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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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중 파키스탄의 탄압에 맞서 설립된 정부이다.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다수당이 되었으나, 서파키스탄의 반발로 국회 개원이 무기한 연기되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독립을 선포했다. 1971년 4월 17일, 임시정부는 무지브나가르에서 선서식을 거행하고,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대통령으로, 사이드 나즐룰 이슬람을 대통령 직무대행으로 하는 내각을 구성했다. 임시정부는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외교 활동과 군사 작전을 수행했으며,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의 항복과 함께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1972년 1월 12일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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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글라데시 임시정부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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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국호 | 방글라데시 |
| 공식 명칭 |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 임시 정부 |
| 로마자 표기 | Asthāẏī Bāṁlādēśa Sarakāra Mujibanagara Sarakāra |
| 일반 명칭 | 방글라데시 |
| 지위 | 망명 정부 |
| 시대 |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
| 수도 | 다카 (주장), 무지브나가르, 콜카타 (망명) |
| 공용어 | 벵골어 |
| 국가 | "나의 황금 벵골" |
| 통화 | 방글라데시 타카 |
| 면적 | 148,460 km² |
| 건국 | 1971년 4월 10일 |
| 해체 | 1972년 1월 12일 |
| 현재 국가 | 방글라데시 |
| 정치 | |
| 정치 체제 | 단일 국가 준 대통령제 임시 정부 |
| 대통령 |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
| 대통령 (대행) | 사이드 나즈룰 이슬람 |
| 총리 | 타주딘 아흐마드 |
| 입법부 | 없음 (법률상) 자문 위원회 (사실상) |
| 정부 | |
| 내각 | 방글라데시 임시 내각 |
| 집권 정당 | 방글라데시 아와미 연맹 |
| 이전 정부 | 동파키스탄 |
| 다음 정부 | 제2차 셰이크 무지브 내각 |
| 역사 | |
| 형성 | 1971년 4월 10일 |
| 내각 선서 | 1971년 4월 17일 |
| 군사적 및 정치적 책임 | 1971년 12월 22일 |
| 해체 | 제헌의회에 의해 1972년 1월 12일 해체 |
2. 배경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압승을 거두었지만, 서파키스탄은 권력 이양을 거부했다.[7] 1971년 3월 1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국회 개원을 무기한 연기했고, 이에 셰이크 무지부르는 동파키스탄에서 국민들에게 비협조 운동을 촉구했다. 야히아 칸은 다카에서 회담을 제안했지만, 3월 25일 협상은 결렬되었다.
같은 날 밤, 파키스탄 군은 서치라이트 작전을 개시하여 방글라데시인들을 탄압하고 수천 명을 학살했다. 셰이크 무지부르는 체포되기 전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포했다.[7]
2. 1. 1970년 파키스탄 총선
1970년 파키스탄 총선은 수년간의 군사 통치 후 파키스탄에서 처음으로 치러진 선거로, 1970년 12월 7일에 실시되었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은 300석 중 160석을 확보하여 파키스탄 국회에서 다수당이 되었다.[7] 아와미 연맹의 압승으로 인해 서파키스탄 야당과 군부는 불안감을 느꼈다.선거 후 야히아 칸 대통령은 국회를 개원하고, 선출된 의원들은 6개항 요구를 준수하는 새 헌법을 초안으로 작성할 예정이었다.
2. 2. 서파키스탄의 권력 이양 거부
1970년 12월 7일에 치러진 총선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은 300석 중 160석을 확보하여 국회 다수당이 되었다.[7] 선거가 마무리되면서 야히아 칸 대통령은 국민의회를 출범시킬 예정이었고, 선출된 입법자들은 새로운 헌법을 초안할 예정이었다. 아와미 연맹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6점 요구 사항을 준수하는 헌법을 작성하는 데 장애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서파키스탄 야당과 군부 체제 사이의 불안감이 증가하고 있었다.[7]1971년 3월 1일, 야히아 칸은 3월 3일로 예정되었던 국회 개원식을 무기한 연기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이 헌법 제정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주는 것이 시급했다"라고 말했다. 셰이크 무지브는 즉시 동파키스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면서 국민들의 비협조 운동을 촉구했다.
3월 3일, 야히아 칸은 헌법 분쟁 해결을 위해 3월 10일 다카에서 원탁 회의를 개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3월 7일, 셰이크 무지브는 대규모 집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무기한 총파업을 요구하며, 군사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3월 15일, 야히아 칸은 다카에 도착했고 다음 날 무지브를 만났다. 그들 사이에는 3월 말까지 일련의 만남이 있었다. 야히아의 주장에 따라 서파키스탄 야당(PPP) 지도자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3월 21일부터 그들과 합류했다. 무지브는 야히아에게 자신의 당이 서파키스탄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 회담 동안, 동파키스탄에서의 전쟁 준비 소식이 아와미 연맹 지도부에 전달되었다. 서파키스탄에서 병력과 무기가 집중되고 있었다. 무지부르는 야히아에게 증원군을 중지할 것을 촉구하며 그 결과를 경고했다.
