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우승유는 당나라 덕종 연간에 태어나, 805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호부 시랑과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이봉길, 이종민 등과 함께 이덕유와 대립하여 우이의 당쟁을 일으켰으며, 헌종, 목종, 경종, 문종, 무종, 선종 시대를 거치며 재상과 지방관을 지냈다. 846년 선종이 즉위한 후 조정에 소환되어 태자소사가 되었으며, 849년에 사망했다. 우승유는 《현괴록》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당 문종 때의 재상 - 이덕유
이덕유는 당나라 무종 시대의 재상으로, 번진 세력 약화에 기여한 문장가이자 정원가였으나, 당쟁 주도 및 폐불 추진 등 논란 속에 좌천되어 생을 마감했다.
우승유 |
---|
2. 생애
우승유는 당나라 때의 관리로, 805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호부 시랑과 동중서문하평장사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이봉길, 이종민 등과 함께 이덕유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이른바 "우이의 당쟁"을 일으켰다.
843년, 회창 연간에 이덕유가 이끄는 세력이 권력을 잡으면서 우승유는 순주 원외장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846년에 선종이 즉위하고 이덕유 세력이 실각하면서, 847년에 우승유는 다시 조정으로 불려와 태자소사가 되었다. 결국 우이의 당쟁은 우승유 측의 승리로 끝났다.
우승유는 『현괴록』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직 진출
우승유는 덕종 재위 기간인 780년 평량의 령태현에서 태어났다.[7][8] 그는 수나라 관료인 우홍(牛弘)의 후손이었다.[9] 그의 할아버지 우소(牛紹)는 예부 시랑을 지냈으며, 아버지 우유문(牛幼聞)은 현령을 지냈다.[10]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이 전에 하사받았던 수도(下杜, 장안 근처)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문장에 능했고, 805년에 과거에 합격했는데,[9] 이는 훗날의 동료이자 동맹인 이종민과 같은 해였다.[11]2. 2. 당 헌종 시기
우승유는 뤄양 (허난성) 이궐현(伊闕)의 현령을 지냈다.[12] 808년, 당 헌종이 응시자들에게 조정에 대한 솔직한 비판을 하도록 특별 과거를 실시했을 때, 시험을 담당한 위관지와 양어릉(楊於陵)은 솔직한 비판을 한 우승유, 황보식(皇甫湜), 이종민을 최고 점수로 선발했다. 그러나 재상 이길보는 그들이 한 비판에 자극받아 이를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으로 간주했다. 이길보는 헌종에게 배기와 왕아가 황보식이 왕아의 조카이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충돌한다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길보의 고발로 배기, 왕아, 양어릉, 위관지는 모두 좌천되었고, 위관지는 처음에는 과주(果州, 현대의 쓰촨성 난충)의 지사로 좌천되었으며, 이후 파주(巴州, 현대의 바중)의 지사로 옮겨졌다. 우승유, 황보식, 이종민은 유배되지는 않았지만, 《자치통감》에는 그들이 사실상 관직에서 막혀 지방 군벌 밑에서 스스로 관직을 찾아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3] 그러나 우승유 자신의 경력에 대한 다른 전통적인 기록에는 그가 지방 군벌 밑에서 근무했다는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이궐의 현령, 그리고 동쪽 수도 뤄양을 구성하는 두 현 중 하나인 하남현(河南)의 현령을 지냈다. 그는 후에 감찰어사(監察御史)라는 직함으로 어사로 재직했으며, 이후 문부성(吏部, '이부')의 하급 관리인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을 지냈으며, 집현전(集賢殿)의 학사로도 활동했다.[9]2. 3. 당 목종 시기
헌종이 820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목종이 뒤를 이은 후, 우승유는 국방부(兵部)의 감독관인 고부 낭중(庫部郎中중국어)으로 승진하여 황제의 조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해 말, 그는 부 수석 어사(御史中丞)가 되었다. 당시 각 지방에 형사 사건이 밀려 있어 많은 사람들이 판결을 기다리며 부당하게 구금되었다. 우승유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많은 책임 있는 관리들을 기소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12]821년, 수주(宿州, 현대의 쑤저우, 안후이) 태수였던 이직신(李直臣중국어)이 부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자, 강력한 환관들이 이직신에게 뇌물을 받고 그를 변호했다. 이에 목종은 우승유에게 "이직신은 재능이 있는데, 불쌍히 여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승유는 이직신의 죽음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응답했다.[14]
목종은 우승유의 말에 동의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14] 이후 목종은 우승유를 매우 존경했다.
