1120년대 말에 볼레스와프는 포메라니아의 교회 조직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는 브워츠와베크 교구에 추가되었고, 노테치 북쪽의 국경 지대는 그니에즈노 교구와 포즈난 교구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포메라니아의 대부분은 독립적인 포메라니아 주교구로 만들어졌으며, 1140년 포메라니아 공국 영토에 세워졌고, 볼레스와프가 1138년에 사망한 후 공국은 폴란드에서 독립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1130년 뤼겐 섬으로 원정을 감행했다.[178] 이를 위해 덴마크 공작 마그누스 닐손과 동맹을 맺었다.[177] 덴마크 함대의 지원을 받았지만, 라니 부족이 볼레스와프 3세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178]

1134년 덴마크 수도 로스킬레 침공이 성공한 후,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의 바르티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에릭 2세에 대항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역할은 덴마크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리핀 가문을 돕는 데 있었다.[178] 덴마크는 첫 공격을 격퇴하고 포메라니아로 확장하는 보복 원정을 이끌었다. 1135년, 볼레스와프 3세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을 바치고, 황제는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178]

5. 1. 폴란드-포메라니아 국경 강화

볼레스와프 3세의 정치적 목표는 노테치 강을 따라 폴란드 국경을 강화하고 포메라니아를 복속시키는 것이었다.[129] 1113년까지 산토크, 비엘렌, 나크워, 차르눈, 우이시체, 비슈오그루트 등을 요새화하여 북부 국경을 강화했다.[129][130]

볼레스와프 3세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포메라리아)로 확장하기 전, 1114년 니사 크워츠카 강 경계에서 열린 회의를 통해 보헤미아와의 정치적 관계를 정상화했다.[103] 이 회의에는 프르제미슬 왕조의 보헤미아 공작인 블라디슬라프 1세, 오토 2세, 소베슬라프 1세가 참여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잘로메아 폰 베르크와 결혼하여 이 조약을 체결했다.[131][132]

5. 2.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정복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한 후, 볼레스와프 3세는 1115년 프로이센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수행하여 폴란드의 북동쪽 국경을 확보했다.[133] 이를 통해 볼레스와프 3세는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를 침공할 수 있게 되었다.[133] 1115년부터 1119년까지 그단스크 포메라니아 정복은 이전 폴란드 통치자들의 오랜 목표, 즉 나크워 카스텔라니를 포함한 비스와 강 유역의 영토를 폴란드에 완전히 병합하는 것을 달성했다.[134][135] 폴란드 공국의 북쪽 경계는 아마도 그브다 강과 우니에스타 강(후대에 이 강들은 포메라니아와 오데르 슬라브족의 경계가 되었다)을 따라 정해졌을 것이며, 웨바를 따라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복된 그단스크스웁스크의 지역 통치자들은 폴란드 귀족으로 교체되었다. 볼레스와프 3세는 또한 해당 지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폴란드 성직자 조직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교회 조직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폴란드 교회로의 병합은 교황 사절인 투스쿨룸의 질 추기경-주교가 방문한 1125~26년에 이루어졌다.

5. 2. 1. 스카르비미르의 반란

아브단니에츠 가문 출신인 팔라틴 백작 스카르비미르가 볼레스와프 3세의 포메라니아 원정 중에 반란을 일으켰다.[136] 이 반란은 1117년에 진압되었고[136], 스카르비미르는 처벌로 눈이 멀게 되었다.[137] 볼레스와프와 아브단니에츠 가문 사이의 갈등 원인은 가문의 영향력 증가, 스카르비미르의 야망, 그리고 볼레스와프와 그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에 대한 질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37] 스카르비미르가 포메라니아인들과 키예프 루스의 대공인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와 접촉했다는 주장도 있다.[138] 이 반란은 볼레스와프가 발표한 상속법과 연관되었을 수도 있는데, 라벤츠 가문 출신인 표트르 브워스토비츠가 팔라틴 백작으로서 스카르비미르를 대체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37] 스카르비미르는 패배 후 볼레스와프로부터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140]

5. 2. 2. 키예프 루스의 개입

1118년, 루리크 왕조 통치자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볼히니아를 자신의 영토에 병합하고 통치자 야로슬라프 스뱌토폴코비치를 추방했는데,[141] 그는 처음에는 헝가리에서,[142][143] 그 다음에는 폴란드에서 망명을 요청했다.[144] 1120년대에 키예프 공은 폴란드에 대한 원정을 계속했다.[141]

5. 3. 서부 포메라니아 정복

1121년(또는 1119년[150]) 볼레스와프의 군대는 그리피체 근처 니에클라지 전투에서 포메라니아 공작 바르티슬라프 1세와 스비에토펠크 1세를 격파했다.[151] 폴란드 군대는 포메라니아를 황폐화시키고, 토착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수천 명의 포메라니아인들을 폴란드 영토 깊숙이 재정착하도록 강요했다.[152] 이후 슈체친(1121~22년)을 점령했는데, 이 도시는 오데르 강의 자연 방어선과 코워브제크와 같은 잘 구축된 요새로 잘 방어되어 있었다. 볼레스와프는 기습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늪의 얼어붙은 물을 통과하는 방향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도시를 장악했다.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폴란드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했다.[153]

1122년 볼레스와프는 서부 포메라니아를 정복하여 폴란드 봉토로 만들었다. 바르티슬라프 1세 공작은 경의를 표해야 했으며, 폴란드 통치자에게 매년 500마르크의 고급 은화를 공물로 바쳐야 했고,[156] 볼레스와프의 요청에 따라 군사적 지원을 제공해야 했다.[157][158] 그 후 몇 년 동안 공물은 300마르크로 줄었다.[159] 1123년 그의 군대는 뤼겐까지 도달했지만 정복에는 실패했다.[153]

볼레스와프는 오데르 강 서쪽, 그리고 호수 근처(현재 독일의 ''Müritz'')에서도 전투를 벌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기술적으로는 포메라니아 밖에 있었다. 동시에, 작센 공작(그리고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도 이 지역으로 진격했다. 동시대 자료에 따르면 작센 군대가 엘베 강 위쪽에서 현대의 로스토크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와리니, 치르치파니, 케시니안 및 톨렌서 부족의 일부를 정복했다.[154] 이러한 양면 확장 정책은 아마도 이전의 알려지지 않은 통치자 간의 합의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포메라니아 땅의 기독교화를 위한 첫 번째 단계였다.[155]

