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사타의 파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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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3세기 안티오크의 주교로, 군주신론적 가르침과 부패 혐의로 비판받았다. 그는 교회의 부를 축적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으며, 269년 안티오크 종교회의에서 해임되었으나, 팔미라 여왕 제노비아의 지원으로 주교직을 유지했다. 272년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주교직을 포기했으며, 그의 가르침은 양자론의 초기 형태를 보였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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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사타의 파울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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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직책 | 안티오키아의 주교 |
임기 시작 | 260년 |
임기 종료 | 268년 |
개인 정보 | |
이름 | 파울로스 |
출생지 | 사모사타 |
사망 | 275년경 |
신학 사상 | |
주요 주장 | 양자론적 그리스도론 주장 |
2. 생애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사모사타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260년에 안티오크 주교로 선출되었고, 200인 관리(Procurator ducenarius)라는 민간 관직도 맡았다.[1]
그의 군주신론적 가르침은 교회에서 강한 반발을 샀고, 대규모 부패 혐의도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파울로스가 교회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교회 관할권을 매매했으며, 신자들에게 기부를 강탈하고, 공공 수입을 사적으로 썼다고 묘사했다. 그의 자만심과 사치는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혐오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269년, 안티오크 종교회의(Pre-Ecumenical synod)에서 70명의 주교, 사제, 부제가 파울로스를 주교직에서 해임하고 도미누스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교황 디오니시우스와 막시무스에게 보낸 회람 서한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보존되어 있다.[4]
종교회의는 성직자나 백성과 상의 없이 결정했기에 권위가 의문시되었고,[3] 파울로스는 팔미라 여왕 제노비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어,[5] 4년간 안티오크 주교직을 유지했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제노비아를 격파하며 보호를 잃자, 파울로스는 주교직을 포기해야 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판결은 "교회의 작은 평화" 시기에 발생했고, 교회 내부 분쟁에 황제가 개입한 첫 사례였다.[6]
2. 1. 초기 생애와 주교 선출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260년에 안티오크의 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민간 관직인 200인 관리(Procurator ducenarius)를 맡기도 했다.[1]그의 군주신론적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큰 반발을 샀으며, 부패 혐의도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은 파울로스가 교회의 봉사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교회 관할권을 매매하고, 신자들에게서 기부를 강탈하고, 공공 수입을 사적으로 유용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그의 자만심과 사치는 기독교를 이교도들에게 혐오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기번은 파울로스가 설교단에서 아시아 소피스트의 스타일을 흉내 냈으며, 대성당은 그의 웅변을 칭찬하는 과장된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고 묘사한다. 파울로스는 자신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칭찬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엄격했지만,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는 관대하여 그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도록 허용했다. 그는 식도락을 즐겼으며, 두 명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을 주교 궁에 동반자로 두었다고 한다.[2]
269년, 70명의 주교, 사제, 부제가 안티오크 종교회의를 열어 파울로스를 주교직에서 해임하고 도미누스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교황 디오니시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막시무스에게 회람 서한을 보냈는데, 이 서한은 파울로스에 관한 유일하게 논쟁의 여지가 없는 동시대 문서이며,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보존되어 있다.[4]
종교회의는 성직자나 백성과 상의 없이 행동했기 때문에 권위에 의문이 제기되었고,[3] 파울로스는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5] 4년 더 안티오크 주교의 집을 점유할 수 있었다. 272년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제노비아를 격파하면서 파울로스는 보호를 잃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파울로스에 대한 찬반 양측의 주장을 듣고 이탈리아와 로마 주교들의 판단에 따라 파울로스에게 주교직을 포기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아우렐리아누스의 판결은 교회가 중앙 정부의 제재 없이 번성했던 "교회의 작은 평화" 기간에 일어났으며, 교회 내부 분쟁에 황제가 개입한 첫 사례였다.[6]
2. 2. 논란과 갈등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군주신론적 가르침으로 교회 내에서 큰 반발을 샀다. 그는 부패 혐의도 받았는데, 에드워드 기번은 파울로스가 교회의 직위를 이용해 부를 축적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묘사했다. 기번은 파울로스가 공공 수입을 횡령하고, 신자들에게 기부를 강요했으며, 주교로서 겸손함보다는 민간 판사의 지위에 어울리는 행동을 했다고 비판했다.[2]269년, 안티오크에서 열린 안티오크 종교회의(Pre-Ecumenical synod)는 파울로스를 주교직에서 해임하고 도미누스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이 회의에는 70명의 주교, 사제, 부제가 참석했다.[4] 그러나 이 종교회의는 성직자나 백성과 상의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권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3] 파울로스는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비호 아래 4년 더 주교직을 유지했다.[5]
