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령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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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1384년 플랑드르 백작령 상속을 통해 부르고뉴 공작이 저지대 국가들을 통치하면서 시작되었다. 부르고뉴 공작들은 신성 로마 제국 내 여러 지역을 획득하며 영토를 확장했으나, 1477년 용담공 샤를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실과 합스부르크 가문 간의 분쟁이 발생했다. 이후 마리의 결혼과 아라스 조약, 상리스 조약을 거치며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였고, 네덜란드 17주로 통합되었다. 부르고뉴 공작들은 중앙 집권화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예술 후원과 삼부회 구성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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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령 네덜란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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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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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부르고뉴 네덜란드 |
존속 기간 | 중세 후기 |
지위 | 신성 로마 제국 및 프랑스 봉토의 인적 동군연합 |
수도 | 없음, 메헬렌 (1473년–1477년) |
공용어 | 네덜란드어, 저지 독일어, 서프리슬란트어, 왈롱어,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통치 형태 | 복합 군주국 |
역사 | |
시작 연도 | 1384년 |
종료 연도 | 1482년 |
선행 국가 | 플랑드르 백국 에노 백국 룩셈부르크 공국 아르투아 백국 헬러 공국 나뮈르 백국 브라반트 공국 홀란트 백국 위트레흐트 주교후국 리에주 주교후국 메헬렌 영주령 안트베르펜 변경백국 젤란트 백국 림뷔르흐 공국 불로뉴 백국 즈트펀 백국 생폴 백국 피카르디 |
후행 국가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프랑스 왕국 |
국기 및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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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부 형태 | 복합 군주제 |
입법부 | 네덜란드General |
통치자 | |
통치자 | 필리프 2세 (1384년–1405년) 마리 (1477년–1482년) |
현재 국가 |
2. 역사
1384년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사망하자, 그의 딸인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필리프 대담공이 플랑드르 백작을 상속받았다. 필리프 대담공은 부르고뉴 공작도 겸하고 있었으며, 이후 약 100년 동안 이 지역은 부르고뉴 공작이 통치하게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은 처음에는 저지대 국가의 플랑드르 백작령, 아르투아 백작령, 레텔 백작령, 부르고뉴 백작령, 뇌브르 백작령을 통치했다. 이후 영토를 확장하여 1421년에는 나뮈르 백작령을 사들였고, 1430년에는 브라반트 공작령과 림뷔르크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1432년에는 에노 백작령, 홀란트 백작령, 젤란트 백작령을 획득했고, 1441년에는 룩셈부르크 공작령을, 1473년에는 겔더른 공작령을 차지했다.
1477년 샤를 대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전사하면서, 부르고뉴 공작령은 살리카 법에 따라 프랑스 왕실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저지대 국가의 영토는 샤를 대담공의 딸 마리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통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다. 이후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의 전개에 대해서는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2. 1. 부르고뉴 공국의 저지대 국가 지배
1384년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사위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필리프 대담공이 플랑드르 백작을 상속받았다. 필리프 대담공은 부르고뉴 공작을 겸하고 있었으며, 이후 약 100년 동안 이 지역은 부르고뉴 공작이 통치하게 되었다.부르고뉴 공작은 처음에는 저지대 국가의 플랑드르 백작령, 아르투아 백작령, 레텔 백작령, 부르고뉴 백작령, 뇌브르 백작령을 통치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들은 영토를 확장하여, 1421년에는 나뮈르 백작령을 사들였고, 1430년에는 브라반트 공작령과 림뷔르크 공작령을 상속받았다. 1432년에는 에노 백작령, 홀란트 백작령, 젤란트 백작령을 획득했고, 1441년에는 룩셈부르크 공작령을, 1473년에는 겔더른 공작령을 차지했다.
1477년 샤를 대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후계자 없이 전사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는 살리카 법에 따라 프랑스 왕실에 반환되었다. 그러나 저지대 국가의 영토는 샤를 대담공의 딸 마리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통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다. 1482년 마리가 사망하면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네덜란드를 통치했던 부르고뉴 공작은 다음과 같다.
통치 기간 | 부르고뉴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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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4년 - 1405년 | 마르그리트 3세와 남편 필리프 대담공 |
1405년 - 1419년 | 장 용감공 |
1419년 - 1467년 | 필리프 선공 |
1467년 - 1477년 | 샤를 대담공 |
1477년 - 1482년 | 마리 여공 |
2. 2.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의 종말과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의 승계
1477년 샤를 대담공이 낭시 전투에서 남자 후계자 없이 전사하면서 발루아 가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살리카 법에 따라 부르고뉴 공작령은 프랑스 왕실에 반환되었고,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는 저지대 국가의 부르고뉴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공격했다.신성 로마 제국령 봉지는 샤를의 외동딸 부귀공 마리와 그녀의 남편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1세는 플랑드르 백작령과 아르투아를 포함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를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소유이기에 나눌 수 없는 것이라 여겼고 프랑스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였다. 이 분쟁은 1479년 긴가트 전투로 종결되었다. 막시밀리안의 승리로 끝났음에도, 그의 아내가 급작스럽게 사망한 후 1482년의 아라스 조약에 따라 플랑드르 백작령만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반면 프랑스는 아르투아를 유지했다.
