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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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덕유는 당나라 중·후기의 문신으로, 재상을 역임하며 '우이의 당쟁'과 '회창의 폐불'에 연루되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한림학사, 중서사인 등을 거쳤으며, 경종, 문종, 무종 시대를 거치며 절강서도관찰사, 병부시랑, 재상 등을 역임했다. 무종 시대에는 회흘(위구르)과의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소의군 유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만년에는 선종에 의해 좌천되어 사망했으나, 사후에 복권되었다. 그는 정원가로서도 명성을 얻었으며, 저서로 《회창일품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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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 선종 때의 재상 - 마식 (당나라)
마식은 당나라 중기의 인물로, 헌종 연간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문종 연간에 재상이 되었으나 환관과의 관계로 파면되어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이덕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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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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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덕유 |
한자 | 李德裕 |
로마자 표기 | I Deok-yu |
자 | 문요 (文饒) |
시호 | 문헌 (文獻) |
작위 | 위공 (衛公) |
생애 | |
출생 | 787년 |
사망 | 850년 |
시대 | 당나라 |
관력 | |
주요 활동 | 재상 평로치청사 |
관직 | 중서시랑 문하시랑 집현전대학사 |
가계 | |
가문 | 조군 이씨 |
아버지 | 이길보 |
저서 | |
주요 저서 | 차공담론 평로평위록 회창일품집 |
2. 생애
이덕유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과거 시험에는 뜻이 없었다. 음서 제도로 교서랑이 되었다.
820년, 목종 즉위 후 한림학사가 되었고, 822년 중서사인으로 승진했다. 이 무렵 우승유, 이종민 등과 대립하며 '우이의 당쟁'을 일으켰다.
경종 시기 절강서도관찰사로 임명되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황제에게 바른 조언을 했다. 문종 즉위 후 829년 병부시랑이 되었으나, 이종민이 환관과 결탁하여 재상이 되면서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839년, 회남절도사 재임 중 엔닌의 천태산 유학 요청을 받았으나, 황제의 칙허가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17] 실제로 엔닌은 '불법 체류' 형태로 천태산을 가게 된다.[18]
840년, 무종 즉위 후 재상에 올라 지방 세력을 진압하며 태위 위국공이 되었다. 그러나 선종 즉위 후 조주, 애주로 좌천되어 사망했다.
이덕유는 회창의 폐불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한 명으로 비난받기도 한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당나라 덕종 시기인 787년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서균은 어사대부를 지냈고, 아버지 이길보는 헌종 때 재상을 지냈다. 이덕유는 젊은 시절 야심이 컸고 학문에 정진했는데, 특히 《한서》와 《좌전》에 집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과거에 응시하기를 원치 않았다. 덕종의 진원 연간(785년 ~ 805년)에 이길보가 유배되었을 때, 이덕유는 아버지를 따라가 관직을 구하지 않았다.[17]어릴 때부터 학문을 닦았지만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아 음서로 교서랑이 되었다.
2. 2. 헌종과 목종 시대
목종이 즉위하자 이덕유는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4] 얼마 지나지 않아 공부(工部)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郎)이 되었고, 한림학사직을 계속 유지했다. 이덕유는 황족들이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을 보고, 황족들이 재상 사무실에서 재상들을 만나도록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3] 그 후 이부(吏部) 고공랑중(考功郎中)으로 승진하여 조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3]821년, 이덕유는 우-이 당쟁의 발단이 된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덕유와 원진은 이종민과 권력 투쟁을 벌였는데, 이덕유는 이길보가 재상으로 있을 때 이종민과 우승유가 이길보를 비판했던 것에 대해 오랫동안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이종민의 동료인 양여사(楊汝士)와 예부시랑(禮部侍郎) 전휘(錢徽)는 과거 시험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절도사 단문창(전 재상)과 한림학사 이신은 특정 응시자들을 위해 전휘에게 청탁했다. 