5. 4. 서부 포메라니아의 기독교화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 획득한 영토의 기독교화를 위한 선교를 조직했다.[161] 그는 포메라니아를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종속시키고자 했다. 스페인 출신 베르나르도가 이끈 선교는 실패로 끝났다.[162] 1124-25년과 1128년에 밤베르크의 오토 주교가 두 차례의 선교를 수행하여 포메라니아의 기독교화에 성공했다.[164]

오토 주교는 선교 동안 볼레스와프의 궁정에 머물렀으며, 포메라니아 통치자 바르티슬라프 1세와 동행했다.[163] 스타르가르트 슈체친스키에서 바르티슬라프 1세는 오토에게 지원을 약속했으며, 500명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을 경비병으로 배정했다.[158] 주요 선교 활동은 프시체, 카미엔, 볼린, 슈체친 등지에서 이루어졌다.[153][165] 슈체친볼린은 슬라브 이교주의의 중심지였으나, 볼레스와프가 포메라니아인에게 부과된 연례 공물을 낮춘 후에야 개종이 받아들여졌다.[159] 1124년 오토의 선교는 서부 포메라니아를 위한 루부슈와 동부 포메라니아(그단스크)를 위한 크루슈비차에 주교구를 세우는 것으로 끝났으며, 이 주교구는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에 종속되었다.[166]

1127년에는 이교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폴란드가 부과한 공물과 역병 때문이었다.[159] 바르티슬라프 1세는 봉기에 맞섰지만, 폴란드 영토로의 반란군 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오토의 외교 덕분에 직접적인 대결은 피할 수 있었고, 1128년 그는 포메라니아로 또 다른 선교를 시작했다. 바르티슬라프 1세는 데민에서 폴란드 기사들과 함께 오토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오데르 강 서쪽, 즉 우제돔, 볼가스트, 귀츠코프에 더 많은 압력이 가해졌다.[168] 포메라니아의 기독교화는 볼레스와프의 포메라니아 정책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여겨진다.

1129년 볼레스와프는 바르티슬라프 1세와 독일 국왕 로테르 3세의 서부 포메라니아 종속 시도에 반대하는 동맹을 덴마크 국왕 닐스와 체결했다. 폴란드-덴마크군은 서부 포메라니아의 볼린우제돔 섬을 점령했다.[169]

1120년대 말에 볼레스와프는 포메라니아의 교회 조직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는 브워츠와베크 교구에 추가되었고, 노테치 북쪽의 국경 지대는 그니에즈노 교구와 포즈난 교구로 분할되었다. 그러나 포메라니아의 대부분은 독립적인 포메라니아 주교구로 만들어졌으며, 1140년 포메라니아 공국 영토에 세워졌고, 볼레스와프가 1138년에 사망한 후 공국은 폴란드에서 독립했다.

5. 5. 뤼겐 정복과 바르티슬라프 1세와의 동맹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1130년 뤼겐 섬으로 원정을 감행했다.[178] 이를 위해 덴마크 공작 마그누스 닐손과 동맹을 맺었다.[177] 덴마크 함대의 지원을 받았지만, 라니 부족이 볼레스와프 3세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178]

1134년 덴마크 수도 로스킬레 침공이 성공한 후, 볼레스와프 3세는 포메라니아의 바르티슬라프 1세와 동맹을 맺고 에릭 2세에 대항했다. 볼레스와프 3세의 역할은 덴마크 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리핀 가문을 돕는 데 있었다.[178] 덴마크는 첫 공격을 격퇴하고 포메라니아로 확장하는 보복 원정을 이끌었다. 1135년, 볼레스와프 3세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을 바치고, 황제는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178]

6. 메르제부르크 회의

1125년,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독일 왕인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로타르 2세는 상속 분쟁에 휘말렸고, 교황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179] 1130년에는 교황 선거에서 이중 선출이 이루어졌고, 로타르는 자신의 대관식을 확보하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했다.[179] 그러나 로타르의 황제 대관식은 독일 왕위 경쟁자들과의 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180]

1130년, 볼레스와프는 뤼겐 섬의 오데르강 좌안 지역을 장악했다. 독일은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품었지만, 내부 정치 상황과 헝가리 내전 개입으로 인해 무력 충돌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1131년 헝가리 국왕 머리 2세의 죽음은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는 벨라 2세 (알모스 공작의 아들)와 보리스 칼라노스 (콜로만 국왕의 사칭 아들) 사이의 전쟁으로 번졌다. 보리스는 폴란드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헝가리와의 더 긴밀한 동맹 및 키예프 공과의 협력을 희망했다 (보리스는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는 거의 모든 나라의 지지를 받는 벨라에 비해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폴란드군은 사요 강 전투 (1132년 7월 22일)에서 헝가리,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 연합군과 맞붙었고, 연합군은 폴란드 공작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79]

헝가리에서의 성공은 제국 봉신인 보헤미아 통치자 소베슬라프 1세가 이용했다. 그는 1132년부터 1134년까지 여러 차례 슐레지엔을 침공했다.[148] 슐레지엔의 소유권 문제는 로타르 3세에게 남겨졌다. 같은 시기에, 1133년의 교황 칙서 ''Sacrosancta Romana''는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에게 볼레스와프가 설립한 포메라니아 교구에 대한 주권을 부여했다.

1109년 나크워 전투에서 포메라니아인을 격파하고 포메라니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 군을 격파하고, 원정에 참여했던 이복 형제 즈비그니에프도 물리쳤다. 그러나 1135년에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하게 되었고, 황제는 헌납된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 1132년부터 1135년까지 헝가리 원정을 행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6. 1. 정치적 배경

1125년, 신성 로마 황제이자 독일 왕인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 로타르 2세는 상속 분쟁에 휘말렸고, 교황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179] 1130년에는 교황 선거에서 이중 선출이 이루어졌고, 로타르는 자신의 대관식을 확보하기 위해 교황 인노첸시오 2세를 지지했다.[179] 그러나 로타르의 황제 대관식은 독일 왕위 경쟁자들과의 분쟁을 종식시키지 못했다.[180]

