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커스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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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랭커스터가는 1267년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그의 아들 에드먼드에게 랭커스터 백작 작위를 수여하면서 시작되었다. 랭커스터 가문은 랭커스터 백작령, 랭커스터 공작령을 거치며 잉글랜드에서 강력한 귀족 가문으로 성장했다. 랭커스터 가문은 1399년 헨리 4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으나, 헨리 6세의 무능과 장미 전쟁으로 몰락했다.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는 요크 가문의 흰 장미와 함께 장미 전쟁의 상징이 되었으며, 헨리 7세의 튜더 왕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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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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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상세 정보 | |
국가 | "[[파일:Royal Arms of England (1399-1603).svg|20px]] 잉글랜드 왕국" "[[파일:France moderne.svg|20px]] 왕국 프랑스" |
모가 | 플랜태저넷 가 |
창시자 | 에드먼드 크라우치백, 제1대 랭커스터 및 레스터 백작 (첫 번째 가문) 존 오브 곤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두 번째 가문) |
마지막 통치자 |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첫 번째 가문) 헨리 6세 (두 번째 가문) |
현재 수장 | 절멸 |
설립일 | 1267년 |
폐위 | 1461년 (처음) 1471년 (최종 및 절멸) |
해산일 | 1361년 (마지막 끊기지 않은 남성 후계자) 1471년 (절멸) |
분가 | 보포트 가 (사생아 합법화) 서머싯 가 (사생아 합법화) |
가문 정보 (첫 번째 가문) | |
작위 | 랭커스터 백작 레스터 백작 샹파뉴 백작 마리 백작 페레르 백작 더비 백작 솔즈베리 백작 링컨 백작 랭커스터 공작 |
가문 정보 (두 번째 가문) | |
작위 | 랭커스터 공작 잉글랜드 국왕 프랑스 국왕 |
2. 기원
1267년 헨리 3세가 그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에게 랭커스터 백작 작위를 수여하면서 랭커스터 가문의 기원이 시작되었다.[1] 헨리 3세는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반란 주동자인 레스터 백작 사이먼 드 몽포르의 작위와 재산을 몰수하여 에드먼드에게 하사했다. 에드먼드는 나바라 왕의 미망인인 아르투아의 블랑슈와 결혼하면서 유럽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에드먼드의 아들 토마스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 되었지만, 사촌인 에드워드 2세와의 갈등으로 1322년 처형되었다. 이후 토마스의 동생 헨리가 이사벨의 반란에 가담하여 에드워드 2세를 폐위시키고, 토마스의 작위와 영지를 회복했다. 헨리의 아들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는 백년 전쟁에서 활약하여 1351년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받았다.
2. 1. 랭커스터 백작령
헨리 3세는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반란 주동자인 레스터 백작 사이먼 드 몽포르의 작위와 재산을 몰수하여 1265년 10월 26일에 자신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에게 하사했다.[1] 여기에는 레스터 백작령이 포함되었으며, 1267년 6월 30일에는 최초의 랭커스터 백작령이 추가로 수여되었다.[1]에드먼드는 나바라 왕의 미망인인 아르투아의 블랑슈와 결혼하면서 유럽 귀족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1] 블랑슈의 딸이자 나바라의 여왕인 나바라의 조안 1세는 프랑스 왕 필립 4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2. 2. 랭커스터 공작령
에드먼드의 장남 토마스는 6개의 백작령을 겸임하여 잉글랜드 최대의 귀족으로서 영향력을 강화했지만, 사촌인 에드워드 2세와 대립한 결과, 영지를 몰수당하고 사형당했다. 토마스의 동생 헨리는 에드워드 2세 폐위에 가담했다. 헨리의 아들인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는 에드워드 3세 치하에서 백년 전쟁에 활약하여 1351년에 랭커스터 공작의 칭호를 얻었다. 헨리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딸인 블랑슈가 존 오브 곤트와 결혼하여 존이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다.3. 랭커스터 왕조
에드워드 3세의 셋째 아들인 존 곤트가 랭커스터 왕조의 시조이다. 존은 친척인 블랑쉬와 결혼하여 랭커스터와 레스터 백작령의 넓은 영지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1362년 장인 헨리 그로스먼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 3세는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다시 만들어 존에게 수여했다. 1399년 존이 사망하자 리처드 2세는 영지를 몰수하고 상속자인 헨리 볼링브로크를 추방했다.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한 사이, 헨리 볼링브로크는 의회파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 2세는 패배하고 유폐된 상태에서 사망했고, 헨리는 헨리 4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은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인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에게 있었다. 헨리 4세가 이 순위를 건너뛰고 왕위를 계승하면서 분쟁의 소지가 남았고, 이후 라이오넬의 후손이 요크 가문과 결혼하면서 정통성 문제가 더욱 커졌다. 이는 결국 헨리 6세 때 장미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헨리 4세의 왕위는 아들 헨리 5세와 손자 헨리 6세에게 이어졌지만, 헨리 6세가 랭커스터 왕가의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존 곤트와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들의 후예인 보퍼트 백작 가문은 랭커스터 왕가의 가장 열렬한 지지 세력이었다. 1396년 존과 스윈포드가 결혼했을 때,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 칙서를 통해 그들의 자녀들을 적출로 인정했다. 1397년 리처드 2세의 칙령으로 이 문서가 반포되었으나, 보퍼트 가문의 정통성은 논란이 많았다.
