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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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예는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옹노현(현재 톈진시 우칭구) 출신이다. 유비, 공손찬, 조조 등을 섬기며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특히 북방 이민족을 상대로 분할 통치 전술을 펼쳐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조창의 오환 토벌, 손권의 합비 공격 방어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청렴한 생활과 뛰어난 계략으로 평가받았다. 82세에 사망했으며, 사후에는 아들 전팽조가 작위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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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년 출생 - 서간
서간은 후한 말기 건안칠자 중 한 명으로,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며 조조를 섬기며 관직 생활을 하고 유학에 기반한 독자적인 사상을 담은 《중론》을 저술하여 당대 인물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 171년 출생 - 사마랑
후한 말기 ~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 사마랑은 사마방의 장남이자 사마의의 형으로, 동탁에게 발탁되었으나 그의 멸망을 예감하고 벗어나 조조에게 중용되어 지방관을 역임하며 선정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217년 오나라 정벌에 참여했다가 역병을 다스리려다 병에 걸려 사망했다. - 252년 사망 - 두서
두서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학자로, 두기의 아들이며 풍락정후 작위를 받았고, 유주자사, 건위장군, 산기황문시랑 등을 역임했으나, 정희와의 갈등으로 탄핵받아 평민으로 강등된 후 유배지에서 저술 활동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 - 252년 사망 - 응거
응거는 위나라의 관료이자 문장가로, 조비와 조예 시대에 산기상시를 지냈으며 조상의 전횡을 풍자하는 시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사후 위위로 추증된 인물이다. - 조조 휘하의 장군 - 유비
유비는 후한 말 평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여러 세력을 거치며 활동하다 제갈량을 영입하여 촉한을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으나, 이릉 전투 패배 후 병사하였다. - 조조 휘하의 장군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전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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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전예 |
한자 표기 | 田豫 |
자(字) | 국양(國讓) |
생몰 | |
출생 | 171년 |
사망 | 252년 (향년 81세) |
출신 배경 | |
출신지 | 유주 어양군 옹노현 |
관직 및 직위 | |
소속 세력 | 조위 |
최종 관직 | 태중대부(太中大夫) |
작위 | 장락정후(長樂亭侯) |
군사 직위 | 진위장군(振威將軍) |
기타 직위 | 호흉노중랑장(護匈奴中郎將) 병주자사(并州刺史) 탕이장군(殄夷將軍) 여남태수(汝南太守)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 위위(衛尉) |
가족 관계 | |
자녀 | 전팽조(田彭祖) 딸 1명 |
2. 생애
어양군(漁陽郡) 옹노현(雍奴縣) (현재 톈진시 우칭구) 출신이다.[1] 젊은 시절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했을 때 그를 따랐으며, 유비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2] 유비가 예주 자사가 되었을 때 어머니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유비는 이를 매우 안타까워했다.[3]
이후 공손찬 휘하에서 동주현령(東州縣令)을 지내며 원소에게 투항한 왕문(王門)의 공격을 설득으로 막아내는 기지를 보였으나,[5] 공손찬에게 중용되지는 못했다.[6] 공손찬 멸망 후에는 옛 친구 선우보를 설득하여 함께 조조에게 귀순했고,[8] 이후 조조 휘하에서 영음현령, 낭릉현령, 획양태수 등을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았다.[9]
조창을 따라 오환 토벌에 참여하여 계책으로 승리에 기여했으며, 남양 태수 시절에는 반란으로 어지러웠던 지역을 안정시켰다. 조비 시대에는 지절(持節)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가 되어 북방 이민족을 관리하며 분할 통치 전략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반항적인 오환족 추장 골진을 참살하고 산적 고애를 토벌하는 등의 공으로 장락정후(長樂亭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후 동료들과의 갈등과 참소로 인해 여남 태수로 좌천되기도 했다. 태화 연간(227년~233년) 말에는 공손연의 반란 토벌에 참여하여 오나라의 지원군을 격파했으나, 청주 자사 정희의 모함으로 공적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234년 합비신성 전투에서는 조예에게 신중론을 진언하여 손권의 오나라 군대를 물러나게 하는 데 기여했다.
정시 연간(240년~249년) 초에는 사용지절(使持節) 호흉노중랑장 겸 병주자사로 임명되어 다시 북방의 안정을 유지하며 명성을 떨쳤다. 말년에는 중앙으로 소환되어 위위에 임명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사임하고 태중대부가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위군에서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향년 82세로 사망했다. 사후 254년에 생전의 공적이 다시 평가되어 유족에게 포상이 내려졌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시기, 오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양양으로 향했다는 언급만 간략하게 등장한다.