아와미 연맹 지도부는 3월 24일 최종 협상이 열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날은 아무런 회의 없이 통과되었다. 3월 25일, 그들은 야히아의 사절단이 다카를 비밀리에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논의가 끝나지 않은 채 평화적인 해결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
2. 3. 동파키스탄의 저항과 탄압
1970년 12월 7일에 실시된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이끄는 아와미 연맹이 300석 중 160석을 확보하여 국회 다수당이 되었다. 이로 인해 서파키스탄 야당과 군부 체제 사이에 불안감이 커졌다.[7]1971년 3월 1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무기한 연기했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이 헌법 제정 문제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주는 것이 시급했다"라고 말했다. 이에 셰이크 무지브르는 즉각 동파키스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면서 국민들에게 비협조 운동을 촉구했다. 이 운동은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사람들은 군대에 의해 부과된 통행금지령을 자발적으로 무시했다.
3월 3일, 야히아 칸은 헌법 분쟁 해결을 위해 3월 10일 다카에서 원탁 회의를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1971년 3월 7일, 셰이크 무지브르는 대규모 집회에서 역사적인 연설을 통해 무기한 총파업을 요구하며, 국민들에게 비상사태에 대비할 것을 요청하고 군사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3월 15일, 야히아 칸은 다카에 도착했고 다음날부터 무지브르와 회담을 가졌다. 3월 21일부터는 서파키스탄 야당(파키스탄 인민당) 지도자 줄피카르 알리 부토도 합류했다. 무지브르는 야히아에게 자신의 당이 서파키스탄의 이익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러나 회담 동안 서파키스탄에서 병력과 무기가 집중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무지브르는 야히아에게 증원 중단을 촉구하며 경고했다. 3월 24일 최종 협상이 예상되었지만, 회의 없이 지나갔다. 3월 25일, 야히아의 사절단이 비밀리에 다카를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평화적인 해결에 대한 희망은 사라졌다.
셰이크 무지브르는 당원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고 명령했지만, 자신은 무고한 파키스탄인 학살의 구실이 될 것을 우려하여 3월 25일까지 탈출을 거부했다. 같은 날 밤, 야히아가 비밀리에 다카를 떠난 후, 파키스탄 군대는 서치라이트 작전을 개시하여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탄압하고 수천 명을 살해했다. 아와미 연맹 지도부는 뿔뿔이 흩어졌고, 며칠 동안 서로 연락이 끊겼다.
셰이크 무지브르는 3월 25일 밤에 체포되기 전,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방송했다.
3. 임시정부 수립 과정
1971년 3월부터 파키스탄군이 검색등 작전으로 동파키스탄 주민을 탄압하자, 선거로 선출된 동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4월 17일 무지브나가르에서 임시정부 선서식을 가졌다. 원래 대통령은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었지만, 3월 25일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사이드 나주룰 이슬람이 대통령직을 대행하였다. 무지브르 라흐만은 체포 전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포하였다.[1]
이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인도 등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였고, 1971년 12월 16일에 파키스탄은 항복하였다. 이듬해인 1972년 1월 12일,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함께 임시정부는 해체되었다.
3. 1. 망명과 인도 지원
아와미 연맹의 사무총장 타주딘 아흐메드와 아미르울 이슬람은 1971년 3월 30일 다카를 탈출하여 인도 국경을 넘었다.[1] 이들은 인도 국경 안전대(BSF)의 지역 책임자인 콜록 마줌다르에 의해 국경 초소에서 환영받았으며, 마줌다르는 즉시 그들을 콜카타로 데려갔다.[1] 3월 30일 밤과 그 다음 날, 타주딘과 이슬람은 BSF 사령관 쿠스로 파람푸르즈 루스타미지와 논의를 가졌다.[2] 4월 1일, 타주딘과 이슬람은 마줌다르와 함께 군용 수송기편으로 델리로 향했다.[3]델리에서 타주딘은 4월 4일 인도의 총리 인디라 간디를 만났다.[4] 다음날 두 번째 만남에서 간디는 셰이크 무지브가 체포되어 파키스탄으로 이송되었지만 파키스탄은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고 알렸다.[5] 이 회담에서 인도는 방글라데시 난민들을 위한 국경을 개방하고, 방글라데시 정부가 인도 영토 내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두 가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6] 인도 정부는 또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6]
타주딘이 델리에 있는 동안, 아와미 연맹 지도부의 일부는 콜카타에 모였다. 4월 8일 콜카타로 돌아온 타주딘은 A H M 카마루자만을 포함한 지도자 그룹을 만나 델리 회담의 결과와 임시 정부 수립을 알렸다.[7]group=lower-alpha 그곳에 있던 일부 지도자들은 타주딘의 총리 자격에 의문을 제기했다.[8] 청년 지도자 셰이크 마니는 내각 구성 자체를 거부하고 무장 저항만을 수행하는 혁명 위원회 설립을 제안했다.[7] 아미르울 이슬람은 혁명 위원회의 부적절성과 합법적인 정부의 필요성을 설명했고, 카마루자만의 중재를 거쳐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타주딘의 제안을 수락했다.[7]