랭커스터 가문이 멸망하자, 헨리 튜더는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의 혈통을 근거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1485년 헨리는 리처드 3세를 몰아내고 헨리 7세로 즉위했다. 그는 랭커스터 가문의 부계 혈족이 아니었으므로 튜더 왕가가 시작되었다. 헨리 7세는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 요크와 결혼하여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상속권을 통합했다.
헨리 4세의 즉위를 둘러싼 역사가들의 논쟁은 상당하며, 일부 학자들은 이를 장미 전쟁의 원인으로 본다. 힘으로 즉위한 것은 플랜태저넷 왕조가 확립해 온 원칙을 깨뜨린 것이며, 권력과 플랜태저넷 혈통을 가진 귀족이라면 누구든 왕위를 노릴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리처드 2세는 헨리를 상속에서 제외하려 했었다. 윌리엄 서닝이 이끄는 헨리의 법률 고문들은 헨리가 정복에 의한 권리로 왕위를 주장하는 것을 만류하고 법적 정당성을 찾도록 했다.[29] 헨리는 어머니를 통한 계승을 주장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둘째 아들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증손자이자 리처드 2세가 지명한 상속인의 아들로서 리처드 2세의 일반 상속인이었다. 헨리의 고문들은 헨리가 헨리 3세의 남계 상속인이라는 주장을 했고, 이는 13세기의 상속 규정에 의해 뒷받침되었다.[30] 모티머의 누이 앤 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랭리 공작 에드먼드의 아들 캠브리지 백작 리처드와 결혼하여 앤의 계승권을 요크 가문의 계승권과 결합시켰다.[31] 모티머는 랭커스터 가문에 충실히 봉사했고, 사우샘프턴 음모를 헨리 5세에게 알려 음모자들을 처형하게 했다.[32]
백년 전쟁은 헨리 6세 섭정 시대 동안 랭커스터 가문과 다른 플랜태저넷 가문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야기했다.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는 칼레만 점유하고자 했으며, 보퍼트 추기경은 협상을 통한 평화를 원했다.[45]
잉글랜드의 동맹국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 대사들이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기를 거부하여 협상이 중단되자 샤를 7세에게 넘어가 아라스 조약 (1435년)에 서명했다.[46] 프랑스는 포르미니 전투와 카스티용 전투에서의 승리로 전쟁을 종식시켰고, 랭커스터 가문은 칼레와 채널 제도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영토를 영원히 잃었다.[47]
헨리 6세는 무능한 국왕이었으며, 사병을 거느린 신하들에게 취약했다. 퍼시-네빌 가문의 불화와 같이 라이벌 관계는 종종 무장 충돌로 번졌다.[48] 프랑스에서의 전쟁이라는 공동 목표 없이, 헨리의 사촌인 요크 공작 리처드 3세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왕권에 도전했다.[49] 대불황으로 헨리는 불만의 중심이 되었다.[50] 잭 케이드는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51] 사회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했다.[52]
헨리의 앙주 마가렛과의 결혼은 요크 공작 리처드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요크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과 요크 공작 에드먼드를 통해 헨리의 사촌이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요크는 군대를 모았지만,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가 정신적으로 붕괴되자 요크는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마가렛은 요크에 대한 적개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54]
역사가 로빈 스토리에 따르면, "헨리의 정신 질환이 비극이었다면, 그의 회복은 국가적 재앙이었다".[55] 헨리의 정신이 회복되자, 궁정 세력은 권력을 재확립했다. 요크와 네빌 가문은 세인트 올번스 제1차 전투에서 승리했다. 역사가 앤서니 굿맨은 약 50명이 사망했으며, 이로인해 화해 시도를 어렵게 만드는 불화를 만들었다고 제안한다.[56] 요크,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5세,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은 해외로 도망쳤다. 네빌 가문이 돌아와 노샘프턴 전투에서 승리하자 헨리는 포로로 잡혔다.[57] 요크는 왕위를 주장한 다음, 협정법을 통과시켰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의 상속권 박탈은 마가렛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갈등은 계속되었다. 요크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사망했다.[58]