그러나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단문창과 이신이 추천한 응시자들은 합격하지 못했고, 합격자 중에는 시험 부서(門下省) 관리 정담의 형제인 정랑, 절도사 배도(전 재상)의 아들 배찬(裴譔), 이종민의 사위 소소(蘇巢), 양여사의 형제 양은사(楊殷士)가 있었다. 이로 인해 여론이 들끓었고, 단문창은 양여사와 전휘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목종이 한림학자들에게 의견을 묻자 이덕유, 원진, 이신 모두 단문창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에 목종은 이종민의 동료 왕기(王起)에게 재시험을 실시하도록 명령하고, 전휘, 이종민, 양여사를 지방 태수로 강등하고, 전휘와 양여사가 선발한 응시자 10명을 파면했다. 이것이 이덕유와 그의 측근들(이당)과 이종민과 그의 측근들(우승유의 이름을 딴 우당) 사이의 약 30년 간의 투쟁의 시작이라고 한다.[4]
822년, 이덕유는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고, 한림학사직을 계속 유지했다.[3] 그는 우승유와 함께 재상 후보로 고려되었다. 823년, 목종은 재상을 임명했고, 이덕유는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절서 관찰사(觀察使)로 파견되었다. 이덕유는 당시 재상 이봉길이 우승유를 재상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몰아내려는 책략이라고 믿었고, 그 후 우승유와 이봉길을 더욱 원망했다.[5]
이덕유가 절서 관찰사가 되었을 때, 절서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 전임자 두이직을 전복하려는 장교 왕국청(王國清)의 음모로 고통을 겪었고, 음모가 끝난 후 두이직은 군인들을 달래기 위해 회계의 재산을 소진했다. 이덕유는 검소하게 생활했고, 자신의 경비 예산의 나머지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그들에게 많은 것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만족했고, 그의 임명 2년 후에는 창고가 다시 가득 찼다. 그는 또한 회로 사람들의 방식을 바꾸어 그들에게 해로운 관습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회로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악령을 두려워하여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 아프면 가족을 버리곤 했다. 이덕유는 백성들 중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과도한 미신이라고 가르치고, 가족을 버린 사람들을 처벌하여 몇 년 안에 이러한 관습이 사라지게 했다. 그는 또한 회로의 다양한 사찰을 목록화하여 좋은 역사적 인물을 숭배하는 사찰만 남겨두고 1,010개의 다른 사찰을 파괴했다. 그는 또한 산에 있는 1,460채의 집을 파괴하여 산적이 작전 기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3]
2. 3. 경종과 문종 시대
824년, 당 목종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 당 경종이 황위를 계승했다.[5] 젊은 당 경종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같은 해 말 절서(浙西) Circuit에 궁궐에서 사용할 은제 그릇을 바치도록 명령했다. 이덕유는 이 Circuit의 비용 부담을 이유로 이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청원했다. 그의 청원에 대한 답변은 없었지만, 그가 그 후에 비단을 바치라는 명령을 철회해달라고 한 청원은 받아들여졌다.[3]같은 해 말, 인근 무녕(武寧, 현재의 장쑤성 쉬저우)의 절도사(節度使) 왕지행은 당 경종을 위해 사주(泗州, 현재의 장쑤성 화이안)에서 사람들이 삭발(불교 승려)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여 황제의 신적 가호를 구하고자 했다. 당 경종은 처음에는 동의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삭발을 하려고 사주로 몰려들었다. 이덕유는 이의를 제기하며 이 일이 계속되면 절서와 절동(浙東, 현재의 저장성 사오싱) 및 복건(福建, 현재의 푸젠성 푸저우)에서 약 60만 명의 싸울 수 있는 젊은이들을 잃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고, 당 경종은 이 관행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5]
825년, 이덕유는 당 경종에게 그의 방식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6부분으로 된 청원서를 제출했는데, 이는 각각 12개의 4자 구절로 된 6개의 시로 쓰여진 ''붉은 스크린의 6가지 격언''(丹扆六箴|단추육잠중국어)이라는 제목으로, 황제의 부적절한 행동을 여섯 가지 영역으로 지적하고 그가 변화하기를 희망했다:[3][5]
- 그가 조정 회의에 늦게 참석하고 충분히 자주 열지 않았다.
- 그가 부적절한 옷을 입고 있었다.
- 그가 너무 많은 공물을 요구하고 있었다.
- 그가 정직한 충고를 가볍게 여겼다.
- 그가 불량배들과 가까이 지냈다.
- 그가 너무 많은 장소에서 쾌락을 추구했다.
당 경종은 이덕유에게 감사를 표하고 칭찬하는 칙령을 내렸다.[5] 이덕유는 이것이 당 경종의 주의를 끌어 그를 장안으로 소환하기를 희망했지만, 당시 재상이었던 이봉길이 그 가능성을 막았다고 한다.[3]
