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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린국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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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선린국보기》는 무로마치 시대의 승려 즈이케이 슈호가 편찬한 외교 문서집으로, 일본과 중국, 조선 간의 외교 관계와 승려들의 왕래를 기록하고 있다. 상권, 중권, 하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명나라에 대한 상표문 작성 지침을 통해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친명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외교 문서 작성의 원칙과 실제 사례를 담고 있으며, 도요토미 정권과 에도 막부에서 외교 문서 작성 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후에도 《속선린국보기》와 같은 후속 저술이 이어졌으며, 즈이케이 슈호의 국체관은 일본 내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2. 역사적 배경

2. 1. 즈이케이 슈호와 고잔 문화

2. 2. 무로마치 막부의 대외 관계

3. 《선린국보기》의 구성과 내용

선린국보기》는 무로마치 시대 중기 고잔파 선승인 즈이케이 슈호가 편찬한 외교 문서집이다. 상권, 중권, 하권의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과 중국, 조선과의 외교 관계 및 승려들의 왕래를 기록하고 있다.

상권은 59년 임나소나갈질지가 왜국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1392년까지 중국 · 조선과의 관계나 승려의 왕래를 중심으로 한 편년체 외교사를 담고 있다. 상권에는 《신황정통기》, 《원형석서》, 현존하지 않는 《해외국기》, 《서적후전기》 등의 인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에는 고잔파 선승들이 가지고 있던 불교 천문학적인 세계관이나 《신황정통기》 인용에 따른 이른바 '신국' 관념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명 황제에 대한 상표문 형식에 대해 "(쇼군이) 일본 국왕을 자칭해서는 안 된다", "(명 황제의 신하임을 나타내는) 신(臣)의 글자는 부득이한 경우 일본 천황의 신하인 것처럼 써야 한다", "연호는 일본의 연호(원호)를 사용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간지를 사용한다"라고 쓰여져 있어,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친명 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즈이케이 슈호는 1464년 명 황제에게 보내는 상표문 작성을 담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외교 문서에 관한 옛 규정과 선례를 후진들에게 알리고, 고잔파가 가진 외교 문서 작성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선린국보기》를 작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 책은 도요토미 정권사이쇼 조타이에도 막부이신 스덴 등 고잔파 선승들이 참고 자료로 사용했다. 에도 시대에는 《속선린국보기》 등 《선린국보기》의 뒤를 잇는 책들이 다수 저술되었다.

3. 1. 상권: 고대부터 남북조 시대까지의 외교사

3. 2. 중권 및 하권: 무로마치 시대의 외교 문서

오에이 5년(1398년)부터 분메이 7년(1475년)까지의 명나라와 이씨 조선과의 외교 문서, 에이쿄 5년(1433년)부터 분메이 18년(1486년)까지의 외교 문서의 별폭이 수록되어 있다. 무로마치 시대 일본과 명나라, 조선 간의 외교 교섭 내용과 문서 작성의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 특히, 외교 문서의 형식과 내용에 담긴 양국의 입장과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고 명나라의 역(曆)을 받은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명나라 황제에 대한 상표문 작성 시, "(장군은) 일본 국왕을 자칭해서는 안 된다", "(명나라 황제의 신하임을 나타내는) 신(臣)의 글자는 부득이한 경우 일본 천황의 신인 것처럼 써야 한다", "연호는 일본의 연호(연호)를 사용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 간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등의 규정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고산파선승이 가지고 있는 불교 천문학적인 세계관과 『신황정통기』의 인용에 기초한 "신국" 관념의 표명으로 볼 수 있다.

공식령에 따르면 외교 문서 기안은 조정의 다이나이키의 직무였지만,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에서 한문에 능통한 고산파 선승들이 담당했다. 즈이케이 슈호 자신도 간쇼 5년(1464년)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상표문 작성을 담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외교 문서 작성의 옛 규정을 후진에게 전하고 고산파의 권한 유지를 위해 『선린국보기』를 저술했다.

3. 3. 인용 자료 및 사상적 배경

4. 외교 문서 작성 지침과 실제

선린국보기》는 외교 문서 작성의 원칙과 실제 사례를 담고 있다. 이 책에는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상표문 형식에 대한 지침이 있는데, "(쇼군이) 일본 국왕을 자칭해서는 안 된다", "(명 황제의 신하임을 나타내는) 신(臣)의 글자는 부득이한 경우 일본 천황의 신하인 것처럼 써야 한다", " 연호는 일본의 연호(원호)를 사용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간지를 사용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고 명나라의 책력을 받은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다.

