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도브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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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도브단은 14세기 이후 세르비아인들에게 중요한 날로, 1389년 성 비투스 날에 벌어진 코소보 전투와 관련이 있다. 이 전투는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로, 세르비아인들의 신앙과 조국을 위한 희생을 기리는 날로 자리 잡았다. 비도브단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관련된 여러 사건, 예를 들어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선포, 사라예보 암살 사건, 베르사유 조약 서명 등과 연관되어 기념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시대에는 전쟁 희생자들을 기리는 날로 지정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슬라브 신 스베토비트와의 연관성이 제기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낭만주의적 해석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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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도브단 | |
---|---|
개요 | |
![]() | |
로마자 표기 | Vidovdan |
의미 | 성 비투스의 날 |
종류 | |
분류 | 축일 |
기념 | |
기념 대상 | 세르브인(세르비아 정교회) |
날짜 | |
그레고리력 | 6월 28일 |
율리우스력 | 6월 15일 |
주기 | |
빈도 | 해마다 |
관련 기념일 | |
관련 행사 | 슬라바 |
2. 역사적 배경
비도브단은 14세기부터 세르비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로 여겨져 왔다. 1389년 성 비투스 날에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1] 이 전투는 세르비아 공국의 오스만 제국 정복으로 이어졌다.[3] 1690년 세르비아인의 대이동 이후 비도브단은 "신앙과 조국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1849년 교회에 의해 공식적인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851년 처음으로 정치적, 공개적으로 기념되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상징했다.
2. 1. 코소보 전투 (1389년)
1389년 성 비투스 날, 오스만 제국 군대와 코소보 평원에서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다.[1][2] 라자르 공이 이끄는 세르비아인 중심의 기독교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 군대와 맞서 싸웠다.[2] 이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았고, 무라드 1세와 라자르 공 모두 사망했지만, 세르비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는 결과로 이어졌다.[3]2. 2.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비도브단
비도브단은 14세기 이후 세르비아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날인데, 1389년 성 비투스 날에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1] 라자르 공이 이끄는 세르비아인들의 기독교 연합군은 코소보 평원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와 싸웠다.[2] 전투 자체는 결정적이지 않았고, 술탄 무라드 1세와 라자르 공 모두 사망했지만, 이는 세르비아 공국의 오스만 정복으로 이어졌다.[3] 1690년 세르비아인의 대이동 이후 비도브단은 전투에서 싸우다 "그들의 신앙과 조국을 위해" 쓰러진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이 휴일은 1849년 교회에 의해 제도화되었고, 1851년 정치적, 공개적으로 처음 기념되었으며, 이는 오스만 지배로부터 세르비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날은 19세기에 유럽에서 민족 정체성이 성장하면서 서서히 인기를 얻었고, 기념의 날로 알려지게 되었다. 1918년 이후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비도브단을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 특히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들을 기리는 기념일로 지정했다.[4][5]
다음은 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비도브단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들이다:[6]
사건 | 발생 년도 | 비고 |
---|---|---|
세르비아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 | 1876년 | 1800년부터 1899년까지 비도브단은 6월 15일(율리우스력) = 6월 27일(그레고리력)에 기념되었다. |
1881년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동맹 조약 서명 | 1881년 | 6월 16일(율리우스력) = 6월 28일(그레고리력)에 발생, 비도브단 다음 날 |
사라예보 암살 사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 1914년 | 1900년부터 2099년까지 비도브단은 6월 15일(율리우스력) = 6월 28일(그레고리력)에 기념된다. |
베르사유 조약 서명 | 1919년 | |
세르비아 왕 알렉산드르 1세가 새로운 1921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의 왕국의 헌법을 선포, 그 후 비도브단 헌법(Vidovdanski ustav)으로 알려짐. | 1921년 | |
티토-스탈린 분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코민포름 결의안이 1948년 소련의 주도로 발표되었다. | 1948년 | |
코소보 전투 600주년(1989년)에 세르비아 지도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전투 현장에서 가지메스탄 연설을 했다. | 1989년 |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시대 이후 비도브단의 첫 번째 공개 기념 행사였다.[6] |
코리도 92 작전 중 스릅스카 공화국군(VRS)이 1992년 6월 28일 모드리차를 탈환했다. | 1992년 | [7] |
19세기 후반부터 세르비아 간행물은 슬라브 신 스베토비트에서 휴일이 유래했다는 아이디어를 홍보하는 내용이 세르비아 문학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견해를 처음 제시한 사람은 나트코 노딜로로, 그는 스베토비트 숭배를 모든 슬라브인에게 귀속시켰으며, 세르비아에서는 나중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성인의 숭배로 의도적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는 이후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스베토비트 숭배는 폴라비아 슬라브족 사이에서만 존재했으며, 비도브단은 이 신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이 신을 휴일과 연결하는 것은 낭만주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 널리 믿어지고 있다.
