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티 퍼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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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티 퍼니스는 미국의 배우, 텔레비전 광고 모델, 소비자 문제 특별 보좌관, 그리고 방송인이었다. 1932년 영화 배우로 데뷔하여 여러 영화에 출연했으며, 특히 1940년대 후반부터는 텔레비전 광고 모델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웨스팅하우스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며 "확신할 수 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라면요."라는 문구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후 ABC의 프로그램 진행과 CBS 패널 쇼에도 출연했다. 1967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에 의해 소비자 문제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며, 뉴욕 주와 시의 소비자 보호 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1990년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94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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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티 퍼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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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엘리자베스 메리 퍼니스 |
| 출생 | 1916년 1월 3일 |
| 출생지 | 뉴욕 |
| 사망 | 1994년 4월 2일 |
| 사망지 | 뉴욕 |
| 배우자 | 레슬리 미들리 (1967년-1994년, 사망) 휴 "버드" 언스트 (1945년-1946년; 1946년-1950년, 사망) 조니 그린 (1937년-1943년) |
| 자녀 | 4명 |
| 정치 경력 | |
| 직책 | 제2대 소비자 업무 특별 보좌관 |
| 임기 시작 | 1967년 5월 1일 |
| 임기 종료 | 1969년 1월 20일 |
| 대통령 | 린든 B. 존슨 |
| 이전 | 에스터 피터슨 |
| 이후 | 버지니아 크나우어 |
| 소속 정당 | 미국 민주당 |
2. 초기 생애
퍼니스는 부유한 사업가 조지 초트 퍼니스와 그의 아내 플로렌스의 딸로 맨해튼에서 태어났다.[11] 그녀는 브리어리 스쿨과 베넷 주니어 칼리지를 다녔다.[1]
베티 퍼니스는 학창 시절 연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연을 맡으며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상업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1932년 RKO 스튜디오와 영화 계약을 맺으며 본격적인 배우 경력을 시작했으나, 첫 영화 ''13인의 여인''(1932)에서의 역할은 최종 편집에서 삭제되었다.
3. 배우 경력
이후 ''매그니피센트 옵세션''(1935), ''스윙 타임''(1936) 등 여러 RKO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다. 1940년대까지 4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점차 역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 텔레비전 드라마 ''스튜디오 원'' 출연을 계기로 웨스팅하우스 제품 광고를 맡게 되면서 텔레비전 광고 모델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웨스팅하우스의 대표 얼굴로서 12년간 활동하며 높은 인지도를 쌓았고,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자와 패널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60년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 종료 후에는 광고 모델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어려움을 겪었고, 이후 라디오 방송과 민주당 관련 활동에 참여했다.
퍼니스는 영화와 텔레비전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두 개의 별을 헌액받았다.[6][7]
3. 1. 할리우드 활동
퍼니스는 방학 동안 연극 무대에 데뷔하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그녀는 또한 상업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그녀는 모델로 전문적인 경력을 시작했으며, 1932년 RKO의 연예 담당자에게 발탁되어 영화 계약을 체결했다. 그녀의 첫 영화 역할은 영화 ''13인의 여인''(1932)에서 "열세 번째 여인"이었지만, 그녀의 장면은 영화 개봉 전에 삭제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여러 RKO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 배우가 되었다. 그녀의 대표적인 영화로는 ''매그니피센트 옵세션''(1935)과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출연한 영화 ''스윙 타임''(1936) 등이 있다.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녀는 4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점차 연기 역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3. 2. 텔레비전 출연
1948년, 퍼니스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텔레비전 드라마 ''스튜디오 원''에 출연했다. 광고 시간 동안 웨스팅하우스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배우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그녀의 쉽고 전문적인 태도는 회사를 감동시켰다. 웨스팅하우스는 그녀에게 자사 제품 홍보 계약을 제안했고, 이는 퍼니스와 웨스팅하우스 간의 긴밀한 관계로 이어졌다.
