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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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랑은 사마방의 장남이자 사마의의 형으로, 사마팔달 중 한 명이다. 동탁이 낙양을 점령했을 때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다 동탁에게 잡혔으나 뇌물을 주고 풀려났다. 이후 조조에게 초빙되어 사공연속, 성고현령, 연주자사 등을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217년 오나라 정벌 중 역병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아들 사마유가 창무정후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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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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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사마랑 |
원어 이름 | 司馬朗 |
자 | 백달(伯達) |
출생 | 171년 |
사망 | 217년 (향년 46세) |
출생지 | 원현 |
사망지 | 거소구 |
관직 경력 | |
원성령 | 원성현의 현령 |
당양장 | 당양현의 장 |
성고령 | 202년, 성고현의 현령 |
승상주부 | 208년, 조조의 승상부의 주부 |
연주자사 | 연주의 자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사마방 |
형제 | 사마의 사마부 |
사촌 | 사마지 |
자녀 | 사마의 사마망 (양자) |
2. 생애
사마방(司馬防)의 장남이자 사마의(司馬懿)의 형으로, 사마팔달 중 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일화와 동탁의 난, 조조 휘하에서의 관직 생활과 오나라 정벌 중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면 된다.
2. 1. 어린 시절과 동탁의 난
사마방(司馬防)의 장남이자 사마의(司馬懿)의 형으로, 사마팔달 중 한 사람이다.190년(흥평 원년), 반동탁연합군이 일어나자 동탁은 수도를 장안으로 옮기고 자신은 낙양에 남았다. 아버지 사마방은 치서어사였으므로 서쪽으로 옮겨야 했는데, 사마랑에게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사마랑이 도주하려 한다는 밀고가 있어 잡혀 동탁에게 보내졌다. 동탁은 사마랑에게 "그대는 몇 년 전에 죽은 내 아들과 동갑이다. 어째서 나를 버리려는 것이냐?"라고 물었다. 사마랑은 "지금 세상은 혼란에 극에 달해 있습니다. 저도 고향도 이대로라면 퇴폐할 우려가 있고, 곧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죽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동탁도 당당한 태도를 보인 사마랑을 높이 평가했다.
사마랑은 동탁이 망하리라고 여겼으므로, 억류될까 두려워 뇌물을 주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마랑은 반동탁연합군의 진격이 저지되면 하내군에 주둔하여 이 땅이 큰 피해를 입게 되리라고 여기고 마을 부로들에게 여양으로 옮기기를 건의했으나, 부로들은 따르지 않고 오직 조자만이 사마랑을 따라 여양으로 옮겼다. 이후 반동탁연합군은 하내와 형양으로 모여들어, 사마랑이 예측한 바와 같이 되었다. 연합군이 해산된 후, 사마랑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엄격한 아버지 사마방에게 엄하게 자랐다. 9살 때, 아버지의 친구가 아버지의 자를 불렀기 때문에 사마랑은 "남의 집 부모를 함부로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부모도 경시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아버지의 친구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12세 때 경전 암송에서 훌륭하게 급제하여 동자랑이 되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대는 12살 치고는 몸집이 상당히 큰데, 진짜 12살이 아닌 거 아니오?"라고 따져 물었다. 그는 "저희 집안은 대대로 체격이 큰 집안이고, 저는 젊은 사람이지만, 본래 출세할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명확하게 대답했다.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동
사마방(司馬防)의 장남이자 사마의(司馬懿)의 형으로, 사마팔달 중 한 사람이다.192년 22세 때(사망년에서 역산, 조조가 사공이 된 해는 196년이라 서로 상충됨) 조조에게 초빙되어 사공연속이 되었고, 이후 성고현령, 당양현장, 원성현령, 승상주부를 역임했다. 사마랑은 현세의 혼란이 옛 주나라 제도를 버린 데 있다고 보고, 지방 주와 군에서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정전제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전제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주와 군이 병사를 거느리는 것은 시행되었으며 사마랑 자신도 군무를 수행했다.[1]
연주자사가 되어 치적을 쌓아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217년, 하후돈, 장패 등과 함께 오를 정벌하러 갔다. 거소(居巢)에서 군사들 사이에 역병이 크게 퍼지자, 사마랑은 친히 순시하고 의약품을 보냈으나, 갑자기 병에 걸려 47세로 사망했다. 임종 시 베옷과 비단 두건으로 계절에 맞는 상복을 입히도록 명했다.[1]
왕릉과 친교가 있었으며, 왕릉은 나중에 연주자사가 되어 사마랑의 업적을 이었다.[1]
어느 날 최염은 "그대의 재능은 동생 사마의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사마랑에게 말했지만, 사마랑은 최염의 말에 전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웃으며 동의하고, 동생 사마의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1]
