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비티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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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레비티 작전은 1941년 5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이 수행한 군사 작전이다. 이 작전은 하파야 고갯길을 확보하고 독일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하파야 고갯길만 점령하는 데 그쳤다. 영국군은 전차 손실과 인명 피해를 입었고, 윈스턴 처칠의 작전 평가가 논란을 일으켰다. 롬멜은 이 작전을 통해 하파야 고갯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후 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작전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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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비티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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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서부 사막 전역 |
장소 | 이집트 리비아 국경 |
날짜 | 1941년 5월 15일 ~ 16일 |
결과 | 결판나지 않음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
교전국 2 |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에르빈 롬멜 막시밀리안 폰 헤르프 |
교전국 2 지휘관 | 윌리엄 고트 아치볼드 웨이벌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전차 30-50대 |
교전국 2 병력 | 3개 보병 대대 전차 52대 |
피해 규모 | |
교전국 1 사상자 | 605명 이상 사상 전차 3대 파괴 |
교전국 2 사상자 | 206명 이상 사상 전차 5대 파괴 항공기 6대 격추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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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0년 9월 초, 이탈리아 제10군은 리비아에서 이집트 침공을 시작했다. 3개월 후, 영국군과 영연방 군대로 구성된 서부 사막 부대는 컴파스 작전으로 반격하여 이탈리아령 키레나이카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제10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1941년 2월, 보급 부족과 그리스 전투에 대한 우선순위로 인해 진격이 중단되었다. 제13군단으로 개칭된 키레나이카 사령부(CYRCOM)는 방어 태세를 취했다.[1] 이후 제2 뉴질랜드 사단과 제6 호주 사단이 루스터 작전으로 그리스로 파견되면서 전력이 약화되었고, 제7 기갑 사단은 휴식과 정비를 위해 나일 삼각주로 철수했다.[2] 제2 기갑 사단과 제9 호주 사단의 일부가 키레나이카에 배치되었지만, 두 부대 모두 경험과 장비가 부족했다.
이탈리아는 제132 기갑 사단 "아리에테"와 제102 기동 사단 "트렌토"를 북아프리카로 보냈다. 1941년 2월부터 5월 초까지, 해바라기 작전으로 에르빈 롬멜 소장이 지휘하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제5 경 및 제15 기갑 사단으로 구성)이 트리폴리에 도착하여 영국군을 저지했다. 롬멜은 적의 약점을 파악하고 신속하게 공세로 전환하여 3월과 4월 동안 추축국이 진격하면서 제2 기갑 사단의 나머지 부대가 격파되었고, 영국 및 영연방군은 후퇴했다.
리처드 오코너 중장과 네임 중장이 포로로 잡히면서 영국군 지휘 체계가 재편되었다. 키레나이카 사령부는 해체되고, 새로운 서부 사막 부대가 지휘권을 인수했다. 제9 호주 보병 사단은 토브루크로 후퇴했고, 나머지 영국군은 약 160.93km 더 동쪽으로 물러나 이집트-리비아 국경의 솔룸으로 이동했다. 막시밀리안 폰 헤르프 대령의 전투단 (''캄프그루페'')은 토브루크 포위전을 수행하는 추축군 주력 부대와 별도로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카푸초 요새와 바르디아를 점령하고 4월 말까지 솔룸과 하파야 고개를 점령했다. 롬멜은 이 지역에 주둔군을 배치하고 방어 태세를 명령했다.
토브루크 주둔군은 영국 해군으로부터 보급품을 받았지만, 롬멜은 항구를 점령할 수 없었다. 그의 솔룸 전선 위치는 긴 보급로의 끝에 있었고, 토브루크 주둔군의 위협을 받았다. 토브루크에 투입된 막대한 병력으로 인해 솔룸에서 병력을 증강할 수 없었고, 이집트로의 추가 진격은 불가능했다. 토브루크를 계속 점령함으로써 영국군은 주도권을 가졌다.
영국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장군은 솔룸 지역에서 브레비티 작전을 신속하게 수행하여 6월에 계획 중이던 주요 공세인 배틀액스 작전을 시작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자 했다. 브레비티 작전의 주요 목표는 할파야 고개를 탈환하고, 솔룸과 카푸초 지역에서 적을 몰아내며, 롬멜의 병력을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부차적인 목표는 토브룩으로 진격하는 것이었지만, 보급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작전에 투입된 병력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아야 했다.
2. 1. 연합군
브레비티 작전은 윌리엄 고트 준장이 지휘했으며, 제22 근위 여단과 제7 기갑 사단의 일부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기갑 부대는 순항 전차와 보병 전차로 구성되었으며, 보병 부대와 포병 부대가 지원했다. 영국 공군(RAF)은 제공권을 장악하고 지상군을 지원했다.[1]
연합군은 세 개의 기둥 부대로 나뉘어 진격했다.[2]
- 해안 그룹: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하여 하파야 고개 하부, 솔룸 막사, 솔룸 마을을 점령할 예정이었다. 제2 대대 The Rifle Brigade, 제8 야전 연대 왕립 포병대의 병력이 포함되었다.