1130년, 볼레스와프는 뤼겐 섬의 오데르강 좌안 지역을 장악했다. 독일은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품었지만, 내부 정치 상황과 헝가리 내전 개입으로 인해 무력 충돌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1131년 헝가리 국왕 머리 2세의 죽음은 왕위 계승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는 벨라 2세 (알모스 공작의 아들)와 보리스 칼라노스 (콜로만 국왕의 사칭 아들) 사이의 전쟁으로 번졌다. 보리스는 폴란드 통치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헝가리와의 더 긴밀한 동맹 및 키예프 공과의 협력을 희망했다 (보리스는 블라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딸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볼레스와프는 거의 모든 나라의 지지를 받는 벨라에 비해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폴란드군은 사요 강 전투 (1132년 7월 22일)에서 헝가리,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독일 연합군과 맞붙었고, 연합군은 폴란드 공작에게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그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179]

헝가리에서의 성공은 제국 봉신인 보헤미아 통치자 소베슬라프 1세가 이용했다. 그는 1132년부터 1134년까지 여러 차례 슐레지엔을 침공했다.[148] 슐레지엔의 소유권 문제는 로타르 3세에게 남겨졌다. 같은 시기에, 1133년의 교황 칙서 ''Sacrosancta Romana''는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에게 볼레스와프가 설립한 포메라니아 교구에 대한 주권을 부여했다.

1109년 나크워 전투에서 포메라니아인을 격파하고 포메라니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 군을 격파하고, 원정에 참여했던 이복 형제 즈비그니에프도 물리쳤다. 그러나 1135년에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하게 되었고, 황제는 헌납된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 1132년부터 1135년까지 헝가리 원정을 행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6. 2. 회의 준비

1134년 2월, 보헤미아의 소베슬라프 1세헝가리 왕 벨라 2세의 고위 관리들은 트란실바니아 주교 페테르와 함께 알텐부르크로 가서 폴란드 통치자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제기했다. 그들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로타르 3세는 다양한 왕조 분쟁을 중재하기로 동의했다.[181]

벨라 2세와 페레미실의 볼로디미르코 볼로다로비치 공작은 폴란드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여 소 폴란드를 점령하고 비실리카에 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레스와프 3세는 1135년 6월 26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열리는 제국 법정으로 소환되었으나, 시간을 벌기 위해 대리인을 보냈다. 황제는 또 다른 대표단을 보내 메르제부르크에서 1135년 8월 15일에 직접 출두할 것을 요청했다.[182] 볼레스와프는 로타르 3세와의 합의 없이는 오데르강 서쪽과 뤼겐섬에서 새로 정복한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179]

메르제부르크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볼레스와프는 라치보르 1세를 설득하여 덴마크를 상대로 원정을 벌이도록 했다. 이는 덴마크 국왕이 독일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황제 로타르 3세에 대한 명백한 도발이었다. 650척의 보트로 구성된 포메라니아 함대는 스웨덴의 쿵엘브를 공격했다.[183]

6. 3. 회의 조항

1135년 8월 15일, 메르제부르크 회의가 열렸다.[185] 이 행사에서 황제 로타르 3세는 볼레스와프의 포메라니아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다. 그 대가로 볼레스와프는 포메라니아 지역과 뤼겐 공국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 고급 은화 6,000개를 지불하기로 합의했다.[185]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요 영토인 폴란드의 완전한 독립 통치자로 남았다. 헝가리와의 분쟁도 볼레스와프가 벨라 2세의 통치를 인정하면서 종결되었다. 이 합의는 볼레스와프의 딸 유디트와 벨라 2세의 아들 게저의 약혼으로 맺어졌으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헤미아-폴란드 분쟁의 경우, 제국의 중재는 실패했다. 로타르 3세는 폴란드 통치자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후속 협상에서 이 문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했다.[185]

이 회의는 교회 의식으로 끝났으며, 이 자리에서 볼레스와프는 제국의 검을 운반하는 영예를 누렸다.[183] 폴란드 외교의 간접적인 목표는 1133년 교황 칙서를 무효화하고 1135년 피사 공의회에서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의 대교구 권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1136년 7월 7일,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Ex commisso nobis a Deo''[187]를 발행하여, 그니에즈노 대주교구의 폴란드 교구에 대한 주권을 확인했다.[186][188][189]

7. 말년과 죽음

1109년 나크워 전투에서 포메라니아인을 격파하고 포메라니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 군을 격파하고, 원정에 참여했던 이복 형제 즈비그니에프도 물리쳤다. 그러나 1135년에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하게 되었고, 황제는 헌납된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 1132년부터 1135년까지 헝가리 원정을 행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폴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후, 1137년 5월 30일 클로츠코 회의(소위 '클로츠코 평화')에서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이 합의의 세부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조약은 니엠차에서 확인되었는데, 볼레스와프의 장남 브와디스와프가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 바츨라프의 세례식에서 대부로 참석했다.

볼레스와프는 생애 말년에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자녀들의 정략 결혼을 주선하는 데 주력했다. 키예프 루스 공국과의 관계를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와 프스코프 공작 브세볼로트의 딸 비아체슬라바의 결혼을 통해 강화했다. 헝가리와의 관계는 그의 아들 미에슈코와 헝가리 국왕 벨라 2세의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통해 정상화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1138년 10월 28일에 사망했으며, 사망 장소는 아마도 소하체프였다.[192] 그의 죽음에 대한 정황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12세기 자료에서는 그의 매장지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15세기에 얀 드우고시가 공작의 무덤이 프워츠크의 마조비아 복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도 소실된 ''마조비아 연대기''에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16~17세기 동안 프워츠크의 참사원이었던 바프진에츠 프셰레츠는 볼레스와프가 대성당의 공동 관에 안치되었으며,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다른 여러 피아스트 마조비아 통치자들의 유해가 함께 안치되었다고 기록했다.[193]

서거 전인 1138년에 유언장을 발표하여 국토를 4분할하여 아들들에게 계승하게 했다. 피아스트 가문의 연장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고, 크라쿠프를 수도로 삼아, 로마 황제에게 바친 포메라니아를 관리하도록 했다. 이 연장자 상속제는 곧 무시되었고, 200년 가까이 분열 시대가 지속되었다.

7. 1. 이웃 국가와의 관계 정상화

폴란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후, 1137년 5월 30일 클로츠코 회의(소위 '클로츠코 평화')에서 보헤미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했지만, 이 합의의 세부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조약은 니엠차에서 확인되었는데, 볼레스와프의 장남 브와디스와프가 소베슬라프 1세의 아들 바츨라프의 세례식에서 대부로 참석했다.

