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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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1899년 창단된 독일의 축구 클럽으로, 1970년대 황금기를 통해 분데스리가 5회 우승, UEFA컵 2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등의 성적을 거두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바이에른 뮌헨과 치열한 우승 경쟁을 펼쳤으며, 1965년 분데스리가 승격 이후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 등 스타 선수들을 배출했다. 현재는 보루시아 파르크를 홈 구장으로 사용하며, 1. FC 쾰른, FC 바이에른 뮌헨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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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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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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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네임 | Borussia Verein für Leibesübungen 1900 e.V. Mönchengladbach |
애칭 | Die Fohlen (망아지들) Die Borussen (프로이센인들) |
창단 | 1900년 8월 1일 |
경기장 | 보루시아-파르크 |
수용 인원 | 54,057명 |
회장 | 롤프 쾨니히스 |
감독 | 제라르도 세오아네 |
웹사이트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공식 웹사이트 |
클럽 색상 | |
색상 | 녹색, 흰색, 검은색 |
유니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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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시즌 | |
리그 | 독일 분데스리가 |
디비전 | 1부 |
시즌 | 2024-2025 |
지난 시즌 순위 | 10위 (2022-23) |
기타 정보 | |
홈 타운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묀헨글라트바흐 |
2. 역사
1899년 11월, 스포츠 협회인 TC 게르마니아 묀헨글라트바흐(일부 자료에서는 "토이토니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언급됨)를 떠난 젊은이 13명이 ''줌 예거호프''(Zum Jägerhof) 펍에서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12] 이들은 프로이센을 뜻하는 ''보루시아''를 팀명으로 정했는데, 이는 묀헨글라트바흐가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프로이센 왕국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2] 보루시아 도르트문트(1909년), SC 프로이센 뮌스터(1906년)도 같은 이유로 팀명을 정했다.[12]
초창기 보루시아는 독일 제국의 다른 축구팀들과 마찬가지로 축구장, 골대, 탈의실, 장비 부족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12] 선수들은 개인 장비를 직접 마련해야 했다.[12]
1900년 8월 1일, '푸스발 클럽 보루시아 1900'으로 재편성되며 공식 창단했다.[12] 보루시아는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두 번째로 창단된 축구 클럽으로, 1894년 창단된 FC 묀헨글라트바흐가 첫 번째 라이벌이었다.[12] 보루시아는 훈련장과 장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마리아니셰 융글링스-콩그레가치온 묀헨글라트바흐 아이켄''(Marianische Jünglings-Kongregation Mönchengladbach Eicken)에 가입했다.[12] 이후 보루시아는 블리츠 노이베르크와 게르마니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각각 2–1로 승리, 레르트 FC를 상대로 4–2로 승리하는 등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12] 1902년에는 네덜란드의 헬몬디아 헬몬드와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국제 경기를 치렀다.[12]
1903년, 보루시아는 청년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독립, 라인-베스트팔렌 슈필페르반트에 가입했다.[12] 이후 브리타니아 뒤셀도르프, BV 졸링겐, 아인트호벤 VV 등과 경기를 치렀다.[12]
1904년, 보루시아는 라인-베스트팔렌 스포츠 연맹의 3부 리그에서 경쟁, BV 졸링겐을 꺽고 우승했다.[12]1905년 1월 8일에는 도시 라이벌 FC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승리했다.[12]
1905년, 보루시아는 경기장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Reyerhütterstraße''에 부지를 확보하여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13] 1906년, 보루시아는 2부 리그에서 8전 전승으로 지구 챔피언이 되었으나, 리그 개혁으로 인해 다시 2부 리그에 배정되었다.[13]