경종의 치세에 절강서도관찰사(浙江西道觀察使)가 되어, 부임지에 선정을 베풀고, 임금을 간하는 등의 공적이 있었다. 문종의 즉위 후, 대화 3년(829년)에 병부시랑이 되었다. 당시 재상 배도는 이덕유를 재상의 반열에 들도록 추천했다. 그러나 이종민이 환관과 결탁하여 먼저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거꾸로 이덕유는 정활절도사로 지방으로 보내졌다. 회남절도사 재임 중 개성 4년(839년)에는 일본에서 온 유학승 엔닌으로부터 천태산 유학에 대한 편의를 요청받았지만, 절도사의 자립이 진전된 상황에서는 칙허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보였다.[17] 실제로 칙허는 내려지지 않아 엔닌은 '불법 체류' 형태로 천태산을 목표로 하게 된다.[18]
2. 4. 무종 시대: 재상 등용과 주요 정책
827년 경종이 암살당하고 그의 동생 문종이 즉위했다.[5] 829년, 문종은 이덕유를 장안으로 소환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 임명했다. 당시 재상 배도는 이덕유를 문종에게 재상으로 추천했지만, 민부시랑이었던 이종민이 환관들의 도움으로 이덕유보다 먼저 재상이 되었다. 이종민은 이덕유를 위협으로 여겨 의성절도사(義成, 본부는 현대 안양시)로 보냈다. 이종민의 추천으로 무창절도사(武昌, 본부는 현대 우한시)였던 우가 830년에 재상으로 소환되었고, 이종민과 우는 이덕유의 동맹 세력을 장안에서 내쫓았다. 배도도 산남동도절도사(山南東道, 본부는 현대 샹양시)로 쫓겨났다.[6]830년 이덕유는 의성에서 서천절도사(西川, 본부는 현대 청두시)로 전임되었다. 서천은 829년 남조의 침략으로 방어력이 약해져 있었는데, 이덕유는 노병 및 장교들과 상의하여 남조와 토번 제국 전선을 파악하고, 증원을 요청하며 병력 약화를 지적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진 후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국경 요새 방어 시설을 강화, 비상 식량을 비축하여 백성들의 안정을 찾게 했다.[6]
831년, 이덕유는 남조에 사신을 보내 829년 침략 당시 포로로 잡았던 서천 백성들을 돌려줄 것을 요청, 남조는 4,000명을 돌려보냈다.[6]
831년 말, 위주(維州, 현대 아바 티베트족 창족 자치주) 담당 토번 장교 시담모(悉怛謀)가 항복 의사를 밝혔다. 이덕유는 항복을 받아들이고 위주를 토번 공격 거점으로 삼으려 했으나, 우는 당나라와 토번 간 평화 조약 위반 및 전쟁 발발 시 토번 군대의 장안 도달 가능성을 들어 반대했다. 문종은 우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주와 시담모, 군인들을 토번에게 돌려주도록 명령했고, 토번은 시담모와 군인들을 학살했다. 이는 우에 대한 대중의 분노를 일으켰고, 우/이종민과 이덕유 갈등의 결과로 여겨져 이덕유는 우에 대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6]
832년, 문종은 시담모 사건 결정을 후회하며 우를 회남절도사(淮南, 본부는 현대 양저우시)로 임명했다. 이덕유는 장안으로 소환되어 병부상서(兵部尚書)가 되었고, 여론은 그를 다음 재상으로 예상했다. 이종민은 두총의 조언으로 이덕유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추천하며 화해를 시도했으나, 양우경(楊虞卿)의 반대로 생각을 바꾸었다.[6]
2. 4. 1. 재상 임명과 초기 활동
833년, 이덕유는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직함을 가지고 사실상 재상이 되었다. 이덕유는 문종을 만나 감사를 표했고, 문종은 그에게 조정 내 파벌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덕유는 문종이 파벌주의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조정 관리의 3분의 1이 파벌에 가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문종이 파벌주의를 싫어하는 점을 이용하여 염유경, 양씨의 측근인 장원부(張元夫)와 소환(蕭澣)을 포함하여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정부에서 몰아냈다. 그는 또한 양의 좌천, 정탄과 은유(殷侑)의 재능을 공개적으로 비하하는 등 여러 문제로 이종민과 곧 갈등을 빚었다. 그해 말, 이종민은 수도에서 쫓겨나 산남서도(山南西道)의 절도사로 부임했다.[6]같은 해, 선무(宣武, 현재 중국 허난성 카이펑에 위치) 절도사 양원경(楊元卿)이 병에 걸려 그의 후임에 대한 논의가 있었을 때, 이덕유는 유총간을 자의(昭義, 현재 중국 산시성 창즈에 위치) 절도사에서 선무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유씨 가문은 유총간의 아버지 유무 때부터 자의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그 기득권을 없애려 했다. 문종은 유총간과 맞설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이덕유의 제안을 따르지 않고, 전 재상 이성을 선무 절도사로 임명했다. 한편, 이덕유의 제안에 따라 문종은 아들 이용을 태자로 책봉하는 것 외에도 현종 때부터 궁궐 안에 갇혀 살았던 황자들에게 궁궐 밖에서 살면서 지방 관료로 임명하고, 딸들을 신속하게 결혼시키며, 황제 시험에서 더 이상 시를 시험하지 않도록 명했다. (그러나 황자들의 궁궐 밖 이주는 어떤 종류의 직책을 받는지에 대한 분쟁으로 인해 시행되지 않았다.)[6]
