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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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유엔군 일원으로 참전한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연합 부대이다. 1950년 7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참전을 결정하고, 700여 명의 벨기에군과 룩셈부르크군으로 구성된 대대를 편성했다. 이들은 부산에 도착하여 훈련을 거친 후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전투, 학당리 전투, 채트콜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99명의 전사자와 다수의 부상자를 냈으며, 두 개의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과 한 개의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부대는 "벨기에인들도 할 수 있다!"라는 구호와 함께 용맹함을 떨쳤으며, 현재까지도 기념비와 박물관을 통해 그들의 헌신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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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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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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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Belgian Volunteer Corps for Korea |
프랑스어 이름 | Corps de Volontaires pour la Corée |
네덜란드어 이름 | Vrijwilligerskorps voor Korea |
활동 기간 | 1950년 ~ 1955년 |
국가 | 벨기에 룩셈부르크 |
소속 | 유엔군 영국 제29보병여단 미국 제1기병사단 미국 제3보병사단 |
병과 | 보병 |
종류 | 육군 |
규모 | 대대 |
명령 체계 | 유엔군사령부 |
별명 | 갈색 베레 |
표어 | 벨기에인들도 할 수 있다!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알베르 크라에 G. 비바리오 중령 R. 가티 중령 |
참전 | |
참전 전투 | 한국 전쟁 금굴산 전투 임진강 전투 설마리 전투 학당리 전투 잣골 전투 차트콜 전투 |
훈장 | |
수훈 |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2회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 벨기에 레오폴드 훈장 |
2. 참전 배경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6월 27일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였다. 이에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견하였으며, 벨기에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벨기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49년 중립을 포기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였다. 6·25전쟁 발발 당시 벨기에는 자국의 방위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고, 군대는 창설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1950년 7월 14일, 벨기에는 유엔과 미국으로부터 재차 참전 종용을 받았고, 7월 22일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상황이 비슷하던 룩셈부르크와 통합된 부대를 편성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
현역, 예비역, 레지스탕스 출신 등 여러 계층에서 2000여 명이 지원하였고, 그 중 700명을 선발하여 벨기에 대대를 창설하였다. 장교와 부사관들은 9월 18일부터 데임(Marche-les-Dames) 병영에서, 사병들은 10월 2일부터 레오폴드 병영에서 선발되었다. 이들 중에는 전 상원의원이자 국방부 장관인 믈랑(Moreau de Melon) 예비역 소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편성을 완료한 벨기에 대대는 한국의 산악 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1개월간 훈련을 실시한 후 포병 학교에서 포병 전술과 전기를 익혔다. 1950년 12월 18일 영국 수송선 카미나(Kamina)호에 승선하여 한국을 향해 앙베르(Anvers)항을 출발하였다. 1951년 1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한 이들은 유엔군 수용대에서 6주간 현지 적응 훈련과 병참선 경계 임무를 수행한 후 3월 6일 미 제3사단에 배속되었다.
서유럽에 위치한 벨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국제 연합(UN)의 서명 회원국이 되었지만, 동아시아와는 기존의 관계가 거의 없었다. 벨기에 육군은 징병제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미 서독 주둔 벨기에 점령군의 일원으로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벨기에는 레오폴 3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기에 점령 당시의 행적으로 인해 왕위에 복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 국왕 문제로 알려진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 위기는 국왕의 복귀를 반대하는 좌파 성향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과 이를 지지하는 보수 세력 간의 더 광범위한 대립을 야기했다. 이 위기는 중도 우파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의 집권을 가져왔지만, 1950년 8월에는 국왕이 아들에게 양위하는 타협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조제프 폴리앙 총리는 해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반대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정부는 모두 대한민국 방어를 위해 UN 사령부 휘하에서 복무할 자원병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2. 1. 벨기에의 국제 정세
서유럽에 위치한 벨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국제 연합(UN)의 서명 회원국이 되었지만, 동아시아와는 기존의 관계가 거의 없었다. 벨기에 육군은 징병제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미 서독 주둔 벨기에 점령군의 일원으로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다.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벨기에는 레오폴 3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기에 점령 당시의 행적으로 인해 왕위에 복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 국왕 문제로 알려진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는 국왕의 복귀를 반대하는 좌파 성향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과 이를 지지하는 보수 세력 간의 더 광범위한 대립을 야기했다. 이 위기는 중도 우파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의 집권을 가져왔지만, 1950년 8월에는 국왕이 아들에게 양위하는 타협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조제프 폴리앙 총리는 해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반대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정부는 모두 대한민국 방어를 위해 UN 사령부 휘하에서 복무할 자원병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2. 2. 한국 전쟁 발발과 벨기에의 참전 결정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침공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6월 27일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였다. 이에 16개국이 전투부대를 파견하였으며, 벨기에도 그 중 하나였다.당시 벨기에는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1949년 중립을 포기하고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 가입하였다. 6·25전쟁 발발 당시 벨기에는 자국의 방위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고, 군대는 창설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1950년 7월 14일, 벨기에는 유엔과 미국으로부터 재차 참전 종용을 받았고, 7월 22일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상황이 비슷하던 룩셈부르크와 통합된 부대를 편성하여 파병을 결정하였다.
