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라 간디
1. 개요
인디라 간디는 1917년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난 인도의 정치인으로, 인도의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딸이다. 1959년 인도 국민회의 총재를 거쳐, 1966년부터 1977년까지, 그리고 1980년부터 1984년 암살될 때까지 두 차례에 걸쳐 인도의 총리를 역임했다. 그녀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인도의 승리를 이끌고, 핵실험을 지휘하여 인도를 핵무기 보유국 대열에 올렸다. 그러나 1975년 비상사태 선포와 권위주의적 통치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84년 시크교도 경호원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그녀의 죽음 이후 반시크교도 폭동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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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암살된 정치인 -
라지브 간디
라지브 간디는 인도의 정치인으로, 1984년부터 1989년까지 총리를 역임했으며, 경제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고 스리랑카 내전에 개입했으나 1991년 선거 유세 중 암살되었다. -
인도의 암살된 정치인 -
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민족주의 지도자이자 사상가로서, 비폭력 저항 운동인 사티아그라하를 통해 인도 독립에 기여했으나, 종교 갈등 속에서 암살당했고 그의 사상은 평화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
인도의 사회주의자 -
자와할랄 네루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는 영국에서 교육받고 간디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독립 후 17년간 총리로 재임하며 인도의 건국과 현대화에 기여하고 비동맹 운동을 주창했다. -
인도의 사회주의자 -
기리시 카나드
기리시 카나드는 인도의 극작가, 배우, 영화 감독으로, 카르나타크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희곡 외에도 영화, 다큐멘터리,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
인도의 외무장관 -
프라나브 무케르지
프라나브 무케르지는 1935년 벵골에서 태어나 캘커타 대학교를 졸업하고, 1969년 인도 의회 상원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재무부, 국방부,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12년 인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17년까지 재임하다가 2020년 코로나19로 사망했다. -
인도의 외무장관 -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는 세 차례 인도 총리를 역임하며 경제 개혁, 파키스탄 관계 개선, 핵실험 등을 추진한 힌두 민족주의 정치인으로 인도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어린 시절
인디라 간디는 1917년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와할랄 네루, 어머니는 카말라 네루였다. 인디라의 조부 모틸랄 네루는 알라하바드의 부유한 법정 변호사였으며, 인도 국민회의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인도 정부 제도의 초안이 된 네루 리포트의 저자이기도 하다. 인디라의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 역시 독립운동 지도자였으며, 훗날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인디라가 2세 경, 부모는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네루의 집은 독립 운동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인디라는 인도와 스위스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는 병약했고,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국내 정치에 깊이 관여했기 때문에 인디라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인디라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비스바 - 바라티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 등에서 교육받았다. 1930년대 초반, 인디라는 학교 가방에 아버지 집에서 주요 혁명적 주도권을 위한 계획이 담긴 중요한 문서를 밀반출하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의 집은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1934년, 어머니 카말라는 결핵으로 사망했다.
2.1. 가족 배경 및 성장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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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라 간디는 1917년 11월 19일 알라하바드에서 자와할랄 네루와 카말라 네루 사이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인디라의 가족은 잠무 카슈미르주와 델리의 브라만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였으며, 훗날 인도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인디라는 외동딸로, 어머니 카말라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병약했고, 아버지는 독립운동으로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에 인디라는 외로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네루 가문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고,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인디라는 인도와 스위스에서 성장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비스바 - 바라티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포함한 학교들에서 교육을 받았다.
12세 때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어린이 조직 '바나라 세나'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인도 독립운동에서 작지만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어린이들은 항의와 깃발 행렬을 지속하였고, 의회 정치인들이 민감한 발간들과 금지된 제재들을 배부하는 도움을 주었다.
1934년 어머니 카말라는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인디라는 17세였다.
유럽과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인디라는 파시교 의회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페로제 간디를 만났고, 1942년에 결혼하였다. 페로제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와 성씨가 같지만 친족은 아니었다.