834년, 이덕유는 문종의 측근인 이충언의 임명을 반대하면서 문종의 불쾌감을 사기 시작했다. 이는 문종의 또 다른 측근인 정주와 정주와 이충언을 문종에게 추천한 환관 왕수징의 반감을 샀다. 왕, 정, 이충언은 이덕유에 대항하기 위해 이종민을 산남서에서 불러 다시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 직후, 이덕유는 스스로 산남서의 절도사로 임명되었고, 명예 직함으로 동중서문하평장사 직함을 계속 유지했다. 이덕유는 문종을 만나 장안에 머물고 싶다고 요청했다. 처음에는 문종이 동의하여 국방부 장관으로 장안에 머물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종민이 이는 이덕유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반대하자, 문종은 이덕유를 절동(浙東) 절도사로 보냈고, 더 이상 동중서문하평장사 직함을 유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7]
840년, 문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무종이 뒤를 이었다. 무종은 문제의 선택(조카 이성미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음)이나 재상 양사부 (무종은 후에 그가 자신의 또 다른 형제인 안왕 이융을 지지했다고 믿었다)와 이지 (무종은 후에 그가 이성미를 지지했다고 믿었다)의 선택이 아니었다.[8] 두 사람 모두 후세 역사가들에게 우파의 지도자로 여겨졌다.[9] 하지만 무종은 권력 있는 환관 구사량과 어홍지(魚弘志)의 선택을 받았다.[8] 무종은 양사부와 이지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을 재상직에서 해임했으며, 양사기가 이덕유를 추천했기에 회남에서 이덕유를 소환하여 재상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8]
이덕유가 장안에 도착하자 무종은 그를 시험 기관의 부책임자인 ''문하시랑''(門下侍郎)으로 임명하고, 다시 재상으로 임명하여 ''동 중서 문하 평장사''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무종을 만나 감사를 표할 때, 이덕유는 황제가 재상들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것과 황제와 관료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무종은 이에 동의했다.[8]
이덕유가 재상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양사부의 측근으로 여겨지던 배이직(裴夷直)과 이중민(李中敏) 등이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41년, 무종은 양사부와 이지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것에 여전히 분개하여 환관을 보내 양사부와 이지에게 자결을 명했는데, 두총이 이덕유에게 황제가 관료를 살해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도록 장려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덕유는 동료 재상 최공, 최단, 진일행과 함께 양사부와 이지를 위해 간청했고, 그들의 거듭된 탄원 끝에 양사부와 이지는 물론 배이직까지 강등되었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8]
2. 4. 2. 회흘(위구르)과의 전쟁
840년, 당나라의 동맹국인 회흘의 칸 야올로거 허사(藥羅葛闔馺중국어)와 재상 쥐에로우(掘羅勿중국어)가 대규모 하가지의 공격으로 사망했고, 남은 회흘 세력은 혼란에 빠졌다.[8] 혼란 속에서 회흘 귀족의 한 무리는 야올로거 우시(藥羅葛烏希중국어)를 새로운 칸으로 지지했고(우제 칸), 야올로거 허사의 형제 와모시는 다른 회흘 귀족들을 이끌고 국경 도시인 천덕(天德,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으로 가서 당나라에 항복하려 했다.[8]841년, 천덕의 지휘관 티엔모(田牟중국어)와 환관 감찰관 웨이 중핑(韋仲平중국어)은 승리를 거두고 싶어 와모시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고 공격할 것을 주장하며, 와모시가 우제 칸의 입장에서 반역자라고 주장했다.[8] 이덕유는 와모시가 반역자가 아니라고 지적했는데, 우제 칸이 칸의 칭호를 주장하기 전에 이미 항복하려 했고, 이전의 당-회흘 동맹에 기초하여, 와모시의 지휘를 받는 사람들과 같이 고통받는 회흘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무종은 이에 동의하여 와모시의 항복을 받아들였다.[8]
와모시는 이어서 회흘 사람들을 위한 긴급 식량 지원을 요청했고, 이덕유는 무종에게 이를 수용할 것을 제안했다. 문종이 소집한 후속 회의에서 천익성은 강력하게 반대하며, 이것은 사실상 적을 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덕유는 와모시가 계속 복종하든 그렇지 않든, 그의 백성들을 먹여 살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나라 군대가 그 시점에서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천덕이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천익성은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고, 무종은 와모시의 백성들에게 긴급 식량을 보내는 것을 승인했다.[8]
또한 이덕유의 조언에 따라 무종은 와모시에게 칙령을 내려 선종의 딸(그리고 무종의 이모) 태화공주를 찾아 돌려보내라고 요청했다. 태화공주는 이전 칸 충덕 칸과 화친 (정략 결혼)의 일환으로 결혼했으며, 무종의 조정은 하가지 세력이 회흘 세력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긴 이후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8]
842년, 이덕유의 조언에 따라 무종은 티안에게 회흘 불규칙군과의 교전을 중단하고 대신 그들을 식량으로 유인하여 허둥 서킷(河東, 현재의 산시성 타이위안)으로 보내도록 명령했다.[8] 또한 이덕유의 추천에 따라 장군 시 슝이 티안을 도와 회흘의 습격에 대비하도록 천덕으로 보내졌다.[8]
