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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이스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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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슬로이스 해전은 1340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백년 전쟁의 주요 국면 중 하나이다. 잉글랜드는 플랑드르 지역에 군대를 상륙시키기 위해 프랑스 해군을 공격했고,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며 승리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도버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프랑스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주장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을 변화시켰다. 프랑스 해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지휘관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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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이스 해전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슬로이스 해전
다른 이름에클루즈 해전
일부백년 전쟁
날짜1340년 6월 24일
장소프랑스 플란데런의 슬뤼 앞바다 (현재 네덜란드 제일란트 지방의 슬로이스)
좌표51°21′00″N 3°22′30″E
결과잉글랜드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잉글랜드 왕국
교전국 2프랑스 왕국
교전국 3제노바 공화국
지휘관
지휘관 1에드워드 3세
지휘관 2헌팅던 백작
지휘관 3위그 키에레
지휘관 4니콜라 베유셰
병력 규모
병력 1120-250척
병력 2190-213척
피해 규모
피해 1400-600명 사망, 2척 손실
피해 216,000-20,000명 사망, 190척 손실 (166척 나포)
추가 정보
중세 해전 묘사
장 프로아사르의 연대기에 실린 전투 세밀화

2. 배경

1337년 잉글랜드에드워드 3세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 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고 저지대(네덜란드) 제후들의 군대를 고용하여 북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필리프 6세는 전투를 회피했고, 저지대 제후들도 전투 의지가 약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40년에는 전쟁 자금이 고갈되자, 에드워드 3세는 아르테벨데의 지도 아래 플랑드르 백작을 추방하고 자치 정부를 세운 플랑드르 도시 연합과 동맹을 맺고, 필리파를 브뤼헤에 남겨두고 새로운 병사와 자금을 모으게 한 후 잉글랜드로 귀환했다.[2]

한편, 프랑스는 노르망디제노바 용병들로 구성된 대해군을 집결시켜 잉글랜드 해안과 선박을 여러 차례 습격하며 잉글랜드 침공을 저지하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의회를 열어 자금을 확보하고, 특별 오항 등에서 최대한 많은 배와 병사들을 모아 플랑드르로 향했다.

2. 1. 전쟁의 원인

1066년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국왕들은 프랑스 내에서 작위와 영토를 소유해 왔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 국왕의 봉신이 되었다.[2] 프랑스 국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토를 빼앗으면서 잉글랜드 세력의 성장을 체계적으로 억제하려고 했다. 수 세기 동안 프랑스 내 잉글랜드 영토의 규모는 다양했지만, 1337년에는 프랑스 남서부의 가스코뉴와 프랑스 북부의 퐁티외만 남았다. 독립적인 성향을 가진 가스콘인들은 그들만의 관습과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생산한 레드 와인의 상당 부분은 수익성 있는 무역을 통해 잉글랜드로 수출되었다. 이 무역에서 거둔 세금은 잉글랜드 국왕에게 상당한 수입을 제공했다. 가스콘인들은 자신의 일에 간섭하는 프랑스 국왕보다 자신들을 내버려 두는 먼 곳의 잉글랜드 국왕과의 관계를 선호했다. 필립 6세와 에드워드 3세 사이의 일련의 불화 이후, 1337년 5월 24일 필립의 대평의회는 파리에서 에드워드가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아키텐 공국(사실상 가스코뉴)을 필립의 소유로 되돌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것은 116년 동안 지속될 백년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2. 2. 양측 해군력

프랑스 해군은 제노바모나코에서 고용한 갤리선으로 보충되었다. 갤리선은 얕은 흘수와 노를 이용해 얕은 항구에 진입할 수 있었고, 기동성이 뛰어나 약탈과 함대전에 효과적이었다. 프랑스는 갤리선을 이용해 영국의 상업 선박을 방해하고, 잉글랜드 남동부 해안을 마음대로 급습했다.[2] 갤리선 운영은 전문적인 활동이었고, 제노바, 모나코 등 지중해 항구 출신 숙련된 선원들이 필요했다.[2]

영국은 전용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왕은 상선인 코그선을 징발해야 했다. 코그선은 깊은 흘수와 둥근 선체를 가지고, 중앙에 있는 큰 돛으로 추진되었다. 선수와 선미에 나무로 된 "성곽"을 추가하고 돛대 꼭대기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군함으로 개조되었다. 코그선은 약 203209.40kg에서 약 304814.10kg의 배수량을 가져 많은 병사를 수송할 수 있었고, 높은 자유현 덕분에 근접전에서 유리했다. 영국 관습법에 따라 왕은 징발된 선박 소유주에게 보상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적고 늦게 지불하여 선주들이 징발에 응하는 것을 꺼리게 했다.[2]

