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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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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설도(薛濤)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이자 서예가이며, 기녀로 활동했다. 장안에서 태어나 촉나라로 이주하여 8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나, 16세에 기녀가 되었다. 검남서천절도사 위고 등 명사들과 교류하며 여교서로 불리기도 했으며, 붉은색 종이인 설도전을 만들어 명성을 얻었다. 그녀는 원진과 교류했으나, 원진이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설도는 시와 서예에 능했으며, 당대와 후대에 걸쳐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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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 (중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추영이 그린 설도의 초상화
추영이 그린 설도의 초상화
본명薛濤 (쉬에 타오)
이명洪度 (홍두)
宏度 (굉두)
女校書 (여교서)
국적중국
직업기생
시인
칭커 (清客, 귀족이나 고관의 집에 머물며 시문(詩文)이나 바둑, 서화(書畫) 등의 재능을 제공하던 사람)
서예가
비구니
생애
출생기원후 770년경
사망832년

2. 생애

설도(薛濤)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촉나라로 이주했다.[5] 아버지 설운(薛郧)을 따라 성도(成都)에 왔으며, 설운은 작은 정부 관리였다.[11] 8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하고 음률에 밝았다. 그러나 14세에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기녀가 되었다.[5] 설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미망인이 되었고, 그들은 가난하게 살았다.[6] 설도는 청두의 기생 및 연예인 길드에 등록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재치와 시적 재능으로 유명해졌다.

기녀로서 설도는 당시 검남서천절도사로 성도에 부임해 온 무원형, 이이간, 단문창(段文昌), 이덕유 등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설도가 열여덟 살 때 서천절도사로 부임해 온 위고는 그녀를 몹시 아껴, 자주 막부(幕府)에서 여는 연회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조정에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郞)직에 임명해달라는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다.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후 그녀는 문인들로부터 여교서(女校書)라 불리게 되었다.[11] 807년 오원형이 총독이 되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두 편의 시를 바쳤다. 오원형은 매우 감명받아 황제에게 설도를 그의 사무실의 편집자(교서, 校书)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설도는 그 직책을 받지 못했지만, "여교서(女校书)"로 알려지게 되었다.[11]

그러나 나중에 위고의 조카 위정관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을 때 설도가 그에게 보낸 구애의 시가 위고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위고는 설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송주로 보내버렸다. 송주에서 설도는 십리시(十離詩)를 지어 위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위고는 설도를 성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기적(妓籍)에서 지우고 막부에서도 내쫓아버렸다.

이후 성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로써 부임해 온 원진과 알게 되어 4년을 보냈는데, 설도가 먼저 원진을 떠나고 원진도 다른 관직에 임명되면서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금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원진을 설도가 만나러 왔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헤어졌고, 원진이 떠난 뒤 설도는 사랑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냈으며 원진 역시 기증설도라는 시로 대답했지만, 이후 원진이 새 부임지 절강에서 유채춘이라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설도는 이후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여도사의 옷을 입고 벽계방에 살면서 음시루를 세웠다. 설도는 두보와 관련된 도시 밖의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었다. 그녀가 시를 쓰기 위해 사용된 수제 종이를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설도가 만든 편지지는 "설도전(薛涛笺)"이라고 불렸으며, 당나라 중후반에는 이미 문인들의 책상에 놓이는 물건이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설도전의 생산 기술이 거의 사라졌고, 연간 생산량도 매우 적었다. 명나라의 촉왕은 한때 그것을 공물로 사용하여 명나라 조정에 넘겨주었다.[8] 설도는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왕희지의 서법을 배워[8] 여성적이지 않고 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9][10]

설도의 무덤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 우허우 구(武侯區) 망강로(望江路)에 조성된 망강루공원(望江楼公园) 북서쪽 대나무 숲 속에 있으며, 묘비는 그녀의 묘지명과 함께 당시 검남절도사로 있던 단문창이 서천여교서설도홍도지묘(西川女校書薛濤洪度之墓)라고 써 주었고 한다. 1994년에 다시 '당여교서설홍도묘'(唐女校書薛洪度墓)라고 쓴 비석이 세워졌다.