1907년, 보루시아는 카이저-프리드리히-할레(de) 근처의 ''Schweizerhaus''로 경기장을 옮겼다.[13] 1908–09 시즌, 보루시아는 1부 리그로 승격했다.[13] 1909–10 시즌을 앞두고는 유니폼 색상을 파란색과 노란색 세로 줄무늬로 변경했다.[14]
1911년, 보루시아는 ''Stadion am Rosengarten''으로 경기장을 다시 옮겼다.[14] 1911–12 시즌 보루시아는 리그에서 12승 1무 1패를 기록, 북부 지구 챔피언으로 ''Verbandsliga'' 승격 및 서독 선수권 대회에 진출했다.[14] VfJuB 듀렌과 VfB 1900 기센을 꺾었지만, 결승에서 쾰른 BC 01에게 패배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3–14 시즌, 독일 축구 구조가 개혁되며 보루시아는 라인 북부 지구에 속하게 되었다.[15] 1914년 3월, 보루시아는 뵈켈베르크슈타디온이 건설될 부지인 ''데 쿨''(De Kull)을 매입했다.[15]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경기장 건설과 축구 발전은 중단되었다.[15]
전쟁 중에도 보루시아는 경기를 계속했지만, 선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5] 1912년부터 클럽 회장이었던 하인츠 쾨르스트겐스와 보루시아 선수이자 최초의 독일 국가대표 선수인 하인츠 디트겐스의 삼촌인 슈테판 디트겐스가 전쟁 중 사망했다.[15]
1919년 3월 15일, FC 보루시아는 Turnverein Germania 1889와 합병하여 1889 VfTuR M.Gladbach가 되었다.[16] 1920년, 쾰러 BC를 3-1로 꺾고 서독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첫 성공을 거두었다.[16] 그러나 합병은 2년 만에 끝났고, 이후 '''보루시아 VfL 1900 e.V. M.Gladbach'''로 알려졌다.[17]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독일 리그는 16개의 가울리겐(Gauligen)으로 개편되었고, 묀헨글라트바흐는 ''가울리가 니더라인''(Gauliga Niederrhein) 등에서 경기를 치렀다.[17] 하인츠 디트겐스는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출전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묀헨글라트바흐는 1949년 란데스리가 니더라인, 1950년 오버리가 서부로 승격했다.[17] 1958–59 시즌, 보루시아는 첫 ''오버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1959–60 시즌 ~ 1964–65 시즌 | |||||
---|---|---|---|---|---|
시즌 | 순위 | 득점 | 실점 | 승점 | 평균 관중 |
1959–60 오버리가 서부 | 14 | 27 | 33 | 38 | 16,134 |
1960–61 오버리가 서부 | 6 | 31 | 29 | 58 | 22,400 |
1961–62 오버리가 서부 | 13 | 21 | 39 | 42 | 13,543 |
1962–63 오버리가 서부 | 11 | 24 | 36 | 44 | 11,200 |
1963–64 레기오날리가 서부 | 8 | 41 | 35 | 71 | 12,000 |
1964–65 레기오날리가 서부 | 1 | 52 | 16 | 92 | 22,334 |
금색: 챔피언으로서 분데스리가로 승격 |
1960년, DFB-포칼 결승에서 카를스루에 SC를 3-2로 꺾고 첫 전국 규모 우승을 차지했다.[17] 이후 클럽명을 보루시아 VfL 1900 묀헨글라트바흐 e.V.로 변경했다.[17] 1960–61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에 진출했지만, 레인저스에게 패배했다.[17]
1963년 푸스볼-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묀헨글라트바흐는 최근 10년간 성적이 원년 멤버 기준에 미치지 못해 2부 리그인 서부 레기오날리가에 속했다.[17]
1964–65 시즌, 유프 하인케스, 베른트 루프 등을 영입하고 유소년 팀 선수들이 프로 선수단에 합류했다.[19] 평균 연령이 21.5세로 낮아 '망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19] 빌헬름 아우구스트 후르트만스는 ''라인ische 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 별명을 사용했다.[19] 레기오날리가 서부에서 우승하며 분데스리가 승격 라운드에 진출, 보름스, 로이틀링겐, 킬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1위를 차지,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20] FC 바이에른 뮌헨도 함께 승격했다.[20]
2. 1. 창단 초기 (1900-1965)
1899년 11월, 스포츠 협회인 TC 게르마니아 묀헨글라트바흐(일부 자료에서는 "토이토니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언급됨)를 떠난 젊은이 13명이 ''줌 예거호프''(Zum Jägerhof) 펍에서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12] 이들은 프로이센을 뜻하는 ''보루시아''를 팀명으로 정했는데, 이는 묀헨글라트바흐가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프로이센 왕국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2] 보루시아 도르트문트(1909년), SC 프로이센 뮌스터(1906년)도 같은 이유로 팀명을 정했다.[12]초창기 보루시아는 독일 제국의 다른 축구팀들과 마찬가지로 축구장, 골대, 탈의실, 장비 부족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12] 선수들은 개인 장비를 직접 마련해야 했다.[12]
