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리너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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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를리너 앙상블은 1949년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헬레네 바이겔에 의해 설립된 독일의 극단이다. 동독의 문화 활동 구축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실천을 바탕으로 서사극을 발전시켰다. 헬레네 바이겔이 브레히트 사후 극단을 운영했으며, 루트 베르그하우스, 만프레트 베크베르트, 클라우스 페이만 등을 거쳐 2017년 올리버 리세가 극장장으로 취임했다. 독일 통일 이후 극장 운영 방식의 변화를 겪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작품을 통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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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너 앙상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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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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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일 | 1949년 1월 |
위치 | 베를린, 독일 |
웹사이트 | 베를리너 앙상블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베를리너 앙상블은 1949년 11월,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는 전후 독일에서 새로운 연극 활동을 시작하고, 동베를린에서 문화 활동을 구축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브레히트는 미국에서의 반공주의 심문(1947년)과 스위스에서의 감시를 겪은 후, 동베를린에서 환영받았다.
초기 앙상블은 1949년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초연에 참여했던 배우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앙상블 설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 도이체스 테아터는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앙상블의 "객연"을 까다롭게 허용했으며, 당시 극장장이었던 볼프강 랑호프는 앙상블의 조기 퇴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앙상블은 1954년 3월 19일부터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자체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3년, 브레히트는 앙상블의 연극 작업을 예술적, 사회적으로 이끌 "작업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브레히트는 연출가이자 작가로서 앙상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는 앙상블의 상징이 되어 장막 위에 그려졌다. 브레히트의 명성 덕분에 앙상블은 국내외에서 객연 요청을 받았으며,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이탈리아 등지에서 공연했다. 런던 공연을 준비하던 중 브레히트는 사망했지만, 그의 서사극 이론과 공동 작업 방식은 헬레네 바이겔에 의해 계승되었다. 바이겔은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앙상블의 극장장을 역임했다.
브레히트 사후, 그의 제자들은 브레히트의 유작을 무대에 올리는 등 앙상블의 주요 연출가로 활동했다. 앙상블은 세심한 리허설을 통해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으며, 각 프로덕션은 모델부흐(Modellbuch)로 기록되었다.
헬레네 바이겔 사후, 루트 베르크하우스가 극장장이 되었으나 실험적인 극을 시도하다 앙상블과 대중의 저항으로 사퇴했다. 1977년 만프레트 베크베르트가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1991년까지 극장을 운영했다. 이후 여러 인물들이 극장 관리를 맡았다.
2000년 1월 8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브레히트 감시에 관한 작품인 《브레히트 문건》(Die Brecht-Akte)을 상연하며 클라우스 페이만(Claus Peymann) 감독하에 개축 작업을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열었다. 페이만은 2017년까지 극장장이자 주 운영주였다. 2017년부터 올리버 리세(Oliver Reese)가 베를리너 앙상블의 새로운 극장장이며, 미하엘 탈하이머(Michael Thalheimer) 등이 선도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7년 9월 21일, 올리버 리세의 첫 상영 기간 개시로 안투 호메루 누느스(Antú Romero Nunes)가 연출한 알베르 카뮈의 《칼리굴라》(Caligula)가 초연되었다.
베를리너 앙상블에는 루트 베를라우(Ruth Berlau, 사진), 카를 폰 압펜(Karl von Appen, 무대 장치),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빌란트 헤르츠펠데(Wieland Herzfelde), 카를하인츠 드레셔(Karl-Heinz Drescher, 무대 및 포스터) 등 유명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2. 1. 창립 배경
베를리너 앙상블은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이 1949년 11월에 독일에서 전후 새로운 활동을 위해 설립하였다. 이는 구 소련 점령 지역, 즉 훗날 동독의 공산주의 정치인들이 동베를린에 일류 문화 활동 분야를 구축하려는 노력과 관련이 있었다.브레히트는 미국에서 1947년 10월 30일, 비미 활동 위원회 앞에서 심문을 받는 등 아픈 경험을 겪었고, 스위스에서 엄격한 개인 감시를 받은 이후 동베를린에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서신들과 유고들에 따르면 앙상블의 설립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1949년부터 1954년까지 베를리너 앙상블의 "객연"에 대해 도이체스 테아터는 까다롭게 굴었고, 당시 극장장인 볼프강 랑호프는 조기 퇴실을 촉구하기도 했다.
