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해방전선 (예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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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족해방전선(NLF)은 1964년 남아라비아 연방에서 결성된 반 왕당파 운동 단체이다. 1950년대 후반 범아랍주의 확산으로 영국과 에미르들의 통제가 위협받자, 영국은 남아라비아 연방을 결성하여 아덴 노동조합 회의(ATUC)의 영향력 확대를 막으려 했다. NLF는 영국군 철수 이후 남예멘 해방전선(FLOSY)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1967년 11월 30일 남예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후 NLF는 예멘 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일당 체제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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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전선 (예멘)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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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민족해방전선 |
아랍어 명칭 | الجبهة القومية للتحرير (al-jabhat al-qawmiyya lil-taḥrīr) |
존속 기간 | 1963년 – 1978년 |
국가 | 남아라비아 연방 (1967년까지) 남아라비아 보호령 (1967년까지) 남예멘 (1967년부터) |
충성 | 남예멘 |
유형 | 게릴라 |
역할 | 게릴라전 |
주둔지 | 예멘 산악 지역 |
장비 | 소화기 다이너마이트 |
별칭 | NLF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카흐탄 무함마드 알-샤비 자랄라 오마르 |
전투 및 활동 | |
참여 전투 | 아덴 비상사태 |
2. 역사적 배경
1950년대 후반,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주창한 범아랍주의가 예멘 지역까지 확산되면서 영국의 식민 통치와 기존 에미르들의 지배 체제에 위협이 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민족주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서로 대립하던 지역 에미르들을 설득하여 1959년 남아라비아 연방을 결성했다.[2] 이러한 영국의 조치와 정치적 격변은 예멘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을 더욱 자극했으며, 이는 이후 민족해방전선(NLF)이 결성되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2]
2. 1. 아덴 비상사태
1950년대 후반,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범아랍주의가 이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영국과 이 지역 전통 에미르들의 통제에 위협이 되었다. 이에 영국은 대립하던 에미르들을 설득하여 남아라비아 연방으로 통합시켰다.[2] 연방에서 아덴 노동조합 회의(ATUC)는 새로운 의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영국은 ATUC가 연방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1962년 아덴 식민지를 연방에 가입시켜 아덴의 친영 의원들이 ATUC의 영향력에 대항하도록 했다.[2] 아덴이 연방에 가입한 다음 날, 예멘 왕조의 무함마드 알 바드르가 축출되고, 나세르가 지원하는 예멘 아랍 공화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왕당파 사이에 북예멘 내전이 발발했다. 이 분쟁은 이 지역 전체로 확산되었고, 영국은 이를 아덴 비상 사태라고 칭했으며, 이는 아덴국에 비상사태가 선포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2]3. 민족해방전선의 결성
1964년, 남아라비아 연방 내에서 왕정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확산되면서 민족해방전선(NLF)은 혁명의 시작을 선포했다. 같은 해 1964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부는 압둘라 알 아스나그가 이끄는 FLOSY에게 남아라비아 연방의 통치권을 넘겨 독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전쟁 확대를 추진하며 영국의 철수를 원치 않았던 미국 존슨 대통령의 반대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965년, 영국은 연방 정부를 중단시키고 직접적인 식민 통치를 강행했다. 영국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기 어렵다고 판단한 아스나그는 국외로 망명하여 NLF에 합류했다. 하지만 NLF 내부에서는 일부 세력이 더욱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채택하면서 이집트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아스나그는 NLF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의 군사 조직인 FLOSY를 결성했다. NLF는 즉각 FLOSY를 나세르의 통제를 받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영국군뿐만 아니라 FLOSY와도 전투를 시작했다.
1967년 2월, 영국은 더 이상 아덴의 기지를 통제하거나 보호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의사와는 달리 철수를 발표했다. 앞서 1967년 1월부터 아덴의 구 아랍 지구에서는 NLF와 FLOSY 지지자들 사이에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영국군이 개입했음에도 2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영국군에 대한 공격이 빈번했으며, 아덴 항공 소속 더글러스 DC-3 여객기가 공중에서 파괴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동시에 NLF와 FLOSY 세력 간의 유혈 충돌도 격화되었다. 1967년 6월 20일에는 남아라비아 연방 육군과 경찰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콜린 캠벨 미첼 중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 아길 앤드 서덜랜드 하이랜더 등 영국군의 노력으로 진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LF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 공격은 영국군을 상대로 계속되었다. 나세르는 FLOSY를 지지하며 당시 이집트에 머물던 NLF 지도부를 체포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FLOSY와 NLF 양측 모두 영국 정부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며 철수하는 영국군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그러나 영국과 NLF 사이에서는 비공식적인 비밀 회담이 열렸고, 양측은 나세르의 지원을 받는 FLOSY를 견제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협력했다. 결국 영국은 해럴드 윌슨 총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이른 1967년 11월 말, 후임 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 없이 아덴에서 철수했다. 아덴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험프리 트레벨리안 경은 떠나면서 정부 청사를 승리자를 위해 새로 칠하는 것으로 존중을 표했다.
