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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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내전은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요한 종교 개혁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어, 1638년 국민 언약 체결로 절정에 달했다. 주교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잉글랜드 의회와 갈등을 겪으며 아일랜드 반란이 촉발되었고, 이는 1642년 제1차 잉글랜드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1644년부터 1646년까지 스코틀랜드 내전이 발발, 잉글랜드 내전과 얽혀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찰스 1세 처형 이후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의 복위를 지지했으나, 크롬웰에게 패배하여 잉글랜드 연방에 편입되었다. 1660년 군주제 복원 이후에도 종교, 정부 형태, 고지대 문제 등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남아 자코바이트 반란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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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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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 | |
분쟁 원인 | 언약도와 왕당파 간의 갈등, 찰스 1세 지지 |
결과 | 언약도가 왕당파를 패배시켰으나, 1650년~1652년 잉글랜드 원두당의 스코틀랜드 정복으로 패배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파일:Royal Standard of Scotland (1603–1689).svg|size=23px]]" 왕당파 "[[파일:Green harp flag of Ireland 17th century.svg|size=22px]]" 아일랜드 동맹 |
교전국 2 | "[[파일:Scottish Covenanter Flag.svg|size=15px]]" 언약도 "[[파일:Scottish Covenanter Flag.svg|size=15px]]" 인게이저 "[[파일:Scottish Covenanter Flag.svg|size=15px]]" 교회당 |
교전국 3 | "[[파일:England]]" 잉글랜드 의회 |
지휘관 | |
왕당파 지휘관 | "[[파일:Royal Standard of Scotland.svg|size=22px]][[파일:Royal Standard of Scotland (1603–1689).svg|size=23px]]" 몬트로스 후작 "[[파일:Arms of Clan Macdonald of Macdonald.svg|size=22px]]" 알라스다르 막 콜라 "[[파일:Green harp flag of Ireland 17th century.svg|size=22px]]" 마그누스 오카헌 "[[파일:Royal Standard of Scotland.svg|size=22px]][[파일:Royal Standard of Scotland (1603–1689).svg|size=23px]]" 찰스 2세 |
언약도 지휘관 | "[[파일:Scottish Covenanter Flag.svg|size=15px]]" 아가일 후작 (교회당) "[[파일:Scottish Covenanter Flag.svg|size=15px]]" 알렉산더 레슬리 (교회당) "[[파일:Scottish Covenanter Flag.svg|size=15px]]" 데이비드 레슬리 "[[파일:Scottish Covenanter Flag.svg|size=15px]]" 해밀턴 공작 (인게이저) |
잉글랜드 의회 지휘관 | "[[파일:England]]" 올리버 크롬웰 "[[파일:England]]" 조지 뭉크 |
병력 규모 | |
왕당파 병력 | 변동, 한 번에 2,000 ~ 4,000명 |
언약도 병력 | 30,000명 이상, 그러나 대부분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주둔 |
사상자 | |
사상자 규모 | 양측 모두 전사자 총 28,000명, 질병으로 사망한 군인 더 많음. 민간인 사망자 약 45,000명, 질병 및 고의적 표적으로 인한 사망. |
스코틀랜드 내전 | |
날짜 | 1644년~1645년 |
장소 | 스코틀랜드 왕국 |
결과 | 잉글랜드 의회파의 승리 |
교전국 1 | "[[파일:Royal_Banner_of_Scotland.svg|border|22px]]" 스코틀랜드 왕당파 "[[파일:Green_harp_flag_of_Ireland_17th_century.svg|border|22px]]" 아일랜드 구교파 |
교전국 2 | "[[파일:Scottish_Covenanter_Flag.svg|border|x15px]]" 스코틀랜드 언약파 |
교전국 3 | 잉글랜드 의회파 |
지휘관 1 | "[[파일:Royal_Banner_of_Scotland.svg|border|22px]]" 몬트로스 후작 "[[파일:Royal_Banner_of_Scotland.svg|border|22px]]" 알라스다르 막 콜라 "[[파일:Royal_Banner_of_Scotland.svg|border|22px]]" 찰스 2세 "[[파일:Green_harp_flag_of_Ireland_17th_century.svg|border|22px]]" 마누스 오카헌 |
지휘관 2 | "[[파일:Scottish_Covenanter_Flag.svg|border|x15px]]" 아가일 후작 (교회당) "[[파일:Scottish_Covenanter_Flag.svg|border|x15px]]" 데이비드 레슬리 "[[파일:Scottish_Covenanter_Flag.svg|border|x15px]]" 해밀턴 공작 (서약도) |
지휘관 3 | 올리버 크롬웰 앨버말 공작 |
사상자 | 모두 합쳐 전사자 28,000명, 비전투 손실은 그보다 많음. 민간인 사망자 45,000여명. |
2. 스코틀랜드 내전의 기원 (1639-1642)
찰스 1세의 종교 개혁 시도는 스코틀랜드 교회(교회)에 대한 강요로 이어졌고, 이는 스코틀랜드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사회 각계각층의 대표들은 국민 언약을 체결하여 예배 방식의 '혁신'에 저항할 것을 맹세했다. 언약도들은 찰스 1세가 바꾸려 하는 종교 형태가 이미 확립되었고 신성하게 규정된 것이라 믿었기에, 찰스와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또한, 1603년 스튜어트 왕이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된 이후 스코틀랜드가 소외되었다는 불만이 팽배했고, 교회는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종교 개혁에 대한 반발은 더욱 거셌다.