2.2. 페로제 간디와의 만남과 결혼
유럽 대륙과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인디라는 훗날 남편이 되는 파시교도 의회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 페로제 간디를 만났다. 페로제 간디는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페르시아계 인도인)였으나, 정치적인 이유로 간디라는 성을 사용했다. (페로제는 마하트마 간디와 성씨가 같지만 친족이 아니었다.) 1942년 인디라와 페로제는 결혼하였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혼 직후, 영국 식민지배에 대항하는 마하트마 간디와 국민회의의 국내적 반란 8월 운동이 시작되면서, 간디 부부는 전복 혐의로 체포되어 1942년 9월 11일부터 1943년 5월 13일까지 투옥되었다.
1944년 페로제 간디와 결혼한 인디라 네루는 "인디라 간디"로 알려지게 되었고, 장남 라지브를 낳았다. 2년 후에는 차남 산제이 간디가 태어났다.
1947년 혼란한 인도의 분할이 일어난 동안, 인디라는 난민 수용소를 결성하고, 파키스탄에서 온 수백만 명의 난민들을 위하여 의료소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부부는 알라하바드에 정착했지만, 인디라가 초대 총리가 된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의 곁을 지키기 위해 델리로 이주하면서 결혼 생활은 악화되었다. 인디라는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 서기이자 간호사 역할을 했다. 1952년 인도의 첫 총선에서 간디는 자신의 부친과 남편의 선거 운동을 모두 관리하였다. 페로제는 인도 국민회의 신문과 보험 회사에서 일하며, 국영화된 보험업에서 주요 스캔들을 폭로하는 등 부패에 맞서는 정치인으로 평판을 쌓았다.
1957년 재선 직후, 페로제는 심근 경색을 겪었으나, 인디라의 간호로 회복하며 관계가 개선되는 듯했다. 그러나 1960년 9월 8일 인디라가 해외에 있는 동안 페로제는 사망하였다.
3. 정치 입문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인디라 간디는 인도 국민회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 직위에 선출된 네 번째 여성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의 수석 보좌관으로도 활동했다. 네루는 자신의 딸을 요직에 앉힌 것에 대해 족벌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62년 선거에서 간디는 의석을 추구하지 않았다.
1964년 5월 27일 네루가 사망한 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의 권유로 간디는 선거에 출마하여 정보·방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힌디어가 남부 비힌디어 사용 주에서 국민 언어로 지정되자 폭동이 일어났고, 간디는 마드라스로 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공무원들과 대화하고, 지역 사회 지도자들의 분노를 달래고, 피해 지역의 재건을 감독했다. 샤스트리와 다른 장관들은 이러한 문제 해결 능력 부족에 당황했다. 그러나 간디는 외교적 능력과 혼란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했다.
간디는 대중매체에 대한 이해와 정치 기술, 그리고 홍보에 능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장관직의 일상적인 세부 사항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간디는 스리나가르 국경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파키스탄 폭도들이 도시에 침투했다는 육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잠무나 델리로 이동하지 않고 지역 정부를 결집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아 국가를 안심시키는 데 기여했다.
1966년 샤스트리가 사망하자, 총리직을 위한 다양한 후보자들이 샤스트리의 후임자를 두고 합의를 보지 못했다. 결국 인디라 간디는 타협 후보로 거론되었는데, 이는 그녀가 쉽게 조종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뛰어난 실력과 끈기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완고하고 통찰력이 있었지만, 권위주의적인 성향도 있었다. 당시 인도 국민회의 의장 쿠마라스와미 카마라지는 수년 후 간디를 총리로 만든 것에 대해 네루에게 개인적인 맹세를 했기 때문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와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군기 구디야(벙어리 인형)라고 불렀다.
인도 국민회의 투표에서 간디는 모라르지 데사이를 355표 대 169표로 꺾고 인도의 세 번째 총리이자 이 직위를 맡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총리로서 간디는 현대화를 추진했다. 그녀는 과학과 기술을 강력하게 장려했다. 그녀는 또한 인도 시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 이웃 중화인민공화국 및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지도력은 인도가 세계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 대국 중 하나가 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여성이 전통적으로 남성에게 종속적인 국가에서 지도자가 된 간디의 부상은 큰 용기가 필요했고, 인도 여성뿐만 아니라 제3세계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1971년 간디는 "빈곤 퇴치" 슬로건을 내걸고 재선에 성공했다.
