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카슈미르 분쟁에서 비롯되었으며, 동파키스탄의 자치권 확대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파키스탄 군의 무력 탄압으로 인해 발발했다. 1971년 12월 3일 파키스탄 공군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동부 전선에서 인도의 압도적인 승리로 이어져,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했다. 서부 전선에서는 인도군이 파키스탄 영토를 일부 점령했지만, 심라 협정을 통해 반환되었다. 전쟁 결과, 파키스탄은 인구의 절반 이상을 잃고 군사적,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인도에게 내주었으며, 9만 명 이상의 파키스탄 군인과 지지자들이 포로로 잡혔다. 이 전쟁은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확정했으며, 남아시아의 지정학적 판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지]] 중장이 [[자그지트 싱 아로라]] 중장 앞에서 [[파키스탄 항복 문서|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지 중장이 자그지트 싱 아로라 중장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모습
분쟁 명칭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일부인도-파키스탄 전쟁 및 분쟁
냉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캠페인해당 사항 없음
날짜1971년 12월 3일 – 1971년 12월 16일 (13일)
장소인도-동파키스탄 국경
인도-파키스탄 국경
통제선
인도양
아라비아해
벵골만
결과
동부 전선:

서부 전선:
영토 변경동부 전선: 동파키스탄파키스탄에서 분리하여 방글라데시가 됨
서부 전선:
인도군은 서부에서 약 5,795 평방 마일 (15,010 평방 킬로미터)의 땅을 점령했지만, 1972년 심라 협정에서 선의의 표시로 돌려줌.
인도는 잠무-카슈미르에서 341.1 평방 마일 (883 평방 킬로미터)의 점령 지역을 유지한 반면, 파키스탄은 20.4 평방 마일 (53 평방 킬로미터)의 영토를 유지함.
교전 세력
교전국 1
지휘관 및 지도자
인도 인디라 간디
스와란 싱
23px
23px
삼 마네크쇼
23px
23px
J.S. 아로라
23px
23px
G.G. 비워
23px
23px
사가트 싱
23px
23px
J. F. R. 제이콥
23px
23px
S. M. 난다
23px
23px
S. N. 콜리
23px
23px
닐라칸타 크리슈난
23px
23px
프라탑 C. 랄
23px
23px
H. C. 디완
방글라데시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M. A. G. 오스마니
파키스탄 야히야 칸
A.A.K. 니아지
라오 파르만
티카 칸
이프티카르 잔주아
무자파르 하산
라시드 아흐메드
Md 샤리프
M.A.K. 로디
레슬리 노먼
압둘 라힘 칸
이나물 하크
Z.A. 칸
압둘 모탈레브 말리크
병력 규모
인도인도군: 825,000 – 860,000
무크티 바히니180,000
파키스탄파키스탄군: 350,000 – 365,000
라자카르35,000
피해 규모
인도2,500–3,843명 사망
9,851–12,000명 부상
1척의 해군 항공기
1척의 프리깃함
오카 항구 손상/연료 탱크 파괴
중립국 주장 (인도)45대의 IAF 항공기
80대의 탱크
인도 주장 (인도)45대의 IAF 항공기
파키스탄9,000명 사망
25,000명 부상
93,000명 포로
2척의 구축함
1척의 기뢰 탐색함
1척의 잠수함
3척의 초계함
7척의 포함
파키스탄 주요 항구 카라치 시설 손상/연료 탱크 파괴
파키스탄 비행장 손상 및 폭격으로 인한 구멍 발생
중립국 주장 (파키스탄)75대의 PAF 항공기
200대의 탱크
인도 주장 (파키스탄)94대의 PAF 항공기
파키스탄 주장 (파키스탄)42대의 PAF 항공기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파키스탄의 분리주의 - 발루치스탄 분쟁
    발루치스탄 분쟁은 파키스탄, 이란,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는 발루치스탄 지역에서 역사적 배경,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소외, 외부 세력의 개입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며, 분리주의 운동과 무력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 파키스탄의 분리주의 -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은 1971년 동파키스탄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벌인 무력 투쟁으로, 파키스탄군의 탄압과 인도군의 개입 끝에 파키스탄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어 방글라데시가 독립했다.
  • 1971년 인도 - 칭기즈 칸 작전
    칭기즈 칸 작전은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파키스탄 공군이 인도 공군 기지를 기습하여 제공권을 확보하려 했던 공습 작전이었으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실패했으며, 인도의 보복 작전을 초래하여 파키스탄의 군사적 손실과 동파키스탄 독립을 막지 못했다.
  • 1971년 인도 -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은 1971년 동파키스탄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벌인 무력 투쟁으로, 파키스탄군의 탄압과 인도군의 개입 끝에 파키스탄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어 방글라데시가 독립했다.
  • 동파키스탄 - 1970년 볼라 사이클론
    1970년 볼라 사이클론은 벵골만에서 발생하여 동파키스탄과 인도 서벵골을 강타, 최대 풍속 240km/h에 달하는 강력한 열대 저기압으로, 기록상 가장 치명적인 열대 저기압 중 하나이며 해일로 인해 최소 30만 명에서 최대 5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 동파키스탄 - 아와미 연맹
    아와미 연맹은 1949년 결성된 방글라데시의 중도 또는 중도좌파 정당으로, 1971년 독립 전쟁을 주도하고 오랫동안 집권하며 민족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 사회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2. 역사적 배경

1947년 인도 분할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카슈미르 지역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었다.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아와미 연맹이 압승했지만, 서파키스탄 중심의 중앙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치권 요구를 억압했다.