2. 3. 이전 활동

1337년 잉글랜드에드워드 3세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한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고 저지대(네덜란드) 제후들의 군대를 고용하여 북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전투를 회피했고, 저지대 제후들도 전투 의지가 약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40년에는 전쟁 자금이 고갈되자, 에드워드 3세는 전략을 바꾸어 아르테벨데의 지도 아래 플랑드르 백작을 추방하고 자치 정부를 세운 플랑드르 도시 연합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아내 필리파를 브뤼헤에 남겨두고 새로운 병사와 자금을 모으게 한 후 잉글랜드로 귀환했다.[2]

한편, 프랑스는 노르망디제노바 용병들로 구성된 대해군을 집결시켜 잉글랜드 해안과 선박을 여러 차례 습격하며 잉글랜드 침공을 저지하려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의회를 열어 자금을 확보하고, 특별 오항 등에서 최대한 많은 배와 병사들을 모아 플랑드르로 향했다.

오항(Cinque Ports)


1338년 3월, 포츠머스가 프랑스 갤리선에 의해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9월에는 왈헤렌 해역에서 아르네무이던 해전이 벌어져 양모를 싣고 있던 영국 선박 5척이 나포되었다. 침몰된 선박 중에는 에드워드 3세의 전함 2척인 크리스토퍼호와 코그 에드워드호가 포함되어 있었다. 10월에는 주요 항구인 사우샘프턴이 함락되어 불탔고, 이듬해에는 헤이스팅스가 공격받았다.

1339년, 프랑스군에 고용된 제노바 용병들 사이에 불만이 쌓였다. 지휘관이 급료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노바 용병들은 프랑스 측의 책임이라고 믿고 8월에 프랑스 국왕을 알현하려 했으나 투옥되었고, 이에 제노바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지중해로 돌아갔다.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이 제노바에 도착하자, 그들은 지배층 귀족들을 전복하는 봉기를 주도했다. 새로운 정권은 프랑스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려 하지 않았다. 설득되어 계약을 체결한 몇몇 선장들은 영국 측의 매수로 계약을 파기했다.

1340년 1월, 영국은 프랑스 갤리선 함대 대부분이 항구 해변에 정박해 있으며 경계가 허술했던 불로뉴 항을 성공적으로 습격했다. 안개를 이용하여 프랑스군을 기습한 영국군은 갤리선 18척, 다른 선박 24척, 대량의 해군 장비와 항구 지역 대부분을 파괴하고 물러났다. 프랑스는 6척의 갤리선만 남았고, 여기에 노 젓는 바지선 22척을 추가했다.

갤리선의 손실로 프랑스의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대한 위협이 줄어들었고, 영국 함선은 공세 작전에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1340년 겨울과 봄 동안 디에프, 르 트레포르, 메르 등 프랑스 항구가 성공적으로 습격당했다.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상선을 징발하는 방편을 사용했다. 필리프 6세는 주로 노르망디 출신의 선박 200척을 모아 "대해군"을 편성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프랑스 문서에는 함대의 규모가 202척으로 기록되어 있다. 갤리선 6척, 왕실 전함 7척, 노 젓는 바지선 22척, 상선 167척이었다. 승무원은 19,000명이 넘었지만, 그중 정규군은 150명, 석궁병은 500명에 불과했다. 함대는 브르타뉴 기사 위그 키에레, 프랑스 해군 사령관과 프랑스 군부 최고위 인사인 니콜라 베위셰, 그리고 프랑스 대 원수가 지휘했다. 6척의 갤리선은 피에트로 바르바베라가 지휘했는데, 그는 지중해에서 코르세어로 활동하며 경험을 쌓았다.

가스코뉴가 전쟁의 원인이었지만, 에드워드 3세는 이 지역에 거의 자원을 할당하지 않았고, 1340년에는 주력군을 프랑스 북동부에서 작전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상륙시켜 대륙 동맹국들, 즉 여러 신성 로마 제국 국가들과 겨울 동안 프랑스에 반란을 일으켜 4월에 공세를 감행했으나 실패한 플랑드르인과 합류하기를 원했다. 5월 18일, 이들 세력에 대한 프랑스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엇갈렸다. 수적으로 열세인 에드워드 3세의 동맹국들은 영국군의 지원을 간절히 원했다.

