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1세 드 부르봉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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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1세 드 부르봉 공작은 1424년부터 클레르몽-앙-보베지 백작, 14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부르봉 공작이자 오베르뉴 통치자였다. 그는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 왕국 샤를 7세를 지지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나, 군제 개혁과 과세에 반발하여 1440년 루이 왕태자를 옹립하는 반란에 가담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샤를 7세에게 용서를 구하고 일부 영지를 박탈당했으며, 1456년 물랭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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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세 드 부르봉은 1410년부터 1434년까지 부르봉 공작이자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 귀족이었으며 아르마냐크파의 일원으로서,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런던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들 샤를 1세 드 부르봉이 공작위를 계승했다.
샤를 1세 드 부르봉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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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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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シャルル1世 (샤루루 1세) |
다른 이름 | Charles Ier (샤를 1세) |
작위 | 부르봉 공작 오베르뉴 공작 |
출생 | 1401년 |
사망 | 1456년 12월 4일 |
사망 장소 | 물랭 |
매장 장소 | 프랑스 스비니 수도원 |
가문 | 부르봉 가문 |
아버지 | 장 1세 |
어머니 | 마리 드 베리 |
배우자 | 아녜스 드 부르고뉴 |
자녀 | 장 드 부르봉 마리 드 부르봉, 칼라브리아 공작부인 필리프 드 부르봉 샤를 드 부르봉 이자벨 드 부르봉 피에르 드 부르봉 루이 드 부르봉 마르그리트 드 부르봉 카트린 드 부르봉 잔 드 부르봉 자크 드 부르봉 |
통치 | |
즉위 | 1434년 |
퇴위 | 1456년 12월 4일 |
이전 통치자 | 장 1세 |
다음 통치자 | 장 2세 |
2. 생애
샤를 1세는 아버지 장 1세가 아쟁쿠르 전투 이후 잉글랜드에 투옥되면서, 아버지의 사망(1434년)보다 18년 이상 앞서 사실상 공작령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1424년부터 클레르몽-앙-보베지 백작이었고, 아버지가 사망한 1434년부터 공식적으로 부르봉 공작이자 오베르뉴 통치자가 되었다. 1416년 외할아버지 베리 공작 장 사후 상속받을 예정이었던 오베르뉴와 몽팡시에는 왕가의 개입으로 1425년에야 특정 조건을 전제로 상속이 인정되었다.
1425년, 그는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장의 딸인 부르고뉴의 아녜스와 결혼했다.
백년 전쟁 동안 샤를 1세는 프랑스 왕 샤를 7세를 위해 왕실 군대에서 활동했다. 오를레앙 공방전 구원에 참여했으나 1429년 청어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른 지휘관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럼에도 샤를 7세를 계속 섬겨, 같은 해 파리 공방전 당시 왕명을 전달하고, 1430년 콩피에뉴에 파견되는 등 활동을 이어갔으며, 샤를 7세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여 귀족 역할을 수행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매형이자 때로는 적대 관계였던 필리프 3세와 휴전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1435년 아라스에서 열린 프랑스-부르고뉴 강화 회담에 사절단으로 참여하여 아라스 조약 체결에 기여했고, 이를 통해 두 공작은 화해하여 1440년까지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샤를 7세의 군제 개혁과 귀족 과세 정책, 그리고 궁정 내 특정 파벌의 득세에 반발하여 1440년 알랑송 공작 장 2세, 뒤누아 등 다른 귀족들과 함께 왕태자 루이를 내세워 프라게리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은 리쉬몽 대원수에게 빠르게 진압되었고, 샤를 1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고 영지 일부를 몰수당했다.