3.1. 인도 국민회의 총재 취임
1959년 인도 국민회의 총재로 선출되어 정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하였다. 당시 인도 국민회의 총재 선거에서 네 번째 여성 총재로 선출되었다.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의 수석 보좌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네루는 자신의 딸이 수석 보좌관으로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족벌주의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62년 선거에서는 의석을 추구하지 않았다.
1964년 5월 27일 네루가 사망한 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의 주장에 따라 선거에 출마하여 정보·방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총재직을 1년 만에 사임했지만, 이는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3.2. 정보방송부 장관 시절
1964년 5월 27일, 자와할랄 네루가 사망하자,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의 권유로 인디라 간디는 선거에 출마하여 정부에 합류했다. 그녀는 정보·방송부 장관으로 즉시 임명되었다.
힌디어가 남부의 비힌디어 사용 주에서 국민 언어가 되는 것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을 때, 간디는 마드라스로 가서 공무원들과 대화하고, 공동체 지도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피해 지역 재건을 감독하였다. 샤스트리와 다른 장관들은 이러한 문제 해결 능력 부족에 당황했다. 반면 간디는 외교적 능력과 소동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여 주목받았다.
간디는 대중매체에 대한 이해와 정치, 홍보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장관직의 일상적인 세부 사항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방송부 장관 재임 기간 동안, 많은 인도인들은 문맹이었고 정보 습득을 위해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의존했다. 간디는 저렴한 라디오 보급을 장려했고, 가족 계획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간디는 스리나가르의 국경 지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파키스탄 폭도들이 도시에 침투했다는 육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잠무나 델리로 이동하지 않고, 지역 정부를 결집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아 국가를 안심시키는 효과를 냈다.
4. 총리 재임 (1차, 1966-1977)
1966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인디라 간디는 인도국민회의 전당대회 투표 결과 잔타당의 모랄지 데사이를 누르고 총리에 취임했다. 취임 전에는 명예직에 불과하며 실권은 당내 유력 정치인들이 장악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곧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당시 식량 위기에 직면했던 인도는 세계은행의 융자 조건으로 1966년 6월 인도 루피 평가절하를 단행했지만, 미국의 원조 중단으로 세계은행도 융자를 대폭 감축했다. 이에 인도는 반미·반세계은행적 색채를 띠며 사회주의적 노선을 추진, 1969년에는 주요 상업은행 14개를 국유화했다. 이 정책으로 인도국민회의는 인디라파와 반인디라파로 분열되었다. 또한, 녹색 혁명을 추진하여 식량 자급을 통한 외국 의존 탈피를 목표했다.
1971년 동파키스탄의 독립 운동에 무력 개입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이 파키스탄을 지원했지만, 소련과 인도-소련 평화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하고 지원을 받아 전쟁에서 승리했다. 종전 후,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 대통령과 협상하여 1972년 심라 협정에서 동파키스탄을 방글라데시로 인정했다.
1974년에는 라자스탄주 포크란에서 "웃는 부처"라는 암호명으로 지하 핵무기 실험을 성공시켜 세계에서 가장 젊은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1971년 총선에서 "빈곤 퇴치"를 내세워 의석 수를 늘렸지만, 1975년 이라하바드 고등법원이 선거법 위반을 인정하고 의원직을 박탈하자, 인도 전역에 비상사태령을 선포하고 반대 세력을 제압하며 야당 당원들을 체포·투옥시켰다. 비상사태령은 7개월 후 해제되었다. 1977년 총선에서 "반인디라"를 기치로 데사이를 중심으로 한 잔타당이 제1당이 되고 인도국민회의는 참패했다. 인디라 간디 자신도 낙선했지만, 정권을 이양했다.
4.1. 총리 취임과 초기 과제
1966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인도 국민회의는 인디라 간디를 총리로 추대했다. 당내 권력 투쟁에서 모라르지 데사이를 누르고 총리에 취임한 인디라 간디는 초기에는 당내 유력 정치인들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곧 자신만의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디라 간디는 취임 당시 심각한 경제 위기와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1965년 파키스탄과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 문제와 가뭄으로 인한 식량 위기로 인도는 독립 이후 최악의 불경기를 겪고 있었다.