1900년 8월 1일, '푸스발 클럽 보루시아 1900'으로 재편성되며 공식 창단했다.[12] 보루시아는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두 번째로 창단된 축구 클럽으로, 1894년 창단된 FC 묀헨글라트바흐가 첫 번째 라이벌이었다.[12] 보루시아는 훈련장과 장비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마리아니셰 융글링스-콩그레가치온 묀헨글라트바흐 아이켄''(Marianische Jünglings-Kongregation Mönchengladbach Eicken)에 가입했다.[12] 이후 보루시아는 블리츠 노이베르크와 게르마니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각각 2–1로 승리, 레르트 FC를 상대로 4–2로 승리하는 등 점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12] 1902년에는 네덜란드의 헬몬디아 헬몬드와 경기를 통해 처음으로 국제 경기를 치렀다.[12]
1903년, 보루시아는 청년회와의 갈등으로 인해 독립, 라인-베스트팔렌 슈필페르반트에 가입했다.[12] 이후 브리타니아 뒤셀도르프, BV 졸링겐, 아인트호벤 VV 등과 경기를 치렀다.[12]
1904년, 보루시아는 라인-베스트팔렌 스포츠 연맹의 3부 리그에서 경쟁, BV 졸링겐을 꺽고 우승했다.[12]1905년 1월 8일에는 도시 라이벌 FC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 승리했다.[12]
1905년, 보루시아는 경기장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Reyerhütterstraße''에 부지를 확보하여 경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13] 1906년, 보루시아는 2부 리그에서 8전 전승으로 지구 챔피언이 되었으나, 리그 개혁으로 인해 다시 2부 리그에 배정되었다.[13]
1907년, 보루시아는 카이저-프리드리히-할레(de) 근처의 ''Schweizerhaus''로 경기장을 옮겼다.[13] 1908–09 시즌, 보루시아는 1부 리그로 승격했다.[13] 1909–10 시즌을 앞두고는 유니폼 색상을 파란색과 노란색 세로 줄무늬로 변경했다.[14]
1911년, 보루시아는 ''Stadion am Rosengarten''으로 경기장을 다시 옮겼다.[14] 1911–12 시즌 보루시아는 리그에서 12승 1무 1패를 기록, 북부 지구 챔피언으로 ''Verbandsliga'' 승격 및 서독 선수권 대회에 진출했다.[14] VfJuB 듀렌과 VfB 1900 기센을 꺾었지만, 결승에서 쾰른 BC 01에게 패배했다.[14]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3–14 시즌, 독일 축구 구조가 개혁되며 보루시아는 라인 북부 지구에 속하게 되었다.[15] 1914년 3월, 보루시아는 뵈켈베르크슈타디온이 건설될 부지인 ''데 쿨''(De Kull)을 매입했다.[15]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경기장 건설과 축구 발전은 중단되었다.[15]
전쟁 중에도 보루시아는 경기를 계속했지만, 선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5] 1912년부터 클럽 회장이었던 하인츠 쾨르스트겐스와 보루시아 선수이자 최초의 독일 국가대표 선수인 하인츠 디트겐스의 삼촌인 슈테판 디트겐스가 전쟁 중 사망했다.[15]
1919년 3월 15일, FC 보루시아는 Turnverein Germania 1889와 합병하여 1889 VfTuR M.Gladbach가 되었다.[16] 1920년, 쾰러 BC를 3-1로 꺾고 서독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첫 성공을 거두었다.[16] 그러나 합병은 2년 만에 끝났고, 이후 '''보루시아 VfL 1900 e.V. M.Gladbach'''로 알려졌다.[17]
1933년 나치당 집권 후, 독일 리그는 16개의 가울리겐(Gauligen)으로 개편되었고, 묀헨글라트바흐는 ''가울리가 니더라인''(Gauliga Niederrhein) 등에서 경기를 치렀다.[17] 하인츠 디트겐스는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출전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묀헨글라트바흐는 1949년 란데스리가 니더라인, 1950년 오버리가 서부로 승격했다.[17] 1958–59 시즌, 보루시아는 첫 ''오버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1959–60 시즌 ~ 1964–65 시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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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 순위 | 득점 | 실점 | 승점 | 평균 관중 |
1959–60 오버리가 서부 | 14 | 27 | 33 | 38 | 16,134 |
1960–61 오버리가 서부 | 6 | 31 | 29 | 58 | 22,400 |
1961–62 오버리가 서부 | 13 | 21 | 39 | 42 | 13,543 |
1962–63 오버리가 서부 | 11 | 24 | 36 | 44 | 11,200 |