4월 10일, 타주딘, 아미르울 이슬람, 셰이크 마니 등은 인도 정부로부터 빌린 더글러스 C-47 스카이트레인 비행기를 타고 국경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른 각료들을 찾아 나섰다.[9] 저공 비행을 하며 비행기는 국경의 여러 비행장에 착륙했다.[9] 도중 여러 곳에서 무하마드 만수르 알리, 압둘 만난, 시에드 나즐룰 이슬람 등의 각료들을 태운 후, 4월 11일, 트리푸라 주의 주도인 아가르탈라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메드와 M. A. G. 오스마니 대령을 포함한 많은 다른 아와미 연맹 지도자들이 피난해 있었다.[9]
아가르탈라에서 아와미 연맹 지도부는 내각 의제와 각료 임명을 논의했다. 셰이크 무지브 대통령이 없는 상황에서 시에드 나즐룰 이슬람이 대통령 직무대행을, 콘다케르 모스타크가 외무부 장관을, 카마루자만이 국무장관을, 만수르 알리가 재무부 장관을, 압둘 만난이 정보방송부 장관을 맡았고,[9] 오스마니는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
3. 2. 임시정부 구성
1971년 3월 25일, 파키스탄군의 강경 진압 이후 아와미 연맹 사무총장 타주딘 아흐메드는 인도로 피신하여 4월 4일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를 만났다.[1] 간디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체포되었음을 알리고, 타주딘은 셰이크 무지브를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정부 구성을 알렸다.[2] 이 회담에서 인도는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한 국경 개방과 임시정부의 인도 내 활동을 허용했다.[3]콜카타에 모인 아와미 연맹 지도부 일각에서는 타주딘의 인도 총리 단독 회담에 반발했지만, A H M 카마루자만의 중재로 임시정부 구성에 합의했다.[4] 4월 10일, 타주딘 등은 더글러스 C-47 스카이트레인 비행기로 국경 주변에 흩어진 각료들을 찾아 나섰고, 트리푸라 주 아가르탈라에서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메드 등과 합류했다.[5]
아가르탈라에서 셰이크 무지브가 없는 상황에서 시에드 나즐룰 이슬람이 대통령 직무대행을, 콘다케르 모스타크가 외무부 장관을, 카마루자만이 국무장관을, 무하마드 만수르 알리가 재무부 장관을, 압둘 만난이 정보방송부 장관을 맡았고, M. A. G. 오스마니가 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6]
4월 17일, 쿠시티아 지구(현 메헤르푸르 지구) 바이디아낫탈라(후에 무지브나가르로 개칭)에서 임시정부 선서식이 거행되었다.[7] 무하마드 유수프 알리 교수가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을 낭독했고,[8] 이 선언은 4월 10일부터 소급 적용되었다.[5] 임시정부는 콜카타에 정착하여 활동했다.[9]
3. 3. 무지브나가르 선서식
1971년 4월 17일, 쿠시티아 지구(현재의 메헤르푸르 지구) 바이디아낫탈라(Baidyanathtala)에서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의 선서식이 거행되었다. 이 마을은 인도-방글라데시 국경에 위치해 있었으며, 플라시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서 멀지 않은 망고 과수원에서 식이 진행되었다.[8] 의식은 압둘 만난(Abdul Mannan)이 집행하였고, 무하마드 유수프 알리 교수가 아미르울 이슬람이 작성한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을 낭독했다. 아미르울 이슬람은 파키스탄 국민의회 의원이자 다카 고등법원의 변호사였으며, 캘커타 고등법원 변호사인 수브라타 로이 초우드리의 도움을 받아 독립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 선언은 1971년 4월 10일부터 소급 적용되어 효력을 발생했다.[15]선서식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며 타주딘 아흐메드는 이 장소의 이름을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을 기념하여 무지브나가르로 명명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망명 정부는 일반적으로 무지브나가르 정부로 알려지게 되었다. 무지브나가르는 참가자들이 파키스탄군의 습격을 우려하여 선서식 직후 곧 떠났으며,[16] 정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콜카타에 망명 상태로 머물렀다.[9]
1971년 4월 10일에 발표된 독립 선언문은 1972년까지 방글라데시의 임시 헌법 역할을 했으며, 임시 정부의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10] 선언문은 파키스탄이 3월 3일에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해 선출된 의원들을 소집하지 않고 "부정하고 배신적인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3월 26일에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여 자결권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켰다고 밝혔다.[10]
그러한 배신적인 행위의 사실과 상황에 비추어, 방글라데시 7,500만 인민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인 방반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Bangabandhu Sheikh Mujibur Rahman)은 방글라데시 인민의 정당한 자결권을 충분히 행사하여 1971년 3월 26일 다카(Dacca)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방글라데시 인민에게 방글라데시의 명예와 통합을 수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그러한 배신적인 행위의 사실과 상황에 비추어, 방글라데시 7,500만 인민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인 방반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은 방글라데시 인민의 정당한 자결권을 충분히 행사하여 1971년 3월 26일 다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방글라데시 인민에게 방글라데시의 명예와 통합을 수호할 것을 촉구했습니다.영어
