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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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6세는 1328년부터 1350년까지 프랑스 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필리프 3세의 손자였으며,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치세 동안 플랑드르 백작을 지원하여 반란을 진압하고,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왕위 계승 주장을 막았지만, 슬로이스 해전과 크레시 전투에서 패배하며 백년 전쟁의 혼란을 겪었다. 또한 흑사병의 유행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통치했으며, 1350년 사망 후 아들 장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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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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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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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프랑스 국왕 |
통치 기간 | 1328년 2월 1일 – 1350년 8월 22일 |
대관식 | 1328년 5월 29일 |
대관식 장소 | 프랑스 |
이전 통치자 | 샤를 4세 |
다음 통치자 | 장 2세 |
섭정 | 조안 왕비 (1340년, 1345–1346년, 1347년) |
출생일 | 1293년 |
출생지 | 퐁텐블로, 파리, 프랑스 |
사망일 | 1350년 8월 22일 (56세 또는 57세) |
사망지 | 노장르루아, 외르에루아르, 쿨롱브 수도원, 프랑스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생드니, 파리 |
배우자 | 부르고뉴의 조안 (1313년 7월 결혼, 1349년 12월 12일 사망) 나바라의 블랑슈 (1350년 1월 11일 결혼) |
자녀 | 장 2세 필리프, 오를레앙 공작 조안 드 프랑스 |
서자 | 장 다르마냐크 토마 드 라 마르슈, 프랑스의 사생아 |
가문 | 발루아 |
아버지 | 샤를, 발루아 백작 |
어머니 | 마르그레트, 앙주 백작부인 |
이름 | |
프랑스어 | Philippe |
별칭 | le Fortuné (운이 좋은 자) le Catholique (가톨릭 신자) |
프랑스 국왕 (재위) | |
프랑스어 | Roi de France |
2. 생애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필리프 4세의 직계 혈통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필리프 3세의 손자였던 필리프가 귀족과 성직자 회의를 통해 살리카 법에 근거하여 왕으로 선출되었다.[51][52] 그의 즉위는 큰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으나, 여계 계승이 인정되던 나바라 왕국의 왕위는 루이 10세의 딸 잔느에게 돌아갔다.
즉위 초인 1328년, 필리프 6세는 3년간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던 플랑드르 백작을 지원하여 8월 23일 카셀에서 반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다음 해에는 프랑스 왕위 계승 후보자 중 한 명이었던 에드워드 3세로부터 기옌 영지에 대한 신하로서의 복종 서약을 받았다. 그러나 1333년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던 데이비드 2세의 망명을 필리프 6세가 받아들이면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고, 결국 에드워드 3세가 다시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1337년 백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과정에서 필리프 6세의 함대는 1340년 6월 23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에게 패배했고, 1346년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서는 프랑스 육군이 참패를 당했다. 이듬해 칼레마저 잉글랜드에 점령당하면서 프랑스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필리프 6세는 소금 전매 특권을 제정하며 재정난에 대처하려 했으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여 프랑스 내부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1349년 필리프 6세는 그르노블 근처의 도피네 영지를 구입하여 왕령을 확장했다. 이 영지는 손자인 샤를(훗날 샤를 5세)에게 상속되었고, 이후 도팽은 프랑스 왕세자의 칭호가 되었다. 필리프 6세는 흑사병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1350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장 2세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
필리프의 어린 시절과 청년기는 그가 왕족으로서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필리프의 아버지인 발루아 백작 샤를 드 발루아는 프랑스의 필리프 4세의 동생으로,[2] 일생 동안 왕위를 차지하려고 노력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샤를은 1325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장남인 필리프가 앙주, 멘, 발루아 백작령을 상속받았다.[3][30]2. 2. 왕위 계승

