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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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공국은 1817년 제2차 세르비아 봉기의 결과로 성립된 자치 공국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 1830년 완전 자치를 인정받고 오브레노비치 왕조의 세습 공국이 되었으며, 1833년에는 영토를 확장했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의 중앙 집권화 시도는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고, 1838년 헌법 공포 이후 왕조 교체와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의 집권기를 거쳤다. 1844년 '나체르타니예' 문서가 작성되어 대세르비아주의 기원이 되었고, 1858년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가 복위했다.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는 군비 증강과 외교를 통해 세력 확장을 시도했으나 암살되었고, 1868년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가 즉위하여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를 지원했다. 1878년 베를린 회의를 통해 독립을 인정받고 영토를 확장했으며, 1882년 세르비아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공국 초창기 인구는 세르비아인이 대다수였으며, 1866년 인구 조사에서 정교회가 압도적인 종교적 비중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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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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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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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세르비아 공국 |
공식 명칭 | '' (세르비아어) |
다른 표기 | '', '' (세르비아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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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일어나라 세르비아여 (세르비아어) |
공용어 | 세르비아어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국교) |
수도 | 베오그라드 (1841년–1882년), 크라구예바츠 (1818년–1841년), 고르냐 츠르누차 (1815년–1818년) |
데모님 | 세르비아인 |
현재 국가 | 세르비아 |
정치 | |
정치 체제 | 절대군주제 (1815년–1838년), 단일 의회 입헌군주제 (1838년–1882년) |
군주 (공작) | 미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 (1817년–1839년, 첫 번째)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 (1868년–1882년, 마지막) |
총리 | 페타르 니콜라예비치 (1815년–1816년, 첫 번째) 밀란 피로차나츠 (1880년–1882년, 마지막) |
입법부 | 없음 (법령에 의한 통치) (1815년–1838년), 국회 (1838년–1882년) |
역사 | |
건국 | 1815년 |
멸망 | 1882년 |
주요 사건 |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 획득 (1817년 11월 6일) 세르비아 공의 세습 인정 (1830년) 사실상 독립 (1867년) 베오그라드로 수도 이전 (1838년) 베를린 조약으로 완전 독립 (1878년 7월 13일) 왕정으로 이행 (1882년 3월 6일) |
이전 국가 | 스메데레보 산자크 혁명 세르비아 |
다음 국가 | 세르비아 왕국 |
인구 및 면적 | |
면적 | 24,440 km² (1815년) 37,511 km² (1834년) |
인구 | 322,500명–342,000명 (1815년) 702,000명 (1834년) 1,353,000명 (1874년) |
기타 정보 | |
통화 | 세르비아 디나르 |
2. 역사적 배경
세르비아 혁명의 지도자인 카라조르제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시키고자 노력했다. 1830년 하티셰리프에 의해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 공국을 인정했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 공국의 세습 공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자치주였지만, 세르비아 영토 내에 주둔한 터키 군대와 이스탄불에 바쳐야 하는 조공으로 인해 자치권에 제약이 있었다.[3]
처음에 공국은 벨그라드 파샤령의 영토만 포함했지만, 1831년부터 1833년까지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867년 오스만 정부는 오스만 주둔군의 철수를 명령했고, 세르비아는 사실상 독립하게 되었다.[3] 1869년 새로운 헌법은 세르비아를 독립국으로 정의했다. 1878년 베를린 조약 (1878)에서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완전히 인정받고 영토를 남동쪽으로 더욱 확장했다. 세르비아 공국은 1882년 세르비아 왕국으로 승격될 때까지 존속했다.
2. 1. 제1차, 제2차 세르비아 봉기 (1804년 ~ 1817년)
카라조르제를 지도자로 하는 제1차 세르비아 봉기(1804년~1813년)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종결로 실패하고, 일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부활했다. 이후 1815년에 돼지 상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지도자로 하는 제2차 세르비아 봉기가 일어났다.[3] 제2차 세르비아 봉기의 결과, 1817년에 밀로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의 공 지위를 인정받고, '''세르비아 공국'''이 성립한다.[3] 이 시점의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과거 베오그라드 현(슈마디야 지방)을 그 영역으로 하였다.[3]2. 2. 자치 공국 시대 (1817년 ~ 1878년)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를 지도자로 하는 제2차 세르비아 봉기의 결과, 1817년에 밀로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의 공 지위를 인정받고, '''세르비아 공국'''이 성립하였다. 1830년 하티셰리프에 의해 세르비아는 완전 자치를 승인받았고,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의한 세르비아 공 지위의 세습도 인정받았다.[3] 또한 1833년에는 영토 확장이 인정되었고, 종주국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납이 정해졌다.