볼레스와프는 생애 말년에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자녀들의 정략 결혼을 주선하는 데 주력했다. 키예프 루스 공국과의 관계를 그의 아들 볼레스와프와 프스코프 공작 브세볼로트의 딸 비아체슬라바의 결혼을 통해 강화했다. 헝가리와의 관계는 그의 아들 미에슈코와 헝가리 국왕 벨라 2세의 딸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통해 정상화했다.

1109년 나크워 전투에서 포메라니아인을 격파하고 포메라니아를 지배하에 두었다. 또한 로마 황제 하인리히 5세 군을 격파하고, 원정에 참여했던 이복 형제 즈비그니에프도 물리쳤다. 그러나 1135년에는 황제 로타르 3세에게 조공하게 되었고, 황제는 헌납된 뤼겐 섬 및 서부 포메라니아를 받았다. 1132년부터 1135년까지 헝가리 원정을 행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7. 2. 죽음

볼레스와프 3세는 1138년 10월 28일에 사망했으며, 사망 장소는 아마도 소하체프였다.[192] 그의 죽음에 대한 정황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12세기 자료에서는 그의 매장지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15세기에 얀 드우고시가 공작의 무덤이 프워츠크의 마조비아 복된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있다고 기록했다. 그는 이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도 소실된 ''마조비아 연대기''에서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16~17세기 동안 프워츠크의 참사원이었던 바프진에츠 프셰레츠는 볼레스와프가 대성당의 공동 관에 안치되었으며, 그곳에는 그의 아버지 브와디스와프 1세 헤르만과 다른 여러 피아스트 마조비아 통치자들의 유해가 함께 안치되었다고 기록했다.[193]

8. 가족

볼레스와프 3세는 두 번 결혼했다.

키예프 대공 스뱌토폴크 2세의 딸 즈비스라바와 결혼했다.



살로메 폰 베르크-셸링겐/Salomea of Berg영어과 재혼했다.

  • 레셰크 (1115/16년 - ?)
  • 리크사 (1116년 - 1156년) - 스웨덴 왕 마그누스 1세 비. 마그누스 사후 민스크 공 볼로다리와 결혼, 그 다음에는 스웨덴 왕 스베르케르 1세와 결혼했다.
  • 볼레스와프 4세 (1120년 - 1173년) - 마조비아 공, 폴란드 대공
  • 미에슈코 3세 (1121년? - 1202년) - 비엘코폴스카 공, 폴란드 대공
  • 카지미에시 (1122년 - 1131년)
  • 게르트루다 (1123/24년 - 1160년) - 수녀
  • 도브로네카 (1128년 - ?)
  • 유디타 (1130년/1135년 - 1171년/1175년)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오토 1세 비
  • 헨리크 (1131년 - 1166년) - 산도미에시 공
  • 아니에스카 (1137년 - ?) - 키예프 대공 므스티슬라프 2세
  • 카지미에시 2세 (1138년 - 1194년) - 폴란드 대공

8. 1. 첫 번째 결혼

류리크 왕조 키예프 대공국의 스뱌토폴크 2세의 딸 즈비슬라바(1085/90 - 1114[316])는 볼레스와프 3세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194] 1103년 맺어진 이 결혼은[317] 즈비그니에프와의 싸움에서 키예프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195] 또한 이 결혼은 갈리치아와 테레보블리아 공국의 공작들이 폴란드를 공격하는 것을 제한했다.[196] 즈비슬라바가 죽을 때까지 폴란드와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 사이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유지되었다.[318][196]

이 결혼에서 브와디스와프 2세 비그나니에츠(1105 - 1159)와 딸 유디트(약 1112 - 1124)가 태어났다.[323] 무롬의 왕자 프세볼로트 다비도비치(Всеволод Давидович)와 1124년에 유디트는 결혼한다.[324][325] 브와디스와프 2세는 볼레스와프 3세를 이어 폴란드의 왕이 되었다.[197]

8. 2. 두 번째 결혼

볼레스와프 3세는 두 번 결혼했다. 1115년 1월 또는 2월에 독일 귀족 여성이자 베르크 백작의 딸인 살로메아 본 베르그-스첼크링켄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326][207] 이 결혼은 폴란드와 보헤미아 사이의 평화 조약 체결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이루어졌다.[208]

피아스트의 정복 휘장


볼레스와프 3세와 살로메아 사이에는 많은 자녀가 태어났다.

  • 볼레스와프 4세: 1125년생으로 별명은 곱슬머리이다.[218]
  • 미에슈코 3세: 1126년생으로 별명은 늙은이이다.[222]
  • 헨리크 산도미에르스키: 1127년생이다.[227]
  • 카지미에시 2세: 1138년생으로 16세기에 "공정한~"이라는 존칭이 붙여졌다.[232]
  • 릭사 볼레스와포브나: 1116년 4월 12일에 태어났다.[210] 힘센 망누스, 민스크의 왕자 폴라츠크의 볼로다르, 스웨덴의 스베르케르 1세와 차례로 결혼했다.
  • 도브로니에가 루드가르다: 1128년생으로 디트리히 폰 라우지츠 변경백과 결혼했다.[223][224]
  • 주디타 볼레스와포브나: 1132년생으로 오토 1세 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와 결혼했다.[225][226]
  • 아그니에슈카 볼레스와포브나: 1137년생으로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 2세와 결혼했다.[229][230][231]


이 외에도 레셰크(1115/16년생),[206][209] 게르트루다(1123/24년생),[217] 카지미에시(1122년생)[210][215] 등의 자녀가 있었다.

9. 상속 조항

9. 1. 장자 상속 원칙

볼레스와프 3세는 젊은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들들에게 영지를 분할하도록 하였고, 피오트르 브와스토비치가 이 조항을 실행하도록 임명되었다.[239] 볼레스와프 3세는 자신의 유언("계승 법령")을 통해 폴란드의 단결을 유지하고 아들들 간의 권력 투쟁을 방지하고자 "장자 상속 원칙"을 도입했다.[239] 이 원칙은 왕조의 맏이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며, 폴란드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크라쿠프 중심의 분할 불가능한 "장자 영지"를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했다.[243] 장자 공작은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인 포메라니아에 대한 통제권도 가졌다.[243]

계승에 관한 규정은 볼레스와프 3세 사후에 발효되었지만, 정확한 제정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240] 1115년 또는 1116년에, 혹은 스카르비미르의 반란 진압 이후(1117년)에 제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41] 원본 문서는 1137년에 작성되었다는 자료가 있다.[242] 이 법령은 1180년에 무효화되었지만,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실레지아 통치자들의 청원에 따라 1210년에 복원되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역사가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한다.[242][239]