4. 민족해방전선 vs. 남예멘 해방전선(FLOSY)
압둘라 알 아스나그는 민족해방전선(NLF)에 합류했으나, 노선 차이로 인해 이탈하여 독자적인 군사 조직인 FLOSY를 창설했다.[8] NLF는 FLOSY를 나세르의 통제를 받는 세력으로 비난하며 영국군뿐만 아니라 FLOSY와도 무력 충돌을 벌였다.[8]
1967년 들어 두 조직 간의 대립은 아덴 등지에서 격렬한 시가전과 상호 간의 테러로 이어지는 등 극심한 폭력 사태로 격화되었다.[8]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집트는 FLOSY를 지원했고,[8] 철수를 앞둔 영국은 FLOSY를 견제하기 위해 NLF와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8]
4. 1. 영국군 철수와 남예멘 독립
1964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부는 압둘라 알 아스나그가 이끄는 FLOSY에게 통치권을 넘겨 남아라비아 연방의 독립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전쟁 확대를 원했던 미국의 존슨 행정부는 영국의 철수를 반대하여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1965년, 영국은 남아라비아 연방 정부 기능을 정지시키고 직접적인 식민 통치를 강화했다. 영국으로부터 권력 이양이 어렵다고 판단한 아스나그는 국외로 나가 민족해방전선(NLF)에 합류했다. 하지만 NLF 내부에서는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성향이 강화되었고, 이들은 이집트와 거리를 두었다. 아스나그는 결국 NLF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인 군사 조직인 FLOSY를 창설했다. NLF는 즉각 아스나그와 FLOSY를 나세르의 통제를 받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비난하며, 영국군뿐만 아니라 FLOSY와도 전투를 벌였다.
1967년 2월, 영국은 더 이상 아덴의 군사 기지를 통제하거나 보호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1967년 1월부터 아덴의 구 아랍 지구에서는 NLF와 FLOSY 지지자들 사이에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으며, 이는 영국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영국군에 대한 공격이 빈번했고, 아덴 항공 소속 더글러스 DC-3 여객기가 공중에서 폭파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동시에 NLF와 FLOSY 조직원들 간의 유혈 충돌도 격화되었다. 1967년 6월 20일에는 남아라비아 연방군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경찰까지 확산되었다. 혼란은 콜린 캠벨 미첼 중령이 지휘하는 제1대대 아길 앤드 서덜랜드 하이랜더 부대의 투입으로 영국에 의해 겨우 수습되었다.
그러나 NLF를 중심으로 한 게릴라 공격은 영국군을 상대로 곧 재개되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FLOSY를 지원했으며, 당시 이집트에 체류 중이던 NLF 지도부를 체포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FLOSY와 NLF 양측 모두 영국 정부와의 연관성을 피하기 위해 철수하는 영국군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영국과 NLF 사이에서는 비공식적인 비밀 회담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영국이 나세르의 지원을 받는 FLOSY를 격파하기 위해 공모한 것이었다. 결국 영국은 해럴드 윌슨 총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앞당겨 1967년 11월 말까지 아덴에서 철수했으며, 후속 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 없이 철수가 이루어졌다. 아덴의 마지막 총독 험프리 트레벨리안 경은 국가를 떠날 때, 존경의 표시로 정부 청사를 승리자를 위해 새로 칠했다.

1967년 11월 30일, ''남아라비아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남예멘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한편,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승리하면서 이집트는 예멘에서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의 군사 지원이 끊긴 FLOSY는 NLF와의 싸움에서 급격히 불리해졌다. NLF는 남아라비아 연방군을 설득하여 FLOSY에 맞서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1967년 11월 7일, FLOSY는 남아라비아 연방군 기지를 공격했으나, 군대는 NLF의 도움으로 FLOSY를 격퇴하여 FLOSY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패배 이후 FLOSY의 전투 부대는 해산되었고, 일부 간부와 지도자들은 국외에 남았다.[8] 대부분의 반대 지도자들은 1968년 사나에 대한 마지막 왕당파의 포위 공격 이후 화해했다.