이에 인디라 간디는 경제 자유화 조치를 취하고 외국 원조 복원을 위해 1966년 6월 인도 루피화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그러나 미국은 파키스탄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원조를 중단했고, 세계은행도 이에 동조하여 융자를 대폭 감축했다. 이로 인해 인도 여론은 반미·반세계은행적 색채를 띠게 되었고, 인디라 간디는 미국과 거리를 두고 사회주의적 노선을 추진하여 1969년에는 주요 상업은행 14개를 국유화했다.
또한, 식량 위기 극복뿐 아니라 식량 자급을 통한 외국 의존 탈피를 목표로 녹색 혁명을 추진했다. 인디라 간디는 미국의 곡물 수입에 대한 인도의 의존을 굴욕적으로 여겨 농업 자급 자족을 추구하는 데 개인적인 동기가 있었다.
4.2. 사회주의 정책과 은행 국유화
1966년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가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인디라 간디는 인도국민회의 전당대회 투표에서 모라르지 데사이를 누르고 총리에 취임했다. 총리 취임 초기에는 당내 유력 정치인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인디라 간디는 명예직에 머물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그녀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당시 인도는 식량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세계은행으로부터 융자를 얻기 위해 1966년 6월 인도 루피화를 평가절하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파키스탄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미국의 원조가 중단되자, 세계은행도 이에 동조하여 융자를 대폭 감축했다. 이로 인해 인도 여론은 반미, 반세계은행적 색채를 띠게 되었고, 인디라 간디는 미국과 거리를 두고 사회주의적 노선을 추진했다. 1969년에는 주요 상업은행 14개를 국유화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 정책을 둘러싸고 인도국민회의는 사회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인디라파와 이에 반발하는 반(反)인디라파로 분열되었다.
4.3.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과 인도의 역할
1971년,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에서 파키스탄으로부터의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인디라 간디는 동파키스탄에 대한 무력 개입을 결정하여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이 파키스탄을 지원했지만, 인디라 간디는 소련과 인도-소련 평화 우호 협력 조약을 체결하여 지원을 확보하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종전 후,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과 협상하여 1972년 심라 협정에서 동파키스탄을 방글라데시로 인정했다.
4.4. 핵실험과 국제 관계
1974년 인디라 간디는 라자스탄주 포크란 근처에서 "웃는 부처(Smiling Buddha)"라는 암호명으로 지하 핵무기 실험을 성공적으로 지휘하였다. 이 실험은 "평화적인 목적"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되었지만, 인도는 이로써 세계에서 가장 젊은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간디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핵무기 위협과 주요 초강대국의 침입적인 이익이 인도의 안정과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어 국내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그녀는 파키스탄의 새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를 심라로 초청하여 1주간 정상 회담을 열었다. 회담이 거의 실패한 후, 두 정상은 협상과 평화적 수단을 통해 카슈미르 분쟁을 해결하기로 한 심라 협정을 맺었다.
인디라 간디는 인도가 통치하던 93,000명의 파키스탄 전쟁 포로를 통해 카슈미르의 파키스탄 점령 지역을 얻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협정은 유엔과 제3국의 즉각적인 간섭을 막고, 파키스탄이 가까운 미래에 주요 공격을 할 가능성을 크게 줄였다. 간디는 부토에게 민감한 문제에 대한 절대적 항복 문서를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파키스탄이 안정되고 정상화되도록 하였다. 무역 관계는 정상화되었지만, 많은 연락은 오랫동안 동결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핵실험은 1971년 전쟁 이후 크게 감소했던 간디의 인기를 즉각적으로 되살렸다. 국민회의당의 전반적인 인기와 이미지가 향상되었고, 인도 의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4.5. 비상사태 선포와 권위주의 통치
1975년 6월 알라하바드 고등 법원은 인디라 간디 총리가 자신의 선거 운동과 당의 업무에서 공무원들을 고용한 것이 유죄라고 판결했다. 이는 기술적으로 선거 사기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법원은 의회에서 그녀의 의석을 박탈하고 6년 동안 선거에 나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간디는 이 결정에 항소했다. 야당들은 그녀의 사임을 요구하며 결집했다. 노동조합들에 의한 파업들과 항의 대집회들이 많은 주에서 혼란을 야기했다. 자야 프라카슈 나라이안의 자나타 당 연정은 비무장의 민중에 해고하는 데 의문이 든다면 명령에 불복종하라고 경찰을 부르기도 하였다. 어려운 경제 상황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공공의 분노를 일으켰다. 큰 집회가 국회의사당과 델리에 있는 간디의 저택을 둘러싸면서 그녀에게 책임감 있는 행동과 사임을 요구했다.