1971년 3월 25일, 서파키스탄 군부는 서치라이트 작전을 개시하여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아와미 연맹 지도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체포했다. 이 탄압으로 인해 인도에 피난한 난민의 수는 12월 3일 개전 직전까지 약 1,000만 명에 육박했으며, 이는 인도의 경제, 사회,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결국 방글라데시 학살로 이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인도-파키스탄 관계는 악화되었고, 전쟁으로 이어졌다.

1971년 4월 17일에는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 정부가 인도 영토 내에서 수립되었고, 인도는 이 정부를 공공연히 지지하며 게릴라 훈련 및 무기 제공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인도는 동파키스탄 문제는 서파키스탄 간의 정치적 해결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며, 인도-파키스탄 간의 외교 교섭을 거부했다.

우기로 인해 게릴라 활동이 부진했지만, 우기가 끝나면서 활발해졌다. 인디라 간디10월 24일부터 20일 동안 벨기에,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을 방문하여 인도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 기간 동안 파키스탄 정부 대표단은 11월 5일부터 3일 동안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일본 및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주요국의 외교 노력과 국제 연합(유엔)의 조정 활동에도 불구하고, 11월 21일 동파키스탄 국경 지대 전역에서 인도군이 지원하는 방글라데시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에 파키스탄 공군은 12월 3일, 스리나가르, 암리차르, 파탄코트 등의 인도 공군 기지를 공격함과 동시에 카슈미르 휴전선을 넘어 인도 측으로 침공했고, 인도군도 반격하여 양국은 전면전에 돌입했다.

2.1. 동파키스탄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인도 분할로 파키스탄이 독립한 1947년부터 동벵골과 서파키스탄 간의 정치적 긴장이 시작되었다. 1950년 벵골어 운동, 1964년 동벵골의 대규모 폭동, 1969년 대규모 시위는 이러한 긴장을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이로 인해 아유브 칸 대통령이 사임하고, 야히아 칸 군 참모총장이 중앙 정부를 맡게 되었다.

동파키스탄과 서파키스탄은 약 1609.34km 이상 떨어져 있어 벵골 문화와 파키스탄 문화를 통합하기 어려웠다. 벵골의 지배를 극복하고 이슬라마바드에 중앙 정부가 형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논란이 많았던 하나의 단위 계획은 동부와 서파키스탄의 두 지역을 설립했지만, 서파키스탄인들은 이 계획에 반대했다.

1969년 야히아 칸 대통령은 총선을 발표했고, 1970년 서파키스탄의 지위를 단일 주로 폐지하여 1947년 파키스탄 수립 당시 정의된 대로 4개의 주로 구성된 원래의 이질적인 지위를 회복했다. 벵골인과 다민족 서파키스탄인 사이에는 종교적, 인종적 긴장도 있었는데, 벵골인들은 지배적인 서파키스탄인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70년 파키스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동파키스탄 입법부 169석 중 167석, 국민 의회 313석 중 거의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아와미 연맹의 지도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여섯 가지 요점을 제시하며 벵골인의 통치 권리를 옹호했다. 아와미 연맹의 선거 성공으로 많은 서파키스탄인들은 벵골인들이 6가지 요점과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헌법을 초안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아흐산 제독 임무가 구성되었으나, 군 최고 수뇌부는 임무의 제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이 거부권을 지지했고,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에게 파키스탄 총리직을 양보하지 않았다. 아와미 연맹은 전국적인 총파업을 촉구했고, 야히아 칸 대통령은 국민 의회 개회를 연기하여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아와미 연맹과 그 지지자들의 실망감을 야기했다.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은 정부를 폐쇄하는 총파업을 촉구했고, 동부의 반대자들은 서파키스탄을 주로 지지하는 비하리족 공동체를 표적으로 삼기 시작했다. 1971년 3월 초, 벵골 폭도들이 치타공에서만 약 300명의 비하리족을 학살했다.

1970년 12월, 파키스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은 군사·외교만을 중앙 정부가 관할하고 나머지는 지방 정부가 관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동파키스탄의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여 압승을 거두어 제1당이 되었다. 이에 대해 강력한 중앙 정부 유지를 주장하는 군부 및 제2당이 된 파키스탄 인민당은 반대했고, 야히아 칸이 직접 다카로 가서 아와미 연맹 총재 무지부르 라흐만과 회담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오랫동안 서파키스탄에 있는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지배에 대한 동파키스탄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져 각종 반정부 운동이 벌어졌다. 야히아 칸, 무지부르 라흐만, 그리고 파키스탄 인민당 총재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3자 회담도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2.2. 서파키스탄의 탄압과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

1971년 3월 25일, 서파키스탄 군부는 서치라이트 작전을 개시하여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아와미 연맹 지도자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체포했다. 이 작전으로 동파키스탄의 지식인들이 희생되었다.

이에 1971년 3월 26일,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대신하여 지아우르 라흐만이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했다. 4월에는 인도에서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무크티 바히니라는 게릴라 부대가 조직되어 파키스탄 군에 저항했다.