3. 전투

프랑스 해군은 제일란트의 에클뤼즈(슬로이스)에 집결하였고, 에드워드 3세가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 숫자는 190척이었다. 함대 사령관은 프랑스 해군의 제독이었던 위그 키에레와 육군 사령관 니콜라 베위셰(본래는 재무담당 법률가) 그리고 제노바의 용병선장 바르바베라였다.

중세 후기 갑옷을 착용한 남성의 흑백 흉상


잉글랜드 함대는 200척이었으나, 왕비의 시녀 등 비전투원이 많이 탑승했고, 수송선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잉글랜드 역사서 대부분은 잉글랜드 함대가 전력상 열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잉글랜드 함대가 접근하자, 해전 전문가인 바르바베라는 해상 전투를 제안했으나, 베위셰는 항구에 정박하여 배를 연결해 요새처럼 방어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당시 해전은 통일된 행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전력 우위를 고려한 상식적인 작전이었다.

바르바베라는 이에 불만을 품고 20척 정도의 갤리선을 이끌고 잉글랜드 함대 일부와 교전, 에드워드 3세에게 부상을 입히고 잉글랜드 선박 1~2척을 나포한 후 전장에서 이탈했다.

에드워드 3세는 곧 회복하여 함대를 정비하고 6월 24일 아침, 프랑스 함대와 대전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바람과 태양을 등지는 유리한 위치에서 정면과 측면 공격을 가했다. 당시 해전은 백병전이 주를 이루었으나, 잉글랜드군이 우세했고, 플랑드르 함대(약 50척) 참전으로 잉글랜드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중세 시대 소형 1척의 돛단배 사진

3. 1. 전개

1340년 잉글랜드에드워드 3세는 그의 군대를 플랑드르 슬뤼스에 상륙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해군은 슬로이스 항구를 봉쇄하고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3열로 배치되어 즈윈 강 어귀를 가로막고 있었고, 배들은 쇠사슬과 밧줄로 서로 연결되어 "성곽의 줄"과 같았다.[4] 이는 방어적인 전투를 하는 함대의 일반적인 중세 전술이었다.

제노바 출신 용병 함장 바르바베라(Barbavera)는 경험 많은 해전 전문가였다. 그는 프랑스 함대가 정박지에서 기동성이 부족하고, 배에 탄 영국 궁수들의 공격에 취약해질 것을 우려했다. 바르바베라는 프랑스 사령관들에게 출항하여 풍향(weather gage)을 확보하고, 영국군이 상륙할 때 공격하거나 공격 위협으로 상륙을 저지하도록 조언했다.[4]

그러나 총지휘를 맡았던 니콜라 베위셰(Nicolas Béhuchet)는 해상 작전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그는 바르바베라를 평민 출신으로 해적과 가깝다고 여겼고, 잉글랜드 함대가 빠져나갈 가능성을 피하고 싶어 항구 입구를 막는 위치를 고수했다.[4] 바르바베라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부하 20척 남짓의 갤리선을 이끌고 잉글랜드 함대 일부와 교전하여 에드워드 3세를 부상시키고, 잉글랜드 배 1~2척을 나포하여 전장에서 이탈했다.

에드워드 3세는 곧 부상에서 회복하고, 함대를 정비한 다음 1340년 6월 24일 아침 항구에 주둔 중이던 프랑스 함대와 대전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바람과 조류를 이용하고 태양을 등지는 좋은 위치를 차지했다.[2] 잉글랜드 함대는 한 부대는 정면에서, 다른 부대는 측면에서 공격하게 했다.

당시 해전은 적선에 올라타 빼앗는 백병전이 주를 이루었다.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의 우월한 사거리와 연사 속도를 이용해 프랑스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프랑스군도 석궁으로 반격했지만, 잉글랜드 장궁병에 미치지 못했다.[2] 저녁까지 전투가 이어졌고, 플랑드르 함대 약 50척이 참전하면서 잉글랜드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3. 2. 전투의 양상

이 전투는 백병전 위주로 진행되었다. 잉글랜드군은 장궁병의 지원을 받는 중장보병을 활용하여 프랑스 함선을 점령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잉글랜드군은 장궁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프랑스군에게 피해를 입혔고, 근접전에서는 중장보병이 활약했다.