초창기 텔레비전 광고는 라디오 연기자들이 시각적인 매체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전기 스토브 시연 중 핫초콜릿을 쏟는 웨스팅하우스 광고 사고도 있었다. 퍼니스는 ''스튜디오 원'' 경험을 통해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 광고 대행사의 제안을 받아 광고계에 뛰어들어 타고난 재능을 보였다. 처음에는 주급 150USD를 받으며 ''스튜디오 원''의 유일한 스폰서였던 웨스팅하우스 광고를 매 에피소드마다 세 편씩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당시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광고는 생방송이었다. 한 생방송 광고에서 냉장고 문이 열리지 않는 사고가 발생해 텔레비전 역사상 유명한 실수로 남았는데, 이 실수의 당사자는 퍼니스가 아니라 대역 배우였던 주운 그레이엄이었다. 퍼니스는 수십 년간 이 실수로 잘못 알려졌으나, 1981년 텔레비전 특별 프로그램 ''TV의 검열된 NG''에서 진실을 밝혔다.[2]
퍼니스는 좋은 외모와 함께 단정하고 수수한 옷차림을 유지하며 성공적인 광고 모델로 자리 잡았다. 하루에 세 번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였고, 웨스팅하우스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예명 사용이나 앞치마 착용을 거부하며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강한 주체성을 드러냈다. 다만, 주부 이미지를 위해 카메라 앞에서 결혼 반지를 착용하는 데는 동의했다. 또한, 의상 선택에 있어서도 웨스팅하우스의 간섭을 원치 않아 모든 옷을 직접 구매했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웨스팅하우스가 대대적으로 후원한 정당 대회 기간 동안에는 28벌의 다른 의상을 입어 라이프 잡지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웨스팅하우스와의 계약은 퍼니스에게 연간 10만달러의 수입을 안겨주었고, 그녀의 광고는 식기 세척기를 제외한 회사 가전제품 판매를 크게 증가시켰다. 식기 세척기 판매 부진은 당시 미국 여성들이 주방 일이 완전히 없어지는 자동화 기기 구매를 꺼렸기 때문이라는 시장 조사 결과가 있었다.
퍼니스의 가장 유명한 광고 중 하나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며 "확신할 수 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라면요."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이 광고는 매우 유명해져서 종종 패러디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매드'' 잡지에서는 네온사인 글자 일부가 타버려 "YOU CAN ..SU.E IF IT'S WESTINGHOUSE!" (웨스팅하우스라면 고소할 수 있습니다!)라고 보이는 개그를 선보이기도 했다.[3]
웨스팅하우스 광고 외에도 퍼니스는 다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ABC의 ''펜트하우스 파티'' 진행을 맡아 1950년 9월부터 1951년 6월까지 39개 에피소드를 이끌었다. 1951년에는 CBS의 패널 쇼 ''왓츠 마이 라인?''에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또한 ABC에서 ''당신의 카이저 딜러는 베티 퍼니스가 출연하는 "바이라인"의 "미스터리 어드벤처"를 소개합니다.''라는 제목의 생방송 미스터리 시리즈에 출연했는데, 이 시리즈는 1951년 11월과 12월에 방영되었고 1957년 가을에 재방송되었다. 이 시리즈는 듀몬트 텔레비전 네트워크에서 제작했으며, 듀몬트에서는 ''뉴스 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1953년 1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는[4] 웨스팅하우스가 후원하는 자신의 주간 텔레비전 프로그램 ''베티 퍼니스를 만나보세요''를 진행했다.[5] 이 15분짜리 토크 프로그램은 금요일 오전에 CBS에서 방송되었다.[4]
그러나 1959년, 웨스팅하우스의 새로운 사장은 퍼니스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새 사장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회사에 반영하고 싶어 했고, 조금 더 젊은 여성 모델을 원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회사 마케팅 부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정은 관철되었고, 퍼니스는 1960년 말 계약이 해지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웨스팅하우스 광고는 1960년 7월 로스앤젤레스 민주당 전당대회, 8월 시카고 공화당 전당대회, 그리고 11월 8일 선거 개표 방송의 CBS 뉴스 보도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덜 상업적인 역할을 맡으려 했지만, 광고 모델 이미지가 너무 강해 진지한 역할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 그녀는 라디오에서 활동했으며, 민주당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퍼니스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텔레비전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6675 Hollywood Blvd.에 별을 가지고 있다.[6][7]
4. 웨스팅하우스 광고 모델
1948년, 텔레비전 드라마 ''스튜디오 원'' 출연 중 퍼포먼스를 눈여겨본 웨스팅하우스의 제안으로 광고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퍼니스는 자연스럽고 전문적인 진행 능력과 스스로 관리한 세련된 이미지 덕분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그녀가 냉장고 문을 열며 말한 "You can be sure... if it's Westinghouse.|확신할 수 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라면요.eng"라는 광고 문구는 당시 가장 유명한 광고 중 하나로 기억된다.[3] 그녀는 12년 동안 웨스팅하우스의 간판 모델로 활동하며 회사의 인지도와 매출 상승에 크게 기여했으나, 1960년 말 회사와의 계약이 종료되었다. 이 기간 동안 퍼니스는 광고 모델 활동 외에도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진행자나 패널로 참여하기도 했다.
