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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렌가리우스 2세 이브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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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렌가리오 2세 이브렌시스는 900년경 이브레아 후작 아달베르토 1세와 기셀라 드 프리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940년부터 이탈리아 귀족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처삼촌인 프로방스의 위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후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오토 1세와의 갈등으로 폐위되어 감옥에 갇혔고, 96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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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렌가리우스 2세 이브렌시스
기본 정보
베렌가리오가 오토 왕에게 절하는 모습
베렌가리오가 오토 1세에게 절하는 모습 (1200년경)
출생900년경
사망966년 8월 4일
사망 장소밤베르크 성, 노르트가우 변경, 독일 왕국
통치
칭호이탈리아 왕
재위 기간950년 – 961년
선대 군주로타리오 2세
후대 군주오토 1세
가문
가문안스카르 가문
가족
배우자윌라 디 토스카나
자녀아달베르토
귀도 디 이브레아
콘라드 디 이브레아
로잘리아 디 이탈리아
아버지아달베르토 1세 디 이브레아
어머니기젤라 디 프리울리

2. 생애

950년 로타리오 2세가 사망하자 아들 아달베르토 2세와 함께 이탈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2] 그러나 전 왕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아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베렌가리우스 2세는 로타리오 2세의 미망인 부르고뉴의 아델하이트에게 아들 아달베르토와의 결혼을 강요하여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게르마니아에서는 이러한 찬탈에 대한 비난이 일어났고, 이는 동프랑크 왕 오토 1세의 개입을 불러 일으켰다. 이 개입으로 베렌가리오 부자는 도주했고, 오토 1세는 "프랑크와 이탈리아의 왕" 칭호를 받았다 (951년). 이는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위를 정식으로 요구하는 전조가 되었다. 그 후, 베렌가리오 2세와 아달베르토 2세는 952년에 왕위 계승을 오토에게 확인하는 등의 합의를 보았다.

롬바르드의 철왕관


940년부터 베렌가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의 귀족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처삼촌 프로방스의 위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위그의 어린 아들 로타리오 2세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포기하라고 경고하였다. 941년 베렌가리우스 2세는 독일로 피신하여 오토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되었다. 945년 베렌가리우스 2세는 오토 1세로부터 군대를 얻어 다시 이탈리아로 복귀, 위그와 싸워 그를 패배시키고 아를로 추방하였다. 947년 위그가 죽자 그의 아들인 로타리오 3세와 싸웠으며, 3년 뒤 로타리오 3세가 갑자기 죽자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시중에서는 베렌가리오가 로타리오 2세를 독살했다고 의심하였다.

로타리오 3세 사후, 베렌가리우스 2세는 로타리오 3세의 미망인이자 이탈리아의 공주, 루돌프 2세의 딸인 아델하이트를 자신의 아들 아달베르토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아델하이트는 이를 거절하고 수감되었다. 951년 아델하이트는 딸 엠마를 데리고 탈출, 카노사에 있던 동프랑크 왕국의 군주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토 1세는 946년 이미 정비 마틸다를 잃었으므로 아델하이트는 곧 오토와 결혼했다. 951년 베렌가리우스 2세는 아들 아달베르토 2세를 공동 국왕으로 선언하고, 로마의 보호자이자 파트리키우스를 자처한 알베리크 2세와 갈등하였다. 954년 로마의 보호자를 자처하던 알베리크 2세가 사망하자 베렌가리우스 2세는 비로소 이탈리아 전역을 통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통솔 기간은 954년 - 955년 무렵으로, 곧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분쟁이 발생한다.

951년 가을, 오토 1세는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왔다. 베렌가리우스 2세는 형식적으로 오토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산 마리노에서 이탈리아 귀족들과 면담한 오토는 951년 12월 25일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오토 1세는 자신의 본처에게서 얻은 딸 리우트가르트의 남편 콘라트 적왕을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로 보내 이탈리아섭정으로 임명한다. 오토는 당초 베렌가리우스 2세를 폐위시키려 했지만, 952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한 베렌가리우스는 오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프리울리 지역을 오토에게, 베로나를 오토 1세의 동생 하인리히 1세에게 양도하였다.[5] 이로써 베렌가리우스 2세는 겨우 이탈리아의 왕이라는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 그는 분리 독립을 기도한다. 953년 오토 1세가 자신의 아들 리우돌프의 반란을 처리하는 동안 베렌가리우스 2세와 아들 아달베르토 2세는 카노사를 공격하였다.