5. 남예멘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1969년 6월 22일, 카흐탄 무함마드 알 샤아비 대통령이 축출되고 살림 루바이가 알리 (살민)가 집권했다.[9]
5. 1. 예멘 사회당(YSP) 일당 체제
카흐탄 무함마드 알 샤아비는 1969년 6월 22일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으나, 민족해방전선(NLF) 내부의 강경 마르크스주의 그룹이 정권을 장악했다. 살림 루바이가 알리 (살민)가 알 샤아비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1970년 내전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는 예멘 아랍 공화국을 승인했고, 잔존 교전 세력에 대한 휴전이 이루어졌다. 민족해방전선은 1970년 12월 1일에 남예멘의 이름을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PDRY)으로 변경했다. 이후 민족해방전선은 1978년에 당명을 예멘 사회당(YSP)으로 바꾸었다.[9] 이 과정에서 다른 모든 정당들은 예멘 사회당으로 통합되었고, 예멘 사회당은 남예멘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어 일당 체제를 구축했다.6. 관련 인물
민족해방전선(NLF)의 활동 및 남예멘 독립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주요하게 관련되어 있다.
-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그의 범아랍주의 사상은 남아라비아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NLF의 경쟁 조직인 FLOSY를 지원하며 북예멘 내전과 아덴 비상 사태에 개입했다.
- 압둘라 알 아스나그: 아덴 노동조합 회의(ATUC)와 FLOSY(점령 남예멘 해방 전선)의 지도자였다. 초기에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끌려 했으나, 이후 NLF와 치열한 경쟁 및 무력 충돌을 벌였다.
- 카흐탄 무함마드 알 샤아비: 민족해방전선(NLF)의 주요 창립자이자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영국 철수 후 수립된 남예멘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 살림 루바이야 알리: NLF 내 강경 마르크스주의 파벌을 이끌었으며, 알 샤아비를 축출하고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의 국가 원수가 되었다.
- 해럴드 윌슨: 영국 노동당 정부의 총리로서, 초기에는 FLOSY를 통한 독립을 구상했으나 아덴 비상 사태가 격화되자 NLF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결국 영국군 철수를 결정했다.
- 험프리 트레벨리안 경: 아덴의 마지막 영국 총독으로, 1967년 영국군 철수 당시 NLF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공식적인 정권 이양 없이 철수를 집행했다.
6. 1. 가말 압델 나세르
1950년대 후반,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이 주창한 범아랍주의는 남아라비아 지역으로 확산되어 영국의 식민 통치와 이 지역 전통 에미르들의 지배력에 위협이 되었다.[2] 이에 영국은 서로 대립하던 에미르들을 설득하여 남아라비아 연방을 결성하도록 유도했다.[2]연방 내에서는 아덴 노동조합 회의(ATUC)가 새롭게 구성된 의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영국은 ATUC가 연방 전체를 장악할 것을 우려하여, 1962년 아덴 식민지를 연방에 가입시켰다. 이는 아덴 내 친영국 성향 의원들을 통해 ATUC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2]
아덴 식민지가 연방에 가입한 바로 다음 날, 예멘 왕국에서는 무함마드 알 바드르 국왕이 축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나세르의 지원을 받는 예멘 아랍 공화국 세력과 사우디 아라비아 및 영국의 지원을 받는 왕당파 세력 간의 북예멘 내전이 발발했다. 이 분쟁은 점차 남아라비아 연방 지역 전체로 확산되었고, 영국은 이 상황을 아덴 비상 사태라고 불렀다. 아덴 비상 사태는 아덴국에 비상사태가 공식적으로 선포되면서 시작되었다.[2] 나세르의 이러한 개입은 남아라비아 지역의 민족주의 운동과 반식민 투쟁이 격화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6. 2. 압둘라 알 아스나그
1964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한 노동당 정부는 압둘라 알 아스나그가 이끄는 FLOSY(Front for the Liberation of Occupied South Yemen, 점령 남예멘 해방 전선)에게 통치권을 넘겨 남아라비아 연방의 독립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전쟁 확대를 추진하던 미국 존슨 대통령 행정부는 영국의 철수를 원치 않았고,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1965년 영국이 남아라비아 연방 정부를 해산시키고 직접 식민 통치를 강행하자, 아스나그는 영국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국외로 나가 민족해방전선(NLF)에 합류했다. 그러나 NLF 내 일부 세력이 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이집트와 거리를 두면서, 아스나그는 NLF에 대항하기 위해 독자적인 군사 조직인 FLOSY를 결성했다. NLF는 즉각 아스나그와 FLOSY를 나세르의 통제를 받는 제국주의 세력으로 비난하며 영국군뿐만 아니라 FLOSY와도 전투를 벌였다.