앙상블은 대체로 1949년에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초연에 참여했던 배우들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1954년 3월 19일부터 앙상블은 자신의 건물인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공연했다.
2. 2. 초기 활동 (1949-1956)
베를리너 앙상블은 1949년 11월,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는 전후 독일에서 새로운 연극 활동을 시작하려는 목적과 함께, 동베를린에서 문화 활동을 육성하려는 공산주의 정치인들의 노력과도 관련이 있었다. 브레히트는 미국에서의 반공주의 심문(1947년)과 스위스에서의 감시를 겪은 후, 동베를린에서 환영받았다.초기 앙상블은 1949년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초연에 참여했던 배우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앙상블 설립 과정은 순탄치 않았는데, 도이체스 테아터는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앙상블의 "객연"을 까다롭게 허용했으며, 당시 극장장이었던 볼프강 랑호프는 앙상블의 조기 퇴출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앙상블은 1954년 3월 19일부터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자체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1953년, 브레히트는 앙상블의 연극 작업을 예술적, 사회적으로 이끌 "작업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이 중 "연극 이론을 위한 작업반", "스튜디오 작업반", "청중과 함께하는 작업을 위한 작업반"이 முக்கியமாக 활동했다. 브레히트는 연출가이자 작가로서 앙상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는 앙상블의 상징이 되어 장막 위에 그려졌다.
브레히트의 명성 덕분에 앙상블은 국내외에서 객연 요청을 받았으며,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이탈리아 등지에서 공연했다. 런던 공연을 준비하던 중 브레히트는 사망했지만, 그의 서사극 이론과 공동 작업 방식은 헬레네 바이겔에 의해 계승되었다. 바이겔은 1971년 사망할 때까지 앙상블의 극장장을 역임했다.
브레히트의 제자들인 베노 베손, 에곤 몽크, 페터 팔리취, 만프레트 베크베르트는 브레히트의 희곡을 연출했으며, 무대 디자이너 카스파르 네허와 카를 폰 아펜, 작곡가 파울 데사우와 한스 아이슬러, 극작가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 등이 브레히트의 주요 협력자였다.
2. 3. 브레히트 사후 (1956-1971)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56년에 사망한 후,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이 베를리너 앙상블의 극장장 직을 이어받아 1971년 사망할 때까지 극단을 운영했다.[1] 베노 베손, 에곤 몽크, 페터 팔리취, 만프레트 베크베르트 등 브레히트의 제자들은 브레히트의 유작을 무대에 올리는 등 앙상블의 주요 연출가로 활동했다.브레히트 사후, 앙상블에서는 ''아르투로 우이의 저항 가능한 출세'', ''제2차 세계 대전의 슈베이크'', ''시몽 마샤르의 환상''과 같은 브레히트의 유작들이 초연되었다.[1] 무대 디자이너 카스파르 네허와 카를 폰 아펜, 작곡가 파울 데사우와 한스 아이슬러, 그리고 극작가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은 브레히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로서 앙상블의 활동을 지원했다.