국내에서는 중앙 집권화를 목표로 하는 밀로시와, 종래의 마을 자치에 의한 분권적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을의 지도자(크네즈라고 불림) 등과의 대립이 격렬해지면서,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크네즈 등의 반밀로시파는 입헌 정치의 도입을 요구하며, 헌법에 의한 공의 권력 제한과 분권 유지를 목표로 했다.
밀로시는 헌법 제정에 계속 저항했지만, 1838년에 헌법이 오스만 제국의 칙령 형태로 공포되자, 이듬해 밀로시는 퇴위를 강요당하고, 아들 밀란 오브레노비치 2세에게 양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밀란이 죽었기 때문에, 후계자를 중앙 집권파가 지지하는 오브레노비치 왕조에서 내세울 것인지, 분권파가 지지하는 카라조르제비치 왕조에서 내세울 것인지를 두고 다시 혼란이 일어났다. 한때 밀란의 동생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가 세르비아 공이 되었지만, 1842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의 아들인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세르비아 공이 되었다.
알렉산다르를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1838년 헌법의 수호를 내걸었기 때문에 '호헌당'이라고 불렸다. 호헌당에 의한 정치 아래서, 세르비아에는 안정이 찾아오고, 근대적 국가 제도의 정비가 진행되었다. 국립은행 설립이나 민법 도입 등이 이루어지고, 관료제와 근대적인 학교 제도도 정비되었다. 근대적인 학교를 졸업하고 관료가 된 사람들은 종래의 정치 담당자였던 지방의 명망가를 대체하는 새로운 엘리트가 되고, 자유주의적인 지향을 가진 그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44년에는 외무대신 일리아 가라샤닌에 의해 '나체르타니예'라고 불리는 비밀 문서가 작성되었다. '나체르타니예'는 가까운 장래에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다고 가정한 위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으면서, 중세의 세르비아 왕국의 영역을 기반으로 한 세르비아인의 일대 독립 국가를, 세르비아 공국이 스스로 건설하려고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후 세르비아 외교의 지침이 된 '나체르타니예'에서 제시되고 있는 정치 사상은 대세르비아주의라고 불리며, 가톨릭을 신앙하는 크로아티아인이나 무슬림인 보스니아인과 같이 종교는 다르지만 언어를 거의 같이하는 모든 남슬라브인 커뮤니티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사상으로 발전해 갔다.
분권파에 의해 공위에 취임한 알렉산다르는 점차 중앙 집권화를 지향하게 되고, 다시 지방의 분권파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1858년에 의회가 소집되자, 이전과는 달리 분권파는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집결하고, 알렉산다르의 폐위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복위가 결정되었다. 1860년에는 밀로시의 뒤를 이어, 미하일로가 다시 세르비아 공이 된다. 분권파의 지지 아래 다시 공위를 얻은 오브레노비치 왕조였지만, 미하일로는 실제로는 전제적인 중앙 집권화를 진행해 갔다.
미하일로는 장래의 완전 독립을 예상한 군비 증강을 도모하는 동시에, 대오스만 제국전을 의식하여 1866년에 몬테네그로와, 후에는 그리스와도 동맹을 맺은 외에, 루마니아와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1867년에는 세르비아 영내에 주둔하고 있던 마지막 오스만 군대 부대를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3] 그 외에도 불가리아인의 독립 운동에 대한 지원이나, 크로아티아의 민족 정당과의 접촉 등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강권적인 정치 자세에 대한 반감이 쌓이고, 1868년에 미하일로는 암살되었다.