그는 1456년 물랭에 있는 자신의 영지 물랭 성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장남 장 2세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2. 1. 가문과 초기 생애
아버지 장 1세가 아쟁쿠르 전투 이후 잉글랜드에 투옥되면서, 샤를은 아버지의 사망(1434년)보다 18년 이상 앞서 사실상 공작령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1424년부터 클레르몽-앙-보베지 백작 칭호를 사용했다.1416년 외할아버지인 베리 공작 장이 사망하면서 오베르뉴와 몽팡시에가 부르봉가에 상속될 예정이었으나, 프랑스 왕가(발루아 왕조)는 이를 즉시 인정하지 않았다. 1425년에야 두 영지의 상속이 인정되었지만, 왕가가 과세권, 재판권 등을 확보하고 부르봉 가문의 대가 끊길 경우 왕가에 영지를 반환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1425년, 샤를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장의 딸인 부르고뉴의 아녜스 (1407–1476)와 결혼했다. 이는 이전에 맺었던 약혼을 다시 확인한 것이었다.
백년 전쟁 시기에는 부르고뉴파에 맞서는 아르마냐크파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지지했다. 1428년부터 시작된 오를레앙 공방전에서는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등과 함께 오를레앙 구원에 참여했다. 그러나 1429년 2월 12일 벌어진 청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보급 부대를 공격하려다 존 패스톨프에게 패배했다. 이후 뒤누아 등과의 의견 충돌로 오를레앙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샤를 7세를 계속 섬겨, 같은 해 9월 파리 공방전 중인 잔 다르크에게 샤를 7세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 역할을 수행했다. 1430년에는 콩피에뉴에 파견되기도 했다.
샤를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귀족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아버지 장 1세가 1434년 사망하면서 공식적으로 부르봉 공작이자 오베르뉴 통치자가 되었다.
2. 2. 백년전쟁 시기의 활동
백년 전쟁 동안 샤를 1세는 부르고뉴파에 맞서는 아르마냐크파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는 왕실 군대에서 활약했으며, 1428년부터 시작된 오를레앙 공방전에서는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등과 함께 오를레앙 구원에 참여했다. 그러나 1429년 2월 12일 벌어진 청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보급 부대를 공격하려다 존 패스톨프에게 반격을 당해 패배했고, 이후 뒤누아 등과의 의견 충돌로 오를레앙에서 이탈하기도 했다.[1][2][3]그럼에도 샤를 1세는 샤를 7세를 계속 섬겼다. 같은 해 9월, 파리 공방전에서 고전하던 잔 다르크에게 샤를 7세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1430년에는 콩피에뉴에 파견되어 부르고뉴 측에 잔 다르크의 인도를 요구했으나 실패했다.[4][5] 샤를 1세는 샤를 7세의 대관식에도 참석하여 귀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동시에 샤를 1세는 그의 매형이자 때로는 적대 관계였던 부르고뉴의 필리프 3세와 휴전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1435년에는 아라스에서 열린 프랑스와 부르고뉴 간의 강화 회담에 프랑스 사절단 일원으로 참여하여 아라스 조약 체결에 기여했으며, 이를 통해 두 공작은 화해하여 1440년까지 동맹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샤를 7세와 아르튀르 드 리쉬몽 대원수가 추진하던 군제 개혁과 귀족 과세, 그리고 궁정 내 메인 백작 샤를 4세 파벌의 득세로 자신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결국 1440년, 샤를 1세는 뒤누아, 알랑송 공작 장 2세 등 다른 불만 귀족들과 함께 왕태자 루이를 내세워 프라게리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은 리쉬몽 대원수에게 신속히 진압되었고, 샤를 1세는 샤를 7세에게 용서를 구하고 일부 영지를 몰수당했다.
2. 3. 프라게리 반란과 말년
백년 전쟁 동안 아르마냐크파의 일원으로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1428년부터 시작된 오를레앙 공방전에서는 장 드 뒤누아, 라 이르 등과 함께 오를레앙 구원에 나섰지만, 1429년 2월 12일 청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군수 부대를 공격하려다 존 패스톨프에게 역습을 당해 패배했다. 이 전투 이후 뒤누아 등 다른 지휘관들과 갈등을 빚고 오를레앙에서 이탈하기도 했다.[1][2][3]하지만 샤를 7세를 계속 섬겨, 같은 해 9월 파리 공방전에서 고전하던 잔 다르크에게 샤를 7세의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하는 사자 역할을 수행했다. 1430년에는 콩피에뉴에 파견되어 부르고뉴 측에 프랑스 인도를 명령했으나 실패했다.[4][5]
1435년에는 아라스에서 열린 프랑스와 부르고뉴 간의 강화 회담에 사절단 일원으로 참여하여 아라스 조약 체결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후 샤를 7세와 아르튀르 드 리쉬몽 대원수가 추진하는 군제 개혁과 귀족에 대한 과세 정책에 반발했다. 또한 궁정 내에서 메인 백작 샤를 4세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득세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약화된 것도 불만을 키웠다.