현역, 예비역, 레지스탕스 출신 등 여러 계층에서 2000여 명이 지원하였고, 그 중 700명을 선발하여 벨기에 대대를 창설하였다. 장교와 부사관들은 9월 18일부터 데임(Marche-les-Dames) 병영에서, 사병들은 10월 2일부터 레오폴드 병영에서 선발되었다. 이들 중에는 전 상원의원이자 국방부 장관인 믈랑(Moreau de Melon) 예비역 소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편성을 완료한 벨기에 대대는 한국의 산악 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1개월간 훈련을 실시한 후 포병 학교에서 포병 전술과 전기를 익혔다. 1950년 12월 18일 영국 수송선 카미나(Kamina)호에 승선하여 한국을 향해 앙베르(Anvers)항을 출발하였다. 1951년 1월 31일 부산항에 도착한 이들은 유엔군 수용대에서 6주간 현지 적응 훈련과 병참선 경계 임무를 수행한 후 3월 6일 미 제3사단에 배속되었다.
서유럽에 위치한 벨기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국제 연합(UN)의 서명 회원국이 되었지만, 동아시아와는 기존의 관계가 거의 없었다. 벨기에 육군은 징병제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이미 서독 주둔 벨기에 점령군의 일원으로서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당시, 벨기에는 레오폴 3세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기에 점령 당시의 행적으로 인해 왕위에 복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 국왕 문제로 알려진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이 위기는 국왕의 복귀를 반대하는 좌파 성향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조합과 이를 지지하는 보수 세력 간의 더 광범위한 대립을 야기했다. 이 위기는 중도 우파 정당인 기독교 사회당의 집권을 가져왔지만, 1950년 8월에는 국왕이 아들에게 양위하는 타협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조제프 폴리앙 총리는 해외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반대했으며,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정부는 모두 대한민국 방어를 위해 UN 사령부 휘하에서 복무할 자원병 부대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3. 지원병 모집 및 부대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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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대대는 3개 소총중대, 1개 화기중대, 대대본부 및 본부중대 등 삼각편제로 편성되었다. 화기중대는 1개 기관총소대(30mm, 1/4톤 정찰대 포함), 1개 박격포소대(76.2mm 박격포), 1개 대전차소대(88.9mm 로켓) 및 1개 공병소대로 편성되었다. 2,000명이 넘는 벨기에인이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B.U.N.C.)에 자원했으며, 이들 중 처음에는 700명만이 레오폴드스부르크에서 훈련을 받기 위해 선발되었다. 훈련 후 자원병들은 그들의 특징적인 갈색 베레모를 받았다. 벨기에인과 함께 훈련을 받은 룩셈부르크 군인들은 B.U.N.C. A 중대 1 소대로 편성되었다.[9]
참전기간 동안 벨기에의 병력 파견은 약 600~900명 선을 유지하였다. 기간 중 장교 199명과 부사관 516명, 병사 2873명 등 연인원 3,498명을 한국전선에 파견하였다. 벨기에 대대는 여러 전투 및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99명이 전사하고 33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명이 실종되고 1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참전연인원 | 전사/사망 | 부상 | 실종 | 포로 |
---|---|---|---|---|
3,498명 | 99명 | 336명 | 4명 | 1명 |
대대는 한국과 미국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비롯해 태극 및 을지무공훈장 등 56개의 대한민국 무공훈장과 미국 동성 십자훈장 24개 등을 수여받았다.