미하일로가 암살됨에 따라, 미하일로의 사촌의 아들에 해당하는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가 새로운 세르비아 공이 되었다. 이듬해 1869년, 자유주의파의 Jovan Ristić|요반 리스티치영어를 중심으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어, 이에 따라 입법권을 가진 일원제의 의회가 매년 소집되게 되었다. 새로운 헌법에서 의회 정치의 틀이 정해진 것은, 근대적인 정당의 탄생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고, 보수파와 자유주의파의 대립 구도가 더욱 명확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2. 3. 독립 공국 시대 (1878년 ~ 1882년)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가 일어나자 세르비아는 자금 등을 지원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의 개전을 둘러싸고 국내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개전에 소극적인 공(公)과 보수파에 대하여 자유주의파는 적극적으로 개전을 주장했다.[3] 결국 자유주의파가 주도권을 잡고 1876년 오스만 제국과 개전했으나, 전력 차이가 커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개입하여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자유주의파 내각 하에서 다시 개전했다. 결과적으로 승전국이 되어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루마니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영토 확장을 인정받았다.그러나 이 조약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반발을 사서 취소되었다. 1878년 수정을 위해 베를린 회의가 열렸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3국은 다시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베를린 조약).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니슈 등을 추가로 얻었다.[3]
베를린 회의 결과, 세르비아에 인접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점령하에 놓였지만, 러시아의 비협조로 인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접근하게 되었다.[3]
3. 정치
세르비아 공국은 1830년 하티셰리프에 의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 공국의 세습 공(knjaz)이 되었다.[3] 세르비아는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자치주였지만, 터키 군대의 주둔과 이스탄불에 대한 연간 2300000그로센의 조공으로 인해 자치권에 제약이 있었다.[3]
공국의 영토는 처음에는 벨그라드 파샤령의 영토만 포함했으나, 1831년부터 1833년까지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다음 조약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 아커만 조약(1826년 10월 7일):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 조약으로, 세르비아의 자치와 1813년 몰수되었던 영토의 반환, 세르비아인들에게 오스만 제국 내 이동의 자유를 부여했다. 1828년 마흐무트 2세에 의해 거부되었다.
- 1829년 하티셰리프
- 1830년 하티셰리프
- 1833년 하티셰리프
행정 구역은 오크루그(Okrug)로 알려진 17개의 구로 나뉘었고, 각 구는 스레스(Sres)로 알려진 여러 개의 군으로 나뉘었다. 공국에는 총 66개의 스레스(Sres)가 있었다.
3. 1. 헌법
1835년 세르비아 헌법이 발효되었다.[1] 1838년 세르비아 헌법은 1838년부터 1869년까지, 1869년 세르비아 헌법은 1869년부터 1888년까지 발효되었다.[2][3]3. 2. 자치권
세르비아 혁명 지도자 — 카라조르제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는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시키는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1830년 하티셰리프에 의해 오스만 당국은 세르비아 공국을 인정했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 공국의 세습 공(knjaz)이 되었습니다. 세르비아는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자치주였지만, 그 자치권은 세르비아 영토 내에 주둔한 터키 군대의 존재와 이스탄불에 연간 2300000그로센의 조공을 바쳐야 하는 것에 의해 제약되었습니다.[3]처음에 공국은 이전 벨그라드 파샤령의 영토만 포함했지만, 1831년부터 1833년까지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습니다.
- 아커만 조약(1826년 10월 7일):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 조약으로, 제5조에서 세르비아의 자치와 1813년 몰수되었던 영토의 반환을 명시하였으며, 세르비아인들에게 오스만 제국 내 이동의 자유도 부여하였다. 1828년 마흐무트 2세에 의해 거부되었다.