마가렛은 스코틀랜드 여왕 게르더스의 메리의 지지를 얻었고, 스코틀랜드 군대와 함께 잉글랜드 남부를 약탈했다.[59] 런던 시민들은 마치 백작 에드워드를 환영했다.[60] 토튼 전투에서 마가렛이 패배하면서 에드워드의 지위가 확정되었고 그는 왕위에 올랐다.[61] 워릭과 클래런스는 랭커스터 가문으로 넘어갔다. 에드워드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잉글랜드에서 도망쳤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클래런스는 바넷 전투에서 편을 바꾸었고, 워릭과 그의 형제는 사망했다. 헨리, 마가렛, 랭커스터의 에드워드는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붙잡혔다. 웨일스 왕자 에드워드는 전장에서 처형되었고, 도싯 후작 존 보퍼트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섬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 4세가 이틀 후 처형되었다는 것은 보퍼트 가문이 적통 남계가 끊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는 런던탑에서 살해되어 처트시 수도원에 묻혔고, 랭커스터 가문은 멸망했다.[62]
1385년 존의 동생 에드먼드 오브 랭글리가 요크 공 작위를 얻어 요크 가문을 일으켜 랭커스터 가문에 대항하는 세력이 되었다.
헨리 5세는 백년 전쟁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지만, 헨리 6세 시대에 모두 잃었고, 요크 가문과의 사이에 장미 전쟁이 발발(1455년)하여, 1461년에 헨리 6세는 에드워드 4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요크 왕조의 내분으로 헨리 6세는 1470년에 복위했지만, 1471년에 에드워드 4세에게 잡혀 살해되었다. 그 후 랭커스터 가문은 부흥하지 못하고, 1485년까지 요크 왕조가 잉글랜드를 지배했다.
헨리 7세는 어머니 마가렛 보퍼트가 랭커스터 가문 방계인 보퍼트 가문 출신이었던 것을 근거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여 리처드 3세를 멸망시키고, 에드워드 4세의 딸을 왕비로 맞아 튜더 왕조를 일으켰다.
3. 1. 헨리 4세 시대
헨리 4세는 재정 문제, 지지자들에게 보상해야 할 정치적 필요성, 잦은 반란, 나병과 간질을 포함한 건강 악화[33]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헨리 4세의 주요 지지자였던 퍼시 가문은 스코틀랜드로부터 북부를 방어하는 데 주로 자신의 비용을 사용했지만, 보상 부족과 헨리 4세의 의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 퍼시(핫스퍼)는 슈루즈베리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1405년 핫스퍼의 아버지인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는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로프를 지원하여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헨리 퍼시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쳤고 그의 토지는 몰수되었다. 헨리 4세는 토마스 베케트를 살해한 것과 비슷한 행위로 스크로프를 처형했다. 이는 헨리 4세의 파문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교회는 서방 분열 중이었고 경쟁 교황들은 헨리 4세의 지지를 간절히 원했기에 항의했지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34] 1408년 퍼시는 다시 한번 잉글랜드를 침략했고 브램햄 무어 전투에서 사망했다.[35] 웨일스에서는 오와인 글린드위르의 광범위한 반란이 1409년 하를레크 성 탈환으로 억압되었지만, 산발적인 전투는 1421년까지 계속되었다.[36]헨리 4세는 아들 헨리 5세[37]에게 왕위를 계승했고, 1422년에는 손자 헨리 6세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38]
3. 2. 헨리 5세와 백년전쟁
헨리 5세는 에드워드 3세가 주장했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다시 주장하며 백년 전쟁을 재개했다.[39] 잉글랜드는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심지어 발루아 왕가의 방계인 부르고뉴 공작 가문과 동맹을 맺어 샤를 6세를 고립시키기도 했다.[41] 1420년 부르고뉴 공작의 중재로 트루아 조약이 체결되었고,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여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 또한 샤를 6세 사후 왕위계승권까지 확보하고, 샤를 6세의 아들 도팽 샤를의 왕위계승권은 사실상 박탈되었다.