3. 1. 지원병 모집
벨기에 대대는 3개 소총중대, 1개 화기중대, 대대본부 및 본부중대 등 삼각편제로 편성되었다. 화기중대는 1개 기관총소대(30미리, 1/4톤 정찰대 포함), 1개 박격포소대(3인치 박격포), 1개 대전차소대(3.5인치 로켓) 및 1개 공병소대로 편성되었다. 참전기간 동안 벨기에는 장교 199명과 부사관 516명, 병사 2873명 등 연인원 3498명을 한국전선에 파견하여 약 600~900명 선의 병력을 유지하였다. 2,000명이 넘는 벨기에인이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B.U.N.C.)에 자원했으며, 이들 중 처음에는 700명만이 레오폴드스부르크에서 훈련을 받기 위해 선발되었다. 훈련 후 자원병들은 그들의 특징적인 갈색 베레모를 받았다.[9]벨기에 대대는 여러 전투 및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99명이 전사하고 33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명이 실종되고 1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대대는 한국과 미국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비롯해 태극 및 을지무공훈장 등 56개의 대한민국 무공훈장과 미국 동성 십자훈장 24개 등을 수여받았다.
참전연인원 | 전사/사망 | 부상 | 실종 | 포로 |
---|---|---|---|---|
3,498명 | 99명 | 336명 | 4명 | 1명 |
벨기에대대의 주요지휘관은 초대 대대장인 크라하이(B. E. M. Crahay) 중령을 비롯하여 비바리오(Vivario G.)중령과 보다르(Bodart) 중령, 그리고 룩셈부르크 소대장 와그너(Josep Wagner) 중위 등이었다.
계급 | 성명 | 참전기간 |
---|---|---|
중령 | B. E. M. Crahay | 1950. 9.~1951. 4. |
소령 | Vivario, G | 1951. 4.~1951. 7. |
중령 | B. E. M. Crahay | 1951. 7.~1951. 9. |
소령 | Vivario, G | 1951. 9~1951. 10. |
중령 | B. E. M. Crahay | 1951. 10.~1951. 11. |
중령 | Cools | 1951. 11.~1952. 2. |
중령 | Vivario, G | 1952. 2.~1952. 12. |
중령 | Gathy | 1952. 12.~1953. 1. |
중령 | Vivario, G | 1953. 1.~1953. 2. |
중령 | Gathy | 1953. 2.~1953. 7. |
소령 | Bodart | 1953. 7.~1953. 8. |
소령 | Brichant | 1953. 8.~1953. 9. |
중령 | Bodart | 1953. 9.~1953. 12. |
소령 | Brichant | 1953. 12.~1954. 2. |
소령 | Pirlot | 1954. 2.~1955. 8. |
벨기에-룩셈부르크 군단은 안트베르펜에서 부산으로 출항하여 1951년 1월 31일에 도착했다.[10] 한국에 도착했을 때, 미국 "카투사" 또는 영연방 "카트콤" 프로그램에 따라 연대의 적절한 대대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대한민국 육군 병력이 벨기에 파견대에 배속되었다.