272년,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제노비아를 격파하면서 파울로스는 보호를 잃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파울로스 문제에 대한 판결을 이탈리아와 로마의 주교들에게 맡겼고, 그 결과 파울로스는 주교직을 포기해야 했다. 이 사건은 "교회의 작은 평화" 기간 동안 발생했으며, 교회 내부 분쟁에 황제가 개입한 첫 사례였다.[6]
2. 3. 안티오키아 공의회와 파면
260년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안티오크의 주교로 선출되었으나, 그의 군주신론적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큰 반발을 샀다. 또한 그는 부패 혐의를 받았는데,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파울로스는 교회의 직책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2]269년 70명의 주교, 사제, 부제가 안티오크 종교회의(Pre-Ecumenical synod)를 열어 파울로스를 주교직에서 해임하고 도미누스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교황 디오니시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교황 막시무스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이 서한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보존되어 있다.[4]
그러나 이 종교회의는 성직자나 백성과 상의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권위에 의문이 제기되었고,[3] 파울로스는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비호 아래 272년까지 주교직을 유지했다.[5]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제노비아를 격파한 후, 파울로스는 주교직을 잃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탈리아와 로마 주교들의 판단에 따라 파울로스에게 주교직을 포기하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교회의 작은 평화" 기간 동안 발생했으며, 교회의 내부 분쟁에 황제가 개입한 첫 사례였다.[6]
2. 4. 팔미라 제국과의 관계와 최후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는 제노비아 여왕이 통치하던 팔미라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5] 그는 안티오크 주교직을 유지하기 위해 제노비아의 보호를 받았다.269년, 70명의 주교, 사제 및 부제가 안티오크 종교회의(Pre-Ecumenical synod)를 열어 파울로스를 주교직에서 해임하고 도미누스를 후임으로 선출했다.[4] 그러나 파울로스는 제노비아와의 관계 덕분에 4년 더 안티오크 주교의 집을 점유할 수 있었다.[5]
272년 말,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제노비아를 격파하면서 파울로스는 보호를 잃게 되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파울로스 지지파와 반대파가 자신의 법정에서 주장을 펼치도록 허용했다.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아우렐리아누스는 질서 회복을 위해 이탈리아와 로마 주교들의 판단에 의존했고, 만장일치로 파울로스가 주교직을 포기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6]
아우렐리아누스의 판결은 교회가 중앙 정부의 제재 없이 번성했던 "교회의 작은 평화" 기간에 발생했다. 이는 교회 내부 분쟁에 황제의 개입을 구한 첫 사례였다.[6]
3. 가르침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파울로스가 공개적으로 보인 일부 교리와 관행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7][8][9][10][11]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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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봉사에 대한 돈을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리를 설교하도록 돈을 지불함. |
주교보다는 제노비아 여왕의 황제 검사관으로 불리기를 선호함. |
그리스도를 위한 시편 제작을 중단하고, 여성들을 훈련시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자신을 찬양하는 시편을 부르게 함. |
에우세비우스는 또한 파울로스가 "수비인트로덕테"라고 부른 자신의 여성 추종자들과 "너무 친밀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12][8]
3. 1. 군주신론과 양자론
바울의 가르침은 군주신론의 한 형태로서, 하느님의 유일성을 강조했다. 바울은 예수가 단순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신성한 로고스 즉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졌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이 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된 하느님으로 여겨졌다. 아나스타시우스에게 귀속된 이단 반박서에 단편만이 보존되어 있는 사비누스에게 보내는 그의 담론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자(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의 본성에 따라 고난을 받고, 은혜에 따라 기적을 행했다. 그의 성격의 확고함과 결단력으로 그는 자신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여겼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하느님과 연합하여 기적의 능력과 권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그는 의지 이상의, 동일한 활동(하느님과 함께)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고,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자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었다."
- "구세주는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으며, 투쟁과 고된 노력으로 우리 조상의 죄를 극복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었고, 그의 도덕적 탁월함으로 하느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선행의 길에서 발전함으로써 하느님과 의지와 에너지(즉, 활동)의 통일성과 동일성에 도달했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도록 보존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상속받았고, 은혜로 그에게 주어진 사랑과 애정의 상을 받았다."
- "우리는 단지 그들의 본성 때문에 복종하는 존재에게 칭찬을 수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태도가 사랑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존재에게 높은 칭찬을 수여한다. 그리고 영감을 주는 동기가 동일하기 때문에 복종하며, 그들은 동일한 내재적 힘에 의해 확고해지고 강화되며, 이 힘의 힘은 계속 증가하여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구세주가 하느님과 결합하여 그분과 분리될 수 없고, 모든 시대에 그분과 동일한 의지와 활동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의 덕분이었다. 이 활동은 선을 나타내는 데 끊임없이 작용한다."