2. 1. 어린 시절과 기녀 생활

설도(薛濤)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촉나라로 이주했다.[5] 아버지 설운(薛郧)을 따라 성도(成都)에 왔으며, 설운은 작은 정부 관리였다.[11] 8세에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하고 음률에 밝았다.[5] 그러나 14세에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기녀가 되었다.[5] 설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는 미망인이 되었고, 그들은 가난하게 살았다.[6] 설도는 청두의 기생 및 연예인 길드에 등록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의 재치와 시적 재능으로 유명해졌다.

기녀로서 설도는 당시 검남서천절도사로 성도에 부임해 온 무원형, 이이간, 단문창(段文昌), 이덕유 등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설도가 열여덟 살 때 서천절도사로 부임해 온 위고는 그녀를 몹시 아껴, 자주 막부(幕府)에서 여는 연회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조정에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郞)직에 임명해달라는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다.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후 그녀는 문인들로부터 여교서(女校書)라 불리게 되었다.[11] 807년 오원형이 총독이 되었을 때, 그녀는 그에게 두 편의 시를 바쳤다. 오원형은 매우 감명받아 황제에게 설도를 그의 사무실의 편집자(교서, 校书)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설도는 그 직책을 받지 못했지만, "여교서(女校书)"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중에 "여교서"는 재능있는 기생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11]

그러나 나중에 위고의 조카 위정관이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었을 때 설도가 그에게 보낸 구애의 시가 위고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위고는 설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송주로 보내버렸다. 송주에서 설도는 십리시(十離詩)를 지어 위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위고는 설도를 성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기적(妓籍)에서 지우고 막부에서도 내쫓아버렸다.

이후 성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로써 부임해 온 원진(元鎭)과 알게 되어 4년을 보냈는데, 설도가 먼저 원진을 떠나고 원진도 다른 관직에 임명되면서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금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원진을 설도가 만나러 왔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헤어졌고, 원진이 떠난 뒤 설도는 사랑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냈으며 원진 역시 기증설도라는 시로 대답했지만, 이후 원진이 새 부임지 절강에서 유채춘이라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설도는 이후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설도는 왕희지의 서법을 배운 서예가로도 인정받았으며, 그 일부는 송나라 궁정에 비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북송의 "선화서보(宣和书谱)"는 설도의 서예에 대해 그녀의 서예는 여성적이지 않고 필력이 강하다고 평했다. 그녀의 서예의 아름다움은 왕희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8] 설도는 중국 서예사에서 최초의 여성 혁신가였으며, 또한 중국 제지사에서도 여성 혁신가이다.[9][10] 그녀가 만든 진홍색 소채가 달린 시전(색지 같은 것)은 당시 '설도전'으로 인기를 끌었다. 설도가 만든 편지지 머리글은 작고 언제 어디서나 가져갈 수 있었다. 설도가 만든 편지지는 나중에 "설도전(薛涛笺)"이라고 불렸다. 당나라 중후반에는 그녀가 만든 편지지가 이미 문인들의 책상에 놓이는 물건이었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설도전의 생산 기술이 거의 사라졌고, 연간 생산량도 매우 적었다. 명나라의 촉왕은 한때 그것을 공물로 사용하여 명나라 조정에 넘겨주었다.

2. 2. 위고와의 관계와 원진과의 만남

장안 사람인 설도는 아버지 설운을 따라 성도(成都)에 왔다.[5] 14세에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기녀가 되었다.[6] 기녀로서 설도는 당시 검남서천절도사로 성도에 부임해 온 위고를 비롯한 여러 명사들과 교류하였다.[11] 특히 열여덟 살 때 서천절도사로 부임해 온 위고는 그녀를 몹시 아꼈고, 조정에 비서성의 교서랑직에 임명해달라는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다.[11]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후 그녀는 문인들로부터 여교서(女校書)라 불리게 되었다.[11]

그러나 위고의 조카 위정관에게 보낸 구애의 시가 위고의 귀에 들어가게 되자, 위고는 설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송주로 보내버렸다. 설도는 십리시(十離詩)를 지어 위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위고는 설도를 성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기적(妓籍)에서 지우고 막부에서도 내쫓아버렸다.