1639년과 1640년의 주교 전쟁에서 언약도들은 승리하여 스코틀랜드를 장악했지만, 아일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까지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왕실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로 인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자금 지원을 거부했고, 찰스 1세는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형벌법을 폐지하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군대를 모집하려 했다. 이러한 전망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언약도들이 얼스터의 같은 종교 신자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곧 아일랜드의 개신교 정착민 대량 학살로 악화되었다.
1642년 4월, 언약도들은 로버트 먼로가 이끄는 군대를 얼스터로 보내 가톨릭교도에 대한 보복을 감행했다. 찰스 1세와 의회 모두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는 데는 동의했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않아 군사 자원 통제권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1642년 8월 제1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로 이어졌다.
날짜 | 사건 | 영향 | |
---|---|---|---|
배경 | |||
17세기 | 잉글랜드 & 스코틀랜드 귀족의 아일랜드 일부 지역 정착 |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불만 야기 | |
1581년 | 스코틀랜드 교회 국가 언약 |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를 거부 | |
1603년 3월 24일 | 왕관의 연합 | 제임스 6세와 1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됨 | |
1625년 3월 27일 | 찰스 1세가 제임스 6세와 1세를 계승 | ||
1625년 10월 | 소환령 |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귀족에게 주어진 모든 토지 하사 철회 | |
1636년 | 캐넌 서가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요됨 | ||
1637년 | 공동 기도서가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요됨 | 폭동 촉발 | |
1638년 2월 28일 | 국가 언약 (장로교) | 교회가 잉글랜드 교회를 거부 | |
1638년 12월 | 교회가 언약도에 의해 추방 | ||
제1차 주교 전쟁 (1639) | |||
1639년 6월 19일 | 베릭 조약 | 찰스 1세가 언약도에게 양보 제1차 주교 전쟁 종결 | |
(막간) | |||
1640년 6월 | 화염과 칼의 위임 | 언약도가 왕당파를 박해 | |
제2차 주교 전쟁 | |||
1640년 8월 28일 | 뉴번 전투 | 결정적인 언약도 승리 | |
1640년 10월 26일 | 리폰 조약 |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군대에 대한 비용 지불 강요 | |
1640년 8월 | 컴벌노드 채권 | 스코틀랜드 내전 (1644)과 인게이지먼트 (1647)를 예고하는 조약 | |
1641년 8월 10일 | 런던 조약 | 찰스 1세가 언약도에게 양보 주교 전쟁 종결 | |
(막간) | |||
1641년 10월 12일 | 사건 | 왕당파의 실패한 납치 시도 | |
1642년 | 언약도, 얼스터에 군대 상륙 | 아일랜드 연합군으로부터 정착민 보호 | |
2. 1. 국민 언약과 스코틀랜드 교회의 저항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교회)에 강요한 종교 개혁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반발은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사회 각계 대표들이 예배 '혁신'에 대한 저항을 맹세하는 국민 언약에 동의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찰스와의 정치적 대결에서 중요한 요인은 언약도들이 찰스가 변경하려 했던 확립되고 신성하게 규정된 종교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또한 언약은 1603년 스튜어트 왕이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된 이후 스코틀랜드가 소외된 것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표명했으며, 교회는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2. 2. 주교 전쟁과 스코틀랜드의 승리
1639년과 1640년 주교 전쟁에서 언약도들은 승리하여 스코틀랜드를 장악했지만, 아일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왕실 정책에 대한 반대로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자금 지원을 거부했고, 찰스 1세는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형벌법을 폐지하는 대가로 군대를 모집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에게 위협적이었으며, 언약도들이 얼스터의 종교 동료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자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곧 개신교 정착민 학살로 이어졌다.1642년 4월 로버트 먼로가 이끄는 군대가 얼스터로 파견되어 가톨릭교도에게 보복했다. 찰스 1세와 의회는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소집했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다. 군사 자원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은 1642년 8월 제1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로 이어졌다.