자료들은 장자 공작이 행사한 권력의 측면에서 불일치를 보인다.[244]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장자 상속에 대해 언급했으며, 빈센티 카들루벡은 장자 상속과 장자 상속을 모두 언급했다.[244] 카들루벡은 두 시스템, 즉 장자 상속이 효력을 발휘하는 개별 구역에서의 최고 권력의 상속을 한 문장으로 결합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볼레스와프 3세가 제정한 것이 장자 상속이 아니라, 블라디슬라프 2세와 그의 후손에게만 해당되는 장자 상속이라는 견해가 있다.[244] 1146년 곱슬머리 볼레스와프 4세가 행사한 권력의 범위와 성격은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245]

9. 2. 폴란드 국가 분할

1138년 폴란드의 분할 (볼레스와프 3세 굽은입의 유언에 따름)


볼레스와프 3세는 자신의 영토를 여러 공국으로 나누었다.[243][246] 선임 영지(수도 크라쿠프)는 상속 불가능하고 분할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 영지는 소폴란드, 시에라츠, 렌치차, 크루슈비차, 쿠야비아의 서부,[247][248] 대폴란드의 동부, 칼리시, 그니에즈노, 그단스크 포메라니아로 구성되었다.[249] 서부 포메라니아는 봉토로 선임 공작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250]

실레지아 공국을 받은 블라디슬라프 2세 추방공은 수도 브로츠와프레부스 지역을 포함한 실레지아를 받았다. 장남으로서 그는 초대 선임 공작 (또는 ''프린켑스'')이 되었다.[253] 볼레스와프 4세 곱슬머리는 수도가 워츠와프인 마조비아 공국과 동부 쿠야비아를 받았다. 미에슈코 3세 늙은이는 수도가 포즈난인, 대폴란드의 나머지 서부 지역으로 구성된 대폴란드 공국을 받았다. 헨리크는 루블린을 수도로 하는 산도미에르츠를 중심으로 한 동부 소폴란드 지역과 북쪽의 부크 강으로 구성된 산도미에르츠 공국을 받았다.[251][254] 볼레스와프의 미망인 베르크의 살로메아는 렌치차 또는 시에라츠-렌치차를 지참금으로 받았다.[255] 그녀가 죽은 후 이 영지는 선임 영지에 포함될 예정이었다.

볼레스와프 3세의 막내 아들 카지미에시 2세는 유언장에 포함되지 않았다.[251]

중세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법령이 볼레스와프의 후손들에게 첫 세대 (즉, 그의 아들들)에게만 상속을 제공한다는 견해가 있다. 그들이 죽은 후 그들의 영지는 선임 영지에 포함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들 간의 후기 싸움으로 인해 공국이 세습 영지로 변모했다.[256]

9. 3. 폴란드의 봉건 분열

"선임 공의 원칙"은 곧 깨졌고, 이로 인해 약 200년에 걸친 폴란드의 봉건 분열[257], 즉 봉건적 분열이라는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258] 이로 인해 영향을 받은 다른 국가들로는 러시아, 헝가리, 독일 등이 있다. 이는 폴란드 국가의 약화와 내부 개발, 문화, 그리고 더 광범위한 인구의 상황 개선을 가져온 시기였다. 당시의 역사 서술에 따르면, 당시 군주적 권한의 분배에도 장점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경제적 기반 위에서의 정치 체제 재건과 국가의 운명에 대한 더 큰 책임을 상층부에 부여하는 것이 포함된다.[259]

10. 국가 조직

12세기 폴란드의 국가 내부 조직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당시 문서의 부재와 연대기 작가들의 보고가 공국의 행정 체제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 부족을 반영하고 있어 파악하기 어렵다.[260]

볼레스와프 3세는 자신의 영토를 주, 구, 고르드로 나누었다. 오폴레는 이러한 행정 구역 체계 안에 남아 있었다.[260] 주는 이후의 ''dzielnica''에 해당하며, 마조비아, 실레지아, 대폴란드, 크라쿠프, 산도미에르츠, 칼리시-웽치차[261], 포메라니아(그단스크 포메라니아)에 6~7개의 주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262] 볼레스와프 3세 통치 시기에는 독일의 모델을 따라 국경 지역을 변경백령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고, 확인된 변경백령으로는 그워구프, 그단스크, 루부슈가 있다.[263] 볼레스와프는 정치, 경제,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성들을 잘 관리했을 것이다.

피아스트 왕조 시대의 국가는 가산적 성격을 띠었다. 공작 궁정(라틴어: ''curia ducis'')은 권력의 중심이었고, 통치 가문(공작 부인을 위한 별도의 궁정과 함께), 세속 및 교회 고위 성직자와 신하, 하급 관리, 기사, 궁정, 사제들이 속해 있었다.[264] 볼레스와프 1세 헤르만과 볼레스와프 3세의 궁정에서 가장 중요한 직책은 팔라틴 백작(보이보드)이었다.[265] 팔라틴 백작(라틴어: ''comes palatinus'')은 통치자를 대신하여 주요 군사 원정을 지휘하고, 국가를 방어하며, 공작 궁정의 수장으로서 행정을 감독하고, 카스텔란의 수장을 통제 및 임명하고, 법원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직책은 1180년에 폐지되었다.[261] 폴란드 관료제는 미에슈코 2세 람베르트 통치 초기에 발전했다. 수집가(라틴어: ''camerarius'')는 공작 궁정의 경제를 관리했고, 다른 직책으로는 체쉬니크, 스톨니크, 스트라즈니크, 미에치니크, 코니우시, 워프치 등이 있었다. 볼레스와프 3세 통치 기간 동안에는 법원 사무실과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의무로 구성된 공작 예배당[267](라틴어: ''capella'')의 업무를 지휘하는 재상 직책이 나타났으며,[266] 미하우 아브다니에츠가 이 직책을 맡았다. 중앙 정부에는 재무관, 주화 주조자 등이 있었다.[262] 볼레스와프 3세 통치 기간 동안 국가의 구조는 폴란드 교회의 조직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교회는 통치자에게 종속되었고 통치자는 서임권을 가졌다.[268]