3. 인도의 개입

1970년 12월, 파키스탄 총선에서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의 자치권 확대를 주장하며 압승을 거두었지만, 군부와 파키스탄 인민당은 이에 반대했다. 야히야 칸 대통령, 무지부르 라흐만 아와미 연맹 총재,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 인민당 총재 간의 회담이 결렬되면서, 1971년 3월 25일 파키스탄 군은 동파키스탄 국민을 무력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아와미 연맹은 불법화되었고, 라흐만은 체포되었다.

이 탄압으로 인해 발생한 약 1,000만 명의 난민이 인도로 피난하면서 인도의 경제, 사회, 정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고, 이는 인도-파키스탄 관계를 악화시켜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971년 4월 17일, 인도 영토 내에서 방글라데시 인민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인도는 이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게릴라 훈련과 무기 제공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인도는 동파키스탄 문제가 서파키스탄 간의 정치적 해결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며 외교 교섭을 거부했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10월 24일부터 20일 동안 벨기에, 오스트리아,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6개국을 방문하여 인도의 입장을 설명하고 국제사회의 이해를 구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의 외교적 노력과 국제 연합(UN)의 조정 활동은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1월 21일, 인도군이 지원하는 방글라데시군이 동파키스탄 국경 지대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파키스탄 공군은 12월 3일, 스리나가르, 암리차르, 파탄코트 등 인도 공군 기지를 공습하고 카슈미르 휴전선을 넘어 인도 측으로 침공했다. 인도군도 반격에 나서면서 양국은 전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12월 3일 저녁, 파키스탄 공군(PAF)은 작전 칭기즈 칸을 개시하여 아그라를 포함한 8개의 인도 비행장에 기습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작전 포커스와 달리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간디 총리는 이 공습을 선전포고로 간주했고, 인도 공군(IAF)은 즉시 보복 공습을 시작했다. 이로써 양국 간 전면전이 시작되었고, 간디는 군대 동원을 명령하고 동파키스탄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인도의 주요 목표는 동부 전선에서 다카를 점령하고, 서부 전선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억류하는 것이었다.

3.1. 인도의 전쟁 준비와 심리전

인도는 1971년 몬순 계절이 시작되면 동파키스탄 지역의 지형이 공격에 불리해진다는 점을 고려하여 공격 시기를 늦추었다. 11월 중순이 되면 지면이 건조해져 신속한 공격이 가능해지고, 12월 초·중순에는 히말라야 고개가 눈으로 덮여 중국의 개입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인도는 심리전을 통해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사기를 높이려 했다. 스와딘 방글라 베타르 켄드라(자유 방글라데시 라디오 센터)는 1971년 3월 30일 파키스탄 세이버 제트기의 포격으로 방송국 건물이 파괴되자 동파키스탄의 칼루르가트에서 인도령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4월 3일, 인도 국경 경비대의 지원을 받아 트리푸라에서 방송을 재개했고, 콜카타로 이전하여 방글라데시 라디오 프로그래머, 뉴스 캐스터, 시인, 가수 및 언론인들이 합류했다. 방송 권한은 방글라데시 임시 망명 정부로 이관되었고, 시인 카지 나즈룰 이슬람의 탄생일인 5월 25일에 첫 방송을 했다. 아카시바니 콜카타도 이 노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한편, 파키스탄에서는 맹목적인 애국심과 군국주의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71년 9월 말, 파키스탄 정부 내 일부 세력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선전 캠페인의 결과, "인도를 분쇄하라"는 스티커가 라왈핀디, 이슬라마바드, 라호르의 차량 뒷유리에 부착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서파키스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0월에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을 겨냥한 듯한 "반역자를 처형하라"는 스티커도 등장했다.

4. 전쟁의 전개

1971년 12월 3일, 파키스탄 공군(PAF)은 작전 칭기즈 칸을 개시하여 인도 공군 기지에 선제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은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작전 포커스 성공에 영향을 받았지만, 파키스탄은 충분한 전력을 투입하지 못해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공격 당시, 타지마할은 위장되어 있었다.

같은 날 저녁, 인디라 간디 총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이 공습을 선전포고로 간주했고, 인도 공군(IAF)은 즉각 대응했다. 다음날 아침, 인도는 대규모 보복 공습을 시작했다.

이 공중전은 전면전의 시작을 알렸고, 간디는 군대 동원을 명령하고 동파키스탄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시작했다. 인도군은 공중, 해상, 육상에서 협동 공격을 개시했다. 동부 전선에서 인도의 주요 목표는 다카 점령이었고, 서부 전선에서는 파키스탄군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인도군은 파키스탄군보다 장비와 병력 면에서 우세했다.

파키스탄은 서부 전선에서도 지상 공격을 시작했지만, 인도군은 성공적으로 파키스탄 영토에 진입하여 약 15008.91km2를 점령했다. 이 영토는 1972년 심라 협정을 통해 반환되었다. 파키스탄군, 특히 제1군단, 제2군단, 펀자브 파견대는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파키스탄 군인과 해병대는 서부 전선에서 사기가 크게 저하되어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

인도 해군은 트라이던트 작전과 파이썬 작전을 통해 카라치 항을 공격하여 파키스탄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벵골만에서는 해상 봉쇄를 통해 동파키스탄을 고립시켰다.

인도 공군은 동부 전선에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파키스탄 공군 기지를 폭격하는 등 활발한 작전을 펼쳤다.