1967년 1월, 아덴의 구 아랍 지구에서는 NLF와 FLOSY 지지자들 사이에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으며, 이는 영국군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측 간의 무력 충돌과 상호 살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나세르는 FLOSY를 지원했으나, 영국은 철수를 결정하면서 NLF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FLOSY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결국 영국은 1967년 11월 말, 해럴드 윌슨 총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이르게 아덴에서 철수했으며, NLF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6. 3. 카흐탄 무함마드 알 샤아비
카흐탄 무함마드 알 샤아비는 1969년 6월 22일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으나, NLF 내부의 강경 마르크스주의 그룹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났다. 살림 루바이가 알리가 알 샤아비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9] 이후 NLF는 1970년 12월 1일에 남예멘의 국호를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PDRY)으로 변경했으며, 1978년에는 당명을 예멘 사회당(YSP)으로 바꾸고 다른 모든 정당을 통합하여 유일 합법 정당 체제를 구축했다.[9]6. 4. 살림 루바이야 알리
카흐탄 무함마드 알 샤아비는 1969년 6월 22일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으나, 민족해방전선(NLF) 내부의 강경 마르크스주의 세력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이후 살림 루바이야 알리가 알 샤아비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집권 시기인 1970년 12월 1일, 남예멘은 국호를 예멘 인민 민주 공화국(PDRY)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민족해방전선(NLF)은 1978년에 당명을 예멘 사회당(YSP)으로 바꾸고, 다른 모든 정당을 통합하여 유일 합법 정당 체제를 구축했다.[9]6. 5. 해럴드 윌슨
1964년 영국 총선에서 승리하여 집권한 노동당의 해럴드 윌슨 총리 정부는 초기에 남아라비아 연방의 독립을 추진하며 압둘라 알 아스나그가 이끄는 FLOSY에게 정권을 이양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베트남 전쟁을 확대하던 미국 존슨 행정부는 영국의 중동에서의 영향력 축소를 우려하여 이 계획에 반대했고, 결국 무산되었다.1965년, 영국은 남아라비아 연방 정부를 중단시키고 직접적인 식민 통치를 다시 시행했다. 이후 민족해방전선(NLF)과 FLOSY 간의 무력 충돌이 격화되고 영국군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면서 영국의 통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결국 1967년 2월, 윌슨 정부는 미국의 의사와는 달리 아덴에서 철수할 것을 공식 발표했다. 이는 현지 상황의 통제 불능 상태와 더불어, 과거 제국주의 정책에서 벗어나려는 노동당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정으로 평가된다.
철수를 앞두고 영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NLF 및 FLOSY와 접촉을 거부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NLF와 비밀 회담을 가졌다. 이는 이집트 나세르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FLOSY를 견제하고 NLF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계산이 깔린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윌슨 총리가 애초 계획했던 시점보다 앞당겨진 1967년 11월 말, 영국군은 아덴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철수 당시 명확한 후계 정부 구성에 대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마지막 총독이었던 험프리 트레벨리안 경은 상징적으로 정부 청사를 새로 칠해놓고 떠나는 것으로 영국의 아덴 통치를 마무리했다.
6. 6. 험프리 트레벨리안
아덴의 마지막 영국 총독이었던 험프리 트레벨리안 경은 1967년 11월 말 영국군이 철수할 때 남아라비아 연방에 대한 통치권을 넘겨줄 대상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국가를 떠나면서 공식적으로 열쇠를 인계할 사람이 없었으나, 승리자(사실상 NLF)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정부 청사를 새로 도색하도록 지시했다.7. 한국과의 관계
(내용 없음)
참조
[1]
웹사이트
National Liberation Front
http://www.fotw.us/f[...]
2013-09-28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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