842년 여름, 우제 칸은 공개적으로 당나라 국경 지역을 공격했다. 무종은 이덕유에게 우제 칸과 그의 고문들을 향한 다양한 질책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여 공격을 재고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우제 칸이 태화공주에게 천덕을 작전 기지로 사용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도록 강요하자, 무종은 이덕유에게 다음과 같은 답변을 써서 보냈다:[8]
제거됨
이덕유의 조언에 따라 무종은 그 후 와모시(이 시점에서 당나라 황실의 이름인 이사중을 부여받음)와 장군 이충순(李忠順중국어)을 우제 칸과 싸우기 위해 국경으로 보냈다.[8] 한편, 843년 봄, 기습 공격에서 시슝은 우제 칸의 군대에 큰 손실을 입히고 태화공주를 구출한 후, 우제 칸은 도망갔고 더 이상 당나라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11]
2. 4. 3. 소의군(昭義軍) 유진(劉稹)의 반란 진압
840년, 문제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무종이 뒤를 이었다. 무종은 문제의 선택이나 재상 양사부와 이지의 선택이 아니었다.[8] 무종은 양사부와 이지를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을 재상직에서 해임했으며, 양사기가 이덕유를 추천했기에 회남에서 이덕유를 소환하여 재상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8]이덕유가 장안에 도착하자 무종은 그를 시험 기관의 부책임자인 ''문하시랑''(門下侍郎|문하시랑중국어)으로 임명하고, 다시 재상으로 임명하여 ''동 중서 문하 평장사''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무종을 만나 감사를 표할 때, 이덕유는 황제가 재상들에게 국정을 위임하는 것과 황제와 관료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무종은 이에 동의했다.[8]
843년 여름, 이덕유는 병이 깊어졌고, 양자이자 생질인 유진에게 조의의 절도사를 계승하게 하고 싶어했다. 이덕유는 곧 사망했지만, 유진은 그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고, 유진을 절도사로 임명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이덕유의 이름으로 작성하게 했다. 재상들은 조의에 대한 군사 작전이 수행하기 어렵다고 보고, 이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덕유는 조의가, 황하 북쪽의 다른 두 절도사, 즉 위보(현 허베이성 한단시 소재)와 정덕(현 허베이성 스자좡시 소재)와 달리 제국 정부에 반항하는 전통이 없다고 주장하며, 유덕유의 청원을 거부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유씨 가문이 조의를 계속 장악하도록 허용하면 다른 절도사들도 이를 따르려고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한 위보의 절도사 하홍경과 정덕의 절도사 왕원규가 유진을 돕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홍경과 왕에게 그들의 절도가 간섭받지 않을 것이며, 조의의 태항산 동쪽 5개 주 중 3개를 점령하는 책임을 지게 함으로써, 제국군이 위보나 정덕 근처에서 작전을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을 제안했다. 무종은 이에 동의했고, 제국 사신들이 위보와 정덕으로 파견되었다. 하홍경과 왕은 제국의 명령에 따르기로 동의했다.[11]
유진이 마침내 이덕유의 죽음을 발표한 후, 무종은 공개적으로 이덕유에게 추증을 내렸지만, 유진에게 이덕유의 관을 뤄양으로 운반하도록 명령했고, 유진의 생부인 유종소(劉從素|유종소중국어)를 만나 유진에게 이 명령을 따르도록 설득하라고 말했다. 유진은 거절했고, 무종은 조의에 대한 전면적인 군사 작전을 명령했다. 이덕유의 제안에 따라, 절도사들은 조의 내에서 특정 목표를 점령하도록 명령받았다. 왕은 싱저우(현 허베이성 싱타이시)를, 하홍경은 밍저우(현 한단시)를, 하양 절도사 왕모원(王茂元)은 쩌저우(현 산시성 진청시)를, 그리고 무녕 절도사 이연좌(李彥佐)와 하동 절도사 유면(劉沔)은 조의의 수도 루저우(潞州)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연좌가 전선으로 가는 길에서 지체하자, 이덕유의 조언에 따라, 무종은 그에게 진행을 촉구하는 가혹한 내용의 칙서를 발령했고, 또한 시웅을 그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결국 시웅이 이연좌의 군대를 인수하게 했다. 곧, 시웅은 이연좌의 군대를 인수하고 즉시 조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11]
한편, 조의 동쪽 전선에서 왕원규와 하홍경은 불화를 겪고 있었는데, 왕은 비밀리에 하홍경이 의도적으로 조의에 대한 공격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덕유의 제안에 따라, 무종은 중무 절도사 왕재(현 허난성 쉬창시)에게 추가 병력을 이끌고 조의 동부 주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는 중무군이 위보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는 하홍경을 놀라게 했고, 그는 조의를 공격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켰다. 하홍경이 군대를 출동시키자마자, 왕재의 명령은 하양 절도를 지원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는데, 유진은 제국 정부를 휴전으로 몰아가기 위해 하양 절도를 공격하고 있었고, 왕모원은 자신의 병으로 인해 이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 후 왕모원이 사망하자, 이덕유의 제안에 따라, 무종은 하양 군대를 왕재의 지휘하에 두었지만 그를 하양 절도사로 임명하지는 않았다.[11]