부귀공 마리는 유언에서 부르고뉴의 재산을 막시밀리안의 아들 미남공 필립에게 남겼다. 그의 아버지는 아라스 조약 합의 조건을 불만족스러워하며 프랑스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지속했다. 1493년 상리스 조약에 따라 샤를 8세는 결국에는 아르투아를 포기했고, 플랑드르와 함께 아르투아는 필립이 통치하는 제국령 17주로 통합되었다.[1]
3. 통치자
1477년 용담공 샤를이 후사 없이 전사하면서, 그의 딸 부귀공 마리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다. 1482년 마리가 사망하면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막을 내렸다.
3. 1.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 용담공 필리프 (1384년–1404년) -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아들이며, 아내인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를 통해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를 확립했다.
- 용맹공 장 (1404년–1419년) - 필리프의 아들
- 선량공 필리프 (1419년–1467년) - 장의 아들
- 용담공 샤를 (1467년–1477년) - 필리프의 아들
- 부귀공 마리 (1477년–1482년) - 용담공 샤를의 외동딸로, 1477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했다.
3. 2. 발루아 가문 (명목상)
- 용담공 필리프 (1384년–1404년) - 프랑스의 국왕 장 2세의 아들이며, 아내인 여백작 마르그리트 3세를 통해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를 확립했다.[1]
- 용맹공 장 (1404년–1419년) - 용담공 필리프의 아들[1]
- 선량공 필리프 (1419년–1467년) - 용맹공 장의 아들[1]
- 용담공 샤를 (1467년–1477년) - 선량공 필리프의 아들[1]
- 부귀공 마리 (1477년–1482년) - 용담공 샤를의 외동딸로, 1477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했다.[1]
3. 3. 합스부르크 가문
부귀공 마리가 1477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혼인하면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4. 정치
이 지역에는 여러 주교령, 자유 도시, 강력한 지방 귀족 세력, 다양한 세금 체계, 상품 단위, 내부 관세 장벽 등 이 지역의 권리를 보호했던 것들이 많았는데, 이는 "위대한 발루아 가"에게 큰 장애물이었다. 발루아 공작들의 직접적인 통제 시도는 독립성을 지닌 지역들에서의 반란(때로는 독립적인 귀족 세력들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으로 이어졌고, 이는 피비린내 나는 군사적 압박으로 진압되었다. 그러나 관료제의 관리들과 함께 점점 현대화된 중앙 정부 체제는 부르고뉴 공작들이 유명 예술가들의 후원자가 되어 화려한 궁정 생활을 시작하게 해주었고, 여기서 생겨난 생활 방식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행동 규범을 만들어냈다. 필리프 2세 (1419년–1467년)는 남동쪽으로 그의 세력을 늘려, 브뤼셀, 나뮈르, 리에주를 그의 휘하에 두었다. 그는 이 지역 최초의 의회 (삼부회)라고 할 수 있는 구조 체계를 전통적인 독립 도시들에 구축하였고, 이 지역의 경제를 통합시켜냈다.
최초의 의회는 1464년 1월 9일 브뤼주의 시청에서 소집되었다. 브라반트 공국, 플랑드르, 릴, 두에, 오르시스, 아르투아 백작령, 에노 백작령, 홀란트 백국, 제일란트, 나뮈르 백작령, 메헬렌 영주령, 불로네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다.[5] 1464년까지 부르고뉴 공작은 각 지역의 삼부회들과 별도로 유대 관계를 유지했다. 대체적으로 각 지역의 삼부회들은 전통적인 계급들인 성직자, 귀족, 제3 계급자들의 대표자들로 이뤄졌으나, 각 삼부회의 정확한 구성과 영향력은 다를 수 있었다. 모든 각 지역들의 삼부회들이 참석한 삼부회는 필리프 2세의 중앙집권 정책을 대표한다.
5. 사회와 경제
1491년과 1492년에 일부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헤임스커르크 전투에서 작센 공작 알브레히트가 이끄는 막시밀리안의 군대에 진압됐다.[6]
오늘날 네덜란드의 메이에레이 판 '스헤르토헨보스 지역의 가톨릭 문화 거주민들은 다른 지역의 네덜란드인들로부터 "부르고뉴적 기질"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그들이 화려한 파티 등을 좋아하는 다정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1477년 저지대 주요 주(州)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1][2]
주(州) | 총 인구 | 농촌 (%) | 도시 (%) | 네덜란드 전체 대비 주(州) 인구 비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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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 {{cvt|666|K|} | } || 64 || 36 || 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