4.1. 동부 전선

1971년 11월 23일, 인도군은 동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벵골 민족주의자 동맹인 미트로 바히니에 합류하여 파키스탄군과 교전했다. 1965년 전쟁과는 달리, 인도군은 9개 보병 사단과 장갑 부대, 근접 항공 지원을 통해 동파키스탄의 수도 다카로 빠르게 진격하는 세 갈래의 신속한 공격을 채택했다. 인도 육군 동부 사령부의 자그지트 싱 아우로라 중장이 인도군의 동파키스탄 공격을 이끌었다.

전쟁 동부 전선의 작전 중 군 부대와 병력 이동을 보여주는 그림
전쟁 동부 전선의 작전 중 군 부대와 병력 이동을 보여주는 그림


인도 동부 사령부가 파키스탄 동부 사령부를 공격하면서, 인도 공군(IAF)은 동파키스탄의 소규모 항공 부대를 신속하게 파괴하고 다카 비행장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인도 해군은 동파키스탄을 효과적으로 봉쇄했다.

인도군은 "전격전" 기술을 이용하여 파키스탄군의 저항을 우회했고, 이는 신속한 승리로 이어졌다. 파키스탄 군은 2주도 채 안 되어 항복했고, 동부 사령부에는 심리적 공황이 확산되었다. 인도군은 다카를 포위하고 1971년 12월 16일 항복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 동파키스탄 정부는 붕괴되었고, A.A.K. 니아지 중장 (동부 사령부 사령관)과 M.S. 칸 제독은 항복했다.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은 모든 군대를 인도군에 항복함으로써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종식시켰다.

파키스탄은 8,000명이 사망하고 25,000명이 부상당했고, 인도는 3,000명이 사망하고 12,000명이 부상당했다. 장갑차 손실도 파키스탄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의미했다.

4.2. 서부 전선

파키스탄군은 서부 국경에 주요 지상 공격을 집중했지만, 인도군은 파키스탄 영토를 성공적으로 침투하여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1971년 12월 3일, 파키스탄 공군(PAF)의 공습 이후, 모하마드 뭄타즈 칸 준장이 지휘하는 파키스탄군 제106 보병 여단은 2,000명의 병력과 포병 지원을 받아 후세이니왈라 마을로 진격했다. 인도군은 인도 공군(IAF)의 지원을 받아 샤스트리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15 펀자브 부대, 병력 900명)를 배치했다. 15 펀자브 부대는 마을을 지키지 못하고 1971년 12월 4일에 후세이니왈라 외곽의 카이저-이-힌드 요새로 후퇴했고, 결국 요새에서도 밀려났다. 인도군은 125명의 사상자를 냈고, 파키스탄군은 67명의 병력을 잃었다.

같은 시기, 파키스탄군은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때와 유사하게 챔브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기티카르 잔주아 소장이 지휘하는 파키스탄 제23 기갑 사단은 자스완트 싱 소장이 지휘하는 인도 제10 사단이 점령한 지역으로 진격했으며, 장비도 우수했다. 1971년 12월 9일까지 파키스탄 사령관 잔주아 소장이 사망했지만, 파키스탄군은 1971년 12월 11일까지 인도 부대를 후퇴시켰다. 파키스탄은 이 전투에서 획득한 영토를 심라 협정 이후에도 유지했다.

1971년 12월 4일, 타리크 미르 준장과 자한제브 아밥 준장이 이끄는 B. M. 무스타파 소장이 지휘하는 파키스탄 제18 보병 사단 부대가 롱게왈라의 라자스탄 마을로 진격했다. 이 마을은 K. S. 찬다푸리 소령 휘하의 병력 부족한 보병 중대와 몇몇 국경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지만, 인도 공군(IAF)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이 중대는 여러 대의 대전차포, 캐논포 및 곡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초기 기갑 진격은 고지대에서 인도군의 대전차 및 대기계 방어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파키스탄 공병은 인도 소화기 및 포병 포격에 의해 격퇴되었다. 호커 헌터와 HAL HF-24 마루트를 장비한 인도 공군 제122 비행대대도 D. M. 정복 비행대장의 지휘하에 파키스탄 부대를 폭격했다. 1971년 12월 7일까지 롱게왈라 전투에서 인도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파키스탄 제1 군단은 1971년 12월 6일 샤카가르 지역으로 진격하여 펀자브와 잠무 사이의 인도 수송선을 차단하려 했다. 이르샤드 아흐메드 칸 중장은 두 개의 보병 사단과 하나의 기갑 사단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다. 이 지역은 켐 카란 싱 중장이 지휘하는 인도 제1 군단이 강력하게 지원했으며, 세 개의 보병 사단, 두 개의 독립 기갑 여단, 두 개의 포병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그 결과 벌어진 전투는 1971년 12월 16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막대한 손실을 기록했다. 파키스탄은 수적으로 인도 측보다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으며, 인도 부대는 파키스탄을 밀어내 시알코트를 위협했다. 바산타르 전투는 인도의 승리로 간주되었다.

1971년 12월 8일부터 14일까지, 인도는 우다이 싱 대령의 지휘하에 투르툭 전투에서 라다크 북부 지역의 800km2에 달하는 카라코람 산맥을 점령했다.