공작 궁정은 카스텔라니를 통해 신하들과 접촉했으며, 카스텔라니는 ''나첼니크'' 또는 읍장(라틴어: ''princeps terrae'')이 관리했다. 그는 카스텔라니 또는 고르드(라틴어: ''comes'')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었고,[261] 카스텔란(고르드 통치자)은 지역 민사 당국을 행사하고, 공공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방어를 조직하고, 법원을 행사했다. 통치자의 직접적인 의무 하에 있는 사람들은 집행관, 즈판(가스탈드), 주화 주조자, 셀니크(세금 징수자) 및 수집가였다.[262] 공국 내의 모든 중요한 직책은 귀족들이 맡았다.[269] 카스텔란은 귀족, 관리 및 미니스테리알레스 집단에 속했다.[267] 변경백(국경 지역을 담당)은 폴란드 통치자에게 직접 종속되었으며, 주 지도자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다.[263]

11세기 말, 공국 조직은 약화되어 기사로 구성된 서유럽 모델의 군대로 대체되었다. 라틴어 용어 ''milites''는 말을 키울 여유가 있는 기사와 전사를 지칭하게 되었다.[270] 볼레스와프 시대의 폴란드군은 공작 군대(''Oddziału nadwornego''), 영주 군대(''Drużyny możnowładców''), 소규모 봉건 영주와 농민으로 구성된 민병대(''Pospolite ruszenie'')[271](혹은 민병대 보좌 군대[272])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었다.

공작 군대는 "새로운 사람들"(pl: ''Nowi Ludzie'')이라 불리는 부족 지도자, 지역 지도자 및 정부 참여를 열망하는 오폴레 통치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아들을 공작의 궁정으로 보내 통치자와 함께 하도록 했다.[273] 볼레스와프의 개인 경호원은 그 자신이 선택했을 것이며, 갈루스 아노니무스의 연대기에 기록된 호출을 사용했다.[274] 귀족들은 농민의 지원을 받는 가난한 기사로 구성된 자신들의 군대를 유지하고 무장을 책임졌다. 그들이 사용하는 장비에는 나무 무기(예: ), 둔기(예: 클럽), 베는 무기(예: 검), 뱉는 무기(예: 쇠뇌, 활과 화살, 투석기), 보호 장비(방패, 헬멧, 갑옷)가 있었다.[275] 이러한 군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작 군대보다 더 커졌으며, 시에치가 대표적인 예이다.[276] 12세기 초의 끊임없는 분쟁 동안 귀족들은 특히 위험한 지역의 민병대를 소환했다. 전체 민병대는 지파로 나뉘었고, 고향 지구의 이름을 받았다(예: ''크루슈비찬 호드''[277]). 무력 충돌의 경우 농민으로 구성된 독립 지파가 더 큰 무기로 소환되었다(예: 1109년).[272]

귀족과 전사 외에도 볼레스와프 시대의 폴란드 사회는 자유 농민과 하인(거주지에 붙어 있음)으로 구성되었다. 별개의 사회 집단은 자유민, 소위 손님(라틴어: ''hospites'') - 재산을 소유하지 않음-, 농장을 가지고 평민에 포함된 전사(라틴어: ''milites gregarii'')였다. 사회 계층의 끝에는 노예(전쟁의 브란치, 또는 그들의 후손)가 있었는데, 이들은 자유 농민과 거의 차이가 없었지만, 주인을 섬기는 의무는 더 높았다.[278] 비자유 인구는 개인적인 서비스나 통치자를 위한 토지 작업에도 사용되었다.[279]

국가의 모든 측면은 공작 판사(라틴어: ''ius ducale'')에 의해 규제되었다. 공작 판사는 신하 또는 재산과 관련된 모든 공작의 권리, 다양한 혜택, 징수금 및 사역의 집행을 다루었다.[280] 확장된 국가 기구와 교회는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인구로부터의 혜택으로 유지되었다. 세금의 주요 부담은 최하위 사회 계층인 농민(라틴어: ''heredes, rustici ducis, possesores'')에게 있었다.[281] 이들은 특정 부과금, 십일조 및 ''podworowe''(소), ''podymne''(집), ''poradlne''(토지), ''narzazu''(돼지 방목), ''stacji'' 또는 ''stanu''(공작 궁정 유지), ''posług komunikacyjnych''(운송로 규제: ''przewód'', ''powóz'', ''podwód'') 등의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다른 세금에는 사냥, 군사, 경비, 왕실 특권, 형사 처벌 관련 세금이 있었고, 신하들은 도로, 다리, 성의 건설 및 유지를 수리해야 했다.[262][280]

11. 인장과 주화

볼레스와프 3세 통치 시대에는 외국 동전으로 명명된 양면 데나리우스가 등장했다.[290] 이 시대의 첫 번째 알려진 데나리우스는 라틴어 전설 ''Bolezlav''를 새겼다. 다른 동전들은 대부분 라틴어 비문 ''Bolezlavs, denarivus, dicis Bolezlai''를 새겼고, 뒷면에는 성 아달베르트가 새겨져 있었다. 또 다른 유형의 동전에는 전설이 없었다. 이들은 주로 무게가 달랐으며, 훨씬 가벼웠고, 순전히 경제적인 목적으로 펀칭되었다.[290] 이 시대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 브락테아테가 제작되었다.[290]

볼레스와프의 ''보호'' 브락테아테


볼레스와프 통치 시대의 두 가지 유형의 브락테아테가 있다. 첫번째 유형은 주교의 복장을 하고 지팡이와 복음을 든 성 아달베르트를 보여준다. 동전의 전설은 그니에즈노 대주교의 형태를 결정한다.[293] 추가 연구를 통해 이 동전은 메르제부르크 회의(1135년)와 볼레스와프의 사망(1138년) 사이의 기간에 주조되었음이 밝혀졌다. 현재는 "보호"라고 불리며, 이는 1135년 신성 로마 제국에 경의를 표한 후 성인을 자신의 보호자로 인정한 폴란드 통치자에 대한 성 아달베르트의 보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동전 전설에서 정치적 선전의 몇 안 되는 예 중 하나이다.[294] 두번째 유형은 볼레스와프와 성 아달베르트가 통치자 위에 손을 얹어 보호하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전설은 라틴어 비문 ''Bolezlaus Adalbertus''를 보여준다. 이 브락테아테는 처음에는 즈비그니에프의 실명에 대한 볼레스와프의 참회 방법으로 여겨졌다.[291] 1127년경 크라쿠프에서 주조되었을 것이다.[292]