217년 손권 정벌에 종군했다가 역병으로 병사들에게 약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자신은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했다. 향년 47세. 그의 부고를 들은 연주의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1]
후에 사마의는 세상을 떠난 형을 생각하며 "나는 인격자로서 세상을 떠난 형에게 미치지 못했다."라고 회고했다고 한다.[1]
2. 3. 오나라 정벌과 죽음
217년, 하후돈, 장패 등과 함께 오나라 정벌에 종군했다.[1] 거소에 도착했을 때, 군사들 사이에서 역병이 크게 퍼져 사마랑은 친히 순시하고 의약품을 보냈다.[1] 그러나 사마랑은 병에 걸려 향년 47세로 사망했다.[1] 그는 임종하면서 베옷과 비단 두건으로 계절에 맞는 상복을 입히도록 명했다.[1]왕릉과 친교가 있었으며, 왕릉은 나중에 연주자사가 되어 사마랑의 업적을 이었다.[1]
사마랑의 부고를 들은 연주의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1] 훗날 사마의는 세상을 떠난 형을 생각하며 "나는 인격자로서 세상을 떠난 형에게 미치지 못했다."라고 회고했다고 한다.[1]
3. 사후
조예 치세 때 사마랑의 아들 사마유(司馬遺)를 창무정후(昌武亭侯)로 봉하고 식읍 1백 호를 주었다. 사마랑의 동생 사마부(司馬孚)는 또 아들 사마망(司馬望)으로 사마랑의 뒤를 잇게 했고, 사마유가 죽자 사마망의 아들 사마홍(司馬洪)이 뒤를 이었다.
217년 하후돈을 따라 장패 등과 함께 손권 정벌에 종군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역병으로 인한 감기가 유행하여, 사마랑을 포함한 많은 병사들이 감기에 걸렸다. 사마랑은 병사들에게 약을 모두 나누어 주고 자신은 마시지 않아 병사했다. 향년 47세. 그의 부고를 들은 연주의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후에 사마의는 세상을 떠난 형을 생각하며 "나는 인격자로서 세상을 떠난 형에게 미치지 못했다."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4. 평가
사마랑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관직 생활 동안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쳐 칭송받았다. 또한 겸손한 성품으로 동생 사마의의 재능을 인정하고, 자신의 목숨보다 병사들을 먼저 생각하는 등 훌륭한 인품을 지녔다. 하지만, 그의 업적과 관련된 기록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존재한다.
조조가 사공에 임명된 시기와 사마랑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다. 조조는 196년에 사공이 되었는데, 사마랑의 사망 연도에서 역산하면 26세가 되어야 한다. 기록의 실수인지, 아니면 사마랑이 나이를 속였는지 불분명하다.[1]
4. 1. 긍정적 평가
사마랑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총명한 인물로 묘사된다. 9살 때 아버지 사마방의 친구가 아버지의 자를 함부로 부르자 예의를 갖춰 지적했고, 12살에는 경전 암송 시험에 급제하여 동자랑이 되었으나, 나이를 의심받자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1]190년 동탁이 낙양을 점령했을 때, 동탁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를 당당하게 밝혀 동탁에게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동탁의 멸망을 예견하고 뇌물을 써서 고향으로 도망쳤다.[1]
조조에게 발탁되어 여러 지방 관직을 역임하며 백성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펼쳐 칭송받았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돌아와 승상주부가 되었고, 이후 연주자사가 되어 뛰어난 내정 수완을 발휘했다.[1]
최염이 동생 사마의의 재능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음에도, 사마랑은 기분 나빠하지 않고 동생의 재능을 인정했다.[1]
217년 하후돈을 따라 손권 정벌에 참여했으나, 역병에 걸린 병사들에게 약을 모두 나눠주고 자신은 마시지 않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애도했다.[1]
훗날 사마의는 형 사마랑을 회고하며 자신의 인격이 형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1]
4. 2. 종합적 평가
사마랑은 엄격한 아버지 사마방 밑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남다른 언행을 보였다. 9살 때 아버지의 친구가 아버지의 자를 함부로 부르자, 예의에 어긋남을 지적하여 부끄럽게 만들었다.[1] 12세에는 경전 암송 시험에 급제하여 동자랑이 되었으나, 나이에 대한 의심을 받자 집안 내력을 언급하며 출세에 뜻이 없음을 밝혔다.190년 동탁이 낙양을 점령했을 때, 사마랑은 동탁에게 붙잡혔으나 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뜻을 밝혀 동탁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동탁의 멸망을 예견하고 뇌물을 써서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도망쳤다.
22세에 조조에게 발탁되어 여러 지방 관직을 역임하며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칭송받았다. 최염이 동생 사마의보다 재능이 부족하다고 평했음에도, 동생의 재능을 인정하며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217년 하후돈을 따라 손권 정벌에 참여했으나, 역병에 걸린 병사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자신은 치료받지 못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으며, 훗날 사마의는 형의 인격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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