그러나 헨리 5세가 샤를 6세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위계승권은 헨리 5세와 카트린 사이의 젖먹이 아들 헨리 6세에게 넘어갔다. 헨리 5세의 동생 존이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섭정이 되었다.[38]
트루아 조약에 따른 왕위계승권은 잉글랜드 점령지와 동맹 영주들에게만 인정되었을 뿐, 루아르강 이남에서는 도팽 샤를이 샤를 7세로 인정받고 있었다. 샤를 7세는 초기에는 힘이 약했지만, 잔 다르크의 도움을 받아 1429년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프랑스 전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43] 1431년 잉글랜드 섭정은 파리에서 헨리 6세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거행했지만, 잉글랜드 세력은 발루아 가문의 군사적 반격과 내부 분열로 약화되었다. 결국 1453년 랭커스터 왕가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 모든 영토를 상실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군주들은 1801년까지 프랑스 왕위에 대한 계승 권리를 유지했다.
3. 3. 헨리 6세와 장미전쟁
헨리 6세는 정신 질환을 앓았고 1453년에는 신경 쇠약으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다. 결국 1461년 8촌인 요크 공작 에드워드에 의해 폐위되어 구금되었고, 요크 공작은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 1470년 헨리 6세는 왕위를 되찾았으나 반년도 채 못 되어 에드워드 4세에 의해 다시 폐위되었다. 1471년 구금 상태에서 사망했고, 17일 후 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권자였던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죽으면서 곤트의 존에서 시작된 랭커스터 왕가는 대가 끊겼다.[68]랭커스터 왕가의 문장은 붉은 장미였고, 요크 가문의 문장은 흰색 장미였기 때문에 후세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장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4. 장미 전쟁
1453년 헨리 6세는 신경쇠약으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질환을 앓았다. 1461년 요크 공작 에드워드에 의해 폐위되어 구금되었고, 요크 공작은 에드워드 4세로 등극했다. 랭커스터 왕가의 문장은 붉은 장미였고, 요크 가문의 문장은 흰색 장미였기 때문에 후세 역사가들은 이 전쟁을 장미 전쟁이라고 부른다.
4. 1. 원인
1453년 헨리 6세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정신 질환을 앓았다.[12] 이러한 헨리 6세의 정신 질환과 무능함, 그리고 왕비 마거릿과 요크 공작 리처드의 대립은 장미 전쟁의 주요 원인이었다.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갈등 심화, 경제 불황과 사회 불안도 전쟁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4. 2. 경과
1453년 헨리 6세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1461년 삼종제(8촌)인 요크 공작 에드워드에 의해 폐위되어 구금되었고, 요크 공작은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다. 1470년 헨리 6세는 왕위를 되찾았지만, 반년도 채 되지 않아 에드워드 4세에게 다시 폐위되었다. 1471년 헨리 6세는 구금 상태에서 사망했고, 17일 후 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곤트의 존으로부터 시작된 랭커스터 왕가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68]이후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 혈족은 존 오브 곤트와 블랑슈의 딸 필리파를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실로 이어졌다.[68] 랭커스터 궁정 세력의 잔당들은 보포르 가의 후손이자 랭커스터 가문의 지지자였던 헨리 튜더 주위에 지지를 결집했다. 헨리 튜더는 어머니 마거릿 보포르 여사를 통해 랭커스터 가문의 상속자임을 주장하며, 리처드 3세에 대한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1485년 왕위에 올랐다. 헨리 7세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튜더 왕조를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통합 왕조로 내세웠다.[70]
4. 3. 결과
1471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가 죽으면서 곤트의 존에서 시작된 랭커스터 왕가는 대가 끊겼다.[68] 랭커스터 가의 방계 혈족 계승은 존 오브 곤트와 블랑슈의 딸 필리파를 통해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실로 이어졌다.[68]이후 랭커스터 가문의 잔당들은 헨리 튜더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헨리 튜더는 보포르 가문 출신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존 오브 곤트와 그의 정부 캐서린 스윈포드 사이에서 태어났다. 존 오브 곤트와 캐서린 스윈포드는 이후 결혼하여 그들의 자녀들은 적출되었으나, 헨리 4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 경쟁을 피하고자 이들의 왕위 계승권을 제한하려 하였다.[69]
헨리 튜더는 어머니 마거릿 보포르 여사를 통해 랭커스터 가문의 상속자임을 주장했다. 그의 아버지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외가 쪽 이복형제였다. 1485년, 헨리 튜더는 리처드 3세에 대한 반대 여론을 이용하여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왕위 계승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고, 튜더 왕조를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모두의 계승자로 홍보했다.[70]