4. 1. 광고 비화
1948년, 퍼니스는 생방송 텔레비전 드라마 ''스튜디오 원''에 출연하게 되었다. 원래 광고 시간에 웨스팅하우스 제품을 홍보하기로 했던 배우 대신 투입되었는데, 그녀의 자연스럽고 전문적인 진행 방식이 회사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웨스팅하우스는 그녀에게 자사 제품 홍보 모델 계약을 제안했고, 이는 퍼니스와 웨스팅하우스 간의 오랜 인연의 시작이 되었다.초창기 텔레비전 광고는 시각 매체에 익숙하지 않은 라디오 연기자들이 투입되는 경우가 많아 종종 어색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예를 들어, 전기 스토브 시연 중 핫초콜릿을 쏟는 방송 사고가 웨스팅하우스 광고에서 발생하기도 했다. 퍼니스는 ''스튜디오 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더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 광고 대행사의 제안을 받아 광고 모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광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처음에는 주급 150USD를 받으며 ''스튜디오 원''의 유일한 스폰서였던 웨스팅하우스의 광고를 매 에피소드마다 세 편씩 촬영했다. 당시에는 비디오테이프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광고는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다. (한 생방송 광고 도중 냉장고 문이 열리지 않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는 텔레비전 역사상 유명한 방송 사고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이 사고의 당사자는 퍼니스가 아니라 대역 배우였던 주운 그레이엄이었다. 수십 년간 퍼니스가 이 사고의 장본인으로 오해받았으나, 1981년 텔레비전 특별 프로그램 ''TV의 검열된 NG''를 통해 진실이 밝혀졌다.)[2]
퍼니스는 뛰어난 외모와 함께 매력적이면서도 단정하고 수수한 옷차림(하루에 세 번씩 의상을 교체)으로 성공적인 광고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와 이미지에 대해 강한 주체성을 보였는데, 웨스팅하우스 측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예명을 사용하거나 앞치마를 착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다만, 주부 이미지를 위해 카메라 앞에서 결혼반지를 착용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또한, 웨스팅하우스가 자신의 외모를 통제하는 것을 원치 않아 모든 의상을 직접 구매했다. 웨스팅하우스가 대대적으로 후원했던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정당 대회 기간 동안에는 무려 28벌의 다른 의상을 선보여 ''라이프'' 잡지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퍼니스와 웨스팅하우스의 계약은 연봉 10만달러 수준까지 올랐고, 그녀가 출연한 광고 덕분에 회사의 가전제품 판매량은 급증했다. 단, 식기 세척기만은 예외였는데, 시장 조사 결과 당시 미국 여성들이 주방 일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구매를 꺼렸기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퍼니스가 출연한 광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냉장고 문을 활짝 열며 "You can be sure... if it's Westinghouse.|확신할 수 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라면요.eng"라고 말하는 장면이었다. 이 광고는 워낙 유명해져서 종종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매드'' 잡지에서는 네온사인 일부가 고장 나 "YOU CAN ..SU.E IF IT'S WESTINGHOUSE!|웨스팅하우스라면 고소할 수 있습니다!eng"라고 보이는 개그를 선보이기도 했다.[3]
퍼니스는 광고 모델 활동 외에도 방송 활동을 이어갔다. ABC에서 1950년 9월부터 1951년 6월까지 39개의 에피소드가 방송된 ''펜트하우스 파티''의 진행을 맡았고, 1951년에는 CBS의 패널 쇼 ''왓츠 마이 라인?''의 고정 패널로 활동했다. 또한, ABC에서 ''당신의 카이저 딜러는 베티 퍼니스가 출연하는 "바이라인"의 "미스터리 어드벤처"를 소개합니다.''라는 제목의 생방송 미스터리 시리즈에 출연했는데, 이 시리즈는 1951년 11월과 12월에 방영되었고 1957년 가을에 재방송되었다. 이 시리즈는 원래 듀몬트 텔레비전 네트워크에서 제작되어 ''뉴스 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바 있다.