결국 1440년, 샤를 1세는 뒤누아, 알랑송 공작 장 2세 등 다른 불만 귀족들과 함께 당시 왕태자였던 루이(훗날 루이 11세)를 내세워 프라게리의 난으로 알려진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반란은 리쉬몽 대원수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고, 샤를 1세는 국왕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으며 일부 영지를 몰수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프라게리 반란 실패 이후, 샤를 1세는 1456년 물랭에 있는 자신의 영지 물랭 성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작위는 장남인 장 2세가 계승했다.
3. 결혼과 자녀
1425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딸 아녜스 드 부르고뉴(1407년–1476년)와 혼인하여 6남 5녀, 총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샤를 1세에게는 사생아도 있었다.
3. 1. 정실과의 관계
1425년에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딸 아녜스(1407년 - 1476년)와 혼인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6남 5녀, 총 11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부르봉 가문의 적통 남계는 아들 대에서 단절되었다.이름 | 생몰년 | 비고 |
---|---|---|
장 2세 | 1426년 - 1488년 | 부르봉 공작 |
마리 | 1428년 - 1448년 | 로렌 공작 장 2세의 비 |
필리프 | 1430년 - 1440년 | 요절 |
샤를 2세 | 1434년 - 1488년 | 리옹 대주교, 부르봉 공작 |
이자벨 | 1436년 - 1465년 | 사촌인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두 번째 비 |
루이 | 1438년 - 1482년 | 리에주 주교 |
피에르 2세 | 1438년 - 1503년 | 부르봉 공작 |
마르그리트 | 1439년 - 1483년 |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의 첫 번째 비, 루이즈 드 사부아의 모친 |
카트린 | 1440년 - 1469년 | 겔데른 공작 아돌프의 비 |
잔 | 1442년 - 1493년 | 오라녜 공작 장 2세 드 샬롱의 비 |
자크 | 1445년 - 1468년 | 몽팡시에 백작 |
3. 2. 자녀 목록
1425년 부르고뉴 공작 장 1세의 딸 아녜스 드 부르고뉴(1407년–1476년)와 결혼하여 슬하에 6남 5녀, 총 11명의 자녀를 두었다.이름 | 생몰년 | 주요 정보 |
---|---|---|
장 2세 | 1426년–1488년 | 부르봉 공작 |
마리 | 1428년–1448년 | 1444년 로렌 공작 장 2세와 혼인 |
필리프 | 1430년–1440년 | 보죄 영주 |
샤를 2세 | 1433년/1434년–1488년 | 리옹 대주교, 추기경, 부르봉 공작 |
이자벨 | 1434년/1436년–1465년 | 부르고뉴 공작 샤를과 혼인 |
피에르 2세 | 1438년–1503년 | 부르봉 공작 |
루이 | 1438년–1482년 | 리에주 주교 |
마르그리트 | 1439년–1483년 | 1472년 사보이아 공작 필리포 2세와 혼인. 루이즈 드 사부아의 어머니. |
카트린 | 1440년–1469년 | 1463년 겔데른 공작 아돌프 2세와 혼인 |
잔 | 1442년–1493년 | 1467년 오랑주 공작 장 4세 드 샬롱아를레와 혼인 |
자크 | 1445년–1468년 | 몽팡시에 백작. 미혼. |
3. 3. 사생아
참조
[1]
서적
Joan of Arc
St.Martin's Press
1986
[2]
서적
Philip the Good
The Boydell Press
2004
[3]
서적
Philip the Good
[4]
서적
Joan of Arc
[5]
서적
Joan of 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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