군사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당항의 반란이 발생하여 옌저우(현 산시성 위린시)를 공격했다. 이덕유는 유목민인 당항이 국경 관리들이 낙타와 말을 얻고 싶어했기 때문에 국경 관리들에게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 방랑 약탈자라고 지적하고, 당항이 거주하는 6개 절도사에 지휘 체계를 부과할 것을 제안했는데, 제국 황족이 명목상의 지휘를 맡도록 했다. 무종은 이에 동의했고, 그의 아들 이기(李岐)를 연왕(燕王)으로 명목상 임명하여 6개 절도사의 최고 사령관이자 당항의 최고 위로자으로 삼았으며, 관리 이회를 이기의 부관으로 임명하여 실제 당항 상황을 감독하게 했다.[11]
왕재가 조의 군대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쩌저우를 즉시 점령할 수 없었고, 유진은 하동의 절도사이자 전 재상인 이사의 사촌인 밍저우 지사 이전으로부터 유진이 항복할 의사가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 이덕유는 제안했고, 무종은 이에 동의하여, 이 제안에 대해 즉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이사에게 가혹한 내용으로 답변하여, 유진과 그의 가족 구성원이 스스로 묶여 조의와 하동의 국경으로 끌려온 경우에만 항복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지시했다; 그때서야 이사가 그들을 장안으로 호송하는 데 동의할 것이라고 했다.[11]
844년에는 장교 왕펑(王逢)의 지휘하에 있던 하동군은 위사(榆社, 현대의 진중시)에 주둔하고 있었고, 왕펑은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하동 본부는 병력이 부족했기에, 이시는 이전에 휘거(回鶻) 원정 당시 류몐이 횡수책(橫水柵, 현대의 다퉁시)에 배치했던 북부 전선의 병사 1,500명을 양변(楊弁) 장교의 지휘를 받아 태원으로 소환하여 왕펑을 지원하도록 했다. 설날 사흘 전에 횡수책의 병사들이 도착했지만, 순회 금고가 비어 있어서 이시는 원정군에게 관례적으로 지급되는 비단 포상을 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사재에서 비단을 꺼내야 했지만, 절반밖에 지급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왕펑과 함께 있던 환관 감시자 여의충(呂義忠)은 병사들에게 태원에 머물지 않고 새해를 보내지 않은 채 출발하도록 강요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병사들은 분노하고 고통스러워했고, 양변은 이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병사들에게 도시를 약탈하고 태원시를 장악하게 했다. 이시는 분주(汾州, 현대의 린펀시)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양변은 유진과 동맹을 맺었다.[11]
양변의 반란에 비추어, 조정 관리들 사이에서는 자의(昭義)에 대한 원정을 중단해야 한다는 즉각적인 요구가 있었고, 왕재조차 유진의 항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덕유는 반대하며, 유진의 항복은 그와 그의 가족이 스스로 속박할 경우에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양변의 반란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덕유의 조언에 따라, 무종 황제는 원정의 초점을 양변에게 먼저 집중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이시와 여에게 인근 주에서 병력을 모아 태원을 탈환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왕펑에게 하동군을 위사에 남겨두고 대신 의무(義武, 현대의 바오딩시)와 선무, 연해(兗海, 현대의 지닝시) 순찰구에서 파견된 병력을 이끌고 태원으로 향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또한 왕원규에게 병력을 태원으로 돌리도록 명령했다. 이는 위사에 있던 하동군에게 공포를 안겨주었고, 다른 순찰구의 병사들이 태원이 함락되면 그들의 가족을 학살할 것이 두려워, 그들은 여를 지휘관으로 하여 양변을 공격하기로 자원했다. 양변이 태원을 장악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여의 지휘하에 있던 하동군은 도시를 탈환하고 양변을 체포했으며, 그는 후에 장안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11]
한편, 이덕유는 왕재가 제주(澤州)를 더 압박하지 않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믿게 되었고, 무종 황제에게 이를 알렸다. 그 이유는 첫째, 시슝이 이전에 왕재의 아버지 왕지흥에 의해 거짓으로 고발되었고, 그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적대감이 있었기 때문에(따라서 왕재는 제주를 더 강하게 공격하면 시가 루주(潞州)를 점령할 기회를 잡을까 우려했다); 둘째, 왕재의 친아들 왕연실(王晏實)은 왕지흥이 아들로 입양하여 법적으로 왕재의 형제였는데, 자의 주 중 하나인 자주(磁州, 현대의 한단)의 지사였으며 유진에게 구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무종 황제는 왕재에게 칙령을 보내 다시 진격을 명령했고, 당시 의무의 절도사였던 류몐을 하양으로 이동시켜 왕재를 더욱 압박했다.[11]