이 선언은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된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법 앞의 평등", "인간의 존엄성", "사회 정의"를 기본 원칙으로 하는 방글라데시를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10]
우리는 방글라데시 인민의 선출된 대표로서, 그 의지가 최고인 방글라데시 인민이 우리에게 준 권한에 따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상호 협의를 거쳐 방글라데시 인민에게 평등, 인간의 존엄성, 사회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방글라데시를 주권을 가진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방반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Bangabandhu Sheikh Mujibur Rahman)이 이미 한 독립 선언을 확인합니다.|우리는 방글라데시 인민의 선출된 대표로서, 그 의지가 최고인 방글라데시 인민이 우리에게 준 권한에 따라 의무를 다하여 스스로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상호 협의를 거쳐 방글라데시 인민에게 평등, 인간의 존엄성, 사회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방글라데시를 주권을 가진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방반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이미 한 독립 선언을 확인합니다.영어
4. 임시정부의 구조와 활동
1971년 4월 10일에 발표된 독립 선언은 1972년까지 방글라데시의 임시 헌법 역할을 했으며, 임시정부의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 선언은 파키스탄이 1971년 3월 3일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해 선출된 입법자들(파키스탄 국민의회)을 소집하지 않고 "부정하고 배신적인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3월 26일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하여 자결(self-determination)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켰다고 밝혔다.[10]
Bangabandhu Sheikh Mujibur Rahman|방반두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영어은 방글라데시 7,500만 인민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서, 1971년 3월 26일 다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방글라데시 인민에게 방글라데시의 명예와 통합을 수호할 것을 촉구했다.[10]
이 선언은 선출된 입법자들로 구성된 제헌의회의 구성과 "법 앞의 평등", "인간의 존엄성", "사회 정의"를 기본 원칙으로 하는 방글라데시를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방글라데시 인민의 선출된 대표로서, 방글라데시 인민이 부여한 권한에 따라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상호 협의를 거쳐 방글라데시 인민에게 평등, 인간의 존엄성, 사회 정의를 보장하기 위해 방글라데시를 주권을 가진 인민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이미 한 독립 선언을 확인했다.[10]
파키스탄 공무원(Civil Service of Pakistan) 소속 방글라데시인 다수가 방글라데시 정부로 전향했다. 악바르 알리 칸 등은 새로 설립된 방글라데시 공무원(Bangladesh Civil Service)의 초기 지도자들이었다. 마우두드 아흐메드는 총무국장을 역임했다.[13] 임시정부는 정교한 행정부 부처 체계를 수립했다. 무함마드 유수프 알리와 J. G. 보믹은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한 구호 담당 최고 책임자를 역임했다. 저명한 예술가 콰무룰 하산은 미술 및 디자인 국장을 역임했다. 콜카타와 아가르탈라가 망명 정부의 주요 중심지였다.
1971년 5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의 공식 라디오 방송국인 스와딘 방글라 베타르 켄드라는 인도 정부에서 할당받은 송신기를 사용하여 방송을 시작했다.[1] 이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의 문화 선전 부서 역할을 했다.
4. 1. 내각 구성
| 직책 | 역임자 |
|---|---|
| 대통령 |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
| 부통령 (권한대행) | 시드 나줄 이슬람 |
| 총리 | 타주딘 아마드 |
| 재무부 장관 | 만수르 알리 |
| 방글라데시군 참모총장 | 대령 M. A. G. 오스마니 |
| 외무부 장관 |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마드 |
| 내무부 장관 | 아불 하스낫 무하마드 카마루즈만 |
임시정부의 각 부서는 다음과 같다.[12]
# 내각 비서처
# 일반행정부
# 구호 및 재활부
# 의회 담당 부서
# 농업부
# 토목부
임시정부 산하 자치 기구는 다음과 같다.[12]
# 기획위원회
# 무역 및 상업위원회
# 청소년 및 수용소 관리위원회
# 구호 및 재활위원회
# 이주민 복지위원회
파키스탄 공무원(Civil Service of Pakistan) 소속이었던 다수의 방글라데시인들이 방글라데시 정부로 전향했다. 카말 우딘 시디키, 누룰 카데르 칸,[12] S. A. 사마드, 칸다케르 아사두자만, 사다트 후세인, 악바르 알리 칸은 새로 설립된 방글라데시 공무원(Bangladesh Civil Service)의 초기 지도자들이었다. 마우두드 아흐메드는 총무국장을 역임했다.[13] 임시정부는 정교한 행정부 부처 체계를 수립했다. 무함마드 유수프 알리와 J. G. 보믹은 방글라데시 난민을 위한 구호 담당 최고 책임자를 역임했다. 저명한 예술가 콰무룰 하산은 미술 및 디자인 국장을 역임했다. 콜카타와 아가르탈라가 망명 정부의 주요 중심지였다.