장궁병


프랑스 함선은 쇠사슬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기동성이 제한되었다.[2] 이는 잉글랜드군의 집중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잉글랜드군은 개별 함선이나 소규모 함선 부대에 집중 공격을 가하여 프랑스 함대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2]

잉글랜드 함대는 바람을 등지고 태양을 마주보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다.[2] 잉글랜드군은 바람과 조류의 이점을 활용하여 공격을 개시했고, 프랑스 함대는 역풍과 비좁은 공간 때문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전투는 저녁까지 이어졌고, 플랑드르 함대(약 50척)가 잉글랜드 측에 가담하면서 잉글랜드의 승리가 확정되었다.[2]

3. 3. 결과

프랑스 함대는 거의 괴멸되었고, 지휘관 키에레와 베위셰는 전사했다.[7] 잉글랜드는 제해권을 장악하고, 병력과 물자 수송이 원활해졌다. 프랑스 측은 바르바베라의 이탈을 패배 원인 중 하나로 지목했다.

몰라뒤주르단에 따르면, 베위셰가 포로가 되었을 때, 범죄자처럼 돛대에 매달려 목이 매달릴 직전에 에드워드의 탑승함 토마스호에서 에드워드에게 폭행을 가했다고 한다.

이 해전의 승리로 잉글랜드는 도버 해협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잉글랜드에서 병력, 물자, 자금 수송이 용이해졌으므로 본격적인 침공이 가능해졌다. 또한 프랑스에 대한 최초의 큰 승리였으며, 그때까지 프랑스 왕과 여러 나라의 군주, 귀족들은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주장을 가볍게 여겼지만, 이 승리로 그 주장에 현실성이 생겼다.

프랑스 측에서는 패전의 원인을 바르바베라가 전장에서 일찍 이탈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노르망디의 원군에 대해서도 프루아사르 등은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었다고 전한다.

> 프랑스인들은 이들 노르망디인들을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해적들이 죽어도 우리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녀석들은 그저 도둑일 뿐이다…… 프랑스 왕은 그들의 죽음으로 20만 플로린을 벌었다. 그들의 4개월치 봉급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고, 바다가 그들의 해적 행위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기세등등해진 잉글랜드군의 공세는 그 후 시들해졌고, 같은 해에 양국은 휴전 조약을 체결했지만, 이것은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고, 1341년의 브르타뉴 계승 전쟁, 데이비드 2세의 스코틀랜드 귀국 등으로 인해 본격적인 장기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필리프 6세는 새로운 제독으로 그의 사촌 루이 데스파뉴(또는 루이스 드 라 세르다, 카스티야 왕 알폰소 10세의 증손자이자 클레르몽 백작 및 탈몽 백작, 후일 카나리아 제도 통치자)를 임명하여 새로운 해전에 대비했다.[7] 또한 승리했지만 해군력의 취약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잉글랜드는 함대를 정비했고, 이것이 브르타뉴브레스트 등의 거점을 건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화 양면 이미지, 앞면에는 배에 앉아 있는 왕관을 쓴 인물이 보임
1354년 제작된 금화 노블 앞면에는 해전을 기념하여 배에 앉아 있는 에드워드가 묘사되어 있음


필리프 6세(왼쪽)와 에드워드 3세. 프로이사르의 『연대기』에서

4. 영향

잉글랜드는 슬로이스 해전의 승리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병력, 물자, 자금 수송이 원활해져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이 가능해졌다. 또한, 이 승리는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강화시켰다. 이전까지 프랑스 왕과 여러 나라 군주, 제후들은 에드워드 3세의 주장을 가볍게 여겼으나, 이 승리로 인해 현실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7]

프랑스 측에서는 패전의 원인을 바르바베라가 너무 일찍 전장에서 이탈한 것과 노르망디 함선에 대한 불신으로 보았다. 프로이사르 등에 따르면, 일부 프랑스인들은 노르망디인들을 해적으로 폄하하며 그들의 죽음으로 프랑스 왕이 20만 플로린을 절약했다는 견해도 있었다.[7]

같은 해, 양국은 휴전 조약을 맺었으나, 이는 새로운 전투를 위한 준비 기간에 불과했다. 1341년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데이비드 2세의 스코틀랜드 귀국으로 인해 백년 전쟁은 장기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7]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새로운 제독으로 그의 사촌 루이 데스파뉴를 임명하여 해전에 대비했다. 잉글랜드는 해군력 강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함대를 정비하여 브르타뉴브레스트 등의 거점을 마련하였다.[7]

5. 한국의 관점

1340년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슬로이스 해전은 백년전쟁 초기 주요 해전 중 하나이다. 이 해전은 잉글랜드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 도시 연맹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고 북프랑스를 침공하려 했으나, 프랑스필리프 6세의 회피 전략과 저지대 제후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1340년 자금 부족으로 전략을 변경, 플랑드르 도시 연맹과 동맹을 맺고, 왕비 필리파 오브 에노를 브뤼헤에 남겨두고 병력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2]