3. 스코틀랜드 내전 (1644-1646)
스코틀랜드 내전은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교회)에 강요한 종교 개혁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반대에서 시작되었다.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사회 각계 대표들이 예배 '혁신'에 대한 저항을 맹세하는 국민 언약에 동의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찰스와의 정치적 대결에서 중요한 요인은 언약도들이 찰스가 변경하려 했던 확립되고 신성하게 규정된 종교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또한 언약은 1603년 스튜어트 왕이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 된 이후 스코틀랜드가 소외된 것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표명했으며, 교회는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639년과 1640년 주교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언약도들은 스코틀랜드를 확고하게 장악했지만, 아일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왕실 정책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로 인해 잉글랜드 의회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자금 지원을 거부했고, 찰스는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형벌법을 폐지하는 대가로 그들로부터 군대를 모집하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망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적들을 모두 불안하게 만들었다. 언약도들이 얼스터의 같은 종교 신자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이는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을 촉발했고, 이는 곧 아일랜드의 개신교 정착민 대량 학살로 악화되었다.
언약도들은 1642년 4월 로버트 먼로가 이끄는 군대를 얼스터로 보내 가톨릭교도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찰스와 의회 모두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어느 쪽도 서로의 통제를 신뢰하지 않았다. 군사 자원 통제권을 둘러싼 투쟁은 결국 1642년 8월 제1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로 이어졌다.
잉글랜드 내전은 1646년 5월 찰스 1세가 잉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언약도 군대에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국왕에게 언약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한 후, 1647년 초 잉글랜드 의회 위원들에게 국왕을 넘겼다. 동시에 그들은 잉글랜드에서 군대 복무에 대한 일부 대금을 받았고, 그 후 북쪽으로 돌아갔다. 1646년에 몬트로스는 노르웨이로 떠났다.
1649년 6월, 망명한 찰스 2세는 몬트로즈를 명목상의 스코틀랜드 부지사로 복직시켰다. 찰스는 또한 아가일의 급진적인 장로교 교회 당이 지배하는 언약도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몬트로즈는 저지대에서 거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찰스는 언약도들이 지시하는 조건으로 왕이 되기 위해 가장 일관된 지지자를 부인하려 했다. 1650년 3월 몬트로즈는 그보다 먼저 보낸 주로 유럽 용병으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지휘하기 위해 오크니 제도에 상륙했다. 본토로 건너간 몬트로즈는 부족들을 모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4월 27일 로스셔에서 카비스데일 전투에서 기습을 받아 패했다. 한동안 방황한 후 그는 애신트의 닐 맥클라우드에게 항복했는데, 닐 맥클라우드의 정치적 적대감을 알지 못한 채 그에게 자신의 신변을 맡겼었다. 그는 포로로 에든버러로 끌려갔고, 5월 20일 의회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2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목에는 위샤트의 몬트로즈에 대한 찬양적인 전기가 걸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진정한 언약도이자 충실한 신하라고 주장했다.