1328년, 필리프 6세의 사촌 형인 샤를 4세가 아들을 남기지 않고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의 직계 혈통이 끊어졌다.[3] 당시 샤를 4세의 왕비 잔느 드 에브뢰는 임신 중이었다.[3] 이 상황에서 필리프는 프랑스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자 중 한 명이었다. 또 다른 주요 후보자는 샤를 4세의 누이인 프랑스의 이자벨의 아들이자, 샤를 4세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족이었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였다.[4]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이미 1316년 루이 10세 사망 당시[51] 살리카 법을 근거로 여성을 통한 왕위 계승을 배제한 전례가 있었다.[52][4] 이 원칙에 따라 프랑스 귀족, 고위 성직자, 파리 대학교는 어머니를 통해 상속권을 얻은 남성(에드워드 3세)은 살리카 법에 따라 왕위 계승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결정했다.[5] 필리프는 필리프 3세의 손자로서 남계 혈통을 이었기 때문에, 필리프 4세의 외손자인 에드워드 3세 대신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다.[5]
샤를 4세의 왕비가 출산할 때까지 필리프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섭정으로 임명되었다(1328년 2월 9일 ~ 4월 1일).[4] 1328년 4월 1일, 잔느 드 에브뢰가 딸 블랑슈를 낳자[6], 필리프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왕으로 선포되었고, 1328년 5월 29일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다.[7] 그의 즉위는 큰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32]

한편, 샤를 4세는 나바라의 왕이기도 했으나, 나바라 왕국은 살리카 법을 따르지 않아 여계 계승이 가능했다. 필리프 6세는 나바라 왕가의 혈통을 잇지 않았으므로 나바라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 나바라 왕위는 루이 10세의 딸이자 잔느 1세의 정당한 상속녀인 잔느 2세에게 돌아갔다. 필리프는 잔느 2세와 협상을 통해 샹파뉴 백작령을 프랑스 왕실 영지로 유지하는 대신, 잔느에게 노르망디의 광대한 영토를 보상으로 제공했다.
즉위 후 필리프 6세는 피에르 로제(당시 페캉 수도원장)를 에드워드 3세에게 보내 아키텐 공국과 가스코뉴에 대한 신하로서의 충성 맹세(오마주)를 요구했다.[8] 에드워드 3세는 두 번째 소환 끝에 1329년 6월 6일 아미앵 대성당에서 맹세를 했으나, 그 방식과 표현은 이후 양국 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8][34][35][36]
2. 3. 치세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필리프 4세의 직계 혈통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필리프 3세의 손자였던 필리프가 귀족과 성직자 회의를 통해 왕으로 선출되었다.[30][31] 이미 루이 10세 사망 당시[51] 프랑크족의 옛 법인 살리카 법을 근거로 여성의 왕위 계승을 배제한 선례가 있었기에[52] 그의 즉위는 큰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32] 그러나 나바라 왕국에서는 여성의 계승이 인정되었고 필리프 본인이 나바라 왕가의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이 10세의 딸 잔느가 나바라의 여왕으로 즉위하였다. 또한 능력 있는 왕비 부르고뉴의 잔은 필리프 6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여러 차례 섭정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필리프 6세의 통치는 여러 위기로 점철되었지만, 초기에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즉위 직후인 1328년, 플랑드르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고 플랑드르 백작루이 1세를 복위시키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9][33] 초기에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와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1329년 그에게 기옌 영지에 대한 오마주를 받기도 했다.[34][35][36]
그러나 아키텐 공국의 지위 문제,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2세와 로베르 3세 달르투아의 망명 문제 등으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10][37][38][12][39][40] 결국 1337년 필리프 6세가 에드워드 3세의 아키텐 영지를 몰수하자,[13][39][41]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백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 과정에서 프랑스군은 1340년 슬로이스 해전에서의 해전 패배,[42][43][44]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의 육전 참패를 겪었으며,[45][46][47] 이듬해에는 칼레를 잉글랜드에 빼앗기는 등[45][46] 어려움을 겪었다.