같은 무렵, 무종 황제는 반대하는 조언에도 불구하고 도교 승려 조귀진(趙歸真)을 총애하기 시작했다. 무종 황제는 이덕유에게 조귀진이 자신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켜야 했다.[11] 한편, 이덕유는 항복한 자의 장교들로부터 정보도 얻고, 왕재, 왕펑, 그리고 하홍경에게 그들의 전술을 지시했다.[13]
이 시점에서, 흥주, 명주, 자주의 자의 병사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고, 유총건의 매형인 배문(裴問)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가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했던 유진의 신임 장교 류계(劉溪)에게 분노했다. 유진은 류계에게 세 개의 주를 관리하도록 맡겼다. 배문 역시 류계에게 분노했고,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믿었기에 왕원규와 하홍경에게 왕조(王釗)와 함께 항복했다. 이덕유의 권고에 따라, 무종 황제는 왕원규와 하홍경이 세 개의 주를 자신들의 순찰구에 합병하는 것을 고려하기 전에, 황제가 임명한 절도사 류준(盧均)을 급히 파견하여 세 개의 주를 접수하도록 했다.[13]
세 개의 주의 항복 소식이 루주에 도착하자, 루주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유진의 신임 장교 곽의(郭誼)를 필두로 한 장교들은 유진 가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자신들을 허락하여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조정에 바치고 항복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유진은 싸움 없이 그들을 허락하여 죽게 했고, 곽의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 후에도 유진 가문을 학살하고 조정에 항복했다.[13]
2. 4. 4. 회창폐불(會昌廢佛)
목종이 즉위하자(820년) 이덕유는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는 우승유, 이종민 등과 대립하며 당나라 시대 가장 격렬한 붕당 중 하나인 '우이의 당쟁'을 일으켰다. 또한, 후세의 불교도들에게는 도사 조귀진과 함께 '회창의 폐불'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비난받고 있다.2. 5. 선종 시대: 몰락과 죽음
당 선종은 평소 이덕유가 권력을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즉위하던 날, 이덕유가 황실 관리들의 축하 서신을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의식이 끝난 후 선종은 측근들에게 "나에게 다가온 자가 ''태위''(太尉)인가? 그가 나를 쳐다볼 때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라고 말했다.[13] 상복 기간이 끝난 다음 날, 선종은 이덕유를 수도에서 내보내 징저우에 본부를 둔 경남절도사(荊南節度使)로 임명하고, 명예직인 ''동 중서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직함을 계속 유지하게 했다. 이덕유가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수도에서 쫓겨난 것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전해진다.[13] 선종은 이후 이덕유의 측근들 중 일부도 수도에서 내보냈다.그 해 말, 무종이 유배 보냈던 다섯 명의 전직 재상들, 즉 우승유, 이종민, 최공, 양사복, 이각은 점차 장안으로 가까워졌다(이종민은 이송되기 전에 사망했다).[13] 이덕유는 그 후 낙양의 수비 임무를 맡게 되었고, 더 이상 ''동 중서문하 평장사''라는 명예직을 갖지 않았다. 847년, 재상으로 이덕유의 후임인 백민중의 추가적인 고발에 따라, 이덕유는 태자(당시 태자가 없었으므로 완전히 명예직이었다)의 선임 고문으로 임명되어 낙양에 사무실을 두도록 명령받았다.[13]
847년 가을, 오상의 형제 오여납(吳汝納중국어)은 오상이 부당하게 처형되었다고 주장하고 이신과 이덕유가 부당한 처형을 유발했다고 비난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선종은 최원조를 유배에서 소환하여 어사대(御史臺)에 그 사건에 대한 설명을 하게 했고, 어사대는 오상이 부당하게 처형되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결과, 이덕유는 더욱 강등되어 차오저우의 지사 군사 고문으로 유배되었다.[13] 848년 가을, 이덕유는 다시 강등되어 하이커우의 호구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850년경 새해에 사망했다.[13] 그의 관은 재상 영호도가 이덕유가 자신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꿈을 꾸었던 후 중재를 한 후에야 장안으로 돌아가 그곳에 묻히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전해진다.[14] 그러나, 이덕유의 작위는 860년, 선종의 아들 의종 치세 동안, 관리 유엽의 권고에 따라 사후에 복권되었다.[16]
3. 평가
후진의 재상 유욱은 ''구당서''의 주 편집자로, 이덕유에 대해 평가했다.[3] 유욱은 이덕유의 뛰어난 재능과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성격적 결함과 그로 인한 비극적 최후를 지적했다. 그는 이덕유가 권력욕에 사로잡혔다는 비난은 지나치다고 보았지만, 원한을 잊지 못하고 반대자들을 모아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의 한계였다고 평가했다.
명나라 시대부터 이덕유는 오공사에서 기념되었다.