베를리너 앙상블은 몇 달에 걸친 세심한 리허설을 통해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으며, 각 프로덕션은 600~800장의 액션 사진이 담긴 모델부흐(Modellbuch)로 기록되었다.[1] 이는 앙상블의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 무대 디자이너 하이네르 힐이 사진 작가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2. 4. 루트 베르크하우스 시대 (1971-1977)
루트 베르크하우스는 작곡가 파울 데사우의 부인이었으며, 헬레네 바이겔의 뒤를 이어 베를리너 앙상블의 극장장이 되었다. 그녀는 실험적인 극을 무대에 올리고자 하였으나, 이는 앙상블과 대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녀는 사퇴하게 되었다.[1]베르크하우스의 지휘 아래, 극단은 1970년대에 다른 유럽 극작가들의 작품으로 레퍼토리를 확장했다. 테레제 기에제, 리오넬 슈테켈, 에른스트 부쉬를 포함한 주요 독일 배우들이 베를리너 앙상블의 작품에 출연했다.
2. 5. 만프레트 베크베르트 시대 (1977-1991)
루트 베르크하우스의 뒤를 이어 1977년 만프레트 베크베르트가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1991년까지 극장을 운영했다.[1] 베크베르트는 극장 운영에 변화를 시도했지만, 이전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는 여러 인물들이 공동으로 또는 단독으로 극장 관리를 맡았다.- 1992년-1993년: 마티아스 랑호프, 프리츠 마르쿠바트, 페터 팔리치, 페터 차데크, 하이네르 뮐러 (공동 극장주)
- 1993년-1994년: 마르쿠바트, 팔리치, 차데크, 뮐러
- 1994년-1995년: 마르쿠바트, 팔리치, 뮐러
- 1995년: 뮐러
- 1996년: 마틴 부트케
- 1997년-1999년: 슈테판 주슈케
3. 베를리너 앙상블의 주요 인물
브레히트와 헬레네 바이겔 외에도 베를리너 앙상블의 발전에 기여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사진작가: 루트 베를라우는 무대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하여 견본책으로 출판했다.
- 음악 감독: 알렉산더 프라이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된 최초의 미국인이자, 극장의 첫 비독일인 음악 감독이었다. 그의 전임자로는 쿠르트 바일, 한스 아이슬러, 파울 데사우가 있다.
- 무대 디자이너: 카를 폰 아펜은 오랫동안 까다로운 무대 장치와 포스터를 담당했다. 존 하트필드,빌란트 헤르츠펠데,카를하인츠 드레셔도 무대와 포스터를 담당했다.
3. 1. 연출가
베노 베손, 에곤 몽크, 페터 팔리취, 만프레트 베크베르트는 브레히트의 제자들로, 아직 무대에 올려지지 않은 브레히트의 연극을 연출할 기회를 얻었다.[1] 이들은 브레히트 사후에도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앙상블의 작업을 이끌었다. 이조트 킬리안과 요아힘 텐셔트도 브레히트의 조연출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브레히트 사후에는 공동으로 배우들과 함께 그 일을 이어나갔다.[1]1970년대에는 루트 베르그하우스가 헬레네 바이겔의 뒤를 이어 극장장이 되었으나, 실험적인 극을 무대에 올리려는 그녀의 시도는 앙상블과 대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켜 결국 사퇴했다. 이후 만프레트 베크베르트가 1977년부터 1991년까지 극장을 운영했다.
1992년부터는 마티아스 랑호프, 프리츠 마르쿠바트, 페터 팔리취, 페터 차데크, 하이네르 뮐러가 공동으로 극장을 관리했다. 이들은 "공동체 극장주"로 불렸으나, 조직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1995년에는 하이네르 뮐러가 단독으로 극장을 맡았고, 1996년에는 마틴 부트케,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슈테판 주슈케가 뒤를 이었다.
미국 연출가 로버트 윌슨은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8년에 브레히트의 ''대양을 건너는 비행''을 초연했다.