4. 2. 행정 구역
방글라데시는 1971년 6월 2일, 선출된 입법자들이 통치하는 구역 행정 위원회(Zonal Administrative Council)라는 5개의 행정 단위로 나뉘었다.[1] 7월 27일에는 구역 위원회의 수가 9개로 늘어났고,[2] 9월 18일에는 11개로 다시 늘어났다.[3] 각 행정 구역의 본부는 인도 영토에 위치했다.[4]| 번호 | 구역 | 본부 | 관할 구역 | 위원장 |
|---|---|---|---|---|
| 1 | 남동부 구역 I | 사브룸(Sabroom) | 치타공, 치타공 언덕 지대, 노아칼리 지구의 페니 지역 | 누룰 이슬람 초우드후리(Nurul Islam Chowdhury) |
| 2 | 남동부 구역 II | 아가르탈라(Agartala) | 다카, 코밀라, 페니 지역을 제외한 노아칼리 지구 | 자후르 아흐메드 초우드후리(Zahur Ahmed Chowdhury) |
| 3 | 동부 구역 | 다르마나가르(Dharmanagar) | 실렛 지구의 하비간지와 몰비바자르 지역 | M. A. 라브 대령 |
| 4 | 북동부 구역 I | 다우키(Dawki) | 실렛 지구의 사다르와 수남간지 지역 | 데완 파리드 가지(Dewan Farid Gazi) |
| 5 | 북동부 구역 II | 투라(Tura, Meghalaya) | 미멘싱, 탕가일 | 샴술 라흐만 칸 |
| 6 | 북부 구역 | 쿠치베하르(Coochbehar) | 랑푸르 | 마티우르 라흐만 |
| 7 | 서부 구역 I | 발루르가트(Balurghat) | 디나즈푸르, 보그라 | 아브둘 라힘 |
| 8 | 서부 구역 II | 말다(Maldah) | 라자샤히 | 아슈라풀 이슬람 |
| 9 | 남서부 구역 I | 크리슈나나가르(Krishnanagar, Nadia) | 파브나, 쿠슈티아 | 아브둘 라우프 초우드후리 |
| 10 | 남서부 구역 II | 방가온(Bangaon) | 파리드푸르, 제소르 | 파니 부샨 마줌다르 |
| 11 | 남부 구역 | 바라사트(Barasat) | 바리샬, 파투아칼리 | M A 모멘 |
각 구역에는 구역 보건 담당관, 교육 담당관, 구호 담당관, 기술 담당관, 경찰 담당관, 정보 담당관, 회계 담당관이 임명되었다.[4]
파키스탄 공무원(Civil Service of Pakistan) 출신 방글라데시인 다수가 방글라데시 정부로 전향했다. 카말 우딘 시디키, 누룰 카데르 칸,[12] S. A. 사마드, 칸다케르 아사두자만, 사다트 후세인, 악바르 알리 칸은 새로 설립된 방글라데시 공무원(Bangladesh Civil Service)의 초기 지도자들이었다. 마우두드 아흐메드(Moudud Ahmed)는 총무국장을 역임했다.[13] 임시정부는 정교한 행정부 부처 체계를 수립했으며, 무함마드 유수프 알리와 J. G. 보믹은 방글라데시 난민 구호 담당 최고 책임자였다. 저명한 예술가 콰무룰 하산(Quamrul Hassan)은 미술 및 디자인 국장을 역임했다.