2. 3. 유고슬라비아 시대의 비도브단
1918년 이후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비도브단을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 특히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사망자들을 기리는 기념일로 지정했다.[4][5]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비도브단에 발생한 중요한 사건들이 있다:[6]
날짜 | 사건 |
---|---|
1919년 | 베르사유 조약 서명 |
1921년 | 세르비아 왕 알렉산드르 1세가 새로운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의 왕국의 헌법을 선포, 그 후 비도브단 헌법(Vidovdanski ustav)으로 알려짐. |
1948년 | 티토-스탈린 분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코민포름 결의안이 소련의 주도로 발표됨. |
3. 주요 사건
14세기 이후 세르비아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날인 비도브단에는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다.[1] 1389년 성 비투스 날, 라자르 공이 이끄는 세르비아인들의 기독교 연합군과 오스만 제국 군대 사이에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다.[2] 이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세르비아 공국의 오스만 정복으로 이어졌다.[3] 1690년 세르비아인의 대이동 이후, 비도브단은 전투에서 "신앙과 조국을 위해" 쓰러진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1918년 이후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비도브단을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 등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일로 지정했다.[4][5]
우연히 또는 의도적으로 비도브단에 발생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6]사건 연도 세르비아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 1876년 1881년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동맹 조약 서명 1881년 사라예보 암살 사건 1914년 베르사유 조약 서명 1919년 알렉산드르 1세의 비도브단 헌법 선포 1921년 코민포름 결의안 발표 1948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가지메스탄 연설 1989년 코리도 92 작전 중 스릅스카 공화국군의 모드리차 탈환 1992년
19세기 후반부터 세르비아 간행물은 슬라브 신 스베토비트에서 휴일이 유래했다는 주장을 담은 내용을 세르비아 문학에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베토비트 숭배는 폴라비아 슬라브족 사이에서만 존재했으며, 비도브단은 이 신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3. 1.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선전포고 (1876년)
1876년 세르비아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14세기 이후 세르비아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날인 비도브단에 일어났다. 1389년 비도브단에 오스만 제국 군대와 코소보 평원에서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는데,[1][2] 이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았고 술탄 무라드 1세와 라자르 공 모두 사망했지만, 세르비아 공국의 오스만 정복으로 이어졌다.[3] 1800년부터 1899년까지 비도브단은 6월 15일(율리우스력) 또는 6월 27일(그레고리력)에 기념되었다.[6]
3. 2.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동맹 조약 (1881년)
1881년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동맹 조약은 6월 16일 (율리우스력) = 6월 28일 (그레고리력)에 체결되었으며, 이는 비도브단 다음 날이었다.[6]
3. 3. 사라예보 사건 (1914년)
1914년 사라예보 사건에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6] 이 사건은 1900년부터 2099년까지 비도브단이 기념되는 6월 15일(율리우스력) = 6월 28일(그레고리력)에 발생했다.
3. 4. 베르사유 조약 (1919년)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비도브단에 서명되었다.[6]
3. 5. 비도브단 헌법 (1921년)
1921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의 왕국의 왕 알렉산드르 1세는 비도브단 헌법으로 알려진 새로운 헌법을 선포했다.[6]
3. 6. 코민포름 결의 (1948년)
티토-스탈린 분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코민포름 결의가 1948년 소련의 주도로 비도브단에 발표되었다.[6]
3. 7. 가지메스탄 연설 (1989년)
1989년, 코소보 전투 600주년을 맞아 세르비아 지도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전투 현장에서 가지메스탄 연설을 했다. 이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시대 이후 비도브단의 첫 번째 공개 기념 행사였다.[6]
3. 8. 코리도 92 작전 (1992년)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1992년 6월 28일 모드리차를 탈환했다.[7]
4. 비도브단과 슬라브 신화
비도브단은 14세기 이후 세르비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날로 여겨진다. 1389년 성 비투스 날에 코소보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1] 라자르 공이 이끄는 세르비아 중심의 기독교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 군대와 코소보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다.[2] 전투 자체는 결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고, 술탄 무라드 1세와 라자르 공 모두 사망했지만, 이 전투는 세르비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에 정복되는 결과로 이어졌다.[3] 1690년 세르비아인의 대이동 이후, 비도브단은 전투에서 "신앙과 조국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사람들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1849년 교회에 의해 제도화되었고, 1851년 처음으로 정치적, 공개적으로 기념되었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상징했다. 19세기 유럽에서 민족 정체성이 성장하면서 비도브단은 점차 기념일로 알려지며 인기를 얻었다. 1918년 이후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비도브단을 전쟁에서 사망한 모든 사람, 특히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기념일로 지정했다.[4][5]
19세기 후반부터 세르비아 간행물에는 비도브단이 슬라브 신 스베토비트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트코 노딜로는 스베토비트 숭배를 모든 슬라브인에게 귀속시키고, 세르비아에서는 나중에 비슷한 이름을 가진 성인의 숭배로 의도적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스베토비트 숭배는 폴라비아 슬라브족 사이에서만 존재했고, 비도브단은 이 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이 신을 비도브단과 연결하는 것은 낭만주의의 창조물이라는 것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참조
[1]
서적
The National Question in Yugoslavia: Origins, History, Politics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1988
[2]
서적
Belgrade: A Cultural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3]
서적
A Legal Geography of Yugoslavia's Disintegratio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4]
서적
Staging the Past: The Politics of Commemoration in Habsburg Central Europe, 1848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Purdue University Press
2001
[5]
서적
The Balkan Wars from Contemporary Perception to Historic Memory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7
[6]
서적
Kosovo between War and Peace: Nationalism, Peacebuilding and International Trusteeship
https://www.routledg[...]
Routledge
2006
[7]
웹사이트
ОБИЉЕЖЕН ДАН ПОЧЕТКА БОРБИ ЗА ОСЛОБОЂЕЊЕ МОДРИЧЕ {{!}} www.modrica.ba
https://modrica.ba/m[...]
2024-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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