1963–64 레기오날리가 서부 | 8 | 41 | 35 | 71 | 12,000 |
1964–65 레기오날리가 서부 | 1 | 52 | 16 | 92 | 22,334 |
금색: 챔피언으로서 분데스리가로 승격 |
1960년, DFB-포칼 결승에서 카를스루에 SC를 3-2로 꺾고 첫 전국 규모 우승을 차지했다.[17] 이후 클럽명을 보루시아 VfL 1900 묀헨글라트바흐 e.V.로 변경했다.[17] 1960–61 유러피언 컵 위너스 컵에 진출했지만, 레인저스에게 패배했다.[17]
1963년 푸스볼-분데스리가 출범 당시, 묀헨글라트바흐는 최근 10년간 성적이 원년 멤버 기준에 미치지 못해 2부 리그인 서부 레기오날리가에 속했다.[17]
1964–65 시즌, 유프 하인케스, 베른트 루프 등을 영입하고 유소년 팀 선수들이 프로 선수단에 합류했다.[19] 평균 연령이 21.5세로 낮아 '망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19] 빌헬름 아우구스트 후르트만스는 ''라인ische 포스트''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 별명을 사용했다.[19] 레기오날리가 서부에서 우승하며 분데스리가 승격 라운드에 진출, 보름스, 로이틀링겐, 킬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1위를 차지,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20] FC 바이에른 뮌헨도 함께 승격했다.[20]
2. 2. 황금기 (1965-198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1965-66 시즌에 FC 바이에른 뮌헨과 함께 분데스리가에 합류하여, 1970년대에 걸쳐 독일 축구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7] 1969년 바이에른 뮌헨이 먼저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묀헨글라트바흐는 1970년에 첫 리그 우승을, 1971년에는 타이틀 방어에 성공하며 반격했다.[7]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의 지휘 아래, 묀헨글라트바흐는 공격적이고 역동적인 축구를 구사하며 "망아지 군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9] 유프 하인케스, 베른트 루프 등 젊은 선수들과 베르티 포크츠, 하인츠 비트만과 같은 경험 많은 선수들이 조화를 이루었다.[21] 특히, 1966-67 시즌에는 FC 샬케 04를 상대로 11-0 대승을 거두며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다 점수 차 승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22]
1970년대는 묀헨글라트바흐의 황금기였다.[23] 1970년 4월 30일, 함부르크 SV를 꺾고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지었으며,[24] 1971년 6월 5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꺾고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로 타이틀 방어에 성공한 팀이 되었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는 분데스리가 3연패를 달성했다.[7]
1973년에는 1. FC 쾰른과의 DFB-포칼 결승에서 귄터 네처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우승했다.[27] UEFA 컵에서는 1975년과 1979년에 우승을 차지했고, 1973년과 1980년에는 준우승을 기록했다.[7] 1975년 UEFA컵 결승 2차전에서는 FC 트벤테를 5-1로 꺾으며 UEFA컵 결승전 원정 최다 점수 차 승리를 기록했다.[31] 1977년 유러피언 컵 결승에 진출했지만, 리버풀 FC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7] 1979년에는 레드 스타 베오그라드를 꺾고 두 번째 UEFA컵 우승을 달성했다.
1970년대 묀헨글라트바흐의 주요 선수로는 귄터 네처, 베르티 포크츠, 유프 하인케스, 알란 시몬센 등이 있다. 특히 알란 시몬센은 1977년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유럽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2. 3. 침체와 재도약 (1980-현재)
1980년대에 들어서 묀헨글라트바흐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주축 선수들을 팔아야 했고, 헤네스 바이스바일러나 우도 라텍과 같은 유능한 감독 없이 정상에 서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대부분 리그 상위권을 유지했고, 1984년에는 FC 바이에른 뮌헨보다 1승점 더 많은 승점을 얻었으나 VfB 슈투트가르트와 함부르크 SV와 승점이 같았지만 골득실에 밀려 우승에 실패했다. 같은 해 DFB-포칼 결승전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1980–81 시즌에는 카를 델하예를 포함한 많은 장기 선수들이 구단을 떠났고, 볼프강 클레프를 울리 주데로 교체했다. 팀은 리그 6위를 기록했지만, 이후 두 시즌 동안 스포츠적인 성적은 향상되지 않았다. 1982년 7위로 유럽 대항전 진출에 실패했고, 이듬해 우베 캄프스가 골키퍼로 성장했다. 1983–84 시즌에는 베른트 크라우스, 미하엘 프론체크, 울리 보로프카를 영입하며 VfB 슈투트가르트, 함부르크 SV에 이어 3위로 시즌을 마쳤다. DFB-포칼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고, 로타어 마테우스는 바이에른으로 이적했다.