볼레스와프의 두 가지 브락테아테 외에도, 현재 화폐학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브락테아테가 하나 있다. 이 브락테아테는 브제그에서 발견되었으며, 전체 무게의 거의 2/3인 0.61g과 직경 27mm로 보존되어 있다. 이 동전은 왕관을 쓰고 손에 칼을 든 채 손을 뻗은 통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브와디스와프 2세 추방자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추가 연구를 통해 이 이미지를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로 식별했다. 그러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현재 보존된 비문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통치자가 동전을 보여주는지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있다.[294]

오스트루프 툼스키(2005)에서 발견된 불라


폴란드 통치자들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인장 5개 중 4개는 2002~2006년 사이에 여러 장소에서 발견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100년도 더 전에 발견되었다.[282] 폴란드 고고학자들은 그렘보키에 (2002년), 오스트루프 툼스키 (2005년), 그니에즈노 (2005년), 그리고 플로츠크에서 32km 떨어진 시에르프치 근처 수스크 마을의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서 추가적인 발견을 했다 (2006년).[283][284] 최초의 예비 연구에서는 이 인장이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의 소유일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인장은 내구성이 뛰어난 납으로 만들어졌으며, 직경은 36~40mm이다.[283] 납으로 된 인장은 당시 유럽 법정에서 사용되었으며, ''불라'' 유형에 속한다.[285] 인장은 지방 자치 단체 및 군사 명령에서도 알려져 있다. 가끔, 가장 중요한 문서(행위)에는 황금 불이 사용되었다.[286]

볼레스와프 통치 시대에 발견된 불라는 필기 형태가 다른 두 가지 주요 유형으로 나뉜다. 제1유형은 속격으로 된 정면, 라틴어 단어 ''sigillum''이 확장되어 저장되었고, 제2유형은 짧고 불라 주변에 위치한다. 두 유형의 인장 중 한 예는 성 아달베르트와의 관계에서 나왔으며, 그가 교황의 인정을 강조하는(제1유형) 모습과, 복원 후 인장에서 분명히 보이는 손을 얹는 제스처와 함께 지팡이를 강조하고 있다(제2유형).[284] 폴란드에서 속격 인장이 사용된 것은 12세기부터였으며, 당시에는 라틴어 전설이 새겨진 데나리우스화에서 그 유일한 통화적 등가물인 ''Denarivs ducis Bolezlai''가 사용된 전례 없는 현상이었다.[287][288] 볼레스와프 통치 말기에는 라틴어 전설이 새겨진 고정된 틀의 비문, 즉 ''Dvx Bolezlavus''로 돌아갔다. S. 수코돌스키에 따르면, 이 불라는 서한, 특권, 판결 등과 같은 군주 문서를 인증하는 데 사용되었으며,[289] T. 유레크에 따르면, 문 손잡이, 상자, 유물 보관함과 같은 거래를 보장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었다.[284] 2006년 10월, 포즈난 학문우호협회는 2002~2005년 동안 발견된 불라가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의 소유임을 확인했다.[286]

군주 주조창은 주로 브로츠와프, 플로츠크, 그니에즈노, 크라쿠프에 위치해 있다. 당시에는 시에치에후와 크라쿠프 근처에 위치한 팔라틴 시에치에흐와 같은 사설 주조창도 존재했다.[290]

12. 교회 재단

12세기에는 통치 가문이 교회를 위해 기부하는 등 광범위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주요 목적은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느님, 교회 계층, 성직자 및 사회 앞에서 종교적 통치자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295] 볼레스와프 3세는 포식적인 전사, 교활한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왕국에서 문화 발전을 후원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중세 군주처럼 그는 여러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곳은 다음과 같다.


  • 고대 이교 사원 터에 세워진 베네딕토회의 성 십자가 수도원.[295]
  • 이노브워츠의 성 길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설립자는 볼레스와프였다.[296]
  • 오스트루프 툼스키의 성모 마리아 승천 참사회 성당은 1120년에 세워졌다.[297]
  • 일부 가설에 따르면 티니에츠의 베네딕토회 수도원도 볼레스와프에 의해 세워졌다.[299]
  • 루빈 수도원은 1137~38년에 볼레스와프와 아브다니에츠 가문에 의해 재건되었다.[300]
  • 바벨 대성당은 볼레스와프의 통치 기간에 완공되었다.[301]
  • 트셰메슈노의 성 아우구스티노 정규 참사회는 아마도 볼레스와프에 의해 세워졌을 것이다.[302]


볼레스와프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살로메아의 슈바벤 츠비에팔텐 수도원과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었다. 츠비에팔텐의 베르톨트의 자세한 묘사는 12세기 폴란드 궁정의 문화적, 예술적, 종교적 발전에 대한 유일한 증거였다.[303]

1113년의 유물함은 볼레스와프의 통치 기간 동안의 예술적 발전의 한 예이다. 이는 갈루스 아노니무스의 보고에 따르면 즈비그니에프의 실명 이후 그니에즈노 대성당의 성 아달베르트 무덤으로의 참회 여행 중에 만들어졌다.[124]

13. 볼레스와프 통치 기간의 폴란드 역사 서술

볼레스와프 3세는 피아스트 왕조의 역사가 기록되기를 원했다. 이 임무는 갈루스 아노니무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베네딕토 수도사에게 할당되었다.[306][307] 이 수도사의 출신에 대해서는 베네치아, 프랑스, 헝가리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308][309][310][311] ''폴란드 연대기''는 라틴어로 1112년과 1116년 사이에 제작되었다.[312] 국가의 역사(라틴어: ''gesta ducum'')는 통치자들의 운명을 묘사하며 만들어졌다. 이 연대기는 전설적인 시대부터 1114년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313] 3부로 구성된 이 미완성 문학 작품은 피아스트가 폴란드를 통치할 권리를 정당화했다. 또한 이 연대기는 통치자들의 책임으로 돌려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건들을 설명하고, 그들의 정책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한다.[314][315]