3. 1. 왕당파와 언약도의 이념적, 정치적 차이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으로 장로교 구조와 칼뱅주의 교리를 가진 교회가 설립되었다. 1640년까지 스코틀랜드 인구의 2% 미만이 가톨릭 신자였으나, 교황주의에 대한 두려움은 널리 퍼져 있었다. 칼뱅주의자들은 '잘 정돈된' 군주제가 신의 계획의 일부라고 믿었기에, 국민 언약은 "우리의 재산, 육체, 생명으로 왕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는 데 헌신했다.이는 잉글랜드와 달리, 전쟁 기간 동안 모든 스코틀랜드인들이 군주제 자체는 신성하게 정해진 것이라고 동의했음을 의미한다.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서 언약도들이 찰스 1세의 복원을 지지하고, 제3차에서는 그의 아들을 지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언약도와 스코틀랜드 왕당파의 차이는 왕과 백성의 권위의 본질과 범위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대중적으로 통치되는 장로교회가 포함되었으며, 이러한 구별이 상대적으로 좁았기 때문에 몬트로스가 양쪽에서 싸운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왕당파는 종교적, 문화적, 정치적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스코틀랜드 고지대와 애버딘셔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몬트로스가 입장을 바꾼 것은 아가일의 야심을 불신하고, 그가 결국 스코틀랜드를 지배하고 왕을 폐위시킬 수도 있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이델터흐는 스코틀랜드의 독특한 문화, 정치, 경제 지역이었다. 게일어와 관습을 사용했으며, 당시에는 스코틀랜드 정부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일부 고지대 클랜들은 언약도의 강력하고 잘 조직된 저지대 기반 정부보다 찰스 왕의 더 먼 권위를 선호했다.
클랜 정치와 반목도 영향을 미쳤다. 장로교 캠벨은 수장인 아가일 후작 아치볼드 캠벨을 중심으로 언약도를 지지했고, 그들의 라이벌들은 자동적으로 반대편에 섰다. 아일랜드 해를 가로지르는 이러한 요인들이 겹쳤다. 예를 들어, 맥도널드 씨족은 가톨릭 신자였고, 캠벨 씨족의 맹렬한 적이었으며, 강한 게일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3. 2. 아일랜드 연맹의 개입과 그 영향
아일랜드 연맹의 스코틀랜드 원정은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씨족 간의 복잡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요한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국민 언약은 스코틀랜드를 장악했지만, 아일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이 일어나자, 언약도들은 1642년 4월 로버트 먼로가 이끄는 군대를 얼스터로 보내 가톨릭교도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스코틀랜드 종교 개혁으로 장로교이고 칼뱅주의인 교회가 설립되었다. 1640년까지 스코틀랜드인의 2% 미만이 가톨릭 신자였으며, 클랜라날드가 지배하는 사우스위스트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클랜 정치와 반목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로교 캠벨은 아가일 후작 아치볼드 캠벨을 중심으로 코베넌트를 지지했고, 그들의 라이벌들은 자동적으로 반대편에 섰다. 맥도널드 씨족은 가톨릭 신자였고, 캠벨 씨족의 맹렬한 적이었으며, 강한 게일어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아일랜드 연맹은 스코틀랜드 내전에 개입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내전이 1646년 5월에 종결된 후, 맥콜라는 남은 아일랜드 및 하이랜드 군대를 이끌고 연맹에 합류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몬트로스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 특히 아일랜드인들은 왕당파가 아가일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언약도들에게 포로로 잡힐 때마다 학살당했다.
4. 잉글랜드 내전과 스코틀랜드 (1642-1649)
1642년 8월,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 간의 갈등이 제1차 잉글랜드 내전으로 번지자, 스코틀랜드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양측 모두 1641년 아일랜드 반란 진압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서로의 통제를 신뢰하지 못했다. 군사 자원 통제권을 둘러싼 투쟁은 결국 제1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로 이어졌다.
1639년과 1640년 주교 전쟁에서 승리한 성약도(Covenant)는 스코틀랜드를 장악했지만, 아일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의 반대로 인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하자,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형벌법 폐지를 대가로 군대를 모집하려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1642년 4월, 로버트 먼로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은 얼스터로 파견되어 가톨릭교도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4. 1. 잉글랜드 의회파와의 관계 변화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교회)에 강요한 종교 개혁에 대한 반발은 1638년 국민 언약으로 이어졌다. 이 언약은 예배 혁신에 대한 저항을 맹세하고, 스튜어트 왕이 잉글랜드 왕국 왕이 된 후 소외된 스코틀랜드의 불만을 표명하며, 교회를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으로 여겼다.1641년 아일랜드 반란 이후,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자 스코틀랜드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잉글랜드 의회와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잉글랜드 내전은 잉글랜드 왕당파와 의회파 간의 갈등이었지만, 스코틀랜드는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이 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성약도(Covenant)는 잉글랜드 의회와 엄숙 동맹과 언약을 맺고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하였다. 이들은 잉글랜드 의회파를 지원하여 찰스 1세에 대항하였는데, 이는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이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신앙을 잉글랜드에 확산시키고, 잉글랜드 의회의 승리를 통해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정치적 독립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스코틀랜드 내부의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4. 2. 찰스 1세 처형과 그 이후
찰스 1세가 처형된 이후,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를 지지하며 잉글랜드 연방에 맞섰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2세와 브레다 조약을 맺고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찰스 2세는 1650년 6월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여 국민 언약과 엄숙 동맹에 서명했다.올리버 크롬웰은 이러한 위협에 맞서 1650년 7월 스코틀랜드를 침공했다. 데이비드 레슬리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은 던바 전투에서 대패했고, 크롬웰은 에든버러를 점령하고 스코틀랜드 남부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 군사적 재앙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내에서는 교회 당으로 알려진 급진파 성약도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이들은 스코틀랜드 왕당파와 협력하여 크롬웰에 맞서 싸웠다. 1650년 12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징집령을 내려 찰스 2세가 직접 지휘하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다. 하지만 이 군대는 훈련 부족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사기가 낮았다.