5. 튜더 왕조의 계승
헨리 튜더는 어머니 마거릿 보퍼트가 존 곤트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브르타뉴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62] 1485년, 헨리는 리처드 3세의 평판이 실추된 틈을 타 정변을 일으켜 승리하고 헨리 7세로 즉위했다.[62] 헨리 7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부계 혈족이 아니었으므로, 그로부터 튜더 왕가가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과 후손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에드워드 4세의 딸 엘리자베스 요크와 결혼하여 요크 왕가의 상속권까지 획득함으로써,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 양쪽의 상속권을 하나로 통합했다.[62]
6. 유산
랭커스터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존 곤트를 시조로 한다. 존 곤트는 헨리 그로스먼트의 딸 블랑쉬와 결혼하여 랭커스터 영지를 상속받았고, 1362년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받았다. 존 사후 리처드 2세는 영지를 몰수하고 그의 아들 헨리 볼링브로크를 추방했으나, 1399년 헨리는 귀국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에게 있었으며, 이는 장미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헨리 4세의 왕위는 헨리 5세와 헨리 6세에게 이어졌지만, 헨리 6세는 랭커스터 왕가의 마지막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6. 1. 정치와 전쟁
에드워드 3세의 아들 존 곤트가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이다. 존은 상속받은 영지가 적었지만, 헨리 그로스먼트의 딸 블랑쉬와 결혼하여 랭커스터 영지를 상속받았다. 1362년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받았다. 존 사후 리처드 2세가 영지를 몰수하고 아들 헨리 볼링브로크를 추방했다.1399년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를 방문한 사이, 헨리는 귀국하여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위 계승권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에게 있었다. 이 문제는 장미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헨리 4세의 왕위는 헨리 5세, 헨리 6세에게 이어졌다. 헨리 5세는 백년 전쟁을 재개하여 1415년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승리하고, 1420년 트루아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헨리 5세는 샤를 6세보다 먼저 사망했고, 헨리 6세가 즉위했다. 잔 다르크의 도움으로 샤를 7세가 1429년 즉위했고, 잉글랜드는 1453년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상실했다.
헨리 6세는 정신 질환을 앓았고, 1461년 에드워드 4세에게 폐위되었다. 1470년 복위했으나 곧 다시 폐위되었고, 1471년 사망했다.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도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사망하여 랭커스터 왕가는 단절되었다.
랭커스터 왕가의 문장은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은 흰 장미여서 이 전쟁을 장미 전쟁이라 부른다. 헨리 4세 즉위는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으로, 귀족들의 왕위 야망을 자극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9] 헨리는 법적 정당성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30] 앤 드 모티머와 캠브리지 백작 리처드의 결혼으로 요크 가문의 계승권이 강화되었다.[31]
헨리 4세는 재정 문제, 반란, 건강 악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퍼시 가문의 반란,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로프 처형 등이 있었다.[34] 오와인 글린드위르의 반란은 1409년 진압되었으나, 전투는 1421년까지 계속되었다.[36]
역사가들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이 랭커스터 가문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64] 셰익스피어는 튜더 왕조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윤색하여 랭커스터 가문을 묘사했다.[66]
존 곤트의 딸 필리파를 통해 랭커스터 가문의 혈통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왕실로 이어졌다.[68] 헨리 튜더는 보포르 가문의 후손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69] 헨리 7세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여 튜더 왕조를 열었다.[70]
6. 2. 종교, 교육, 예술