823년, 전 재상이며 대장군이었던 한홍이 사망했는데, 얼마 전 그의 아들 한공무(韓公武중국어)가 사망했었다. 한홍은 오랫동안 선무군(宣武, 현대의 카이펑, 허난) 절도사를 지내며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15] 한홍은 819년에 장안에 머물 것을 제안했고,[16] 한공무의 제안에 따라 선무에서의 자신의 행적이 더 이상 조사받지 않도록 장안의 다른 관리들에게 많은 뇌물을 제공했다.[12][15]
한홍과 한공무가 모두 사망한 후, 한홍이 그의 어린 손자 한소종(韓紹宗중국어)에게 남긴 재산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했다. 목종은 한소종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겨 한홍의 재산 목록을 황제가 직접 검토하도록 명령했다. 목종은 한홍의 기록을 검토하던 중, 한홍이 다른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사실을 발견했고, 우승유에게도 뇌물을 제안했지만 우승유가 거절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목종은 매우 기뻐하며 이 내용을 측근들에게 보여주며 "그를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는 우승유를 입법부의 부수장인 중서시랑(中書侍郎중국어)으로 임명하고,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중국어)라는 직함과 함께 사실상 재상으로 임명했다.
당시 우승유와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는 모두 재상 후보로 진지하게 고려되었지만, 우승유가 실제로 재상이 된 반면 이덕유는 절서군(浙西, 현대의 전장, 장쑤) 지사가 되어 8년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다. 이로 인해 이덕유는 이봉길 재상이 우승유를 지지하여 자신을 밀어냈다고 믿게 되었다. 이길보가 우승유의 시험 답안에 불쾌감을 느꼈던 것에서 시작된 우승유와 이덕유 간의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다.[15]
2. 4. 당 경종 시기
경종 황제는 즉위 후 우승유에게 명예직인 '은청 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중국어)를 하사하고, 기장 자작에 봉했다. 그해 말, 경종 황제는 그의 명예직을 '금자 광록대부'로 승격시키고 그의 조상 우홍이 지녔던 기장공 작위를 하사했다.[10][12] 경종 황제는 또한 그에게 황실 역사를 편찬하는 책임을 맡겼다.[12]
825년, 우승유는 경종 황제가 경솔하고 부지런하지 않으며, 경종 황제 주변의 사악한 자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자신에게 재앙을 불러올까 두려워 이 문제에 대해 감히 말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사임하고 지방 관직을 맡겠다고 제안했다. 825년 봄, 경종 황제는 악악 절도사(鄂岳, 본부는 현대 우한, 후베이성)를 무창 절도사로 개편하고, 우승유를 무창의 절도사로 임명하면서 명예직으로 '동 중서문하 평장사' 직함을 계속 유지하게 했다. 샹양을 거쳐 갈 때, 산남동도 절도사(山南東道, 본부는 샹양) 유공착(柳公綽중국어)은 중앙 정부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의 참모들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승유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이는 그들이 절도사로서 같은 지위에 있었고 산남동도는 무창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의 절도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15]
무창의 수도 강하(江夏중국어)의 습도 때문에 성벽이 자주 무너져 매년 녹토로 수리해야 했다. 매년 노역이 무거웠고, 관료들은 이를 기회 삼아 부패했다. 우승유는 무창에 도착하자 벽돌로 성벽을 수리하는 사업을 시작했고, 그 사업이 완료된 후에는 강하 성벽이 더 이상 습도로 인해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창의 현 중 하나인 면주(沔州, 현대 센타오, 후베이성)가 무창의 수도인 악주(鄂州) 건너편 양쯔 강에 있었기 때문에, 우승유는 면주를 악주에 병합하여 백성들의 행정적 부담을 줄여달라고 요청했다.[12]
2. 5. 당 문종 시기
830년, 문종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 이종민은 재상이었다. 같은 해 봄, 우승유가 문종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장안으로 갔을 때, 이종민은 문종에게 우승유가 유능하니 중앙 정부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문종은 우승유를 동 중서 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및 병부상서(兵部尚書)로 임명했다.[1] 우승유와 이종민은 이덕유 당파를 중앙 정부에서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831년, 이재의는 겉으로는 황실에 존경을 표하고 최근 이통제와의 전쟁을 포함해 많은 명령을 따랐지만, 사실상 황실로부터 독립적인 룰롱 절도사(盧龍, 현대 베이징)였다. 그런데 그의 부하인 양지성에 의해 룰롱에서 쫓겨났다.[2] 문종은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했고, 우승유는 룰롱이 실제로 수십 년 동안 황실에 속해 있지 않았고, 양에 대한 공격은 소용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2] 그의 제안에 따라 양은 룰롱의 지휘권을 유지하게 되었고, 문종은 이재의의 이전 공적을 고려하여 그를 산남서도(山南西道, 현대 한중시, 산시성) 절도사로 임명했다.[2] (양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말자는 우승유의 주장은 송나라 역사학자 사마광이 그의 《자치통감》에서 날카롭게 비판했다.)[2]