3. 1. 긍정적 평가
후진의 재상 유욱은 ''구당서''의 주 편집자였으며, 이덕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3]신인 제가 어렸을 때, 저는 종종 어르신들이 위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당시 천자는 총명하고 용감했으며, 결단력이 빨랐고, 위공은 황제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직접 노력했습니다. 황제는 그의 조언을 경청했고, 많은 일들이 성사되었습니다. 황제와 신하의 관계는 천 년 동안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궁궐 안에서의 그의 조언과 전당에서의 보고서를 읽어보니, 그는 적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승리로 이끄는 전술을 제시했으며, 마치 유명한 궁수 양유기(養由基)가 화살을 빗나가는 일이 없는 것처럼, 그는 정말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문학적 능력에 관해서는, 엄안(嚴安)과 사마상여(한나라의 유명한 작가)만이 그의 서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통치 능력에 관해서는, 소하와 조참조차 그와 같은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가장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원한을 잊지 못했고, 은혜로 원망을 갚지 못했으며, 불화를 넘기지 못하고 대신 반대자들을 주변에 모았습니다. 그는 따라서 평민들과 칼과 곡괭이로 싸우는 것과 같았고, 그 결과 마침내 습한 바다에서 죽었으니, 이는 애석한 일입니다. 옛 속담에 수도의 번화한 시장에서 금을 훔친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재능이 있었지만,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중국어
명나라 시대부터 이덕유는 오공사에서 기념되었다.
3. 2. 부정적 평가
후진의 재상 유욱은 ''구당서''의 주 편집자였으며, 이덕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3]"제가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위공(이덕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종종 들었습니다. 당시 천자는 총명하고 용감했으며, 결단력이 빨랐고, 위공은 황제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직접 노력했습니다. 황제는 그의 조언을 경청했고, 많은 일들이 성사되었습니다. 황제와 신하의 관계는 천 년 동안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궁궐 안에서의 그의 조언과 전당에서의 보고서를 읽어보니, 그는 적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승리로 이끄는 전술을 제시했으며, 마치 유명한 궁수 양유기(養由基)가 화살을 빗나가는 일이 없는 것처럼, 그는 정말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문학적 능력에 관해서는, 엄안(嚴安)과 사마상여(한나라의 유명한 작가)만이 그의 서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통치 능력에 관해서는, 소하와 조참조차 그와 같은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권력욕에 사로잡혔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가장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원한을 잊지 못했고, 은혜로 원망을 갚지 못했으며, 불화를 넘기지 못하고 대신 반대자들을 주변에 모았습니다. 그는 따라서 평민들과 칼과 곡괭이로 싸우는 것과 같았고, 그 결과 마침내 습한 바다에서 죽었으니, 이는 애석한 일입니다. 옛 속담에 수도의 번화한 시장에서 금을 훔친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재능이 있었지만,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3. 3. 종합
후진의 재상 유욱은 ''구당서''의 주 편집자였으며, 이덕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3]유욱은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위공(이덕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당시 천자는 총명하고 용감했으며 결단력이 뛰어났고, 위공은 황제의 신뢰에 보답하고자 노력했다. 황제는 그의 조언을 경청했고 많은 일이 성사되었다. 황제와 신하의 관계는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궁궐 안에서의 그의 조언과 전당에서의 보고서를 보면,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승리로 이끄는 전술을 제시하는 것이 마치 유명한 궁수 양유기(養由基)가 화살을 빗맞히는 일이 없는 것과 같았으니, 그는 정말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문학적 능력은 엄안(嚴安)과 사마상여(한나라의 유명한 작가)만이 그의 서기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의 통치 능력은 소하와 조참조차 그와 같은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유욱은 이덕유가 권력욕에 사로잡혔다는 비난은 너무 가혹하다고 보았다. 그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원한을 잊지 못하고, 은혜로 원망을 갚지 못했으며, 불화를 넘기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자들을 주변에 모았다는 점이다. 이는 평민들과 칼과 곡괭이로 싸우는 것과 같았고, 결국 습한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애석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옛 속담에 수도의 번화한 시장에서 금을 훔친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듯이, 그는 분명히 재능은 있었지만 올바르게 행동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지적했다.
명나라 시대부터 이덕유는 오공사에서 기념되어 왔다.
4. 저서
- 次柳氏旧聞중국어 1권
- 西南備辺録중국어 13권 (실전)
- 会昌一品集중국어 20권
특히 会昌一品集중국어은 이덕유가 재상으로서 수완을 발휘했던 6년 동안 쓴 제(制)·조(詔)·상소문 등을 모은 것이다. 여기에는 위구르 제국 붕괴 후 남쪽으로 도망쳐 당나라 북변으로 흘러온 위구르 일파에 대한 대응, 소의군(昭義軍) 절도사 유진(劉稹)의 반란 평정 등 당시 정책의 양상을 직접적으로 그려내는 문장이 다수 실려 있다. 이는 무종(武宗) 시기 정치사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역사 관점에서도 중요한 사료로 주목받는다.[4]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2]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3]
서적
Old Book of Tang
[4]
서적
Zizhi Tongjian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Zizhi Tongjian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Zizhi Tongjian
[9]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0]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1]
서적
Zizhi Tongjian
[12]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New Book of Tang
[15]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16]
서적
Zizhi Tongjian
[17]
서적
入唐求法巡礼行記
開成4年正月17日
[18]
논문
漂流・遭難、唐の国情変化と遣唐使事業の行方
吉川弘文館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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