2000년에는 클라우스 페이만이 극장장이 되어 2017년까지 극장을 이끌었다. 2017년부터는 올리버 리세가 새로운 극장장이 되었으며, 미하엘 탈하이머 등과 함께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3. 2. 배우
베를리너 앙상블에는 테레제 기제, 에른스트 부쉬, 헬레네 바이겔, 에케하르트 샬, 기젤라 메이, 잉그리드 피트, 하인츠 슈베르트, 쿠르트 보이스, 안젤리카 돔뢰제, 에르빈 게쇼넥, 위르겐 홀츠 등 많은 배우들이 활동했다.특히 헬레네 바이겔은 브레히트의 아내이자 앙상블의 핵심 배우였다. 그녀는 앙상블 설립부터 1971년 사망할 때까지 극장장으로 활동하며 앙상블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서사극과 공동 작업에 대한 브레히트의 견해를 계승하여 발전시켰다.[1]
베를리너 앙상블은 길고 세심한 리허설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각 프로덕션은 600~800장의 액션 사진이 담긴 모델부흐(Modellbuch)로 기록되었다.[1]
3. 3. 극작가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은 브레히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 중 한 명이었다. 브레히트의 제자들인 베노 베손, 에곤 몽크, 페터 팔리취, 만프레트 베크베르트는 아직 무대에 올려지지 않은 브레히트의 연극을 연출할 기회를 얻었다. 하이너 뮐러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베를리너 앙상블의 공동 극장주 중 한 명이었다.3. 4. 무대 디자이너
카스파르 네허와 카를 폰 아펜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 중 한 명이었다. 카를 폰 아펜은 오랫동안 까다로운 무대장치와 연극 포스터로 유명했다. 존 하트필드, 빌란트 헤르츠펠데, 카를하인츠 드레셔 또한 무대와 연극 포스터로 유명했다. 무대 디자이너 하이네르 힐은 사진 작가 중 한 명이었다.3. 5. 작곡가
파울 데사우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의 음악을 작곡했으며, 한스 아이슬러와 함께 브레히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 중 한 명이었다. 쿠르트 바일은 서푼짜리 오페라와 해피 엔드의 음악을 작곡했다.4. 주요 작품
베를리너 앙상블은 다양한 작품을 무대에 올렸는데, 그중에서도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작품들이 중심이었다. 브레히트 생전에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코카서스의 백묵원》, 《갈릴레이의 생애》 등이 공연되었다. 브레히트 사후에는 그의 작품 외에도 다른 유럽 작가들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1953년에는 브레히트의 아이디어에 따라 "연극 이론을 위한 작업반", "스튜디오 작업반", "청중과 함께하는 작업을 위한 작업반" 등 다양한 "작업반"들이 만들어져 연극 작업을 이끌었다.
독일 재통일 이후 극장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1992년 베를린 시의회는 페터 자덱, 페터 팔리취, 하이네르 뮐러, 프리츠 마르크하르트, 마티아스 랑호프 5명을 "인텐덴텐"(총괄 관리자)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알렉산더 프라이가 베를리너 앙상블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993년 극단은 민영화되었지만, 1,600만 달러의 보조금을 계속 받았다.[1] 1995년에는 하이네르 뮐러만 남고 공동 운영은 해체되었다.
마르틴 부트케가 주연을 맡은 뮐러의 《억척스러운 아르투로 우이의 번영》은 베를리너 앙상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젊은 연출가들과 무대 디자이너들은 브레히트식 연극의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고 현대적인 연극 스타일을 도입하기도 했다.
1998년에는 로버트 윌슨이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브레히트의 《대양을 건너는 비행》을 초연했다. 1999년에는 하이네르 뮐러의 ''Die Bauern''의 마지막 공연으로 막이 내려졌고, 이는 앙상블의 잠정적인 종말을 알렸다.
2000년 1월, 클라우스 페이만의 감독 하에 극장은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는 2017년까지 극장장이자 주 운영주였다. 2017년부터는 올리버 리세가 베를리너 앙상블의 새로운 극장장으로, 미하엘 탈하이머가 주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리너 앙상블을 배경으로 루트 베를라우는 무대 장면 사진을, 카를 폰 아펜은 무대 장치와 연극 포스터 작업을 했다. 존 하트필드, 빌란트 헤르츠펠데, 카를하인츠 드레셔도 무대와 연극 포스터로 유명했다.