같은 해, 우승유의 재상 동료 송신석은 문종을 전복하고 그의 형제 이구를 장왕으로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았다.[3] (송신석에 대한 혐의는 문종과 송신석이 권력 있는 환관들을 학살하려 하자, 환관들이 송신석의 반역 혐의를 조작하면서 비롯되었다.)[3] 문종은 처음에는 혐의를 믿고 송신석을 처형하려 했으나, 우승유는 많은 다른 관리들과 함께 이미 재상인 송신석이 반역을 꾀하려 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3] 대신 이구는 강등되었고, 송신석은 유배되었지만, 둘 다 목숨을 건졌다.[3]
831년 말, 당시 서천 절도사(西川, 현대 청두시, 쓰촨성)였던 이덕유는 위주(維州, 현대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 쓰촨성)를 담당하는 토번의 장교 시담모(悉怛謀)가 수십 년 전에 당나라로부터 빼앗았던 위주를 그에게 항복했다고 보고했다.[4] 이덕유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위주를 토번에 대한 대규모 작전을 시작하는 발판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4] 우승유는 이에 반대하며, 이는 당나라와 토번 간의 평화 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며, 전쟁이 시작되면 토번 군대가 쉽게 장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4] 문종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덕유에게 위주와 시담모, 그의 군인들을 토번에게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4] 토번은 시담모와 그의 군인들을 학살했다.[4] 이 학살은 우승유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고, 당시에는 우승유/이종민과 이덕유 사이의 갈등의 결과로 일반적으로 여겨졌다.[4] 문종이 이 결정을 후회하자, 우승유는 여러 차례 사직을 요청했다.[4] 특히 문종이 진정한 평화가 언제 올 것인지에 대해 재상들에게 여러 번 질문했고, 우승유는 단기간 내에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문종을 지나치게 조급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4] 833년 새해 즈음, 문종은 우승유를 회남 절도사(淮南, 현대 양저우시, 장쑤성)로 임명하고, 명예직으로 동 중서 문하 평장사 직함을 유지하게 했다.[4]
837년, 우승유는 명예직 삼공 중 하나인 사공(司空) 칭호를 받았고, 낙양 수비대장 겸 상서성 낙양 지부의 수장이 되었다.[5] 우승유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권력에 개의치 않고, 손님을 접대하고 희귀한 나무와 돌을 수집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5] 838년, 문종은 그를 장안으로 소환하여 상서성의 수장 중 한 명인 좌복사(左僕射)로 임명했다.[6] 당시 문종의 아들이자 태자인 이영이 문종에게 심하게 꾸짖음을 받은 후 사망했는데, (이영이 실제로 문종의 명령이나 묵인 하에 살해되었다는 의혹이 있었다) 우승유는 문종을 만나 부자 관계의 올바른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며 문종을 울게 만들었다.[6] 그 후 우승유는 발병을 핑계로 다시는 궁궐에서 문종을 만나지 않았고, 문종은 우승유를 면직시켰다.[6] 839년, 문종은 우승유를 산남동도 절도사 겸 수도인 상주(襄州)의 지사로 임명하고, 동 중서 문하 평장사 및 사공 직함을 명예직으로 유지하게 했다.[7] 그는 또한 우승유에게 많은 희귀한 고대 그릇을 하사하고 산남동도로 서둘러 보고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7] 우승유는 산남동도가 최근 대규모 자연 재해를 겪었고 즉시 돌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며, 문종의 말에도 불구하고 즉시 산남동도로 떠났다.[7]
2. 6. 당 무종 시기
840년, 당 문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당 무종이 뒤를 이었다.[19] 당 무종은 우승유에게 명예직인 임시 ''사도''(司徒, 삼공 중 하나)를 수여했다.[12] 그러나 당 무종의 즉위 직후 이덕유가 재상이자 조정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841년, 한수의 대홍수로 상주 백성들의 가옥이 파괴되자, 이덕유는 우승유를 비난하고 그의 지위를 박탈한 뒤 황태자의 수석 고문으로 만들었다.[19][20] 842년, 우승유는 다시 뤄양의 수비관이 되었다.[9]843년, 이덕유는 서대모(Xidamou)의 항복 문제를 재조사하여 우승유와 이종민을 고발했다. 당 무종은 서대모에게 사후 명예를 수여했지만, 당시에는 우승유나 이종민에 대해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1] (이는 일반적으로 이덕유가 우승유와 이종민에게 복수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이덕유가 그들을 직접 공격할 더 강력한 방법을 찾은 후에야 중단되었다).[22]