브로츠와프에 있는 갈루스 아노니무스를 기리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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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18]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19] 서적 Полное собранiе русскихъ лѣтописей
[220]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221] 웹사이트 Jana Długosza kanonika krakowskiego Dziejów polskich ksiąg dwanaście http://www.pbi.edu.p[...] 2014-07-21
[222]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23]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224]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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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27]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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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230]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31] 서적 Genealogia Mścisławowiczów
[232]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33] 서적 Genealogia Piastów
[234]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35]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236]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237]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238]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239]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40] 간행물 Testament Bolesława Krzywoustego
[240] 간행물 Polska elita polityczna XII wieku (Część II. Wróżda i zgoda)
[241]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41] 간행물 Polska elita polityczna XII wieku (Część II. Wróżda i zgoda)
[241] 서적 Władysław II Wygnaniec
[242]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242] 서적 Dzieje Polski średniowiecznej
[242] 웹사이트 Monumenta Poloniae Historica http://kpbc.umk.pl/d[...]
[243] 웹사이트 Testament Bolesława Krzywoustego http://www.jednodnio[...] 2014-07-22
[244] 간행물 Primogenitura zasadą regulującą następstwo w pryncypat w ustawie sukcesyjnej Bolesława Krzywoustego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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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 웹사이트 Testament Bolesława Krzywoustego http://www.jednodnio[...] 2014-07-22
[245]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46] 논문 Primogenitura zasadą regulującą następstwo w pryncypat w ustawie sukcesyjnej Bolesława Krzywoustego Śląski Kwartalnik Historyczny Sobótka 1993
[247] 서적 Polska Piastów
[248] 웹사이트 Testament Bolesława Krzywoustego http://www.jednodnio[...] 201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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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51] 서적 Dzieje Polski średniowiecznej
[252] 서적 Korona i infuła. Od monarchii do poliarchii
[253] 서적 Testament Bolesława Krzywoustego
[254] 웹사이트 Testament Bolesława Krzywoustego http://www.jednodnio[...] 2014-07-22
[255] 논문 Jeszcze o testamencie Bolesława Krzywoustego Przegląd Historyczny
[256]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57] 논문 Primogenitura zasadą regulującą następstwo w pryncypat w ustawie sukcesyjnej Bolesława Krzywoustego Śląski Kwartalnik Historyczny Sobótka 1993
[258]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59] 서적 Władysław II Wygnaniec
[260] 서적 Dzieje Polski średniowiecznej
[261]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62] 서적 Dzieje Polski do roku 1501
[263]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64] 서적 Społeczne gwarancje bytu
[265]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66] 서적 Społeczne gwarancje bytu
[267] 서적 Dzieje Polski średniowiecznej
[268] 서적 Społeczne gwarancje bytu
[269] 서적 Dynastia Piastów w Polsce
[270] 서적 Społeczeństwo polskie od X do XX wieku
[271] 서적 Historia oręża polskiego 963–1795
[272] 서적 Historyczny rodowód polskiego ceremoniału wojskowego
[273] 서적 Społeczeństwo polskie od X do XX wieku
[274] 서적 Cronicae et gesta ducum sive principum Polonorum
[275] 서적 Historia oręża polskiego 963–1795
[276] 서적 Historia oręża polskiego 963–1795
[277] 서적 Cronicae et gesta ducum sive principum Polonorum
[278] 서적 Dynastia Piastów w Polsce
[279] 서적 Historia Polski do połowy XV wieku
[280]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281] 서적 Dynastia Piastów w Polsce
[282] 웹사이트 Nie śniło się historykom (in Polish) http://www.bulla.arc[...] 2014-07-26
[283] 웹사이트 Nowe (mazowieckie) znalezisko bulli Bolesława Krzywoustego i problemy ołowianych pieczęci we wczesnośredniowiecznej Polsce, p. 1 (in Polish) https://docs.google.[...] 201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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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서적 Denar w kalecie
[288] 웹사이트 Nowe (mazowieckie) znalezisko bulli Bolesława Krzywoustego i problemy ołowianych pieczęci we wczesnośredniowiecznej Polsce, p. 2 (in Polish) https://docs.google.[...] 201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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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0] 웹사이트 Polska: Epoka denarowa w mennictwie polskim (in Polish) http://www.nbportal.[...] 201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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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웹사이트 Pierwsze polskie brakteaty. Poglądy na ich temat w ujęciu historycznym (in Polish) http://www.poszukiwa[...] 201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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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 웹사이트 Kościół grodowy (I) na Ostrowie Tumskim - historyczny świadek Obrony Głogowa (in Polish) http://www.glogow.pl[...] 2014-07-27
[298] 웹사이트 Kościół grodowy (I) na Ostrowie Tumskim - historyczny świadek Obrony Głogowa (in Polish) http://www.glogow.pl[...] 2014-07-27
[299] 웹사이트 Opactwo Benedyktynów w Tyńcu. Założenie klasztoru. Spór o fundatora Opactwa (in Polish) http://www.tyniec.be[...] 2014-07-27
[300]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301] 서적 Sztuka polska, Romanizm
[302] 서적 Sztuka polska, Romanizm
[303] 서적 Piastówny i żony Piastów
[304] 서적 Sztuka polska, Romanizm
[305] 서적 Sztuka polska, Romanizm
[306] 문서 16th century Bishop and historian [[Marcin Kromer]] believed that the author was Gallus due to the assumption that the monk came from Provence, France.
[307] 간행물 Nowe studia nad Gallem-Anonimem
[308] 간행물 Gallus Anonim czy Italus Anonim
[309] 웹사이트 Kierunek: Wenecja!. Wywiad z Tomaszem Jasińskim (in Polish) http://histmag.org/K[...] 2014-07-27
[310] 서적 Zamiana Galla-Anonima, autora pierwszej „Kroniki dziejów Polski”, na Anonima-Wenecjanina Wydawnictwo DiG 2006
[311] 간행물 Przegląd koncepcji dotyczących pochodzenia Galla Anonima. Od Kromera do badaczy współczesnych
[312] 서적 Cronicae et gesta ducum sive principum Polonorum 2003
[313] 서적 Cronicae et gesta ducum sive principum Polonorum
[314] 서적 Historia Polski – średniowiecze
[315] 서적 Polska Piastów
[316] 논문 The problem of food in 1109, Zbyslava's death and the Polish-Kievan alliance in 1102–1114, pp. 42–46 http://www.history.o[...] 2009-09-13
[317] 서적 Genealogia Piastów
[317]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318]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319] 서적 Cronicae et gesta ducum sive principum Polonorum
[320]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321]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322] 서적 Rodowód Piastów śląskich
[323] 서적 Piastówny i żony Piastów
[323] 서적 Słownik władców Polski i pretendentów do tronu polskiego
[324] 간행물 Ипатiевская лѣтопись Полное собранiе русскихъ лѣтописей
[325]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326] 서적 Genealogia Piastów
[326] 서적 Bolesław III Krzywousty
[326] 서적 Rodowód pierwszych Piastó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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