- 1829년 하티셰리프
- 1830년 하티셰리프
- 1833년 하티셰리프
3. 3. 행정 구역
공국은 Okrug|오크루그sr로 알려진 17개의 구로 나뉘었고, 그 구들은 구의 크기에 따라 Sres|스레스sr로 알려진 여러 개의 군으로 나뉘었다. 공국에는 총 66개의 Sres|스레스sr가 있었다.3. 4. 군사
세르비아 공국군(Armed Forces of the Principality of Serbia)은 세르비아 공국의 군사력이었다. 1830년에 창설된 상비군으로서 1876년~1878년 세르비아-오스만 전쟁에 참전했고, 이 전쟁 이후 세르비아가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세르비아 공국군은 세르비아 왕국군으로 계승되었다.[1]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가 일어나자 세르비아는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의 개전을 둘러싸고 국내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개전에 소극적인 공(公)과 보수파에 대하여 자유주의파는 적극적으로 개전을 주장했다. 결국 자유주의파가 주도권을 잡고 1876년 오스만 제국과 개전했으나, 전력 차이가 커 휴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개입하여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자유주의파 내각 하에서 다시 개전했다. 결과적으로 세르비아는 승전국이 되어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루마니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영토 확장을 인정받았다.[1]
하지만 이 조약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반발로 취소되었다. 1878년 조약 수정을 위해 베를린 회의가 열렸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3개국은 다시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베를린 조약).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니슈 등을 추가로 획득했다.[1]
4. 통치자
초상화 | 이름 | 출생 | 사망 | 재위 시작 | 재위 종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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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 | 1780년 3월 17일 | 1860년 9월 26일 | 1817년 11월 6일 | 1839년 6월 25일 | |
![]() | 밀란 오브레노비치 2세 | 1819년 10월 21일 | 1839년 7월 8일 | 1839년 6월 25일 | 1839년 7월 8일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의 아들 |
![]() |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 1823년 9월 16일 | 1868년 6월 10일 | 1839년 7월 8일 | 1842년 9월 14일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의 아들 |
![]() |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 1806년 10월 11일 | 1885년 5월 3일 | 1842년 9월 14일 | 1858년 12월 23일 | |
--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 | 1780년 3월 17일 | 1860년 9월 26일 | 1858년 12월 23일 | 1860년 9월 26일 | |
-- |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 1823년 9월 16일 | 1868년 6월 10일 | 1860년 9월 26일 | 1868년 6월 10일 | |
![]() |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 | 1854년 8월 22일 | 1901년 2월 11일 | 1868년 6월 10일 | 1882년 3월 6일 |
4. 1. 오브레노비치 가문
세르비아 공국은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공의 통치 기간을 제외하고는 오브레노비치 가문이 통치하였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와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는 각각 두 번씩 통치하였다.초상화 | 이름 | 출생 | 사망 | 재위 시작 | 재위 종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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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 | 1780년 3월 17일 | 1860년 9월 26일 | 1817년 11월 6일 | 1839년 6월 25일 | align="center"| | |
밀란 오브레노비치 2세 | 1819년 10월 21일 | 1839년 7월 8일 | 1839년 6월 25일 | 1839년 7월 8일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의 아들 | |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 1823년 9월 16일 | 1868년 6월 10일 | 1839년 7월 8일 | 1842년 9월 14일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의 아들 | |
-- | 밀로시 오브레노비치 1세 | 1780년 3월 17일 | 1860년 9월 26일 | 1858년 12월 23일 | 1860년 9월 26일 | align="center"| |
-- |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 | 1823년 9월 16일 | 1868년 6월 10일 | 1860년 9월 26일 | 1868년 6월 10일 | align="center"| |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 | 1854년 8월 22일 | 1901년 2월 11일 | 1868년 6월 10일 | 1882년 3월 6일 | align="center"| |
1815년, 돼지 상인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를 지도자로 하는 제2차 세르비아 봉기가 일어나, 1817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 공 지위를 인정받았다.[1] 1830년에는 완전 자치를 승인받고,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의한 세르비아 공 지위의 세습도 인정받았다.[1] 그러나 국내에서는 중앙 집권화를 추구하는 밀로시와 분권적 체제를 유지하려는 지도자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1]