3. 2.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B.U.N.C.) 편성
벨기에 대대는 3개 소총중대, 1개 화기중대, 대대본부 및 본부중대 등 삼각편제로 편성되었다. 화기중대는 1개 기관총소대(30미리, 1/4톤 정찰대 포함), 1개 박격포소대(3인치 박격포), 1개 대전차소대(3.5인치 로켓) 및 1개 공병소대로 편성되었다. 2,000명이 넘는 벨기에인이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B.U.N.C.)에 자원했으며, 이들 중 처음에는 700명만이 레오폴드스부르크에서 훈련을 받기 위해 선발되었다. 훈련 후 자원병들은 그들의 특징적인 갈색 베레모를 받았다. 벨기에인과 함께 훈련을 받은 룩셈부르크 군인들은 B.U.N.C. A 중대 1 소대로 편성되었다.[9]참전기간 동안 벨기에의 병력 파견은 약 600~900명 선을 유지하였다. 기간 중 장교 199명과 부사관 516명, 병사 2873명 등 연인원 3498명을 한국전선에 파견하였다. 벨기에 대대는 여러 전투 및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99명이 전사하고 336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명이 실종되고 1명이 포로가 되는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참전연인원 | 전사/사망 | 부상 | 실종 | 포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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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8명 | 99명 | 336명 | 4명 | 1명 |
대대는 한국과 미국대통령의 부대표창을 비롯해 태극 및 을지무공훈장 등 56개의 대한민국 무공훈장과 미국 동성 십자훈장 24개 등을 수여받았다. 벨기에-룩셈부르크 군단은 안트베르펜에서 부산으로 출항하여 1951년 1월 31일에 도착했다.[10] 한국에 도착했을 때, 미국 "카투사" 또는 영연방 "카트콤" 프로그램에 따라 연대의 적절한 대대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대한민국 육군 병력이 벨기에 파견대에 배속되었다.
벨기에대대의 주요지휘관은 초대 대대장인 크라하이(B. E. M. Crahay) 중령을 비롯하여 비바리오(Vivario G.)중령과 보다르(Bodart) 중령, 그리고 룩셈부르크 소대장 와그너(Josep Wagner) 중위 등이었다.
계급 | 성명 | 참전기간 |
---|---|---|
중령 | B. E. M. Crahay | 1950. 9.~1951. 4. |
소령 | Vivario, G | 1951. 4.~1951. 7. |
중령 | B. E. M. Crahay | 1951. 7.~1951. 9. |
소령 | Vivario, G | 1951. 9~1951. 10. |
중령 | B. E. M. Crahay | 1951. 10.~1951. 11. |
중령 | Cools | 1951. 11.~1952. 2. |
중령 | Vivario, G | 1952. 2.~1952. 12. |
중령 | Gathy | 1952. 12.~1953. 1. |
중령 | Vivario, G | 1953. 1.~1953. 2. |
중령 | Gathy | 1953. 2.~1953. 7. |
소령 | Bodart | 1953. 7.~1953. 8. |
소령 | Brichant | 1953. 8.~1953. 9. |
중령 | Bodart | 1953. 9.~1953. 12. |
소령 | Brichant | 1953. 12.~1954. 2. |
소령 | Pirlot | 1954. 2.~1955. 8. |
4. 주요 전투 및 작전
1951년 4월, 벨기에군은 임진강 전투에 참전했다. 제1대대는 1951년 8월 벨기에에서 파견된 신규 대대에 의해 교체되었고[11], 이 대대는 1955년까지 주둔했다.
임진강 전투에서 벨기에 대대는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와 함께 주요 고개를 지켰다. 임진강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벨기에군은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전투 중 부대 지휘관인 알베르 크라예는 중국군의 인광탄에 부상을 입고 일본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11]
B.U.N.C.는 계속해서 전투에 참여했고, 1951년 10월 하크탕니 전투 (브로큰 애로우 전투의 일련)에서 추가적인 전공을 세웠다. 당시 벨기에군은 고립된 언덕에 자리를 잡고 끈질긴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100명 이상의 중국군을 사살하고 자신들은 소수의 병력만 잃었다.[11]
벨기에 분견대가 치른 마지막 주요 작전은 1953년 4월의 채컬 전투였다. 벨기에군은 철의 삼각지대에서 55일 넘게 방어선을 유지하며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냈다.[11]
휴전 이후, BUNC를 전쟁 중의 병력 규모로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1954년 12월 30일 약 200명으로 감축되었지만, 다른 UN 분견대와 마찬가지로 판문점에서의 협상 이후 불안정한 평화 상태에서 한국에 주둔하며 그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다. 부대의 마지막 구성원들은 1955년 6월 15일에 한국을 떠났다.