2019년, ''다스 테아터 암 쉬프바우어담''의 부속 건물이 건설될 것이라고 발표되어, 극장은 처음으로 두 번째의 완비된 강당을 갖게 되었다.[2]
4. 1. 브레히트 생전 (1949-1956)
베를리너 앙상블은 1949년 11월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이 설립했다. 브레히트는 미국에서의 경험과 스위스에서의 감시를 겪은 후 동베를린에서 환영받았다. 앙상블은 1949년 초연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 참여했던 배우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54년 3월 19일부터는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브레히트는 연출가이자 작가로서 앙상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파블로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상징으로, 장막 위에 그려져 있었다. 앙상블은 국내외에서 객연 요청을 받았으며,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이탈리아 등지에서 공연했다.
브레히트는 베를리너 앙상블을 위해 새로운 희곡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전에 무대에 올렸던 연극들을 재공연했다. 1949년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초연했으며, 《코카서스의 백묵원》과 《갈릴레이의 생애》를 연출했다.
4. 2. 브레히트 사후
베노 베손, 에곤 몽크, 페터 팔리취, 만프레트 베크베르트와 같은 브레히트의 제자들은 아직 무대에 올려지지 않은 그의 연극들을 연출할 기회를 얻었다.[1] 카스파르 네허와 카를 폰 아펜은 무대 디자이너, 파울 데사우와 한스 아이슬러는 작곡가,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은 극작가로서 브레히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들이었다.[1] 1956년 브레히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은 1971년 사망할 때까지 베를리너 앙상블을 계속 운영했다.[1]베를리너 앙상블은 길고 세심한 리허설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으며, 종종 몇 달에 걸쳐 진행되었다.[1] 각 프로덕션은 600~800장의 액션 사진이 담긴 모델부흐(Modellbuch)라는 미리보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1] 무대 디자이너 하이네르 힐은 사진 작가 중 한 명이었다.[1]
브레히트 사후, 《아르투로 우이의 저항 가능한 출세》, 《제2차 세계 대전의 슈베이크》, 그리고 《시몽 마샤르의 환상》 세 편의 연극이 앙상블에서 초연되었다.[1] 헬레네 바이겔의 후임인 루트 베르그하우스의 지휘 아래, 이 극단은 1970년대에 다른 유럽 극작가들의 작품으로 레퍼토리를 확장했다.[1] 테레제 기에제, 리오넬 슈테켈, 에른스트 부쉬를 포함한 주요 독일 배우들이 베를리너 앙상블의 작품에 출연했다.[1]
5. 서사극과 베를리너 앙상블
브레히트는 서사극 이론을 통해 관객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사회 변혁에 참여하도록 이끌고자 했다. 베를리너 앙상블은 이러한 브레히트의 연극 철학을 구현하는 핵심적인 공간이었다.
1949년 11월, 브레히트는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설립했다. 이는 소련 점령 지역(훗날 동독)의 공산주의 정치인들이 동베를린에 문화 예술 분야를 구축하려는 노력과 관련 있었다. 브레히트는 미국에서의 비미 활동 위원회 심문(1947년 10월 30일)과 스위스에서의 감시를 겪은 후 동베를린에서 환영받았다. 그러나 앙상블 설립 과정에는 어려움도 있었는데, 도이체스 테아터는 1949년부터 1954년까지 베를리너 앙상블의 "객연"을 까다롭게 받아들였고, 당시 극장장 볼프강 랑호프는 퇴실을 촉구하기도 했다. 1954년 3월 19일부터 앙상블은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1953년, 브레히트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연극 작업을 이끌기 위해 다양한 "작업반"을 만들었다. "연극 이론을 위한 작업반", "스튜디오 작업반", "청중과 함께하는 작업을 위한 작업반"이 특히 중요했다. 브레히트는 연출가이자 작가로서 극장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피카소의 평화의 비둘기는 베를리너 앙상블의 상징이 되어 장막 위에 그려졌다. 앙상블은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이탈리아 등지에서 객연 요청을 받았다.