간디 총리는 파크루딘 알리 아메드 대통령에게 비상사태를 선언하도록 조언했다. 그녀는 파업과 집회들이 "내부의 소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메드는 과거 정치적 동맹자였으며, 인도에서 대통령은 선출된 총리의 조언에 따라 행동한다. 따라서 헌법 조항 352조 아래 내부의 혼란 때문에 비상사태가 6월 26일 선언되었다.
국회에 의해 비상사태 선언이 비준되기 전, 간디는 파업과 항의를 해산하기 위해 경찰과 군대를 소집했다. 그녀는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많은 이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영국에 의해 투옥되었던 사람들이었다. 소등 명령을 강요하는 권력과 무기한 구금 권한이 경찰에게 승인되었다. 모든 발표물은 정보·방송부를 위해 직접 검열되었다. 선거는 불명확하게 연기되었고 비의회적 주 정부들은 퇴거되었다.
간디는 더 나아가 국회에서 투표될 필요가 없던 법령들을 발포하는 데 아메드 대통령을 이용하여 자신과 산제이가 법령에 의해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훗날의 총리이자 당시 간디의 정보·방송부 장관 인데르 쿠마르 구지랄은 자신의 장관 업무에서 산제이의 간섭에 항의하며 사임하였다.
총리의 비상사태 규칙은 19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국가는 중요한 경제와 산업의 진보를 이루었다. 이는 노조와 학생회의 훈련은 물론 공장, 학교와 대학들에서 파업에 대항하는 정책들 때문이었다. 여러 곳의 게시판에 바테인 캄, 캄 지아다 (적게 이야기 하고, 더 많은 일을 하자) 슬로건과 함께 공공 생산성이 증가하였고 행정은 능률적이었다.
세금 탈세는 열성적인 공무원들에 의해 축소되었다. 농업과 산업 생산은 간디의 20 포인트 프로그램 아래 확장되었다. 국제 공동체에서 인도의 재정적 신분 만큼 세입이 증가하였다. 거의 중산층 계급들은 형세와 함께 자신들의 불만을 품는 동안 그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찾아냈다.
동시에, 의견 차이를 억누르기 위한 엄격한 캠페인은 수천 명의 정치적 활동가들의 체포와 고문을 포함했다. 델리의 자마 마스지드 주변 빈민가는 산제이에 의해 명령이 내려지고, 자그모한에 의해 수행되면서 처리되었다. 이 활동은 수만 명의 국민들을 노숙자로 만들었고, 수천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가족 계획 프로그램은 수천 명의 아버지들에게 강제적으로 정관 수술을 강요하였고, 가끔 부족하게 관리되어 21세기로 들어가 지속된 가족 계획에 대항하는 공공적 노여움을 양성하였다.
1977년 자신의 인기를 크게 잘못 판단한 간디는 선거를 실시했고 인도 인민당/자나타 당 연정에 의해 완전히 패하였다. 자나타 당은 그녀의 장기적 라이벌 데사이에 의해 지도되었다. 그는 선거들이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 선택하는 데 인도를 위한 마지막 기회였다고 주장하였다. 간디 당의 패배에 이어 그녀는 수상에서 물러나기로 동의하였다.
5. 총리 재임 (2차, 1980-1984)
1977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 인디라 간디는 1980년 총선에서 다시 권력을 잡았다. 자나타 당 연정은 간디에 대한 증오만으로 연합되었지만, 내부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다. 간디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다시 공공 연설을 시작하고, 비상사태 동안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며 지지를 얻었다. 1979년 6월, 모라르지 데사이 총리가 사임하고 차란 싱이 총리에 임명되었지만, 싱은 다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간디는 자신의 초기 지지를 철회했고, 1980년 새로운 선거가 소집되어 간디의 인도 국민회의가 압승을 거두었다.