4. 1. 한강선 진출 (1951년 3월)
벨기에 대대는 왜관지구에서 대유격작전과 부대 훈련을 완료하고 3월 6일 왜관을 출발, 3월 7일 정오에 수원에 도착하였다. 3월 9일, 미 제15연대의 우일선인 제1대대 진지를 인수하여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하였다. 대대의 주 방어선은 말죽거리 북단을 연하는 선이었으며, 각종 장애물과 미 제15연대로부터 지원받은 전차중대로 방어를 강화했다.3월 6일부터 3월 21일까지 미 제3사단 제15연대에 배속되어 노량진-천호동 일대에서 한국군 제1사단과 양동작전을 펼쳐 미 제25사단의 도하 작전을 지원했다.
한편, 중공중앙군사위원회(CCP Central Military Committee)는 전쟁 장기화에 따라 3교대 작전이라는 새로운 작전교대주기를 마련하여 3개 지원군으로 임무를 교대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1951년 4월 중순, 한반도에 배치된 중공군은 총 95만 명에 달했고, 이 병력으로 마지막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4. 2. 임진강 전투 (1951년 4월)
설마리 전투는 영연방 제29여단에 배속되어 임진강 북방 금굴산을 방어하던 벨기에·룩셈부르크대대가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중공군 제188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고지를 고수한 방어전투이다.영국군 제29여단에 배속된 대대는 4월 19일 얼스터대대의 임진강 북쪽 금굴산 지역을 인수하여 여단의 전초부대가 되었다. 당시 대대가 인수한 금굴산 지역은 임진강변을 따라 배치된 영군국 제29여단 지역을 감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인접에서 임진강 동쪽의 진상리 일대에 배치된 미 제3사단의 좌측방을 엄후할 수 있어 전술적으로 중요한 감제고지였다. 그럼에도 유일한 통로가 임진강과 한탄강에 설치된 교량을 통과해야 함으로 적의 공격에 고립될 위험도 안고 있었다.
4월 22일부터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첩보가 있어 여단장이 각 대대에게 전투정찰대를 적진 깊숙이 파견토록 명령했고, 미 제3사단장은 주간에는 은폐하고 야간에 수색활동을 강화하라 지시했다.
1951년 임진강 전투에서 벨기에 대대는 영국군 글로스터셔 연대와 함께 주요 고개를 지켰다. 임진강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벨기에군은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전투 중 부대 지휘관인 알베르 크라예는 중국군의 인광탄에 부상을 입고 일본의 병원으로 후송되었다.[11]
4. 3. 학당리 전투 (1951년 10월)
학당리 전투는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철원과 평강 사이의 학당리 388고지에서 전초임무를 수행하던 벨기에 · 룩셈부르크대대가 1951년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중공군 제78사단의 2차에 걸친 야간공격을 격퇴한 방어전투이다.벨룩스대대는 미 제1군단으로부터 미식 장비를 보급 받고 미 제3사단의 지원 하에 미식 교육훈련을 받아 새로운 대대로 변모하였다. 10월 7일 대대는 미 제3사단 제15연대에 배속되어 율지리(학당저수지 서북쪽 3km)로 이동하였다. 이 무렵 제15연대는 제임스타운(Jamestown)선으로 진출하기 위해 철원 서쪽 324고지(악어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대대는 10월 10일 11시 40분 388고지에 도착해 배치를 완료하고 전방 기슭에 청음초를 설치, 고지 주변을 수색했다. 이때 388고지는 각종 지뢰와 전술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지 주변에는 강력한 탄막지대도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북쪽의 발이봉과 동쪽 서방산의 중공군으로부터 감제되고 있어 방어에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1951년 10월, 벨기에군은 하크탕니 전투 (브로큰 애로우 전투의 일련)에서 추가적인 전공을 세웠다.[11] 당시 벨기에군은 고립된 언덕에 자리를 잡고 끈질긴 중국군의 공격을 받았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100명 이상의 중국군을 사살하고 자신들은 소수의 병력만 잃었다.
4. 4. 잣골 전투 (1953년 2월-4월)
잣골지구 전투는 미 제3사단에 배속되어 김화 서북방 5km 지점 잣골에서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수행하던 벨기에 · 룩셈부르크대대가 1953년 2월 26일부터 4월 21일까지 중공군 제70사단의 공격을 격퇴한 방어전투이다.