이후 성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로써 부임해 온 원진과 알게 되어 4년을 보냈다.[7] 금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원진을 설도가 만나러 왔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헤어졌고, 원진이 떠난 뒤 설도는 사랑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냈으며 원진 역시 기증설도라는 시로 대답했다. 하지만 이후 원진이 새 부임지 절강에서 유채춘이라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설도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2. 3. 만년과 죽음

장안 사람인 설도는 아버지 설운을 따라 성도(成都)에 왔다.[5]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음률에 밝아 8세에 시를 짓기도 했다.[11] 그러나 14세에 아버지가 죽고 가세가 기울어 16세에 기녀가 되었다.

기녀로서 설도는 당시 검남서천절도사로 성도에 부임해 온 무원형, 이이간, 단문창(段文昌), 이덕유 등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설도가 열여덟 살 때 서천절도사로 부임해 온 위고는 그녀를 몹시 아껴, 자주 막부(幕府)에서 여는 연회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도록 하였으며, 조정에 비서성(秘書省)의 교서랑(校書郞)직에 임명해달라는 주청을 올리기도 하였다.[11]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후 그녀는 문인들로부터 여교서(女校書)라 불리게 되었다.[11]

그러나 위고의 조카 위정관에게 보낸 구애의 시가 위고의 귀에 들어가자, 위고는 설도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녀를 송주로 보내버렸다. 송주에서 설도는 십리시(十離詩)를 지어 위고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위고는 설도를 성도로 불러들이는 대신 기적(妓籍)에서 지우고 막부에서도 내쫓아버렸다.

이후 성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로써 부임해 온 원진과 알게 되어 4년을 보냈는데, 설도가 먼저 원진을 떠나고 원진도 다른 관직에 임명되면서 장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금강 포구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는 원진을 설도가 만나러 왔지만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헤어졌고, 원진이 떠난 뒤 설도는 사랑의 시를 써서 원진에게 보냈으며 원진 역시 기증설도라는 시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후 원진이 새 부임지 절강에서 유채춘이라는 연극배우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설도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만년에는 여도사의 옷을 입고 벽계방에 살면서 음시루를 세웠다. 설도는 두보와 관련된 도시 밖의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살 수 있었다. 그녀가 시를 쓰기 위해 사용된 수제 종이를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설도가 만든 편지지는 "설도전(薛涛笺)"이라고 불렸으며, 당나라 중후반에는 이미 문인들의 책상에 놓이는 물건이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설도전의 생산 기술이 거의 사라졌고, 연간 생산량도 매우 적었다. 명나라의 촉왕은 한때 그것을 공물로 사용하여 명나라 조정에 넘겨주었다.[8] 설도는 서예가이기도 했으며, 왕희지의 서법을 배워[8] 여성적이지 않고 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9][10]

설도의 무덤은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 우허우 구(武侯區) 망강로(望江路)에 조성된 망강루공원(望江楼公园) 북서쪽 대나무 숲 속에 있으며, 묘비는 그녀의 묘지명과 함께 당시 검남절도사로 있던 단문창이 서천여교서설도홍도지묘(西川女校書薛濤洪度之墓)라고 써 주었고 한다. 1994년에 다시 '당여교서설홍도묘'(唐女校書薛洪度墓)라고 쓴 비석이 세워졌다.

3. 설도의 시

설도의 문집으로 《금강집》(锦江集) 5권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전당시》(全唐诗)에 그녀의 시 한 권이 수록되어 있다.[11] 완화계(浣花渓)에 머물면서 백거이(白居易), 원진, 우승유(牛僧孺), 영호초(令狐楚), 장적(張籍), 두목(杜牧), 유우석(劉禹錫) 등의 문인과 교류하며 명기(名妓)로 알려졌다.

장위(張為)가 지은 시인주객도(詩人主客図)에는 설도의 시를 청기아정(清奇雅正)이라 평하며 가도(賈島), 방간(方干), 항사(項斯) 등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元)의 신문방은 설도의 시를 두고 「정(情)이 필묵에 가득하고 한원숭고(翰苑崇高)하다」고 하였으며, (清)의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주변루(籌邊楼)」라는 시에 시정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우국(憂国)의 정이 담겨 있다고 지적하였다.