1984–85 시즌,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를 상대로 10–0으로 승리했다.[35] 독일 컵 준결승에서 VfL은 쇠렌 레르비의 페널티킥 골로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했다. 1985–86 시즌은 리그 4위로 마감했고, 뒤셀도르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5–1로 승리했으나 마드리드에서 4–0으로 패하여 UEFA컵에서 탈락했다.
1986–87 시즌, 유프 하인케스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고, 볼프 베르너가 감독으로 부임했다. 리그 3위를 기록했고, 우베 란은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함부르크 SV에게 DFB 포칼 준결승에서 패했고, UEFA컵 준결승에서 던디 유나이티드에게 패했다. 1987년 이후 보루시아는 2008년까지 16명의 새로운 감독을 영입했다. 1989년 11월 21일 베르너의 해임은 보루시아에서 감독이 조기에 해임된 첫 번째 사례였다.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영입했지만, 1990년대 초에는 하락세가 이어졌다. 1989–90 시즌에는 강등을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1991–92 시즌에는 컵 준결승에서 우베 캄프스의 활약으로 결승에 진출했지만, 2부 리그 하노버 96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1993년, 하이코 헤를리히, 파트리크 안데르손,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영입하며 상위권으로 재진입했고, 1994–95 시즌에는 VfL 볼프스부르크를 3–0으로 꺾고 DFB-포칼에서 우승했다.
1990년대에 팀 성적이 하락했고, 1996-97 시즌 전반기 이후 17위를 기록했다. 프리델 라우쉬 감독 아래에서 1998년 극적인 시즌 마지막 경기를 치른 후에야 분데스리가에 잔류할 수 있었다. UEFA컵에서 아스널 FC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모나코에게 패했다. 1998-99 시즌, 샬케 04를 상대로 3-0으로 승리했지만, 9일째에 순위표 최하위에 머물렀고, 21번의 패배 이후, 분데스리가에서 처음으로 강등되었다.
1999년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되어 두 시즌을 보냈다. 1999-2000 시즌 2부 리그는 순위표 5위로 마무리했고, 2000-01 시즌, 2. 분데스리가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분데스리가로 복귀했다. DFB 포칼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우니온 베를린에게 승부차기에서 패했다. 2001년 1 분데스리가 복귀 후에도 리그 하위권을 맴돌았다. 2003-04 시즌에도 UEFA컵 출전에 실패했고, 알레마니아 아헨에게 0-1로 패하며 DFB 포칼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2004년, UEFA 유로 2004에서 네덜란드를 4강에 올린 딕 아드보카트를 감독으로 영입했지만, 이듬해 4월에 사임했다. 호르스트 쾨펠이 임시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2006-07 시즌에는 유프 하인케스가 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재정난 해결을 위해 59,771석의 보루시아 파르크를 건설했다. 2004년 새 경기장 개장으로 재정난 해결과 더 많은 관람표 판매를 기대했다. 2006-07 시즌 31라운드에서 강등되었지만, 2007-08 시즌 32라운드에 승격했다.
2010-11 DFB-포칼에서 5년 만에 16강에 진출했고, 분데스리가에서는 레버쿠젠을 상대로 16년 만에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반기에는 최하위에 머물렀다. 2011년 2월 13일, 미하엘 퐁체크는 해임되었고 뤼시앙 파브르가 새로운 감독으로 고용되었다.[44] 팀은 16위에 올라 VfL 보훔과의 강등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승리하여 강등을 막았다.[45][46][47]
2011년 뤼시앵 파브르 감독 부임 이후, 마르코 로이스 등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재건하며, 2011-12 시즌 분데스리가 4위를 기록하며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했다. 2012-13 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디나모 키예프에 패했지만, 2012–13 분데스리가 시즌 동안 8위로 마쳤다. 2013–14 분데스리가 시즌에는 6위로 마감하며, 2014-15 유로파 리그 플레이오프 단계에 진출했다. 2014–15 분데스리가 시즌을 3위로 마감하여 2015–16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 직행했다. 2015-16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하고, 세비야를 4-2로 꺾었지만, 조 최하위로 마쳤다.[48]
2015–16 분데스리가 시즌의 부진한 시작으로, 파브르는 사임했고[49] 안드레 슈베르트가 임시 감독으로 대체되었다. 분데스리가에서 6연승을 거두었고, 시즌을 4위로 마감하여 챔피언스 리그 진출 자격을 얻었다. 2016-17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3위를 기록하며 UEFA 유로파 리그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분데스리가에서 부진을 겪었고, 안드레 슈베르트가 사임하고 디터 헤킹으로 대체되었다. 헤킹은 분데스리가에서 3번 승리하며 9위로 올라섰으며, DFB-포칼 8강 진출 자격도 얻었다.