1953년 1월 1일부터 7월 3일까지,[4] 웨스팅하우스가 후원하는 자신의 이름을 건 주간 텔레비전 프로그램 ''베티 퍼니스를 만나보세요''에 출연했다.[5] 이 15분짜리 토크 프로그램은 금요일 오전에 CBS에서 방송되었다.[4]
그러나 1959년, 웨스팅하우스의 새로운 사장은 퍼니스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새 사장이 회사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고, 더 젊은 모델을 기용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사 마케팅 부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장의 결정은 관철되었고, 퍼니스는 1960년 말 계약이 해지되었다. 그녀의 마지막 웨스팅하우스 광고는 1960년 7월 로스앤젤레스 민주당 전당대회, 8월 시카고 공화당 전당대회, 그리고 11월 8일 선거 개표 방송의 CBS 뉴스 보도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덜 상업적인 역할을 맡으려 했지만, 광고 모델 이미지가 너무 강해 진지한 역할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 시기 동안 그녀는 라디오 방송 활동과 함께 민주당을 위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퍼니스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영화(1533 Vine Street)와 텔레비전(6675 Hollywood Blvd.) 분야에서의 공헌을 인정받아 두 개의 별을 가지고 있다.[6][7]
5. 소비자 운동
베티 퍼니스는 배우 활동 이후 소비자 운동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민주당을 위한 그녀의 활동을 눈여겨본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제안으로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소비자 문제 특별 보좌관을 맡으며 공직에 입문했다.[8] 이후 ''컨슈머 리포트''를 발행하는 컨슈머 유니온의 이사(1969-1993)[11], 넬슨 록펠러 뉴욕 주지사에 의해 임명된 뉴욕 주 소비자 보호 위원회 초대 위원장 겸 집행 이사(1970-1971)[9][10], 뉴욕시 소비자 문제 부서 책임자(1973)[11] 등을 역임하며 정부와 민간 영역 모두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커먼 코즈 전국 운영 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1971).[9][10]
방송계로 복귀한 후에는 뉴욕 WNBC에서 소비자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었으며, 특히 소비자 사기 사례를 집중 조명했다. 1976년부터는 ''투데이'' 쇼에 합류하여 앵커 및 리포터로 활동했으며,[11] 1977년에는 그녀의 프로그램 ''바이라인: 베티 퍼니스''가 피바디상을 수상하며[12] 소비자 저널리즘 분야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5. 1. 린든 B. 존슨 행정부
1967년,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민주당을 위한 그녀의 활동을 알고 퍼니스에게 소비자 문제 특별 보좌관 자리를 제안했다.[8] 그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69년 존슨 행정부가 끝날 때까지 이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는 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소비자 권리와 관련된 문제들을 배우면서 비판자들을 잠재웠다.5. 2. 뉴욕시 소비자 문제 부서 책임자
1973년에는 뉴욕시 소비자 문제 부서의 책임자를 맡았다.[11]5. 3. 소비자 단체 활동
1967년, 민주당을 위한 그녀의 활동을 눈여겨본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퍼니스에게 소비자 문제 특별 보좌관 자리를 제안했다.[8] 그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존슨 행정부가 끝나는 1969년까지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퍼니스는 소비자 권리와 관련된 문제들을 배우고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자신을 향한 비판을 극복했다.1969년부터 1993년까지는 ''컨슈머 리포트''를 발행하는 컨슈머 유니온의 이사로 활동했다.[11] 1970년 8월에는 당시 뉴욕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에 의해 뉴욕 주 소비자 보호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 겸 집행 이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1년 7월, 텔레비전 활동 복귀를 위해 이 직책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퍼니스는 커먼 코즈 전국 운영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9][10] 1973년에는 뉴욕시 소비자 문제 부서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11]
뉴욕의 WNBC 방송국과 계약을 맺은 후, 퍼니스는 소비자 문제, 특히 소비자 사기 사례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1976년에는 바바라 월터스의 후임으로 ''투데이'' 쇼의 앵커를 맡고 정기 리포트를 제공하며 방송 활동을 이어갔다. 1977년, 그녀의 프로그램 ''바이라인: 베티 퍼니스''는 피바디상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12]
6. 방송 복귀와 투병
1959년, 웨스팅하우스의 새로운 사장은 퍼니스를 해고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회사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강요하고 더 젊은 여성 대변인을 원했기 때문일 수 있다. 회사 마케팅 부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뜻을 관철했고 퍼니스는 1960년 말 계약에서 해지되었다. 웨스팅하우스를 위한 그녀의 마지막 광고는 1960년 로스앤젤레스 민주당 전당대회, 시카고 공화당 전당대회, 11월 8일 선거 개표 방송의 CBS 뉴스 보도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텔레비전에서 덜 상업적인 역할을 시도했지만, 광고 모델 이미지가 너무 강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라디오에서 활동했으며, 민주당을 위해 일했다.