4.3. 해상 작전

인도 해군은 1971년 12월 4일에서 5일 밤 사이 트라이던트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카라치 항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파키스탄 해군의 구축함 PNS 카이바르(1956)와 기뢰 제거함 PNS 무하피즈가 침몰했고, PNS 샤 자한(DD-962)도 큰 피해를 입었다. 파키스탄 해군 약 720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예비 연료와 많은 상선을 잃었다. 1971년 12월 9일, 파키스탄 잠수함 PNS 헝고르(S131)는 INS 쿠크리(F149)를 격침시켜 194명의 인도군 사상자를 냈다.

인도 동부 해안 근처 비사카파트남의 항로 부표 밖에서 침몰한 파키스탄의 PNS 가지.
인도 동부 해안 근처 비사카파트남의 항로 부표 밖에서 침몰한 파키스탄의 PNS 가지.


INS 쿠크리(F149)의 침몰 이후, 1971년 12월 8일에서 9일 밤 사이 파이썬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인도 해군이 카라치 항에 다시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 탱크가 파괴되고 파키스탄 상선 3척과 카라치에 정박 중이던 외국 선박이 침몰했다.

인도 해군은 벵골만에서 해상 봉쇄를 통해 동파키스탄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12월 4일부터 항공모함 INS 비크란트(1961)가 배치되었고, 호커 시 호크 전투 폭격기가 치타공과 콕스 바자르를 포함한 동파키스탄의 여러 해안 도시를 공격했다. 파키스탄은 PNS 가지 잠수함을 보내 대응했지만, PNS 가지는 비사카파트남 해안에서 침몰했다.

인도 항공모함 INS 비크란트(1961)가 브레게 알리제 항공기를 발진한다.
인도 항공모함 INS 비크란트(1961)가 브레게 알리제 항공기를 발진한다.


파키스탄 해군은 7척의 포함, 1척의 기뢰 제거함, 1척의 잠수함, 2척의 구축함, 파키스탄 해안 경비대 소속 3척의 순찰정, 18척의 화물선, 보급선 및 통신 선박을 잃었다. 카라치 해군 기지와 부두에 큰 피해가 발생했고, 3척의 상선과 10척의 소형 선박이 나포되었다. 약 1900명의 인원이 사망했으며, 1413명의 군인이 다카에서 인도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다. 파키스탄은 전쟁으로 해군력의 절반을 잃었다.

4.4. 공중 작전

선제 공격 시도 이후, 파키스탄 공군(PAF)은 인도의 보복에 대응하여 방어 태세를 취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인도 공군(IAF)은 분쟁 지역에서 파키스탄 공군과 계속 교전했지만, 파키스탄 공군의 출격 횟수는 날마다 감소했다. 인도 공군은 4,000회 출격한 반면, 파키스탄 공군은 벵골어를 사용하지 않는 기술 인력 부족으로 인해 보복에 거의 나서지 못했다.

이러한 보복 부족은 파키스탄 공군 AHQ가 동부 해방 전쟁에서 이미 막대한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손실을 줄이려는 의도적인 결정 때문이기도 하다.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해군이 카라치 항구를 두 차례 습격한 후 인도 해군과의 접촉을 피했지만, 공격에 사용된 보트의 연료 탱크를 파괴하기 위해 오카 항구를 폭격하여 보복했다.

동부에서는 제14 비행대 "테일 초퍼스"가 파괴되었고, 지휘관인 중령 PQ 메디가 포로로 잡히면서 다카에 있던 파키스탄 공군 사령부가 무력화되었다. 이로써 인도는 동부 전선에서 완전한 제공권을 확보했다.

인도 공군의 공습 후 파괴된 다카 비행장의 항공기 격납고.
인도 공군의 공습 후 파괴된 다카 비행장의 항공기 격납고.


전쟁이 끝날 무렵, 파키스탄 공군 조종사들은 동파키스탄에서 인접국인 버마로 탈출에 성공했다. 1971년 12월 다카가 인도군에 의해 점령되기 전에도 많은 파키스탄 공군 요원들이 이미 스스로 동부에서 버마로 떠났다.

인도 육군이 동파키스탄을 장악하면서,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에 대한 공격을 지속했고, 이 작전은 전투기들의 주간 대공 비행장, 대 레이더, 근접 지원 공격 시리즈로 발전했다. 야간에는 캔버라와 An-12를 이용해 비행장과 전략 목표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으며, 파키스탄은 B-57과 C-130을 이용해 유사한 야간 공격으로 대응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주로 자체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 F-6를 공중전투 초계 임무에 투입했고, 이로 인해 파키스탄 공군은 효과적인 공격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인도 공습으로 다카에서 USAF기와 유엔 항공기 1대가 손상되었고, RCAF의 DHC-4 카리부 1대가 이슬라마바드에서 파괴되었으며, 미국 군사 연락 책임자인 준장 척 예거가 소유한 USAF의 비치 U-8도 파괴되었다. 인도 공군의 산발적인 공습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파키스탄 공군 전진 기지를 대상으로 계속되었고, 차단 및 근접 지원 작전이 유지되었다.