현대의 호운익(胡雲翼, 1906년1965년)은 「당시의 문인 명사와 교류하며 그 영향을 받아 기교는 숙련되어 있으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기녀였던 설도로써는 사교 및 접대가 중요한 일이었기에, 예술가라기보다는 직업인으로써의 기능적인 작풍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벗을 보내다(送友人)
水國蒹葭夜有霜수향의 갈대에 밤 되니 서리가 내려
月寒山色共蒼蒼달빛 차가운 산색과 더불어 하얗다
誰言千里自今夕누가 말했나 천리 기약이 오늘 밤에 끝이라고
離夢杳如關塞長이별의 꿈은 먼 관문과 요새만큼 아득하구나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4수 가운데 세 번째 시는, 김억이 한국어로 번역하고 임성태가 곡을 붙여 《동심초》(同心草)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개작하였다. 설도의 시 5,000여 수가 14세기까지 전해진 《금강집》에 수록되었다. 오늘날까지 약 90여 편의 시가 남아 있으며, 이는 당나라 시대의 다른 어떤 여성보다 많은 수치이다.

어린 나이에 시재가 뛰어나, 8세 무렵 어느 날 아버지가 "정원 쓸고 옛 오동나무, 우뚝 솟아 줄기는 구름 속에 닿았네(庭除市古桐、聳幹入雲中)"라고 읊자, 그녀가 "가지에는 남북의 새 맞이하고, 잎에는 오가는 바람 보내네(枝迎南北鳥、葉送往來風)"라고 즉시 이었다는 전설이 있다.

4. 설도전(薛濤箋)

설도는 송주에서 돌아와 완화계에서 살았는데, 지역 주민들이 종이 만드는 것을 보고 배워 목부용 껍질로 붉은 색 종이를 만들어 그 종이에 시를 쓰곤 했다. 《운부군옥》에 따르면 설도는 보통의 종이 폭이 너무 크고 넓다며 작고 가늘게 줄인 종이를 만들었으며, 훗날 사람들은 이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설전(薛箋) 또는 촉전(蜀箋)이라 불렀다고 한다. 진한 붉은색으로 색이 예쁘고 크기도 아담해 이 종이에 연애의 시를 써서 보내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망강루공원 안에는 설도가 설도전을 만들 때 물을 길어다 썼다던 우물이 남아 있다.

5. 평가

설도의 문집으로 《금강집》(锦江集) 5권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전당시》(全唐诗)에 그녀의 시 한 권이 수록되어 있다. 완화계(浣花渓)에 머물면서 그녀는 백거이(白居易) ・ 원진 ・ 우승유(牛僧孺) ・ 영호초(令狐楚) ・ 장적(張籍) ・ 두목(杜牧) ・ 유우석(劉禹錫) 등의 문인과도 교류하며 명기(名妓)로 알려졌다.

장위(張為)가 지은 시인주객도(詩人主客図)에는 설도의 시를 청기아정(清奇雅正)이라 평하며 가도(賈島) ・ 방간(方干) ・ 항사(項斯) 등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元)의 신문방(辛文房)은 설도의 시를 두고 「정(情)이 필묵에 가득하고 한원숭고(翰苑崇高)하다」고 하였으며, (清)의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주변루(籌邊楼)」라는 시에 시정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우국(憂国)의 정이 담겨 있다고 지적하였다.

현대의 호운익(胡雲翼, 1906년1965년)은 「당시의 문인 명사와 교류하며 그 영향을 받아 기교는 숙련되어 있으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기녀였던 설도로써는 사교 및 접대가 중요한 일이었기에, 예술가라기보다는 직업인으로써의 기능적인 작풍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벗을 보내다(送友人)
水國蒹葭夜有霜수향의 갈대에 밤 되니 서리가 내려
月寒山色共蒼蒼달빛 차가운 산색과 더불어 하얗다
誰言千里自今夕누가 말했나 천리 기약이 오늘 밤에 끝이라고
離夢杳如關塞長이별의 꿈은 먼 관문과 요새만큼 아득하구나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4수 가운데 세 번째 시는, 김억이 한국어로 번역하고 임성태가 곡을 붙여 《동심초(同心草)》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개작하였다.