- "구세주가 하느님과 하나의 뜻을 가진 것을 놀라지 마라. 자연이 많은 것의 실체를 하나로 존속하게 하듯이, 사랑의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통일성과 동일한 의지를 생성하며, 이는 동일한 승인과 기쁨으로 나타난다."
바울은 양자론의 초기 선구자였다. 아르메니아의 바울파가 그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로부터 그들의 이름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바울파는 양자론에 대한 옹호보다 영지주의와 성상파괴주의적 견해 때문에 더욱 심하게 박해받았다.
바울의 제자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는 아리우스 즉 아리우스파의 창시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3. 2. 사비누스에게 보낸 담론
사비누스에게 보낸 그의 담론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자(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의 본성에 따라 고난을 받고, 은혜에 따라 기적을 행했다. 그의 성격의 확고함과 결단력으로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비슷하게 여겼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하나님과 연합하여 기적의 능력과 권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그는 의지 이상의, 동일한 활동(하나님과 함께)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고,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자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었다."
- "구세주는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으며, 투쟁과 고된 노력으로 우리 조상의 죄를 극복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었고, 그의 도덕적 탁월함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선행의 길에서 발전함으로써 하나님과 의지와 에너지(즉, 활동)의 통일성과 동일성에 도달했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도록 보존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상속받았고, 은혜로 그에게 주어진 사랑과 애정의 상을 받았다."
- "우리는 단지 그들의 본성 때문에 복종하는 존재에게 칭찬을 수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태도가 사랑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존재에게 높은 칭찬을 수여한다. 그리고 영감을 주는 동기가 동일하기 때문에 복종하며, 그들은 동일한 내재적 힘에 의해 확고해지고 강화되며, 이 힘의 힘은 계속 증가하여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구세주가 하나님과 결합하여 그분과 분리될 수 없고, 모든 시대에 그분과 동일한 의지와 활동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의 덕분이었다. 이 활동은 선을 나타내는 데 끊임없이 작용한다."
- "구세주가 하나님과 하나의 뜻을 가진 것을 놀라지 마라. 자연이 많은 것의 실체를 하나로 존속하게 하듯이, 사랑의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통일성과 동일한 의지를 생성하며, 이는 동일한 승인과 기쁨으로 나타난다."
3. 3. 에우세비우스의 기록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에 관한 주요 정보는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에우세비우스는 파울로스가 보인 일부 교리와 관행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종교적 봉사에 대해 돈을 받았으며[7],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교리를 설교하도록 돈을 지불했다.[8]
- 제노비아 여왕의 황제 검사관으로 불리기를 선호했다.[9]
- 그리스도를 위한 시편 제작을 중단하고, 여성들을 훈련시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자신을 찬양하는 시편을 부르게 했다.[10][11]
에우세비우스는 파울로스가 "수비인트로덕테"라고 부른 자신의 여성 추종자들과 "너무 친밀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12][8]
4. 유산과 영향
제1차 니케아 공의회는 사모사타의 파울로스를 따르는 파울로스파에 대한 규정을 두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파울로스파의 세례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베풀어졌지만, 정통적인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보았다.[14] 파울로스파는 공의회 이후 곧 사라졌으나, 7세기의 바울파와 혼동되기도 했다.[15]
4. 1. 니케아 공의회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제19규정은 파울로스파에 관한 것이었다.[13]공의회는 파울로스파 신자가 가톨릭 교회로 피신할 경우, 반드시 재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또한 과거에 성직자였던 자들 중 흠이 없고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자는 재세례 후 가톨릭 교회의 주교에게 서품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부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파면했다. 여성 부제와 일반 성직자도 같은 기준을 따랐다. 여기서 여성 부제는 수도복을 입었지만 안수를 받지 않아 평신도로 여겨지는 이들을 의미한다.[13]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사모사타의 파울로스 추종자들이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정통적인 의미로 행하지 않아 세례가 무효라고 설명했다.[14] 파울로스파는 공의회 직후 곧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7세기의 이원론적 분파인 바울파와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15]
4. 2. 파울로스파와 바울파