1838년 헌법이 오스만 제국의 칙령 형태로 공포되자, 밀로시는 퇴위를 강요당하고 아들 밀란 오브레노비치 2세에게 양위했다.[1] 밀란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3세가 세르비아 공이 되었지만, 1842년 쿠데타로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에게 공위를 빼앗겼다.[1]
1858년 의회가 소집되자, 분권파는 오브레노비치 왕조에 집결하여 알렉산다르의 폐위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복위를 결정했다.[1] 1860년 밀로시의 뒤를 이어 미하일로가 다시 세르비아 공이 되었다.[1] 미하일로는 전제적인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는 한편, 1866년 몬테네그로, 그리스와 동맹을 맺고, 루마니아와 우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1] 1867년에는 세르비아 영내에 주둔하던 마지막 오스만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1] 그러나 1868년, 미하일로는 암살되었다.[1]
미하일로 암살 후,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가 세르비아 공이 되었다.[1]
4. 2.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는 1842년부터 1858년까지 세르비아 공국을 통치한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출신 공이다. 오브레노비치 왕조가 아닌 카라조르제비치 가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세르비아 공국의 통치자였다.초상화 | 이름 | 출생 | 사망 | 재위 시작 | 재위 종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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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다르 카라조르제비치 | 1806년 10월 11일 | 1885년 5월 3일 | 1842년 9월 14일 | 1858년 12월 23일 |
5. 인구
세르비아 인구의 역사에 따르면, 세르비아 공국의 인구는 1834년 678,192명에서 1878년 1,669,337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연도 | 인구 |
---|---|
1834 | 678,192 |
1841 | 828,895 |
1843 | 859,545 |
1846 | 915,080 |
1850 | 956,893 |
1854 | 998,919 |
1859 | 1,078,281 |
1863 | 1,108,668 |
1866 | 1,216,219 |
1878 | 1,669,337 |
5. 1. 민족 구성
공국 초창기 인구는 약 87%가 세르비아인이었고 13%는 비세르비아인이었다. 비세르비아인 중 대부분은 블라흐인이었고, 일부 무슬림 알바니아인도 있었는데, 이들은 스메데레보, 클라도보, 추프리야에 거주하는 무슬림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새로운 국가는 인구를 동질화하려고 했다. 그 결과, 1830년부터 1870년대 전쟁(알바니아인들이 추방된 전쟁)까지, 세르비아 공국의 영토에 살던 최대 15만 명의 알바니아인이 추방된 것으로 추산된다.[4] 1862년에는 1만 명 이상의 무슬림이 오스만 불가리아와 오스만 보스니아로 추방되었다.[5] 1876년–1878년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중에는 무슬림 인구가 니시 산자크에서 추방되었다.명칭 | 1866년 인구 조사 | 인구 비율 |
---|---|---|
민족 | ||
세르비아인 | 1,057,540 | 87% |
블라흐인(루마니아인) | 127,326 | 10.5% |
로마인(집시) | 25,171 | 2.1% |
기타 | 5,539 | 0.5% |
종교 | ||
정교회 | 1,205,898 | 99.20% |
이슬람교 | 6,498 | 0.54% |
가톨릭교회 | 4,161 | 0.31% |
기타 | 0.2% |
5. 2. 종교
공국 초창기에는 인구의 대다수가 정교회 신자였으며, 이슬람교와 가톨릭교회 신자도 일부 존재했다. 1830년부터 1870년대 전쟁( 알바니아인들이 추방된 전쟁)까지, 세르비아 공국 영토에 살던 최대 15만 명의 알바니아인이 추방되었고[4], 1862년에는 1만 명 이상의 무슬림이 오스만 불가리아와 오스만 보스니아로 추방되었다.[5] 1876년–1878년 세르비아-오스만 전쟁 중에는 무슬림 인구가 니시 산자크에서 추방되었다.
6. 외교 관계
세르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세르비아는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카라조르제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의 지도 하에 독립 투쟁을 벌였고, 1830년 하티셰리프에 의해 자치 공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고, 오스만 군대가 주둔하고 조공을 바쳐야 했다. 1867년 오스만 군대가 철수하면서 사실상 독립했고, 1878년 베를린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 세르비아는 헤르체고비나 봉기를 지원하는 등 러시아와 협력했다. 러시아는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에 개입하여 세르비아 독립을 도왔다. 그러나 베를린 회의 이후 러시아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관계로 기울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 베를린 회의 결과,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점령하에 놓이면서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882년 세르비아 왕국으로 승격하는 과정에서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승인을 받았다.
기타 발칸 국가들과의 관계: 세르비아는 제1차 발칸 동맹을 구축하는 등 다른 발칸 국가들과 협력 관계를 모색했다. 산스테파노 조약에서는 루마니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고, 베를린 조약에서도 이들 국가와 함께 독립국 지위를 재확인받았다.