5.1. 정권 복귀와 경제 정책
1977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실각했지만, 1980년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의 인도 국민회의는 압승을 거두고 다시 정권을 잡았다. 2차 집권 기간 동안 인디라 간디는 경제 자유화 정책을 일부 도입하고, 시장 경제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1980년, 인디라 간디는 아들 산제이 간디의 국산 자동차 출시 꿈을 기리기 위해 그의 부채에 시달리는 회사인 마루티 우댜그(Maruti Udyog)를 43에 국유화하고 전 세계 자동차 회사들에 합작 투자를 제안했다. 일본의 스즈키(Suzuki)가 파트너로 선정되었고, 이 회사는 1984년 첫 인도산 자동차를 출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주의적 기조를 유지하며, 빈곤층과 소외 계층을 위한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5.2. 펀자브 문제와 블루스타 작전
1980년대 초, 펀자브 지역에서 시크교 분리주의 운동이 격화되면서 인도는 심각한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 펀자브 지역의 종교 지도자 자르나일 싱 빈드란왈레는 ਪੰਜਾਬੀ ਅਕਾਲੀ ਦਲ펀자브어당과의 갈등속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1981년 9월 암리차르에서 25일간 체포되었다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며, 이후 황금 사원 구역 안의 구루 나나크 니와스로 본부를 옮겼다.
인디라 간디는 빈드란왈레의 무장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1984년 6월 3일 블루스타 작전을 개시, 군대를 동원하여 시크교의 성지인 황금 사원을 공격했다. 많은 시크교도들은 이를 자신들의 가장 신성한 사당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여 분노했다. 이 작전으로 빈드란왈레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지만, 2만 명 이상의 시크교도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고 시크교도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6. 암살과 그 이후
인디라 간디의 정치 경력은 1979년 모라르지 데사이 총리의 사임과 차란 싱의 총리 임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싱은 다수당을 형성하지 못해 간디와 협상했지만, 간디는 지지를 철회했고, 1980년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간디의 인도 국민회의는 압승을 거두며 재집권에 성공했다.
재집권 이후 간디는 펀자브주 문제에 직면했다. 자르나일 싱 빈드란왈레는 시크교 분리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1981년 9월 체포되었다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된 후 황금 사원으로 거점을 옮겼다. 간디는 1984년 6월 3일 블루 스타 작전을 승인하여 빈드란왈레와 그의 추종자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시크교도들이 희생되었다.
간디의 총리 재임 기간 중 1980년 아들 산제이 간디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인디라 간디는 아들의 국산 자동차 출시 꿈을 기리기 위해 마루티 우댜그(Maruti Udyog)를 국유화했다.
인디라 간디는 1985년 베트남 정부로부터 금성훈장(Golden Star Medal)을 수여받았다.
6.1. 암살과 반시크교 폭동
1984년 6월 3일 블루 스타 작전으로 많은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의 가장 신성한 사당으로 여기던 곳에 격노하여 심한 논쟁이 일어났다.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 경호원 사트완트 싱과 비안트 싱에게 뉴델리 사프다르중 1번지 총리 관저 정원에서 암살당했다. 이들은 블루스타 작전에 대한 복수를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간디는 아일랜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영국 영화 제작자 피터 우스티노프와 인터뷰를 하러 가던 중, 경호원들이 지키는 위켓 게이트를 지나가다 총격을 받았다. 비안트는 권총으로 세 번, 사트완트는 30발을 발사했다. 이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으나, 다른 경비원들에게 끌려가 비안트는 사살되고 케하르 싱은 공격 음모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트완트와 케하르는 티하르 교도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간디는 오전 9시 30분에 전인도 의학 과학 연구소로 옮겨져 수술을 받았으나, 오후 2시 20분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티라스 다스 도그라가 이끄는 의사팀은 부검을 통해 간디가 스텐 기관단총과 .38 스페셜 권총에서 최대 30개의 총상을 입었다고 증언했다. 공격자들은 31발을 발사했고, 그중 30발이 명중, 23발은 관통, 7발은 몸에 남아 있었다. 도그라는 법정에서 증인으로 출석하여 증언했다. 살마 술탄은 1984년 10월 31일 저녁, 도르다르산 뉴스에서 간디 암살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는데, 이는 총격 후 10시간 이상 지난 시점이었다.
간디는 11월 3일 라지 갓 근처에서 힌두 전통에 따라 화장되었으며, 화장된 곳은 샤크티 스탈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장례식은 BBC 등 국내외 방송국에서 생중계되었다.