잇따른 전쟁 패배와 더불어 흑사병의 창궐은 경제 혼란과 사회 불안을 심화시켰다. 필리프 6세는 소금 전매 특권 제정 등으로[48]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으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말년인 1349년에는 그르노블 근교의 도피네 영지를 구입하여 왕령을 확장했는데,[49] 이는 훗날 프랑스 왕세자의 칭호인 도팽의 유래가 되었다.
필리프 6세는 흑사병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1350년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장 2세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왕위를 계승했다.[48]
2. 3. 1. 플랑드르 원정
필리프 6세는 즉위 직후인 1328년, 플랑드르 지역의 문제에 개입하게 된다. 당시 플랑드르 백작 루이 1세는 3년 전부터 이어진 직물공 시민들과 농민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33] 이 봉기는 플랑드르 농민 봉기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루이 1세는 백작령에서 쫓겨난 상태였다.[9]루이 1세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필리프 6세는 군대를 이끌고 플랑드르로 향했다. 1328년 8월 23일, 카셀 전투에서 필리프 6세의 프랑스군은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9][33] 이 승리 덕분에 루이 1세는 다시 플랑드르 백작의 자리에 복귀할 수 있었다.[9] 카셀 전투에서의 승리는 필리프 6세 통치 초기의 중요한 군사적 성공으로 기록된다.[9]
2. 3. 2. 백년 전쟁
1328년 플랑드르 백작루이 1세를 지원하여 8월 23일 카셀에서 3년간 이어지던 직물공 시민과 농민의 반란군에게 승리하였다.[33][9] 다음 해인 1329년, 프랑스 왕위 계승 후보자 중 한 명이었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아미앵에서 필리프 6세의 왕위를 인정하고 기옌 소유에 대해 신하로서의 복종을 맹세(오마주)하였다.[34][35][36] 초기 두 왕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어서 1332년 함께 십자군 원정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그러나 아키텐 공국의 지위 문제는 여전히 갈등의 불씨였고, 양국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1333년 에드워드 3세와 대립하던 스코틀랜드의 왕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자 필리프 6세는 그를 환영하고 그의 이익을 옹호하며 에드워드 3세를 분노하게 했다.[10][37][38] 반대로 에드워드 3세는 아르투아 백작령 계승 문제로 필리프 6세와 대립하다 추방된 로베르 3세 달르투아의 망명을 받아들였다.[12][39][40] 필리프 6세는 1336년 12월 26일 로베르 3세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요구했으나, 에드워드 3세는 이를 거절했다.[12]
1337년 5월 24일,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신하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왕의 사적인 원수'인 로베르 3세를 보호했다는 이유로 아키텐 공작령과 퐁티외 백작령의 몰수를 선언했다.[13][39][41] 이는 백년 전쟁의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1340년 프랑스 왕위를 공식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41]

필리프 6세는 프랑스가 잉글랜드보다 부유하고 인구가 많았기에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초기, 프랑스 사략선들은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공격하며 해상에서 우위를 점했다.[14] 필리프 6세는 해상력을 바탕으로 잉글랜드 침공을 계획하고 1339년 슬루이스에 함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나 1340년 6월 23일,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가 프랑스 함대를 기습하여 괴멸시키면서 프랑스는 제해권을 상실하고 침공 계획은 무산되었다.[15][42][43][44]
육지에서는 에드워드 3세가 플랑드르와 저지대 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1339년 피카르디를 침공(셰보셰)했으나, 필리프 6세가 전투를 피하는 지구전 전략을 사용하면서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해야 했다. 에드워드 3세는 재정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340년 7월, 에드워드 3세는 다시 돌아와 투르네 공성전을 시작했지만,[16] 재정난으로 인해 결국 1340년 9월 23일, 9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맺었다.[17]