- 중앙 그룹: 하파야 고개의 정상부를 정리하고, 비르 와이어, 무사이드, 포트 카푸초를 확보하고, 바르디아 방향으로 중대 규모의 수색 작전을 수행할 예정이었다. 제1 대대 더럼 경보병, 제2 대대 스코츠 근위대, 제4 RTR의 보병 전차가 포함되었다.
- 사막 그룹: 남쪽 사막 측면에서 제7 기갑 여단 그룹은 비르 엘 카이라가트에서 약 48.28km 떨어진 시디 아제이즈까지 이동하여 가는 길에 만나는 모든 저항을 파괴할 예정이었다. 제7 지원 부대의 세 개 소규모 기동 부대("Jock columns"), 제2 RTR의 순항 전차, 시디 아제이즈-바르디아 도로를 감시하고 왼쪽 측면의 탁 트인 사막을 순찰하는 임무를 맡은 장갑차 제11 훌란이 포함되었다.
2. 2. 추축군
막시밀리안 폰 헤르프 대령이 지휘하는 Kampfgruppe von Herffde는 주요 추축군 저항 세력이었다. 이 부대는 제5기갑연대 제2대대 소속 전차 30~50대, 이탈리아 Bersaglieriit 부대의 전차와 Bersaglieriit 부대 2개 중대, 그리고 지원 화력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잘 훈련된 이탈리아 자동차화 보병 부대인 Bersaglieriit와 포병 지원 부대는 하파야 고개 주변의 최전선을 방어했다.
1941년 5월 9일, 독일군은 영국군의 무선 기상 보고서를 가로챘다. Afrika Korpsde의 전쟁 일지에는 "과거에 이러한 보고서는 항상 적의 주요 공세, 즉 시디 바라니, 바르디, 토브루크, 게벨 점령 전에 발행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를 통해 에르빈 롬멜은 토브루크 주변의 동쪽을 강화하여 주둔지에서의 출격에 대비하고, Kampfgruppe von Herffde에게 더 공격적인 태세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5월 13일, 추축국 항공기가 영국 전차 집결지를 폭격했고, 헤르프는 임박한 영국군의 공격을 예상했다. 그러나 다음 날 항공기는 영국군을 찾을 수 없었고, "적의 공격 의도를 알 수 없었다"고 보고되었다.
영국군의 공세가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브레비티 작전은 추축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롬멜은 일기에 초반 공격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기록했다. 5월 15일 정오까지, 추축군 지휘부는 혼란의 조짐을 보였다. 영국군이 100대 이상의 전차를 동원한 것으로 오인하고, Luftwaffede와 Regia Aeronauticait 양측에 합동 작전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토브루크 주변의 병력은 포위된 도시 동쪽으로 재배치되어 구원을 시도하거나 수비대가 영국군의 진격을 막는 것을 방지했다.
중령 한스 크라머는 제8 기갑 연대의 전차 대대와 88mm 대공포 1개 포대로 캄프그루페 폰 헤르프de를 증원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다음 날에는 한스-카를 프라이헤어 폰 에제베크 장군 휘하의 추가 증원군이 파견되었다.
독일군은 중앙 열을 상대로 반격을 집중했다. 헤르프는 5월 15일 오후, 제2 기갑 연대 제2 대대로 포트 카푸초를 향해 국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제5 기갑 연대는 카푸초를 재탈환했으며 영국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7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헤르프는 영국군이 시디 아지즈 남쪽에 병력을 집중하여 소룸-바르디아 지역의 독일 전선을 무너뜨릴 위협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영국군과의 접촉을 끊고, 다음 날 아침 크라머의 제8 기갑 연대와 합류하여 집중적인 반격을 가하는 계획을 세웠다.
3. 전투 경과
5월 15일, 영국군은 세 방향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중앙 그룹은 하파야 고개에서 우고 몬테무로 대령이 지휘하는 8 베르살리에리 연대의 중대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이탈리아군은 47mm 대전차포로 마틸다 보병 전차의 장갑을 관통할 수 없었지만, 약 365.76m에서 전차의 궤도와 하부를 조준하여 7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롬멜은 이들의 활약에 몬테무로에게 철십자 훈장 1급 수여를 추천했다. 영국군은 7대의 전차 손실을 보았지만, 결국 하파야 고개 지역을 점령하고 비르 와이르-무사이드 도로로 진격했다. 오전 8시경, 대규모 독일-이탈리아 야영지가 항복했으며, 10시 15분까지 비르 와이르와 무사이드가 점령되었다.