인도가 서파키스탄에 대한 가장 성공적인 공습 중 하나는 1971년 12월 8일에 발생했는데, 파탄코트에 주둔한 20 비행대의 인도 헌터 항공기가 무리드의 파키스탄 기지를 공격하여 지상에 있던 F-86 항공기 5대를 파괴했다. 이는 파키스탄 군사 역사가인 공군 준장 M. 카이저 투파일이 그의 저서 In The Ring and on Its Feet: Pakistan Air Force in the 1971 Indo-Pak War에서 확인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작전에서 제한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중동 동맹국으로부터 미라지를 지원받았다(그 정체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음). 저자 마틴 보우만에 따르면, "리비아의 F-5는 사르고다 AFB에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아마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더 많은 F-5가 유입될 파키스탄 조종사를 훈련시키기 위한 잠재적인 훈련 부대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인도 공군은 병력 지원, 공중전, 깊숙한 침투 공격, 적진 뒤에 낙하산 투하, 실제 목표에서 적 전투기를 유인하기 위한 페인트, 폭격 및 정찰 등 광범위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오직 공중전에만 집중했던 파키스탄 공군은 전쟁 첫 주 안에 아대륙의 하늘에서 궤멸되었다. 살아남은 파키스탄 공군 항공기는 이란 공군 기지나 콘크리트 벙커에 숨어들어 싸움을 거부했다.

인도는 동부에서 1,978회, 파키스탄에서 약 4,000회의 출격을 했고, 파키스탄 공군은 해당 전선에서 각각 약 30회와 2,840회의 출격을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인도는 항공기 45대를 잃었고 파키스탄은 75대를 잃었다.

5. 파키스탄의 항복과 방글라데시 독립

1971년 12월 16일 16시 31분 IST, 다카의 람나 경마장에서 인도 동부 사령부 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 중장과 파키스탄 동부 사령부 사령관 A.A.K. 니아지 중장 간에 동파키스탄에 주둔한 파키스탄 동부 사령부의 항복 문서가 공식적으로 서명되었다. 방글라데시 측에서는 BAF의 수장인 A. K. 칸데커 공군 대령이 대표로 참석했다. 항복이 조용히 받아들여졌지만, 경마장 주변 군중들은 반파키스탄 구호를 외치며 파키스탄 군 지휘관들에게 위협을 가했고, 인도 장교들이 니아지 중장을 보호해야 했다.

12월 17일 14시 30분 GMT에 적대 행위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인도는 파키스탄에서 광대한 영토를 획득했다고 주장했다(전쟁 후 전쟁 전 경계가 인정됨). 이 전쟁으로 방글라데시는 독립을 이루었다.

인도군은 약 9만 명의 파키스탄 군인과 민간인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 하무두르 라만 위원회와 포로 조사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파키스탄 포로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좌우로 밀어서 보기
군별캡처된 파키스탄 포로 수지휘관
파키스탄 육군54,154중장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지
파키스탄 해군/파키스탄 해병대
1,381소장 모하마드 샤리프
파키스탄 공군833공군 준장 이나물 하크
준군사 조직(동파키스탄 소총대/경찰)22,000소장 라오 파르만 알리
민간 정부 인원12,000총독 압둘 모탈레브 말리크
합계:90,368~


군인 외에도 15,000명의 벵골 민간인이 전쟁 포로가 되었다.

6. 전쟁의 결과 및 영향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결과, 방글라데시가 독립하면서 파키스탄은 인구의 절반 이상과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남아시아에서 인도의 영향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인도는 파키스탄을 고립시키는 외교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영국프랑스를 설득하여 유엔에서 친파키스탄 결의안을 막도록 했다.

인도는 전쟁 승리 후 방글라데시와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기도 했다. 인도의 과도한 주둔은 방글라데시 내에서 힌두교 지배에 대한 불안감을 야기했고, 무지부르 라흐만이 인도의 내정 간섭을 허용한다는 우려도 제기되었다. 아와미 연맹 집권 기간에는 양국 관계가 좋았지만, 방글라데시 민족주의당 집권 후 관계가 악화되었다.

파키스탄은 전쟁 패배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인구의 절반과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잃고 지정학적 역할에 타격을 입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전쟁 패배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하무두르 라만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이 위원회는 군부의 책임을 지적했다. 위원회는 파키스탄 군 장성들의 방탕, 밀수, 전쟁 범죄 및 직무 태만을 비난하며 공개 재판을 권고했지만, 실질적인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이후 파키스탄은 산업 국유화와 헌법 제정 등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군대는 재건 및 재조직되었으며, 합동 참모 본부 (JS HQ)가 설치되어 지휘 계통이 중앙 집중화되었다. 또한 파키스탄은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나섰다.

방글라데시에서는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 범죄 재판소가 설립되어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이 재판소는 2010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동안 파키스탄 군과 그들의 현지 협력자들이 저지른 집단 학살, 반인륜 범죄, 살인, 강간 등의 혐의를 조사하고 기소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은 카슈미르 분쟁과도 연관되어 있으며, 전쟁을 종결시킨 심라 협정에서도 카슈미르 문제가 주요 쟁점으로 다루어졌다.

6.1. 국제 사회의 반응

소련동파키스탄을 동정했고, 전쟁 중 파키스탄에 대한 인도군과 무크티 바히니의 침략을 지원했다. 이는 방글라데시 독립으로 동파키스탄이 분리되면 경쟁국인 미국과 중국의 입지가 약화될 것이라는 더 넓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미국이나 중국과의 대립이 발생할 경우 대처하겠다는 약속을 인도에 했다. 이 약속은 1971년 8월에 체결된 인도-소련 우호 협정에 명시되었다.