베렌가리우스 2세와 아달베르토 2세의 태도와 정치적 행동은 봉건 영주들과 성직자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여러 번 동프랑크 왕의 개입을 요청했지만, 실현된 것은 오토의 아들 리우돌프에 의한 956년부터 957년의 단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안스카리 가문의 왕위와 이탈리아에서의 권력 확인을 합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어 베렌가리우스는 교황령에 대해 공격적인 정치를 펼쳤고, 요한 12세는 오토에게 이탈리아로의 세 번째 진공 (961년)을 요구했다. 베렌가리오의 군대는 전투를 거부했고, 부자는 산 레오의 요새에 농성하게 되었다. 오토는 그를 정식으로 폐위시키고, 요한 12세에 의해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았다.

960년 아달베르토 2세와 함께 교황 요한네스 12세를 공격하자, 961년 가을 오토 1세는 교황의 요청으로 로마로 진군하여 12월 25일 베렌가리오 2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이탈리아 왕위에 올랐다.[3] 962년 2월 2일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받았다.[3]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 부자 간의 갈등에 반감을 품고 963년 베렝가리오와 협상하자, 오토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963년 12월 교황을 베렝가리오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축출하고, 산 레오에서 베렝가리오 2세 내외를 생포하여 독일 바이에른 공국 노드가우 후작령 밤베르크의 감옥에 가두었다.[3]

966년 8월 4일 독일 노드가우 밤베르크 성 감옥에서 옥사하였다.[3] 아들 아달베르토 2세는 966년경까지 오토 1세에게 저항하였다. 왕비 토스카나의 윌라는 밤베르크의 수녀원에 감금되어 생을 마쳤다.[3]

2. 1. 초기 활동

900년이브레아 후작 아달베르토 1세와 기셀라 드 프리울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기셀라 드 프리울리는 프리울리 후작이자 롬바르디아의 왕,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베렌가리오 1세의 딸이었고, 베렝가리오 1세는 다시 경건왕 루트비히의 딸 기셀라 드 프랑크의 아들이었다.

베렌가리오의 친할아버지 안스카르는 본래 프랑스 출신으로 부르고뉴와 오스크의 백작이었으나,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들과 친인척 관계였다. 888년구이도에 의해 이탈리아 이브레아후작에 임명되어 이탈리아에 정착하였다. 이후 계속 이브레아 후작직을 세습했고, 아버지 아달베르토는 베렝가리오 1세의 딸과 결혼하여 세력가가 되었으며 프리울리 후작직도 승계하였다.

베렌가리오 2세의 선대는 다소 불분명한데 베렝가리오 1세의 집안의 친인척이면서 동시에 스폴레토의 구이도, 람베르토 집안과도 친인척 관계였다. 일설에는 피핀 3세의 형 카를로만의 딸 로트루드의 후손이라 하나 불확실하다. 베렌가리오는 이브레아 후작 아달베르토 1세와 황제 베렝가리오 1세의 딸 기셀라의 아들이었다. 920년대 초 그는 외할아버지 베렌가리오 1세의 휘하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었지만, 베렌가리오의 아버지 아달베르토 1세는 어느 시점에서 황제 베렝가리오 1세의 정적으로 변신했다.

아버지 아달베르토 1세는 로돌포의 편에 서게 됨으로써 베렝가리오 1세가 암살된 뒤에도 이브레아 후작직과 이탈리아 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923년부터 940년까지 이브레아후작이었고, 923년 아를의 보소의 딸이자 프로방스의 위그의 조카인 토스카니의 윌라와 결혼하였다. 940년 아들 귀도에게 이브레아 후작위를 넘겨주었다.

파비아의 베렌가리우스 궁정에서 자란 연대기 작가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그녀의 성격에 대한 몇 가지 생생한 설명을 제공한다.[1]

940년경, 베렌가리우스는 삼촌의 통치에 반대하는 이탈리아 귀족들의 반란을 이끌었다. 이탈리아의 휴의 가신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그는 왕의 어린 아들 이탈리아의 로타르 2세의 사전 경고를 받고, 독일 왕 오토 1세의 궁정으로 도망가야 했다.