1967년,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민주당을 위한 그녀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퍼니스에게 소비자 문제 특별 보좌관 자리를 제안했다.[8] 그녀는 이 제안을 수락하여 1969년 존슨 행정부가 끝날 때까지 이 역할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으나, 그녀는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소비자 권리 관련 문제들을 익히며 비판을 잠재웠다. 이후에도 소비자 운동에 헌신하여 1969년부터 1993년까지 ''컨슈머 리포트''를 발행하는 컨슈머 유니온의 이사로 활동했다.[11] 1970년 8월에는 당시 뉴욕 주지사 넬슨 록펠러에 의해 뉴욕주 소비자 보호 위원회의 초대 위원장 겸 집행 이사로 임명되어 1971년 7월까지 활동하다가 텔레비전으로 복귀했다. 1971년 퍼니스는 커먼 코즈 전국 운영 위원회에 선출되었고,[9][10] 1973년에는 뉴욕시 소비자 문제 부서의 책임자도 역임했다.[11]
뉴욕의 WNBC와 계약을 맺은 퍼니스는 소비자 문제 전문 기자로 활동하며, 특히 소비자 사기 사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1976년에는 바바라 월터스가 떠난 ''투데이'' 쇼에 합류하여 앵커 역할과 함께 정기적인 리포트를 제공했다. 1977년 그녀의 프로그램 ''바이라인: 베티 퍼니스''는 피바디상을 수상하며 전문성을 인정받았다.[12]
1990년, 퍼니스는 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투데이 쇼'' 출연 일정을 주 4일로 줄였다. 그러나 NBC는 이를 빌미로 2년 후 그녀를 해고했는데, 이는 네트워크가 소비자 보도를 더 선정적인 방식으로 바꾸려는 결정과 맞물린 것으로 보인다. 퍼니스는 이 해고에 대해 부당함을 느끼며 연령 차별의 사례라고 지적했다. 그녀는 계속 일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위암이 재발하면서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퍼니스는 어떤 일이든 거절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학이 다양한 경력을 쌓게 된 원동력이라고 믿었다. 투병 중에도 그녀는 일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한 인터뷰에서는 암 치료 과정의 고통을 언급하며 "치료가 질병보다 더 나쁘다"고 말하기도 했다.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1994년 4월 2일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78세의 나이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7]
7. 사생활
퍼니스는 네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937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조니 그린과 했으며, 그와의 사이에 자녀 한 명을 두었다. 1943년 그린과 이혼한 후, 라디오 아나운서 휴 "버드" 언스트 주니어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는 1945년, 두 번째는 1946년이었다. 언스트와의 두 번째 결혼은 195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는 결혼 생활 문제로 우울증을 겪다가 뉴욕 신문에 연락해 "좋은 기사를 원하면 와서 가져가라"고 말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퍼니스는 1967년 레슬리 미드글리와 재혼했고, 미드글리는 퍼니스보다 오래 살았다.[11] 배우 라이자 스나이더는 퍼니스의 손녀로, CBS 텔레비전의 시트콤 예스, 디어와 맨 위드 어 플랜 등에 출연했다.