간디 암살 이후, 반시크교도 폭동이 뉴델리를 휩쓸고 전국으로 퍼져나가 수천 명이 사망하고 수만 명이 노숙자가 되었다. 중립적인 관찰자들은 델리 프라데슈 회의 위원회의 많은 지도자들이 폭력에 연루되었다고 고발했으며, 이들은 살인 및 방화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 부족으로 각하되었다.
간디의 죽음에 전 세계가 애도를 표했으며, 세계 지도자들은 암살을 규탄했다.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은 간디의 죽음이 '전 세계에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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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라지브 간디의 총리직 승계와 암살
인디라 간디의 사망은 전 세계적인 애도를 불러왔다. 세계 지도자들은 암살을 규탄했고, 그녀의 죽음이 국제 관계에 '큰 공허함'을 남길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소련의 콘스탄틴 체르넨코 대통령은 깊은 애도를 표했으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인도 대사관을 방문하여 조문록에 서명하고 암살에 대한 '충격, 혐오, 슬픔'을 표명했다.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도 간디의 죽음이 '전 세계에 대한 위대한 지도자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인디라 간디의 뒤를 이어 장남인 라지브 간디가 총리가 되었지만, 그 역시 1991년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LTTE)를 대신해 활동하는 자살 폭탄 테러범에 의해 암살당했다.
6.3. 네루-간디 가문의 유산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로서 오랫동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네루-간디 가문은 인도 정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디라 간디는 1981년 2월 아들 산제이 간디가 사망하자, 항공 조종사였던 또 다른 아들 라지브 간디를 설득하여 정계에 입문시켰다. 인디라 간디의 암살 이후, 라지브 간디는 총리직을 계승하였다. 1991년 5월 라지브 간디 역시 타밀일람 해방 호랑이 투사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라지브 간디의 부인 소냐 간디는 2004년 로크 사바 선거에서 인도 국민회의를 승리로 이끌며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의 국민민주동맹을 권좌에서 몰아냈다. 소냐 간디는 총리직을 맡지 않았지만, 의회의 정치적 기구를 통치했다. 이후 만모한 싱 박사가 국가를 이끌었다. 라지브 간디의 자녀들인 라훌 간디와 프리얀카 간디 또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인디라 간디의 또 다른 아들 산제이 간디의 부인 마네카 간디는 인디라 간디와 갈등을 겪은 후, 야당인 인도 인민당의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산제이 간디의 아들 바룬 간디도 어머니와 함께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흔히 네루-간디 가문으로 불리지만, 인디라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와는 혈연 관계가 없다. '간디'라는 성은 남편 페로제 간디에게서 온 것이다.
7. 평가와 유산
헨리 키신저는 인디라 간디를 "철의 여인"이라고 묘사했는데, 이 별명은 그녀의 강인한 성격과 연관되게 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인도 정치에 강력한 유산을 남겼으며, 인도 총리직을 역임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샤크티 스탈(Shakti Sthal)은 "힘의 장소"를 의미하며 그녀를 위한 기념물이다.
7.1. 긍정적 평가
인디라 간디는 강력한 지도력과 결단력으로 인도를 이끌었으며, 빈곤 퇴치와 사회 개혁에 힘썼다. 특히 녹색 혁명을 통해 식량 자급을 달성하고, 은행 국유화를 통해 금융 시스템을 개혁한 것은 높이 평가받는다.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에 대한 인도의 승리를 이끌어 인도 최고 민간인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를 수여받았다. 2011년에는 방글라데시 최고 민간인 훈장인 방글라데시 자유 훈장이 사후 수여되었다.
간디의 주요 유산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을 패배시키고 동파키스탄을 독립적인 방글라데시로 만든 것이다. 인도가 핵무기 보유국 그룹에 합류하는 데 기여했다. 공식적으로 비동맹 운동의 일원이었지만, 인도의 외교 정책을 소련 진영으로 기울게 했다.