2. 2. 이탈리아의 군주

940년부터 베렌가리우스 2세는 이탈리아의 귀족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처삼촌 프로방스의 위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위그의 어린 아들 로타리오 2세에게 이탈리아 왕위를 포기하라고 경고하였다. 941년 베렌가리우스 2세는 독일로 피신하여 오토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이 되었다. 945년 베렌가리우스 2세는 오토 1세로부터 군대를 얻어 다시 이탈리아로 복귀, 위그와 싸워 그를 패배시키고 아를로 추방하였다. 947년 위그가 죽자 그의 아들인 로타리오 3세와 싸웠으며, 3년 뒤 로타리오 3세가 갑자기 죽자 이탈리아의 왕이 되었다. 시중에서는 베렌가리오가 로타리오 2세를 독살했다고 의심하였다. 베렌가리우스 2세와 아달베르토 2세 부자에게 위그와 로타리오 3세는 각각 처삼촌과 처사촌, 외종조부와 외당숙, 조카사위와 외종손, 사촌매부 및 외5촌 조카가 된다.

로타리오 3세 사후, 베렌가리우스 2세는 로타리오 3세의 미망인이자 이탈리아의 공주, 루돌프 2세의 딸인 아델하이트를 자신의 아들 아달베르토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아델하이트는 이를 거절하고 수감되었다. 951년 아델하이트는 딸 엠마를 데리고 탈출, 카노사에 있던 동프랑크 왕국의 군주 오토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토 1세는 946년 이미 정비 마틸다를 잃었으므로 아델하이트는 곧 오토와 결혼했다. 951년 베렌가리우스 2세는 아들 아달베르토 2세를 공동 국왕으로 선언하고, 로마의 보호자이자 파트리키우스를 자처한 알베리크 2세와 갈등하였다. 954년 로마의 보호자를 자처하던 알베리크 2세가 사망하자 베렌가리우스 2세는 비로소 이탈리아 전역을 통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통솔 기간은 954년 - 955년 무렵으로, 곧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정치에 개입함으로써 분쟁이 발생한다.

951년 가을, 오토 1세는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왔다. 베렌가리우스 2세는 형식적으로 오토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산 마리노에서 이탈리아 귀족들과 면담한 오토는 951년 12월 25일 아델하이트와 결혼했다. 오토 1세는 자신의 본처에게서 얻은 딸 리우트가르트의 남편 콘라트 적왕을 이탈리아 북부 파비아로 보내 이탈리아섭정으로 임명한다. 오토는 당초 베렌가리우스 2세를 폐위시키려 했지만, 952년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열린 의회에 참석한 베렌가리우스는 오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그때까지 유지하던 프리울리 지역을 오토에게, 베로나를 오토 1세의 동생 하인리히 1세에게 양도하였다.[5] 이로써 베렌가리우스 2세는 겨우 이탈리아의 왕이라는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로 돌아온 뒤 그는 분리 독립을 기도한다. 953년 오토 1세가 자신의 아들 리우돌프의 반란을 처리하는 동안 베렌가리우스 2세와 아들 아달베르토 2세는 카노사를 공격하였다. 954년 8월 31일 로마와 이탈리아 중부의 패자인 알베리크 2세의 사망으로 이탈리아 중부의 주권을 획득한다.

950년 로타리오 2세가 사망하자 베렌가리우스 2세는 아들 아달베르토 2세와 함께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다.[2] 전 왕을 독살한 혐의로 그들의 정치적 입지는 약화되었고, 베렌가리우스는 로타리오의 미망인 부르고뉴의 아델하이트에게 아달베르토와의 결혼을 강요하여 정당성을 강화하려 했다. 게르마니아에서는 찬탈에 대한 비난이 일어났고, 이것이 동프랑크 왕 오토의 개입 원인이 되었다. 이 개입으로 베렌가리오 부자는 도주했고, 오토는 "프랑크와 이탈리아의 왕" 칭호를 받았다 (951년). 그 일은 그가 이탈리아 왕위의 정식 수여를 요구하는 전조가 되었다. 그 후, 두 변방 백작은 952년에 왕위 계승을 오토에게 확인하는 등의 합의를 이루었다.

베렌가리우스 2세와 아달베르토 2세의 태도와 정치적 행동은 봉건 영주들과 성직자들의 불만을 야기했고, 여러 번 동프랑크 왕의 개입을 요청했지만, 그것이 실현된 것은 오토의 아들 리우돌프에 의한 956년부터 957년의 단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안스카리 가문의 왕위와 이탈리아에서의 권력 확인을 합의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어 베렌가리우스는 교황령에 대해 공격적인 정치를 펼쳤고, 요한 12세는 오토에게 이탈리아로의 세 번째 진공 (961년)을 요구했다.