랭커스터 가문 사람들은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헨리 4세는 영어 성경을 소유한 최초의 잉글랜드 국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존 트웬지의 시성을 지원하고, 은둔 수녀 마가렛 펜색스에게 연금을 지급했으며, 웨스트민스터의 여러 은둔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25] 그의 가계부에는 많은 빈민들에게 지급된 전통적인 지원금(1406년 부활절에는 1만 2천 명)과 하루에 2펜스씩 받는 24명의 "왕의 기도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의 교회에 대한 의존은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었다. 아룬델 대주교는 랭커스터 가문에 중요한 지원을 제공했고, 다른 주교들도 그의 뜻에 따랐다. 그 대가로 교회는 이단에 대한 종교적 정통성에 대한 지원을 요구했다. 롤라드파는 진압되었고, 이단은 De haeretico comburendo에 따라 영국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가 되었지만, 헨리 4세는 롤라드파에 동정적인 그의 랭커스터 가신들을 지나치게 적대시할 여유가 없었다.[25]헨리 5세는 "하느님의 영광을 높이고, 교회를 확장하며, 조국을 해방시키고, 왕국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는 것"을 목표로 했다.[71] 그는 독실한 신앙심을 지니고 교회 문제에 참여했으며, 국왕으로서 그의 역할은 하느님을 공경하고, 교회를 확장하고, 이단과 싸우고, 기존의 사회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를 포함한 그의 모든 승리는 신의 개입으로 돌렸다. 헨리 5세는 1415년 스크롭 대주교 처형에 대한 속죄로 시온 수도원을 세웠고, 런던에 세 개의 수도원(카르투시오회, 브리지틴회, 셀레스틴회 수도회)을 설립했다.[71] 마찬가지로 독실했던 헨리 6세는 이튼 칼리지와 킹스 칼리지(케임브리지)를 설립했으며, 킹스 칼리지 채플과 이튼 칼리지 채플을 포함한 건물들에 지속적인 교육적, 건축적 유산을 남겼다.[72]

랭커스터 정권은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거짓말에 의해 설립되고 정당화되었다. 이는 "일련의 위헌적인 행위"로 묘사되었으며, "세 가지 주요 위증 행위"에 근거하고 있다.[73] 역사가 K.B. 맥퍼레인은 "중세 영국 정치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헨리 4세처럼 정보 공급이 효과적으로 조작된 다른 사례를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74] 랭커스터 가문은 헨리 4세가 왕위에 오르기 몇 년 전부터 찬사시를 위해 시인들을 후원했는데, 그중에는 1368년경 랭커스터의 블랑슈에게 공작 부인의 책을 헌정한 제프리 초서도 포함되어 있다. 1400년 헨리 4세의 봉급을 받는 시인들은 선전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존 고워는 1399년 "리처드 2세 폐위 기록 및 과정"이라는 랭커스터 가문의 공식 기록을 바탕으로 그의 삼중 연대기를 저술했다. 고워는 헨리 4세에게 헌정된 "평화 찬양"을 포함하여 몇몇 호의적인 작품들을 더 만들었다.[75]
역사학자들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이 중세 후기 시대에 대한 인식에 미친 영향이 학술 연구를 능가한다는 점에 실망해왔다.[64]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연대기는 존왕부터 헨리 8세까지 이어지지만, 랭커스터 가문 구성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8편의 희곡이 주를 이룬다.[65] 이 희곡들은 다음과 같다.
역사학자 노먼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 희곡들은 튜더 시대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요구 사항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 사실적으로 부정확하지만, 과거와 랭커스터 가문이 신화, 전설, 사상 및 대중적 오해의 관점에서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논쟁적인 정치적, 종교적 문제들을 피해 튜더 시대 영국이 중세의 갈등을 거부하고 조화와 번영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것을 모호하게 묘사했다. 유명한 애국적인 "홀을 든 섬" 연설은 생애 대부분을 아키텐에서 보낸 존 오브 곤트가 한 것으로, 영국의 편견을 보여주는 시적 허용의 일부이다. 헨리 5세는 프랑스에 대한 공감이 거의 없는 일방적인 묘사이다.[66] 이러한 역사적 대사의 많은 부분이 현실주의보다는 역사적 신화를 보여준다.[67]
6. 3. 셰익스피어 역사극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랭커스터 가문의 흥망성쇠를 다루며, 이들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64] 셰익스피어는 튜더 왕조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랭커스터 가문의 역사를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관객들에게 애국심과 교훈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결합하여 랭커스터 가문에 대한 신화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66]셰익스피어의 역사극 연대기는 존왕부터 헨리 8세까지 이어지지만, 랭커스터 가문 구성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음 8편의 희곡이 주를 이룬다.[65]
리처드 2세 2막 1장 40-50행에서 존 오브 곤트의 연설은 잉글랜드에 대한 강한 애국심을 보여준다.[63]
하지만, 역사학자 노먼 데이비스에 따르면, 이 희곡들은 튜더 시대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요구 사항에 의해 제약을 받았으며, 사실적으로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과거와 랭커스터 가문이 신화, 전설, 사상 및 대중적 오해의 관점에서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보여준다.[66]
7. 역대 통치자
1399년 존 고트가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공령을 몰수했다. 이에 존의 아들인 헨리 볼링브룩이 반란을 일으켜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라 랭커스터 왕조를 열었다.