1990년, 퍼니스는 위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투데이 쇼 출연 일정을 주 4일로 줄였다. 그러나 NBC는 이를 빌미로 삼아 2년 후 퍼니스를 해고했는데, 이는 네트워크가 소비자 보도 프로그램을 더 선정적인 타블로이드 형식으로 바꾸려는 결정과 맞물려 이루어졌다. 퍼니스는 이러한 해고 조치에 강하게 반발하며 명백한 연령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계속 일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재발한 위암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퍼니스는 어떤 일이든 거절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학이 다양한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믿었다. 암 투병 중에도 그녀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한 인터뷰에서는 암 치료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치료가 질병보다 더 나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건강은 계속 악화되어, 1994년 4월 2일 뉴욕의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에서 78세를 일기로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7]
8. 출연 작품
베티 퍼니스는 영화 배우이자 텔레비전 인물로서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초기에는 RKO 스튜디오 소속으로 여러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후 텔레비전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주요 출연 작품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8. 1. 영화
퍼니스는 방학 동안 연극 무대에 데뷔하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고, 상업 광고 모델로도 활동했다. 모델로 전문적인 경력을 시작했으며, 1932년 RKO 스튜디오의 연예 담당자에게 발탁되어 영화 계약을 체결했다. 그녀의 첫 영화 역할은 ''13인의 여인''(1932)에서 "열세 번째 여인"이었지만, 해당 장면은 영화 개봉 전에 삭제되었다.이후 몇 년 동안 퍼니스는 여러 RKO 영화에 출연하며 인기 배우가 되었다. 그녀의 주요 성공작으로는 ''매그니피센트 옵세션''(1935)과 프레드 아스테어, 진저 로저스와 함께 출연한 ''스윙 타임''(1936) 등이 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4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지만, 점차 연기 역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 주요 출연 영화 ===
| 연도 | 제목 | 비고 |
|---|---|---|
| 1932 | 서부의 반역자들 | |
| 1933 | 크로스 파이어 | |
| 럭키 데빌스 | ||
| 위대한 재스퍼 | ||
| 스칼렛 리버 | ||
| 긴급 호출 | ||
| 헤드라인 슈터 | ||
| 미드쉽맨 잭 | ||
| 애기 애플비, 메이커 오브 멘 | ||
| 에이스 오브 에이스 | 크레딧 없음 | |
| 1934 | 리오로 날아오다 | 크레딧 없음 |
| 비단털옷의 거지들 | ||
| 데인저러스 코너 | ||
| 사악한 여자 | ||
| 그리드아이언 플래시 | ||
| 밴드는 연주한다 | ||
| 1935 | 버지 윈터스의 삶 | |
| 여기가 쿠키가 오는 곳 | ||
| 의혹의 그림자 | ||
| 맥파든의 플랫 | ||
| 침착해 | ||
| 벌의 관리자 | ||
| 1936 | 매그니피슨트 옵세션 | |
| 세 명의 현명한 남자들 | ||
| 대통령의 미스터리 | ||
| 올 아메리칸 쳅 | ||
| 미스터 신데렐라 | ||
| 스윙 타임 | ||
| 1937 | 그들은 결혼을 원했다 | |
| 엄마가 나선다 | ||
| 좋은 늙은 술고래 | ||
|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 ||
| 1939 | 상하이 북쪽 | |
| 1941 | 내일은 항상 온다 | |
| 1957 | 군중 속의 얼굴 | 본인으로 카메오 출연, 크레딧 없음 |
=== TV 출연 ===
- 클라이막스! (1954년)
- 스튜디오 원
- * "보이 미츠 걸" (1949)
- * "특별 발표" (1956)
- * "숲 속의 아기" (1957) - 코랄, 리비츠키 공주 역
참조
[1]
웹사이트
Betty Furness; Ad Star, Consumer Advocate
https://www.latimes.[...]
1994-04-04
[2]
방송
TV's Censored Bloopers
NBC
1981
[3]
간행물
Mad magazine
1960-01
[4]
서적
Total Television: the Comprehensive Guide to Programming from 1948 to the Present
Penguin Books USA, Inc.
1996
[5]
서적
The Encyclopedia of Daytime Television
https://archive.org/[...]
Watson-Guptill Publications
2020-03-22
[6]
웹사이트
Betty Furness
https://walkoffame.c[...]
2019-10-25
[7]
웹사이트
Betty Furness - L.A. Times Hollywood Star Walk
http://projects.lati[...]
[8]
뉴스
Betty Furness Is Sworn In As Top Consumer Advocate
https://news.google.[...]
1967-05-01
[9]
뉴스
Betty Furness Heads State's Consumer Board
https://www.nytimes.[...]
2008-11-02
[10]
뉴스
State Will Name Consumer Chief
https://select.nytim[...]
2008-11-02
[11]
뉴스
Betty Furness, 78, TV Reporter And Consumer Advocate, Dies
https://www.nytimes.[...]
2015-01-05
[12]
웹사이트
Buyline: Betty Furness
http://www.peabodyaw[...]
20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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