베렌가리오의 군대는 전투를 거부했고, 부자는 산 레오의 요새에 농성하게 되었다. 오토는 그를 정식으로 폐위시키고, 요한 12세에 의해 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았다.

2. 3. 퇴위와 최후

960년 아달베르토 2세와 함께 교황 요한네스 12세를 공격하자, 961년 가을 오토 1세는 교황의 요청으로 로마로 진군하여 12월 25일 베렌가리오 2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이탈리아 왕위에 올랐다.[3] 962년 2월 2일 오토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관을 받았다.[3]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 부자 간의 갈등에 반감을 품고 963년 베렝가리오와 협상하자, 오토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963년 12월 교황을 베렝가리오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축출하고, 산 레오에서 베렝가리오 2세 내외를 생포하여 독일 바이에른 공국 노드가우 후작령 밤베르크의 감옥에 가두었다.[3]

966년 8월 4일 독일 노드가우 밤베르크 성 감옥에서 옥사하였다.[3] 아들 아달베르토 2세는 966년경까지 오토 1세에게 저항하였다. 왕비 토스카나의 윌라는 밤베르크의 수녀원에 감금되어 생을 마쳤다.[3]

3. 사후

그의 아들 아달베르토 2세는 966년 오토 1세에게 패하고 죽어, 이탈리아 왕위는 베렌가리오의 부계쪽 조카손자 아르뒤노가 자립할 때까지 독일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 다른 아들 귀도는 970년 슈바벤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의 혈통은 14세기까지도 이어졌는데, 아달베르토 2세의 미망인 메이콘의 게르베르가(Gerberga de Mâcon)는 부르고뉴의 앙리 1세와 재혼하였다. 부르고뉴의 앙리 1세는 아달베르토의 아들 오토 윌리엄에게 부르고뉴 동쪽 영역에 부르고뉴 백작령을 신설하여 그를 임명하였다. 오토 윌리엄의 가계는 오토 윌리엄의 아들 레니에 1세의 증손 레너드 3세가 딸 베아트릭스만을 남기고 죽어 단절되었지만, 부르고뉴 여백작이 된 베아트릭스가 프리드리히 바르바롯사와 결혼하여 신성로마 제국의 황후가 됨과 동시에 자신들의 아들 오토에게 백작위를 넘겼다. 이 가계는 외손을 통해 발루아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사위들에게로 이어졌다.

오토 윌리엄의 다른 아들 레이몽은 레온카스티야의 통치자였던 지메네즈 가문의 우라카 여왕과 결혼하여 얻은 알폰소 7세를 통해 16세기까지 이어진다. 알폰소 7세의 마지막 직계 후손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로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트 2세와 결혼하여 얻은 딸 요안나 광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로 이어진다.

4. 가계

관계이름비고
할아버지안스카르902년 4월 사망
아버지아달베르토 1세? - 924
어머니프리울리의 기셀라880 - 915
왕비윌라 드 아를보소 드 아를의 딸, 프로방스의 위그의 조카딸
아들아달베르토? - 975, 이탈리아의 공동 왕(951~965), 이브레아 후작(965~975)
아들이브레아의 귀도? - 970년 6월 25일, 이브레아 후작(957 -965)
아들콘라트? - 1001년
로살라(수산느)936/45년 - 1003년, 플랑드르 백작아르눌 2세와 결혼, 프랑스 왕 로베르 2세와 결혼 (992년 이혼)
겔베르가몬페라토 후작알레라모와 결혼



딸 이브레아의 수산나


토스카나 변경백 보소의 딸 빌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5. 기타

한때 로타리오 2세를 그가 독살했다는 의혹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참조

[1] 서적 Antapodosis
[2] 웹사이트 "Representing Royal Authority at San Michele Maggiore in Pavia" https://www.academia[...] 2022-07-30
[3] 서적 Medieval European Coinage: Volume 1, The Early Middle Ages (5th-10th Centuri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6
[4] 문서 후대의 합스부르크 왕가에도 아득하지만 그의 후손이 된다.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과 결혼한 레온-카스티야의 [[이사벨라 1세]]가 베렝가리오 2세의 직계 남계 18대 손녀가 된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딸 후아나는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형제의 어머니로 이들의 남계 후손은 20세기 이후에도 이어졌다.
[5] 문서 오토 1세는 이 두 지역을 독일 국왕의 봉토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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