브레히트 사후, 그의 아내 헬레네 바이겔이 1971년 사망할 때까지 극장장으로서 앙상블을 이끌었다. 이후 루트 베르크하우스, 만프레트 베크베르트 등이 극장장을 맡았으며, 2000년에는 클라우스 페이만이 극장장으로 부임하여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브레히트 감시에 관한 작품인 《브레히트 문건》을 상연하기도 했다. 2017년부터는 올리버 리세가 극장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리너 앙상블에는 사진사 루트 베를라우, 무대 장치가 카를 폰 압펜, 존 하트필드, 빌란트 헤르츠펠데, 카를하인츠 드레셔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창작 활동을 펼쳤다.
5. 1. 베를리너 앙상블의 연극 양식
베노 베손, 에곤 몽크, 페터 팔리취, 만프레트 베크베르트는 브레히트의 제자들로, 아직 무대에 올려지지 않은 브레히트의 연극을 연출할 기회를 얻었다. 무대 디자이너 카스파르 네허와 카를 폰 아펜, 작곡가 파울 데사우와 한스 아이슬러, 그리고 극작가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은 브레히트의 가장 가까운 협력자들이었다.[1]베를리너 앙상블은 길고 세심한 리허설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는데, 종종 몇 달에 걸쳐 진행되었다. 각 프로덕션은 600~800장의 액션 사진이 담긴 모델부흐(Modellbuch), 즉 미리보기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무대 디자이너 하이네르 힐은 사진 작가 중 한 명이었다.[2]
''서푼짜리 오페라''와 ''해피 엔드''는 각각 1928년과 1929년 베를린의 쉬프바우어담 극장에서 초연되었지만, 베를리너 앙상블이 창단되기 20년 전이었다. 브레히트는 베를리너 앙상블을 위해 새로운 희곡을 쓰지 않았지만, 이전에 무대에 올렸던 연극들을 재공연했으며, 1949년 ''어머니 용기''를 초연했다. 그는 또한 ''코카서스의 백묵원''과 에리히 엥겔과 함께 ''갈릴레이의 생애''를 연출했다. 브레히트 사후, ''아르투로 우이의 저항 가능한 출세'', ''제2차 세계 대전의 슈베이크'', ''시몽 마샤르의 환상''이 앙상블에서 초연되었다.
6. 독일 통일 이후의 변화와 현재
헬레네 바이겔의 후임인 루트 베르크하우스 지휘 아래, 베를리너 앙상블은 1970년대에 다른 유럽 극작가들의 작품으로 레퍼토리를 확장했다. 테레제 기에제, 리오넬 슈테켈, 에른스트 부쉬를 포함한 주요 독일 배우들이 베를리너 앙상블의 작품에 출연했다.
독일 재통일 이후, 베를리너 앙상블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2년 베를린 시의회는 페터 자덱, 페터 팔리취, 하이네르 뮐러, 프리츠 마르크하르트, 마티아스 랑호프 다섯 명의 연출가 집단을 "인텐덴텐"(총괄 관리자)으로 임명했다. 1993년 극단은 민영화되었지만, 1600만달러의 보조금을 계속 받았다.[1] 1995년에는 하이네르 뮐러만이 남게 되었다.
미국 연출가 로버트 윌슨은 베르톨트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8년에 브레히트의 ''대양을 건너는 비행''을 초연했다.