6. 1.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세르비아 혁명의 지도자인 카라조르제와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수 세기 동안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부터 세르비아를 해방시키는 목표를 달성했다. 1830년 하티셰리프에 의해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 공국을 인정했고, 밀로시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 공국의 세습 공(knjaz)이 되었다. 세르비아는 법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자치령이었지만, 세르비아 영토 내에 주둔한 오스만 군대와 이스탄불에 매년 2300000그로센의 조공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자치권에 제약이 있었다.[3]처음에 공국은 이전 벨그라드 파샤령의 영토만 포함했지만, 1831년부터 1833년까지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866년 세르비아는 다른 발칸 국가들과 일련의 협정을 체결하여 제1차 발칸 동맹을 구축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1867년 4월 18일 오스만 정부는 1826년 이후 세르비아에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을 상징했던 마지막 존재인 오스만 주둔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유일한 조건은 오스만 국기가 세르비아 국기와 함께 요새 위에 계속 게양되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의 사실상 독립은 이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3] 1869년 새로운 헌법은 세르비아를 독립국으로 정의했다. 세르비아는 1878년에 베를린 조약에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완전히 인정되면서 남동쪽으로 더욱 확장되었다. 공국은 1882년 세르비아 왕국으로 승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가 일어나자 세르비아는 자금 지원 등을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둘러싸고 국내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전쟁에 소극적인 공(公)과 보수파에 대하여 자유주의파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자유주의파가 주도권을 잡고 1876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전력 차이가 커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개입하여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자유주의파 내각 하에서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승전국이 되어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루마니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영토 확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조약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반발을 사서 취소되었다. 1878년, 수정을 위해 베를린 회의가 열렸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3국은 다시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베를린 조약).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니슈 등을 추가로 얻었다.
베를린 회의의 결과, 세르비아에 인접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점령하에 놓였지만, 러시아의 비협조로 인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접근하게 된다.
188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승인 하에 군주제로 이행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되었다.
6. 2.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 당시 세르비아는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두고 국내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개전에 소극적인 공(公)과 보수파에 대해 자유주의파는 적극적으로 개전을 주장했다. 결국 자유주의파가 주도하여 1876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전력 차이로 휴전해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개입하여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이 발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자유주의파 내각 하에서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승전국이 되어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루마니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영토 확장을 인정받았다.그러나 이 조약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반발로 취소되었다. 1878년, 수정을 위해 베를린 회의가 열렸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3공국은 다시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베를린 조약).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니슈 등을 추가로 획득했다.
베를린 회의 결과, 세르비아에 인접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점령하에 놓였다. 러시아의 비협조로 인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접근하게 되었다. 188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승인 하에 군주제로 이행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되었다.
6.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관계
1878년 베를린 회의 결과, 세르비아에 인접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점령하에 놓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비협조로 인해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접근하게 된다.[1] 1882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승인 하에 군주제로 이행하여 '''세르비아 왕국'''이 되었다.[1]6. 4. 기타 발칸 국가들과의 관계
1875년 헤르체고비나 봉기가 일어나자 세르비아는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둘러싸고 국내 정치적 대립이 발생했다. 전쟁에 소극적인 공(公)과 보수파에 대하여 자유주의파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장했다. 결국 자유주의파가 주도권을 잡고 1876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전력 차이가 커 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개입하여 러시아-튀르키예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자유주의파 내각 하에서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승전국이 되어 산스테파노 조약에서 루마니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과 영토 확장을 인정받았다.[1]그러나 이 조약은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강력한 반발을 사서 취소되었다. 1878년, 수정을 위해 베를린 회의가 열렸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3공국은 다시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베를린 조약).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니슈 등을 추가로 얻었다.[1]
참조
[1]
서적
The Balkan Economies C.1800-1914: Evolution Without Development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Why Narratives of History Matter: Serbian and Croatian Political Discourses on European Integration
https://books.google[...]
Nomos Verlag
2020-03-27
[3]
서적
History of the Ottoman Empire and Modern Turkey, Volume 2: Reform, Revolution and Republic—The Rise of Modern Turkey, 1808–1975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Nation Failure, Ethnic Elites, and Balance of Power: The International Administration of Kosova
https://books.google[...]
Springer
2020-03-27
[5]
학술지
The Expulsion of Muslims from Serbia after the International Conference in Kanlıca and Withdrawal of the Ottoman Empire from Serbia (1862-1867)
https://dergipark.or[...]
[6]
서적
The Balkan Economies C.1800-1914: Evolution Without Develop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7]
서적
The Balkan Economies C.1800-1914: Evolution Without Development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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