4. 3. 방글라데시군 (무장 투쟁)
3월 중순 무지브-야히아 회담 기간 동안 동파키스탄 군대의 무장 해제가 진행되었고, 고위 동파키스탄군 장교들은 여러 가지 구실로 전출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파키스탄군 대대에서 복무하던 동파키스탄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곧바로 동벵골 전역에서 파키스탄군에 대한 무장 저항을 시작했다. 이들 대대의 반란 지휘관들은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지 못한 채 4월 4일에 오스마니 대령과 만났다.[11] 이 회의에서 방글라데시군(BDF)이 오스마니 대령을 최고사령관으로 하여 창설되었다.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임시 지휘 체계와 작전 계획이 채택되었다. 타주딘 총리는 뉴델리에 있는 동안 방글라데시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는 4월 10일 라디오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이후 M. A. 랍 중령이 육군 참모총장을 맡았다. 1971년 8월 A. K. 칸드카르 소장이 그의 부총장이 되었다. 1971년 11월 21일 이후 칸드카르는 육군 참모차장(연락)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직책 | 직책 보유자 | 비고 |
|---|---|---|
| 방글라데시군(BDF) 최고사령관 | M A G 오스마니 대령 | |
| 주정부 군사 대표(게릴라 훈련) | 편대장 M. 하미둘라 칸 | 탐가이 주랏(TJ), SH |
| 육군 참모총장 | M. A. 랍 중령 | |
| 참모차장(연락) | A K 칸드카르 소장 |
초기 방글라데시군은 파키스탄군의 동벵골 연대(EBR) 5개 정규 대대(1, 3, 8대대(지아우르 라흐만 소령(HJ) 지휘), 2대대(K M 샤피울라 소령 지휘), 4대대(칼레드 모샤라프 소령 지휘))의 잔여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7월에 오스마니는 지아우르 라흐만의 지휘 아래 3개 대대를 'Z부대'라는 여단으로 통합했다.[12] 마찬가지로 8월~9월에 'S부대'와 'K부대'라는 2개의 여단과 이들 부대를 위한 3개 대대(9, 10, 11 EBR)가 부분적으로 창설되었다.[12]
전국 각지의 건강한 시민들도 무장 저항을 일으켰다. 주로 중화기와 병력 부족으로 파키스탄군의 공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저항 세력 모두 인도 영토로 후퇴했다. 파키스탄 육군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점령된 방글라데시의 여러 지역에서 수천 명의 남성들이 인도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 점령군과의 싸움에 참여하기 위한 무기와 훈련을 구했다.
7월 중순(11일~17일) 콜카타 시어터 로드에 있는 방글라데시 정부 본부에서 열린 BDF 부대 지휘관 회의에서 파키스탄군과 동파키스탄 경비대(EPR) 출신 반란 벵골 병사들로 구성된 정규군은 "정규군"(일반적으로 ''Mukti Fouj''라고 불림)으로 명명되었고, 불규칙 게릴라 전사들은 ''Gono Bahini''(일반적으로 ''Muktijoddha'' 또는 "자유 투사"라고 불림)으로 명명되었다.[13] 부대도 재편성되었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게릴라는 동파키스탄-인도 국경에 있는 캠프에 주둔했다.[11] 11월 21일, 인도군에 합류하여 파키스탄에 대한 방글라데시-인도 연합 공세에 참여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6월 말부터 훈련받은 방글라데시군(BDF) 게릴라 첫 번째 부대(수백 명)가 점령된 방글라데시에 진입하여 작전을 시작했다.[14] 이들은 파키스탄군 기지와 통신 시스템을 반복적으로 기습 공격함으로써 파키스탄군의 작전을 방해했다.
인디라 간디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와 협력하기로 합의했고, 11월 21일부터 인도군이 방글라데시군으로부터 통제권을 장악했다.[15] 국경 지역에는 게릴라전을 위한 훈련을 받는 청년들을 위한 ‘청년 캠프’가 설립되었다. 몇 달 안에 상당한 규모의 게릴라 부대가 조직되었다.
인도는 8월에 소련(USSR)과 우호 조약을 체결했고, 러시아의 무기 공급이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약 500명의 게릴라가 훈련을 받았다.[16] 매달 1,000명의 게릴라를 훈련시켜 총 1만 명으로 늘릴 계획이었다.[16] 8월 말부터 제한적인 훈련과 방글라데시군(BDF)에 대한 지원 외에도 콜카타에 본부를 둔 인도군 동부 사령부(Eastern Command)가 매월 ‘작전 목표’ 설정에 관여했다.[16] 인도군의 B. N. 사르카르(B. N. Sarkar) 소장이 인도 정부와 방글라데시 임시정부 간의 군사 연락 장교로 임명되었다. 해군 작전에서 방글라데시군(BDF) 해군 특수부대는 방글라데시 치타공 항구에 정박 중인 파키스탄 해군 함정 두 척을 폭파했다.[17]
전쟁 초기, 파키스탄군 3개 사단이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에 주둔해 있었다.[18] 3월 25일부터 4월 7일까지 파키스탄군은 파키스탄에서 온 2개 사단의 증원을 받았다. 파키스탄에 대한 결정적인 공세를 위해 인도군은 중국과의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북부 전선에 주둔한 병력으로 증원되었다. 인도 군사 전략가들은 겨울에 결정적인 공세를 계획했다.[18] 한편, 방글라데시군은 국경 초소를 파괴하여 게릴라들이 국내로 진입하고 작전을 수행하기 쉽게 만들었다.
방글라데시군(BDF) 게릴라는 정부 청사, 군 검문소, 다리, 철도 및 발전소를 계속 공격했다. 결과적으로 9월까지 점령된 방글라데시의 육상 운송 능력은 10분의 1로 감소했다. 10월 둘째 주부터 게릴라 작전이 더욱 강화되었다. 10월 말까지 370개의 초소 중 90개만이 남았다.