2. 1. 어린 시절과 유비와의 만남
전예(田豫)는 어양군(漁陽郡) 옹노현(雍奴縣) (현재 톈진시 우칭구) 출신이다.[1]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을 무렵, 젊은 전예는 유비에게 몸을 맡겼고, 유비는 그를 깊이 눈여겨보며 높이 평가했다.[2] 초기에 유비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부터 그를 따랐다는 기록도 있으나,[12] 구체적인 행적은 공손찬 휘하에서 유비를 만난 시점부터 명확해진다.이후 유비가 도겸의 추천으로 예주 자사가 되었을 때, 전예는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3] 유비는 전예와의 헤어짐을 매우 아쉬워하며 "그대와 함께 큰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3]
2. 2. 공손찬 휘하에서의 활약
유비가 공손찬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어린 전예는 유비에게 몸을 맡겼고, 유비는 그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2][1] 유비가 예주 자사가 되자, 전예는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때 유비는 "그대와 함께 대업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라며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했다.[3]이후 전예는 공손찬을 섬겨 동주현(東州縣)의 현령을 대행했다.[12][11] 당시 공손찬의 부하였던 왕문(王門)이 공손찬을 배신하고 원소에게 투항한 뒤, 1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동주현을 공격해왔다.[4] 이때 전예는 성벽 위에서 왕문을 향해 꾸짖었다.
그대는 공손씨의 은혜를 입고도 떠났으나, 이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소. 그러나 다시 돌아와 공격하니, 한낱 배신자에 지나지 않음을 이제야 알았소. 본래 보잘것없는 지혜를 가진 자라도 자기 것을 지키며 쉽게 내주지 않는 법이며, 나는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소. 어찌 속히 공격하지 않는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왕문은 부끄러움을 느끼고 군대를 물렸다.[5] 공손찬은 전예의 지략과 능력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중용하지는 못했다.[6][11]
2. 3. 위나라의 장수가 되다
199년, 공손찬이 원소에게 멸망한 후, 전예의 옛 친구인 선우보가 어양 태수 대행이 되었다. 선우보는 누구에게 귀부해야 할지 망설였고, 당시 장사(長史)였던 전예에게 조언을 구했다. 전예는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권했고, 선우보는 이를 따라 조조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8] 이 일로 전예 역시 조조에게 발탁되어 승상 군모연(軍謀掾)이 되었다.[9] 이후 영음(潁陰)현과 낭릉(朗陵)현의 현령, 익양 태수를 역임하며 부임하는 곳마다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여 치적을 쌓았다.[9]218년, 조창의 상(相)으로 임명되어 대군의 오환 토벌에 종군했다. 역수(易水) 북쪽에서 오환족의 기습을 받아 조창군이 위기에 몰렸을 때, 전예는 전차를 이용해 원형 진을 만들어 적의 공격을 막고, 적이 물러나자 추격하여 크게 승리하는 계책을 세웠다. 대군이 평정된 것은 전예의 공이 컸다고 평가받는다.
이후 남양 태수로 임명되었다. 당시 남양군은 전임 태수 동리곤(東里袞)의 폭정으로 후음(侯音) 등이 반란을 일으켜 수천 명이 산적이 되고, 그 동료 500여 명이 감옥에 갇혀 있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전예는 감옥에 갇힌 자들을 설득하여 석방했고, 그의 은혜에 감동한 이들이 산적이 된 동료들을 설득하여 하루 만에 산적 무리가 해산되고 군의 안정을 되찾았다.
조비가 황제로 즉위한 후, 북방 이민족들이 국경을 자주 침범하자 전예는 지절(持節) 호오환교위(護烏丸校尉)에 임명되어 견초, 해준 등과 함께 선비족을 감독하며 북방 국경의 안정을 책임졌다. 그는 이민족들이 서로 연합하지 못하도록 분할 통치하는 전략을 구사했으며, 위나라에 우호적인 부족이 반항적인 부족에게 공격당하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구원했다. 또한, 위나라에 복종하지 않던 오환의 왕 골진(骨進)을 소수의 기병만 이끌고 찾아가 참살하여 북방에 그의 위세를 떨쳤다. 유주와 기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산적 고애(高艾)를 선비족의 도움을 받아 토벌한 공으로 장락정후(長樂亭侯)에 봉해졌다.
전예는 9년간 호오환교위 직책을 수행했으나, 그 기간 동안 영호우(令狐愚)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고, 유주 자사 왕웅 일파와의 갈등과 참언으로 인해 여남 태수 겸 진위장군으로 좌천되었다.