1999년 BBC 온라인 투표에서 "밀레니엄의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2012년 아웃룩 인디아의 가장 위대한 인도인 투표에서 7위를 차지했다. 2020년에는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100대 여성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7.2. 부정적 평가
인디라 간디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으로 비판받았다. 특히 1975년 선포된 비상사태는 언론 탄압과 인권 유린으로 이어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상사태 기간 동안 간디의 차남 산자이 간디(Sanjay Gandhi)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사실상 경찰 국가를 수립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간디는 족벌 정치와 부정부패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국민회의당의 내부 민주주의가 손상되었고, 권력이 총리실과 아들들에게 집중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984년 블루스타 작전은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고, 시크교도들의 분노를 사서 결국 간디의 암살로 이어졌다. 간디의 경호원이었던 시크교도 사트완트 싱과 비안트 싱은 블루스타 작전에 대한 복수로 간디를 암살했다.
7.3. 종합적 평가
인디라 간디는 인도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헨리 키신저는 인디라 간디를 "철의 여인"이라고 묘사했는데, 이 별명은 그녀의 강인한 성격과 연관되게 되었다.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 파키스탄을 상대로 인도의 승리를 이끈 후, V. V. 기리 대통령은 간디에게 인도 최고 민간인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를 수여했다. 2011년에는 방글라데시 자유 훈장이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 대한 그녀의 "뛰어난 공헌"을 기리며 사후에 수여되었다.
간디의 주요 유산은 파키스탄을 패배시키고 동파키스탄을 독립적인 방글라데시로 만들라는 미국의 압력에 맞서 굳건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인도가 핵무기 보유국 그룹에 합류하는 데 책임이 있었다. 인도가 공식적으로 비동맹 운동의 일원이었지만, 그녀는 인도의 외교 정책을 소련 진영으로 기울게 했다.
1999년, 간디는 BBC가 주최한 온라인 투표에서 "밀레니엄의 여성"으로 선정되었고, 2012년, 그녀는 아웃룩 인디아의 가장 위대한 인도인 투표에서 7위를 차지했다. 2020년에는 타임지가 지난 세기를 정의한 세계 100대 여성 중 한 명으로 간디를 선정했다.
수십 년 동안 인도 정치의 최전선에 있었던 간디는 인도 정치에 강력한 유산을 남겼다. 그녀의 통치가 국민회의당의 내부 당 민주주의를 손상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비평가들은 그녀가 주 정부 수장들을 약화시켜 연방 구조를 약화시키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약화시키고, 권력을 자신의 비서실과 아들들에게 집중시켜 내각을 약화시켰다고 비난한다. 간디는 또한 인도 정치와 인도의 제도에서 족벌주의 문화를 조성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녀는 또한 일부 사람들이 인도 민주주의의 "암흑기"라고 묘사한 비상사태 기간과 거의 유일하게 관련되어 있다. 비상사태 중에 채택된 인도 헌법 제42차 수정 조항도 그녀의 유산으로 간주될 수 있다.
8. 외부 링크
인디라 간디의 죽음은 전 세계적으로 애도되었다. 세계 지도자들은 암살을 규탄하며 그녀의 죽음이 국제 관계에 '큰 공허함'을 남길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에서 소련의 콘스탄틴 체르넨코 대통령은 "소련 국민들은 위대한 인도 국민의 영광스러운 딸이자, 평화와 국민의 안보를 위한 불타는 투사이자 소련의 위대한 친구인 그녀가 악당의 암살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을 고통과 슬픔으로 접했습니다"라는 애도를 전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함께 인도 대사관을 방문하여 조문록에 서명하고 암살에 대한 '충격, 혐오, 슬픔'을 표명했다. 42대 미국 부통령 월터 몬데일은 간디를 '위대한 민주주의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부르며 '이러한 충격적인 폭력 행위'를 개탄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및 유럽 지도자들은 간디를 민주주의의 위대한 옹호자로 애도했으며, 비동맹 운동은 '깊은 슬픔'을 표명하고 살인을 '테러' 행위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간디의 죽음은 '전 세계에 대한 위대한 지도자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베셀린 주라노비치, 파키스탄 대통령 모하마드 지아울하크, 이탈리아 대통령 산드로 페르티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바티칸) 및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은 살인을 규탄했다. 유엔에서 총회는 충격을 받은 대표들이 사망을 애도하면서 회의를 중단했다. 잠비아의 총회 의장 폴 루사카는 예정된 토론을 연기하고 서둘러 추모 회의를 조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