1341년 시작된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잉글랜드가 브르타뉴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필리프 6세는 여전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1343년 교황의 중재 협상에서 그는 에드워드 3세가 완전한 주권을 가진 아키텐 공국을 인정하는 대가로 전쟁을 끝내자는 제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1345년 잉글랜드는 다시 공세를 시작하여 더비 백작이 아제네와 앙굴렘을 점령했다. 프랑스는 1346년 봄, 노르망디 공작 장(훗날의 장 2세)의 지휘 아래 대규모 반격을 개시하여 에귀용에서 더비 백작을 포위했다. 그러나 추방된 프랑스 귀족 고드프루아 다르쿠르의 조언을 받은 에드워드 3세는 아키텐 대신 방비가 허술한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를 약탈하고 캉을 점령한 뒤 파리 근교 푸아시까지 진격했다가 필리프 6세의 군대가 집결하자 솜 강을 건너 후퇴하여 크레시에 진을 쳤다.[18]

필리프 6세는 다음 날 전투를 계획했으나, 무질서하게 영국군을 추격하던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고 1346년 8월 26일 저녁 무렵 성급하게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어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잉글랜드 장궁병의 위력 앞에 참패했고, 역사가 장 프로이사르는 이를 "대단하고도 두려운" 패배라고 기록했다.[45][46][47] 필리프 6세 자신도 부상을 입고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했다.
크레시 전투 이후 전세는 완전히 잉글랜드에게 기울었다. 에귀용을 포위하고 있던 노르망디 공작 장은 북쪽으로 후퇴했고, 브르타뉴에서는 블루아의 샤를이 잉글랜드군에게 사로잡혔다. 영국군은 크레시에서 칼레로 이동하여 공성전을 시작했다. 칼레는 완강히 저항했지만, 영국군은 영국 해협을 통해 쉽게 보급을 받으며 공성전을 지속했다. 1347년 7월 필리프 6세가 구원군을 이끌고 왔지만, 이전의 투르네 공성전 때와는 달리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 약탈과 세금 개혁으로 확보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필리프 6세는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8월에 철수했고, 직후 칼레는 잉글랜드에 항복했다.[45][46]
칼레 함락 이후 프랑스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필리프 6세는 소금 전매 특권을 제정하여 재정난에 대처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유럽 전역을 휩쓸면서 프랑스 내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필리프 6세는 1350년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 장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48]
한편, 1349년 필리프 6세는 그르노블 근교의 도피네 영지를 구입하여 왕세자에게 물려줄 계획이었으나, 구입 절차가 완료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이 영지는 손자인 샤를(훗날의 샤를 5세)에게 상속되었고, 이후 도팽은 프랑스 왕세자의 칭호가 되었다.[49]
2. 3. 3. 내정
크레시 전투에서 패배하고 칼레를 점령당한 후 프랑스 경제는 혼란에 빠졌다.[45][46] 필리프 6세는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금 전매 특권을 제정했지만,[48] 혼란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1348년에는 흑사병이 프랑스를 강타하여 이후 몇 년 동안 왕비 잔을 포함한 프랑스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했다.[19] 이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인플레이션을 급등시켰고, 국왕은 가격 통제를 시도했으나 이는 국가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19]프랑스 삼부회는 크레시 전투 패배 이후 필리프 6세가 영국을 침공하여 반격하려는 계획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19] 또한, 필리프 6세가 아들 장의 약혼녀였던 나바라의 블랑슈와 재혼한 것은 아들 장과 많은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19]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필리프 6세의 마지막 주요 업적은 1349년 그르노블 근처의 도피네와 랑그도크의 몽펠리에 지역을 프랑스 왕령으로 편입한 것이었다.[19][49] 도피네는 원래 아들 장에게 주려 했으나, 매입이 성사되기 전에 필리프 6세가 사망하여 손자인 샤를(훗날 샤를 5세)에게 상속되었다. 이후 도팽이라는 칭호는 프랑스 왕태자의 공식 칭호가 되었다.[49]
필리프 6세가 1350년에 사망할 당시 프랑스는 흑사병의 후유증과 계속되는 전쟁,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이 만연한 분열된 상태였다.[19][48]
2. 4. 죽음