대대가 배치된 잣골은 중공군의 강력한 방어거점인 오성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하단에 위치하고 있어 대대도 강력한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중공군도 C중대 전초인 카롤(Carol) 진지에서 350m 떨어진 400고지에 소대규모의 전초를 설치하고 중대 활동을 감제하고 있었다.
벨기에군은 1953년 4월의 채컬 전투에서 철의 삼각지대에서 55일 넘게 방어선을 유지하며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4. 5. 채트콜 전투 (1953년 4월)
벨기에 분견대가 치른 마지막 주요 작전은 1953년 4월의 채트콜 전투였다.[11] 벨기에군은 철의 삼각지대에서 55일 넘게 방어선을 유지하며 중국군의 공격을 막아냈다.[11]
5. 지휘관
5. 1. 벨기에군 지휘관
지휘 기간 | 지휘관 (모두 한국에서 중령 계급을 역임) | 지휘 중 주목할 만한 사건 | 이후 경력 |
---|---|---|---|
1950년 9월 28일 – 1951년 11월 21일 | 알베르 크라에 | 부대 초대 지휘관; 임진강 전투. 인(人) 부상 수류탄에 부상 | 중장 계급으로 예편. 그는 또한 독일 주둔 벨기에 점령군을 지휘했다. |
1951년 11월 21일 – 1952년 2월 23일 | 노르베르트 쿨스 | 건강상의 이유로 교체됨. | |
1952년 2월 23일 – 1953년 2월 13일 | 조르주 비바리오 | 학탕니 전투 | 합동 참모 본부 사령관이 되었고, 중장 계급으로 예편했다. |
1953년 2월 12일 – 1953년 7월 12일 | 로베르 가티 | 챗콜 전투 | |
1953년 7월 12일 – 1953년 12월 19일 | 보다르 | 한국 전쟁 휴전 | |
1953년 12월 19일 – 1954년 5월 27일 | 브리샹 (소령) (임시) | ||
1954년 2월 27일 – 1955년 8월 14일 | 피에를로 | 벨기에 유엔 사령부 해산 |
5. 2. 룩셈부르크군 지휘관
지휘 기간 | 지휘관 이름 (모두 한국에서 소위 계급을 역임) | 지휘 중 주요 사건 | 이후 경력 |
---|---|---|---|
1951년 10월 1일 – 1951년 9월 30일 | 요제프 "요스" 와게너 | 제1 룩셈부르크 파견대, 한강 주변 작전, 임진강 전투 | 이후 중령 |
1952년 2월 4일 – 1953년 2월 3일 | 로돌프 "루디" 루티 | 제2 룩셈부르크 파견대, 킹 포스트 전투 |
6. 인명 피해
벨기에군 101명, 룩셈부르크군 2명, 벨기에 파견대에 배속된 대한민국 군인 9명이 전쟁 중 전사했다.[16] 벨기에군 478명과 룩셈부르크군 17명이 전상했으며, 벨기에군 5명이 실종 상태이다.[16] 2명은 북한군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16]
7. 훈장 및 표창
B.U.N.C.는 두 개의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표창과 한 개의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17]
임진강 전투에서의 작전에 대한 미국 대통령 부대표창 내용은 다음과 같다.[17]
한국에 주둔한 유엔군 소속의 룩셈부르크 파견대를 포함한 벨기에 대대는 1951년 4월 20일부터 26일까지 한국 한탄강 인근 임진강에서 적에 대한 작전 수행과 놀라운 영웅적 행위에 대해 특별히 언급되었다. 한국 유엔군에서 가장 작은 부대 중 하나인 벨기에 대대는 공산 중국군에 대한 적극적이고 용감한 행동으로 자군 손실의 30배에 달하는 피해를 적에게 입혔다. 이 기간 동안 기관총, 박격포, 포병의 지원을 받는 상당한 수의 적군은 대대가 점령한 진지를 반복적으로 강력하게 공격했지만, 벨기에군과 룩셈부르크군은 적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이러한 광적인 공격을 끊임없이 용감하게 격퇴했다... 이 기간 동안 이 부대원들이 보여준 특별한 용기는 그들의 국가와 그들 자신에게 특별한 영예를 안겨주었다.