미국은 시민 전쟁에 개입하려는 시도에서 수사학 사용을 거부하면서,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물질적으로 파키스탄을 지지했다. 미국 정부는 소련이 인도와 비공식적인 동맹을 맺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 따라서 미국은 소련의 남아시아 영향력을 제한하는 데 파키스탄의 도움이 필요했다. 냉전 동안 파키스탄은 미국의 가까운 공식 동맹이었으며, 닉슨이 중화인민공화국과 화해를 협상하고 있었고, 1972년 2월 방문할 예정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닉슨은 인도의 파키스탄 침공이 소련의 이 지역 완전 지배를 의미하며, 미국의 글로벌 위치와 미국의 새로운 전술적 동맹국인 중국의 지역적 위치를 심각하게 훼손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파키스탄이 동부 전선에서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닉슨은 항공모함을 지휘하는 제74 기동 부대를 벵골 만에 배치했다. 엔터프라이즈와 그 호위함들은 1971년 12월 11일에 작전 위치에 도착했다. 소련 해군블라디보스토크에서 2개 그룹의 순양함구축함을 파견했고, 1971년 12월 18일부터 1972년 1월 7일까지 미국 제74기동 부대를 따라 인도양으로 진입했다. 소련은 또한 인도양에서 USS 엔터프라이즈 기동 부대가 제기하는 위협을 막기 위해 핵 잠수함을 배치했다.

전쟁 기간 동안 중국은 동파키스탄 사태에 대한 인도의 개입을 가혹하게 비판하며, 인도가 남아시아에서 제국주의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은 동파키스탄에 대한 인도의 직접적인 개입과 침투를 비난했다.

1962년 중인 국경 분쟁 이후 파키스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중국은,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도 시종일관 파키스탄 지지 입장을 취했고, 유엔에서는 격렬하게 소련과 인도를 비난했다.

일본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미국, 중국, 소련의 입장 차이로 인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6.2. 전후 처리

1972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심라 협정을 체결하여 카슈미르 지역의 통제선을 확정하고, 전쟁 포로를 교환했다. 이 조약으로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의 주권을 인정했고, 인도는 9만 명 이상의 파키스탄 전쟁 포로를 석방했다. 인도는 전쟁 중 파키스탄으로부터 점령한 13,000 km2 이상의 토지를 반환했지만, 찰룬카, 탕, 투르툭, 티악시, 초르바트 계곡 등 전략적 요충지는 계속 통제했다.

1973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와 3자 협정을 체결하여 전쟁 포로, 비벵골인, 파키스탄에 충성하는 벵골 관료 및 민간인을 파키스탄으로 이송했다. 이는 1947년 인도 분할 이후 최대 규모의 인구 이동이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1971년 전쟁 범죄에 대한 국제 범죄 재판소가 설립되어 관련자들을 처벌했다. 이 재판소는 2010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어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동안 파키스탄 군과 그들의 현지 협력자들이 저지른 집단 학살, 반인륜 범죄, 살인, 강간 등의 혐의를 조사하고 기소했다.

7. 군사적 성과 및 수상

전쟁 이후, 인도 육군 부대에는 41개의 전투 서훈과 4개의 전구 서훈이 수여되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동파키스탄 1971 (전구 서훈)
* 신드 1971 (전구 서훈)
* 잠무 카슈미르 1971 (전구 서훈)
* 펀자브 1971 (전구 서훈)
* 바산타르 강
* 보그라
* 차차로
* 참브
* 펀치 방어전
* 데라 바바 나나크
* 가드라 시티
* 하라 칼란
* 힐리
* 롱게왈라
* 파르바트 알리
* 풍리 교량
* 셰흐라
* 칭고 강 계곡
* 실헤트

용감한 행동을 한 양측의 많은 병사와 장교들은 각 국가에서 가장 높은 용맹 무공 훈장을 받았다. 다음은 인도의 파람 비르 차크라, 방글라데시의 비르 슈레슈토, 파키스탄의 니샨-에-하이데르 수훈자 목록이다.

파람 비르 차크라 수훈자:

👆
좌우로 밀어서 보기
계급이름부대참고
랜스 나이크앨버트 에카 (사후 추서)제14 근위대
플라잉 오피서니르말 지트 싱 세콘 (사후 추서)제18 비행대 (인도 공군)
소령호시아르 싱제3 그레나디어 연대
소위아룬 케타르팔 (사후 추서)제17 기갑 연대 (푸나 기병)


비르 슈레슈토 수훈자:

* 대위 모히우딘 자항기르 (추서)
* 중사 문시 압두르 로우프 (추서)
* 이등병 하미두르 라흐만 (추서)
* 이등병 모스타파 카말 (추서)
* ERA 모하마드 루훌 아민 (추서)
* 비행 중위 마티우르 라흐만 (추서)
* 중사 누르 모하마드 셰이크 (추서)

니샨-에-하이데르 수훈자:

👆
좌우로 밀어서 보기
계급이름부대참고 자료
소령무하마드 아크람 (추서)제4 프론티어 포스 연대
파일럿 장교라시드 민하스 (추서)파키스탄 공군 제2 비행대
소령샤비르 샤리프 (추서)제6 프론티어 포스 연대
소와르무하마드 후세인 (추서)제20 랜서스
랜스 나이크무하마드 마흐푸즈 (추서)제15 펀자브


2011년 7월 25일, 전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에게 방글라데시 독립 훈장(Bangladesh Swadhinata Sammanona)이 사후 추서되었다.