2017-18 시즌, 마티아스 긴터를 영입했다. 텔레콤 컵에서 4위를 기록했고, DFB-포칼 1라운드에서 로트-바이스 에센과의 서부 더비에서 2-1로 승리했다. 리그 초반, 1. FC 쾰른을 1-0으로 꺾고, 함부르크 SV와의 마지막 홈 경기에서 3-1로 승리하며 전반기를 6위로 마쳤다. DFB-포칼에서 레버쿠젠에게 0-1로 패했다. 2017-18 시즌은 함부르크 SV에게 1-2로 패배하면서 9위에 머물렀다.
2018년 7월, 알라산 플레아가 합류했고, 2018–19 DFB-포칼 1라운드에서 BSC 하스테트를 11-1로 꺾었다.[50] 2019–20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2-1로 꺾고 2019년 12월에 리그 선두를 차지했지만, 최종적으로 4위로 시즌을 마쳤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했으며, 알라산 플레아의 해트트릭으로 샤흐타르 도네츠크를 6-0으로 꺾었다.[51] B조에서 2위로 마쳐 16강에서 맨체스터 시티에 의해 탈락했다.[52]
한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리버풀 FC와 UEFA 컵 결승과 유러피언 컵 결승에서 만나며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두 팀 서포터들은 서로 격년으로 리버풀과 묀헨글라트바흐를 여행하며 우정을 쌓았다. 힐스버러 참사 이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힐스버러 재단에 거금을 기부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크루제; 벤트; 존슨; 자카; 라파엘; 코르브; 헤르만; 크라머; 브로어스; 조머; 그리고 얀치케.
3. 경기장
3. 1. 보루시아 파르크
4. 라이벌 관계
4. 1. 1. FC 쾰른
1. FC 쾰른과의 라이벌 관계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라이벌 관계 중 가장 심각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59] 두 팀 간의 적대감은 1964년 쾰른의 감독 헤네스 바이스바일러가 묀헨글라트바흐를 지지하면서 시작되었다. 바이스바일러는 두 클럽의 역사에서 핵심적인 인물이다. 쾰른의 마스코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헤네스'라고 명명되었으며, 묀헨글라트바흐는 바이스바일러를 '세기의 팀'의 감독으로 숭배한다. 묀헨글라트바흐의 경기장인 보루시아-파크는 바이스바일러를 기리는 의미로 ''헤네스-바이스바일러-알레''라는 도로에 위치해 있다.FC 쾰른 서포터들은 이에 격분했고, 곧 심각한 스포츠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쾰른은 분데스리가 창립 멤버이자 리그 첫 챔피언으로서 초반에는 유리했지만, 묀헨글라트바흐는 빠르게 격차를 좁혔다. 1969-70 시즌과 1977-78 시즌 사이, 묀헨글라트바흐는 5번, 쾰른은 1번의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1977-78 시즌, 묀헨글라트바흐는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인 12-0으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꺾었지만, 쾰른이 FC 장크트 파울리를 5-0으로 이기며 챔피언십을 차지했다. 쾰른이 약간 더 나은 골득실(+45 대 +42)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1977-78 시즌 이후 두 클럽 모두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두 클럽 서포터 간의 폭력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면서 라이벌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60][61][62][63] 전체적으로 묀헨글라트바흐가 두 팀 간의 경기에서 더 성공적이었으며, 105번의 대결에서 54승 20무 31패를 기록했다. 특히 묀헨글라트바흐는 원정 경기에서도 FC 쾰른보다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묀헨글라트바흐 우세 24–10–17).[64] 보루시아와 FC 쾰른의 첫 번째 경기는 1961년 1월 1일 오버리가 서부(1947–63)에서 11,000명의 관중 앞에서 열렸으며, 쾰른이 묀헨글라트바흐를 4-1로 꺾었다.[65]