태화 연간(227년~233년) 말, 요동의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예는 중호군 양기의 추천을 받아들여 전예에게 태수 직위를 유지한 채 청주의 군대를 지휘하여 토벌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오나라가 공손연과 동맹을 맺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조예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전예는 오나라 군선의 예상 경로를 예측하여 요충지를 점거하고 기다렸다가 실제로 나타난 오나라 군선을 기습하여 많은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당시 청주 자사였던 정희(鄭袤)는 전예에게 군권을 빼앗긴 것에 불만을 품고 전예가 전리품을 국고에 제대로 납부하지 않았다고 모함하여 그의 공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234년, 손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신성을 공격했을 때, 만총은 즉시 구원군을 이끌고 출정하려 했다. 이때 전예는 조예에게 "적군이 성을 공격하여 지치기를 기다린 후에 대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도를 눈치채면 적은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라고 진언했고, 조예는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전예의 예측대로 오나라 군대는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퇴각했다.
경초 연간(237년~239년) 말에는 식읍 300호가 추가되어 총 500호가 되었다. 정시 연간(240년~249년) 초에는 사용지절(使持節) 호흉노중랑장에 임명되었고, 진위장군 직위가 더해졌으며 병주자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의 명성을 들은 주변 이민족들은 앞다투어 공물을 바쳤고, 덕분에 국경 지대는 평온을 유지하여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240년에는 흉노를 토벌하여 백성들이 그에게 감사했다고 전해진다.
말년에는 중앙으로 소환되어 위위에 임명되었으나, 고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임을 요청했다. 당시 실권자였던 사마의는 서신을 보내 만류했지만, 전예는 "나이가 70이 넘었는데 아직 관직에 있는 것은 죄스러운 일입니다"라고 답하며 병을 핑계로 거듭 사직 의사를 밝혔다. 결국 태중대부로 임명되어 명예직에 머물렀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위군에서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으며, 과거 부임지였던 여남 백성들이 보내온 지원마저 사양했다(『위략』).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 전팽조(田彭祖)가 그의 작위를 계승했다.
254년, 생전의 공적이 다시 인정되어 조정에서 그의 유족에게 재물과 곡식을 하사했다.
2. 4. 북방을 안정시키다
218년, 조창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오환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 공으로 남양 태수로 승진했다.조비가 즉위한 후 북방 민족들이 국경을 소란하게 하자, 전예는 지절 호오환교위로 임명되어 견초, 해준과 함께 선비족을 감독하며 북방 국경 안정에 힘썼다. 이때 오환족 추장 골진이 위나라에 복종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자, 전예는 직접 백여 기의 병력을 이끌고 골진의 부락으로 나아가 맞이하러 나온 골진을 참살하여 위세를 떨쳤다. 이 일로 전예의 명성은 북방에 널리 퍼졌다.
전예는 북방 민족을 다스리는 데 분할 통치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이민족 부족들이 서로 연합하지 못하도록 이간책을 쓰고, 항상 서로 다투게 만들었다. 위나라에 우호적인 부족이 반항적인 부족에게 공격받으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여 승리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통제했다. 또한, 유주와 기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산적 고애를 선비족의 협력을 얻어 참살하였고, 이 공으로 장락정후에 봉해졌다.
호오환교위로 9년간 재임하며 북방을 안정시켰으나, 그 과정에서 령호우에게 탄핵을 받기도 했으며(「왕릉전」 인용 『위서』), 유주 자사 왕웅 일파와의 대립으로 참소를 당해 결국 여남 태수 겸 진위장군으로 좌천되었다.
정시 연간 초에는 사용지절 호흉노중랑장으로 임명되었고, 진위장군 직함이 더해져 병주 자사를 겸임했다. 240년에는 흉노를 토벌하여 백성들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그의 위명을 들은 주변 이민족들은 앞다투어 공물을 바쳤고, 덕분에 국경 지대는 평온을 되찾아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3. 삼국지연의 속 전예
4. 평가
사생활이 검소하여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이민족이 바친 물건은 모두 국고에 넣었기에 가족들은 늘 가난하게 지냈다. 이러한 전예의 행실은 이민족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진수는 전예를 평가하기를, "청렴하게 처신하고 계략에 통달했으며, 능력에 비해 낮은 지위에 머물렀다"고 하였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Sanguozhi
[7]
서적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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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諱と字の一字を合わせると豫譲の姓名となる
[11]
서적
英雄記
[12]
문서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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