제4 RTR A 중대와 제1 더럼 경보병(1DLI)은 카푸초 요새를 향해 진격했다. 요새 근처 능선 뒤에는 독일 전차 20~30대가 대전차포의 지원을 받으며 선체 은폐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제4 RTR A 중대와 교전하여 5대의 전차를 파괴했지만, 공격이 계속되자 철수했다. 제4 RTR 전차와 1DLI의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요새 공격이 시작되었고, 격렬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정오 직전까지 요새를 점령했다. 1DLI의 D 중대는 요새 북쪽의 작은 착륙장을 점령했다.
오후에 제2 스코츠 근위대 중대 중 한 곳이 바르디아를 향해 탐색 중 기관총 사격을 받았으나, 하사 F. 라일리가 지휘하는 유니버설 캐리어 그룹이 기관총 진지를 공격하여 무력화하고 대전차포와 교전하여 승무원을 포로로 잡았다. 라일리는 이 공로로 무공 훈장을 받았다.
사막 측면에서 제2왕립 전차 연대(RTR)는 제7기갑여단과 함께 진격했다. 오전 중에 독일 장갑차 3대를 발견하여 교전, 4호 전차 1대를 파괴하고 나머지를 격퇴시켰다. 정오까지 여단은 포트 카푸초(Fort Capuzzo) 서쪽에 도달했고, 오후에는 시디 아제이즈(Sidi Azeiz)를 향해 정찰을 시작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 진행된 진격은 하파야 고개 기슭에서 이탈리아군의 저항으로 지연되었으나, 저녁 무렵 제2 소총 여단 S 중대가 이탈리아군 진지를 점령하고 약 130명의 포로를 잡았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북아프리카 사령부는 영국의 공세가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지만, 브레비티 작전은 그들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만들었다. 5월 15일 정오까지, 추축군 지휘부는 혼란에 빠졌다. 100대 이상의 전차가 동원된 것으로 잘못 판단하여 Luftwaffede와 Regia Aeronauticait 양측에 합동 작전을 요청했다. 토브루크 주변의 병력은 재배치되었고, 한스 크라머 중령은 제8 기갑 연대의 전차 대대와 88mm 대공포 1개 포대로 캄프그루페 폰 헤르프de를 증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다음 날에는 한스-카를 프라이헤어 폰 에제베크 장군 휘하의 추가 증원군이 파견되었다.
독일군은 중앙 열을 상대로 반격을 집중했다. 헤르프는 5월 15일 오후, 제2 기갑 연대 제2 대대로 포트 카푸초를 향해 국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13시 30분경, 착륙장에 있던 제1DLI D중대가 압도당했고, 제1DLI의 잔여 병력은 무사이드로 후퇴했다. 14시 45분까지 제5 기갑 연대는 카푸초를 재탈환했다.
사막 측면에서 제2 RTR A 중대의 시디 아지즈를 향한 순찰은 제5 기갑 연대에 의해 감시되었지만, 독일군은 영국군 전차를 중장갑 마틸다 보병 전차로 오인하여 공격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헤르프는 영국군이 해당 지역에서 2개 사단을 운용하고 있다고 믿고 접촉을 끊었으며, 다음 날 아침 크라머의 제8 기갑 연대와 합류하여 집중적인 반격을 가할 계획이었다.
3. 1. 영국군의 철수

고트 준장은 5월 16일 새벽, 22 근위 보병 여단 그룹이 비르 와이르와 무사이드 주변 개활지에서 독일 기갑 부대의 반격에 취약하다고 판단하여 철수시켰다. 오전 10시까지 보병은 하파야 고개로 후퇴하여 새로운 진지를 점령했지만, 제7 기갑 여단 그룹은 당분간 포트 카푸초 서쪽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다.[1]
크래머의 증원군은 오전 3시에 시디 아제이즈 지역에 도착했고, 오전 6시 30분에 포트 카푸초에 도착했다. 오전 8시경 폰 헤르프 전투단|폰 헤르프 전투단de과 접촉했지만, 오전 중반에 두 그룹 모두 연료가 떨어졌다. 오후 4시에 독일군이 진격을 재개했지만, 제2 왕립 전차 연대의 전차 17대 가량에 의해 저지되었다. 영국군은 독일 전차 1대가 불타고 다른 1대가 파괴되었으며, 50대까지의 전차 진격을 저지했다고 보고한 반면, 독일군은 강력한 영국 전차 공격을 격퇴했다고 믿었다. 밤이 다가오자 헤르프는 전투를 중단하고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그는 파손된 기계를 수리하고 재정비하여 5월 18일에 공격 작전을 재개할 계획이었다.[2] 제2 왕립 전차 연대는 비르 엘 카이라가트로 후퇴했으며, 처음에는 독일 전차 2대가 뒤따랐지만, 다른 1대가 파괴된 후 1대가 철수했다. 이 연대는 5월 17일 오전 2시 30분경 비르 엘 카이라가트에 도착했다.