밴 플리트 장군의 명령에 의해 수여되었다.[17]
벨기에-룩셈부르크 군단은 임진강 전투, 학탕니 전투, 채트콜 전투 등 한국 전쟁의 세 번의 주요 전투에 참전했다.[17]

8. "Belgians Can Do Too!"
"벨기에인들도 할 수 있다!"는 "철의 삼각지대" 주변 전투에서 부대 파드레(반데르 고턴 신부)의 지프 앞 유리에 쓰여진 구호였다.[14][15] 병사들의 피로를 본 파드레는 당시 벨기에군과 함께 복무했던 미군 제15보병연대의 모토("할 수 있다")를 차용하여 사기를 북돋으려 했다.[14][15] 이 문구는 벨기에에서 유명해졌으며, 벨기에 파견대의 정신과 용기를 요약하는 것으로 여겨진다.[14][15]
9. 기념 및 유산
제3 공수 대대는 BUNC의 전통(깃발 및 배지 포함)을 유지하며, 틸렌에 주둔하고 있다.
9. 1. 기념비 및 박물관
제3 공수 대대는 BUNC의 전통(깃발 및 배지 포함)을 유지하며, 틸렌에 주둔하고 있다.
디키르히 룩셈부르크에 있는 국립 군사 역사 박물관에는 B.U.N.C의 한국 참전에 관한 영구 전시관과 기념관이 있다.
벨기에 육군의 제3공수대대 병영에 딸린 작은 박물관이 틸렌 벨기에에 있는데, 이곳은 한국 전쟁에 참전한 벨기에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11년,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왕립 군사 박물관은 "벨기에인들도 할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B.U.N.C.의 한국 참전에 관한 임시 전시회를 열었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기념비는 벨기에 브뤼셀의 줄스 세자르 거리와 대한민국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다.
대한민국 동두천시 자유수호박물관 외부에도 작은 기념비가 있다.
또한 벨기에 몽스에 위치한 SHAPE 본부 외부에도 작은 기념비가 있다.
9. 2. 전통 계승
제3 공수 대대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의 전통(깃발 및 배지 포함)을 유지하며, 틸렌에 주둔하고 있다.
9. 3. 주요 참전 인물
- 미셸 디디스하임 - 이후 알베르 2세 국왕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 에티엔 갈리 - 1948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 수상자로, 형 피에르와 함께 벨기에 유엔군 대대에서 대위로 복무했다.[18]
- 피에르 프랑시스 - 1948년 런던 올림픽 육상, 1960년 로마 올림픽 펜싱(에페) 선수였으며, 한국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육상 경기를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상을 입어 벨기에 올림픽 팀을 위해 펜싱을 시작했다. 제1 근위 연대 대령으로 퇴역했다.
- 알베르 게리스 - 제2차 세계 대전 중 벨기에 레지스탕스의 저명한 일원이었다. 나치 점령 유럽에서 연합군 비행사들이 체포되는 것을 돕기 위해 "팻 라인"을 만들었고, 가명은 팻 오리어리였다. 한국에서 복무한 후 소장 계급으로 벨기에 의료 병력의 사령관이 되었다.[19]
- 앙리 모로 드 멜렌 - 기독교 사회당 (PSC-CVP) 정부의 국방부 장관이었으나, 1950년 육군 소령으로 한국에서 복무하기 위해 장관직을 사임하고 자원했다.
- 기 드 그레프 - 벨기에 유엔군 대대 대위로 1953년 자트콜 전투에 참전했으며, 벨기에 국방부 장관 외젠 드 그레프의 아들이었다. 외젠 드 그레프는 모로 드 멜렌이 사임한 후 1950년부터 1954년까지 국방부 장관직을 맡았다.[20]
- 브누아 베르하겐 - 이후 저명한 아프리카학자가 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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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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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Krij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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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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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elgravehar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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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 Guerisse: Belgian war hero
https://www.nytimes.[...]
198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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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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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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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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