1385년, 존의 동생 에드먼드 오브 랭글리는 요크 공 작위를 받아 요크 가문을 일으켰고, 이는 랭커스터 가문의 강력한 경쟁 세력이 되었다.
헨리 5세는 백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헨리 6세 시대에 그 성과는 대부분 상실되었다. 1455년에는 요크 가문과의 장미 전쟁이 발발했고, 1461년 헨리 6세는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되었다. 1470년 헨리 6세는 잠시 복위했지만, 1471년 에드워드 4세의 반격으로 붙잡혀 살해되었다. 이후 랭커스터 가문은 1485년까지 요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헨리 7세는 어머니 마가렛 보퍼트가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인 보퍼트 가문 출신이라는 점을 근거로 왕위 계승권을 주장,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를 제거하고 에드워드 4세의 딸과 결혼하여 튜더 왕조를 열었다.
초상 | 이름 | 재위 기간 | 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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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헨리 4세 | 1399년 9월 30일 ~ 1413년 3월 20일 | 에드워드 3세의 손자, 곤트의 존의 아들 | 사촌 리처드 2세를 폐위 |
헨리 5세 | 1413년 3월 20일 ~ 1422년 8월 31일 | 헨리 4세의 아들 | 아쟁쿠르 전투 승리 | |
![]() | 헨리 6세 | 1422년 8월 31일 ~ 1461년 3월 4일 1470년 10월 30일 ~ 1471년 4월 11일 | 헨리 5세의 아들 | 장미 전쟁 발발, 1471년 런던탑에서 살해됨 |
7. 1. 랭커스터 백작 및 공작
초상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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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곤트 | 1340년 3월 6일 | 1399년 2월 3일 |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 랭커스터 왕가의 시조 |
![]() | 헨리 볼링브로크 | 1366년 4월 3일 | 1413년 3월 20일 | 존 곤트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 1399년 9월 30일 잉글랜드 국왕 즉위 |
![]() | 헨리 먼모스 | 1386년 9월 16일 | 1422년 3월 31일 | 헨리 4세의 아들, 1413년 잉글랜드 국왕 즉위 |
- 헨리 볼링브로크: 1399년 9월 30일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가 되면서 랭커스터 공작가는 왕위에 합쳐짐. 이후 장자인 헨리 먼모스를 위해 웨일스 공작,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1399년 11월 10일에 창설.
- 헨리 먼모스: 1413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로 등극하면서 모든 작위가 왕위에 통합.
헨리 드 그로스몽은 1299년과 1314년 사이에 그로스몽 성(몬머스셔)에서 태어났다.[12] 그는 에드워드 3세와 동시대 인물로, 그의 통치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신뢰받는 사령관이었다.[14] 1330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백년 전쟁 발발 후 여러 외교 사절단과 소규모 원정에 참여했다.[15], [16] 1345년, 오베로슈 전투에서 승리하여 "랭커스터의 군사 경력 중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묘사되었다.[18] 에드워드 3세는 헨리를 가터 훈장 창립 기사로 임명하고,[20] 랭커스터 공작으로 임명하여 랭커셔를 백작령 지위로 격상시켰다.[21]
1350년, 헨리는 윈첼시 해전에서 해상 승리를 거두며 흑태자 에드워드의 생명을 구했다.[22] 1351년부터 1352년까지 십자군을 위해 프러시아에서 활동했다.[23]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건트의 존을 헨리의 상속녀 랭커스터의 블랑슈와 결혼시켰다. 헨리 사후, 에드워드는 건트에게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수여했고, 건트는 잉글랜드에서 에드워드 다음으로 부유한 지주가 되었다. 건트는 생전에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399년 사망하자 그의 토지는 리처드 2세에 의해 몰수되었다. 건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헨리 볼링브로크는 랭커스터 상속 재산 복원을 주장했지만, 리처드 2세에 대한 대중의 반대를 통합하여 왕국과 리처드를 장악, 콘위 성에서 항복을 받아냈다. 헨리는 위원회를 통해 리처드를 퇴위시키고, 불법적인 의회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26]
'''랭커스터 가'''(House of Lancaster)는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인 존 오브 곤트를 시조로 하는 플랜태저넷 가의 분가이다. 가문 이름은 존 오브 곤트 이후 이 가문이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랭커스터 가문의 시작은 1267년 헨리 3세의 둘째 아들 에드먼드가 랭커스터 백작에 서임된 것이다.