12월 초, 파키스탄의 인도 영토 공습에 따라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방글라데시를 승인했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벵골만(Bay of Bengal)에 7함대(Seventh Fleet)가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소련은 이에 반대하며 벵골만에 군함 한 척을 배치했다. 파키스탄군은 12월 16일 다카에서 항복했다.
4. 4. 외교 활동
1971년 4월 15일, 무지브나가르 내각이 취임 선서를 하기 전, 타주딘 아흐메드 총리는 콜카타에 있는 파키스탄 부고등판무관 호세인 알리와 비밀리에 만났다. 타주딘은 알리와 그의 벵골 출신 직원들에게 내각이 취임 선서를 한 다음 날 방글라데시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설득했다.[14] 약속대로, 알리와 부고등판무관처의 70명의 직원들은 방글라데시 정부에 충성을 맹세했고, 서커스 애비뉴 9번지에 있는 파키스탄 고등판무관 공관은 방글라데시 콜카타 대표부가 되었다. 이 대표부는 정부 사무소의 일부, 특히 외무부를 수용하게 되었다.4월 초, 타주딘은 경제학자 레흐만 소반에게 야히아 칸의 경제 고문인 경제학자 미르자 무자파르 아흐메드가 파키스탄을 위해 새로운 외국 원조를 받는 것을 막고, 파키스탄 외교 공관에서 근무하는 방글라데시 관리들이 방글라데시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설득하도록 의뢰했다. 5월 말, 타주딘은 기자 무예둘 하산에게 인도 정치 세력과 소통하고 소련과 연락을 맺도록 지시했다.
방글라데시 임시정부는 여러 특사들을 파견하여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 이름 | 직책 | 파견지 |
|---|---|---|
| 후마윤 라시드 초우두리 | 특사 | 뉴델리 |
| 아불 말 아불 무히트 | 특사 | 워싱턴 D.C. |
| 레흐만 소반 | 특사 | 워싱턴 D.C. |
| 판사 아부 사예드 초우두리 | 해외 대표[14] | 런던 |
| 아불 파테 | 특사 | 콜카타 |
1971년 3월부터 파키스탄군이 Operation Searchlight|검색등 작전영어으로 동파키스탄 주민을 탄압하자, 선거로 선출된 동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4월 17일에 Mujibnagar|무지브나가르영어에서 선서를 하였다. 원래 대통령은 무지브르 라흐만이지만, 3월 25일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사이드 나주룰 이슬람이 실질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무지브르 라흐만은 체포 전,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미국과 인도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였고, 1971년 12월 16일에 파키스탄은 항복하였다. 이듬해인 1972년 1월 12일,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함께 임시정부는 폐지되었다.
4. 5. 문화 활동
5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의 공식 라디오 방송국인 스와딘 방글라 베타르 켄드라는 인도 정부에서 할당받은 송신기를 사용하여 방송을 시작했다.[1] 이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의 문화 선전 부서 역할을 했다.5. 임시정부 내부 갈등
1971년 9월, 바라사트에 본부를 둔 남부 지역의 국회 및 주 의회 의원 40명이 임시정부의 성과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 이들은 총리의 지역 행정 위원회 명령(GA/810/345)을 취소하고, 대신 아와미 연맹 회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1] 또한, 기획 위원회 위원들에 대해 "그들 중 누구도 아와미 연맹 회원이 아니며 아와미 연맹의 이념을 믿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타주딘 아흐마드 총리의 내각과 아와미 연맹의 사임을 요구했다.[2][3]
아와미 연맹의 학생 단체인 차트라 연맹은 처음에는 방글라데시 해방군(BLF)으로 불렸고, 나중에는 무지브 바히니로 불렸는데, 이들은 인도 정보기관인 연구분석동(RAW)의 지원을 받아 독립적인 군대로 부상하여 정규군과 충돌을 일으켰다.[18] 타주딘 아흐마드 총리는 인도 관리들과 인디라 간디 총리에게 무지브 바히니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5][6]
1971년 8월,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마드 외무장관과 그의 외교부 동료들은 정부 몰래 미국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다.[7] 인도 정보기관들은 모스타크가 방글라데시 대표단을 이끌고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직전에 이 사실을 발견했고, 타주딘은 전쟁이 끝난 후인 12월에 모스타크를 유엔 대표단에서 해임했다.[9]
5. 1. 불만과 이견
1971년 9월, 바라사트에 본부를 둔 남부 지역의 국회 및 주 의회 의원 40명이 임시정부의 성과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 이들은 총리의 지역 행정 위원회 명령(GA/810/345)을 취소하고, 대신 아와미 연맹 회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1] 또한, 기획 위원회 위원들에 대해 "그들 중 누구도 아와미 연맹 회원이 아니며 아와미 연맹의 이념을 믿지 않는다"고 불평했다.[2] 이들은 타주딘 아흐마드 총리의 내각과 아와미 연맹의 사임을 요구했다.[3]아와미 연맹의 학생 단체인 차트라 연맹은 처음에는 방글라데시 해방군(BLF)으로 불렸고, 나중에는 무지브 바히니로 불렸다. 처음에는 무함마드 아툴 고니 오스마니가 방글라데시 정규군의 젊은이들을 모집하도록 위임받았지만, 결국 인도 정보기관인 연구분석동(RAW)의 지원을 받아 독립적인 군대로 부상했다.[18] 무지브 바히니는 여러 곳에서 정규군과 충돌했다. 정규군의 지역 사령관들과 오스마니는 정부가 그들을 같은 지휘하에 둘 것을 촉구했다.[4] 타주딘 아흐마드 총리 자신은 10월 22일 회의에서 인도 관리들과 인디라 간디 총리에게 무지브 바히니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5][6] 그러나 상황은 결코 개선되지 않았다.