4. 2. FC 바이에른 뮌헨
1965-66 시즌부터 분데스리가에 참가한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1970년대에 분데스리가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다.[66] 1969-70 시즌부터 1976-77 시즌까지 묀헨글라트바흐가 5번, 뮌헨이 3번 우승을 차지했다.[66]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묀헨글라트바흐가 쇠퇴하면서 뮌헨은 분데스리가와 보루시아와의 직접적인 대결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66] 119번의 경기에서 뮌헨이 58번, 묀헨글라트바흐가 29번 승리했으며, 32번은 무승부로 끝났다.[66]하지만 묀헨글라트바흐는 여전히 뮌헨에게 고통스러운 패배를 안길 수 있는 주목할 만한 변수로 남아있다.[66] 예를 들어, 이고르 데 카마르고는 2011년 8월 7일 뮌헨에서 열린 마누엘 노이어와 제롬 보아텡의 첫 경기에서 1-0 승리의 결정적인 골을 기록했다.[67] 2015년에는 뮌헨의 홈 구장에서 2-0 승리를 거두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바이에른 감독이었던 펩 과르디올라에게는 드문 국내 패배였다.[68] 2021년 10월 27일, 글라트바흐는 DFB-포칼 경기에서 바이에른을 5-0으로 꺾었는데, 이는 1978년 이후 바이에른의 최악의 패배였다.[69][70][71]
5. 선수
5. 1. 현재 선수 명단 (2023-24 시즌)
2024년 8월 30일 기준 선수명단.[76]
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
1 | GK | 요나스 오믈린 | 요나스 오믈린/Jonas Omlinde |
2 | DF | 파비오 키아로디아 | 파비오 키아로디아/Fabio Chiarodiait |
3 | DF | 이타쿠라 고 | 이타쿠라 고/板倉 滉일본어 |
5 | DF | 마르빈 프리드리히 | 마르빈 프리드리히/Marvin Friedrichde |
7 | MF | 케빈 슈퇴거 | 케빈 슈퇴거/Kevin Stögerde |
8 | MF | 율리안 바이글 | 율리안 바이글/Julian Weiglde |
9 | FW | 프랑크 오노라 | 프랑크 오노라/Franck Honorat프랑스어 |
10 | MF | 플로리안 노이하우스 | 플로리안 노이하우스/Florian Neuhausde |
11 | FW | 팀 클라인딘스트 | 팀 클라인딘스트/Tim Kleindienstde |
13 | FW | 후쿠다 시오 | 후쿠다 시오/福田 師王일본어 |
14 | FW | 알라산 플레아 | 알라산 플레아/Alassane Pléa프랑스어 |
16 | MF | 필리프 잔더 | 필리프 잔더/Phillip Sanderde |
19 | MF | 나탕 은구무 | 나탕 은구무/Nathan Ngoumou프랑스어 |
20 | DF | 루카 네츠 | 루카 네츠/Luca Netzde |
21 | GK | 토비아스 시플 | 토비아스 시플/Tobias Sippelde |
22 | DF | 슈테판 라이너 | 슈테판 라이너/Stefan Lainerde |
25 | FW | 로빈 하크 | 로빈 하크/Robin Hackde |
26 | DF | 루카스 울리히 | 루카스 울리히/Lukas Ullrichde |
27 | MF | 로코 라이츠 | 로코 라이츠/Rocco Reitzde |
28 | FW | 그란트레온 라노스 | 그란트레온 라노스/Գրանտ-Լեոն Ռանոսhy |
29 | DF | 조 스캘리 | 조 스캘리/Joe Scally영어 |
30 | DF | 니코 엘베디 | 니코 엘베디/Nico Elvedide |
31 | FW | 토마시 치반차라 | 토마시 치반차라/Tomáš Čvančaracs |
33 | GK | 모리츠 니콜라스 | 모리츠 니콜라스/Moritz Nicolasde |
34 | FW | 찰스 헤어만 | 찰스 헤어만/Charles Herrmannde |