에드먼드의 장남 토마스는 6개의 백작령을 겸임하며 잉글랜드 최대 귀족으로 영향력을 강화했지만, 사촌 에드워드 2세와 대립하여 영지를 몰수당하고 사형당했다. 그러나 토마스의 동생 헨리의 아들 헨리 오브 그로스몬트는 에드워드 3세 치하에서 백년 전쟁에 활약하여 1351년 랭커스터 공작 칭호를 얻었다. 헨리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딸 블랑슈가 존 오브 곤트와 결혼하여 존이 랭커스터 공작이 되었다.
7. 2. 랭커스터 왕조 국왕
헨리 4세는 1399년부터 1413년까지 재위한 잉글랜드 국왕이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의 아들로, 사촌인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다.[29] 헨리 4세의 즉위는 장미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힘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은 플랜태저넷 왕조의 원칙을 깨뜨린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29]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재정 문제, 반란, 건강 악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33]
헨리 5세는 1413년부터 1422년까지 재위한 잉글랜드 국왕으로, 헨리 4세의 아들이다. 그는 백년 전쟁에서 아쟁쿠르 전투의 대승을 포함하여 프랑스에 대한 주요 군사 원정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41] 1422년 뱅센에서 이질로 사망하였다.[38]
헨리 6세는 1422년부터 1461년까지, 그리고 1470년부터 1471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재위한 잉글랜드 국왕이다. 헨리 5세의 아들로, 1살도 채 되지 않아 왕위에 올랐다.[42] 그는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으며, 장미 전쟁 발발의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1461년 요크 왕조의 에드워드 4세에게 왕위를 빼앗겼고, 1470년에 잠시 복위했지만 1471년 런던탑에서 살해되었다.[62]
초상 | 이름 | 재위 기간 | 가계 | 비고 |
---|---|---|---|---|
헨리 4세 | 1399년 9월 30일 ~ 1413년 3월 20일 | 에드워드 3세의 손자, 곤트의 존의 아들 | 사촌 리처드 2세를 폐위 | |
헨리 5세 | 1413년 3월 20일 ~ 1422년 8월 31일 | 헨리 4세의 아들 | 아쟁쿠르 전투 승리 | |
헨리 6세 | 1422년 8월 31일 ~ 1461년 3월 4일 1470년 10월 30일 ~ 1471년 4월 11일 | 헨리 5세의 아들 | 장미 전쟁 발발, 1471년 런던탑에서 살해됨 |
8. 문장
랭커스터의 붉은 장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의 금장미 문장에서 유래했다. 그의 가족 구성원들은 왕실 문장의 변형을 사용했는데, 왕의 동생인 랭커스터 백작은 붉은 장미를 사용했다.[84] 랭커스터의 붉은 장미는 장미 전쟁 기간 동안 랭커스터 가문의 문장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장미 착용"에 대한 증거로는 잉글랜드의 헨리 6세로부터 직접 받은 영지를 매년 붉은 장미를 바치는 조건으로 소유해야 했던 토지 소유 기록이 있다.[85] 그러나 장미 전쟁 중에 랭커스터 가문이 실제로 붉은 장미를 상징으로 사용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에이드리언 에일스는 붉은 장미가 "아마도 헨리 7세가 기존의 요크 가문의 흰 장미에 빠르게 대응하면서, 상징이 말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시대에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또한 헨리 7세가 가장 유명한 장식 문장인 튜더 장미를 만들고 활용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소위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와 요크의 흰 장미를 결합한 것이다. 이러한 꽃의 결합은 평화와 조화의 회복, 그리고 1486년 1월 요크의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을 깔끔하게 상징했다. 그것은 단순한 장식 선전의 훌륭한 작품이었다.[86] 튜더 장미는 잉글랜드의 식물 문장으로 사용된다 (스코틀랜드는 엉겅퀴, 아일랜드는 클로버, 웨일스는 파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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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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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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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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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orial général, contenant la description des armoiries des familles nobles et patriciennes de l'Europe: précédé d'un dictionnaire des termes du blason
G.B. van Goor
1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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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85]
서적
Concise Encyclopedia of Heraldry
Brackten Books
1915
[86]
간행물
Heraldry in Medieval England: Symbols of Politics and Propaganda
Boydell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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