1971년 8월,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마드 외무장관과 그의 외교부 동료들은 정부 모르게 파키스탄의 핵심 동맹국인 미국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다.[7]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이 반역죄로 파키스탄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같은 단체가 '자유 아니면 무지부르' 교리를 퍼뜨리고 있었다.[8] 인도 정보기관들은 모스타크가 방글라데시 대표단을 이끌고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직전에 이 사실을 발견했다. 타주딘은 전쟁이 끝난 후인 12월에 모스타크를 유엔 대표단에서 해임했다.[9]
6. 방글라데시 독립과 임시정부 해체
1971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와 협력하기로 합의했고, 11월 21일부터 인도군이 방글라데시군으로부터 통제권을 장악했다.[15] 6월 말부터 훈련받은 방글라데시군(BDF) 게릴라 부대가 점령된 방글라데시에 진입하여 파키스탄군 기지와 통신 시스템을 공격하며 파키스탄군의 작전을 방해했다. 인도는 8월에 소련과 우호 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의 무기 공급을 받기 시작했다. 인도군은 겨울에 결정적인 공세를 계획했고, 방글라데시군은 국경 초소를 파괴하여 게릴라들이 국내로 진입하기 쉽게 만들었다. 방글라데시군 게릴라는 정부 청사, 군 검문소, 다리, 철도 및 발전소를 계속 공격하여 9월까지 점령된 방글라데시의 육상 운송 능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12월 초, 파키스탄이 인도 영토를 공습하자 인도는 파키스탄에 전쟁을 선포하고 방글라데시를 승인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벵골만에 7함대가 있다고 위협했지만, 소련이 이에 반대하며 벵골만에 군함 한 척을 배치했다. 결국 파키스탄군은 12월 16일 다카에서 항복했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인도 등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 후, 1972년 1월 12일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임시정부는 폐지되었다.
6. 1. 전쟁 승리와 독립
1971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는 방글라데시 임시정부와 협력하기로 합의했고, 11월 21일부터 인도군이 방글라데시군으로부터 통제권을 장악했다.[15] 6월 말부터 훈련받은 방글라데시군(BDF) 게릴라 부대가 점령된 방글라데시에 진입하여 파키스탄군 기지와 통신 시스템을 공격하며 파키스탄군의 작전을 방해했다.인도는 8월에 소련과 우호 조약을 체결하여 소련의 무기 공급을 받기 시작했다. 인도군은 겨울에 결정적인 공세를 계획했고, 방글라데시군은 국경 초소를 파괴하여 게릴라들이 국내로 진입하기 쉽게 만들었다. 방글라데시군 게릴라는 정부 청사, 군 검문소, 다리, 철도 및 발전소를 계속 공격하여 9월까지 점령된 방글라데시의 육상 운송 능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12월 초, 파키스탄이 인도 영토를 공습하자 인도는 파키스탄에 전쟁을 선포하고 방글라데시를 승인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벵골만에 7함대가 있다고 위협했지만, 소련이 이에 반대하며 벵골만에 군함 한 척을 배치했다. 결국 파키스탄군은 12월 16일 다카에서 항복했다.
6. 2. 임시정부 해체
1971년 3월부터 파키스탄군이 Operation Searchlight영어으로 동파키스탄 주민을 탄압하자, 선거로 선출된 동파키스탄 지도자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4월 17일에 Mujibnagar영어에서 선서를 하였다. 원래 대통령은 무지브르 라흐만이지만, 3월 25일에 체포되었기 때문에 사이드 나주룰 이슬람이 실질적인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무지브르 라흐만은 체포 전,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포하였다.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인도 등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였고, 1971년 12월 16일에 파키스탄은 항복하였다. 이듬해인 1972년 1월 12일,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함께 임시정부는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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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th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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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That unsung 'Philatelic war' ...
https://www.the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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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ofa.g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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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pa Publications Private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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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pa Publications Private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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