38 | MF | 이방드로 보르게스 산시스 | 이방드로 보르게스 산시스/Yvandro Borges Sancheslb |
41 | GK | 얀 올쇼브스키 | 얀 올쇼브스키/Jan Olschowskyde |
5. 2. 주요 선수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소속된 국가대표팀 국기를 표시한다. 선수들은 복수의 FIFA 비회원국 국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번호 | 포지션 | 이름 | 국적 |
---|---|---|---|
1 | GK | 마르크안드레 테어 슈테겐 | 독일 |
32 | DF | 마르빈 콤퍼 | 독일 |
31 | DF | 단치 | 브라질 |
39 | DF | 마르틴 슈트란츨 | 오스트리아 |
15 | DF | 알바로 도밍게스 | 스페인 |
3 | DF |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센 | 덴마크 |
8 | MF | 마흐무드 다후드 | 독일 |
11 | MF | 마르코 마린 | 독일 |
4 | MF | 마이클 브래들리 | 미국 |
15 | MF | 로만 노이슈테터 | 러시아 |
27 | MF | 오쓰 유키 | 일본 |
18 | MF | 후안 아랑고 | 베네수엘라 |
16 | MF | 호바르 노르트베이트 | 노르웨이 |
34 | MF | 그라니트 자카 | 스위스 |
11 | FW | 마르코 로이스 | 독일 |
9 | FW | 이고르 지 카마르구 | 벨기에 |
11 | FW | 루크 데 용 | 네덜란드 |
10 | FW | 막스 크루제 | 독일 |
5. 3. 역대 주요 선수
'''분데스리가 출장 기록'''순위 | 선수 | 경기 |
---|---|---|
1 | 베르티 포그츠 | 419 |
2 | 우베 캄프스 | 390 |
3 | 헤르베르트 뷔머 | 366 |
4 | 크리스티안 호흐슈테터 | 339 |
5 | 한스-귄터 브룬스 | 331 |
6 | 파트리크 헤르만 | 323 |
7 | 볼프강 클레프 | 321 |
8 | 한스-요르크 크리엔스 | 290 |
9 | 유프 하인케스 | 283 |
10 | 미하엘 클린케르트 | 274 |
'''분데스리가 득점 기록'''
순위 | 선수 | 골 |
---|---|---|
1 | 유프 하인케스 | 195 |
2 | 헤르베르트 라우멘 | 97 |
3 | 한스요르크 크리엔스 | 92 |
4 | 귄터 네처 | 82 |
5 | 우베 란 | 81 |
6 | 알란 시몬센 | 76 |
7 | 라르스 슈틴들 | 75 |
8 | 프랑크 밀 | 71 |
9 | 한스귄터 브룬스 | 61 |
10 | 마르틴 달린 | 60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소속으로 100경기 이상 출전한 선수 목록
'''수상'''
; 발롱도르
:* 1977: 알란 시몬센
; 올해의 선수 – 독일
:* 1971: 베르티 포그츠
:* 1972: 귄터 네처
:* 1973: 귄터 네처
:* 1979: 베르티 포그츠
:* 1987: 우베 란
:* 2012: 마르코 로이스
; 올해의 선수 – 호주
:* 1996: 데이미언 모리
; 올해의 선수 – 오스트리아
:* 1986: 안톤 폴스터
:* 1997: 안톤 폴스터
; 올해의 선수 – 벨기에
:* 2001: 웨슬리 손크
; 올해의 선수 – 덴마크
:* 1994: 토마스 헬베그
; 올해의 선수 – 스웨덴
:* 1993: 마르틴 달린
:* 1995: 파트리크 안데르손
:* 2001: 파트리크 안데르손
; 올해의 선수 – 미국
:* 1997: 케이시 켈러
:* 1999: 케이시 켈러
:* 2005: 케이시 켈러
; 분데스리가 득점왕
:* 1974 – 30 골 – 유프 하인케스 (게르트 뮐러(바이에른 뮌헨)와 공동 수상)
:* 1975 – 29 골 – 유프 하인케스
:* 1987 – 24 골 – 우베 란
:* 1995 – 20 골 – 하이코 헤를리히 (마리오 바슬러(베르더 브레멘)와 공동 수상)
; 올해의 골
:* 1971: 울리크 르 페브르
:* 1972: 귄터 네처
:* 1973: 귄터 네처
:* 1978: 라이너 본호프
:* 1979: 하랄트 니켈
:* 2005: 카스페르 뵈겔룬
:* 2006: 올리버 노이빌
; 시즌의 골
:* 2012–13: 후안 아랑고
:* 2020–21: 발렌티노 라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