프랑스는 노르망디제노바 공화국 용병 함대를 동원하여 잉글랜드 해안과 선박을 공격하며 잉글랜드 침공설을 퍼뜨렸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오항(Cinque Ports) 등에서 배와 병력을 모아 플랑드르로 향했다.[3]

이러한 상황에서 슬로이스 해전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벌어졌으며,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5. 1. 인물


  • '''에드워드 3세''': 잉글랜드의 왕으로,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를 지휘했다.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 함대의 규모가 190척이라고 언급했다.[4]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회복 후 프랑스 함대와 대결했다.[2]
  • '''위그 키에레''': 프랑스 해군제독으로,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지휘했다. 보케르의 관리인 세네샬(대관)을 역임한 경력이 있다.[5][6]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4]
  • '''니콜라 베위셰''': 프랑스 해군의 지휘관으로, 본직은 재정 전문 법률가였다.[4] 해전 전문가인 바르바베라의 해상 전투 제안을 거부하고, 항구에 닻을 내린 채 배를 쇠사슬로 연결하여 요새를 만들어 맞서는 전략을 택했다.[2]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4]
  • '''바르바베라''': 제노바 출신의 용병 함장으로, 갤리선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니콜라 베위셰에게 해상 전투를 제안했으나 거부당하자, 자신의 부하 20척 남짓의 갤리선을 이끌고 잉글랜드 함대 일부와 교전하여 에드워드 3세를 부상시키고 잉글랜드 배 1~2척을 나포한 후 전장에서 이탈했다.[2]

5. 2. 사건

1337년 잉글랜드에드워드 3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고, 에노 백작 등 저지대(네덜란드) 제후들의 군대를 고용하여 북프랑스를 침공했다. 그러나 프랑스필리프 6세는 전투를 피했고, 저지대 제후들도 소극적이어서 큰 성과는 없었다. 1340년 에드워드 3세는 자금 부족으로 전략을 변경,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플랑드르 도시 연맹과 동맹을 맺었다. 그는 왕비 필리파 오브 에노를 브뤼헤에 남겨두고 병력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는데, 이는 벨기에 브뤼헤에 병력을 주둔시킨 것과 같았다.[2]

한편, 프랑스는 노르망디제노바 공화국 용병 함대를 동원, 잉글랜드 해안과 선박을 공격하며 침공설을 퍼뜨렸다. 에드워드 3세는 장관 교체, 의회 소집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고, 오항(Cinque Ports) 등에서 배와 병력을 모아 플랑드르로 향했다.

오항은 헤이스팅스, 뉴로므니, 하이스, 도버, 샌드위치 등 잉글랜드 남동부 항구 도시들이며, 윈첼시, 라이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해상 임무를 대가로 특권을 받았다.[3]

5. 3. 국제 관계

1337년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에 선전포고한 후, 잉글랜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동맹을 맺고 저지대 국가들의 제후들을 고용하여 북프랑스를 침공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필리프 6세는 전투를 회피했고, 저지대 제후들의 전의도 약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 1340년 자금이 부족해지자 전략을 바꾸어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가 이끄는 플랑드르 도시 연맹과 동맹을 맺었다. 에드워드 3세는 왕비 필리파 오브 에노를 브뤼헤에 남겨두고, 새로운 병력과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는 에드워드가 현재 벨기에에 있는 브뤼헤에 병력을 주둔시킨 것과 같았다.[2]

한편, 프랑스는 노르망디제노바 공화국 용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함대를 집결시켜 잉글랜드 해안과 선박을 공격했고, 잉글랜드 침공 소문도 돌았다. 에드워드 3세는 장관을 교체하고 의회를 열어 자금을 확보한 후, 오항(Cinque Ports) 등에서 가능한 모든 배와 병력을 모아 플랑드르로 향했다.[3]

오항은 잉글랜드 남동부 항구 도시인 헤이스팅스, 뉴로므니, 하이스, 도버, 샌드위치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나중에 윈첼시와 라이도 추가되었다. 이들은 해방에 해당하는 임무를 맡는 대가로 여러 특권을 받았다.[3]

참조

[1] 서적 西洋騎士道事典 原書房
[2] 서적 図説 中世ヨーロッパ 武器・防具・戦術百科 原書房
[3] 서적 ランダムハウス大英和辞典第二版 小学館
[4] 문서 ジャン・ファヴィエ
[5] 서적 ロワイヤル仏和辞典
[6] 서적 西洋騎士道事典 原書房
[7] 웹사이트 Discovery Of The Canary Islands And The African Coast http://history-world[...] 201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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