1651년, 크롬웰 군은 파이프에서 스코틀랜드 군을 격파하고 퍼스로 진격했다. 찰스 2세는 잉글랜드로 진격하여 왕당파 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나, 우스터 전투에서 패배하고 유럽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저항은 사실상 끝났다.

1651년부터 1654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는 왕당파 봉기가 일어났지만, 잉글랜드 연방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조지 몽크 장군은 스코틀랜드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어 잉글랜드 연방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를 통치했다. 1658년 크롬웰이 사망한 후, 몽크는 1660년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가서 찰스 2세의 왕정 복고를 지원했다. 스코틀랜드 의회와 입법 자치는 복원되었지만, 종교 문제 등 많은 갈등 요인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5. 잉글랜드 연방 시기 (1650-1660)
찰스 1세에 대항한 성약도(Covenant)는 이후 찰스 2세의 대의에 헌신하며, 의회의 간섭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장로교 스코틀랜드를 확보하려는 희망으로 그와 브레다 조약(1650년)을 체결했다. 찰스 2세는 1650년 6월 23일 모레이의 가머스에 상륙하여, 상륙 직후 1638년 성약과 1643년 엄숙 동맹을 서명했다.
새로운 성약도 동맹과 함께하는 찰스 2세의 위협은 새로운 잉글랜드 연방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겨졌으며, 올리버 크롬웰은 일부 부하들을 아일랜드 정복을 계속하게 하고 5월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는 1650년 7월 22일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여 에든버러를 향해 동해안을 따라 진격했다. 8월 말까지 그의 군대는 질병으로 인해 줄어들고 보급품이 부족해져, 던바 항구에 있는 기지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했다.
1651년부터 1654년까지 스코틀랜드에서 왕당파 봉기가 일어났다. 던노터 성은 1652년 5월 의회군에게 마지막으로 함락된 요새였다. 연합 제안에 따라 스코틀랜드는 런던의 통합 의회에서 30석을 얻었고, 몬크 장군이 스코틀랜드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군대는 잉글랜드 연방의 나머지 기간 동안 스코틀랜드를 주둔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한 후, 잉글랜드 연방 초기 몇 년 동안 우위를 다투던 파벌과 분열이 다시 나타났다. 크롬웰과 잉글랜드 의회를 내내 섬겼던 몬크는 자신의 최선의 이익과 조국의 이익이 찰스 2세의 복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1660년, 그는 군대를 스코틀랜드에서 남쪽으로 행진시켜 군주제의 복위를 보장했다. 스코틀랜드 의회와 입법 자치는 복위 하에 복원되었지만, 종교, 스코틀랜드의 정부 형태, 고지대의 지위 등 전쟁을 일으킨 많은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1688년 명예 혁명 이후, 더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동일한 분쟁으로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5. 1. 크롬웰의 스코틀랜드 정복
데이비드 레슬리가 지휘하는 스코틀랜드 성약도 군대는 올리버 크롬웰의 진격을 감시하고 있었다. 레슬리는 크롬웰의 병든 병사들이 배에 오르는 것을 보고 공격을 준비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성약도 총회에 의해 자신의 판단과 반대로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보고한다. 크롬웰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신형 육군은 1650년 9월 3일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에게 치명적인 패배를 안겼다. 레슬리의 군대는 전멸하여 14,000명 이상의 사상자(사망, 부상, 포로 포함)를 냈다. 크롬웰 군은 이후 에든버러를 점령했고, 연말까지 그의 군대는 스코틀랜드 남부 대부분을 점령했다.이러한 군사적 재앙은 교회 당으로 알려진 급진적인 성약도를 불신하게 만들었고, 성약도와 스코틀랜드 왕당파는 크롬웰의 스코틀랜드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최소한 일시적으로) 그들의 차이점을 묻도록 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650년 12월 징집령을 통과시켜 각 자치구와 샤이어가 병사 할당량을 징집하도록 했다. 고지대와 저지대 모두에서 새로운 징병이 실시되어 국군으로 명명된 진정한 국가 군대가 결성되었으며, 이는 찰스 2세 자신이 지휘했다. 이는 전쟁 중에 스코틀랜드가 투입한 가장 큰 병력이었지만,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구성원인 왕당파와 성약도 세력들이 최근까지 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낮았다.