6. 1. 극장 운영 방식의 변화
독일 재통일 이후, 베를리너 앙상블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92년, 베를린 시의회는 페터 자덱, 페터 팔리취, 하이네르 뮐러, 프리츠 마르크하르트, 마티아스 랑호프, 5명의 연출가 집단을 "인텐덴텐"(총괄 관리자)으로 임명했다.[1]새로운 예술적 경영진 아래에서, 베를리너 앙상블은 국영 극장에서 시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유한책임회사로 바뀌었다. 1993년, 극단은 민영화되었지만 1600만달러의 보조금을 계속 받았다.[1] 공동 운영의 아이디어는 실패로 판명되었고, 경영진은 1995년에 해체되어 하이네르 뮐러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갈등은 앙상블의 예술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B.K. 트라겔레흔과 아이나르 슐리프를 포함한 젊은 연출가들과 무대 디자이너 안드레아스 라인하르트는 브레히트식 연극의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고 더욱 현대적인 연극 스타일을 도입했다. 마르틴 부트케가 주연을 맡은 뮐러의 브레히트의 ''억척스러운 아르투로 우이의 번영''는 베를리너 앙상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프로그램 ''브레히트 – 뮐러 – 셰익스피어''는 그들의 지침이 되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로버트 윌슨은 브레히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8년에 브레히트의 ''대양을 건너는 비행''을 초연했다. 1999년 4월 30일, 하이네르 뮐러의 ''Die Bauern''의 마지막 공연으로 막이 내려졌고, 이는 극장 시즌의 조기 종료를 의미하며 앙상블의 잠정적인 종말을 알렸다. 1995년 12월 뮐러가 사망한 후, 극장 건물 자체가 극작[가] 롤프 호흐후트의 손에 있는 비영리 재단에 의해 매입되는 과정에 있었고, 그는 극장에 대한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 듯 보여서, 이 상징적인 문화 기관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에 대한 어려운 결정은 또 다른 문제로 악화되었다. 베를린 시가 모든 사람의 만족을 위해 합의를 협상한 후, 새로운 행정부 찾기가 시작되었다. 빈의 부르크극장의 도발적이고 성공적인 매니저인 클라우스 페이만이 마침내 그 직책에 임명되었고, 광범위한 개조 공사가 완료된 후 2000년 1월에 극장을 다시 열었다. 페이만의 노력으로 극장의 운영이 안정되었다. 그는 브레히트처럼 대중을 위한 정치 연극을 제작하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맡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해석했다.
6. 2. 클라우스 페이만 시대 (2000-2017)
2000년 1월 8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브레히트 감시에 관한 작품인 《브레히트 문건》(Die Brecht-Akte) 상연과 함께 클라우스 페이만 감독하에 개축 작업을 마치고 새롭게 문을 열었다.[1] 클라우스 페이만은 2017년까지 극장장이자 주 운영주였으며, 그의 노력으로 극장의 운영이 안정되었다. 그는 브레히트처럼 대중을 위한 정치 연극을 제작하겠다는 약속을 가지고 자신의 역할을 맡았지만, 더 넓은 의미로 해석했다.[2]6. 3. 올리버 리세 시대 (2017-현재)
2017년부터 올리버 리세(Oliver Reese)가 베를리너 앙상블의 새 극장장이 되어, 미하엘 탈하이머(Michael Thalheimer) 등 선도 그룹과 함께 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올리버 리세의 첫 상영작은 안투 호메루 누느스(Antú Romero Nunes) 연출의 알베르 카뮈 《칼리굴라》(Caligula)로, 2017년 9월 21일에 초연되었다.[2]2019년에는 쉬프바우어담 극장(Das Theater am Schiffbauerdammde)의 부속 건물이 그해 가을에 건설될 것이라고 발표되어, 극장은 처음으로 두 번째의 완비된 강당을 갖게 되었다.[2]
7. 한국 연극과의 관계
베를리너 앙상블과 브레히트의 작품은 한국 연극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참조
[1]
뉴스
Power Struggle at the Berliner Ensemble
https://www.nytimes.[...]
1993-02-08
[2]
웹사이트
Berliner Ensemble bekommt neue Spielstätte
https://www.faz.net/[...]
201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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