크레시 전투에서 패배하고 칼레를 잃은 후, 프랑스 삼부회는 필리프 6세에게 자금 지원을 거부하여 그가 영국을 침공하려던 계획은 중단되었다. 1348년에는 흑사병이 프랑스를 강타하여 이후 몇 년간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왕비 부르고뉴의 잔도 포함되었다. 이로 인한 노동력 부족은 인플레이션을 급등시켰고, 국왕은 가격 통제를 시도했으나 이는 국가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아들 장 2세의 약혼녀였던 나바라의 블랑슈와 재혼하면서 아들과 많은 귀족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19]필리프 6세의 마지막 주요 업적은 1349년 도피네와 랑그도크의 몽펠리에 지역을 획득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망 당시 프랑스는 사회적 불안으로 가득 찬 분열된 국가였다. 필리프 6세는 1350년 8월 22일 에르-에-루아르주의 쿨롱브 수도원에서 사망했으며[20], 생드니 대성당에 첫 번째 부인인 부르고뉴의 잔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의 내장은 파리에 있던, 현재는 철거된 자코뱅 수도원( Couvent des Jacobins de la rue Saint-Jacques|쿠방 데 자코뱅 드 라 뤼 생자크fra )에 따로 묻혔다. 왕위는 첫째 아들인 장 2세가 계승하였다.
3. 가족 관계
필리프 6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21]와 프랑스의 아녜스(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막내딸)의 딸인 잔느(잔느 롬)[21]로, 필리프 6세의 사촌뻘이었다. 1313년 7월에 결혼했으며, 잔느는 1349년에 사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다음 자녀들이 있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장 2세 | 1319년 4월 26일 | 1364년 4월 8일 | 프랑스 국왕[22] |
마리 드 프랑스 | 1326년 | 1333년 9월 22일 | 브라반트 공작 장 3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장 드 브라반트와 결혼. 자녀 없음.[23] |
루이 | 1329년 1월 17일 | 1329년 1월 17일 | 당일 사망 |
루이 | 1330년 6월 8일 | 1330년 6월 23일 | 유아기 사망 |
아들 (장?) | 1333년 10월 2일 | 1333년 10월 2일 | 당일 사망 |
아들 | 1335년 5월 28일 | 1335년 5월 28일 | 사산 |
필리프 | 1336년 7월 1일 | 1375년 9월 1일 | 오를레앙 공작 |
잔느 | 1337년 11월 | 1337년 11월 | 당일 사망 |
아들 | 1343년 여름 | 1343년 여름 | 당일 사망 |
1349년 잔느가 사망한 후, 필리프 6세는 1350년 1월 11일(또는 1월 19일[50])에 블랑슈 드 나바르[24](나바라 여왕 잔 2세와 필리프 3세의 딸)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명의 딸이 있었다.
필리프 6세에게는 알려진 사생아도 있었다.
4. 평가
필리프 6세는 '행운왕'(幸運王)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목숨을 건진 점이나, 흑사병 유행 시기에 프랑스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는 점, 그리고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가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 중 하나였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별명은 그의 치세 동안 프랑스가 겪었던 심각한 위기들을 고려할 때 역설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중앙 집권화를 통해 국가의 기틀을 다지려 노력했지만, 백년 전쟁의 시작과 함께 1340년 슬로이스 해전과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했으며, 1347년에는 중요한 항구 도시 칼레를 잉글랜드에 빼앗겼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는 국가적 위신을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소금 전매특권 제정 등으로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으나 경제 혼란은 계속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흑사병이 창궐하여 프랑스 사회는 극심한 불안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는 외부의 침략과 내부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사회적 불안정은 심화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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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Charles IV died on 1 February 1328. Philip's ascension was not confirmed until the birth of Charles IV's posthumous daughter on 1 April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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