5. 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당대의 설도의 문집으로 《금강집》(锦江集) 5권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전당시(全唐诗)》에 그녀의 시 한 권이 수록되어 있다. 완화계(浣花渓)에 머물면서 백거이(白居易) ・ 원진 ・ 우승유(牛僧孺) ・ 영호초(令狐楚) ・ 장적(張籍) ・ 두목(杜牧) ・ 유우석(劉禹錫) 등 당대의 여러 문인과 교류하며 명기(名妓)로 알려졌다.

장위(張為)가 지은 시인주객도(詩人主客図)에는 설도의 시를 청기아정(清奇雅正)이라 평하며 가도(賈島) ・ 방간(方干) ・ 항사(項斯) 등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元)의 신문방(辛文房)은 설도의 시를 두고 「정(情)이 필묵에 가득하고 한원숭고(翰苑崇高)하다」고 하였으며, (清)의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주변루(籌邊楼)」라는 시에 시정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우국(憂国)의 정이 담겨 있다고 지적하였다.

현대의 호운익(胡雲翼, 1906년1965년)은 「당시의 문인 명사와 교류하며 그 영향을 받아 기교는 숙련되어 있으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기녀였던 설도로써는 사교 및 접대가 중요한 일이었기에, 예술가라기보다는 직업인으로써의 기능적인 작풍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벗을 보내다(送友人)
水國蒹葭夜有霜수향의 갈대에 밤 되니 서리가 내려
月寒山色共蒼蒼달빛 차가운 산색과 더불어 하얗다
誰言千里自今夕누가 말했나 천리 기약이 오늘 밤에 끝이라고
離夢杳如關塞長이별의 꿈은 먼 관문과 요새만큼 아득하구나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4수 가운데 세 번째 시는, 김억이 한국어로 번역하고 임성태가 곡을 붙여 《동심초(同心草)》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개작하였다.

5. 2. 현대의 평가

설도의 문집으로 《금강집》(锦江集) 5권이 있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전당시(全唐诗)》에 시 한 권이 수록되어 있다. 완화계(浣花渓)에서 백거이(白居易), 원진, 우승유(牛僧孺), 영호초(令狐楚), 장적(張籍), 두목(杜牧), 유우석(劉禹錫) 등과 교류하며 명기(名妓)로 알려졌다.

장위(張為)는 시인주객도(詩人主客図)에서 설도의 시를 청기아정(清奇雅正)이라 평하며 가도(賈島), 방간(方干), 항사(項斯) 등과 같은 반열에 두었다. (元)의 신문방(辛文房)은 설도의 시를 두고 「정(情)이 필묵에 가득하고 한원숭고(翰苑崇高)하다」고 평했다. (清)의 《사고제요(四庫提要)》에서는 「주변루(籌邊楼)」라는 시에 시정(詩情)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우국(憂国)의 정이 담겨 있다고 지적하였다.

현대의 호운익(胡雲翼, 1906년1965년)은 「당시의 문인 명사와 교류하며 그 영향을 받아 기교는 숙련되어 있으나 솔직한 감정을 표출하지는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기녀였던 설도로써는 사교 및 접대가 중요한 일이었기에, 예술가라기보다는 직업인으로써의 기능적인 작풍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벗을 보내다(送友人)'''
水國蒹葭夜有霜수향의 갈대에 밤 되니 서리가 내려
月寒山色共蒼蒼달빛 차가운 산색과 더불어 하얗다
誰言千里自今夕누가 말했나 천리 기약이 오늘 밤에 끝이라고
離夢杳如關塞長이별의 꿈은 먼 관문과 요새만큼 아득하구나



설도의 시 《춘망사》(春望詞) 4수 가운데 세 번째 시는, 김억이 한국어로 번역하고 임성태가 곡을 붙여 《동심초(同心草)》라는 제목의 가곡으로 개작하였다.

5. 3.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참조

[1] 웹사이트 About Xue Tao http://www.thedrunke[...] 2018-01-02
[2] 웹사이트 Xue Tao Culture http://www.wangjiang[...]
[3] 웹사이트 prostitutes and poets - the ancient world of China http://www.theworldo[...] Th world of Chinese 201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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