제1차 니케아 공의회 제19조는 파울로스파에 관한 것이었다.이에 따르면 파울로스파 신자가 가톨릭 교회로 돌아올 경우, 재세례를 받아야 했다. 과거 성직자였던 이들 중 흠이 없고 비난받을 여지가 없는 사람은 재세례 후 가톨릭 교회의 주교에게서 다시 서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부적합한 자는 파면되었다. 여성 부제와 성직자들도 같은 기준을 따랐다. 여기서 여성 부제란 수도복을 입었지만 안수를 받지 않아 평신도로 여겨지는 이들을 의미했다.[13]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는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추종자들이 삼위일체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정통적인 의미로 행하지 않아 세례가 무효라고 설명했다.[14] 파울로스파는 공의회 직후 곧 사라진 것으로 보이며, 7세기경 바울파는 종종 파울로스파와 동일한 것으로 오인되기도 했다.[15]
4. 3. 아리우스파에 미친 영향
사모사타의 파울로스의 제자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는 아리우스 즉 아리우스파의 창시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5. 한국적 관점에서의 재조명
(현재 섹션에는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5. 1. 초기 기독교의 다양성
바울의 가르침은 군주신론의 한 형태로서, 하느님의 유일성을 강조했다. 바울은 예수가 단순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신성한 로고스 즉 하느님의 말씀으로 채워졌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예수는 하느님이 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된 하느님으로 여겨졌다. 아나스타시우스에게 귀속된 이단 반박서에 단편만이 보존되어 있는 사비누스에게 보내는 그의 담론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1]-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 그는 기름 부음 받은 자(즉,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받았고, 그의 본성에 따라 고난을 받고, 은혜에 따라 기적을 행했다. 그의 성격의 확고함과 결단력으로 그는 자신을 하느님과 비슷하게 여겼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하느님과 연합하여 기적의 능력과 권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그는 의지 이상의, 동일한 활동(하느님과 함께)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났고,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자 구세주라는 칭호를 얻었다."[1]
- "구세주는 거룩하고 의롭게 되었으며, 투쟁과 고된 노력으로 우리 조상의 죄를 극복했다. 이러한 수단을 통해 그는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었고, 그의 도덕적 탁월함으로 하느님과 연합하게 되었다. 선행의 길에서 발전함으로써 하느님과 의지와 에너지(즉, 활동)의 통일성과 동일성에 도달했다. 이것은 분리될 수 없도록 보존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상속받았고, 은혜로 그에게 주어진 사랑과 애정의 상을 받았다."[1]
- "우리는 단지 그들의 본성 때문에 복종하는 존재에게 칭찬을 수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태도가 사랑이기 때문에 복종하는 존재에게 높은 칭찬을 수여한다. 그리고 영감을 주는 동기가 동일하기 때문에 복종하며, 그들은 동일한 내재적 힘에 의해 확고해지고 강화되며, 이 힘의 힘은 계속 증가하여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구세주가 하느님과 결합하여 그분과 분리될 수 없고, 모든 시대에 그분과 동일한 의지와 활동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의 덕분이었다. 이 활동은 선을 나타내는 데 끊임없이 작용한다."[1]
- "구세주가 하느님과 하나의 뜻을 가진 것을 놀라지 마라. 자연이 많은 것의 실체를 하나로 존속하게 하듯이, 사랑의 태도는 많은 사람에게 통일성과 동일한 의지를 생성하며, 이는 동일한 승인과 기쁨으로 나타난다."[1]
바울은 양자론의 초기 선구자였다. 아르메니아의 바울파가 그의 가르침을 따랐고, 그로부터 그들의 이름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바울파는 양자론에 대한 옹호보다 영지주의와 성상파괴주의적 견해 때문에 더욱 심하게 박해받았다.[1]
바울의 제자 안티오키아의 루키아노스는 아리우스 즉 아리우스파의 창시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1]
참조
[1]
간행물
Paul of Samosata
[2]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3]
서적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4]
서적
Ecclesiastical History
[5]
서적
A History of the Church
https://archive.org/[...]
Sheed & Ward
1934
[6]
서적
Roman Syria and the Near East
Getty Publications
2003
[7]
서적
Ecclesiastical History
[8]
서적
Ecclesiastical History
[9]
서적
Ecclesiastical History
[10]
서적
Ecclesiastical History
[1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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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Ecclesiastical History
[13]
웹사이트
CHURCH FATHERS: First Council of Nicaea (A.D. 325)
http://www.newadvent[...]
[14]
Wikisourc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Series II, Volume IV. Against the Arians, Discourse II, 42-43
[15]
서적
The Church of the Ancient Councils: The Disciplinary Work of the First Four Ecumenical Councils
https://books.google[...]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6]
서적
기독교 교회사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4-03-10
[17]
서적
교회사 안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도서출판 그리심
200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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