843년 후반, 유총간이 조의절도사 (昭義, 본부는 현재의 산시성 창즈)가 되었다. 당 무종은 이덕유의 조언에 따라, 유총간이 지정한 후계자, 유총간의 조카 유진(유총간이 양자로 삼음)에게 절도사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유진을 상대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명령했다.[21] 844년, 황실군이 유진을 멸망시킨 후, 이덕유는 당시 호주 (현대 저장성 후저우)의 지사였던 우승유와 이종민을 그들이 재상으로 재직하는 동안 유총간이 조의를 사실상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데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한 유총간과 유진이 우승유와 이종민과 교류한 증거를 찾기 위해 유진의 저택을 철저히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유총간의 비서 정경(鄭慶중국어)에게 유총간이 우승유와 이종민으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지만 모두 불태웠다고 보고하도록 유도했다. 어사 이회(李回중국어)와 정아(鄭亞중국어)도 이 보고에 동의했다. 또한, 허난부 (河南, 즉, 뤄양 지역) 부시장인 여술(呂述중국어)은 유진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우승유가 한숨을 쉬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 무종은 분노하여 즉시 우승유의 뤄양 수비관 직책을 박탈하고 황태자 고문으로 강등시켰다.[20] 또한 이종민을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장주 (현대 푸젠성 장저우)로 이동시켰다. 그 직후, 당 무종은 우승유를 정주 (현대 푸젠성 룽옌)의 지사로, 이종민을 장주의 비서감으로 추가로 강등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승유는 다시 순주 (현대 광둥성 후이저우)의 비서감으로, 이종민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봉주 (현대 광둥성 자오칭)로 유배되었다.[23]
2. 7. 당 선종 시기 및 사망
당 선종이 즉위한 846년, 이덕유가 권력을 잡는 것을 싫어한 선종은 이덕유를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종이 추방했던 우승유, 이종민, 최공, 양사부, 이각 등 다섯 명의 전직 재상들을 수도 가까이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때 우승유는 형주(형양, 호남) 지사 군사 자문관으로 이동했다.[23] 이후 여주(汝州, 현대의 평정산, 하남)로 이동했으며, 장안으로 소환되어 태자의 자문관이 되었다.[9][20] 우승유는 849년에 사망했고, 사후 명예를 받았다.[2]3. 우이당쟁(牛李黨爭)
840년 당 문제 사후 당 무종이 즉위하면서 이덕유가 조정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19] 843년, 이덕유는 서대모(Xidamou) 항복 문제를 재조사하여 우승유와 이종민을 고발했고, 유총간 사후 유진과의 분쟁에서도 이들을 모함했다.[21][22][20] 결국 우승유는 순주 비서감으로, 이종민은 봉주로 유배되었다.[23]
3. 1. 배경
정원 21년(805년) 진사이며, 호부 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역임했다. 이봉길, 이종민 등과 결탁하여 이덕유와 대립, '''우이의 당쟁'''을 일으켰다.[1]회창 3년(843년) 이덕유의 이당이 집권하자 순주 원외장사로 좌천되었다.[1] 회창 6년(846년) 선종 즉위 후 이당이 배척되자, 대중 원년(847년) 조정에 소환되어 태자소사가 되었다.[1] 이후 이덕유는 경주 사호로 부임지에서 사망, 우이의 당쟁은 우당의 승리로 끝났다.[1]
우승유는 『현괴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1]
3. 2. 전개
840년, 당 문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 당 무종이 즉위했다.[19] 당 무종은 우승유에게 명예직인 임시 ''사도''(司徒, 삼공 중 하나)를 수여했다.[12] 그러나 당 무종 즉위 직후 이덕유가 재상이자 조정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841년, 한수의 대홍수로 상주 백성들의 가옥이 파괴되자, 이덕유는 우승유를 비난하고 그의 지위를 박탈한 뒤 황태자의 수석 고문으로 만들었다.[19][20] 842년, 우승유는 다시 뤄양의 수비관이 되었다.[9]843년, 이덕유는 서대모(Xidamou)의 항복 문제를 재조사하여 우승유와 이종민을 고발했다. 당 무종은 서대모에게 사후 명예를 수여했지만, 당시에는 우승유나 이종민에 대해 더 이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21] 이는 일반적으로 이덕유가 우승유와 이종민에게 복수하기 위한 계획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이덕유가 그들을 직접 공격할 더 강력한 방법을 찾은 후에야 중단되었다.[22]