4. 결과 및 영향
"브레비티 작전"은 하파야 고개를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외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영국군은 전차 5대가 파괴되고 13대가 손상되는 피해를 입었다. 인명 피해는 최소 206명이었으며, 특히 제1 더럼 경보병 연대는 196명이 사망,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히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전차 3대(2호 전차 1대, 3호 전차 2대)와 258명의 사상자였다. 이탈리아군의 총 손실은 395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347명이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 지휘관 헤르프는 하파야 고개에서 "사자 같은 용맹함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더 강력한 적군에 맞서 싸운" 이탈리아 베르살리에리 부대를 칭찬했다.[1] 이 전투에서 금성 무공 훈장을 추서받은 제8 베르살리에리 연대의 자친토 코바 중위는 반격을 조직하고 영국군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려다 사망했다.[2]
윈스턴 처칠은 "타이거 새끼"(작전명 "타이거"의 일환으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증원군)를 사용하지 않고 공세를 취해 약 48.28km 진격했고, 하파야와 소럼을 점령했으며, 독일군 포로 500명을 생포하고, 병력과 전차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고 언급하며, 결과에 비해 너무 큰 대가는 아닌 것 같다고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이는 사건에 대한 처칠의 무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브레비티 작전"은 롬멜에게 하파야 고개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5월 27일, 롬멜은 스콜피온 작전을 통해 고개를 재탈환하여 브레비티 작전에서 영국군이 얻었던 이점을 되돌렸다.
이 작전은 배틀액스 작전과 토브룩 구출 작전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 "타이거" 호송대는 전차 238대를 가져와 제7 기갑 사단을 재정비할 수 있게 했다.
5. 평가
브레비티 작전은 하파야 고갯길을 탈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1] 영국군은 전차 5대가 파괴되고 13대가 손상되었으며, 최소 206명의 인명 피해를 보았다. 반면 독일군은 전차 3대와 258명의 인명 피해를 냈고, 이탈리아군은 395명의 피해를 보았다.
윈스턴 처칠은 작전 결과를 보고받고 아치볼드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냈으나, 실제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긍정적인 면만 언급했다.
역사가 토마스 옌츠는 영국군 전차 부대가 효과적으로 싸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 RTR의 "용감한" 행동 등이 독일군에게 전투가 끝났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브레비티 작전이 영국군의 승리로 끝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5. 1. 부정적 평가
"브레비티 작전"은 하파야 고갯길 탈환에는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1] 영국군은 전차 5대가 파괴되고 13대가 손상되었으며, 최소 206명의 인명 피해를 보았다. 특히 제1 더럼 경보병 연대는 196명이 사망,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히는 큰 피해를 입었다.[2] 반면 독일군은 전차 3대와 258명의 인명 피해를 냈고, 이탈리아군은 395명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 중 상당수는 포로로 잡혔다.윈스턴 처칠은 작전 결과를 보고받고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냈으나, 실제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타이거 새끼"를 사용하지 않고도 약 48.28km를 진격하고 하파야와 소럼을 점령했으며, 독일군 포로 500명을 생포하고 병력과 전차에 큰 피해를 입혔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와 같은 결과에 전차 20대와 1,000~1,500명의 사상자는 너무 큰 대가는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덧붙여, 무리한 작전 지시와 상황 오판을 드러냈다.
역사가 토마스 옌츠는 영국군 전차 부대가 효과적으로 싸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제2 RTR의 "용감한" 행동과 시디 아제이즈 순찰이 독일군에게 전투가 끝났다는 확신을 심어주어, 브레비티 작전이 영국군의 승리로 끝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6. 관련 인물
- '''에르빈 롬멜''': 독일 아프리카 군단 사령관이었다.[1]
- '''아치볼드 웨이벌''': 영국 중동 사령부 사령관이었다.
- '''윌리엄 고트''': 브레비티 작전의 영국군 지휘관이었다.
- '''막시밀리안 폰 헤르프''': 독일군 지휘관이었다. 5월 27일 스콜피온 작전을 통해 하파야 고갯길을 탈환했다.[1]
- '''우고 몬테무로''': 이탈리아군 지휘관이었다.
-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총리였다. 그는 브레비티 작전에 대해 오판하고 무리한 기대를 했다. 그는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내 작전 결과를 칭찬했지만, 실제 피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1]
참조
[1]
뉴스
Italians' Bravery Praised By Nazi Chief in Africa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41-08-05
[2]
웹사이트
COVA Giacinto
http://www.quirinale[...]
Presidenza Della Repubblica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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