공식령에 따르면, 외교 문서 초안 작성은 조정의 다이 나이키의 직무였다. 그러나 조정 권력의 쇠퇴와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교토의 조정과 분리된 입장에서 외교를 실시하면서,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한문에 능통한 고잔파의 선승들이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게 되었다. 즈이케이 슈호 자신도 간쇼(寬正) 5년(1464년)에 명 황제에게 보내는 상표문 작성을 담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외교 문서에 관한 옛 규정과 선례를 알리고 고잔파의 외교 문서 작성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선린국보기》를 저술했다.

실제로 《선린국보기》는 도요토미 정권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와 에도 막부이신 스덴(以心崇伝) 등 고잔파 선승들이 외교 문서 작성 시 참고 자료로 활용했다. 이후 에도 막부의 외교 문서 작성권은 하야시 가로 이관되었지만, 고잔파 선승들은 쓰시마 후추 번의 이테이 암자에서 조선수문직으로 파견되어 대조선 외교 문서 작성에 계속 참여했다. 에도 시대에는 《속선린국보기》 등 《선린국보기》의 뒤를 잇는 목적을 가진 책들이 다수 저술되었다.

4. 1. 상표문(上表文) 작성 원칙

4. 2. 외교 문서 작성의 실제 사례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한문에 능통한 고산파 선승들이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했으며, 즈이케이 슈호도 간쇼 5년(1464년) 명나라 황제에 대한 상표문 작성을 담당했었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외교 문서 작성에 관한 옛 규정을 고산파 후학들에게 전하고, 고산파의 외교 문서 작성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선린국보기』를 저술했다.

이 책은 실제로 도요토미 정권에서 외교 문서를 담당했던 사이쇼 조다이나 도쿠가와 정권(에도 막부)에서 외교 문서를 담당했던 스덴 등 고산파 선승들이 참고했다. 이후 에도 막부의 외교 문서 작성 권한은 하야시 가문으로 옮겨졌지만, 고산파 선승은 쓰시마 번의 이테이안에 조선 수문직으로 파견되어 조선을 향한 외교 문서 작성에 계속 관여했다. 에도 시대에는 『속선린국보기』 등 『선린국보』의 계승을 의도한 서적들이 저술되었다.

5. 《선린국보기》의 영향과 후대의 평가

선린국보기》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외교 문서를 맡았던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와 에도 막부에서 외교 문서를 담당한 난젠지(南禪寺)의 이신 스덴(以心崇伝) 등 오산파 선승들에 의해 참고 자료로 사용되었다. 나중에 에도 막부의 외교 문서 작성권은 하야시 가(林家)로 옮겨지지만, 오산파 선승들은 그 뒤로도 막부의 명에 의해 쓰시마 후추 번의 이테이 암자에 조선수문직으로 파견되어 조선과의 외교 문서 작성에 임하게 된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속선린국보기》(續善隣國宝記) 등 《선린국보기》의 뒤를 잇는 목적을 드러낸 책들이 다수 저술되고 있다.

이 책에는 고잔파 선승들이 가지고 있던 불교 천문학적인 세계관이나 《신황정통기》 인용에 따른 이른바 '신국'(神國) 관념의 표현이 이루어지고있는 부분이 있다. 또한 명의 황제에 대한 상표문 형식에 대해 "(쇼군이) 일본 국왕을 자칭해서는 안 된다", "(명 황제의 신하임을 나타내는) 신(臣)의 글자는 부득이한 경우 일본 천황의 신하인 것처럼 써야 한다", " 연호는 일본의 연호(원호)를 사용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간지를 사용한다"라고 쓰여져 있어 일본 국왕으로 책봉되고 명 왕조의 책력을 받은 쇼군 요시미쓰의 자세를 비판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전쟁 전부터 패전 후 한시기에 걸쳐 이 책이 가진 국체관(國體觀)이 주목받은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즈이케이 슈호의 국체관은 그와 오랜 친분이 있던 명경도의 기요하라노 나리타다(清原業忠)의 영향이(《신황정통기》의 수용을 포함해서) 크기에 이 책에 실린 국체관이 곧 즈이케이 슈호 자신의 관념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즈이케이 슈호 자신은 아시카가 요시미쓰 이후에 성립된 대명 외교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

5. 1. 조선 전기 외교에 미친 영향

5. 2. 일본 내에서의 수용과 계승

5. 3. 현대적 평가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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