R. M. 무줌다르는 인도 병기 공장 봉사단(IOFS) 장교로, 인도 병기 공장 제2대 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동안의 공헌을 인정받아 1973년 인도 정부로부터 공무 부문에서 파드마 부샨 훈장을 수여받았다.

O. P. 바흘은 인도 병기 공장 봉사단(IOFS) 장교로, 전 병기 공장 부국장 및 병기 공장 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의 노력으로 1972년 공무 부문에서 파드마 슈리 훈장을 수여받았다.

2012년 3월 28일, 방글라데시 대통령 질루르 라만과 총리 셰이크 하시나는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 훈장과 해방 전쟁의 친구 훈장을 75명, 6개 단체, 미트라 바히니 그리고 인도 국민에게 다카의 방가반두 국제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특별 행사에서 수여했다. 여기에는 전 네팔 대통령 람 바란 야다브, 제3대 부탄 국왕 지그메 도르지 왕추크, 전 소련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국가 원수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전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전 영국 총리 에드워드 히스, 전 네팔 총리 비슈웨슈와르 프라사드 코이랄라 등 8명의 국가 원수가 포함되었다. 단체에는 BBC, 아카쉬바니 (전인도 라디오), 국제 적십자 위원회, 유엔 난민 기구, 옥스팜 그리고 캘커타 대학교 샤야크 사미티가 포함되었다.

이후 방글라데시의 외국인 친구 명단은 568명으로 확대되었는데, 여기에는 인도인 257명, 미국인 88명, 파키스탄인 41명, 영국인 39명, 러시아인 9명, 네팔인 18명, 프랑스인 16명, 일본인 18명이 포함된다.

8. 미디어에서의 묘사

* 오라 에가로 존(Ora Egaro Jon) (웅장한 11인)은 1972년에 개봉한 달리우드 전쟁 영화로, 차시 나즈룰 이슬람이 감독했다. 실제 인도 육군파키스탄 육군 병력이 출연했으며,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다룬 최초의 장편 영화였다.
* 힌두스탄 키 카삼(Hindustan Ki Kasam)은 1973년에 개봉한 볼리우드 전쟁 영화로, 체탄 아난드가 감독했으며 작전명 선인장 릴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 아크라만(Aakraman)은 1975년 볼리우드 영화로, 이 전쟁을 배경으로 로맨틱한 삼각관계를 그렸다.
* 보더(Border)는 1997년에 개봉한 볼리우드 전쟁 영화로, J.P. dutta가 감독했다. 이 영화는 라자스탄에서 벌어진 롱게왈라 전투 (서부 전선)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되었다.
* 12월 16일(16 December)은 2002년 영화로, 마니 샹카르가 감독했다.
* 1971 – 전쟁 포로(1971 – Prisoners of War)는 2007년에 개봉한 볼리우드 전쟁 영화로, 아므리트 사가르가 감독했다. 파키스탄포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며, 전쟁 중 포로로 잡혀 석방을 기다리는 6명의 인도 포로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 미드나잇 차일드(Midnight's Children)는 2012년 영화로, 살만 루시디의 소설을 각색했으며, 1947년 8월 15일 자정에 태어난 두 쌍둥이의 가상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71년 전쟁에 대한 언급도 있다.
* 전쟁의 아이들(Children of War)은 2014년 힌두어 드라마 영화로, 1971년 방글라데시 학살과 해방 전쟁의 사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 가지 어택(The Ghazi Attack)은 2017년 전쟁 영화로, 산칼프 레디가 감독했다. 전쟁 중 PNS 가지의 침몰을 다루고 있다.
* 1971: 국경 너머(1971: Beyond Borders)는 2017년 인도 전쟁 드라마 영화로, 메이저 라비가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 라지(Raazi)는 2017년 소설 "Calling Sehmat"을 바탕으로 한 픽션 스파이 영화로, PNS 가지를 배치하려는 계획을 감지하기 위한 전쟁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로미오 악바르 월터(Romeo Akbar Walter)는 2019년 스릴러 스파이 영화로,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배경으로 하며, 파키스탄에서 비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연구분석원(RAW)에 의해 스카우트된 젊은 인도 은행원 레흐마툴라 알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부지: 인도의 자부심(Bhuj: The Pride of India)은 2021년 액션 영화로, 전쟁 중 파키스탄의 공습으로 파괴된 인도의 부지 공군 기지를 재건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 피파(Pippa)는 2023년 액션 영화로, 1971년 11월 동부 전선 가리푸르 전투에서 싸운 발람 싱 메타 준장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 샘 바하두르(Sam Bahadur)는 2023년 영화로, 인도의 초대 야전원수 샘 마네크쇼의 삶과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 대한 그의 공헌을 바탕으로 한다.
* 무크티: 국가의 탄생은 2017년 마누 초브가 감독한 단편 영화로, J. F. R. 제이콥 소장과 A. A. K. 니아지 중장이 파키스탄 항복 문서를 두고 벌인 협상 등 1971년 전쟁에 기여한 그의 공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PNS 가지는 PNS 가지 (샤히드)우르두어 드라마로, PNS 가지 침몰을 다룬 작품이다. ISPR에서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