1651년 7월, 존 램버트 장군이 지휘하는 크롬웰 군의 일부가 포스 만을 건너 파이프로 진입하여 인버케이싱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을 격파했다. 신형 육군은 퍼스에 있는 왕실 기지로 진격했다. 찰스는 포위될 위험에 처하여, 크롬웰을 피하고 그곳에서 왕당파 봉기를 일으키려는 필사적인 최후의 시도로 자신의 군대를 잉글랜드 남부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크롬웰은 찰스를 잉글랜드로 따라가고 조지 몽크를 스코틀랜드에서의 작전을 마무리하도록 남겨두었다. 한편, 몽크는 8월 14일에 스털링을, 9월 1일에 던디를 점령하여, 보고에 따르면 12,000명 인구 중 최대 2,000명을 살해하고, 도시 항구의 모든 배 60척을 파괴했다.
스코틀랜드 왕국군은 잉글랜드 서부로 진격했는데, 그 지역에서 잉글랜드 왕당파의 동조가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잉글랜드 왕당파가 군대에 합류했지만, 찰스와 그의 스코틀랜드 지지자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크롬웰은 마침내 1651년 9월 3일 우스터에서 새로운 국왕과 교전하여 그를 격파했고, 이 과정에서 그의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3,000명을 살해하고 1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크롬웰에게 잡힌 많은 스코틀랜드 포로들은 서인도 제도, 버지니아, 메인주 베릭에서 노예 노동으로 팔려갔다. 이 패배는 스코틀랜드의 전쟁 노력이 실제로 끝났음을 의미했다. 찰스는 유럽 대륙으로 탈출했고, 그의 도주로 인해 크롬웰의 침략에 저항하려는 성약도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5. 2. 잉글랜드 연방의 통치와 스코틀랜드의 변화
1651년 우스터 전투에서 잉글랜드 연방이 승리한 후, 스코틀랜드 의회는 해산되었고, 연합 제안에 따라 잉글랜드 의회에 30석이 주어졌다. 조지 몽크 장군은 잉글랜드 연방 시기 스코틀랜드를 점령한 의회군을 지휘했으며, 스코틀랜드 군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알라스데어 맥콜라가 군대를 일으켰던 서부 고지대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왕당파 반란이 계속되었다. 1653년부터 1655년까지 북서부 고지대에서 친 왕당파 봉기가 일어났으나, 6,000명의 뉴 모델 아미 병력이 투입된 후에 진압되었다. 몽크는 인버네스를 포함한 고지대 전역에 요새를 주둔시키고, 왕당파 저항 세력을 서인도 제도로 계약 노동자로 추방하면서 진압했다.
이전의 왕당파 또는 언약도 군인이었던 모스트루퍼로 알려진 무법자들이 의회군과 스코틀랜드 민간인을 공격하면서 불법 행위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6. 결론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 교회에 강요한 종교 개혁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반대는 1638년 국민 언약 체결로 이어졌다. 이는 스튜어트 왕가가 잉글랜드 왕국 왕이 된 이후 스코틀랜드가 소외된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며, 교회는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641년 아일랜드 반란은 개신교 정착민 대량 학살로 이어져 제1차 잉글랜드 내전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내전으로 스코틀랜드에서만 약 28,000명이 전투로 사망했고, 질병까지 포함하면 실제 군 사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과 질병으로 약 15,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1645~1649년 사이 흑사병으로 30,000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잉글랜드 내전과 아일랜드 연맹 전쟁에서 사망한 스코틀랜드 군인까지 고려하면, 세 왕국 전쟁은 스코틀랜드 역사상 가장 참혹한 사건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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