843년 후반, 유총간이 조의절도사 (昭義, 본부는 현재의 산시성 창즈)가 되었다. 당 무종은 이덕유의 조언에 따라, 유총간이 지정한 후계자이자 양자인 유총간의 조카 유진에게 절도사의 지위를 승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유진을 상대로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명령했다.[21] 844년, 황실군이 유진을 멸망시킨 후, 이덕유는 당시 호주 (현대 저장성 후저우)의 지사였던 우승유와 이종민을 그들이 재상으로 재직하는 동안 유총간이 조의를 사실상 독립적으로 통치하는 데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또한 유총간과 유진이 우승유와 이종민과 교류한 증거를 찾기 위해 유진의 저택을 철저히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하자, 유총간의 비서 정경(鄭慶중국어)에게 유총간이 우승유와 이종민으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지만 모두 불태웠다고 보고하도록 유도했다. 어사 이회(李回중국어)와 정아(鄭亞중국어)도 이 보고에 동의했다. 또한, 허난부 (河南, 즉, 뤄양 지역) 부시장인 여술(呂述중국어)은 유진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자 우승유가 한숨을 쉬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당 무종은 분노하여 즉시 우승유의 뤄양 수비관 직책을 박탈하고 황태자 고문으로 강등시켰다.[20] 또한 이종민을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장주 (현대 푸젠성 장저우)로 이동시켰다. 그 직후, 당 무종은 우승유를 정주 (현대 푸젠성 룽옌)의 지사로, 이종민을 장주의 비서감으로 추가로 강등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승유는 다시 순주 (현대 광둥성 후이저우)의 비서감으로, 이종민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봉주 (현대 광둥성 자오칭)로 유배되었다.[23]
정원 21년 (805년) 진사에 급제했다. 이후 호부 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에 올랐다. 이봉길, 이종민 등과 결탁하여 이덕유와 다투어, "우이의 당쟁"을 일으켰다.
회창 3년 (843년), 이덕유의 이당이 권력을 잡자 우승유는 순주 원외장사로 좌천되었다. 회창 6년 (846년)에 선종이 즉위하자, 이당은 배척되었고, 대중 원년 (847년)에 우승유는 조정에 소환되어 태자소사가 되었다. 그 후, 이덕유는 경주 사호로 부임지에서 사망했고, 우이의 당쟁은 우당의 승리로 끝났다.
3. 3. 종결
회창 6년(846년) 선종이 즉위하자 이덕유 계열은 배척되었고, 대중 원년(847년)에 우승유는 조정에 소환되어 태자소사가 되었다. 그 후, 이덕유는 경주 사호로 부임지에서 사망했고, 우이의 당쟁은 우당의 승리로 끝났다.[1]참조
[1]
웹사이트
http://dbo.sinica.ed[...]
[2]
문서
Commemorative Text for the Spirit Tablet for the Deceased Chancellor, Taizi Shaoshi, Posthumously-Honored Taiwei, Lord Niu
http://www.dushu.com[...]
[3]
서적
Niu Seng-ju (780-848) and his "Hsuan-kuai lu" (Ph.D. dissertation)
https://www.proquest[...]
University of Wisconsin
2023-06-17
[4]
서적
A Brief History of Chinese Fiction
Foreign Languages Press
[5]
웹사이트
Xuanguailu 玄怪錄
http://www.chinaknow[...]
2023-06-17
[6]
간행물
Daoist Transcendence and Tang Literati Identities in "Records of Mysterious Anomalies" by Niu Sengru (780-848)
https://www.jstor.or[...]
2007-12
[7]
웹사이트
平凉概况
http://www.pingliang[...]
[8]
서적
甘肃新县志便览
https://books.google[...]
甘肃人民出版社
1991
[9]
문서
New Book of Tang
[10]
웹사이트
漢川草廬-二十四史-新唐書-卷七十五‧表第十五
http://www.sidneyluo[...]
2009-12-19
[11]
문서
Old Book of Tang
[12]
문서
Old Book of Tang
[13]
문서
Zizhi Tongjian
[14]
문서
Zizhi Tongjian
[15]
문서
Zizhi Tongjian
[16]
문서
Zizhi Tongjian
[17]
문서
Zizhi Tongjian
[18]
문서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838
[19]
문서
Zizhi Tongjian
[20]
문서
[21]
문서
Zizhi Tongjian
[22]
문서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843
[23]
문서
Zizhi Tongjian
[24]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